빽넘버 - 제2회 대한민국 전자출판대상 대상 수상작
임선경 지음 / 들녘 / 201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의 남아 있는 생애가 숫자로 보인다는 설정은 <데스노트>에서 라이토가 자신의 남은 생애 절반을 주며 바꿀지를 고민했던 능력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설정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펼쳐보인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있으면 좋을 것 같은 특별한 능력이 실상은 자신의 삶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삶과 죽음에 대한 사건을 통해 작가는 보여준다.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작업의 동기가 모친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징후도 몰랐던 스스로가 괴로워 무언가를 알고 있는 인물을 창조했지만, 막상 글을 쓰면서 그 앎이라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는 깨달음이 진솔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무언가를 꿈꾸지말고 불가항력을 즐겨야 겠다. 내일을 모르고 살아야 오늘을 더 진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덧 

1. 제목의 '빽넘버'는 본문에서는 '백넘버'로 표기되어 있다. 제목에서만 된소리로 강조한 의도를 모르겠다.

2. 차례에 보면 각 10개의 장마다 1. 9, 2. 21, 3. 27, 4. 43, 5. 59... 등의 숫자가 있다. 처음에는 이 숫자들이 백넘버와 관련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본문의 내용과 숫자를 유심히 살폈는데... 그냥 쪽수였다. 

3. 본문의 1/3을 주인공인 원영이 어떻게 그 능력을 갖게 되는지 설명에 할애하는데, 뒷부분의 전개 분량에 비해 앞의 내용이 너무 많아 아쉬웠다.

주택가의 원룸촌은 길 찾기가 어렵다.

사실 ‘대체로’는 퍽 무책임한 단어다. 무엇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몇몇이 제기할지도 모르는 반론을 슬쩍 비켜가기 위해서 ‘대체로’라는 표현을 쓴다. ‘내가 언제 다 그렇다고 했어?’라는 뜻이지만 속으로는 ‘글쎄, 다 그렇다니까. 아니라면 네가 별종인 거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 10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인생에서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생명은 유한하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죽어간다. 모두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잘도 모르는 체하면서 살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때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죽는 때이다. 그런데 나는 바로 그때를 알고 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확실하다. - 22

사실은 ‘어째서?’가 가장 어이없는 물음이다. 어째서라니. 세상에 뚜렷한 이유가 있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 사람들은 대부분의 인간사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일이라고 믿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알게 될 것이다. - 25

살면서 겪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들에는 대부분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하고 돌이켜보았지만 이유는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있다. - 25

나는 내가 갑자기 모두의 걱정거리가 된 것이 싫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더할 나위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된 것이 싫었다. 혈연 간의 사랑과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착취가 싫었다. 그 관계에서 감정이 소모될 것이 싫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돈과 서비스의 맞교환이라는 산뜻한 대안이 있다. - 72, 73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안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른 사람과 내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은 저주에 가까운 일이다. - 84

망설이는 건 망설일 만하니까 망설이는 것이다. 다음부터는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은 안 하는 쪽으로 결정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 112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다. 소식하고 단식하는 일은 내가 살고 있는 오늘, 내 몸이 더 가볍고 경쾌하기를 바라서이지 하루 더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 127

확률은 확률에 불과하다. 개인에게는 확률이란 이진법의 세계다. 내가 해당하느냐 아니냐, O냐 X냐 둘 중 하나뿐이다. 번개에 맞을 확률이 0.0001퍼센트여도 내가 번개에 맞았다면 그것은 의미없는 숫자가. 확률은 집단을 대상으로 했을 때만 유용하다. 개별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확률은 아무 의미도 없다. 안전벨트를 안 맸어도 음주운전을 했어도 졸음운전을 했어도 12차선 도로 위에 드러누워 있었어도 살면 사는 것이고 죽으면 죽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안전벨트를 맨다. 확률에 기댄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어서다. 확률에 기대지 않는다면 남는 건 부적뿐이니까. - 152

미래가 가진 권력이란 대단해서 지금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복무하도록 만든다. 이다음을 위해 지금 가지고 있는 시간, 돈 에너지를 몽땅 바치도록 만든다. 지금 가질 수 있는 행복까지 유보하도록 만든다. - 188, 189

모든 것은 시스템이 결정한다. 시스템은 시스템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 시스템은 유지가 유일한 목적이다. - 220

나는 교훈을 얻었다. 삶에 유일한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무지다. 그날을 알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 그리하여 선택할 수도 없는 것. 나의 백넘버를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또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을 알면서도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용기 따윈 없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몇 번이고 누군가를 죽일 것이다. 죽을 때까지 나는 무엇이 나를 그 길로 이끄는지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불안해하며 살 것이다.
내 백넘버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나의 구원이다. 나는 모르고 살 것이다. 그래서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죽을 것이다. 불가항력이 주는 자유를 맘껏 누릴 것이다. -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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