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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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정세랑 작가가 궁금해 이 책을 읽었다. 장편에 비해 단편은, 작가가 각 단편에 흩어버린 생각들을 하나하나 주우며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의 처음에 있던 <웨딩드레스 44>나 책의 말미에 있는 <이혼 세일> 등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작가의 관점을 보여준다. 웨딩드레스가 다양한 사람들의 손을 거쳐가면서 그들의 사연을 소개하거나, 이혼을 결심한 후 친구들을 불러 집안의 가재도구들을 싼 값에 판매하는 이야기를 통해 결혼이라는 형식 뒤에 숨어 있는 여성들의 사연과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를 은근한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한편, 누군가의 습격을 당해 사망한 여성이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의 <영원히 77 사이즈>, 잘린 귓바퀴 끝이 계속 과자로 재생된다는 설정의<해피 쿠키 이어>, 선배들의 비급서를 얻어 소환한 남편이 사람들의 절망적 감정을 빨이들이며 산다는, 이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옥상에서 만나요>에서는 비현실적인 판타지와 같은 요소를 끌어낸다. 아마도 <지구에서 한아뿐>과 이러한 소설들이 같은 집합에 속하지 않았나 싶다. 


기대한 것처럼 다양하고, 기발한 상상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 저변에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 외국인, 비주류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엿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는 현상이 아닌 그 현상이 발생한 이유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작품인 <이마와 모래>에서의 대식국 사람들과 소식국 사람들 사이의 오해가 빗어내는 이야기들은, 이 모든 현실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계속적으로 소통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 드레스는 2013년 7월, 캐나다데이 세일 기간에 밴쿠버의 작은 창고에서 픽업되어 한국으로 수입되었다.

여자는 고전문학 전공자였는데, 고전문학 속 영웅들이 대다수 고아인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고아들만이 진정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 15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 18

친척도 친구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래서 이민을 가는 걸까? 눈을 뜨면 모르는 사람들로만 가득한 도시였으면 했다. - 25

여자의 친척이 성당에서 하는 예비부부 수업을 추천했고, 곧이어 남자의 친척이 절에서 하는 수업을 추천했다. 종교가 없는 여자는 당황스러웠다.
"네? 결혼을 절대 안하실 분들이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러 가라고요?" - 26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 30

물이 새는 다리미가 인생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눈물 방지 테스트를 통과한 인생입니다, 그런 스티커가 붙어 있어도 끝내는 울게 된다. - 35

어딜 가도 보이는 부분만 달콤할 거라고 생각해. (...) 아, 휴지기를 모르는구나. 반죽을 잘 식히지 않으면 구멍이 나.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구멍을 몇 개나 냈는지 몰라. 단계마다 15분씩 냉장고에서 식히지 않으면 축축 늘어져서 백퍼센트 구멍이 나버려.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 64

"솔직히 역사는 그 순간을 살았던 그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전근대사는 무기로 쓰면 안되고, 근현대사에 있어선 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겠지. 민족주의자 말고 각자 나라에서 좋은 시민들이 되면 지금과는 다를 거야." - 83

하지만 따지고 보면 백 퍼센트 도피 아닌 결혼이 어딨겠어? 여자들에겐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 있는걸. - 105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모든 사랑 이야기는 사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 116

"되게 바보 같은데, 사랑받는 기분이다? 클라이언트들한테 좋은 반응을 얻거나 무서운 윗사람한테 칭찬을 들으면, 프로답지 않게 갑자기 눈물이 글썽 고여. 나는 사랑도 꽤 받고 컸는데 왜 하필 그런 순간들에서 충족감을 느낄까? 미쳤나봐. 고장났나봐." - 128, 129

"회사는 악독하지만, 어떨 때는 갑옷이기도 하잖아. 조직 밖의 사람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혼자 세상이랑 싸운다고." - 130

그런 사람이라 좋아했으니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로 마음먹는다. 상당한 의지력이 필요하다. - 203

"그냥,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게 아닐까. 그래서 한동안 동산만 가지고 살아보고 싶어서." -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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