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이야기
윤흥길의 소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있습니다.
실직을 하여 처자식을 먹여살리기도 버거운 한 사내가 날마다 반짝반짝 구두에 광을 내고 그 중 한 켤레를 신고 막노동 판으로 일하러 다닙니다.
구두는 이 사내의 자존심으로 대변됩니다.
좀 문제가 다르기는 하지마는 저는 가방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백화점에라도 갈라치면 가방 코너에는 꼭 들러봅니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것도 구경을 합니다.
가방을 좋아하는 터라 시장바구니도 여러 개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환경실천을 하느라 저는 어디에 가더라도 장바구니를 갖고 다닙니다.
접으면 눈썹연필 두어 개의 크기밖에 되지 않는 장바구니를 언제나 가방에 넣고 다닙니다. 물건을 사면 들고 오기 쉽게 검정 비닐봉투에 넣어줍니다.
그렇게 생각 없이 받아오다 보면 얼마 안가서 비닐 모아두는 서랍이 넘쳐납니다.
땅에 묻히면 썩지도 않는 그 비닐은 그야말로 처치곤란입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해서 비닐 봉투에 넣어오지 않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훨씬 작은 한 친구가 남편과의 이런저런 일로 많이 힘들어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일본 여성인데, 제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입니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방학을 했는데 성적이 신통찮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뜬금없이 아내에게 ‘금족령’을 내렸다는 겁니다.
집에서 하는 게 뭐냐, 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친구는 하는 일이 있어요, 일본어 개인 교습을 하고 있거든요.
나름대로 많이 바빠요. 그런 가운데 잠시 잠깐씩 틈을 내어 사진을 찍은 친구에요.
남편의 ‘지엄한 금족령’ 때문에 나들이에 동행하지 못했어요.
그날 사진 찍는 내내 좀 불편한 마음이었어요.
불편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기어이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정작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잘 지내. 힘 내. 남자들은 다 그래(남자들을 도매금으로 넘겼어요).
우리 집 영감도 똑같아.” 애꿎은 우리 남편 흉도 두어 개 보고 전화를 끊었어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어요.
‘세상은 거대한 슈퍼마켓이다.
우리가 장을 보러 가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골라서 값을 치르고 장바구니에 넣어 집으로 가지고 온다.
시식 코너에서 여러 가지 시식거리로 우리들을 유혹하지만 그런다고 다 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없는 것이 없다.
사랑, 희망, 기쁨, 설레임, 소망, 환희, 정열,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좌절, 절망, 우울, 슬픔, 미련, 망설임.... 수많은 감정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을 사듯이 세상의 모든 감정들 중에서도 우리가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면 된다. 필요한 것만 내 마음의 장바구니에 담고 나머지는 그냥 던져버려라.‘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답니다.
그런데 제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놈의 ‘나이’라는 것이지요.
어느 모임에든 연장자가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결심을 했드랬지요,
‘나는 나이 먹으면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여기서 어쩌구저쩌구 하게 되는군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이미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하는 나이에 와 있는 걸요.
저의 장바구니. 걸어놓지 않은 것도 여러개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