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 년 제2차 수신사행에 대한 개관

1876년 제1차 수신사행 파견1876년(고종 13) 2월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는 조선이 제국주의적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직후인 1876년 2월 22일 수신사로 임명된 김기수를 정사로 하는 제1차 수신사는 같은 해 4월 서울에서 출발했다. 이 수신사행은 최초의 근대적 외교 사절단이었다.
1811년 마지막 통신사 이후 65년 만에 공식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763년 통신사가 1764년 일본 본토를 다녀온 이래, 사절단이 112년만에 도쿄에도)에 간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근대적인 서구 중심의 국제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수신사는 종전의 통신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김기수는 "수신 이란 옛 우호를 닦고 신의를 두텁게 하는 것"이라고했다. 옛 우호는 개항 이전의 전통적인 교린 체제를 의미한다.  - P6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제결을 전통적인 교린 체제의 회복 또는 연장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당시 조일 관계가 교린 체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데 통신사 대신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신사행에 대한 조선의 인식은 혼합적이고 과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새로운  외교 체제의 성립을 강조하면서 수신사행의 절차나 구성을 통신사행과는 다르게 요구했다.
제1차 수신사는 수교 교섭 때 일본이 사절을 파견한 것에 대한 회사(답례) 와 수신이라는 명분적인 임무와 함께,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의 경제 시찰과 개화 문물의 탐색이라는 실질적인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견문 활동과 보고에 대한 평가는 위정자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기 못했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개화 또는 대외 정책을 실시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나뉜다. 당시에는 아직 개화 정책을 추진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서 제1차 수신사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 큰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김기수의 견문은 위정자들이 일본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1수신사에 참가한 수행원들은 개화 자강과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880년 제2차 수신사행 파견조선이 근대 서양문물을 수용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는 시점은1579년이다. 그해 3월 일본은 류큐(琉球) 왕국을 폐지하고 오키나와(沖繩)현 설치를 단행했으며, 청과 러시아 사이에서는 이리 (중국 신장성 천산산맥중부의 분지)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 P7

청의 싱력자 이홍장은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원로대신 이유원李裕元에게 서신을 보내서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지 모르니 서구열강과 조약을 맺고 군사력을 강화하라고 당부했다.
1880년 2월 의정부에서는 수신사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 공사公使가 연례적인 일을 전담하기 위해 조선에 왔으므로 교린의 의리로 보아 사례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1880년 3월 김홍집이 수신사로 임명되었다. 제2차 수신사행의 사명은 변리공사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貿) 등 일본사절의 내한에 대한 답례와 수신, 일본 물정의 탐색이라는 점에서는 제1차 수신사행과 마찬가지였으나, 양국 간의 주요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달랐다.
사행이 파견되기 전, 하나부사 요시모토는 인천 개항과 미곡 금수의 해제, 관세 배상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조선 조정은 이들 현안을 절충하기 위해 수신사를 파견한 것이다. 김홍집이 해결해야 할 현안은 첫째 인천 개항과 일본 공사의 주경 (공부를 위해 서울에 머무름) 요구를 철회시키도록 절충할 것, 둘째 부산항에서 관세를 징수하도록 교섭할 것, 셋째 미곡수출 금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절충할 것 등이었다. 아울러 이홍장이 권고한 내용과 관련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타진하고, 국제 정세를 탐문하며, 일본의 문물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었다.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일본에서 외교 현안의 절충이라는 막중한 사명이외에도 일본 측의 권유로 개화 문물을 시찰하고 일본 정계 요인들을 만났다. 그리고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여 공사 하여장, 참찬관 황준헌運 등과 국제 정세를 논했다. 이들과 여섯 차례에 걸친 토론을 통해 김홍집은 국제 정세에 눈을 뜨고, 문호 개방과 부국강병책의 절박함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 P8

 특히 황준헌은 이 논의 내용에 자신의 지론을 담은 《조선책략》을 지어 김홍집이 귀국할 때 청의 정관응이 지은 《이언,
고)과 함께 전해 주었다.
김홍집은 사행 중 견문을 기록한 <수신사일기>를 남겼다. 여기에는 수신사 김홍집 복명서使命書), 수신사 김홍집 입시연설人說》, 《답서계를및 등본〉, 〈조선책략〉, 〈대청흠사필담 大淸欲使第, 〈제대신헌의 人國),
<아라사채탐사俄羅斯解使 백춘배 서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수신사기록 국사편찬위원회, 1958)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자료 가운데중요한 것은 문견별단聞見別의 성격을 띤 복명서다. 이것은 사행의 노정과 일정, 현안 협상에 관한 보고, 러시아의 군사와 남진 의도, 일본의 해외정보 수집 노력, 흥아회亞會, 일본 지리, 인물, 풍습, 메이지유신 이후의성과, 군사 제도, 교육 제도, 경제 제도 등을 구체적으로 논한 것이었다. 이보고서는 《조선책략> 과 함께 조선이 안으로는 자강 정책, 밖으로는 개국정책으로 정책을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은 왕조의 존립을 도모하는 대책을 마련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1880년 12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통리기무아문은 청에 군기 제조와 군사 조련에 관한 지식 습득을 위한 유학생을 파견하고, 일본에 여러 제도 등의 시찰 조사를 위한시찰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881년 4월에는 일본에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고, 9월에는 청에 영선사選使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했다. 또한 1882~1883년에 미국, 영국, 독일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병자수호조규에 이은 제2의 문호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 P9

1881년에는 제3차 수신사(정사 조병호 夏齋), 1882년에서 제4차 수신사(정사 박영효朴泳孝)가 파견되었다. 1880년대에 개화자강운동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 것은 4차례에 걸친 수신사의 일본 견문 보고가 중요한 계기가되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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