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정치.문화생활 이야기(개정판), 청년학술 52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청년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왕권의 약화와 외척의 권력 집중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세도정치는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 아니라 영·정조대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의 당파 결성이 여전했고 훈척勳戚 세력이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2. 조종祖宗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부여되는 묘호廟號로서, 생전의 행적을 평가하고 추존하는 뜻을 담는다. 통상 조는 창업을 하거나 공이 있는 왕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守成한 왕에게 붙이는 게 원칙이나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좌우되곤 했다.

3. 사도세자의 죽음은 흔히 그의 발작하는 정신병을 원인으로 간주하지만, 영조 즉위를 전후한 노/소론 대립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신임의리) 그리고 이 사태를 바라보는 세자의 어긋한 견해가 종묘사직의 안위와 맞물리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4. 세도정치기에는 핵심 가문들이 과점한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국왕의 견제조차 없이 국가의 정책을 사적 영역에서 결정하다시피 했는데, 이에 맞선 흥선대원군이 국왕의 생부라는 권위와 강력한 개혁 추진력을 바탕으로 실권을 거머쥐었다.

5.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역성혁명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조준을 필두삼아 토지·정치·지방제도를 개혁하고 창왕을 공양왕으로 교체했다. 이후에도 민심을 잃는 왕의 행위를 강조하고 자연재해를 왕조의 쇠락과 연결시켜 마침내 조선을 개창했다.


6.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집권층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요언혹중지설妖言惑衆之說’로 규정, 단속하고, 지방에서 향약을 재보급하여 정부와 지배층의 무능을 가리고 백성들을 단속하는 일에 몰두했다.

7. 왕의 동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간원이 자유로운 분위기인 반면, 관료들을 탄핵하여 기강을 세우는 사헌부는 관서 내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홍문관을 포함한 삼사는 계啓나 소疏, 경연에서의 발언을 통해 인사에 대한 이의나 정책을 제안했다.

8. 문반관료를 뽑는 문과는 초시나 복시를 막론하고 초장에서는 경학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여 사서오경 습득력을 평가하고, 중장에서는 문학시험인 부와 외교문서 문체인 표·전의 문장 능력을, 종장에서는 당면한 현안에 대한 의견 논술을 평가했다.

9. 백성들이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자기 고을의 수령과 관찰사, 사헌부의 처리를 거쳤다는 확인서가 있어야만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왕의 행차에 글을 올리는 상언과 왕이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만이 남았다.

10.『경국대전』은 정부 조직법에서 사회규범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데 <이전>은 관리 체계, <호전>은 토지와 조세 규정, <예전>은 의례와 풍속, <병전>은 군사 제도, <형전>은 형벌과 노비, <공전>은 토목과 도량형 관련 규정을 담고 있다.


11. 왜란 이후 환관 출신의 명 사신들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 뇌물을 요구했는데,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요구받은 선조나 차자次子로 즉위하여 명의 책봉 승인이 필요했던 광해군, 반정의 정당성을 갈구했던 인조 모두 여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2.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이전 지도가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적 지리관에 따라 외형보다 이념을 중시한 측면을 벗어났지만, 서구식 세계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구의 천문 지리 지식도 응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국토 인식에 열렬히 집중했다.

13. 조선 후기 지역 및 국제 교역의 확대와 도시의 성장(인구 밀집) 등이 야기한 역병은 종종 양대 전란보다 많은 목숨을 앗아가 도망과 유랑, 굶주림을 낳았고 산 자들은 여제(역신을 쫓는 제사)와 수륙제(극락왕생을 비는 불교 의식)로 슬픔을 달랬다.

14. 조선시대에 장치기라고 불리는 놀이는 타구打毬(방희, 골프 형태)와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기마격구騎馬擊毬(폴로 형태), 말을 타지 않고 골문에 골을 넣는 장구杖球(필드하키 형태)가 있었는데, 15세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즐겼다.

15. 사대부 출신 화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회화의 발달을 이끈 것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이었다. 화원들은 기록사진사 같은 역할을 하여 국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화, 지도 삽화, 의궤도(국가 공식 행사의 의례 과정) 등을 그렸다.


16. 전라도에서 유행하던 서사무가敍事巫歌를 개조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판소리는 점차 세련된 사설과 재미로 정형을 갖추었고, 지주·양반층까지 저변을 넓혀갔다. 상업도시를 기반 삼아 유행한 꼭두각시놀음과 탈놀이는 민중예술의 전형이다.

17. 남자 옷은 유행을 별로 타지 않았지만 점차 외투의 폭이 넓어지고 갓이 커지면서 유행을 나타냈고, 여자 옷은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풍성해졌으며, 치마 안팎에 노리개를 착용하여 멋을 냈다. 조선 후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가체가 유행했다.

18. 명종대에 문정왕후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 부흥을 주도한 보우普雨는 모든 유학자들에게 요승妖僧이라고 비난받았다. 불교 부흥책에 힘입어 봉은사와 봉선사가 선종과 교종의 중심 사찰로 선정(1550)되었고, 승과에서 여러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19. 동양의 우주론은 재이론災異論과 천원지방天圓地方 개념으로 대표되며, 조선은 송대 이후 강화된 중화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중화 조선’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지동설이라는 서양 우주론이 가져온 변혁은 중화 관념에 점차 균열을 가져왔다.

20.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는 주로 대형화포 위주였고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사격순간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명과 일본의 신형 화기를 접한 조선은 자체 제작과 개량에 힘을 쏟았고 기병 중심의 진법은 중무장 보병 중심으로 재정비했다.


21.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출판의 본산은 불교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 출판 사업은 유가 경전, 농서農書, 의학서 등에 편중되었다. 제지 기술도 고려시대에 이미 확립되었지만, 여전히 종이가 귀하여 한 번 사용한 종이는 대개 재생되었다.

22. 조선에서 융성한 성리학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집착하고 성리학적 가치관만을 주입하면서 여타의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 및 상공업의 발전으로 사회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성리학은 자기 본위적 논리에 자족할 뿐이었다.

23. 조선 왕조 내내 아악과 민요의 두 축으로 전개되던 음악 문화는 19세기 말 민요만 살아남아 민중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했다. 최초의 전국 민요 아리랑은 지역 특색과 서민 애환을 담아 널리 불리웠으며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