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대기근 - 중국 참극의 역사 1958~1962, 2011년 새뮤얼 존슨상 수상작 ㅣ 인민 3부작 2
프랑크 디쾨터 지음, 최파일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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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6월 백화 운동의 붕괴는 <우파 보수주의>가 중대한 이념적 적이며, 현재의 경제 부진 뒤에는 우파의 타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주석의 의혹을 확고하게 했다. 그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 바로 그 전문가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지며 폐기되었던 사회주의 고조 정책들을 부활시키고 싶었다. 경제 발전을 도울 전문적 기술과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인들이 불만분자들이라면 나라의 미래를 그들의 전문성에 맡긴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당의 제2인자인 류사오치도 농업 생산의 목표량을 더 늘려야 한다는 주석의 주장에 당의 지지를 결집시켰다. 1957년 10월 류사오치의 지원을 받은 마오쩌둥은 재도입된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한 <더 크게, 더 신속하게, 더 좋게, 더 경제적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는 무분별하게 앞으로 내달린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모진(冒進)>이라는 표현을 도약한다는 의미의 <약진>으로 대체하는 데도 성공했다."(42)


"1957년 5월, 모스크바에서 외국 당 대표단들을 앞에 두고 흐루쇼프는 10월 혁명을 기념하는 기조연설에서 자신의 경제 드라이브의 성공을 선언했다. 「동지들, 우리 계획가들이 계산에 따르면 다음 15년 안으로 소련은 미국 중요 생산품의 현재 산출량을 따라잡을 뿐 아니라 능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도전을 받아들였고 중국은 당시 여전히 중요 산업 강국으로 간주되던 영국을 15년 내로 넘어설 것이라고 즉시 발표했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었다."(49) "중국은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고, 중공업과 경공업을 동시에 시도하면서 <두 다리로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의 지도자로서 마오쩌둥은 이제 완전한 충성심을 요구했다. <숭배가 뭐가 나쁜가? 진리는 우리 수중에 있는데 왜 우리가 그것을 숭배하지 말아야 하는가? 집단은 저마다 그 지도자를 숭배해야 하고, 숭배할 수밖에 없다.> 마오쩌둥은 설명했다. 이것은 <올바른 개인숭배>라고."(56-7)


"<대약진>이라는 표현은 1957년 하반기에 시작된 치수 사업 맥락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5년 안으로 영국을 추월하려고 작정한 마오쩌둥은 자본을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서 급속한 공업화의 열쇠를 찾았다. 거대 인구는 중국의 진짜 자산이고 농촌의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춘경기가 오기 전 농한기에 그들을 동원해야 한다. 물길을 돌려서 건조한 북부 지방에 흩어져 있는 피폐한 촌락들의 빈약한 표토에 물을 댈 수 있다면, 아열대 남부 지방에서 거대한 제방과 저수지로 홍수가 방제된다면, 곡물 수확량은 급증할 것이다." "1957년 10월에 3000만 명 정도가 모집되었다. 1958년 1월이 되자 중국에서는 여섯 사람 중 한 명 꼴로 땅을 파고 있었다. 그 해가 저물기 전에 5억 8000만 세제곱미터 이상의 돌과 흙이 옮겨졌다." "허난 성과 안후이 성의 경계 지역, 수십 년 동안 전개될 야심 찬 <화이 강을 동력화하자> 운동의 중심지에서는 100개가 넘는 댐과 저수지가 1957년과 1959년 사이에 건설되었다."(67-8)


"중앙에는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일단의 목표치들이 있고, 제2차 계획 역시 당연히 달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두 번째 계획이 성으로 전달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달성해야 할 지방의 첫 번째 목표치가 된다. 각 성은 그다음 그들이 예상하는 달성 목표치를 반영한 제2차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구받고 결국에는 다 합쳐서 세 가지 목표치가 나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현까지 전달되어 현 단위에서 사실상 네 번째 생산 계획까지 추가되었다. 전국적 목표치들이 당 모임에서 끊임없이 수정되어 올라가면서 정해진 목표량과 희망 목표량으로 이루어진 시스템 전체가 꼭대기부터 밑바닥 마을 단위까지 광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며 목표량에서 대약진을 낳았다." "온 나라가 규정량, 할당치, 목표량의 세상이 되었고, 확성기가 구호를 쏟아 내고 간부들이 작업을 체크하고 평가하고, 위원회가 주변 세상을 끝없이 등급을 매기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그런 숫자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80-1)


"수치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새로운 최고치를 경신하는 것은 사회주의 진영이 지난해 우주 공간에 쏘아올린 첫 인공위성을 기려 <스푸트니크호 발사하기>라고 불렸다." "이러한 기록들 다수가 <스푸트니크 밭>, 즉 새로운 기록을 경신하는 데 열심인 현지 간부들이 과대 선전한 다수확 실험용 밭에서 달성되었다. 이 밭들은 대체로 집단 농장 가운데 단 몇 뙈기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훨씬 넓은 곳에 적용되는 새로운 영농 기술의 시연장 역할을 했다. 수확량을 증대시키려는 움직임은 비료 쟁탈전을 조장했다."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된 방법은 진흙과 볏짚으로 지은 건물을 허무는 것이었다. 외양간처럼 동물이 살았던, 특히 가축이 방뇨한 건물의 벽은 유용한 비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낡은 담과 폐가가 헐렸지만 증산 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줄줄이 늘어선 가옥들 전체가 체계적으로 철거되었다."(82-3)


"북중국 시골에 자리한 쉬수이 현의 현지 지도자 장궈중은 관개 사업을 마치 야전처럼 접근했다. 10만 명의 인력을 징발한 그는 농민들을 군대 조직을 따라 대대, 중대, 소대 단위로 나눴다. 그리고 마을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이 노동 부대원들이 임시 막사에서 자고 공동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야외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명령에 군대처럼 정확하게 대응하는 규율 잡힌 단위로 주민들을 집산화함으로써 장궈중은 노동 문제와 자본 문제를 동시에 해결했다." "(농민 병사들을 지속적으로 혁명에 전개하는 사업의) 핵심 용어는 <군사화>, <전투화>, <규율화>였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대대와 소대 단위로 조직된 방식을 칭찬하고, 여성을 가사에서 해방시켜 전선으로 보내는 공동 식당과 탁아소, 양로원에 찬사를 쏟아냈다. 그는 <인민공사는 훌륭하다!>고 선언했다. 그해 여름에 걸쳐 중국 전역의 현지 간부들이 너도나도 집단 농장을 인민공사로 결합하여 중국은 동원 체제가 되었다."(95-7)


"강철은 사회주의 연금술에서 성스러운 요소였다. 철강 생산량은 사회주의 나라들이 종교적 열의를 띠며 되뇌는 마법의 숫자였다. 철강 생산량은 인간 행위의 모든 복잡한 차원들을 마법처럼 증류하여 한 나라가 발전의 척도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보여 주는 단 하나의 정확한 숫자로 환원했다." "성공의 열쇠는 인민공사의 뒤뜰에 설치하여 주민들이 운영하는 작은 고로(高爐)였다. 모래, 돌, 내화 점토나 벽돌로 만들어진 고로는 영국을 앞지르기 위한 노력에 모든 주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다." "전통적인 송풍 방식에 기반을 둔 토법고로는 일부는 작동했을지 모르지만 다수가 철강 열풍에 사로잡힌 간부들이 인민공사에 강요해 만들어진 엉터리였다."(109-10) "결국 지도부는 그들이 원하는 기록을 얻었다. 비록 그 대부분은 광석을 제련한 후에 남은 찌꺼기거나 불순한 원광, 아니면 그저 통계적 발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114)


"공산주의로 가는 빛나는 길을 대중 동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더라도 중국이 농업 국가에서 산업 거국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공업 장비와 선진 기술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이 중국이 15년 안으로 영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던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베이징은 우방국들로부터 아낌없이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강소, 시멘트 가마, 유리 공장, 발전소, 정유 공장 등, 중공업을 위한 모든 장비와 설비를 구입했다."(127) "중국의 외화와 준비금은 한정되어 있었으므로 부채와 실제 수입액은 제한된 자원에 부담을 주면서 현물 수출로 갚아야 했다. 기본적 무역 패턴은 신용, 자본재, 원자재를 희소 광물, 제품, 식품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는 케이블과, 콩은 알루미늄과, 곡물은 압연강과 교환되었다. 안티몬, 주석, 텅스텐 같은 희금속의 양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베이징의 흥청망청 쇼핑은 청구서를 지불하기 위해 농촌에서 더 많은 식량을 뽑아내야 한다는 뜻이었다."(130-1)


"적자는 어떻게 메워야 할까? 1958년 11월 저우언라이가 처음으로 <외국과 체결한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안 먹거나, 덜 먹고 덜 소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천명했다. 몇 주 뒤 그는 <물건을 받고 답례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 방식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덩샤오핑도 거들었다. <만약 모두가 달걀 몇 알, 고기 1파운드, 기름 1파운드, 곡물 6킬로그램만 아낄 수 있다면 수출 문제 전체가 싹 사라질 것이다.>" "후베이 성은 1959년에 대량 아사와 싸우라고 베이징으로부터 곡물 20만 톤을 받은 반면 중국은 같은 해에 400만 톤 이상을 수출했다." "무역 문제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1959년 3~4월 상하이 당 모임에서 이 사안이 논의되었다. 마오쩌둥이 나서서 해법으로 채식을 권유했다." "이제 대담해진 저우언라이는 <육류 수출을 보장할 수 있도록 석 달 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류 외에 식용유 소비도 감축되었다."(137-8)


"수출이 현지의 필요를 제치고 반드시 보장되어야 했다. <우리는 덜 먹어야 한다.> 실질적 문제에 직면한 전시에는 단호하고 가차없는 접근이 정당화되었다. <먹을 게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인민 절반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나머지 절반은 굶어 죽게 둬야 한다.> 마오쩌둥의 말이 법이었다."(147) "마오쩌둥은 (1959년 7월에 열린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지적한) 펑더화이와 그의 지지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했고 그리하여 그들의 위상을 빼앗고 그들을 부르주아 계급으로 낙인찍었다. 8월 16일 협의회 폐회식에서 마오쩌둥의 반대파들이 당과 국가, 인민에 반하는 모의를 꾸몄다고 유죄를 인정하는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다음 몇 달 동안 <우경> 분자들에 대한 전국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질 것이었다."(161) "대약진 운동에 방해가 되었던 사람은 누구든 제거되었다."(164)


"1960년 봄 베이징은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자들과의 유화> 정책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흐루쇼프를 갈수록 독설에 찬 발언으로 규탄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을 이끄는 권리를 놓고 공공연하게 모스크바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격노한 소련 지도자는 소련 고문관을 전부 중국에서 철수시키는 것으로 보복했다." "이제 돈이 많이 드는 프로젝트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한 식량 수출을 덜 해도 되므로 중국 인민은 이러한 프로젝트 취소로 득을 봤어야 한다. 그러나 16년에 걸쳐 상환하도록 협정이 맺어져 있음에도 마오쩌둥은 일정을 앞당겨 정산해야 한다고 우겼다." "1960년 8월 5일, 소련 전문가들의 출국이 전부 완료되기도 전에 성장省長들은 국제 수지 적자가 20억 위안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나라는 수출을 충분히 하고 있지 않다는 경고를 전화를 통해 받았다. 2년 안으로 소련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이는 다시 곡물, 면화, 식용유 수출을 최대한 증대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했다."(170-1)


"중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발 도상국에 후한 원조와 값싼 차관으로 국제적 이미지를 가꾸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베이징이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외국 무상 원조를 늘린 한 가지 이유는 공산주의 미래로 가는 다리를 발견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요 고려사항은 모스크바와의 경쟁의식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흐루쇼프는 댐이나 대형 경기장 같은, 위신을 높이는 프로젝트에 원조를 아끼지 않음으로써 개도국들을 미국으로부터 소련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식으로 개도국의 충성을 놓고 경쟁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리더십을 놓고 그에게 도전하고 싶었다. 그는 개발 도상국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전제가 되는 크렘린의 <평화적 진화> 개념을 무시하고 그 대신 모스크바와의 결연한 경쟁 속에서 알제리와 카메룬, 케냐와 우간다 같은 나라들에서 공산 혁명가들을 원조하면서 전투적인 혁명 이론을 선동했다."(182)


"(1960년 자신의 고향 마을 탄쯔충을 시찰하면서 당이 인민에게 가한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류사오치는 (1961년 5월 31일 지도자 모임에서) 당의 전반적 정책은 대성공이라고 교조적으로 주장하면서 재앙의 규모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시도를 일축함과 동시에 마오쩌둥이 애호하는 경구가 틀렸음을 밝힘으로써 민감한 부위를 건드렸다." "류사오치는 마오쩌둥과 멀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자 참상이 어디서나 너무나 명백하여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신랄한 비판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류사오치는 문화 대혁명 동안 도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지만 당분간은 다른 지도자들이 조심스럽게 국무원장 쪽으로 기울면서 마오쩌둥으로부터 권력의 균형추를 아주 조금 가져왔다. 언제나 신중한 저우언라이는 루산 총회에 뒤이어 발생한 일부 오류를 인정한 다음 주석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 잘못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공개적으로 수용했다."(194-5)


# 농업

1. 곡물 징발 : (종자와 사료를 포함한) 최저생존량 이하의 곡물만 남겨 놓고 나머지를 국가에서 강제로 징발하면서, 농민들은 땅과 수확물에 대한 통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교환 화폐가 된 곡물을 얻기 위해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2. 할당량 : 지역의 조달 목표량은 지도부로 올라가면서 부풀려졌고, 수확량도 그에 걸맞게 부풀려졌다. 다시 증가된 조달 할당량이 부과되었고, 이는 30~37퍼센트에 이르는 곡물 징발을 강제했다. 국가가 식량 부족 사태와 기근을 초래했다.

3. 관료 계획 : 곡물 생산량에 목을 맨 간부들이 곡물 농사를 강제하거나 배게 심기, 깊이 갈기 등을 강요하면서 수확량은 오히려 감소했다. 여기에 곡물 수확량이 넘친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이 농지의 3분의 1을 휴경하라고 지시하면서 수확량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4. 저장과 운송 : 국가 저장은 그에 걸맞는 대규모 저장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벌레와 부패에 따른 곡물 손상을 초래했다. 여기에 수송능력 초과와 연료 부족으로 운송 체계가 마비되면서, 나라 전체에서 곡물이 철도 측선에서 썩어 나갔다.

5. 상업용 작물 : 국가가 경제적 비용 이하의 가격으로 면직물 상품 수출을 강제하면서 면화의 징발량은 82~90퍼센트에 달했다. 중국 전역에서 아사한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6. 가축 폐사 : 가금류는 대약진 기간 초반에 상당량이 도살되었지만, 점차 방치와 굶주림, 추위와 질병으로 폐사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모든 가축이 인민공사로 넘어가면서 농민들에겐 가축을 돌볼 동기가 전혀 없었다.


# 공업

1. 생산량 : 공장의 최고 목표가 생산량이 되면서, 기업체들은 위신이 서는 건물을 세우고, 각종 기계류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새로운 장비는 유지보수 실패로 망가졌고, 더 많은 생산량 추구는 날림으로 제조한 저질 상품들을 양산했다.

2. 노동환경 : 농촌인구 유입으로 노동자 수는 대폭 늘어났지만, 최신식으로 지어진 공장과 달리 노동자들의 의식주 환경에 대한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열악한 위생과 부족한 식사로 많은 노동자들이 만성 질환에 시달렸다.


# 상업

1. 상품의 실종 : 엉성한 서류 작업, 부정확한 회계, 읽기 힘든 재고 목록 등 분배 과정마다 부패와 관리 부실이 끼어들었고, 사라진 상품들은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장비와 연료 부족으로 운송 능력이 저하되면서 상품이 제때 분배되지도 못했다.

2. 시장의 실종 : 1949년 이전에는 외딴 지역에서 상인과 행상꾼들이 정기 시장을 만들거나 거리를 누볐고, 읍과 도시에서는 양품점과 가게, 백화점이 성황을 이뤘지만, 1949년 이후에 자유 교역이 계획 경제로 대체되면서 시장은 폐쇄되었다.


# 주거

1. 과시용 건물 : 주거 프로젝트에 배정된 대부분의 돈은 당원들을 제외하고 아무에게도 유형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위신 과시용 건물들(호텔, 박물관, 경기장, 대강당 등)과 관공서에 투입되었고, 해당 공간 마련을 위해 일반 가옥들이 철거되었다.

2. 철거 : 대저택, 종교시설, 역사적 기념비와 문화 유적들이 관리 부실과 용도 변경(작업장, 기숙사, 공동 식당 등)으로 마구 철거되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주택이 비료와 연료의 원천으로 쓰이면서 전체 가옥의 30~40퍼센트가 돌무더기로 변했다.


# 자연

1. 삼림 파괴 : 토법고로에 불을 때기 위해, 연료 부족을 메우기 위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철도와 도로를 내기 위해, 도시에서는 회사 시설을 세우기 위해 남벌이 횡행했다. 남부의 대나무 숲부터 북쪽의 고산 목초지와 소나무 숲까지 다양한 숲이 장기간 훼손되었다.

2. 자연 재해 : 잘못 구상된 관개 공사와 경작지의 확대는 자연적 배수 시스템을 파괴하여 자연재해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고, 토양을 염류화시켰다. 황허강과 화이강을 따라 진행된 치수 공사는 물과 함께 토사를 가두어 정상적인 강우량에도 큰 침수를 일으켰다.

3. 병충해 방제 : 쥐, 파리, 모기, 참새를 박멸한다는 명분으로 일시에 대중이 동원되었고, 깃털 달린 생물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곡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유해 조수에 지정된 참새가 격감하자 1958년 이후 충해가 확산되어 상당 비율의 작물을 망쳤다.


"평등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주였을지 몰라도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현실에 정교한 위계질서를 수립했다."(287) "기근이 진행되면서 특권 계층의 수가 불어났다. 지속적인 숙청에도 불구하고 당원 수는 1958년 1245만 명에서 1961년 1738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증가했다. 당원들은 어떻게 자신을 챙겨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기근 와중에도 실컷 먹는 한 가지 방법은 모든 것을 국가가 제공하는 잦은 당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었다."(289) "이따금씩 잔치가 벌어진 또 다른 이유는 징발과 인플레이션이 개인의 비축물을 급속히 잠식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축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 인민공사가 도래한다는 소문이 돌자 주민들은 앞다퉈 국영 상점에 가구를 파는 가운데, 베이징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보통은 한적한 일부 식당들이 1959년에 한창 성업 중인 것을 보았다. 가구를 팔아 얻은 수익은 식당에서 별미를 사먹는 데 쓰였다."(293)


"사회적 위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든 간에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사실상 모두가 공산당이 열심히 없애려고 한 그 이윤 동기를 십분 발휘하며 분배 시스템을 전복했다. 기근이 지속되면서 보통 사람의 생존은 점점 더 거짓말을 하고, 아첨을 하고, 감추고, 훔치고, 속이고, 좀도둑질을 하고, 열심히 뒤지고, 몰래 빼돌리고, 게으름을 피우고, 잔꾀를 부리고 조작하거나 다른 식으로 국가의 허점을 찌르는 능력에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홀로 경제를 헤쳐 나갈 수는 없었다. 문지기들의 국가에서 장애물은 어디에서나 있었다." "하찮은 권력은 하찮은 사람들을 타락시켰고,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하게 된, 공급이 딸리는 재화와 용역에 관해 자의적으로 변덕스러운 결정을 내리며 계획 경제의 하층부에서 급증했다. 그리고 명령 계통의 더 위쪽에서는 권력이 더 클수록 그 오남용도 더 위험스러워졌다. 가장 단순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도 개인적 인맥과 사회적 연줄이 필요했다."(295-6)


"국가를 속이는 또 다른 길은 배급 명단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죽은 사람 장사가 나라 전역에서 성행했다. 식량을 더 많이 배급받기 위해 가족의 죽음을 감추는 것처럼 간부들은 수시로 농민들의 숫자를 부풀려서 잉여분을 전용했다."(300) "계획 경제의 많은 역설 가운데 하나는 모두가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품귀와 인플레이션이 가격을 밀어 올릴 것이라는 쪽에 돈을 걸고 무더기로 구입함으로써 투기를 했다." "당원들은 투기사업에 뛰어들기에 좋은 입장이었고, 일부에게는 그것이 상시적인 활동이었다." "(각종 물품을 거래하고 사들이는) 관행은 예외적 행위라기보다는 <생활 방식>이었는데 노동자들이 <저금을 하는 것은 물자를 모으는 것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널리 믿었기 때문이다. 저금은 매달 몇 퍼센트씩 깎여 나갔다. 상하이에서는 물자 부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아직 가게에서 구할 수 있는 상품은 무엇이든 전부 줄을 서서 구입해 쟁여 놓았다."(302-4)


"일부 역사가들은 <국가>에 <농민>을 대적시키면서 암시장과 방해 행위, 태만, 절도를 <저항> 행위나 <약자의 무기>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생존 기술들이 <저항> 행위라면 당은 진즉에 붕괴했을 만큼 널리 만연해 있었다. 정권에 의해 조성된 아사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관습적인 도덕 규준을 무시하고 최대한 훔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절도는 고질적이었고 그 빈도는 필요와 기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훔칠 기회는 도시에서 가장 컸지만 훔쳐야 할 필요는 기근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농촌을 지배했다. 생산 사이클의 모든 단계마다 주민들은 국가의 요구로부터 곡물 일부를 지키고자 애썼다. 이것은 밭에서부터, 심지어 밀이나 옥수수가 완전히 여물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파랄 때 먹기>란 뜻의 츠칭이라는 전통적 관행을 연상시키듯 주민들은 의용군이 보지 않을 때 조용히 밭에서 이삭을 곧장 잘라내, 손수 겉겨를 벗겨 내고 빻은 다음 푸른 낟알을 생으로 먹었다."(313-4)


"역사상 다른 기근들에서처럼 아사 사태가 지속될 것이 분명해질 즈음이면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너무 허약해져 무기를 찾아 봉기를 조직하는 것은 고사하고 옆마을로 걸어갈 기운조차 없었다."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또 한 가지 이유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공고한 무언가가 공산당 지배에 대한 신빙성 있는 위협의 출현을 막았다. 대량 아사의 시기에 가장 흔한 자구책은 희망이라는 단순한 장치였다. 그리고 희망은 농촌 마을에서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오쩌둥은 진심으로 인민의 최상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가르쳤다. 제국 시대에 흔한 확신은 황제는 자애로우나 그 신하들은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패한 간부가 자애로운 주석의 명령은 수행하지 못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정부>라는 멀리 떨어진 존재와 <마오쩌둥>이라는 반신은 착한 편이었다. 그가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텐데······."(338-9)


"(대약진 운동을 진두지휘한) 모든 지도자들은 고된 전시 상황에 적응된 군부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극단적으로 곤궁한 여건 속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20년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말살 정책에 대응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당 자체를 뒤흔들며 주기적으로 벌어진 지독한 숙청과 한바탕 자행되는 고문의 시기를 견뎌냈다. 그들은 폭력을 찬미했고, 대량 인명 손실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공유했다. 1962년 자기 성의 주민 수백만 명을 잃은 리징취안은 대약진 운동을 열 명 중 한 명만이 살아남아 완수할 수 있었던 대장정에 비유했다. <우리는 약하지 않으며 더 강해졌다. 우리는 근간을 유지했다.>" "폭력은 단계적으로 증대되면서 처벌의 위협과 아사의 위협이 서로를 상쇄하는 순간 한계에 도달했다."(435-6)


"가용한 식량을 늘리는 편리한 방책은 약자와 병자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계획 경제는 이미 사람들을 대차대조표 위의 숫자들로, 석탄이나 곡물처럼 공공선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자원으로 환원했다. 국가가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식량은 흔히 무기로 이용되었다. 굶주림은 심지어 구타보다 더 먼저 동원되는 처벌 수단이었다." "한 농민이 설명했듯이 <솥에서 죽을 퍼내는 국자는 사람들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인터뷰 대상자들이 기억한 현상, 즉 공동 식당에서 음식을 퍼주는 사람이 <불순분자>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차별했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라 전역에서 너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수시로 배급이 끊겼다. 배급을 끊는 것은 몸이 아픈 것을 정권에 대한 반대로 해석하는 간부들이 쉽게 도달하는 결정이었다." "그것은 약자를 희생시켜 강자에게 보상하며 희소성을 관리하는 단순하고 효과적인 시스템이었다."(438-40)


"(1962년 7월 마오쩌둥과 독대한 자리에서) 류사오치는 천윈과 톈자잉, 대약진 운동을 가장 거침없이 비판해 왔던 두 명이 토지 분배에 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히길 원한다고 보고함으로써 말문을 열었다. 곧장 폭발한 마오쩌둥의 입에서 폭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류사오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대꾸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소!」 「역사는 당신과 나를 심판할 거요. 심지어 식인 행위도 역사책에 남게 될 거요!」" "두 사람은 곧 진정했고 마오쩌둥은 경제 조정 정책을 지속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주석은 이제 그 자신의 흐루쇼프, 다시 말해 주인 스탈린을 비난했던 하인을 찾아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류사오치가 분명히 자신의 모든 범죄 행위를 규탄하는 비밀 연설을 할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마오쩌둥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당과 나라를 산산조각 낼 문화 대혁명을 개시하기 위한 참을성 있는 기초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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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ㅣ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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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해방과 그 뒤를 잇는 혁명의 이야기는 평화나 자유, 정의와 무관하다. 다른 무엇보다, 계산된 공포와 조직적인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9)


1부 정복(1945~1949)


"만리장성 북쪽의 광활한 만주 벌판 중앙에 위치한 창춘은 1898년 철도가 들어서기 전까지 작은 교역 도시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이 운영한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 소유의 동청 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괴뢰 정부 만주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후에 마지막 황제로 알려지는 헨리 푸이를 만주의 통치자로 내세웠다. 일본인들은 넓은 도로와 나무 그늘을 조성하고 공공사업을 벌여 창춘을 방사상의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948년 4월,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창춘을 향해 진격했다. 황푸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 군대가 창춘을 포위했다. 린뱌오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전략가였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창춘의 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28-9)


"포위는 150일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1948년 10월 16일, 장제스가 정둥궈 장군에게 도시를 포기하고 선양으로 나아가는 남쪽 길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창춘에서 두 개의 부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하나는 아열대 지역인 윈난 성에서 파병되어 대다수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진 제60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훈련시킨 강인한 베테랑들이며 버마 전선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제7군이었다. 제7군은 명령받은 대로 용감하게 돌진했으나 포위를 뚫는 데는 실패했다. 반면에 제60군은 적에게 돌진하길 거부했다. 선양까지 그 먼 길을 행군만 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군인들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신 제7군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린뱌오에게 창춘을 넘겨주었다." "대략 16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공산당 군대에 포위된 채 굶어 죽었다. 인민 해방군 중위였던 장정룽은 봉쇄 작전에 대해 기록하면서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다>라고 썼다."(33-4)


# 전후 만주 일대를 둘러싼 정세 변화

1. 스탈린과 장제스의 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 : 미군을 중국과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고, 농촌에서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조약 진행

2.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평화 협상(충칭, 1945.8-10) : 마오쩌둥은 옌안으로 돌아와 ‘장제스의 영도 아래 모든 당파가 일치단결한다’는 충칭 성명이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고 설명

3. 소련 주도 하에 공산당 군대 무장 : 공산당은 내몽골과 만주의 여러 도시들에서 일본군이 남긴 무기와 퇴역군인, 괴뢰군, 비적 등을 포함한 잡다한 인원들을 긁어모아 50만 명의 군대 조직

4. 소련 철군(1946.4)과 트루먼의 중재 : 트루먼은 조지 마셜(마셜 플랜 설계자)을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립 정부를 세우도록 중재

5. 장제스의 만주 진격(1946.6)과 휴전 : 장제스는 공산당을 창춘에서 몰아내고 하얼빈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다시 조지 마셜이 개입하여 휴전 협정 선포를 종용(마셜은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척 하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기만술에 넘어감)


6. 공산당 군대 재정비 : 공산당이 휴전 후 일본군으로 복무하던 20만의 강병을 포함, 많은 군인들을 재모집하고 소련의 군사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키우는 동안 미국은 국민당에게 환멸을 느끼고 무기 공급 축소(트루먼의 무기 금수 조치, 1946.9)

▶ 인플레이션의 습격 : 세수(稅收)만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국민당이 돈을 마구 찍어내자 고정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부정과 착복, 비리가 성행하면서 반反국민당 정서 확산

7. 모스크바와 옌안의 효과적인 합작 : 만주에서 소모전을 벌여 국민당 정예군을 소진시키고, 만리장성 이남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국민당 점령 지역의 혼란을 극대화하는 전술 구사

8. 공산당의 공세 전환과 만주 점령 : 1947년 12월, 린뱌오가 이끄는 군대가 쑹화 강을 건너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산개되어 있는 정부군 격파. 1948년 2월 이후 창춘을 비롯한 선양 포위에 성공, 11월 1일 전투 종료


북부 전선이 무너진 순간부터 국민당의 붕괴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1949년 1월 14일, 공산당에서 평화를 위한 여덟 가지의 가혹한 제안을 제시했다. 2주 뒤 22년 동안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장제스가 물러났다." "하지만 너무나 늦고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했다. 인플레이션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국민당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까지 생겼다. 언론에 함구령을 내렸음에도 갈수록 도를 더해 가던 권력 남용 실태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터였다. 특히 비밀 요원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경찰이 동원했던 잔인한 방법들도 도시민의 상당수가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유능한 선전 간부들은 국민당 정부의 모든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공산당은 이미지 전쟁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에 관련된 환상을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60)


2부 장악(1949~1952)


"이전 정권 밑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은 예전의 일상적인 업무를 대체로 그대로 수행했다. 1945년 국민당 정권하에서 중국 경찰은 호적을 등록하고 관할권 내의 도시에서 신분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호적에는 가족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 공장 기숙사나 병원 내의 한 부서 등 어떠한 집단도 포함될 수 있었다. 새 정부는 앞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파시즘>이라고 비난받았던 호적 제도를 이제 그대로 넘겨받았고 새롭게 손을 보았다. 그에 따라 식량 배급표는 각 호구의 대표─가장이나 공장장, 절의 주지 등─에게 일임되었고 이제 그들 대표가 해당 호적 집단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를 보고할 책임을 졌다. 배급 제도와 호적 제도에 근거하여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각각의 경찰서에서 한 달에도 몇 번씩 배급표를 발행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서류 작업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부는 각각의 모든 호적 집단을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86)


"새 정부의 시각에서 볼 때 의심스러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한동안은 대체로 평온한 삶을 유지했다. 정권을 확립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는 새 정부에게 교수나 사무원, 은행원, 변호사, 경영자, 의사, 기술자 등 대다수 전문직 종사자들은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웃고 노래할 때는 끝났다. 그들은 모두 학교로 보내졌고 새로운 신념을 배워야 했다. 관공서와 공장, 작업장, 학교, 대학교 등 모든 곳에서 <재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배포된 팸플릿이나 잡지, 신문, 교과서를 탐독하면서 새로운 원칙을 배워 나갔다. <모든 사람이 올바른 대답과 올바른 생각, 올바른 구호를 배우고 있었다.> 이 작업은 시나오xinao, 즉 <세뇌> 라고 불렸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혁하도록 요구되었고 공산당에서 말하는 <신인민>이 되어야 했다." "(과거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죄를 시인할 경우 그 사람에 관한 모든 서류에 기록되었고 이 기록은 남은 여생 동안 그 사람을 따라다녔다."(89-90)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통제 아래 농촌 마을을 피로 물들였다. 공작대들은 곳곳에서 묵은 원한을 들추어냈고 분노를 부채질했으며 지역의 불만을 계급 간의 증오심으로 바꾸었다. 또한 시샘을 폭발시키도록 선동된 폭도들은 곳곳에서 전통적인 마을 지도자들의 재산을 제 것처럼 도용했다. 위안바오의 경우에는 초기에 땅과 피를 맞바꾼 마을 중 하나였지만 1947년과 1948년 사이에 모든 마을이 비슷한 의례를 거쳤다. 즉 마을 주민들이 계급으로 나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증오심으로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었으며, 희생자들은 모욕과 폭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때로 죽임을 당했으며 가해자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 1947년에 토지 개혁을 감독하도록 산시 성으로 보내진 캉성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공포 정치를 주도했다. "캉성은 <민중>에게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결정하고 그 사람에게 거의 무차별적인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124-5)


"한국 전쟁은 공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규합하고 불과 몇 개월 전 마오쩌둥이 묘사했던 적들을 거세게 밀어붙일 단초를 제공했다. 국민당 시절 전통적으로 국경일로 기념되던 10월 10일에 마오쩌둥으로부터 혁명을 방해하는 <국민당 잔존 세력들>과 <비밀 요원들>, <비적들>, 그 밖의 <반동분자들>을 소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앞으로 만 1년 동안 중국의 근간을 뒤흔들고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가르도록 강요하는 대大공포 정치가 토지 개혁과 병행하여 전개될 참이었다." "망상증은 자신의 그림자에도 놀랄 정도로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던 공산 정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공산당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실제나 가상의 적을 탓하는 버릇이 오랜 세월 몸에 배어 있었다. 우물이 독에 오염되거나 곡물 저장고가 화염으로 사라지는 등의 사건 뒤에는 언제나 스파이나 지주가 숨어 있었다. 평범한 농민들의 저항─실제로 많이 발생했다─은 반혁명의 증거로 간주되었다."(144-5)


"(마오쩌둥은) 공포 정치란 <안정적>이며 <정밀>하고 <무자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외과 수술에 준하는 정밀함으로 절대 마구잡이식 도살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실행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당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무자비함》이란 단어가 강조되어야 한다.> 뤄루이칭의 보고서를 정독한 그는 중국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성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것이다. 너무 조기에 숙청을 중단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마오쩌둥은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하들로 하여금 공포 정치를 수행하는 데 따른 지침과 관련하여 자신의 수많은 발언과 연설, 지시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부하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을 내놓도록 부추겼다. 부하들이 내놓은 제안 가운데 하나를 무심한 듯 골라서 채택하기도 했다."(148-9)


"이런 형태의 정부는 야심찬 부류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각하기에 마오 주석의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다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도록 만들었다." "토지 개혁과 관련해서 모든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실적을 비교하며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마을은 마을끼리, 현은 현끼리, 성은 성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너무 적게 죽이기보다는, 그래서 <우파>로 몰려 숙청되기보다는 차라리 너무 많이 죽이는 편을 택했다. 윈난 성의 일부 관리들은 마구잡이로 숙청을 실시했다. <어떤 지역들은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숙청되었는지만 보고 며칠 안에 서둘러서 체포와 숙청을 진행했다.> 일부 당원들은 자신이 무력해 보일까 봐 두려워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어떤 당 간부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여러분은 증오심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증오해야 한다.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죽여야 한다.> 할당량을 채우거나 초과하기 위해서 수천 명이 소리 없이 처형되었다."(153)


3부 통제(1952~1956)


"1942년 들어 마오쩌둥은 자칭 정풍 운동을 통해 라이벌을 한 명씩 제거하면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숙청 관련 역사의 선구자 가오화의 말에 따르면 숙청의 목적은 <폭력과 공포로 당 전체를 겁먹게 만들고,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를 뿌리 뽑고, 당 전체를 마오쩌둥이라는 최후 권력자 한 명에게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지극히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감독하며 이 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조율했지만 전면에는 자신의 심복인 캉성을 내세웠다." "1944년까지 1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작원이나 스파이로 몰렸고 정체가 탄로났다. 마오쩌둥은 공포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면서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거리를 두는, 인정 많은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얼마 뒤 폭력성을 제한하기 위해 그가 개입했고 캉성에게 그 동안의 책임을 돌렸다. 공포 정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정풍 운동은 향후 펼쳐질 수많은 운동의 표본이 되었다."(247-8)


"1952년 1월에 마오쩌둥이 자본가를 겨냥하여 단행한 오반 운동은 토지 개혁을 거치며 세부적인 조정을 통해 확립된 기술 덕을 톡톡히 보았다. 비판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영자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선동되었다. 노동조합들은 산하에 노동 여단을 결성했으며 각각의 회원들은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굳건히 버틸 것>을 약속하고 반反자본가 운동을 철저히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 과거에 당한 모욕을 기억나는 대로 모조리 들추어내라는 지방 간부의 선동에 직원들이 <쓴소리를 내뱉으면서> 전통적인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도 끝이 났다. 이제는 노동자가 주인이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사업장의 창문에는 전단지와 포스터가 도배되었고 한 무리의 시위대가 출입구를 봉쇄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쉽게 고발할 수 있도록 윗부분에 가느다란 틈이 나 있는 선홍색 고발 상자도 제공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는 대형 현수막이 펄럭였다. <타락한 죄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라.>"(262-3)


"1952년 봄 정부는 반反자본가 운동을 종료하려는 은밀한 시도에 돌입했다. 노동절을 기점으로 세금 부담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자산 재평가가 시행되었으며, 오반 운동 중 부과된 벌금이 삭감되었고, 휘청거리는 기업들에게 저리 대출이 제공되었다. 하지만 지원은 무조건적이지도, 모든 기업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정부는 어떤 기업을 살릴 것인지 선별해서 선택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민간 경제 부문에 대한 장악력이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대출에는 새로운 조건들이 붙었는데 그중 하나는 정부가 수익의 75퍼센트를 가져가고 남은 25퍼센트를 가지고 수익 배당과 보너스, 직원 월급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2년 3월에 이르러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정체의 늪에 빠졌다." "위로는 관리자부터 아래로는 말단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판 대회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산업 생산량이 곤두박질쳤으며 교역이 서서히 중단되었다."(269)


"집산화로 가는 길은 실제로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을 훨씬 덜 걸렸다. 꼭 가야 했던 길인 동시에 토지 개혁이 끝나자마자 선택에 의해 결정된 길이었다. 농민들이 일단 전부 비슷한 면적의 땅을 소지하고 나자 이번에는 가축과 농기구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한 구획씩 토지를 분배받은 여러 지역의 농민들은 몇몇 가구씩 쟁기질할 가축과 농기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주인들은 좀처럼 탐탁하지 않았다.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가축이나 농기구를 소중히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가 집산화의 첫 번째 단계였다. 농기구와 역축(役畜), 노동력을 공유하는 가구들은 <호조조(互助組)>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호조라는 말이 의미하듯 실제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거에도 농번기에는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했던 것이지 지방 간부의 비난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323-5)


농업 생산성 하락과 지방 당 간부들의 부패, 그리고 이에 기인하는 극심한 기아 등이 만연해도 "당은 이 모든 문제에 관한 해법을 갖고 있었다. 집산화로 가는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투기꾼과 사재기꾼, 부농과 자본가의 탓이었다. 앞서는 수년에 걸쳐 반혁명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회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들을 겨냥해서 조직적인 공포 정치를 실시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해법이었다. 1953년을 기점으로 호조조가 합작사(合作社)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농기구와 역축과 노동력은 이제 영구적으로 공유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 명목상의 소유권만 가졌다. 대신 자신의 토지를 출자함으로써 다른 여러 공동 출자자들과 함께 합작사에서 자신의 몫을 보장받았다." "집산화의 이 두 번째 단계도 자발적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에게 빌리는 대신 국가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나중에라도 갚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332-3)


"농촌에 가장 큰 피해를 준 변화는 1953년 말에 시행된 전매권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농민에게 모든 잉여 곡식을 국가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작사가 정한 가격으로 국가에 판매하도록 명령했다. 바야흐로 집단화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이 중대한 변화의 숨은 목적은 전국에서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투기를 근절하고, 도시 사람이 먹을 곡식을 확보함으로써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335) "농민들이 이 제도에 저항하고 반발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도부 내에서도 <황색 폭탄>으로 거론되었다."(338) "(곡물 가격을 높이는) 민간 상인은 기근의 책임을 전가하기에 만만한 희생양이었다. 정부가 곡물 전매권을 도입한 데는 훨씬 절박한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바로 파탄 지경에 이른 경제 현실이었다. 토지 개혁은 중국을 번영의 시대로 이끌지 못했다. 무역은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고 정부는 수입의 두 배가 넘는 지출 때문에 엄청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336)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길을 나섰다. 정부가 전매 제도를 실시한 이래로 많은 농민들이 그들의 행보로써 투표를 대신했다. 대대적인 농촌 탈출 행렬에 합류한 것이다."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막는 여러가지 방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1955년 6월 22일, 저우언라이가 1951년부터 도시에 적용되고 있던 호적 제도를 농촌에 확대 적용하는 명렁서에 서명했다." "농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1955년을 끝으로 주거와 이주의 자유가 막을 내렸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은 이제 망류(盲流) 또는 <맹목적인 이주자>로 불렸다. 무뢰한을 의미하는 <류망<流氓)>이라는 단어에서 글자의 순서가 바뀐 동음이의어였다. 호적 제도는 농부들을 땅과 하나로 묶어서 합작사들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로 집산화의 네 번째 단계였다. 이제 농부들은 명목상 땅의 주인일 뿐 농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348-50)


1956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상공업이 국유화되었다. "산업 전반을 국유화하기 위한 충격조들이 도시 곳곳에 파견되어 경영자들에게 기업을 내놓고 중화 전국 공상업 연합회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 대다수는 두려움에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에 더해서 공개적으로 광적인 열의를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기업가들은 전 재산을 국가에 넘긴 다음에는 그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당의 변덕에 의해 좌우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1952년에 정부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잔혹한 운동을 벌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다. 이번만큼은 모두가 기쁘게 동참하는 인상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 운동에서 희생자가 아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너무나 안심되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따라서 비록 선전부에서 주장하듯이 《사회주의로 편입된 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몇몇은 진짜로 기뻐했다.>"(372)


4부 반발(1956~1957)


"인민 공화국은 그들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다량의 통계 자료를 동원해서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신중국은 가장 최근의 석탄 채굴량과 곡물 생산량부터 해방 이후로 건설된 주택의 총면적까지 모든 것을 정량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따금씩 그 수치가 모호하기도 했지만 측정 대상이 무엇이든 늘 상승세를 나타냈다."(396) "현장의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역사적 대전환기를 살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또는 이제까지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더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록을 달성한 노동자나 적군의 총탄을 몸으로 막아 낸 군인 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되도록 부추겨졌다. 선전 기관은 본보기로 제시된 수많은 영웅적인 노동자와 농부, 군인 등을 끊임없이 미화했다."(399)


"전국적으로 주석의 방문은 물론이고 외국인 기자나 정치가, 고위 지도자, 학생 단체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무수히 많은 쇼가 행해졌다. 수많은 불교 사찰이 파괴되면서 소수의 불교 사찰에만 막대한 돈이 투자되었고 그 안에서는 어용 승려들이 신중국의 종교적 르네상스를 설파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된 시범 공장에서는 세심하게 선별된 노동자들이 계획 경제의 승리를 시현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았다. 모든 주요 도시에서 집산화에 따른 이점을 소개할 시범 농촌이 선발되었다. 사방에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입이 닳도록 당을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선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중국은 하나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일반인들은 어쩌면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훌륭한 배우였다."(400-1)


"1956년에는 수년 전 해방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존중하기는커녕 대차대조표 상의 단순한 숫자로, 위대한 목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자원으로 여겼다. 농민은 집산화라는 명목 아래 토지와 농기구와 가축을 잃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곡식을 국가에 넘겨야 했으며 아침이면 그들을 부르는 나팔소리에 달려 나가서 지방 간부들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도시의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정부에서 선전하듯이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 아니라 채무 노동자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유례없이 오랜 시간을 일하고 하나의 생산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강요받았으며 그럼에도 소득은 계속 줄어들었다. 공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이제 중국에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사회적 긴장이 정부를 향한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418-9)


흐루쇼프의 스탈릭 격하 연설이 공개된 후 "1956년 9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는 공산당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언급한 부분이 삭제되었고, 공동 지배 체제가 찬양되었으며, 개인 숭배가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흐루쇼프 때문에 사면초가에 몰린 마오쩌둥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태연한 척 지켜보는 것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대회를 앞두고 몇 달 동안은 그들에게 협조하기도 했다." "모스크바로부터 들려온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저우언라이와 천윈은 1956년 여름에 <성급한 진군>을 중단하도록 촉구하면서 집산화 속도를 늦추고자 했다. 그들은 집단 농장의 규모를 축소했고, 제한적인 자유 시장제를 재도입했으며, 민간 생산을 상당한 수준까지 허가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노력을 개인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마오쩌둥 개인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테지만 사회주의 고조는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폐기되었다."(422-3)


"(1956년 10월 고무우카는) 폴란드의 집단 농장이 개인 소유의 농장보다 생산량이 훨씬 적다고 폭로했다.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고무우카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논평이 진정한 폭탄선언이었다. 폴란드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상대로 수출할 때는 헐값에 팔고 수입할 때는 비싸게 사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이야말로 <제국주의 수탈>의 원흉인 듯 보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상황을 둘러싼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헝가리에서 폭동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중국인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극히 다양한 이유로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벌이거나 정부에 탄원했으며 인원수도 점점 늘어났다." "1957년 초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반기를 들었다." "상하이 밖에서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으로 모든 부문의 경제가 마비되었다."(425-6)


"1956년 4월 25일 마오쩌둥이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열 가지 중요한 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비스탈린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독립적으로 중국식 사회주의화를 도모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분별없이 모방하고 기계적으로 옮겨 적용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은 중공업에 치중한 낡은 스탈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고유한 사회주의 모델을 발전시켜야 했다." "중국만의 고유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본주의 국가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했다. 같은 맥락에서 스탈린이 남긴 유물의 모든 면을 거부한 흐루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비난을 받아야 했다. <북풍이 불면 그들은 북쪽에 선다. 내일 다시 서풍이 분다면 그들은 서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덧붙였다." "어느새 마오쩌둥은 보통 사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430-1)


"일주일 뒤인 5월 2일, 마오쩌둥은 당에 <백가지 꽃이 일시에 개화하고 백 가지 학문이 서로 논쟁하게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지식인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432) "헝가리 폭동을 계기로 마침내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가 찾아왔다. 11월 초 부다페스트에서 소련 군대가 반란자들을 진압하는 동안 마오 주석은 헝가리 공산당이 <대중과 이혼하고 스스로 귀족층>이 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폭발시켰으며 통제 불능 사태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원들을 상대로 정화 운동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정풍 운동이었고 스파이와 간첩을 색출한다며 당원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던 옌안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고위 간부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진정한 위험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나 학생이 아니라 당 내부에 존재하는 <독단주의>와 <관료주의>, <주관주의>라는 의견을 피력했다."(433-4)


"(많은 당원들이 대중적인 저항을 단속하는 쪽을 선호했지만) 마오 주석은 <소란을 겁내지 말라. 소란은 더 크고 더 오래 갈수록 더 낫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이 있은 지 거의 1년이 지난 1957년 2월 27일은 마오쩌둥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마오쩌둥이 최고 국무회의 확대 회의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날이었다. 마오쩌둥의 설명에 따르면 넉 달 전 헝가리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다수가 반혁명주의자가 아니었다. 잘못은 당에, 특히 관료주의에 물든 간부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정당한 관심을 정부의 적들이 가하는 악의적인 위협과 구분하지 못했다." "일반 대중은 불만을 제기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도록 도와야 했다.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한 사람들에게 어떤 보복도 가해지지 않을 터였다. 재차 주석의 극적인 요청이 이어졌다."(435-6)


"1957년 5월 15일, 마오쩌둥이 <상황이 변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우리는 당분간 우경 세력이 미친 듯이 날뛰도록 놔두어야 한다. 그들이 극에 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더욱 날뛸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물고기처럼 낚이는 신세가 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어떤 자들은 그들이 너무 깊이 현혹된 나머지 체포되고 제거될까 봐 겁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많은 물고기가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굳이 미끼로 유혹할 필요가 없다.> 마오쩌둥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마침내 6월 11일에 이르러 "꽃을 피우고 논쟁하는 시기는 끝났다. 마오쩌둥은 잠깐 후퇴하여 당 내부의 적들과 협력해야 했다. 그들도 사방에서 공격을 받자 주석의 그늘 밑에서 단결했다. 내내 의구심을 품고 있던 덩샤오핑과 펑전이 우경 세력을 쓸어버릴 포괄적인 정책을 요구했다. 주석은 덩샤오핑에게 반反우파 투쟁을 일임했고 곧 수십만 명이 표적이 되었다."(443-4)


"반우파 투쟁으로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우경 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평생을 당에 헌신했던 딩링 같은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 지도부로서는 마오쩌둥이 대중을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당 지도자들이 일치된 목소리를 냈으며 더 이상 주석의 정책에 섣불리 이의를 달지 못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한 저우언라이와 천윈의 신중한 관점도 배제되었다. 마오쩌둥은 사기가 충천했다. 해방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중국을 사회주의 진영의 선두로 나서게 만들 새롭고 과감한 실험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었다. 그는 이 실험을 대약진 운동이라고 불렀고 실험이 성공할 경우 중국은 집산화를 앞당겨서 누구나 풍족한 삶을 누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유토피아로서 날아오를 터였다. 향후 4년 동안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인재를 통해 수천만 명이 혹사를 당하거나 굶주리거나 죽도록 매질을 당할 참이었다."(4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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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정치.문화생활 이야기(개정판), 청년학술 52 ㅣ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청년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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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왕권의 약화와 외척의 권력 집중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세도정치는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 아니라 영·정조대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의 당파 결성이 여전했고 훈척勳戚 세력이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2. 조종祖宗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부여되는 묘호廟號로서, 생전의 행적을 평가하고 추존하는 뜻을 담는다. 통상 조는 창업을 하거나 공이 있는 왕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守成한 왕에게 붙이는 게 원칙이나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좌우되곤 했다.

3. 사도세자의 죽음은 흔히 그의 발작하는 정신병을 원인으로 간주하지만, 영조 즉위를 전후한 노/소론 대립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신임의리) 그리고 이 사태를 바라보는 세자의 어긋한 견해가 종묘사직의 안위와 맞물리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4. 세도정치기에는 핵심 가문들이 과점한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국왕의 견제조차 없이 국가의 정책을 사적 영역에서 결정하다시피 했는데, 이에 맞선 흥선대원군이 국왕의 생부라는 권위와 강력한 개혁 추진력을 바탕으로 실권을 거머쥐었다.

5.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역성혁명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조준을 필두삼아 토지·정치·지방제도를 개혁하고 창왕을 공양왕으로 교체했다. 이후에도 민심을 잃는 왕의 행위를 강조하고 자연재해를 왕조의 쇠락과 연결시켜 마침내 조선을 개창했다.


6.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집권층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요언혹중지설妖言惑衆之說’로 규정, 단속하고, 지방에서 향약을 재보급하여 정부와 지배층의 무능을 가리고 백성들을 단속하는 일에 몰두했다.

7. 왕의 동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간원이 자유로운 분위기인 반면, 관료들을 탄핵하여 기강을 세우는 사헌부는 관서 내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홍문관을 포함한 삼사는 계啓나 소疏, 경연에서의 발언을 통해 인사에 대한 이의나 정책을 제안했다.

8. 문반관료를 뽑는 문과는 초시나 복시를 막론하고 초장에서는 경학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여 사서오경 습득력을 평가하고, 중장에서는 문학시험인 부와 외교문서 문체인 표·전의 문장 능력을, 종장에서는 당면한 현안에 대한 의견 논술을 평가했다.

9. 백성들이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자기 고을의 수령과 관찰사, 사헌부의 처리를 거쳤다는 확인서가 있어야만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왕의 행차에 글을 올리는 상언과 왕이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만이 남았다.

10.『경국대전』은 정부 조직법에서 사회규범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데 <이전>은 관리 체계, <호전>은 토지와 조세 규정, <예전>은 의례와 풍속, <병전>은 군사 제도, <형전>은 형벌과 노비, <공전>은 토목과 도량형 관련 규정을 담고 있다.


11. 왜란 이후 환관 출신의 명 사신들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 뇌물을 요구했는데,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요구받은 선조나 차자次子로 즉위하여 명의 책봉 승인이 필요했던 광해군, 반정의 정당성을 갈구했던 인조 모두 여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2.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이전 지도가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적 지리관에 따라 외형보다 이념을 중시한 측면을 벗어났지만, 서구식 세계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구의 천문 지리 지식도 응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국토 인식에 열렬히 집중했다.

13. 조선 후기 지역 및 국제 교역의 확대와 도시의 성장(인구 밀집) 등이 야기한 역병은 종종 양대 전란보다 많은 목숨을 앗아가 도망과 유랑, 굶주림을 낳았고 산 자들은 여제(역신을 쫓는 제사)와 수륙제(극락왕생을 비는 불교 의식)로 슬픔을 달랬다.

14. 조선시대에 장치기라고 불리는 놀이는 타구打毬(방희, 골프 형태)와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기마격구騎馬擊毬(폴로 형태), 말을 타지 않고 골문에 골을 넣는 장구杖球(필드하키 형태)가 있었는데, 15세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즐겼다.

15. 사대부 출신 화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회화의 발달을 이끈 것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이었다. 화원들은 기록사진사 같은 역할을 하여 국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화, 지도 삽화, 의궤도(국가 공식 행사의 의례 과정) 등을 그렸다.


16. 전라도에서 유행하던 서사무가敍事巫歌를 개조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판소리는 점차 세련된 사설과 재미로 정형을 갖추었고, 지주·양반층까지 저변을 넓혀갔다. 상업도시를 기반 삼아 유행한 꼭두각시놀음과 탈놀이는 민중예술의 전형이다.

17. 남자 옷은 유행을 별로 타지 않았지만 점차 외투의 폭이 넓어지고 갓이 커지면서 유행을 나타냈고, 여자 옷은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풍성해졌으며, 치마 안팎에 노리개를 착용하여 멋을 냈다. 조선 후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가체가 유행했다.

18. 명종대에 문정왕후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 부흥을 주도한 보우普雨는 모든 유학자들에게 요승妖僧이라고 비난받았다. 불교 부흥책에 힘입어 봉은사와 봉선사가 선종과 교종의 중심 사찰로 선정(1550)되었고, 승과에서 여러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19. 동양의 우주론은 재이론災異論과 천원지방天圓地方 개념으로 대표되며, 조선은 송대 이후 강화된 중화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중화 조선’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지동설이라는 서양 우주론이 가져온 변혁은 중화 관념에 점차 균열을 가져왔다.

20.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는 주로 대형화포 위주였고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사격순간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명과 일본의 신형 화기를 접한 조선은 자체 제작과 개량에 힘을 쏟았고 기병 중심의 진법은 중무장 보병 중심으로 재정비했다.


21.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출판의 본산은 불교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 출판 사업은 유가 경전, 농서農書, 의학서 등에 편중되었다. 제지 기술도 고려시대에 이미 확립되었지만, 여전히 종이가 귀하여 한 번 사용한 종이는 대개 재생되었다.

22. 조선에서 융성한 성리학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집착하고 성리학적 가치관만을 주입하면서 여타의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 및 상공업의 발전으로 사회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성리학은 자기 본위적 논리에 자족할 뿐이었다.

23. 조선 왕조 내내 아악과 민요의 두 축으로 전개되던 음악 문화는 19세기 말 민요만 살아남아 민중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했다. 최초의 전국 민요 아리랑은 지역 특색과 서민 애환을 담아 널리 불리웠으며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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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사회.경제생활 이야기(개정판), 청년학술 51 ㅣ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청년사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가호를 기준으로 측정했는데, 이는 군역 같은 각종 역역자力役者를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왕이 덕정德政을 펼치면 호구가 늘어난다는 생각을 근거로 가호의 증감을 파악하는 이념적인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2. 조선왕조는 칠거지악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흠결을 이혼사유로 나열했으나 실상은 재혼을 금기시하는 정절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서 나쁜 병에 걸렸거나 간통을 한 경우,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3. 가짜 족보는 족보 편찬 과정에서 조작과 윤색을 하는 경우, 조선시대에 지방의 군현제도가 개편되면서 고려의 속현, 촌,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삼던 성씨가 사라진 경우, 천민층이 양인화하면서 기존의 유명 성씨를 채택하는 경우 등으로 생겼다.

4. 사족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는 조선 초 수령을 견제하고 향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다가, 성종대 이후 향약 보급과 함께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고 백성들에 대한 통제와 영향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5. 이황은 문묘 종사 운동과 더불어 늘어나는 서원을 독자적인 교육 기관으로 정착시켰는데, 그는 도학 실천의 주체를 사림士林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습속을 바로잡아 학문의 방향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서원은 붕당정치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6. 사족들의 지배력이 강고하던 시기에 광역의 리里 아래 존재하던 자연촌들이 18세기 후반 이후 독립된 마을로 분화하면서,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자작·소작 농민들의 일상 의례·공동 행사·공동 노역을 담당하는 두레 조직이 늘어났다.

7. 조선왕조는 조세 확대 차원에서 백정에게도 양인 신분을 부여했지만 이들은 강제로 특정 방坊 및 촌村에 거주했고, 사회적 멸시와 가혹한 통제에 시달렸다. 백정에는 도축업자, 유랑 재인才人, 회자수(망나니), 피혁 제조업자(갖바치) 등이 있다.

8. 흉년과 기근, 과중한 조세 부담, 수령의 탐학에 반발하여 일어난 임꺽정 무리는 재상, 관료, 양반층을 적으로 삼고 도사, 수령, 부장들을 서슴없이 처단하는 등 봉건국가의 권위에 정면도전하다가 국가 기틀을 뒤흔드는 반적으로 몰려 토벌당했다.

9.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보면 수령은 태형에 처할 만한 가벼운 범죄를, 장형 이상의 죄는 관찰사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국왕이 최종 집행권을 행사했다. 유배의 경우 신체형이 수반되는데, 사대부는 속전贖錢을 내고 이를 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10. 조선은 물물교환 경제 위주로 쌀과 삼베와 같은 물품화폐가 널리 통용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장시의 발달과 더불어 금속화폐가 서서히 보급되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구매력과 여전히 취약한 시장경제 그리고 동銅 생산 부진으로 한계가 뚜렷했다.


11. 조선 초기에는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다가 16세기 후반부터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앙법은 김매기 횟수를 줄여주었고, 수확량이 많았으며, 모내기 기간 동안 논에 비료를 주기도 수월했지만, 가뭄이 들면 농사를 그르칠 위험성이 높았다.

12. 시전 상인들이 대대로 독점권을 남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가운데 영·정조대에 이르러 서울로 상품이 들어오는 길목을 거점으로 상업을 하는 사상들이 시전의 독점권을 무너뜨렸지만(신해통공, 1791) 폭리를 취하는 행태는 사상들도 마찬가지였다.

13. 대다수 지방 농촌에는 시전과 같은 상설 점포가 없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리는 장시 역시 조선 초기에는 드물었다. 이 공백을 메운 행상(장돌뱅이)의 활발한 활동에 발맞춰 간선도로와 해로海路가 생겨나고(발견되고) 주막촌이 형성되었다.

14. 공식적으로 국경을 오가는 역관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의 후시後市 무역(사私무역)을 주도하고,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틈을 타 중계무역을 행하면서 큰 이익이 보았지만 청·일간 국교 재개(1687)로 사상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15. 중국과의 교역 확대로 은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을 중심으로 개발이 전개되고, 18세기 말에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민영 광업도 등장한다. 금맥을 찾아내고 작업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물주를 업고 혈주穴主나 덕대가 되어 직접 광산을 경영했다.


16. 조선 초기에는 개인의 염분 소유 및 소금의 생산·판매를 허용하는 대신 국가가 생산자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세종 말에는 흉년의 기민飢民 구제를 위해 전매제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소금 품귀 현상이 심해지자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7. 조세 제도는 양천제良賤制를 기반으로 삼았는데, 애초에 제외 대상인 천인층은 18세기까지도 30~35퍼센트에 달했다. 한정된 양인층에게 가급적 많은 세원을 징수하기 위해 직접세 외에 걷는 인두세와 가호세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18.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法宮은 경복궁이고, 경복궁에 대하여 이궁離宮으로 조성된 궁궐이 창덕궁이다. 창경궁은 상왕 태종이 머무르던 수강궁을 수리한 궁궐인데,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생활 기능을 보완하면서 하나의 궁역宮域을 이룬다.

19. 농민의 한해살이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절기에 맞춰 파종·제초·이앙 등의 농사일을 하면서 진행되었다. 조정은 춘분에서 추분에 이르는 시기를 농절農節이라고 하여 민간의 소송 사건처럼 농사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을 금하였다.

20. 조선시대에는 하루 두 끼가 일반적이어서 식사를 ‘조석朝夕’이라 했고, 점심은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켰다. 북부지역은 주식이 조였고, 남부지역은 대개 논농사를 지었기에 보리나 잡곡을 섞은 쌀밥을 주로 먹었다.


21. 조선시대의 술은 탁주濁酒·청주淸酒·소주燒酒로 나뉘는데, 탁주는 막걸리(마구 걸러낸 술)를 뜻하고, 청주는 술을 체로 거르지 않고 술독에 넣은 용수에 고인 맑은 술을 떠낸 것이며, 소주(불태운 술)는 증류기를 이용하여 ‘고아 내린’ 술을 말한다.

22. 담배가 전래된 17세기는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던 때로서 상놈이 양반 앞에서, 아이가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흡연 문화가 형성되고, 흡연 행위가 사회적 권위와 연결 지어지면서 담뱃대의 길이가 신분의 높낮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23. 양인남자는 원칙적으로 16~60세라는 긴 기간동안 군역의 의무(1년에 2~6개월)를 져야 했고, 종종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나 복장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또한 부대마다 신분에 따라 편제되어 차별을 받았고, 군정의 가혹한 수취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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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ㅣ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1장 정도전, 맹자의 혁명론을 읽다


"정도전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곤 줄곧 간신으로 남았다. 1398년 9월 12일 정종이 내린 교지에는 "불행하게도 간신 정도전·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고 해 정도전을 간신으로 규정하고 그의 처단을 정당화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고종 2년(1865)에 와서다. 경복궁을 지을 때 전각에 이름을 붙이는 등 경복궁 설계에 공이 있다는 것이 복권의 이유였다." "정몽주가 태종 때 충신으로 추대되고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 것에 비하면 정도전에 대한 조선왕조의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신숙주의 평가대로,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정도전이 만든 것으로 당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그에게 견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졸기」卒記에는 "무릇 임금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대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20)


"정도전이 제시한 혁명의 논리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전에게 역성혁명易姓革命론은 자신이 마련한 정치적 구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민심이 등을 돌리고 천명이 떠난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는 정도전 정치 철학의 대전제다. 그의 정치적 각본에서 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백성이었다."(29) 정도전의 혁명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어진 정치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정보위」正寶位 편에서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듯 임금도 백성을 낳고 기르는 정치, 즉 인정仁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에게 인이라는 것은 천지의 본질인 동시에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셈이다. 정도전의 혁명론이 주자학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인정, 즉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인은 단순히 인간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본질, 즉 천리이다."(31-2)


"『심기리편』에서 보듯 정도전의 철학 이론에서 최고 범주는 이理이다. 그의 철학에서 이는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그것이 구체화된 형태인 인간의 도덕규범이다. 인간은 바로 천리를 인식하고 천리를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해한 불교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떨쳐버리는 무념망정의 상태를 지향하며, 도교는 장생불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정도전에 따르면, 그러한 삶을 사는 존재는 거북과 뱀, 흙덩이와 나무토막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정도전은 천리를 실천하는 인간, 천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했다."(39) "정도전에게 조선왕조의 건국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왕씨에서 이씨로 왕을 교체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를 바꾸는 정치의 혁명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성혁명을 넘어 문화의 혁명이고 사상의 혁명이었다. 불교적 사유에서 주자학적 사유로의 전환, 바로 그것이 여말선초에 진행됐던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었다."(45)


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권근은 (정몽주를 평가하여) "한번 섬겼던 마음을 지키고 그 지조를 꺾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큰 절개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영웅 만들기의 극치는 역시 적의 신하를 충신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통이 주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송 태조가 추증했고, 문천상이 송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원 세조가 추증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54-5)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것은 중종 12년(1517)이었다. 하지만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61년 전인 세조 2년(1456)이었다. 최고의 충신이자 학자인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되는데 왜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법도 하지만, 문묘 종사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문묘에 종사된 사람은 최치원·설총·안향 등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58)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추진한 사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였다. 이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을 도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림파가 구사한 전략은 충절과 학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정몽주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규정하고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학문, 즉 도학이 정몽주에게서 기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정몽주에서 자신들로 이어지는 도학의 족보를 공인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권전이 정몽주를 지칭해 "학교를 세우고 교학을 베풀어 유술儒術을 크게 일으키고 이 도를 밝혀 후학을 깨우친 것은 동방에서 이 사람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요·순에서 시작되는 도통을 정몽주가 계승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단순히 훌륭한 도학자를 넘어 도통의 계승자가 된다."(62)


"사림들이 정몽주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의 충절만이 아니라 그가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祖]라는 점이었다. 고려 말 이색이 정몽주를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로 평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기록됨으로써 정몽주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이학, 즉 주자학의 효시를 인정받은 셈이다.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그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공식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학의 계보, 즉 도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시조라는 말은 계승·전통·계보 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더욱이 김굉필을 함께 종사하자는 주장을 감안하면, 그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통을 승인한 것이고, 나아가 정몽주의 후예이자 김굉필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조광조 및 그를 따르는 사림파에게 도통의 계승자임을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 즉 도학적 가치를 공인받으려는 내밀한 의도가 사림파에게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68)


3장 조광조, 조선 선비의 영원한 이상


# 중종 대의 정치적 쟁점을 다루는 조광조의 태도

1. 소릉昭陵(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호) 복위 문제 : "전날의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한 일"이라면서 정당화

2. 단종의 후사 문제 : "매우 아름다우면서 행하기도 어렵지 않다"는 말로 적극 찬성

3.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 :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크게 이치가 있다'면서 잘못된 주장이 아님을 인정

4. 정국공신 개정 문제 : 무리하게 공신에 포함된 자들의 위훈 삭제를 요구하여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


"조광조는 중종시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는 연산시대의 악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는 관점이다. "지금 세상에는 공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소인들은 조금이라도 불만의 뜻이 있으면 곧바로 국가에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일 조정에 조그만 변고가 있다면 그 세력은 반드시 벌떼같이 일어날 것입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봄에 풀이 싹트듯 인심이 비로소 스스로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라든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0여 년에 선비의 습성이 점점 교화되어서 지금은 서민들도 역시 예로써 상喪을 치르는 경우가 있습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103) "인간이 따라야 할 실천의 길, 즉 도라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따라서 정성[誠]을 다해 정치를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조광조 정치 철학의 근본이다."(106)


"조광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강직하게 쓰는 데 있다. 마음 씀이 진실로 강직하다면 선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광조가 정치적 사안을 두고 늘 왕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촉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렇게 되면 개혁이라는 것은 왕의 인격 수양과 이로 인한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왕과의 대립,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된다. 이념적인 왕은 이상 사회로 가는 길의 동반자이고 후원자이지만 현실의 왕은 그 길에서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인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훈구 세력과의 투쟁,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진행됐다. 소격서의 철폐가 그렇고 정국공신의 개정이 그렇다." "수차례에 걸친 개정 요구와 사직 압력 등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중종 14년 11월 11일 정국공신 개정이 확정되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11월 15일에 시작된 기묘사화였다."(119-20)


# 정국공신 개정 4일 후 기묘사화 발생, 다시 6일 후 정국공신 개정 취소


훈구와 사림 세력, 그리고 왕권이 이중 삼중으로 충돌하는 권력의 장에서 "임금의 도덕적 성취와 이것에 의한 도덕적 감화, 그리고 도덕적 사회의 건설은 그저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광조가 현실 정치에서 선택한 방법은 임금의 도덕적 성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고 소인을 퇴출시키거나 나아가 왕과의 투쟁도 불사하지 않았다. 왕이 투쟁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왕은 더 이상 개혁의 동반자가 아니라 적이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개혁의 방법은 군주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왕과의 투쟁이라는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투쟁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고, 교감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왕에 대한 의존을 포기하고 왕을 넘어서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림파 도학자들이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았던 반정이고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몽주, 길재로부터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그들의 존재 기반, 즉 도학의 정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123-4)


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 오현五賢이 확립된 이유

1. 기묘사화 이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로 조광조의 입지가 굳건해졌다.

2.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계보를 처음 언급한 이황의 권위가 높아졌다.

3. 이理에 대한 인식과 『소학』 실천을 기준으로 도학의 기준이 엄격해졌다.

4. 16세기 중반만 해도 불가나 도가 혹은 유교 내 다른 분파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았기에 도학의 이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했다.


"오현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문묘의) 대성전이 재건되던 선조 35년이었다. 이 해 8월 성균관 진사 최극겸 등이 두 차례에 걸쳐 오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날 사관은 "오현이 도학을 천명하여 중화[華]로써 오랑캐[夷]를 변화시켰으니, 공맹의 가르침[斯文]에 끼친 공이 크다. 따라서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무례한 일이 아니다"면서 오현의 문묘 종사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도학의 존재 여부로 중화와 오랑캐를 이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에 따르면 오현은 단순히 도학을 밝힌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야만을 문명으로 바꾼 인물들이다. 그래서 오현은 우리나라를 야만의 구렁텅이에서 문명 세계로 구출해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도학이냐 도학이 아니냐는 단순히 특정한 하나의 학문이나 사상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이냐 야만이냐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 셈이다."(145)


"광해군이 오현의 문묘 종사를 결정한 것은 정치적인 배경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창대군과 임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은 정통성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대북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하기는 했으나 사림 전체의 지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따라서 광해군은 사림들의 공론인 오현의 문묘 종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당시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북 세력을 일정하게 견제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오현에는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오현의 문묘 종사는 퇴계학파의 정치 세력인 남인들에게 정치적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하지만 주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로 구성된 북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현의 문묘 종사는 조식이 문묘 종사에서 배제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학통의 권위에 손상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한쪽 날개가 꺾이는 조치였다. 157)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황은 이단에 대해 자극적인 소리나 미색처럼 여거서 그것을 엄하게 끊어버리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학자는 다만 마땅히 성현의 책을 읽어서 그것을 알고 깊이 믿는 것이지 이단의 문자는 전혀 알지 못해도 관계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단을 물리치려는 이황의 노력은 오래지 않아 장유張維가 우리나라에는 주자학만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다양성과 경쟁이 사라진, 단일하고 순수한 학문과 이념에 대한 집착은 파멸적이다. 더욱이 단일성과 순수성에 대한 고집은 자신의 기원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와 결합되는 퇴행성을 띠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과 진지한 자기 성찰이 동반되지 않은 학문은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생명력마저 갉아먹고 퇴락하게 된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교조화된 주자주의에서 그 퇴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170-2)


5장 조식, 이황의 마지막 라이벌


"이황은 조식曺植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학문과 실천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이황은 명종 13년(1558)에 제자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운成運과 조식의 학문에 대해 "노장이 빌미가 되어 우리 학문에 힘씀이 깊지 않았고, 그 결과 의리義理를 꿰뚫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성운의 삶을 '청은'淸隱으로 규정한 것도 이 편지에서다. '청은'은 글자 그대로 맑은 은둔인데, 그 속뜻은 엄격하고 철저한 은둔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은둔이 지나쳐 현실을 완전히 저버리고 노장의 경지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성운과 조식을 가리켜 "의리를 꿰뚫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의리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관통하는 천리이자 두 세계 전체를 규율하는 질서를 뜻한다. 이황이 위 언급에서 의도했던 것은 자연에 은거하더라도 천리를 깨닫고 실천하려는 도학적 삶의 태도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식과 성운은 한 번도 관직에 나간 적이 없는 산림처사, 즉 재야의 선비라는 공통점이 있다."(175-6)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오현이 문묘에 종사된 지 여섯 달 쯤 지난 광해군 3년(1611)에 차자箚子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출처가 오히려 중도를 잃은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특히 이황에 대해서는 "과거로 벼슬길에 나와 완전히 나아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비웃으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정인홍은 더욱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아주 높은 벼슬을 했고, 혹은 청요직淸要職을 맡았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을사사화 때 이언적은 좌찬성이었고 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황은 홍문관 응교였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당연히 물러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의 출사 원칙에 비춰보면, 간신과 외척의 전횡으로 뜻있는 선비들이 죽어가던 시기에 주요 관직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인홍은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178-9)


"하지만 정인홍의 이언적·이황 비판은 오히려 반대 세력의 결속을 강화시킴으로써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유폐라는 강경책으로 일관한) 북인 정권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해군은 조식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받을 때마다 '후일을 기다리자'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의논해야 한다'와 같은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이다." "광해군이 비록 대북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고 국정을 운영했지만, 기반은 기반에서 멈춰야 하는 것이 정치의 철칙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북 세력은 왕권을 떠받치는 기반이 아니라 왕권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광해군으로서는 대북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는 것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조식의 문묘 종사를 극구 저지했던 것은 살아 있는 권력인 대북 세력에게 성현의 후예라는 권위까지 주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188-9)


6장 이이·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들이 반정의 타도 대상을 정인홍·이이첨의 대북 일파로 한정시킴으로써 얻은 효과는 대북 세력과 대북 이외의 세력 사이의 대립 구도를 만든 것이었다." 서인들은 남인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일부 북인 인사들을 등용하기는 했지만 "애써 잡은 권력을 다른 정파와 나누어 가진다거나 권력 자체를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인조반정 직후에 공신들이 국혼國婚을 놓치지 않고 산림山林, 즉 신망이 높은 재야 선비를 우대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국혼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당파에서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겠다는 것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결탁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산림을 우대하겠다는 것은 학문과 신망이 높은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사림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이었다."(215-6)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면 선비들이 만족할 것이라고 했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는 문묘 종사를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것은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인조는 권력이 서인들에게 집중된다는 사실과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18-9)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숙종 8년(1682) 5월 20일이었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논의가 일찍부터 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와 같이 논의되고, 결국 이들의 문묘 종사가 문묘의 개정 작업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송나라 3현과 함께 논의함으로써 문묘 종사의 초점을 흐리고, 결과적으로 남인들의 반발을 완화할 전략일 수 있다. 둘째는 이이와 성혼의 지위를 송나라 3현과 마찬가지로 도의 전승이라는 맥락에서 평가하겠다는 전략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는 사태를 겪은 후)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기에 이르렀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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