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1장 정도전, 맹자의 혁명론을 읽다


"정도전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곤 줄곧 간신으로 남았다. 1398년 9월 12일 정종이 내린 교지에는 "불행하게도 간신 정도전·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고 해 정도전을 간신으로 규정하고 그의 처단을 정당화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고종 2년(1865)에 와서다. 경복궁을 지을 때 전각에 이름을 붙이는 등 경복궁 설계에 공이 있다는 것이 복권의 이유였다." "정몽주가 태종 때 충신으로 추대되고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 것에 비하면 정도전에 대한 조선왕조의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신숙주의 평가대로,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정도전이 만든 것으로 당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그에게 견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졸기」卒記에는 "무릇 임금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대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20)


"정도전이 제시한 혁명의 논리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전에게 역성혁명易姓革命론은 자신이 마련한 정치적 구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민심이 등을 돌리고 천명이 떠난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는 정도전 정치 철학의 대전제다. 그의 정치적 각본에서 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백성이었다."(29) 정도전의 혁명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어진 정치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정보위」正寶位 편에서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듯 임금도 백성을 낳고 기르는 정치, 즉 인정仁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에게 인이라는 것은 천지의 본질인 동시에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셈이다. 정도전의 혁명론이 주자학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인정, 즉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인은 단순히 인간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본질, 즉 천리이다."(31-2)


"『심기리편』에서 보듯 정도전의 철학 이론에서 최고 범주는 이理이다. 그의 철학에서 이는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그것이 구체화된 형태인 인간의 도덕규범이다. 인간은 바로 천리를 인식하고 천리를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해한 불교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떨쳐버리는 무념망정의 상태를 지향하며, 도교는 장생불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정도전에 따르면, 그러한 삶을 사는 존재는 거북과 뱀, 흙덩이와 나무토막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정도전은 천리를 실천하는 인간, 천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했다."(39) "정도전에게 조선왕조의 건국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왕씨에서 이씨로 왕을 교체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를 바꾸는 정치의 혁명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성혁명을 넘어 문화의 혁명이고 사상의 혁명이었다. 불교적 사유에서 주자학적 사유로의 전환, 바로 그것이 여말선초에 진행됐던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었다."(45)


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권근은 (정몽주를 평가하여) "한번 섬겼던 마음을 지키고 그 지조를 꺾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큰 절개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영웅 만들기의 극치는 역시 적의 신하를 충신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통이 주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송 태조가 추증했고, 문천상이 송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원 세조가 추증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54-5)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것은 중종 12년(1517)이었다. 하지만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61년 전인 세조 2년(1456)이었다. 최고의 충신이자 학자인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되는데 왜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법도 하지만, 문묘 종사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문묘에 종사된 사람은 최치원·설총·안향 등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58)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추진한 사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였다. 이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을 도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림파가 구사한 전략은 충절과 학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정몽주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규정하고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학문, 즉 도학이 정몽주에게서 기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정몽주에서 자신들로 이어지는 도학의 족보를 공인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권전이 정몽주를 지칭해 "학교를 세우고 교학을 베풀어 유술儒術을 크게 일으키고 이 도를 밝혀 후학을 깨우친 것은 동방에서 이 사람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요·순에서 시작되는 도통을 정몽주가 계승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단순히 훌륭한 도학자를 넘어 도통의 계승자가 된다."(62)


"사림들이 정몽주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의 충절만이 아니라 그가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祖]라는 점이었다. 고려 말 이색이 정몽주를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로 평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기록됨으로써 정몽주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이학, 즉 주자학의 효시를 인정받은 셈이다.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그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공식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학의 계보, 즉 도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시조라는 말은 계승·전통·계보 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더욱이 김굉필을 함께 종사하자는 주장을 감안하면, 그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통을 승인한 것이고, 나아가 정몽주의 후예이자 김굉필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조광조 및 그를 따르는 사림파에게 도통의 계승자임을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 즉 도학적 가치를 공인받으려는 내밀한 의도가 사림파에게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68)


3장 조광조, 조선 선비의 영원한 이상


# 중종 대의 정치적 쟁점을 다루는 조광조의 태도

1. 소릉昭陵(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호) 복위 문제 : "전날의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한 일"이라면서 정당화

2. 단종의 후사 문제 : "매우 아름다우면서 행하기도 어렵지 않다"는 말로 적극 찬성

3.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 :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크게 이치가 있다'면서 잘못된 주장이 아님을 인정

4. 정국공신 개정 문제 : 무리하게 공신에 포함된 자들의 위훈 삭제를 요구하여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


"조광조는 중종시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는 연산시대의 악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는 관점이다. "지금 세상에는 공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소인들은 조금이라도 불만의 뜻이 있으면 곧바로 국가에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일 조정에 조그만 변고가 있다면 그 세력은 반드시 벌떼같이 일어날 것입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봄에 풀이 싹트듯 인심이 비로소 스스로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라든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0여 년에 선비의 습성이 점점 교화되어서 지금은 서민들도 역시 예로써 상喪을 치르는 경우가 있습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103) "인간이 따라야 할 실천의 길, 즉 도라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따라서 정성[誠]을 다해 정치를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조광조 정치 철학의 근본이다."(106)


"조광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강직하게 쓰는 데 있다. 마음 씀이 진실로 강직하다면 선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광조가 정치적 사안을 두고 늘 왕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촉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렇게 되면 개혁이라는 것은 왕의 인격 수양과 이로 인한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왕과의 대립,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된다. 이념적인 왕은 이상 사회로 가는 길의 동반자이고 후원자이지만 현실의 왕은 그 길에서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인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훈구 세력과의 투쟁,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진행됐다. 소격서의 철폐가 그렇고 정국공신의 개정이 그렇다." "수차례에 걸친 개정 요구와 사직 압력 등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중종 14년 11월 11일 정국공신 개정이 확정되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11월 15일에 시작된 기묘사화였다."(119-20)


# 정국공신 개정 4일 후 기묘사화 발생, 다시 6일 후 정국공신 개정 취소


훈구와 사림 세력, 그리고 왕권이 이중 삼중으로 충돌하는 권력의 장에서 "임금의 도덕적 성취와 이것에 의한 도덕적 감화, 그리고 도덕적 사회의 건설은 그저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광조가 현실 정치에서 선택한 방법은 임금의 도덕적 성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고 소인을 퇴출시키거나 나아가 왕과의 투쟁도 불사하지 않았다. 왕이 투쟁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왕은 더 이상 개혁의 동반자가 아니라 적이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개혁의 방법은 군주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왕과의 투쟁이라는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투쟁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고, 교감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왕에 대한 의존을 포기하고 왕을 넘어서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림파 도학자들이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았던 반정이고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몽주, 길재로부터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그들의 존재 기반, 즉 도학의 정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123-4)


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 오현五賢이 확립된 이유

1. 기묘사화 이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로 조광조의 입지가 굳건해졌다.

2.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계보를 처음 언급한 이황의 권위가 높아졌다.

3. 이理에 대한 인식과 『소학』 실천을 기준으로 도학의 기준이 엄격해졌다.

4. 16세기 중반만 해도 불가나 도가 혹은 유교 내 다른 분파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았기에 도학의 이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했다.


"오현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문묘의) 대성전이 재건되던 선조 35년이었다. 이 해 8월 성균관 진사 최극겸 등이 두 차례에 걸쳐 오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날 사관은 "오현이 도학을 천명하여 중화[華]로써 오랑캐[夷]를 변화시켰으니, 공맹의 가르침[斯文]에 끼친 공이 크다. 따라서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무례한 일이 아니다"면서 오현의 문묘 종사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도학의 존재 여부로 중화와 오랑캐를 이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에 따르면 오현은 단순히 도학을 밝힌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야만을 문명으로 바꾼 인물들이다. 그래서 오현은 우리나라를 야만의 구렁텅이에서 문명 세계로 구출해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도학이냐 도학이 아니냐는 단순히 특정한 하나의 학문이나 사상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이냐 야만이냐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 셈이다."(145)


"광해군이 오현의 문묘 종사를 결정한 것은 정치적인 배경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창대군과 임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은 정통성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대북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하기는 했으나 사림 전체의 지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따라서 광해군은 사림들의 공론인 오현의 문묘 종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당시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북 세력을 일정하게 견제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오현에는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오현의 문묘 종사는 퇴계학파의 정치 세력인 남인들에게 정치적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하지만 주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로 구성된 북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현의 문묘 종사는 조식이 문묘 종사에서 배제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학통의 권위에 손상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한쪽 날개가 꺾이는 조치였다. 157)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황은 이단에 대해 자극적인 소리나 미색처럼 여거서 그것을 엄하게 끊어버리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학자는 다만 마땅히 성현의 책을 읽어서 그것을 알고 깊이 믿는 것이지 이단의 문자는 전혀 알지 못해도 관계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단을 물리치려는 이황의 노력은 오래지 않아 장유張維가 우리나라에는 주자학만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다양성과 경쟁이 사라진, 단일하고 순수한 학문과 이념에 대한 집착은 파멸적이다. 더욱이 단일성과 순수성에 대한 고집은 자신의 기원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와 결합되는 퇴행성을 띠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과 진지한 자기 성찰이 동반되지 않은 학문은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생명력마저 갉아먹고 퇴락하게 된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교조화된 주자주의에서 그 퇴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170-2)


5장 조식, 이황의 마지막 라이벌


"이황은 조식曺植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학문과 실천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이황은 명종 13년(1558)에 제자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운成運과 조식의 학문에 대해 "노장이 빌미가 되어 우리 학문에 힘씀이 깊지 않았고, 그 결과 의리義理를 꿰뚫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성운의 삶을 '청은'淸隱으로 규정한 것도 이 편지에서다. '청은'은 글자 그대로 맑은 은둔인데, 그 속뜻은 엄격하고 철저한 은둔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은둔이 지나쳐 현실을 완전히 저버리고 노장의 경지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성운과 조식을 가리켜 "의리를 꿰뚫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의리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관통하는 천리이자 두 세계 전체를 규율하는 질서를 뜻한다. 이황이 위 언급에서 의도했던 것은 자연에 은거하더라도 천리를 깨닫고 실천하려는 도학적 삶의 태도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식과 성운은 한 번도 관직에 나간 적이 없는 산림처사, 즉 재야의 선비라는 공통점이 있다."(175-6)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오현이 문묘에 종사된 지 여섯 달 쯤 지난 광해군 3년(1611)에 차자箚子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출처가 오히려 중도를 잃은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특히 이황에 대해서는 "과거로 벼슬길에 나와 완전히 나아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비웃으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정인홍은 더욱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아주 높은 벼슬을 했고, 혹은 청요직淸要職을 맡았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을사사화 때 이언적은 좌찬성이었고 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황은 홍문관 응교였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당연히 물러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의 출사 원칙에 비춰보면, 간신과 외척의 전횡으로 뜻있는 선비들이 죽어가던 시기에 주요 관직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인홍은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178-9)


"하지만 정인홍의 이언적·이황 비판은 오히려 반대 세력의 결속을 강화시킴으로써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유폐라는 강경책으로 일관한) 북인 정권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해군은 조식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받을 때마다 '후일을 기다리자'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의논해야 한다'와 같은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이다." "광해군이 비록 대북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고 국정을 운영했지만, 기반은 기반에서 멈춰야 하는 것이 정치의 철칙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북 세력은 왕권을 떠받치는 기반이 아니라 왕권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광해군으로서는 대북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는 것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조식의 문묘 종사를 극구 저지했던 것은 살아 있는 권력인 대북 세력에게 성현의 후예라는 권위까지 주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188-9)


6장 이이·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들이 반정의 타도 대상을 정인홍·이이첨의 대북 일파로 한정시킴으로써 얻은 효과는 대북 세력과 대북 이외의 세력 사이의 대립 구도를 만든 것이었다." 서인들은 남인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일부 북인 인사들을 등용하기는 했지만 "애써 잡은 권력을 다른 정파와 나누어 가진다거나 권력 자체를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인조반정 직후에 공신들이 국혼國婚을 놓치지 않고 산림山林, 즉 신망이 높은 재야 선비를 우대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국혼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당파에서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겠다는 것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결탁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산림을 우대하겠다는 것은 학문과 신망이 높은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사림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이었다."(215-6)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면 선비들이 만족할 것이라고 했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는 문묘 종사를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것은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인조는 권력이 서인들에게 집중된다는 사실과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18-9)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숙종 8년(1682) 5월 20일이었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논의가 일찍부터 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와 같이 논의되고, 결국 이들의 문묘 종사가 문묘의 개정 작업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송나라 3현과 함께 논의함으로써 문묘 종사의 초점을 흐리고, 결과적으로 남인들의 반발을 완화할 전략일 수 있다. 둘째는 이이와 성혼의 지위를 송나라 3현과 마찬가지로 도의 전승이라는 맥락에서 평가하겠다는 전략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는 사태를 겪은 후)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기에 이르렀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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