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의 5.18 - 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
노영기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5월
평점 :
서장| 5·18진상규명투쟁의 역사
"5·18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나 참여자는 많으나 가해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가 군인들에게 총과 칼, 곤봉 등을 쥐어 주고 폭행과 발포를 사주했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은 아니다. 군, 그중에서도 보안사령부의 자료, 행정기관 자료, 민간 자료 등 방증 자료들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19년 8월 5일, 16세의 고등학생으로 5·18항쟁에 참여해 '막내 시민군'으로 불렸던 박정철이 동지들의 곁으로 떠나갔다. 5·18의 진상규명과 연구가 '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후과는 역사 왜곡이다.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억지는 과거의 왜곡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왜곡하며,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가 쌓아나갈 미래까지 왜곡한다.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이며, 40년이 지난 오늘 다시 5·18에 주목하는 이유이다."(32-4)
1_유신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제1호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헌법 개정이나 폐지를 제안하거나 청원하는 일체 행의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때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중앙정보부가 수사할 수 있는 긴급조치 2호를 동시에 선포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74년 1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이끌던 장준하와 백기완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긴급조치는 1975년 5월 19일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로 이어졌으며,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무려 2,159일간의 이른바 '긴급조치(긴조)의 시대'를 만들었다. 긴급조치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곤 했다."(42)
"대통령 박정희가 남긴 유산 중 하나는 군대를 자주 정치에 동원해 민간사회를 직접 통제한 것이었다.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곤 했다.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와 1979년 10월 부마항쟁 등의 현장에는 늘 군대가 출동했다. 계엄령 외에 위수령도 적극 활용했다. 1965년 4월 19일과 8월 26일, 1971년 10월 15일, 그리고 부마항쟁 때의 마산 지역에는 위수령을 선포했다. 특정 지역에 한정시켜 발동한 위수령은 그 모법母法조차 불분명한 대통령 명령이었다."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도 신군부가 처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공수부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시위 진압이었고, 평시에도 공수부대의 훈련에는 시위 진압훈련인 '폭동진압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세력이 병영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공수부대는 정치에 동원됐다."(45-6)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에서는 1·2·3군사령관과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후방의 충정부대에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1/4분기의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공수부대도 정규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훈련에 매진했다. 주간에는 CS탄, 500-MD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됐고, 매일 밤 출동 준비 군장을 꾸렸다가 해체하는 혹독한 훈련이 기계처럼 반복됐다. 의아한 점은 당시 국방장관이던 주영복은 폭동 진압훈련을 실시하라는 육군본부의 지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의 특별지시에 따라 강원도 화천에 주둔한 11공수여단에서도 충정훈련이 강화했다. 공수부대는 아니지만 후방의 충정부대로 배치된 20사단도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이렇듯 1980년 2월부터 군은 충정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충정훈련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66-7)
"〈부마지역 학생 소요사태 교훈〉은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일종의 작전평가서이다. 1976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00시 01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해병 7연대를 부산대에, 3공수여단을 동아대에 각각 출동시켰다. 이날 부산의 남포동 등 7곳의 시위 발생 지역에 3공수여단을 투입, 〈철저하고 간담이 서늘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하여 〈학생이나 깡패들의 데모 의지〉를 〈말살〉시켰다. 다음 날에는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을 부산 지역에 추가 배치하고, 특전사령부 지휘부도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10월 20일에는 1공수여단 2대대와 5공수여단을 마산 지역에 투입했다. 보고서에는 시위계층을 〈학생이나 깡패들〉로 명시하고 있다. 이 점은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리 및 단어와 유사하다. 보안사령부는 5·18항쟁을 주도한 계층을 '학생, 깡패, 불순분자, 야당 정치인'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항쟁 주체를 특정 계층으로 축소시켜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69-70)
2_5·17쿠데타-비상계엄 전국 확대
"무력으로 국회 개원을 막아 헌정질서를 유린한 신군부는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설치한 뒤 개헌뿐 아니라 언론 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 공무원 숙청, 10·27법난, 삼청교육대 설치 및 운영 등 무소불위의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며 제5공화국의 출범을 기획했다." "한편 5월 15일 서울역에서 회군한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은 가두시위를 일시 중단하고 정부 발표를 기다리기로 결의했다. 국회 개원과 함께 학생들도 군 개입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고 시위를 일시 중단한 것인데, 이는 신군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당시는 야권과 국민들이 힘을 모아 유신체제를 청산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였다.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공화국에 어울릴 만한 헌법을 채택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국민들의 바람이 멀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보고서의 마지막 단계인 군 투입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85-7)
"신군부는 5월 초순경부터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상정했다. 국내에서 가두시위가 발생하여 사회가 혼란해졌으므로, 이에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군이 나선다는 게 군 동원의 명분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신군부가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정당한 조치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거짓이었다."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5·17전국 비상계엄의 배경〉에서는 〈학원 및 노조의 소요사태로 극도의 사회혼란, 적색분자 개입의 본격화, 국민경제의 도탄〉 등을 틈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침투하면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이므로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안정 속에 성장과 발전을 희구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코자 5·17조치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군부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의 침투〉를 꺼내들고 있다는 점이다.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거가 이미 1980년 5월부터 등장하고 있었다."(88-9)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성명은 '북괴 남침설'을 재확인하는 성명이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5월 17일 자로 '정치 활동의 금지, 정치 활동 이외의 옥내외 집회의 신고 및 언론의 사전 검열, 대학의 휴교, 태업 및 파업의 금지,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선동적 발언 질서문란 행위 금지,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 등을 규정한 포고령 10호를 공포했다. 포고령 10호에 따라 헌법에 보장된, 심지어 유신헌법에서조차 보장된 국민들의 기본권은 무시되었고 계엄포고 위반을 들어 무차별적으로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사회는 다시 1979년 10·26 이전의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엄령이 작동하는 시대로 되돌아갔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 해제는 국회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탱크와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국회 개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1980년 5월에도 끝내 국회의 문은 열리지 못했다."(111-2)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군과 대통령의 주장은 '대국민 사기극'에 다름 아니었다. 1979년 12월 북한은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의 제안에 대해 정부는 1980년 1월 24일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자고 역제안했다. 그리하여 1980년 2월 6일 판문점에서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을 시작으로 이후 총 10차례의 실무회담이 열렸다. 정부는 5월 초순부터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북한 남침설'을 유포시켰다. 그러면서도 2주에 한 번씩 북한과 회담하고 있었다. 심지어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을 비롯해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남북회담 실무진이 판문각에서 접촉했다.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면서 그 위협의 배후이자 당사자인 북한과 실무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12-3)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가두시위의 중단을 결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반면, 광주에서는 5월 16일, 시내 9개 대학 학생과 시민 등 3만여 명이 오후 3시부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시국성토대회에서는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함께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5월 15일 자)이 낭독됐다." "경찰은 주변의 질서유지에만 힘쓰고 학생들도 담배꽁초와 휴지를 줍는 등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가두시위와 집회를 마쳤다. 횃불시위를 마친 학생운동 지도부는 사태를 관망한 뒤 5월 19일 다시 성토대회를 열자고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5월 18일까지 시국을 관망하자는 전국총학생회단의 결의안에 따른 결의였다. 경찰이 시위를 지켜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위 대열을 보호해주는 가운데 5월 16일의 집회 및 횃불시위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날의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120-3)
3_항쟁의 시작
"5·17조치가 공표됨과 동시에 5월 18일 새벽 전국의 201개 보안시설에 총 2만 4,740명(2,009/22,731)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 중에서 2만 2,342명(1,865/20,477)이 전국 92개 대학에 들어간 반면, 국가의 주요 보안시설 109개에는 불과 2,398명(144/2,254)이 배치됐다. 정부와 신군부의 주장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 보안시설의 경계를 강화하고 계엄군 병력도 그곳에 집중 배치되어야 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런데 이날 전국 국가 보안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의 비율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광주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하고 시민항쟁으로 전환되자 서울에서 광주로 계엄군 병력이 추가 파견됐다. 5월 19일부터는 광주 시내에 2대의 장갑차가 돌아다니고 헬기가 떠다녔다. 5월 27일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될 때는 광주 시내에 18대의 탱크까지 진입했다."(126-8)
"계엄사령부 법무처는 5월 18일 법무기관에 법무장교를 감독관으로 파견하고, 5월 20일부터는 대법원과 법무부에 각 1명씩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또 계엄사령부는 각 지역의 계엄분소장들에게 5월 20일부터 6월 19일까지 한 달 동안 〈사회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해〉 군경합동 단속을 실시하여 〈사회의 암적 존재인 폭력깡패를 발본색원〉하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깡패 단속은 지역 책임제로 하되 〈암적 깡패는 군재에 회부〉하고 단속 결과를 매일 보고토록 지시했다." "주목할 것은 '지역 책임제'라는 형식을 빌려 연행자의 수를 지역별로 할당한 점이다. 단속 대상인 〈암적 깡패〉의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외 대상자들의 인권도 무시될 수밖에 없다. 명확한 기준이 없을 경우 임의의 원칙, 다시 말하면 군이나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 아래 국민들의 인권이 말살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지역 할당제는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됐다."(133)
"7공수여단 31대대가 전북대를 점거하고 학생들을 체포하던 도중 전북대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북대에 진주하던 공수부대를 피해 도망하던 전북대 학생 이세종(농학과 2학년)이 사망했는데, 7공수여단은 그 사인을 '좌상박부 골절 및 우측 두개골 함몰 골절'로 인한 즉사로 상급 부대(전교사: 전남·북계엄분소)에 보고했다. 그리고 〈변사자는 이 포위망을 탈출을 목적으로 지상 13미터 동 회관(학생회관) 옥상 북편 전등주에 매달려 은신하려다 힘이 빠져 변사한 것〉이며, 〈첩보 즉시 전주지검 안상수 검사가 현장에 입장, 지휘하여 진상규명 후 사체를 전북의대 부속병원 시체실에 안치 중〉이라고 보고했다." "안상수 검사는 2004년 10월 11일 열린 17대 국회의 전북도교육청 국정감사 자리에서 자신이 보기에는 〈총 개머리판에 맞아서 사망〉했으나 〈수사권이 비상계엄하라서 군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끝까지 밝히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고 발언했다."(142-3)
4_폭력과 야만의 시간
"학생들이 시내에서 시위하자 5월 18일 오전 11시 40분경부터 전남도경 안병하 국장의 지휘 아래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투입되기 전인 오전 11시에 전남도경국장은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치 않도록 할 것, 기타 학생은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11시 55분에는 〈연행 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있었던 학생들의 가두시위, 특히 5월 16일의 횃불시위 등에서 시민과 학생들을 보호하던 경찰에 비해 이날 진압의 강도는 강했다. 군이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 아래에서 평화를 지향한 그의 소신은 실현되기 힘든 '이상'에 가까웠다. 5월 27일 이후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의 합동수사본부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합수부에서 14일간 고문을 받은 뒤 '자진 사표' 형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149-52)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할 결과 5·18항쟁기 최초 희생자가 발생했다. 최초 희생자는 5월 19일 새벽 3시경 국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김경철이다. 보안사령부의 〈검시결과 보고〉에 농아자로 기술된 것처럼,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5월 18일 오후 친척을 배웅하고 귀가하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외마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른 채 온몸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검시결과 보고〉에서 그의 사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에 의한 뇌진탕'이었으며, 예리한 물체로 인한 타박사로 기록됐다. 〈검시조서〉에 서술됐듯이 그는 머리에서부터 몸통 아래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구타당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결국 머리 뒷부분을 맞아 입은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렀다." "김안부도 공수부대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뒤 사망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광주공원 부근에 처참하게 남겨진 그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했다."(168-9)
"학생들이 주도하며 수백 명 단위로 시위하던 5월 18일과 달리 5월 19일부터는 시민들이 시위에 본격 참여함으로써 그 숫자가 전날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전날의 참상을 목격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서서히 항쟁의 주역으로 시위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수가 전날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시위 진압에 사용된 장비도 달라졌다. 5월 18일에는 오후 4시부터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투입되어 진압했는데, 5월 19일부터는 서울에서 급파된 11공수여단의 3개 대대가 오전부터 광주 시내에 추가 투입됐다. 이날 충정작전 수행을 위해 차량 37대(장갑차 2대 포함)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기갑학교장에게 내려졌다. 광주 시내 상공에는 5월 19일 오전부터 헬기가 출현했고, 광주시 동구청에는 10시 57분경 〈상공에 헬리콥터 비행 순찰 중〉이라고 보고됐다."(179-80)
"5월 19일 시위 진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수부대원들이 금남로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5월 19일의 진압이 무자비한 폭력에 더하여 금남로 한복판에서 연행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는 야만의 행동을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광주 시내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9일에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한 시민들의 겉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기합(원산폭격)을 주었다. 동구청 민원실과 같은 관공서까지 쫓아 들어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뒤 연행해갔다. 관공서만이 아니었다. 민가, 병원, 학원, 숙박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뒤따라와 난폭한 행동을 저질렀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시위 진압 광경이었다. 후방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위 진압'이라기보다는 흡사 '전쟁터에서 적국의 한 도시를 점령한 승리자들이 벌이는 비이성적 폭력'에 가까웠다."(181, 184)
"5월 19일의 전교사 계엄회의와 2군사령부의 지시에 보이듯이 군은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는 5월 19일부터 이를 '도시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즉 군은 시민들을 '도시게릴라'로 규정하여 강력한 진압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한 〈치명상을 입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한 타격〉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도 더욱 강력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 강도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더욱 상승한 셈이었다. 5월 19일 중앙기동예비대이던 3공수여단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고 이동이 시작됐다." "아직 전교사에서 추가 병력 파병을 요청하지 않은 시각인데도 3공수여단의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는 광주의 상황이나 정식 명령계통과는 상관없이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활동이 지역의 계엄분소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이다."(209-11)
"군 최고 지휘부는 광주의 계엄군에게 광주 시내에서 발생하는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라고 계속해서 명령했다. 군 최고 지휘부의 명령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과 현장의 공수부대원들에게 하달되면서 진압의 폭력과 야만성을 증폭시켰다.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는 당시 11공수여단이 점거한 조선대에서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 지휘부의 명령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집합된 병력에게 다시 구타를 강력하게 하지 않는다고 더 강하게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 이병을 불러내더니 이 병사는 구타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엎드려" 하더니 자신이 휴대한 진압봉으로 엉덩이를 열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군요. 머나먼 광주에서까지 자기 부하를 구타하는 중대장이 죽도록 미웠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증오심은 더 강하게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224)
5_항쟁과 발포 사이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진압 및 해산'의 구도를 뒤집은 것은 5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된 기사들의 차량 시위였다. 공수부대의 폭력과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분노하던 기사들이 5월 20일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차를 몰았다." "맨주먹으로 공수부대에 맞서던 시민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금남로로 진입하는 차량 대열을 보고 감격해하며 합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시위 군중들이 공세가 거세지자 공수부대를 비롯한 군경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밤 광주시청을 지키던 3공수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당하며 고립됐다. 이에 전남대에 있던 3공수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주시청으로 지원을 나갔다. 그런데 3공수여단 작전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원을 나가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했다. 5·18항쟁 기간 처음으로 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246-9)
"광주역 앞에서 발생한 3공수여단 집단발포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3공수여단이 집단발포에 이르는 과정과 시간이다. 지금까지 3공수여단의 집단발포는 시민들이 차량을 이용, 공수부대를 공격하여 3공수여단의 대원들이 사망하거나 다치게 되자 발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안사령부 자료에 의하면 21시 50분에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8톤 트럭에 치어 사망한 뒤 각 대대에 M-16 소총 실탄을 나눠주고 장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3공수여단 본부중대의 지원 병력이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출발한 때는 이보다 앞선 시각이다. 따라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하는 공수부대를 차량으로 공격한 것이라 추정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격렬하게 대항한 까닭에, 시민과 공수부대원들 모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3공수여단 철수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은 5·18항쟁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53-6)
"광주에서 시민에게 처음으로 무기가 반출된 때는 5월 21일 새벽이다. 시민들은 광주세무서를 불태우며 직장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카빈 소총 50정 중 17정을 반출했다. 이날의 무기 반출은 5·18항쟁에서 시민이 무장하고 군에 대항한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당시 광주세무서에서 반출된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으며, 군에서도 이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군에서는 〈광주세무서에서 CAR 17정 분실(20일 야간), 실탄 1,800발 사전 회수 통합 보관〉하고 있었다. 세무서뿐만이 아니었다. 당수 광주 시내의 실탄과 노리쇠 등은 전교사와 31사단이 이미 군부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빈 총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군 자료의 용어와 서술 기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시위하는 시민들을 '시민'과 '학생' 또는 '군중'으로 표현했지만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가 있은 뒤부터는 '폭도' 또는 '난동자'라 칭하며 시민 저항의 성격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폭도가 등장하는 것은 5월 20일 21시 5분의 보고이다."(258-9)
"5월 21일 새벽 3공수여단이 전남대로 철수한 뒤 시민들은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내팽개쳐진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희생자들은 허봉(19)과 김재화(34)였다. 허봉의 사인은 '우측 두정골 열상, 좌측 좌두부 좌상'이었다. 사망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광주역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피 흘리며 죽어갔다. 김재화는 광주역 광장에서 총상을 입고 노광철의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21일 새벽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로, 사인은 '좌측 흉부 우측 흉부 관통상(M16)'이었다. 이들 사망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역 부군에서 총상이나 타박상을 입었다." "5월 21일 새벽,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은 그때까지 광주 시민들의 가슴에 쌓인 슬픔과 분노에 불을 지폈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덮은 두 구의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로부터 쫓아내기 위해서였다."(260-2)
"각종 자료와 증언에 기초하여 5월 21일 오후 1시 전후의 상황을 다시 구성해보겠다. 5월 21일 새벽 5시경 광주역에서 참혹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한 시민들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오전 1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전남도지사와 시민 대표들의 협상에서 시민들은 '정오까지 공수부대의 철수'를 비롯한 정부의 만행 인정과 사과 및 보상 등을 요구했다.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점차 전남도청 쪽으로 밀려나며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무렵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시민들이 금남로에 있던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져 불이 붙자 계엄군 측 장갑차 한 대가 뒤로 물러났다. 이 무렵 시민들이 당일 오전에 아세아자동차로부터 꺼내온 장갑차가 전남도청 앞 분수대의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로 인해 계엄군의 저지선이 붕괴되고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분수대 뒤쪽과 전남도청 및 그 주변으로 피신했다."(284-5)
"전남도청 앞을 돌아 빠져나갔다가 다시 금남로에 나타난 시민 측 장갑차와 뒤따라온 버스가 또다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뒤이어 11공수여단 63대대 8지역대 권용운 일병이 장갑차에 깔려 희생됐다. 시민이 몰던 장갑차가 잠시 멈춘 다음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갈 무렵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집단발포를 시작하고, 장갑차를 뒤따르던 버스를 향해서도 일제 사격했다. 그즈음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방송되고 분수대 부근의 공수부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집단발포했다. 이후 대열을 정비한 공수부대는 수협 등 주변 건물의 옥상에 저격병들을 배치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에서 100~3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저지선을 설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금남로와 충장로 등지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금남로와 노동청 쪽 방향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도 금남로 쪽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실시했다."(285)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놀라고 분노한 시민들은 곧바로 무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무장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들이 무장저항,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복종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총을 든 시민들은 최소한의 자구책, 생존을 위해 총을 들었지만 언제라도 공권력의 잘못이 고쳐지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총을 내려놓겠다는 입장이었다." "시민들은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무기를 구했다. 주로 경찰서와 지서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등지에서 무기들을 꺼냈고, 화순 무기고(화순탄광)와 같이 폭발물이 있는 곳에서 무기와 폭발물을 구해 무장했다. 당시 각 지역의 경찰서 및 지서에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광주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꺼내 가는 시민들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 나타난 시각은 대략 5월 21일 오후 2시 30분 전후이다. 자료들에는 이날 오후 3시 무렵부터 총격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96-300)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것은 작전상 후퇴일 뿐 진압작전의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계엄사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토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광주는 '외부의 불온세력'과 연계된 '폭도'들이 점거한 '불량도시'로 규정됐다. 계엄군의 작전은 광주와 외부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군에 자위권이 발동되고, 많은 양의 실탄이 병사들에게 주어졌다. 게다가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퇴각하여 외곽을 봉쇄할 병력들이 충분해졌다." "5월 21일 이후 실시된 계엄군의 광주 봉쇄는 새로운 '경계'를 통한 '구분 짓기'를 의미한다. 계엄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는 단순히 시민들의 출입을 막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민들의 출입을 군이 가로막는 것도 문제이지만, '폭도'와 '양민'을 가르는 경계가 만들어진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바리케이드는 이후 외곽 봉쇄 기간 내내 '학살의 경계선'으로 기능했다."(310-2)
6_일어서는 광주
"시민군은 광주 시민들의 두터운 지지와 후원 속에 탄생한 조직이었다. 나이와 직업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손에 총을 들 수 있는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박남선은 전남도청 본관 1층의 전남도청 서무과에 시민(군)상황실을 차리고 상황실장을 맡아 시민군을 조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항쟁 초기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시민군의 주력도 대학생에서 청년들로 바뀌어갔다. 총을 잡은 시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시민군은 대부분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는 장면을 보거나 듣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총을 들었다." "시민군 중 순찰대들은 일상적인 치안 유지뿐 아니라 사고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차량 통제까지 했다. 5월 22일부터 차량등록증을 발급하고 5인 1조씩 순찰대를 구성했다. 5·18항쟁을 왜곡하려는 극우세력들은 이들을 '광수 몇 호'라 부르며 북한의 특수부대원들로 매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남로나 충장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이었다."(349-51)
"지금 와서 보면 민군 협상은 논의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떤 결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한 협상이었다. 시민 대표들은 시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실질적인 대표단이었던 반면, 전교사의 군인들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전남·북 계엄분소의 지휘부, 즉 계엄사령부의 하급 부대 실무자들일 뿐이었다. 군이 시민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다른 의미 있는 상황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수습위원들이 무기 회수에 나서자 시민(군)들은 강력 반발했다. 시민들은 무조건 무장해제(반납)만을 강요하는 군의 압박에 반발했다." "군이 시민대표단과의 협상을 계속하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한미 간 협의, 지역감정, 민간인 인질 등을 이유로 5월 24일까지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을 연기토록 지사하고, 국방부장관은 5월 25일 이후로 연기하도록 했다. 결국 전교사 사령관의 지휘 아래 5월 27일 01시에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357-9)
"시민 내부의 강온파 간 대립과 갈등은 세력 분화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5월 25일 밤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구성됐다. 이날 새로 구성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의 총 12명의 지도부 중 7명이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었다. 정상용·이양현·윤강옥 등은 민청학련사건 등 시국사건과 관련하여 구속 또는 제적당한 뒤 학외에서 활동했다. 윤상원과 김영철은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함께 활동하며 노동운동과 주민운동을 전개해왔다. 정해직은 교육운동을, 박효선은 극단 광대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전개해왔다. 5월 26일 밤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재진입할 것을 예상하며 시민군을 재편하여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하여 최후 항전에 대비했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은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두렵거나 무서운 사람,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권유했다. 또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본격 진입하기에 앞서 여성과 어린 중고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364-6)
"5월 23일 국방부 출입기자단 21명이 국방부 대변인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를 방문 취재했다. 이들이 촬영한 장면은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들(현역, 민간인)의 치료 장면, 병원 앞에서 군인과 폭도가 대치하고 있는 광경, 광주 시가지 항공 촬영, 불에 탄 MBC 건물, 도청 주변 폭도 동정, 시가지 차량 및 시민 움직임, 차량 소실 현장 등이었다. 5·18항쟁이 폭도들의 행위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목적에서 의도된 사진 촬영이다. 국방부는 이들에게 헬기를 비롯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는 5·18항쟁을 인식하는 군이 시각이 담겨 있다. 군은 기자들에게 (데모대 진압과정에서) 선무와 발포 명령이 없었기에 사태가 악화됐고, 불순집단이 섞여 있으며, 시민들의 저항을 〈반정부 폭도〉들의 행위로 낙인찍고 있다. 오늘날 5·18항쟁 왜곡의 주요 근거가 이미 1980년 5월 22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375-7)
"5·18항쟁의 왜곡과 관련해 또 언급되어야 할 부분은 보안사령부에서 고급 장교들을 광주에 파견한 점이다. 5월 19일 오전 9시경 보안사령부 참모회의에서 광주 상황에 대해 토의한 뒤 당시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했다. 보안사령부는 광주일고·육사 출신의 홍성률 대령도 광주로 파견했다. 홍성률 대령은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9사단장 노태우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알리는 개인 서신을 직접 전달한 인물이다." "상무충정작전의 실행을 앞두고 보안사령부는 군의 진입에 앞서 시민군의 무선을 감청하려는 목적에서 515보안부대를 5월 26일 오후 7시 광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송정리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 중이던 계엄군들에게 총 6,300만원의 돈과 중식용 소 7마리가 내려졌다. 이 중 보안사령관이 금일봉을 내린 게 흥미롭다. 보안사령관이 적지 않은 금일봉을 내린 것은 당시 누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398-400)
"공수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 5월 27일 01경부터였으며, 03시 30분부터 미리 정해진 광주 시내의 주요 지점으로 은밀히 침투했다. 상무충정작전이 본격 시작된 것이었다." "3공수여단이 새벽 4시 51분에 무장 헬기 지원을 요청했고, 전교사는 5시 35분에 헬기를 지원했다. 5시 28분에 군은 전남대병원을 점거했다. 특공 임무를 마친 공수부대가 보병부대에 점거시설을 인계하고 광주 시가지에서 철수를 완료한 시각은 3공수여단이 7시 5분, 7공수여단이 7시 15분, 11공수여단이 7시 25분이다. 뒤이어 보병부대가 광주 시내에 주둔하는 것으로 5월 27일 새벽에 전개된 상무충정작전은 일단락됐다."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이 흘린 핏자국이 남겨지고 탄흔이 새겨졌다. 그렇게 5월 27일 아침이 찾아왔다.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는 탱크가 자리했다. 국민들을 학살한 자들은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을 들락거렸다."(408, 412-5)
"광주에 배치된 각 부대의 총 병력은 2만 365명(4,727/1만 5,590)이었다. 원래 전남·북 계엄분소인 전교사의 병력에 특전사령부 병력(3·7·11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이 더해진 통계이다. 총 47개 대대라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에 총 30대의 헬기와 항공기(O-1), 전차, 장갑차, 각종 차량 등의 장비까지 동원했으니 정부와 군,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쟁을 벌였던 셈이다. 5·18항쟁 기간 동안 총 2만 365명이 군인들은 총 51만 2,626발의 실탄을 사용했다. 발포하지 않은 계엄군을 감안하면 1인당 50여 발 이상 발포했고, 공수부대는 100여 발 이상의 실탄을 사용한 셈이다. 이는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상무충정작전 직후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소속 의사들과 보건소 의사들이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검안했다. 이후 검찰은 민간인 희생자 수를 총 142명으로 발표했다."(418-20)
"5·18을 무력진압하고 며칠 뒤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김대중을 비롯한 36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8월 13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8월 6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중장으로 승진한 지 불과 5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15분부터 9시 40분까지 합동회의를 가진 최규하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8월 18일 오전 10시 8분에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출발했다.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뒤이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이날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보고회를 비롯해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려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그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총 투표자 2,525명 중 1명이 기권했다 그리하여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4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