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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는 어떻게 살았는가
메리 비어드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9월
평점 :
프롤로그: 엘라가발루스와의 식사
"진지한 역사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것이다. 나는 다른 각도에서 로마 황제들을 조명하려 하고, 왜 그들 가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엘라가발루스처럼 결국 자객의 칼날이나 독이 든 버섯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를 직면하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탐험에서 고대의 과장, 허구, 거짓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통치자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그들을 판단하고, 전제군주 권력의 성격을 논의하고,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표시하는 데 사용한 도구함에는 언제나 공상, 한담, 중상, 떠도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엘라가발루스의 치세에 관한 고대의 묘사를 채우고 있는 과장된 이야기들은 그 출처가 어디이든 로마인들이 한 황제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몇몇 귀중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들의 거짓말과 악명 높은 과장은 '나쁜' 로마 통치자의 '나쁜' 측면처럼 보이는 것을 드러내는, 거의 확대경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25-6)
"그러나 터무니없어 보이는 황제의 기행에 관한 일화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전제정에 대한 매우 다르고 똑같이 오싹한 공포다. 제한 없는 권력에 대한 공포도 그중 하나다. 여름에 자신의 정원을 눈과 얼음으로 장식하거나, 바다에서 멀리 있을 때만 해산물을 먹는 등의 엘라가발루스의 행동에 관한 흥미로운 일화들은 그의 엉뚱하고 돈이 많이 드는 방종 이상의 것을 알려준다. 이런 일화들은 황제의 지배가 어디서 끝나느냐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엘라가발루스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한 측면일 뿐이었다. 그것은 또한 진실과 거짓이 거듭 혼동되는 기만의 악몽이었다. 어느 것도 보이는 대로가 아니었다. 황제의 관대함도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친절은 말 그대로 죽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확대경은 로마에서 황제의 통치를 둘러싼 불안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황제의 권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감각을 왜곡시키고, 악이 판치는 혼돈 속에서 번성했다."(27-8)
1. 1인 통치의 기초
"서기전 2세기의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서기전 5세기에 이탈리아 중부의 평범한 소도시였던 로마가 수백 년 사이에 어떻게 지중해 연안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됐는지 놀라워했다. 그것이 모두 로마인들이 공격적이고 군사를 중시했다거나 전투에서 규율과 전문 기술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쉽다. 그들은 군사력을 중시했지만 그들에게 정복당한 지역 대부분도 그러했다. 로마 또한 전투 기술에서 약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군은 초기에는 해전에 약해서 상시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 가장 좋은 설명(또는 추측)은 로마의 상층부가 군사적 영광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격성과 군국주의가 매우 경쟁력 있는 그들의 기풍과 결합했고, 그들이 이탈리아 대부분의 통제권을 쥐게 되자 로마인이 이용할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인적 자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행운' 덕분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합쳐진 결과가 광대하고 급속하며 격렬한 영토의 팽창이었다."(58-9)
"분명한 점은 이 일련의 정복이 로마의 정치에 거의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희생자들에게는 더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혼란의 일부는 나라가 얻은 막대한 이익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그것이 이전에 권력을 공유하는 지배층 사이에 존재했고 그들의 경쟁으로 인한 대립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던 이론적인 평등성을 파괴했다." "마찬가지로 중요했던 것이 로마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공화국 정부의 권력 공유 구조에 가해진 압박이었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역할은 공유되었고 일시적이며 해마다 바뀌는 관리라는 틀 안에 수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에 대응해 외국에 파견되는 관리들에게는 임시로 추가 임기를 주었다. 이는 일시적이고 권력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로마의 관직 임명 원칙에 위배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서 큰 땅덩이는 점차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던 정부 구조를 파괴해 1인 통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제국이 황제를 만들어낸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59-60)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중에 개발된 두 가지 중요한 권력의 원리를 재구성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것이 군사적 통치였다는 점이다. 현대의 군사 독재 체제에서 늘 그렇듯이 로마제국이 제복을 입고 분열 행진을 하는 병사들 천지였다는 말은 아니다. 핵심적인 사실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25만이 넘는 제국의 무장 병력을 통제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전역에 있는 로마의 고위 대리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틀도 짰다. 그는 평화로운 속주의 총독 선임은 원로원에 맡겼지만, 나머지 속주의 총독은 자신이 골랐다. 명백하게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병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유지하고, 그들이 선을 넘지 못하게 보장하며, 군사 권력을 자신만이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를 국유화하는 데는 휘청거릴 정도로 돈이 많이 들었다. 정규 급료와 퇴역 병사들을 위한 연금을 합치면 매년 로마 국가 전체 수입의 절반을 넘는 액수였다."(76-9)
"아우구스투스의 두 번째 기본 원칙은 일종의 로마의 민주주의를 바꾸는 것이었다. 황제는 갈수록 누가 핵심 관직을 맡을 것인지를 통제했다. 로마의 '일종의' 민주주의 형태에서조차도 대중의 민주 선거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플리니우스는 서기 100년에 자신이 집정관이 된 것은 트라야누스 덕분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그래서 감사 결의를 했다), 로마 작가들은 무심코 황제들이 이 관원들을 '임명'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직후 그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선거 의례를 시민 전체가 하는 것에서 원로원이 하는 것으로 '간소화'했다. 그 이후 선거는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집정관의 임기를 단축하면서 한때 권력의 자리가 이제는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화는 보통선거의 폐지였다. 이는 군대 개혁과 마찬가지로 지도층의 로마인과 일반 시민 사이의 연결을 끊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대중적 권력 기반을 가진 경쟁자의 출현을 막는 효과가 있었다."(80-2)
"고대 로마 상류층은 가만히 누워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을까? 한 가지 대답은 〈아니요〉이다. 원로원 의원들과 황제 사이의 불안한 관계는 황제의 통치에 관한 기록에서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대체로 〈잘 넘어간〉 듯했다. 후대의 로마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후계자 상당수는 상류층과의 위험한 줄타기를 해내는 데 필요한 정교한 정치적 움직임에서 그리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부분적으로 그로 인해 역사에서 '나쁜' 황제들로 기록되었다. 거의 모든 상류층 출신의 로마 역사가들에게 '나쁨'은 흔히 〈로마 상류층의 관점에서의 나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도 과장되고 허구가 섞여 있으며 디스토피아적인 엘라가발루스의 세계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관계는 결코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 않았다. 양쪽 모두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외양과 실제 사이의 괴리가 불신을 부채질했다."(83, 87)
"지금도 자신의 머리를 정치적 흉벽 위에 거의 내놓지 않는 사람들은 부패한 독자재들에 대한 용감하고 원칙적인 반대자라고 생각되는 이들을 편드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부역자'들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롭고, 어떻든 암살 위협을 받거나 '악동들' 때문에 혼란에 빠진 통치자들의 곤경을 동정하는 것은 어쩐지 내키지가 않는다. 그러나 반란자들을 동정하게 되면 1인 통치에 대한 중대한 저항의 흔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잊기가 쉽다. 물론 개별 통치자들의 범죄와 악행에 대한 대규모 저항이나 1인 통치의 일부 측면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말이다." "원로원 의원 대다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프린켑스와 협력할 태세가 되어 있었거나 그것을 즐겼다. '협력자'와 '부역자', 점잖은 사람과 아첨꾼 사이에는 분명히 가는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좋건 나쁘건, 그리고 때때로 수반되는 이중적 사고가 어떤 것이든,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체제가 돌아가고 오래 지속된 것은 부분적으로 그같은 사람들 덕분이었다."(88-90)
2. 다음 차례는? 승계의 기술
"로마의 승계를 둘러싼 논란과 그것이 권력 구조에서 열어놓은 분열 뒤에는 불운, 독약병, 야망이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이 있었다. 근대 유럽 군주들은 '장자 상속제'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제도는 그런 고정된 원칙이 없었다. 이에 따라 누가 권력과 지위를 물려받을 것인지에 대해 훨씬 유연성이 있었고, 원칙적으로 부적합하거나 인기가 없는 사람을 걸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권력이 이행될 때마다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고, 더욱 흔하게는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몇 년씩 경쟁과 다툼이 이어질 수 있었다." "결국 재임 중인 황제가 스스로 선호하는 승계자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고 통상적인 것보다 빨리 집정관 자리에 앉히며 기타 여러 가지 명예와 장식품을 주는 것이 흔한 관행이 됐다. 그러나 옛 지배자가 죽으면 암시적인 승계 약속을 다른 사람들이 현실화하거나 현실화를 거부할 수 있었다."(98-9)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치세는 새 황제 또는 황제 후보자가 근위대, 병사들, 도시 주민들에게 돈을 뿌리고 원로원에 존중과 키빌리타스의 약속을 남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대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면 그 대가로 원로원은 권력 이행을 공식 승인하고, 사람들은 적어도 복종을 하며, 병사들은 열렬하게 새 황제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런 뒤에도 흔히 '정보 조작'이라 부를 만한 단결된 움직임이 있었던 듯하다. 황제를 분명하고 불가피하며 무엇보다도 신이 선택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고대 황제들의 전기에서 아직도 읽을 수 있는 모든 조짐과 예언의 핵심이었다. 독수리가 어느 날 우연히 클라우디우스의 어깨 위에 앉았다거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제가 되리라는 조짐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여사제가 이 미래의 황제를 '임페라토르'로 '잘못' 불렀다고나 하는 식이다. 기본 규칙은 권력을 차지할 자격이 박약할수록 기미와 징조가 더욱 강력하고 과장돼야 한다는 것이었다."(99-100)
"통상적인 로마 황제 이야기는 아주 특별한 유형의 '승자가 쓴 역사'였다. 그리하여 '좋은' 황제들이 등장했다. 1세기에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후게자로 점찍은 그의 아들 티투스가 평화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티투스의 지위는 합당한 아버지의 아들이자 합당한 후계자라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긍정적인 모습을 홍보하고 심지어 만들어내는 데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같은 논리로 2세기에 줄줄이 나온 입양 황제들은 거의 불가피하게 자신이 승계되도록 공식 '선택'한 사람의 명성을 높이는 일에 매달렸다. 그 입양이 아무리 분명치 않고 날조된 것이라도 말이다. 기번은 이 시기를 인류의 전 역사에서 가장 즐겁고 번영을 누린 때라고 단언했지만, 이는 그가 로마제국의 일반 주민과 세계의 나머지 지역 사람들을 무시한 것일 뿐만 아니라 황제들이 전임자들이 시대를 그렇게 '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를 간과한 것이었다. 황제가 암살되거나 정변의 희생자가 된 경우에는 정반대였다."(111-3)
3. 실력자들의 식사
"로마의 궁궐은 웅장했지만 황제의 환대 장소로 비교적 작은 한 부분일 뿐이었다. 이탈리아 전역과 그 너머의 도시와 시골에서 우리는 황제가 한때 손님을 초대했던 수십 군데의 식당 유적을 더 찾아낼 수 있다." "때로 황제는 연회를 열기 위해 자신의 사유지 너머 다른 장소를 간단히 징발했다. 분명히 도시의 대표적인 건물들은 일시적으로 황제의 식사를 위해 전용될 수 있었고, 콜로세움도 그중 하나였다. 적어도 한 번은 이곳이 황제가 수천 명의 고마운 시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장소로 쓰였다. 그 행사는 도미티아누스가 주최한 또 하나의 연회였다. 공화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따른 것으로, 중요 인물이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대량의 식사를 제공했다." "음식과 함께 경기장 바닥에서는 공연이 벌어졌다. 검투사나 야생동물이 아니라 서로 맞선 여자와 난쟁이 집단들 사이의 연출된 싸움과 때로 음악가와 예인들의 외설스러운 공연도 있었다."(143-5)
"로마 상류층의 식사는 황제가 초대한 것이든 플리니우스 같은 자들이 초대한 것이든 수백 명의 노예가 필요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 또는 그 가족들이 남긴 기념물에서 받는 압도적인 인상은 위계가 잡혀 있고 세부적으로 전문화된 궁궐의 주방 세계와 하인 무리에 대한 것이다. 황제 집안의 요리사, 주방 관리자, 집사, 잔심부름꾼, 포도주 관리자, 특정 종류의 빵을 만드는 일류 제빵사, 시식시종, 초대 담당자나 식탁 냅킨 담당자에 대한 기념물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 특히 비교祕敎적인 식후 공연 예인들의 기념물도 있다." "직물 관리자나 틈새의 희극 배우까지 책임이 세세하게 규정된 전문적인 기반 구조는 부분적으로는 황제의 권력에 대한 과시였고, 이는 다른 부유한 로마 가정에서 더 작은 규모로 모방되었다. 예를 들어 《사티리콘》에서 트리말키오가 자신의 노예를 등급에 따라 '부서'를 나누고 한 노예에게 '요리 부서'에서 '심부름 부서'로 강등시키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이 익살스럽게 묘사된다."(150-1)
"황제와 상류층 사이의 식사 시간이 그대로 죽음과 유혈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황제들이 귀족들의 콧대를 꺾어버리는 것으로 유명한 것도 바로 식사 자리에서였다. 때로는 그것이 음식과 술을 먹는 양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더 큰 위험도 있었다." "칼리굴라가 식사 자리에서 자신은 언제든 원하는 때에 집정관의 목을 벨 수 있다고 빈정거린 것은 과도한 자만심의 징표이자 원로원 의원들의 잠재적인 취약성의 징표였다. 더욱 불편한 것은 칼리굴라의 명령에 따라 눈앞에서 아들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본 로마 귀족의 이야기다. 황제는 아침에 아들의 처형을 겪은 아버지를 그날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러고는 엄청난 친근감을 보이며 이 불쌍한 귀족에게 웃고 농담을 할 것을 강요했다. 마치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과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투였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도대체 왜 여기에 동조했을까? 한 로마 작가가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그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165-8)
4. 궁궐 안에 있는 것?
"팔라티노 언덕의 역사는 로마의 권력 변화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곳은 로마 도시가 건설된 일곱 개(또는 그 이상의) 언덕 가운데 하나였으며, 황제들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인 서기전 1세기 중반에 로마 정계 거물들의 본거지였다. 여기서 로마의 일종의 민주주의 아래서 권력, 영향력, 시민들의 표를 다투었던 경쟁자들이 옆집 이웃으로 살았다. 그들이 살던 집은 터무니없는 금액에 주인이 바뀌었고,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서로 가까웠다. 지붕을 조금 높게 고쳐 이웃집에 햇빛이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전통적인 로마의 집은 안쪽을 향해 안마당 주위에 지어졌고, 외면에는 비교적 품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집주인들은 거의 정치에서 경쟁하듯이 건축에서도 경쟁을 했다. 내부 주랑 현관에 기둥을 몇 개나 설치할 것인지, 비싼 수입 대리석을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평범한 현지의 돌을 사용할 것인지, 또는 수수한 생활방식을 따르며 사치를 배격하는 시늉을 할지 말지가 위신 경쟁에서 중요했다."(191)
"로마에서 1인 통치가 시작되고 100년쯤 지난 1세기 말에 팔라티노의 풍광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역사 유적과 신전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집은 사라졌고, 언덕의 대부분은 하나의 궁궐이 차지했다. 새 정치 체제의 가장 생생한 표시 가운데 하나로서 황제는 옛 귀족들을 전통적인 위신의 구역에서 몰아냈다. 전략적 구매, 징발, 강탈 또는 그저 '적대적 환경'을 통해서였다. 변화의 상징성은 분명했지만, 그것은 또한 점진적이었다. 귀족들은 거의 곧바로 언덕의 주거 구역을 황실에 내주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시작된 일이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개념의 궁궐은 하룻밤 사이에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서기 41년 팔라티노에서 일어난 칼리굴라 암살 사건 때에는 거대한 단일 저택을 상상해서는 절대 안 되고, 사유지가 확대되면서 그것이 점차 언덕에 있던 집들 대다수를 집어삼켰다고 봐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192-4)
"그럼에도 궁궐의 위치는 더 큰 상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팔라티노 언덕의 한쪽에서는 이 도시의 옛 정치 중심지였던 포룸이 내려다보인다. 원로원 청사가 있는 곳이고, 한때 시민들이 모여 투표를 하던 곳이며, 공화국의 거물들이 군중에게 연설을 하던 곳이다. 1세기 말 이후 어느 때라도 원로원 청사에서 걸어 나와 위쪽을 보면 우뚝 솟은 황제의 주거지가 시야를 압도했을 것이다. 이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언덕의 다른 쪽에서 궁궐은 로마인의 문화생활과 상상력에서 똑같이 중요한 기념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 즉 대경기장이다. 도시의 이른 시기부터 정기적인 전차 경주가 벌어졌던 이곳은 콜로세움에 가려져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남쪽에서 팔라티노 언덕을 올려다보면 궁궐과 경기장이 함께 보였을 것이다. 그 의미는 바로 황제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대중오락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었다."(208-10)
"미로 같은 궁궐은 유용한 면이 있었다. 세계 각지의 왕궁들은 안전장치로서 매우 복잡한 배치를 사용했다. 고대 로마에서도 건축은 아마도 외부인이 방향 감각을 잃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되어 궁궐 안에서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위해를 가하려 했든 아니든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미로는 황제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길을 헤매게 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했던 것만큼이나 황제 자신을 가두어놓았다. 이 때문에 황제는 가족, 노예, 참모, 호위병 등이 충성스럽든 그렇지 않든 그들에게 휘둘렸다." "궁궐은 또한 황제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거의 대다수의 암살된 황제는 궁궐에서 살해됐다. 이곳은 음식에 몰래 독을 탈 수 있고, 단검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궁궐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스타티우스가 궁궐 연회에서 느낀 흥분, 트라야누스의 너그러운 저택 공개에 대한 플리니우스의 열광, 플로티나가 계단에서 한 사려 깊은 연설에 대한 중요한 평형추다."(211-4)
5. 궁궐 사람들: 궁정의 황제
"로마 작가들이 궁정의 작동 방식에 대해 가장 유감스럽게 여긴 것은 국가 권력이 단 한 사람(황제)과 가까운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보았듯이 불가피하게 부패가 뒤따랐다." "공화국 시절에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권력과 위신이 자유민 남성 시민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선출된 남성 고위층의 손에 있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함께 공개적인 토론을 했다. 이런 전통적 제도 가운데 일부는 황제의 통치하에서도 유지됐다. 다만 황제 자신의 그늘 아래에 어색하게 있었다. 그러나 궁궐은 이제 새로운 권력의 원천이 됐다." "황제 주위에서 권력은 아주 다르게 측정됐다. 누가 황제에게 접근할 수 있고, 황제가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중요했다. 이것이 근접성의 힘이었고, 이에 따라 원로원의 어떤 고관보다도 황제의 아내, 노예, 연인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정교한 예법과 궁정의 허례의 기능 중 하나는 전통적인 고위층의 상대적 무력함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249-50)
"황제는 제국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행정 업무를 수행해줄 일꾼들이 필요했다. 원로원 상층부는 속주를 통치하거나 옛날 방식으로 레기오(군단)를 지휘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궁궐에서 사무를 보는 것은 아주 달랐다. 게다가 귀족이 권력의 밀실 막후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제위 경쟁자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해방노예는 복무와 복종의 위계 속에서 전통적이고 편리한 해법을 제공했다. 플리니우스가 팔라스의 비문에서 본 미덕 중 하나는 〈그의 주인에 대한 순종과 충성심〉이었고, 그것은 평균적인 원로원 의원들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가피한 결과는 소수의 해방노예에게 훨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권력 비슷한 것을 주는 것이었다. 일부 황제들은 그 대신에 원로원 의원 바로 아래에 있는 자유민 출신의 기사 계층(에퀴테스)에게 의존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해방노예가 제국 궁정에서 주요 '공무 직위' 일부를 차지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260-1)
"궁정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판치는 곳이라는 생각은 거의 고대의 고정관념이었다. 어떤 때는 좀더 일반적으로 그들의 사악하거나 교묘한 권력 장악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그들은 막후에서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고, 위험스럽게 중앙 무대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대다수의 로마 상류층 여성 및 다른 지역의 전통 왕가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기본적으로 왕가의 게임의 전당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혼인을 했다. 가계도상의 느슨한 가지를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고, 당사자들은 그 문제에 발언권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율리아는 열네 살에 고종사촌 마르켈루스와 혼인했다. 그를 제위 상속자로 점찍기 위한 것이었다. 100년쯤 뒤에 악명 높은 파우스티나는 불과 여덟 살 때 승계 계획을 뒷바침하기 위해 스무 살 이상 연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했다." "'아내 탓'은 권력의 회랑에서 발생한 특이한 사태에 대한 준비된[상투적인] 설명이었다."(268-9, 217-3)
"그렇다면 이 여성들의 많은 성적 일탈의 배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부분적으로 고대와 현대의 고위층의 성에 대한 환상에 의해 추동됐을 것이고, 부분적으로는 일부 여성들이 실제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성적 제약을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간통 가능성은 '아버지의 아들'이 실제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정성의 가능성을 열어놓았고(로마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기성 질서, 가부장적 혈통, 적법한 승계를 위협했다." "통치자의 가문 안에서 황제의 여성 친척들은 승계를 보장하는 데 이바지하는 동시에 그것을 방해하는 위협이 됐다. 간통 및 배신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해방노예의 돌출에 관한 공포와 마찬가지로 이런 이야기의 바탕에 있는 것은 여성들에 대한 우려라기보다는 황제에 대한 우려였다. 황제의 권력은 여성들의 성관계, 성적 취향, 음모에 의해 언제든 손상될 가능성이 있었다."(277-8)
6. 일하는 황제
"플리니우스는 우리가 아는 한 업무 서신 선집을 광범위한 독자에게 유포한 유일한 총독이었다. 하지만 제국의 40개 속주 총독들은 서한집을 만들지는 않았더라도 플리니우스와 상당히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고, 모두 로마의 본부에 정기적으로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대충 계산해보면, 플리니우스가 만약 평균적인 빈도로 편지를 쓰고 본래 쓴 편지들 가운데 추측컨대 유포시킬 것으로 4분의 1 정도를 선별했다면 속주 총독들이 보낸 편지가 매일 열두 건 이상이 황제에게 도착했다는 얘기가 된다. 모두가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게 보고를 하고 답해주기를 기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황제와 서신을 나누고 있었을 다른 고관과 군 지휘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많았고 오래 지연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서신에 의한 통치'였다. 프론토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황제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는 〈전 세계에 편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산뜻하게 요약했다."(298-9)
"황제가 궁궐에서 공개적인 '인사'를 주재하고 있을 때나 가마를 타고 거리에 나왔을 때, 또는 어떤 지방 도시에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는 작은 파피루스 문서인 리벨루스libéllus(탄원서)들도 들려 있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황제에게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황제 앞에는 본인이 내려야 할 공식적인 법적 결정도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로마 세계에서 황제가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공화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른 관리와 배심원의 법률적 역할 위에 더해진 것이었다. 황제는 제국 전체의 상소법원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청원에 대한 황제의 답변 중 일부는 로마제국 전역의 돌에, 청동판에, 또는 파피루스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진다. 그리고 발굴을 통해 더 많은 수가 계속해서 발견됐다. 어떤 것들은 로마의 법률 편람에 들어갔다. 황제의 말은 사실상 법이고 까다로운 문제에 관한 황제의 답변은 법적인 판단 기준이었기 때문이다."(302-3)
7. 여가 시간에는?
"군주의 생활에서 일과 여가 사이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황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연회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필연적으로 그의 통치 성격을 반영했다. 그러나 문서 업무, 원로원에서의 연설, 또는 법적 사건 판단과 그가 공식 업무에서 벗어났을 때 선택한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다. 보통 '여가'로 번역되는 '오티움otuim'과 그 반대의 '업무'인 '네고티움negotium' 사이에 뚜렷한 대비가 존재한다. 전자는 '스스로 시간을 통제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고, 후자는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해야 하는 것'이다. 황제들은 문학과 웅변술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시를 쓰고 곡을 연주하고, 권투·씨름·달리기·수영 같은 건전한 운동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모든 경우에 자주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고대에는 검투사 경기에서부터 전차 경주와 극장 공연까지 다양한 대중오락에 가장 큰 관심이 집중됐고, 황제의 역할은 열렬한 애호가, 너그러운 주최자, 이따금씩 공연 참여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345-7)
"이런 행사들은 단지 로마 사회의 위계를 자세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구분을 드러냈다. 관중인 '우리'와 경기장에서 싸우고 고통을 받고 죽는 '그들' 사이의 구분이다. 여기서 공연하는 사람은 배제된 자, 저주받은 자, 혐오되는 자,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당연히 (완전한) 로마인은 아니었다. 검투사는 흔히 노예이거나,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로서 처벌로 싸움을 선고받은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자원한 자유민도 서명하는 순간 시민의 권리와 특권 일부를 상실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가장 희귀하고 가장 악명 높은 동물들은 낯설고 위험한 자연계의 극단을 떠올리게 했다. 그곳을 정복하거나 길들이는 것은 로마의 운명이었다. 관중이 폭력을 보며 어떤 본능적인 즐거움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거나 이런 경기는 또한 로마 권력의 행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저 공식 복장을 하고 앉아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 관중은 로마 및 로마인의 지배를 경험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과시하는 셈이었다."(353-4)
8. 해외로 나간 황제
"황제가 이탈리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 때문이었다. 관광, 방랑, 사실 조사, 홍보 활동 등을 능가했다. 그들의 공식 칭호 중 하나인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문자적으로 '군 지휘관'을 의미했다." "여기서도 로마의 통치자들은 미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1~2세기는 크게 팽창한 시기가 아니었다. 해외의 정복 영토라는 측면에서 제국은 수백년 전 1인 통치가 시작되기 오래전인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전 1세기 사이에 대체로 형성됐다. 이집트를 포함한 광대한 마지막 영토는 아우구스투스 치세 초에 제국에 추가됐다." "로마 전제정의 창설자 중 한 명이 남긴 명확한 메시지는 미래의 황제들이 무분별하게 제국의 규모를 늘리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전쟁 반대를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 바깥으로부터 오는 위협에 저항함으로써 얻는 영광이 언제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영광은 로마 영토 안의 폭동과 반란을 진압하는 데서도 얻을 수 있었다."(411-4)
"여기에는 두 가지 생각의 충돌이 깔려 있었다. 현재의 영토를 고수하려는 위험 회피 입장과, 영광은 군사적 팽창에서 온다는 전통적인 견해 사이의 충돌이다. 후자는 '한계 없는 제국'을 소유하는 것이 로마의 운명이라는 지속적인 대중의 환상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실상 보초 근무를 서는 경찰력이었던 레기오들의 총사령관이라는 황제의 이미지와, 공화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로마의 용감한 장군이라는 황제의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었다. 동시에 '위대한' 정복자가 되지 않은 채 어떻게 '위대한' 로마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황제가 제국을 확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절대로 폐기된 적이 없었다. 전투복 차림의 황제의 조각상은 이 균열을 미봉하는 데 한몫했다. 그 조각상들은 군사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단순히 '기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모든 중무장 흉갑과 군복 '치마'는 황제가 그런 복장을 실생활에서는 잘 입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겨주었다."(416-7)
"황제가 전쟁에 대한 열의를 과시하는 것은 단순히 군사적 영광을 얻거나 쟁취하기 위한 시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를 자기 병사들과 같은 위치에 놓기 위해 설계한 것이기도 했다. 로마의 권력과 안전은 궁극적으로 드러났든 드러나지 않았든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병사들의 충성스러운 지원을 유지하는 것은 황제가 절대적으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일이었다. 2세기경 제국 전체의 병력은 40만 명 안팎에 이르렀다. 황제로서는 군대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악몽이었다. 이 때문에 황제는 막대한 액수의 돈을 게속해서 후한 봉급과 연금에 쏟아붓고 때때로 가욋돈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충성은 또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어서, 충성심을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 황제는 자신을 '콤밀리티오commilitio'('같은 군인', '전우')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플리니우스가 〈찬양 연설〉에서 트라야누스가 콤밀리티오처럼 행동한다고 칭송하면서 동시에 임페라토르임을 이야기한 것은 또 하나의 줄타기였다."(425)
9. 얼굴과 얼굴
"황제의 이미지 창출과 확산의 혁명은 궁극적으로 처음 1인 통치를 시작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살아 있는 로마인으로서 주조된 주화에 자신의 두상을 새겨 넣은 최초의 인물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 신화 속 영웅, 오래전에 죽은 사람만을 주화에 새기는 옛 공화국의 전통을 깼다. … 카이사르의 계획을, 40여 년의 치세에 걸쳐 실천할 기회를 얻은 것은 그의 후계자였다." "특히 두드러진 것은 한때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제국의 서로 다른 지역에 설치됐던 황제의 조각상들이 흔히 디자인에서 미세한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머리칼의 정확한 배치마저도 그러했다. 이는 그 자체로 조각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에 대한 좋은 단서다. 많은 것들은 실제로 현지의 돌을 가지고 조각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물을 서로 그렇게 유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거의 확실하게 모형을 바탕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445-7)
"그러나 혁명은 단지 (제국 전역을 뒤덮은) 양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는(또는 그에게 조언한 누구라도) 또한 로마의 완전히 새로운 초상화 '양식'을 시작했다. 그의 보다 엄격한 정치적인 변화 일부에 발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공화국의 상류층은 초상화에서 '결점까지 모두'의 작품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수척하고 주름지고 노쇠한 모습까지 말이다. 이것이 그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었든 아니든, 그것은 나이와 권위의 힘을 이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모든 것을 바꾸었다. 그 자신의 이미지는 서기전 5세기 그리스 조각의 이상화 전통을 돌이켜보았다. 그의 전신상에서 그는 이상적인 고전적 신체를 가진 것으로 묘사됐다. 자세는 제한적이었는데, 토가나 갑옷을 입고 서 있거나, 때로는 말을 탄 모습이었다. 그의 두상은 똑같이 이상적이고 젊은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치세 40여 년 동안 그대로 유지했다. 그는 서른 살 때나 일흔 살 때나 조각품 속에서 같은 모습이었다."(448-9)
"황제의 초상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것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은 한 통치자에게서 다음 통치자로의 승계와 권력 이전을 둘러싼 일부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작은 초상들에서도 선택된 상속자를 유일한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그를 후계자가 될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새 황제가 제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한 가지 유용한 방책은 전임자를 쏙 빼닮은 것처럼 표현되는 것이었다. 한 닮은꼴에서 다른 닮은꼴로 빈틈없이 권력이 이양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예를 들어 암살이나 내전 이후 황제가 전임자의 유산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다르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교과서적인 사례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공식 초상이었다. 그는 서기 69년에 권좌에 올랐는데, 네로의 몰락 이후 벌어진 다툼의 최종 승자였다."(453-6)
10. ‘나는 신이 되어가는 것 같아’
"로마에는 표준적인 황제 장례 절차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장례식은 거의 개선식처럼 치러졌다. 죽은 황제의 모형은 개선하는 장군과 마찬가지로 유피테르 신의 복장을 차려입었다. 행렬 속에 또 다른 아우구스투스의 초상이 개선 전차에 실려 전시됐다. 그리고 원로원은 포룸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이른바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마르스 평원')의 화장장으로 가는 경로는 개선 행진의 경로와 같아야 한다는(다만 방향은 반대였다) 포고를 내렸다. 이것은 승리 행진으로서의 장례식이었고, 로마의 시민적 전통과 노골적인 전제정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시신은 로마 상류층과 원로원의 관직 보유자들이 운구했다. 모든 시민에게는 애도 기간이 정해졌는데, 여성은 1년이나 됐고 남성은 며칠에 불과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경칭 가운데 하나는 '파테르 파트리아라이pater patriae'(조국의 아버지)였다. 모든 로마의 영웅들은 그의 조상으로 간주됐고, 모든 시민은 그의 가족의 일원이었다."(500-1)
"로마에서 황제의 화장(실제 시신이든 밀랍 모형이든)은 또 다른 기능이 있었다. 그것은 장례 의식의 일부였을 뿐만 아니라, 다음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일부 로마 황제와 그 가족 일부가 공식적으로 신이 되는 과정이다." "서기 63년 네로의 딸 클라우디아가 태어난 지 겨우 넉달 만에 죽은 뒤 여신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뒤에 황제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리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신격화가 그저 황제의 선물만은 아니었다. 원로원의 정식 표결을 거쳐야만 죽은 사람을 새로운 신으로 공식 결정할 수 있었다. 클라우디아의 경우에, 타키투스는 원로원이 비굴한 아첨을 해서 거기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아첨이든 아니든 이것은 원로원과 황제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황제가 자신이 죽은 뒤 어둡고 어중간한 하계(대다수의 로마인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로 가는 대신 신이 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열망은 원로원의 손에 달려 있었다."(506-7)
"그러나 황제 숭배는 보다 일반적으로 로마 종교를 지배하는 원리라는 맥락으로 되돌리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로마의 종교는 새로운 신들을 환영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형태 모두에서 그것은 '다신교'였다. 그리고 로마 세계 일대에서 단일한 정통 신앙은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격화된 황제라는 맥락에서 이 신들(오래된 신과 새로운 신 모두) 가운데 일부는 본래 인간이었다고 전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는 힘센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친 뒤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비로소 신이 됐다고 한다." "로마에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구분이 없었고, 종교는 개인의 헌신, 개별적인 믿음, '믿음'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것은 로마의 군사적·정치적 성공이 신들을 적절하게 숭배한 덕분이었다는 단순한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뒤집어 말하자면 그들을 적절하게 숭배하지 않으면 국가는 위험해지리라는 것이었다. 개인의 신심은 거의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514-6)
에필로그: 한 시대의 종말
"알렉산데스 세베루스의 죽음과 함께 황제의 직무 기술서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서기 235년을 이 책의 종료 지점으로 선택한 이유다. 그렇다고 후대의 황제들이 전통적인 표현으로 '좋은' 황제가 아니라 '나쁜' 황제였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 황제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극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후 50년 동안에 통치자들이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졌다. 235년에서 285년 사이에 통치자를 자처했던 서른 명 정도의 황제(또는 잠시 제위에 오른 찬탈자들) 가운데 일부는 〈6개월 동안 제위에 있었고, 어떤 사람은 1년, 몇몇 사람은 2년, 그리고 기껏해야 3년이었다.〉" "그들 상당수는 전통적인 상류층 바깥 출신이었고, 군대 계급을 통해 차근차근 올라갔으며, 군사정변을 일으켜 제위에 올랐다. 그것은 흔히 '1인 통치'가 아니었다. 그들은 갈수록 서로 다른 종류의 공식 또는 비공식 배열로 권력을 공유하거나 사실상 제국의 한 부분만을 장악했다. 많은 사람들은 '지역' 황제였을 뿐이다."(533)
"상황은 세기 말로 가면서 다시 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의 치세(서기 284년에서 337년 사이에 각기 20여 년, 30여 년 재위했다)는 그 확실한 징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옛날 방식의 황제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3세기 초 '위기'의 시기 동안에 이루어진 임시방편 일부는 이제 실제로 공식화됐다. 예를 들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서부 속주와 동부 속주로 나누고 네 명의 황제가 통치하게 했다. 동-서 양쪽에 각기 상-하위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기에 어떤 형태의 공통 통치가 표준이 됐다. 게다가 재정립된 황제의 권위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지는 대가를 치르고 얻었던 듯하다. 황제를 그의 신민과 떼어놓는 정교한 의식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다 분명한 경의의 표시가 있었으며, 플리니우스 같은 사람들과 나누던 간단한 식사가 대폭 축소됐다." "4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황제가 '우리 가운데 하나'라는 신화가 훨씬 의미가 없어졌다. 모든 사람에게 말이다."(5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