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방의 비극 - 중국 혁명의 역사 1945~1957 ㅣ 인민 3부작 1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8월
평점 :
"중국의 해방과 그 뒤를 잇는 혁명의 이야기는 평화나 자유, 정의와 무관하다. 다른 무엇보다, 계산된 공포와 조직적인 폭력의 역사를 보여준다."(9)
1부 정복(1945~1949)
"만리장성 북쪽의 광활한 만주 벌판 중앙에 위치한 창춘은 1898년 철도가 들어서기 전까지 작은 교역 도시에 불과했다. 이후 일본이 운영한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 소유의 동청 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1932년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괴뢰 정부 만주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후에 마지막 황제로 알려지는 헨리 푸이를 만주의 통치자로 내세웠다. 일본인들은 넓은 도로와 나무 그늘을 조성하고 공공사업을 벌여 창춘을 방사상의 근대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1948년 4월,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창춘을 향해 진격했다. 황푸 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왜소한 체격의 남자 린뱌오가 지휘하는 공산당 군대가 창춘을 포위했다. 린뱌오는 최고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여겨졌으며 탁월한 전략가였다. 아울러 무자비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창춘의 방어군 지휘관 정둥궈에게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도시를 굶겨서 항복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28-9)
"포위는 150일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1948년 10월 16일, 장제스가 정둥궈 장군에게 도시를 포기하고 선양으로 나아가는 남쪽 길을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창춘에서 두 개의 부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하나는 아열대 지역인 윈난 성에서 파병되어 대다수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진 제60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 훈련시킨 강인한 베테랑들이며 버마 전선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 제7군이었다. 제7군은 명령받은 대로 용감하게 돌진했으나 포위를 뚫는 데는 실패했다. 반면에 제60군은 적에게 돌진하길 거부했다. 선양까지 그 먼 길을 행군만 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군인들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신 제7군에게 총구를 겨누었고 린뱌오에게 창춘을 넘겨주었다." "대략 16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공산당 군대에 포위된 채 굶어 죽었다. 인민 해방군 중위였던 장정룽은 봉쇄 작전에 대해 기록하면서 <창춘은 마치 히로시마 같았다>라고 썼다."(33-4)
# 전후 만주 일대를 둘러싼 정세 변화
1. 스탈린과 장제스의 중소 우호 동맹 조약(1945.8) : 미군을 중국과 한반도에서 철수시키고, 농촌에서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조약 진행
2.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평화 협상(충칭, 1945.8-10) : 마오쩌둥은 옌안으로 돌아와 ‘장제스의 영도 아래 모든 당파가 일치단결한다’는 충칭 성명이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고 설명
3. 소련 주도 하에 공산당 군대 무장 : 공산당은 내몽골과 만주의 여러 도시들에서 일본군이 남긴 무기와 퇴역군인, 괴뢰군, 비적 등을 포함한 잡다한 인원들을 긁어모아 50만 명의 군대 조직
4. 소련 철군(1946.4)과 트루먼의 중재 : 트루먼은 조지 마셜(마셜 플랜 설계자)을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립 정부를 세우도록 중재
5. 장제스의 만주 진격(1946.6)과 휴전 : 장제스는 공산당을 창춘에서 몰아내고 하얼빈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다시 조지 마셜이 개입하여 휴전 협정 선포를 종용(마셜은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척 하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기만술에 넘어감)
6. 공산당 군대 재정비 : 공산당이 휴전 후 일본군으로 복무하던 20만의 강병을 포함, 많은 군인들을 재모집하고 소련의 군사 고문들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키우는 동안 미국은 국민당에게 환멸을 느끼고 무기 공급 축소(트루먼의 무기 금수 조치, 1946.9)
▶ 인플레이션의 습격 : 세수(稅收)만으로 전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국민당이 돈을 마구 찍어내자 고정 수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다양한 형태의 부정과 착복, 비리가 성행하면서 반反국민당 정서 확산
7. 모스크바와 옌안의 효과적인 합작 : 만주에서 소모전을 벌여 국민당 정예군을 소진시키고, 만리장성 이남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여 국민당 점령 지역의 혼란을 극대화하는 전술 구사
8. 공산당의 공세 전환과 만주 점령 : 1947년 12월, 린뱌오가 이끄는 군대가 쑹화 강을 건너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산개되어 있는 정부군 격파. 1948년 2월 이후 창춘을 비롯한 선양 포위에 성공, 11월 1일 전투 종료
북부 전선이 무너진 순간부터 국민당의 붕괴는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1949년 1월 14일, 공산당에서 평화를 위한 여덟 가지의 가혹한 제안을 제시했다. 2주 뒤 22년 동안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장제스가 물러났다." "하지만 너무나 늦고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했다. 인플레이션과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국민당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까지 생겼다. 언론에 함구령을 내렸음에도 갈수록 도를 더해 가던 권력 남용 실태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터였다. 특히 비밀 요원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경찰이 동원했던 잔인한 방법들도 도시민의 상당수가 등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유능한 선전 간부들은 국민당 정부의 모든 약점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공산당은 이미지 전쟁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에 관련된 환상을 심어 주는 데 성공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60)
2부 장악(1949~1952)
"이전 정권 밑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은 예전의 일상적인 업무를 대체로 그대로 수행했다. 1945년 국민당 정권하에서 중국 경찰은 호적을 등록하고 관할권 내의 도시에서 신분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호적에는 가족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 공장 기숙사나 병원 내의 한 부서 등 어떠한 집단도 포함될 수 있었다. 새 정부는 앞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파시즘>이라고 비난받았던 호적 제도를 이제 그대로 넘겨받았고 새롭게 손을 보았다. 그에 따라 식량 배급표는 각 호구의 대표─가장이나 공장장, 절의 주지 등─에게 일임되었고 이제 그들 대표가 해당 호적 집단에서 발생하는 모든 변화를 보고할 책임을 졌다. 배급 제도와 호적 제도에 근거하여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각각의 경찰서에서 한 달에도 몇 번씩 배급표를 발행해야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서류 작업을 동반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부는 각각의 모든 호적 집단을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86)
"새 정부의 시각에서 볼 때 의심스러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한동안은 대체로 평온한 삶을 유지했다. 정권을 확립하고 경제를 부양하려는 새 정부에게 교수나 사무원, 은행원, 변호사, 경영자, 의사, 기술자 등 대다수 전문직 종사자들은 너무나 소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웃고 노래할 때는 끝났다. 그들은 모두 학교로 보내졌고 새로운 신념을 배워야 했다. 관공서와 공장, 작업장, 학교, 대학교 등 모든 곳에서 <재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배포된 팸플릿이나 잡지, 신문, 교과서를 탐독하면서 새로운 원칙을 배워 나갔다. <모든 사람이 올바른 대답과 올바른 생각, 올바른 구호를 배우고 있었다.> 이 작업은 시나오xinao, 즉 <세뇌> 라고 불렸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혁하도록 요구되었고 공산당에서 말하는 <신인민>이 되어야 했다." "(과거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죄를 시인할 경우 그 사람에 관한 모든 서류에 기록되었고 이 기록은 남은 여생 동안 그 사람을 따라다녔다."(89-90)
"토지개혁은 공산당의 통제 아래 농촌 마을을 피로 물들였다. 공작대들은 곳곳에서 묵은 원한을 들추어냈고 분노를 부채질했으며 지역의 불만을 계급 간의 증오심으로 바꾸었다. 또한 시샘을 폭발시키도록 선동된 폭도들은 곳곳에서 전통적인 마을 지도자들의 재산을 제 것처럼 도용했다. 위안바오의 경우에는 초기에 땅과 피를 맞바꾼 마을 중 하나였지만 1947년과 1948년 사이에 모든 마을이 비슷한 의례를 거쳤다. 즉 마을 주민들이 계급으로 나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증오심으로 극도의 흥분 상태가 되었으며, 희생자들은 모욕과 폭행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때로 죽임을 당했으며 가해자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가졌다." 1947년에 토지 개혁을 감독하도록 산시 성으로 보내진 캉성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공포 정치를 주도했다. "캉성은 <민중>에게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결정하고 그 사람에게 거의 무차별적인 울분을 발산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124-5)
"한국 전쟁은 공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규합하고 불과 몇 개월 전 마오쩌둥이 묘사했던 적들을 거세게 밀어붙일 단초를 제공했다. 국민당 시절 전통적으로 국경일로 기념되던 10월 10일에 마오쩌둥으로부터 혁명을 방해하는 <국민당 잔존 세력들>과 <비밀 요원들>, <비적들>, 그 밖의 <반동분자들>을 소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앞으로 만 1년 동안 중국의 근간을 뒤흔들고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하여금 편을 가르도록 강요하는 대大공포 정치가 토지 개혁과 병행하여 전개될 참이었다." "망상증은 자신의 그림자에도 놀랄 정도로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던 공산 정권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공산당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실제나 가상의 적을 탓하는 버릇이 오랜 세월 몸에 배어 있었다. 우물이 독에 오염되거나 곡물 저장고가 화염으로 사라지는 등의 사건 뒤에는 언제나 스파이나 지주가 숨어 있었다. 평범한 농민들의 저항─실제로 많이 발생했다─은 반혁명의 증거로 간주되었다."(144-5)
"(마오쩌둥은) 공포 정치란 <안정적>이며 <정밀>하고 <무자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외과 수술에 준하는 정밀함으로 절대 마구잡이식 도살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실행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당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무자비함》이란 단어가 강조되어야 한다.> 뤄루이칭의 보고서를 정독한 그는 중국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성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것이다. 너무 조기에 숙청을 중단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마오쩌둥은 일부러 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부하들로 하여금 공포 정치를 수행하는 데 따른 지침과 관련하여 자신의 수많은 발언과 연설, 지시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도록 유도했다. 아울러 부하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을 내놓도록 부추겼다. 부하들이 내놓은 제안 가운데 하나를 무심한 듯 골라서 채택하기도 했다."(148-9)
"이런 형태의 정부는 야심찬 부류들로 하여금 그들이 생각하기에 마오 주석의 진정한 의도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다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도록 만들었다." "토지 개혁과 관련해서 모든 지도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실적을 비교하며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마을은 마을끼리, 현은 현끼리, 성은 성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너무 적게 죽이기보다는, 그래서 <우파>로 몰려 숙청되기보다는 차라리 너무 많이 죽이는 편을 택했다. 윈난 성의 일부 관리들은 마구잡이로 숙청을 실시했다. <어떤 지역들은 다른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체포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숙청되었는지만 보고 며칠 안에 서둘러서 체포와 숙청을 진행했다.> 일부 당원들은 자신이 무력해 보일까 봐 두려워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어떤 당 간부는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여러분은 증오심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증오해야 한다.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죽여야 한다.> 할당량을 채우거나 초과하기 위해서 수천 명이 소리 없이 처형되었다."(153)
3부 통제(1952~1956)
"1942년 들어 마오쩌둥은 자칭 정풍 운동을 통해 라이벌을 한 명씩 제거하면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돌입했다. 숙청 관련 역사의 선구자 가오화의 말에 따르면 숙청의 목적은 <폭력과 공포로 당 전체를 겁먹게 만들고, 개인의 독립적인 사고를 뿌리 뽑고, 당 전체를 마오쩌둥이라는 최후 권력자 한 명에게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지극히 세부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감독하며 이 운동의 전 과정을 직접 조율했지만 전면에는 자신의 심복인 캉성을 내세웠다." "1944년까지 1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작원이나 스파이로 몰렸고 정체가 탄로났다. 마오쩌둥은 공포가 날뛰도록 내버려 두면서 자신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거리를 두는, 인정 많은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얼마 뒤 폭력성을 제한하기 위해 그가 개입했고 캉성에게 그 동안의 책임을 돌렸다. 공포 정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다. 정풍 운동은 향후 펼쳐질 수많은 운동의 표본이 되었다."(247-8)
"1952년 1월에 마오쩌둥이 자본가를 겨냥하여 단행한 오반 운동은 토지 개혁을 거치며 세부적인 조정을 통해 확립된 기술 덕을 톡톡히 보았다. 비판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경영자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선동되었다. 노동조합들은 산하에 노동 여단을 결성했으며 각각의 회원들은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굳건히 버틸 것>을 약속하고 반反자본가 운동을 철저히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 과거에 당한 모욕을 기억나는 대로 모조리 들추어내라는 지방 간부의 선동에 직원들이 <쓴소리를 내뱉으면서> 전통적인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도 끝이 났다. 이제는 노동자가 주인이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사업장의 창문에는 전단지와 포스터가 도배되었고 한 무리의 시위대가 출입구를 봉쇄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쉽게 고발할 수 있도록 윗부분에 가느다란 틈이 나 있는 선홍색 고발 상자도 제공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는 대형 현수막이 펄럭였다. <타락한 죄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라.>"(262-3)
"1952년 봄 정부는 반反자본가 운동을 종료하려는 은밀한 시도에 돌입했다. 노동절을 기점으로 세금 부담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자산 재평가가 시행되었으며, 오반 운동 중 부과된 벌금이 삭감되었고, 휘청거리는 기업들에게 저리 대출이 제공되었다. 하지만 지원은 무조건적이지도, 모든 기업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정부는 어떤 기업을 살릴 것인지 선별해서 선택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민간 경제 부문에 대한 장악력이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대출에는 새로운 조건들이 붙었는데 그중 하나는 정부가 수익의 75퍼센트를 가져가고 남은 25퍼센트를 가지고 수익 배당과 보너스, 직원 월급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52년 3월에 이르러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정체의 늪에 빠졌다." "위로는 관리자부터 아래로는 말단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비판 대회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산업 생산량이 곤두박질쳤으며 교역이 서서히 중단되었다."(269)
"집산화로 가는 길은 실제로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을 훨씬 덜 걸렸다. 꼭 가야 했던 길인 동시에 토지 개혁이 끝나자마자 선택에 의해 결정된 길이었다. 농민들이 일단 전부 비슷한 면적의 땅을 소지하고 나자 이번에는 가축과 농기구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한 구획씩 토지를 분배받은 여러 지역의 농민들은 몇몇 가구씩 쟁기질할 가축과 농기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주인들은 좀처럼 탐탁하지 않았다.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가축이나 농기구를 소중히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가 집산화의 첫 번째 단계였다. 농기구와 역축(役畜), 노동력을 공유하는 가구들은 <호조조(互助組)>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호조라는 말이 의미하듯 실제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거에도 농번기에는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했던 것이지 지방 간부의 비난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323-5)
농업 생산성 하락과 지방 당 간부들의 부패, 그리고 이에 기인하는 극심한 기아 등이 만연해도 "당은 이 모든 문제에 관한 해법을 갖고 있었다. 집산화로 가는 길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투기꾼과 사재기꾼, 부농과 자본가의 탓이었다. 앞서는 수년에 걸쳐 반혁명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회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들을 겨냥해서 조직적인 공포 정치를 실시했던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해법이었다. 1953년을 기점으로 호조조가 합작사(合作社)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농기구와 역축과 노동력은 이제 영구적으로 공유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 명목상의 소유권만 가졌다. 대신 자신의 토지를 출자함으로써 다른 여러 공동 출자자들과 함께 합작사에서 자신의 몫을 보장받았다." "집산화의 이 두 번째 단계도 자발적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에게 빌리는 대신 국가에게 의지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나중에라도 갚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332-3)
"농촌에 가장 큰 피해를 준 변화는 1953년 말에 시행된 전매권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농민에게 모든 잉여 곡식을 국가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작사가 정한 가격으로 국가에 판매하도록 명령했다. 바야흐로 집단화의 세 번째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이 중대한 변화의 숨은 목적은 전국에서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투기를 근절하고, 도시 사람이 먹을 곡식을 확보함으로써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335) "농민들이 이 제도에 저항하고 반발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지도부 내에서도 <황색 폭탄>으로 거론되었다."(338) "(곡물 가격을 높이는) 민간 상인은 기근의 책임을 전가하기에 만만한 희생양이었다. 정부가 곡물 전매권을 도입한 데는 훨씬 절박한 다른 이유가 존재했다. 바로 파탄 지경에 이른 경제 현실이었다. 토지 개혁은 중국을 번영의 시대로 이끌지 못했다. 무역은 극심한 곤경에 처해 있었고 정부는 수입의 두 배가 넘는 지출 때문에 엄청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336)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길을 나섰다. 정부가 전매 제도를 실시한 이래로 많은 농민들이 그들의 행보로써 투표를 대신했다. 대대적인 농촌 탈출 행렬에 합류한 것이다."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을 막는 여러가지 방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1955년 6월 22일, 저우언라이가 1951년부터 도시에 적용되고 있던 호적 제도를 농촌에 확대 적용하는 명렁서에 서명했다." "농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1955년을 끝으로 주거와 이주의 자유가 막을 내렸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들은 이제 망류(盲流) 또는 <맹목적인 이주자>로 불렸다. 무뢰한을 의미하는 <류망<流氓)>이라는 단어에서 글자의 순서가 바뀐 동음이의어였다. 호적 제도는 농부들을 땅과 하나로 묶어서 합작사들이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로 집산화의 네 번째 단계였다. 이제 농부들은 명목상 땅의 주인일 뿐 농노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348-50)
1956년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상공업이 국유화되었다. "산업 전반을 국유화하기 위한 충격조들이 도시 곳곳에 파견되어 경영자들에게 기업을 내놓고 중화 전국 공상업 연합회에 가입하도록 강요했다. 대다수는 두려움에 그대로 따랐는데 여기에 더해서 공개적으로 광적인 열의를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기업가들은 전 재산을 국가에 넘긴 다음에는 그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 당의 변덕에 의해 좌우될 거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1952년에 정부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잔혹한 운동을 벌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다. 이번만큼은 모두가 기쁘게 동참하는 인상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이 운동에서 희생자가 아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너무나 안심되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따라서 비록 선전부에서 주장하듯이 《사회주의로 편입된 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몇몇은 진짜로 기뻐했다.>"(372)
4부 반발(1956~1957)
"인민 공화국은 그들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다. 다량의 통계 자료를 동원해서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신중국은 가장 최근의 석탄 채굴량과 곡물 생산량부터 해방 이후로 건설된 주택의 총면적까지 모든 것을 정량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따금씩 그 수치가 모호하기도 했지만 측정 대상이 무엇이든 늘 상승세를 나타냈다."(396) "현장의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가 수많은 추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그들에게 자신이 역사적 대전환기를 살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또는 이제까지 일어났던 어떤 일보다 더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신기록을 달성한 노동자나 적군의 총탄을 몸으로 막아 낸 군인 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되도록 부추겨졌다. 선전 기관은 본보기로 제시된 수많은 영웅적인 노동자와 농부, 군인 등을 끊임없이 미화했다."(399)
"전국적으로 주석의 방문은 물론이고 외국인 기자나 정치가, 고위 지도자, 학생 단체의 방문이 있을 때마다 무수히 많은 쇼가 행해졌다. 수많은 불교 사찰이 파괴되면서 소수의 불교 사찰에만 막대한 돈이 투자되었고 그 안에서는 어용 승려들이 신중국의 종교적 르네상스를 설파했다. 최신 기술이 적용된 시범 공장에서는 세심하게 선별된 노동자들이 계획 경제의 승리를 시현하기 위해서 교육을 받았다. 모든 주요 도시에서 집산화에 따른 이점을 소개할 시범 농촌이 선발되었다. 사방에서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고 열정적이었으며 입이 닳도록 당을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그 실체는 선전 속 모습과 전혀 달랐다. 중국은 하나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래로 무수히 많은 시간의 학습 모임을 통해 당의 방침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고, 올바른 대답을 내놓고, 동조하는 척하는 방법을 배운 터였다. 일반인들은 어쩌면 위대한 영웅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상당수가 훌륭한 배우였다."(400-1)
"1956년에는 수년 전 해방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부는 국민을 존중하기는커녕 대차대조표 상의 단순한 숫자로, 위대한 목적을 위해 활용되어야 할 자원으로 여겼다. 농민은 집산화라는 명목 아래 토지와 농기구와 가축을 잃었다. 어느 때보다 많은 곡식을 국가에 넘겨야 했으며 아침이면 그들을 부르는 나팔소리에 달려 나가서 지방 간부들에게 지시를 받아야 했다. 도시의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정부에서 선전하듯이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 아니라 채무 노동자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유례없이 오랜 시간을 일하고 하나의 생산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강요받았으며 그럼에도 소득은 계속 줄어들었다. 공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이제 중국에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사회적 긴장이 정부를 향한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418-9)
흐루쇼프의 스탈릭 격하 연설이 공개된 후 "1956년 9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는 공산당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언급한 부분이 삭제되었고, 공동 지배 체제가 찬양되었으며, 개인 숭배가 비난의 도마에 올랐다. 흐루쇼프 때문에 사면초가에 몰린 마오쩌둥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태연한 척 지켜보는 것 말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심지어 대회를 앞두고 몇 달 동안은 그들에게 협조하기도 했다." "모스크바로부터 들려온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저우언라이와 천윈은 1956년 여름에 <성급한 진군>을 중단하도록 촉구하면서 집산화 속도를 늦추고자 했다. 그들은 집단 농장의 규모를 축소했고, 제한적인 자유 시장제를 재도입했으며, 민간 생산을 상당한 수준까지 허가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노력을 개인적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마오쩌둥 개인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테지만 사회주의 고조는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 대표 대회에서 폐기되었다."(422-3)
"(1956년 10월 고무우카는) 폴란드의 집단 농장이 개인 소유의 농장보다 생산량이 훨씬 적다고 폭로했다.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고무우카의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논평이 진정한 폭탄선언이었다. 폴란드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상대로 수출할 때는 헐값에 팔고 수입할 때는 비싸게 사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인이야말로 <제국주의 수탈>의 원흉인 듯 보였다. 그리고 폴란드의 상황을 둘러싼 관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헝가리에서 폭동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중국인들을 더욱 흥분시켰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극히 다양한 이유로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벌이거나 정부에 탄원했으며 인원수도 점점 늘어났다." "1957년 초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반기를 들었다." "상하이 밖에서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으로 모든 부문의 경제가 마비되었다."(425-6)
"1956년 4월 25일 마오쩌둥이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열 가지 중요한 관계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비스탈린화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독립적으로 중국식 사회주의화를 도모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분별없이 모방하고 기계적으로 옮겨 적용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중국은 중공업에 치중한 낡은 스탈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대신 고유한 사회주의 모델을 발전시켜야 했다." "중국만의 고유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본주의 국가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했다. 같은 맥락에서 스탈린이 남긴 유물의 모든 면을 거부한 흐루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비난을 받아야 했다. <북풍이 불면 그들은 북쪽에 선다. 내일 다시 서풍이 분다면 그들은 서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덧붙였다." "어느새 마오쩌둥은 보통 사람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430-1)
"일주일 뒤인 5월 2일, 마오쩌둥은 당에 <백가지 꽃이 일시에 개화하고 백 가지 학문이 서로 논쟁하게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지식인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432) "헝가리 폭동을 계기로 마침내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가 찾아왔다. 11월 초 부다페스트에서 소련 군대가 반란자들을 진압하는 동안 마오 주석은 헝가리 공산당이 <대중과 이혼하고 스스로 귀족층>이 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폭발시켰으며 통제 불능 사태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국 공산당원들을 상대로 정화 운동을 실시하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정풍 운동이었고 스파이와 간첩을 색출한다며 당원들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던 옌안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고위 간부들과 회의하는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진정한 위험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나 학생이 아니라 당 내부에 존재하는 <독단주의>와 <관료주의>, <주관주의>라는 의견을 피력했다."(433-4)
"(많은 당원들이 대중적인 저항을 단속하는 쪽을 선호했지만) 마오 주석은 <소란을 겁내지 말라. 소란은 더 크고 더 오래 갈수록 더 낫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이 있은 지 거의 1년이 지난 1957년 2월 27일은 마오쩌둥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마오쩌둥이 최고 국무회의 확대 회의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날이었다. 마오쩌둥의 설명에 따르면 넉 달 전 헝가리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다수가 반혁명주의자가 아니었다. 잘못은 당에, 특히 관료주의에 물든 간부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대중의 정당한 관심을 정부의 적들이 가하는 악의적인 위협과 구분하지 못했다." "일반 대중은 불만을 제기함으로써 중국 공산당이 사회적 불평등을 개선하도록 도와야 했다.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한 사람들에게 어떤 보복도 가해지지 않을 터였다. 재차 주석의 극적인 요청이 이어졌다."(435-6)
"1957년 5월 15일, 마오쩌둥이 <상황이 변하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우리는 당분간 우경 세력이 미친 듯이 날뛰도록 놔두어야 한다. 그들이 극에 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더욱 날뛸수록 우리에게 유리하다. 어떤 자들은 자신들이 물고기처럼 낚이는 신세가 될까 봐 두렵다고 말한다. 어떤 자들은 그들이 너무 깊이 현혹된 나머지 체포되고 제거될까 봐 겁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수많은 물고기가 스스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우리는 굳이 미끼로 유혹할 필요가 없다.> 마오쩌둥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마침내 6월 11일에 이르러 "꽃을 피우고 논쟁하는 시기는 끝났다. 마오쩌둥은 잠깐 후퇴하여 당 내부의 적들과 협력해야 했다. 그들도 사방에서 공격을 받자 주석의 그늘 밑에서 단결했다. 내내 의구심을 품고 있던 덩샤오핑과 펑전이 우경 세력을 쓸어버릴 포괄적인 정책을 요구했다. 주석은 덩샤오핑에게 반反우파 투쟁을 일임했고 곧 수십만 명이 표적이 되었다."(443-4)
"반우파 투쟁으로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우경 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평생을 당에 헌신했던 딩링 같은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 지도부로서는 마오쩌둥이 대중을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당 지도자들이 일치된 목소리를 냈으며 더 이상 주석의 정책에 섣불리 이의를 달지 못했다. 경제 문제와 관련한 저우언라이와 천윈의 신중한 관점도 배제되었다. 마오쩌둥은 사기가 충천했다. 해방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중국을 사회주의 진영의 선두로 나서게 만들 새롭고 과감한 실험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었다. 그는 이 실험을 대약진 운동이라고 불렀고 실험이 성공할 경우 중국은 집산화를 앞당겨서 누구나 풍족한 삶을 누리는 공산주의자들의 유토피아로서 날아오를 터였다. 향후 4년 동안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인재를 통해 수천만 명이 혹사를 당하거나 굶주리거나 죽도록 매질을 당할 참이었다."(4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