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1862-1946)은 베를린에서 멀지 않은 슐레지엔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예나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 다윈과 헤켈의 진화론, 그리고 당대를 풍미하던 사회개혁론을 접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창작활동기는 1889년부터 1차대전사이인데, "특히 드라마 영역에서 풍부하고 다재다능했던 그의 탁월한 업적에 대해 1912년 노벨 문학상이 수여됨으로써, 현대드라마에서 그의 명성은 세계적인것이 되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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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버나스 쇼 (1856-1950)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깊었던 쇼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을 극으로 썼을 뿐 아니라 증명하고자 했다. 그는 신랄하면서 재기 넘치는 재치로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위장하면서 당시 사회조직의 비정함, 낭비,
무능력 같은 여러 맹점들을 폭로하였다. 쇼는 개혁논자의 비판적 사고를 널리 보급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면서 후세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전했다. 그의 재치, 뛰어난 언어감각과 필력은 극이 단순한 선전극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쇼는 매우 재미있게 쓴 서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입센과 마찬가지로 쇼는 낭만적인 무대 관습이 현실을 외면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극 세계에서 우연적인 사건들과 짜 맞춘 줄거리, 파국,
낭만적 속임수들은 단지 어리석고 불합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쇼는 정통극이란 극작가가 "주인공의 열정이 단순히 결혼이나, 검시관의 조사를 받고, 처형되는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시, 예술, 치국책을 내다볼 열정을 지닌 인물로, 그리는 극이라고 정의하면서 정통극을 추구했다. 따라서 쇼 극의 주제는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혹은 주인공과 그 시대의 종교풍습, 예법, 정치, 관습과의 투쟁을 다루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쇼만큼이나 재치 있고 세련되었으며 자신과 주위 상황을 또렷하고 냉철하게 이해하고 있다.
쇼는 자신의 극을 "문제극" [가벼운 극과 대비되는 진지한 극]이라 칭하면서 극의 가치를 그것의 사회적 유용성에서 찾았다. 쇼에게 있어, 셰익스피어는사회와 그 복잡한 구조를 잘 이해하면서도 시사적 사고를 덜 가지고 작품을 쓴 시인으로, 사회변혁을 부르짖으며 돌아다닌 이보다 덜 중요한 그런 작가이다. 쇼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한 여름 밤의 꿈이 갓 칠한 페인트럼 상쾌할 때, 『인형의 집』은 도랑에 괜 물처럼 밋밋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클 것이고, 최고의 천재에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쇼의 첫 공연작 『홀아비의 집 (1892)에서는 빈민가에 지주들이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데, 매우 사실적이다. - P16

 쇼는 지금껏 논의의 관례가 없었던 항목을 지적하기 위해 극적 관습들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피그말리온 (1913)은 계급 차별의 천박함을 보여준다. 음성학 교수인 헨리 히긴스는 말투와 행동방식, 현실 인식법을 바꿈으로써, 동부 런던 토박이인 꽃파는 소녀 엘리자 두리틀을 6개월 내에 숙녀로 변화시킨다. 자신이 만든 동상이 사람이 되어 그와 사랑에 빠지는 예술가의 이야기인 그리스 신화 ‘피그말리온‘을 배경으로 한 이 극은 전통적 기법을 사용하는 ‘로맨스‘ 이지만, 쇼의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결혼하지 않는 것이 당당하게 강조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쇼가 무신론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조직화된 기독교 체제와 교리를 거부했다. 대신 ‘생명력‘ 사상과 ‘창조적 진화‘
이론을 주장하는 니체 철학을 신봉했고, 이를 ‘돈 주앙‘의 현대판인 『인간과 초인』(1905)에서 그렸다. 쇼는 여성은 생명을 창조하므로 ‘생명력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남성 또한 ‘생명력‘의 일부이다. 자기 내부의 또 다른 동력인 지성이라는 능력에 이끌려 자신 보다 위대한 존재[초인]을, 또한 현세보다 더나은 세상을 창조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쇼는 몇몇 극에서 교회와 교회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도전하고 있다. 『악마의 제자』(1897)에서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낭만이나 선지자뿐 아니라 종교에서 등을 돌린 사람을 옛 부족의 우상인 여호와의 청교도 폭정 아래서 진화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의 본성과 삶의 대의 때문에 목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다. 『안드로클레스와 사자』(1913)에서 쇼는 다양한 종교 이야기를 극화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기독교 순교극을 택했다. 이 극은 로마인들 [오늘날의 엄격한 시민]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이유는 그들이 당시의 전통적 종교에 순응하지 않으면서 기존 사회의 기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0년 후
,《성녀 조안》(1923)에서는 비국교도자와 국교도자의 입장을 둘 다 제시했다.
이 작품은 쇼의 최고의 몇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데 기존 종교의 권위를 뛰어넘는 인식을 가진 개인 조안과, 그런 조안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 제거하려는 권력층간의 충돌을 그린다. - P18

이 극이 전율을 주는 이유는 조안이 선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성녀 조안』에는 이러한 종교, 사회적 주제 외에도 여성의 주제가 담겨있다. 경이로운 존재이며, 순교자이고 마침내는 성자가 되는 조안이란 인물은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쇼의 극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워렌 부인의 직업》의 주인공 역시 강한 의지의 여성이다. 한낱 매춘부에서 이제 여러 채의 유곽을 소유하게된 그녀는 뉘우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 직업을 유지하는 것만이 자립할 수 있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워렌 부인을 비난하지 않고 매춘이란 직업을 필요악으로 만든 사회제도를 질책한다. 또 다른 의지의 여성상은 잘 구성된 극 『캔디다』(1897)의 주제가 된다. 이 극은 중후한 남편의 뻔한 상식과 젊은 시인의 낭만주의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입센의 인형의 집과 비교해보면 노라와는 달리 캔디다는 인형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에관한 진실 즉, 남편 모렐이 예리한 인식의 소유자인 젊은 시인 마치뱅크스 보다 더 악하고 여러 면에서 더 낭만적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1899)에서 쇼는 매우 다른 방식의 결혼을 이야기한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어머니와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아버지는 여러 해떨어져 살다가, 자녀 양육권을 가지고 의견 충돌을 빚게 된다. 어머니의 근대적 사고 방식에 의해 외국에서 자란 아이들은 영국에 귀국한 뒤 어머니의 방식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부적절한 결혼』(1910)에는 리자 스체파노스카라는 또 다른 해방된 여성이 나온다. 리자는 비행기를 타고지붕을 박살내면서 까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숨막힐 듯한 가족생활에 타격을 가해 보다가 결국에는 낭만적 혼란을 해결하고 가족들의 권태감을 덜어준다.
여성과 성, 결혼에 관한 쇼의 결정적인 대사는 『인간과 초인』(1905)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엄격한 생물학적 목적"이란 명령에 의해 여자들은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추구한다는 철학을 유머를 더해가며 설명하면서도 쇼는 상당히 진지하다. - P18

극의 구조는 빅토리안 소극의 틀을 주축으로, 흔히 따로 공영되기도 하는 극중극 ‘지옥의 돈주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극중극에서 쇼는 생명력에 관한 자신의 사상을 충분히 피력한다. 주인공 존 태너가 천생배필인 앤 화이트필드에게 마침내 사로잡히고 말았을 때, 존은 창조의 도구라는 생물학적 운명은 받아들이지만 기쁨과 축하로 가득한 결혼이라는 낭만적 사고는 거부한다. 결혼은 해야하지만 그 목적은 오직 출산에 있고 결국 초인이 태어날 가능성을 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화론적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단체 페이비언 협회의 멤버였던 쇼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믿음을 투사하는 중요한 몇 작품을 남겼다. 『바바라 소령
(1905)에서 그는 백만장자 탄약 제조업자인 앤드류 언더셰프트를 통해 가난이 모든 범죄 중 가장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더셰프트는 자신의 딸 바바라를 구세군 소령으로 만들지만, 바바라는 "눈에 배고픔의 허기가 절절한 사람을 향해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의사의 딜레마 (1906)에서는 자유 방임의 상태에서 모든 직업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음모가 된다는 사실을 검토한다. 주인공은 분명히 사악한 천재와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난하고 평범한 개업의 중 누구를 살려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주인공은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 치료법을 제시한다. 바로 환자를 치료하도록 의사에게 돈을 지불하는 국민건강 보험이다. 쇼는 셰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우연한 만남을 다룬 재치가 넘치는 1막극 『소네트의 다크 레이디』(1910)란 극에서 또 하나의 국가 기관, 바로 국립 극장을제안한다. 쇼는 사과수레 (1929)에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관론을펼쳐 보인다. 미래의 시점을 배경으로 한 환상극에서 대중의 이익에 가장 위험이 되는 것은 재벌로, ‘파괴 주식회사‘는 실제로 정부까지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첫 성공작 『무기와 인간 (1984)에서 쇼가 다룬 것은 전쟁이다.  - P19

낭만적인 군대극의 형식을 따랐지만 쇼는 그 낭만적 태도를 비난하고 전쟁의 외관과 매력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야만적 성격을 간과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를 지적한다. 쇼는 애국심의 발로가 아닌 생계수단으로 직업 군인을 택한 한 스위스용병이 명예를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군인의 어설픈 태도를 보여준다. 1890년대 영국 대중들에게 전쟁에서 낭만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는 것은 용기와 애국섬, 제국에의 신망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년작, 1906 공연)는 쇼가 당대 최고의 배우라.
여겼던 존스톤 포브스-로버트슨을 염두에 두고 썼던 극이다. 그 과정에서 쇼는 시저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생각을 반박한다. 쇼는 시저를 최고의 현자로 묘사하고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대부분 교사로서의 관계로 그린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쇼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의 충격으로 쇼는 『상심의 집.(1920)에서 절망이라는 새로운 고찰을 끌어낸다. 이 극은 체콥 풍의 방식으로 붕괴하기 직전의 부패한 사회를 그린다. 『무드셀라로돌아가다. (1922)는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창조적 진화이론에 있다는 결론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파괴적인 힘을 이겨내기에 충분히 강인하여 초인으로 진화하기만 한다면, 인간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문명사회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5편으로 구성된 이 극은 창세기에서 신탁까지의 생물학적 역사의 과정을 다루고 있으며, 공연에도 수 시간이소요된다. 마지막 편에서 쇼는 주인공인 "장수자"들이 작가가 이상적 사회주의사회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몇몇 계획들이 현실화되어 있는 이상향의 세계에서, 순수한 사고의 존재가 되어 쇼 식으로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보여준다. 쇼가 겪은 전후 환멸은 <너무 진실해서 선이 될 수 없는>(1932)에서 더 명확하게 그려진다. 전쟁의 충격으로 도둑이 된 성직자는할 말이 한마디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 설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버나드 쇼는 여러 주제들, 수많은 희극적 상황과 심각한 상황들, 끝도 없는 기발한 생각들을 다루었다. 그 대부분은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 P20

쇼는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사회에서 귀찮아하는 것들을 재치와 매력과 그리고 시야가 넓은 천재의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묘사했다. "나는 어떤 영웅적 모험도 하지 않았다. 사건이 내게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가 그 사건에 다가갔고 내 모든 경험들은 책과 연극 안에 남아있다. 읽어보거나 관람해 보아라. 내 모든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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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버마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놓여 있다. 민족학적으로 인도차이나에 속한다. 크기는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친 것보다 3배 더 크고, 인구는 1400만 명이며, 그들 중 대략 900만 명이 버마족이다. 나머지는 중앙아시아의 온대 초원지역에서 여러 기간에 걸쳐 버마에 이주해 온 수많은 몽골족과 영국 지배 이후 들어온 인도인들이다. 버마인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나머지 국민들은 여러 이교도 신을 숭배한다. 버마에 살고 있는 이 다양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과 말하기 위해서는 120여 개의 언어와 방언을 알아야 한다.
인구밀도가 잉글랜드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이 나라는 세계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국가 중 하나이다. 이 자원은 최근에 개발되기 시작하고 있다. 주석, 텅스텐, 옥,
루비 등이 풍부하며, 이밖에도 엄청난 양의 광물자원이 매장되어있다. - P47

지금 이 나라는 세계 석유의 5퍼센트를 생산하고 있는데, 석유 매장량은 좀체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큰 부의 원천은 80에서 90퍼센트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벼를 생산하는 논이라 할 수 있다. 벼는 버마를 남북으로 관통해서 흐르는 이라와디 강 주변의 모든 분지에서 경작된다. 이라와디 강이 매년 많은 양의 충적토를 흘려보내는 남부지방의 거대한 삼각주에 있는 평야는 엄청나게 비옥하다. 질과 양에 있어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쌀의 수확으로 버마는 인도, 유럽, 심지어 미국까지 쌀을 수출한다. 게다가 연중 기온 차이는 인도만큼 불규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크지도 않다. 풍부한 강우량, 특히 남부지방에 비가 많이 내려 가뭄 걱정이 없고 더위도 강렬하지 않다. 그래서 이곳의기후는 대체로 열대 지역 중에서 가장 건강에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버마 시골이 넓은 강, 높은 산, 사시사철 푸른 숲, 밝은 색깔의 꽃, 이국적 과일 등이 널려 있는 정말로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을 덧붙여 말한다면, 지상의 낙원‘이라는 구절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니 영국 사람들이 이 나라를 손에 넣으려고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820년 영국인들은 이 거대한 지역을 점령했고, 마침내1882년에 유니언 잭이 미얀마의 거의 모든 영토 위에 나부끼게되었다. 미개 부족들이 살고 있는 북쪽 산악지역은 최근까지 영국인의 손에 들어오지 않고 있지만, 쉽게 말하면 평화로운 합병이고 완곡하게 말하면 ‘평화로운 침투‘를 의미하는 과정 덕분에 이미 점령된 지역과 똑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 P48


이 글에서 나는 대영제국주의의 이런 징후에 찬사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모든 제국주의 정책의 논리적 결과라고 말해두고 싶다. 버마에서 영국 행정부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경제적 및 정치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이다.

우선 정책에 대해 알아보자. 대영제국주의 통제 하에 있는 인도 지역의 모든 식민정부는 필연적으로 독재적이다. 왜냐하면 군대의 위협만이 수백만 명의 피식민주의자들을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독재는 민주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겨져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동양인들을 지배하는 데 영국 사람들이즐겨 사용하는 속담은 ‘동양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유럽 사람에게 결코 시키지 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 권력은 영국 사람들이 쥐고 있지만 일일 업무를 처리해야 하고 업무상 원주민들과 접촉을 해야 하는 하급 공무원 자리는 그 지방에 거주하는 원주민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버마에서 하급 치안판사, 경감까지의 모든 경찰, 우체국 직원, 행정직원, 마을 이장 등은 모두 버마인들이다.
최근에 여론을 잠재우고 우려할 만한 민족주의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영국은 교육받은 원주민 후보들을 받아들여 몇 개의 요직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원주민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제도는 세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원주민들은 유럽인들보다 적은 봉급을 받는다. - P49

두 번째, 그들은 같은 원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법적 분행을 쉽게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그들은 그들에게 생계비를 지급해주는 정부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들이나 어느 정도 교육받은 계층과 밀접한 협조를 이어나감으로써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불만이 생길 경우이들 계층에서 반란 지도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 물론 버마는 인도의 각지역처럼 의회 (언제나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는)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의회는 힘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사법권도 정의롭게 발동되는 경우가 없다. 식민정부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정부의 꼭두각시들이다. 식민정부는 반항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 꼭두각시를 이용해 그 싹을 미리 잘라버린다.
게다가, 각 지역에는 영국이 임명하는 지사가 있다. 지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 대통령처럼 절대적인 거부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국 식민정부가 본질적으로 독재적일지라도 그들이 버마에서 인기가 없는것은 결코 아니다. 영국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물론 버마인들에도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며 병원과 학교를 만들고 법과 질서를 세운다. 게다가 결국 버마인들은 땅을경작하는 데 몰두한 소작농에 불과하다. 그들은 독립주의자로 나아가는 지적 발전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 P50

버마인들에게 그들의 마을은 그들의 소우주에 해당된다. 논밭에서 평화롭게 농사짓도록만 해주면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백인이든 흑인이든상관하지 않는다. 버마인들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냉담하다는 사실은 영국인들로 구성된 2개 보병 대대, 인도인들로 구성된 10개보병 대대와 기마경찰 정도만이 이 나라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이 인도인들로 구성된1만 2천 명의 군인들만 있으면 1천4백만 명의 인구를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것이다.
식민정부에 가장 위험한 적은 젊은 지식인 계급이다. 만일 이계층 사람들의 수가 많아진다면, 어쩌면 이들은 혁명의 깃발을들어 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첫째로 버마인들은 대다수가 소작농이다. 둘째로 영국 정부는 버마인들에게 단지 심부름꾼, 하급 공무원, 하찮은 변호사 서기, 그 밖의 다른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길러낼 만큼의 별로 유익하지 않은 지식만을 가르치려 할 뿐이다. 기술과 산업 지식을 가르쳐주는 일은 절대 없다. 인도 전역에 퍼져 있는 이 규칙의 목적은 인도를 영국과 경쟁할 수 있는 산업국가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제대로 교육받은 버마인들은 대체로 모두 영국에서공부한 사람들이며, 그 결과 이들은 부유한 소수 계층에 속한다.
그래서 버마에는 지식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반역을 부추길 수 있는 여론 형성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P51

경제적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미얀마 사람들은 대체로 무지해서 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최소한의 분노도 표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현재로선 그들은 큰 경제적 손실도 입지 않고 있다.
영국인들이 광산과 유전을 장악하고 있고 목재 산업도 지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모든 중개인, 브로커, 제분업자, 수출업자들이 쌀로부터 엄청난 부를 긁어모으고 있는데도 정작 생산자인 원주민 농민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쌀이나 석유로 많은 돈을 벌어들여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업가들이 이 나라의 복지에써야 할 돈을 쓰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의 돈은 지방세도 내지 않고 해외로 빠져나가 영국에서 소비된다. 솔직히 말해 영국 사람들은 버마를 뻔뻔스럽게도 도적질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으로선 버마 사람들이 이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나라는 부유하고,
그들의 인구는 드문드문 산재해 있으며, 모든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욕심이 적어 그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땅패기를 경작하는 소농들은 말하자면 마르코 폴로 시절 그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수준 그대로 살고 있다. 원한다면 그들은 적당한 가격으로 미개척지를 살 수 있다.  - P52

그들은 몹시도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체로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배고픔과 실업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노동이 있고 굶어죽지 않을 식량이 있다. 불필요하게 뭘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머지않아 국가의 거대한 부가 쪼그라들면서 버마 사람들은 서서히 고통받기 시작할 것이다. 버마가 전쟁이후 어느 정도 개발되고는 있지만, 이미 소농들은 20년 전보다더 가난하다. 그들은 토지세의 과중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따라서 수확이 증가해도 늘어난 세금을 벌충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노동자들의 임금 또한 뛰는 생활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영국 정부가 인도인들이 버마에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허가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굶어죽기 직전의 인도인들은 그들의 땅을 떠나 버마로 들어와 임금을 거의 받지 않고 밥만 먹여줘도 일을 해서, 버마인들이 볼 때 인도인들은 무시무시한 경쟁자가 되어버렸다.
이 외에도 인구의 가파른 증가가 있다. 작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0년 만에 1천만 명이나 증가했다. 모든 인구과잉 국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조만간 버마인들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반(半)노예상태로 전락할 것이며, 더욱이 실업문제도 불거져 나올 것이다. 그때가 되서야 그들은 오늘날 거의 의심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 이를테면 유전, 광산, 제분업, 쌀의생산과 판매 등이 영국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산업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자신의 산업적 무능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53

버마에 대한 영국의 정책은 인도에서와 똑같다. 인도에서의 산업정책은 의도적으로 낙후시키는 것이다. 인도는 손으로 제작할수 있는 기본 필수품 정도만 생산 가능하다. 이를테면 원양선을건조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동차, 소총, 시계, 전구 같은것도 만들 수 없다. 동시에 그들은 서구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공장에서 만든 제품에 의존하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영국 공장에서 만든 제품들의 중요한 배출구 역할을 하는것이다. 대외 경쟁은 턱없이 높은 관세의 장벽에 막혀 있다. 그래서 두려워할 게 없는 영국 공장 소유주들은 시장을 마음대로 주물러 엄청난 이득을 챙긴다. 버마인들은 아직은 크게 고통 받지않고 있는데 이 나라가 대체로 농업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마인들은 모든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들의 아버지 세대에서 없었던 현대 산업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그 결과 영국인들은 버마에서 두 가지방법으로 도둑질을 하고 있다. 첫 번째는 버마의 천연자원을 약탈하고 있고 두 번째는 이곳에서 버마인들이 필요로 하는 제조품을 팔 독점권을 행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버마인들은스스로 산업자본주의자가 될 희망을 가지고 산업자본주의에 휘말려들게 된다. 게다가 인도인들의 경우처럼 버마인들도 순전히군사적 고려 때문에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있다.  - P54

그들은 사실상 배를 건조할 수도 없고, 총이나 현대 전쟁에 필요한 그 밖의 무기를 만들 수도 없다. 만일 영국인들이 현 상태로 인도를 포기한다면, 인도의 주인만 바뀌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 나라는 다른 강대국에 의해 침략되고 착취될 것이다. 영국의 인도 지배는 본질적으로 군사 보호를 상업 독점과 교환하는 데 놓여 있지만, 이거래는 인도의 모든 영역에까지 지배가 미치는 영국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버마가 영국인들로부터 부수적인 이득을 취한다해도 버마는 대단히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금까지 영국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원주민들을 심하게 억압하지 않고 있다. 버마인들은 아직도 농업 소농에서 제조 산업분야의 노동자로 탈바꿈하는 과도기의 초기단계에 놓여 있다. 그들의 상황은 상업과 산업에 필요한 자본, 건설 자재, 지식, 영향력 등이전적으로 외국인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사실만 빼고 18세기 유럽의 상황과 비교될 수 있다. 그래서 버마인들은 독재정치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되었다. 독재정치는 그 자체를 위해 그들을지켜주지만 그들의 효용성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내팽개쳐버릴것이다. 대영제국과 그들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주인이 좋은가, 나쁜가? 이것은 질문이 되지 못한다. 주인의 지배는 독재적, 쉽게 말하자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두자.
- P55

버마인들은 지금까지 저항의 명분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국가의 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 부족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그들은 자본주의가 자체의 존립을 위해 지금까지 그들에게 신세져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부당하게 대우받아왔는지를 스스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 1929년 5월 4일, <시민의 진보>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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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년 제2차 수신사행에 대한 개관

1876년 제1차 수신사행 파견1876년(고종 13) 2월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는 조선이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직후인 1876년 2월 22일 수신사로 임명된 김기수를 정사로 하는 제1차 수신사는 같은 해 4월 서울에서 출발했다. 이 수신사행은 최초의 근대적 외교 사절단이었다.
1811년 마지막 통신사 이후 65년 만에 공식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763년 통신사가 1764년 일본 본토를 다녀온 이래, 사절단이 112년만에 도쿄에도)에 간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근대적인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수신사는 종전의 통신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김기수는 "수신 이란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고했다. 옛 우호는 개항 이전의 전통적인 교린 체제를 의미한다.  - P6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제결을 전통적인 교린 체제의 회복 또는 연장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조일 관계가 교린 체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데 통신사 대신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신사행에 대한 조선의 인식은 혼합적이고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새로운  외교 체제의 성립을 강조하면서 수신사행의 절차나 구성을 통신사행과는 다르게 요구했다.
제1차 수신사는 수교 교섭 때 일본이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한 회사(답례) 와 수신이라는 명분적인 임무와 함께,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의 경제 시찰과 개화 문물의 탐색이라는 실질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견문 활동과 보고에 대한 평가는 위정자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기 못했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개화 또는 대외 정책을 실시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나뉜다. 당시에는 아직 개화 정책을 추진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서 제1차 수신사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김기수의 견문은 위정자들이 일본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1수신사에 참가한 수행원들은 개화 자강과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0년 제2차 수신사행 파견조선이 근대 서양문물을 수용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는 시점은1579년이다. 그해 3월 일본은 류큐(琉球) 왕국을 폐지하고 오키나와(沖繩)현 설치를 단행했으며, 청과 러시아 사이에서는 이리 (중국 신장성 천산산맥중부의 분지)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 P7

청의 싱력자 이홍장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원로대신 이유원李裕元에게 서신을 보내서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지 모르니 서구열강과 조약을 맺고 군사력을 강화하라고 당부했다.
1880년 2월 의정부에서는 수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 공사公使가 연례적인 일을 전담하기 위해 조선에 왔으므로 교린의 의리로 보아 사례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1880년 3월 김홍집이 수신사로 임명되었다. 제2차 수신사행의 사명은 변리공사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貿) 등 일본사절의 내한에 대한 답례와 수신, 일본 물정의 탐색이라는 점에서는 제1차 수신사행과 마찬가지였으나, 양국 간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사행이 파견되기 전,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인천 개항과 미곡 금수의 해제, 관세 배상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조선 조정은 이들 현안을 절충하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김홍집이 해결해야 할 현안은 첫째 인천 개항과 일본 공사의 주경 (공부를 위해 서울에 머무름) 요구를 철회시키도록 절충할 것, 둘째 부산항에서 관세를 징수하도록 교섭할 것, 셋째 미곡수출 금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절충할 것 등이었다. 아울러 이홍장이 권고한 내용과 관련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타진하고, 국제 정세를 탐문하며, 일본의 문물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었다.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외교 현안의 절충이라는 막중한 사명이외에도 일본 측의 권유로 개화 문물을 시찰하고 일본 정계 요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공사 하여장, 참찬관 황준헌運 등과 국제 정세를 논했다. 이들과 여섯 차례에 걸친 토론을 통해 김홍집은 국제 정세에 눈을 뜨고, 문호 개방과 부국강병책의 절박함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 P8

 특히 황준헌은 이 논의 내용에 자신의 지론을 담은 《조선책략》을 지어 김홍집이 귀국할 때 청의 정관응이 지은 《이언,
고)과 함께 전해 주었다.
김홍집은 사행 중 견문을 기록한 <수신사일기>를 남겼다. 여기에는 수신사 김홍집 복명서使命書), 수신사 김홍집 입시연설人說》, 《답서계를및 등본〉, 〈조선책략〉, 〈대청흠사필담 大淸欲使第, 〈제대신헌의 人國),
<아라사채탐사俄羅斯解使 백춘배 서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수신사기록 국사편찬위원회, 1958)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 가운데중요한 것은 문견별단聞見別의 성격을 띤 복명서다. 이것은 사행의 노정과 일정, 현안 협상에 관한 보고, 러시아의 군사와 남진 의도, 일본의 해외정보 수집 노력, 흥아회亞會, 일본 지리, 인물, 풍습, 메이지유신 이후의성과, 군사 제도, 교육 제도, 경제 제도 등을 구체적으로 논한 것이었다. 이보고서는 《조선책략> 과 함께 조선이 안으로는 자강 정책, 밖으로는 개국정책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은 왕조의 존립을 도모하는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880년 12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통리기무아문은 청에 군기 제조와 군사 조련에 관한 지식 습득을 위한 유학생을 파견하고, 일본에 여러 제도 등의 시찰 조사를 위한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881년 4월에는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고, 9월에는 청에 영선사選使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또한 1882~1883년에 미국, 영국, 독일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병자수호조규에 이은 제2의 문호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 P9

1881년에는 제3차 수신사(정사 조병호 夏齋), 1882년에서 제4차 수신사(정사 박영효朴泳孝)가 파견되었다. 1880년대에 개화자강운동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 것은 4차례에 걸친 수신사의 일본 견문 보고가 중요한 계기가되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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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오페라도 보러 가셨나요?
뒤라스-----오페라는 내겐 진력나는 부르주아들의 사교 행사였어요.
막이 오르자마자 질려버렸죠. 지나친 스펙터클 장치로 인해 시각은 포화 상태에 음악적 효과는 빈약해졌죠. 음악은, 진정한 음악은 절대 다른 무엇의 배경이 될 수 없거든요. 음악만으로 우리를 전부 채워야 또는 전부 비워야 하죠.
- P36

"인간의 의식을 단순화하려는 그 모든 시도가그 자체로 파시스트적이었죠. 그런 의미에서는스탈린주의나 나치즘이나 다를 바 없어요."
- P39

토레--저널리즘은 어떤 기능을 해야 할까요?
뒤라스--언론이 없다면 모르는 채로 지나칠 사건들에 대해 여론을 조성해야겠죠.
직업인의 객관성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어요. 난 그보다는 명확한 ‘입장 표명‘이 더 낫다는 쪽이에요. 일종의 도덕적 스탠스라고 할까요. 작가도 자신의 책들을 통해 완벽하게 드러낼 수 있죠.
토레--선생님은 각종 사건, 사고 들에 늘 깊은 관심을 보이셨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요. 종종 텔레비전이나 일간지들을 통해 입장을 밝혀서 여론의 혹독한 질타를 받기도하셨어요.
뒤라스--생각한 걸 이야기하고, 사회적 부당함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묵과를 고발하기 위한 시도예요. 알제리전쟁이라든가 전체주의 체제의 부상, 지구촌의 군국주의화, 사회의 도덕성 강요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기를 촉구하고 싶은거죠. 난 늘 그런 시도를 해왔어요.
내게 가장 흥미로운 건, 그 모든 것이 개개인에게 미치는영향이에요. 개인에게 내재된 광기나 동기 없는 충동적 행위, 치정이나 분노로 인한 범죄 같은 거요. 아니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사건들처럼 사법 시스템에 의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에 관심이 집중되기도 하고요. - P51

토레--인류의 미래와 진보에 대해선 어떤 그림을 그리시는지요?
뒤라스--자동화, 원거리통신, 정보화 등이 인간의 수고를 덜어준 끝에 결국 창의력을 둔화시킬 거예요. 기억을 잃은 납작하고 밋밋한 인류가 될 위험이 있죠.
하지만 인류의 문제점에 대해선 아무리 떠들어대봤자 소용없어요. 우리는 하루하루, 자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하면서, 아니면 늘 그렇듯 신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 P55

토레--인류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사람들의 불안감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심판이 아니며 원하던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비극의 자각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뒤라스--그 말, 그 행복이란 말은 절대 내뱉어선 안 돼요. 우리가 단어에 부여한 의미 자체로 예외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고, 사정거리 바깥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니까요. 닿을 수없고, 대단히 신비롭게 말이에요.
- P56

뒤라스--
사람들은 흔히 삶이 사건별로 연대순으로 식별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실은 사건들의 사정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알지 못해요. 우리의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리는건 기억이죠.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표면, 외피에 불과해요. 나머지는 되살려낼 수 없을 만큼 우리 안에 어둡고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조.. 기억이 강렬할수록, 통째로 드러내기가 어려워져요..
난 전통적인 의미의 기억 되살리기는 관심 없어요.우린 구미대로 자료를 파내는 보관소가 아니니까요. 더구나 기억을 잊는 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만일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80퍼센트가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지 않는다.
면, 사는 게 참을 수 없어질 거예요. 망각과 구멍이야말로 진정한 기억이죠. 우리를 회상과 맹목적인 고통의 압박에서 구해주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잊어요.
- P87

뒤라스--글쓰기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아니에요. 그보다는 이야기를 둘러싼 것들을 환기시켜, 이야기를 중심으로 순간을 창조하고, 이어서 또 다른 순간을 계속해서 창조하는 작업이에요. 거기엔 모든 것이 있고,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으며, 두 경우가 교환 가능할 수도 있죠.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처럼 말이에요.
토레--그걸 선생님의 반복적이고 돌발적인 조건법 시제 사용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도 될까요?
뒤라스--조건법은 영화만큼이나 문학의 바탕이 되는 작위적인 아이디어를, 다른 어떤 시제보다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줘요.
모든 사건이 다른 무엇의 잠재적이고 있을 법한 결과로 보이게 되죠. 그래서 아이들이 허구의 결말을 의식하는 동시에 가벼운 게임을 즐기는 기분으로, 끊임없이 조건법 동사를 변형하며 노는 거예요. - P88

"인간 존재는 그저 단절된 충동들의한 묶음일 뿐이에요.
문학은 그 상태 그대로를 복원해야 하죠."
- P120

 욕망은 잠재적인 활동이고, 그래서 글쓰기와 흡사해요. 우리는 늘 글을 쓰듯 욕망하죠.
실제로 난 글을 쓰는 순간보다. 글을 쓰려고 자세를잡는 순간에 더 글쓰기에 사로잡힌 기분을 느끼거든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이점은, 글쓰기가 시작될 때의 카오스와 종이 위에서 가벼워지고 환해지는 카오스의 결과물 사이의 차이점과 똑같아요.
카오스는 욕망 속에 있죠. 쾌락은 우리가 이룬 것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에요. 나머지는, 우리가 욕망한 것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요. 영원히 잃어버린 채로.
- P174

"우리는 늘 우리 본연의 모습인 단일성에 도달하기 위해 기를 쓰지만,
우리의 풍요로움은 바로 그 범람에 있는 거예요."
- P183

토레--혼자라고 느끼시나요?
뒤라스--모든 사람들처럼요. 우리 모두가 두려워서 끝까지 감추려고 애쓰는 그 궁극의 고독을 느끼죠. 하지만 하루도 혼자만의 시간이 없다면, 그런 환경이라면, 숨쉬기도 힘들 것 같아요. - P186

토레--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뒤라스--나는 진정한 여성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다소 근시안적인 모든 형태의 투쟁을 경계해요. 거기엔 이데올로기 자체보다 더 제도화된 반이데올로기가 존재하거든요. 의식이 있고 정보가 있는 여성은 그 자체로 당연히 정치적인 여성이에요.. 자신의 육체를 대표적인 순교지로 만들면서, 게토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말이에요.
토레--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침묵은, 침묵의 실행과 이해는,
여성다움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요?
뒤라스--여성은 모호함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자신의 말속에 담긴 침묵까지도 통째로 번역하고, 포용해요. 반면에 남성은 침묵의 힘을 조금도 못 견딘다는 듯이, 말해야만할 필요성을 느끼죠..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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