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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혁명 - 세상을 바꾸는 21세기 생존 프로젝트
강양구.강이현 지음 / 살림터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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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혁명이라고 하니 문득 밥상이 그리워진다. 옛날에는 밥상에 빙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게 언제 이야기인지 까마득하게 생각된다. 우리집은 대가족이어서 저녁 때가 되면 큰상을 두명이서 양쪽 끝을 잡고 안방으로 옮겨 빙 둘러앉아 먹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설거지 거리도 엄청났을 것이다. 지금 셋이 먹는 설거지거리도 귀찮아 마누라하고 가위바위보를 하니 주사위를 굴리니 어쩌고 하는데 당시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누나들도 공부한답시고 도와주지 않은 설거지를 엄마 혼자 다 할려면 참 많기도 많았을 것이다. ) 당근 아버지가 먼저 한 술 뜨셔야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때는 뭐 유전자 변이 식품도 없었고, 유기농업이니 공정무역이니 그게 뭐 밥달라고 개가 짓는 소린지 등가렵다고 소가 우는 소린지 그런 단어도 아마 없었던 시절이라 속시끄러운 콩가루 집안에서는 혹간 밥상이 전복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지만 밥상이 혁명하는 사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무슨 소린지.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이만 각설하고, 항상 그렇듯이 듣거나 읽어 아는 것 하고 실천궁행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자식 두엇 키우면서 사교육비에 등골이 휘고 부모 봉양이다 주택 마련이다 노후 준비다 이래저래 분주하기는 되게 분주한 게 쥐꼬리 선낯곱쟁이 월급받으며 광역시의 변두리에서 그럭저럭 근근히 먹고싸는 소시민으로 말하자면, 이 물건(먹을거리)이 몇만 마일을 날아왔든 몇십만백만 마일을 뛰어왔든 값싸면 최고다. 거기다가 맛도 좋으면 금상첨화 왠떡이냐다. 웰빙은 다음이고 세계화와 농업정책에 대한 관심은 더더더 다음이다. 하물며 온실가스 배출과 관련한 환경문제는 말해 무엇하리오다. 광우병 파동으로 반짝이며 흔들리고 넘실대던 촛불의 물결이 서울광장을 꽉꽉 채워 광장이 미어터질 듯 하던게 언제였던가. 미국산 쇠고기 지금 잘팔리고 또 잘들 자시고 계신다. 한우는 귀족들이나 먹는 음식이다. 상것들 먹는게 양반들과 같을 수가 없다. 그저 배 부르면 그만이다. 공짜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다.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피부에 직접 접촉되면 모두가 민감하게 반응할 것인데(뾰족한 바늘로 몰래 옆에 있는 사람을 살짝만 찔러 봐라 아마 깜짝 놀래 자빠질 것이다) 그때는 이미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생 생각이 먹거리 문제, 환경문제 등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고, 비록 소생이 근근히 먹고싸는 소시민이지만 우선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로컬푸드나 유기농산품에 조금 관심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세계화니 환경문제니 농민을 죽이는 농업정책이니 하는 조금 심각스러운 것들은 일단 차치하고 말이다.  

 

이건 사족지나 오족쯤 되는 이야긴데(말하자면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로컬푸드 영수증에 온실가스 줄인 양이 표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지난주 목요일에 서울 출장을 다녀왔는데 저녁에 동대구역에 도착해서 보니 나가는 출구 벽면에 크게 쓰여져 있었다. “당신은 오늘 소나무 여덟 그루를 심으셨습니다”. 승용차로 서울 가는 것 보다 열차타고 가는 것이 당근 편하고 돈도 적게 들고 또 시간도 빨라서 열차를 이용했을 뿐이고 열차안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을 잤을 뿐인데, 소생이 혹시 꿈에라도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면 모를까 동대구역에 내려서 저런 문구를 떡 보니 뭔가 소홀찮게 켕기는 기분이다. 주말에 어디 산에라도 가든지 해서 아니면 아파트 단지내 화단에라도 작은 묘목 하나쯤 심어야 할 것만 같다. 잘 한 일도 없는데 과분한 칭찬을 받으면 이거 이넘이 나를 놀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법이다. 온실가스 줄인 양’이나 ‘소나무 여덟 그루’는 허수고 뭔가 속임수라는 생각이 든다. 소생이 너무 민감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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