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문: 퍼즐 


"나는 소련 붕괴가 불가피했다는 지배적인 서사, 즉 서방과 소련 내 반공주의 집단 내부에서 생겨난 서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소련 붕괴의 역사는 사전에 알려진 대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상, 두려움, 열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가 전개되며 펼쳐진 드라마였다." "이 책은 고르바초프를 중심에서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소련 행위자와 목소리, 이니셔티브(주도적 행동이나 조치)를 소개한다." "또한 소련 붕괴에 서방, 특히 미국이 미친 영향의 궤적을 고찰한다. 정부 및 비정부 행위자들과 언론은 소련 정치와 상상력에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멀리서 보면 잘 알려진 증거도 달리 보인다. 소련사의 최종 국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내가 그 사건의 참여자이자 목격자였을 때보다 지금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련의 종말에서 무엇보다도 돈이 결정적이고 가차 없는 역할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소련 시절에 경제적 무지라는 내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예전에는 완전히 놓친 것이었다."(25-8)


1부 희망과 오만, 1983~1990년


1장 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소련의 세입과 재정 상태는 위태로웠다. 문제는 서방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막대한' 국방 지출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련이 세계경제에 점차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과 소련의 재정이었다. 소련의 무역수지는 높은 유가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사근사근하고 태평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과 달리 안정화 자금의 축적, 다시 말해 미래에 대비한 저금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82년 11월 당 총회에서, 안드로포프는 곡물, 지방, 육류를 비롯한 식품의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을 비판했다. 〈누굴 겁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린 지난 몇 년간 수십억 루블과 금을 낭비했소.〉 소련은 석유에서 나온 이윤을 서방의 과학기술을 수입하는 대신 식량을 수입하고 위성국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써버렸다. 적어도 폴란드는 서방에 진 빚더미에서 깔리면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할 테고, 미국은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미국인들이 소비에트 블록에 속한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통화 전쟁'에 관해 불길하게 언급했다."(36-7)


"안드로포프는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당 개혁가를 찾았다. 그렇게 만난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적 신념은 공포와 배신, 학살의 세월로 얼룩지지 않았다. 1950년대에 모스크바대학을 다닌 학생으로서, 고르바초프는 불셰비키 지도자를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친애하는 일리치'는 전제정과 불의에 맞섰고, 대중 테러 수단을 마지못해 채택했으며, 스탈린을 몰아내려다 비극적이게도 일찍 죽었다. 이 신화는 고르바초프 일파에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레닌은 이상이었고, 스탈린은 결함 있는 현실이었다." "1985년 12월,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에게 미래 정치 개혁을 위한 요강을 보냈다. 그는 지도자의 임무가 소련 사회에 억눌린 좌절감을 급진적 변화로 돌리는 것이라고 썼다. 초점은 정치적 개혁에 맞춰져야 한다.야코블레프는 당을 경제 관리에서 배제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탈집중화, 글라스노스트(문제점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는 '관료제라는 독재'에서 소련을 해방해줄 것이다."(40-3)


"신레닌주의적 웅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첫 2년 동안 어떤 개혁 전략을 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레닌의 숭배자로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소생시킬 핵심 수단을 모색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의 보수적인 충고도 유념했다. 야코블레프가 제시한 급진적 정치 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소련 인민이 경제에서 실질적인 개선을 실감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므로 집권 직후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다뤄야 할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1) 품질 2) 금주 투쟁 3) 빈곤층 4) 과수원과 텃밭을 위한 토지 5)  의약품.〉 놀랍게도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거시경제 안정성에 관해 제기했던 시급한 문제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식량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 균형을 회복하고, 그림자 경제를 강력히 단속하고, 노동력을 규율할 필요성 말이다. 고르바초프의 작성문은 소련 경제를 괴롭히는 경제적·재정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은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의 공식 표어는 '가속화'였다."(44-5)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 소련 경제학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을 계산했든 간에, 1986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참사는 모든 것을 망쳤다. 소련 예산 중 체르노빌 참사 복구 비용은 사고 후 첫 한 달간만 30억 루블에 달했다. 1989년 초, 리시코프는 복구 비용이 8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무신론자지만 미신을 믿었던 라이사 고르바초바는 체르노빌을 매우 나쁜 징조로 여겼고, 수백만 명이 똑같이 생각했다.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소련 지도자는 물론 격노했지만, 레닌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는 위기를 이용해 포괄적인 결론으로 비약했다. 구체제 전체가 심하게 병들고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혁명을 요구했다. 주된 메시지는 소련이 벼랑 끝에 있는데, 지난 15년간 국가와 인민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았고 고약한 습관에 빠진 탓이라는 것이다. 당이 이 수렁에서 그들을 끌어내지 못하면 소련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늪'으로 다시 가라앉을 것이었다."(48-9)


"국영기업법은 1988년 1월에 시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개혁가들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법은 과거 소비에트 경제를 안정화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 무엇보다도 당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자들은 당원이자 노멘클라투라였다. 이제부터 기업의 수장은 노동자와 직원의 '조합'에 의해 선출된 예정이었다. 더 이상 위에서 해고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개혁은 진정한 자유화와 경제 회생을 불러오지 못했다. 경영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기업 조합들은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를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고 능률과 생산 품질을 개선할 동기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 이윤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임금과 봉급을 불릴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소련 소비자 중 절대다수가 원하는 값싼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고, 값비싼 품목의 생산에 초점을 맞췄다. 단 몇 년 만에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소비에트 경제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을 터였다."(53-4)


2장 해방 


"소련 경제를 개혁하는 데 열심인 서기장이 서방 국가를 방문할 때 경제학자, 기획자, 군수 산업 경영자, 은행가, 여타 기술 관료와 동행했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는 언론인과 사회과학자, 작가, 연극 연출가, 영화제작자를 비롯하여 문화 인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수행단을 데려갔다. 대다수는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서방의 모든 것에 대해 매혹과 찬탄,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급진적 개혁을 위해 소련 인민을 준비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고무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열심히 모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의 주요 원천은 모두 서방에 있다고 믿었다." "내부 담론에서 사용된 적 없는 언어와 개념이 들어올 길이 열렸다. 소련은 이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고, '다원주의', '위기', '전체주의', '스탈린주의' 같은 단어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 들여온 어휘들과 소련 언론인, 사회과학자, 작가의 저작에서 나온 어휘들이 소련의 옛 어휘를 점차 대체해나갔다."(74-5)


"고르바초프가 전 지구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투철한 신레닌주의자였다. 정치국과 측근들과 함께 외교 정책을 논의하면서,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은유를 활용하곤 했다. 이것은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 3월에 독일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한 도시다. 이 조약으로 레닌은 영토를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소비에트 정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후퇴와 긴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이 은유를 이용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가 주는 교훈은 지정학적 양보 이상을 뜻했다. 그는 냉전의 상대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하고 싶었다. '공동의 이해관계'와 '인류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함께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소련 지도자는 현실정치의 각본을 따르는 대신, 도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보편적 비전을 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제안을 경제 및 정치 개혁의 시작과 일치시켰다."(75)


3장 혁명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소련 최초의 핵무기를 설계했지만,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권 옹호자가 되었고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항의했으며 1980~1986년 KGB의 감시 아래 망명 생활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1989년 봄의 모스크바 민주파 모임에서, 사하로프는 법의 지배, 시민사회, 인권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적 의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한때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막 탄생한, 말하자면 젊은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빙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죠. 1주일, 아니면 2주일? 정말이지, 한 시간 만에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그는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최고의 전술은 불가능을 이루려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연단에서 허용되는 한 '진살의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가 기대하거나 원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111-2)


"인민대표대회가 만든 새로운 최고소비에트의 주요 메시지는 '행정적-관료적 시스템의 타도'였다. 입법 활동의 상당 부분은 '전체주의적'이지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은 경제를 수립하려는 욕망에 영감을 받았다. 갓 당선된 의원들은 유권자들에 대한 열의를 과시하며,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을 확대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다양한 요구를 정부에 쏟아냈다. 하지만 필요한 수단과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부 위원회들은 기업체와 협동조합 및 수출 지향 이해집단을 대변하는 새로운 로비 활동가들을 위한 정보 교환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고소비에트는 그러한 경제 행위자들에게 이익은 더 많이 배분해주고 세금은 낮춰주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 긴축 프로그램의 기획자인 아발킨은 1989년 7월 말에 최고소비에트가 〈[경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법안을 단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가 불능〉의 기운이 짙어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했다."(118-9)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같은 해에 일어난 소련의 급진화처럼, 서구식 소비주의가 대중을 유혹하면서 야기되었다.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 위에서 자유에 취해 춤추는 동안, 수십만 명이 서베를린의 호화로운 상점을 뒤덮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보고 만지고 맛보고 싶었다." "1989년 봄과 여름에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자유화 노선은 상당한 급진화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나라의 핵심부, 무엇보다 모스크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업 지대,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전면이 먼저 무너졌고, 그다음은 동유럽에 위치한 외부 제국의 차례였다. 12월 16일, 동유럽의 마지막 공산 정권이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소련 지도자와 엘리트들에게 내부의 위기가 외부의 사건을 점차 압도했다."(139, 144)


4장 분리주의 


"옐친은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로 기울었지만, 미국을 방문한 후로는 자유주의적 의제로 전향했다. 1989년 12월 초, 그는 '러시아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러시아의 민주적·국가적·정신적 부활〉이라고 선언했다. 옐친의 '러시아'는 러시아연방만이었다. 그는 소련의 핵심부가 완전한 주권을 얻고, 자체적으로 헌법을 보유하고, EEC에 가입하고, 미국, 일본,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길 원햇다. 터무니없이 야심 찬 목표였지만, 그 덕분에 옐친은 급진적인 포퓰리즘적 의제를 세웠다.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옐친이 보내는 메시지는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들이 오랫동안 보유했던 경제적·정치적·사회적·과학적 기관이 없는, 국가성이 없는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인텔리겐치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달랐는데, 러시아연방이 민주파에게 더 나은 목표라는 것이었다."(150-1)


"1990년 5월 31일 정상회담 첫날, 부시가 독일과 NATO에 관해 묻자 고르바초프는 갑자기 헬싱키최종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가입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부시와 미국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고르바초프가 거래하려 들거나 자문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매우 중요한 것을 그냥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체르냐예프가 소련대표단 가운데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위해 외교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크렘린 지도자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소련이 〈더 강하지만 민주적이고 ······ 진보적이고, 역동적이고, 자유로워져서, 바깥 세계와 미국을 향해 돌아서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 외에 나머지 소련 대표단은 그런 고고한 염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공통의 목표 의식, 고르바초프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더는 없었다. 미국인들과의 동맹이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개혁을 구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173)


"부시 행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한 지렛대로서 계속해서 미국의 지원이라는 미끼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부시는 소련 경제 계획의 지침을 IMF와 세계은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한 터였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의 개혁 정책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제 개혁이 실패하더라도 부시 행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1990년 전반기 동안,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엘리트층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갈수록 거침없어지는 러시아 대항 엘리트층을 결국엔 상대해야 했다. 한쪽은 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에서 옐친이 이끄는 집단이고, 다른 한쪽은 '러시아공산당' 집단이었다. 대항 엘리트층은 러시아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포퓰리즘,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상충하는 세력들을 대변했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추락했고 정치적 기반은 좋게 말해서 위태로웠다.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유일하게 유리한 입지는 세계 정치가라는 독특한 위상이었다."(177-8, 181)


5장 갈림길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연석회의에서 경제 위기의 심각성과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짐짓 놀라워한 유일한 참석자였다. 그는 페트라코프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리시코프가 정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길 기다렸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경제 전략 논의를 의회 기구에 위임했다. 둘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양극화, 급진적 포퓰리즘, 희생양 찾기의 분위기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대통령뿐이었다. 최고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돈이 많이 드는 사회 보호 프로그램에 투표했다. 그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돈은 지폐를 더 찍어내야 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심화된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리시코프 정부는 마침내 국영기업의 수익에 55퍼센트를 과세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포퓰리즘적인 최고소비에트는 거부권을 행사했다."(182, 187)


"사실, 옐친은 강력한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는 러시아와 같은 주권국가들로 구성되고, 상위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는 연합만 수용할 태세였다. 옐친의 구체적 요구 사항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이었다. 그는 리시코프 정부와 재무부, 국영은행, 대외무역은행의 수장들도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재무부는 개별 공화국들에서 파견한 이사들이 감독해야 한다. 러시아연방은 자체 KGB와 경찰을 두고, 수도인 모스크바와 자체 세관, 대륙붕·삼림·어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러시아 영토상의 무수한 산업 단지와 MIC(군산복합체)의 '폐쇄' 도시들도 관리해야 한다. 러시아 정부는 금 보유고와 다이아몬드, 석유, 여타 자원에서 러시아의 몫을 받아야 한다. 러시아의 과학아카데미, TV 방송, 항공사도 설립될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옐친은 〈크렘린은 러시아 소유〉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의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로 선출된 지난날의 추방자는 최후통첩의 언어를 구사했다."(197-8)


6장 리바이어던 


"소련군이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철수하기로 하자 이는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인 야로센코는 〈우리는 거대한 소련 군사력을 파괴하기로 동의했다. 그것도 공짜로. ······ 하지만 최고소비에트를 비롯한 누구도 그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 신뢰? 대출? 지원? 코콤(COCOM) 제재의 끝?〉 … 국방부장관 야조프는 전쟁으로 형제들과 형제들과 일가친척 서른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참모총장 모이세예프는 전쟁에서 형제들을 잃었다. 그들의 경력 전체가 냉전기에 이뤄졌다." "장성들은 고르바초프가 신세계 질서라고 말하는 사명감 가득한 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무감과 규율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뜻을 따랐지만, 속으로는 대후퇴에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자문은 좀 더 유연해져서 군축 회담에서 양보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통일독일이 NATO에 가입하리라는 전망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228-9)


2부 쇠퇴와 몰락1991년


7장 대치 


"소련 지도자는 걸프에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에게 걸프전은 그와 부시가 함께 건설하기로 다짐한 평화로운 세계 질서라는 비전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걸프전의 결과로 고르바초프는 체면을 잃고 위축되었다. 체르냐예프는 상관이 불만을 터트렸다고 기록했다. 〈워싱턴에서는 옛 시절과 옛 방식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열광적 도취를 끝내려는 모양이다.〉 미국의 걸프전 준비 과정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과의 유혈 충돌은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운 음모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자문들이 〈반대파, 누구보다도 옐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라고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분명 고르바초프는 KGB 보고서에 의존했지만, 체르냐예프조차도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고르바초프의 꿈을 전쟁이 묻어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체르냐예프와 그의 상관 모두, 소련은 미국의 하위 파트너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277-9)


"1991년 3월 17일의 전 연방 국민투표는 고르바초프가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억 4857만 4606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중 1억 1350만 명이 개혁된 연방을 보존하자고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 국민투표는 공화국들에서 분리주의에 대한 요구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까지 여섯 공화국이 투표에 불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두 공화국 국민의 과반수 이상은 독립공화국이 '주권국가연합'에 가입하는 데 '찬성' 표를 던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지만 그러고 나서는 연방정부가 없는 연합에 가입한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주 세 곳은 자체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찬성했다." "러시아연방 내 84개 자치구에서 옐친의 프로젝트는 확고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 투표 결과는 러시아연방 내 민족적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그의 정책을 확인해주었다."(283-4)


8장 이양 


"5월 21일,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의의 또 다른 특별 회기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크렘린에서 개최되었다. 4일간의 회기 동안, 러시아 대의원들은 선거 규정을 승인하고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으로 제한했다. 대회는 또한 옐친과 그 외의 다섯 후보자를 대통령 경선 후보자로 승인했다." "민주러시아는 옐친의 풀뿌리 선거 운동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제공했다. 대부분은 저항적인 '과학-기술 인텔리겐치아' 출신이었다. 옐친 선거 운동의 최말단은 그의 열성 팬, 다시 말해 혁명가적인 카리스마를 추종하는 수십만 개인이었다. 그들로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식의 통치와 구질서의 붕괴로 인한 고통스러운 권력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준종교적인 숭배심과 믿음도 불어넣었다. 서방 관측통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그저 옐친이 그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러시아식 사우나를 즐기며, 얼음장 같은 찬물에 첨벙 뛰어들었던 것이다."(304-7)


"옐친은 새로운 대통령직에 국가적 수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웠다. 옐친은 여전히 국가 관료 기구에는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포퓰리즘적인 연설에서, 옐친은 중앙 관료제가 터무니없이 돈이 많이 들고, 특권의 중심지이며, 인민이 더 잘 살 수 있게 재정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론 생각이 달랐다. 부르불리스가 회고하길, 옐친은 관료 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 계획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소련 관료 중 최고의 인력을 새로운 러시아 국가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옐친은 KGB가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의심했지만, 그런 막강한 조직의 적대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러시아 지도자가 러시아연방 내 비러시아계 '민족' 자치구들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산당 없이, 러시아의 영토적·정치적 주권을 공고히 할 다른 국가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KGB는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318-9)


9장 합의 


"1991년 여름은 소련의 미래와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에 적응시킬 방안에 관한 합의 없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서방의 선택지는 단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이곳의 비판가들은 준종교적 성격 때문에 이 개념을 '십계명'이라고 불렀다." "1991년 4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일부 러시아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그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년대에 경제 성장을 유일하게 경험한 칠레를 방문했다. 그룹의 리더인 비탈리 나이슐은 수학을 연구한 적 있는 41세의 경제학자로, 고스플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나이슐과 친구들은 소련의 관료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는데, 소련의 노동력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전체주의로 인해 변질되고 저하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시장 충격만이 노동 윤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상' 경제로 향하려면 완전한 붕괴와 고통, 그에 따른 생존의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322-4)


"야블린스키의 해법은 대기업들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민영화는 안정화 기금에서 인민이 대출한 돈으로 이뤄지며, 이 기금은 서방 국가들에 의해 조성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혁이 소련 경제에 시동을 걸고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위한 '마셜플랜'이라고 불렀다." "미국 언론은 이 계획을 신나게 공격했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에서 앨리슨과 야블론스키를, 〈자본주의가 돈을 댄 버팀목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긴급 구제하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들고나온 선의의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련이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붉은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주택과 아파트, 토지와 공장을 매각하고, 이윤 동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 요구되는 정치적 기후를 자유라고 한다〉라고 말했다."(329-30, 334-5)


"6월 3일, 행정부의 주요 일원들이 소련에 관해 토론했다. 국무부의 베이커 팀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존중과 관여'라는 입장을 대변했다. 그들은 공동의 경제 공간을 지닌 개혁된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딕 체니와 펜타곤 소속 보좌관들은 소련 '제국'의 해체를 환영하면서 소련 의존국인 쿠바와 아프가니스탄을 버리고, 핵무기를 감축하고, MIC의 해체 과정에 착수하도록 고르바초프에게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부 장관 니컬러스 브래디와 국제문제 특별보좌관 데이비드 멀퍼드는 재정적 근거에서 소련에 대한 대규모 지원에 단호히 반대했다." "브래디는 솔직하게 미국의 전략적 우선 사항을 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가 국방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소련이 시장 체제로 간다면, 그들은 대규모 국방 조직을 감당할 수 없다. 진짜 개혁 프로그램은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335-6)


10장 음모 


"불청객의 난입[쿠데타]으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고대하던 휴가는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훨씬 중요한 무엇이 툭 끊어졌다.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줄 알던 정치적 마법사 고르바초프가 끝났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미국과 맺은 모든 국제적 합의와 위대하고 민주적인 유럽 공동의 집에 대한 환상의 끝이기도 했다." "러시아연방의 모든 지역과 주요 도시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통치하기로 했다. 셰닌과 모스크바 당 조직의 수장인 유리 프로코피에프 같은 일부 당료들은 쿠데타 음모를 열렬히 지지했고, 당 연락망을 이용해 공화국별, 지역별, 지구별 조직의 동료들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모자들은 당 기반 시설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셰닌의 이름은 위원회 명단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반동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라고 바클라노프는 회상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새로운 것의 탄생을 상징해야 했다.〉"(384-6)


11장 훈타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옐친은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코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탱크 위에 올라선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허세였다. 옐친의 총파업 선언은 통하지 않았다. 군에 대한 그의 주장도 엄포일 뿐이었다." "누구도 옐친이 돌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련 헌정 질서의 주요 파괴자에서 수호자로 변신했는데 말이다. 미국의 방송국 자유라디오는 러시아 의회 내에 특파원을 두고 옐친의 발언을 소련 전역에 중계했다. CNN 카메라맨이 탱크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해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보도 방송은 옐친을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에 두었고, 사태 전개에 엄청난 중요성을 띠었다."(392-4)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면 대중적 정당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쿠데타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 그리고 러시아 역사의 교훈이었다. KGB 의장 크류치코프는 눈앞의 딜레마를 고민했다. 옐친과 러시아의 여타 선출 공직자들을 체포했다가는 서방에서 공분이 빗발치고 냉전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소련의 경제와 재정은 서방의 제재를 버틸 수 없었다. 크류치코프는 야조프, 야나예프, 루캬노프가 폭력사태를 각오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대 책임을 이용하는 점진적인 단계별 전술에 의해 비상통치가 필요하다고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옐친을 잡지 않고 놔둔 것은 크류치코프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다른 잘못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공모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막강한 무기인 TV를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TV에서 소련 인민들은 무자비한 훈타 대신, 권력 의지가 없는 한 무리의 썰렁한 관료를 목도하고 있었다."(396-400)


"훗날 정치적 목적을 위해 8월의 사건을 미화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옐친은 훈타의 구성원이 무자비한 냉소주의자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니라 〈평균적이고, 평범한 소련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이 인명과 합법성을 존중했다고도 시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항하고 권력을 잃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1993년 10월, 모스크바의 헌정 위기 동안에 옐친은 아주 딴판으로 행동했는데, 러시아 의회가 자신에게 대항하자 탱크 부대 지휘관들에게 의사당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고,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며, 6년을 더 집권했다." "국가 기구의 일부 목격자들은 8월 21일에 일어난 일을 '정치적 멜트다운(붕괴)'이라고 묘사했다. 공모자들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을 이뤄냈으니, 바로 중앙 정부의 행정부가 완전히 항복한 것이었다. 실패한 비상통치는 옐친과 그의 민주파 추종자 및 지지자에게 고르바초프와 헌정 질서를 대신해 집행 권한의 수단을 장악할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했다."(420-1)


12장 종말 


"소련 지도자는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사흘간의 개인적 드라마에 몰두해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훈타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지만, 서방 기자들을 제외하면 언론은 적대적이었다. 옐친의 자문이자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유리 카랴킨은 고르바초프에게 왜 그런 〈명백한 악당들〉을 정부의 중요 직위에 임명했는지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크류치코프와 야조프를 '신뢰했다'고 맥없이 시인했다. 또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현명하지 못하게 덧붙였다. 이 발언은 그 후 여러 음모론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동안 일부 인사들은 〈진짜 민주주의자〉처럼 처신했다고 말하며 당 기구를 변호했다. 영국 대사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소련 대통령을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봉 왕가에 비유하며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33)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고르바초프는 다시금 굴복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후보자를 임명하라는 옐친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 시점부터 소련 지도자는 명목상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군과 KGB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한때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본산이었던 당 본부는 이제 서류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이 줄지어 놓여 있는, 환기가 되지 않은 채 버려진 건물이었다. 당은 거대한 단체였기에, 누구도 그곳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날 늦게,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이끌던 권력 구조를 어쩔 수 없이 해산해야 했다. 옐친은 러시아 의회의 긴급 회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문서 한 장을 떠밀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가 〈[소련] 정부 전체가 사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옐친은 의기양양하게 소련의 다음 총리는 러시아연방에서 지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반대하지 않았다."(435-8)


"중앙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소련 경제의 무정부적 와해 과정이 시작되었다. 고전 명작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는 그리스의 마을 주민들이 부유한 부인의 집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단 몇 분 만에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탈탈 털려서 텅 빈 잔해만 남는다. 소련의 조르바 같은 환경에는 명백한 승자가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기간에 이미 출발하는 데 유리했으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돈을 버는 것이 진짜 목표인 젊은 기업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콤소몰 출신이었다. 소련 당국은 콤소몰 활동가에게 최초의 상업은행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출범시킬 독보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폴 클렙니코프는 KGB와 당이 〈한 세기 전 차르 비밀경찰이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나중에 썼는데, 말하자면 혁명가들을 통제할 요량으로 그들의 뒤를 봐줬던 것이다. 신진 자본가들이 소련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훈타의 실패 뒤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를 느꼈다."(453)


"고르바초프의 임시정부 도박은 마지막이자 가장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소련의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와 국제적 명성, 완전한 경제적 붕괴에 대한 공화국들의 두려움이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도록 당분간은 내버려뒀다. 그러나 새로운 연방이란 전망은 고작 두 달 만에 모스크바의 인디언 서머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옐친은 자신보다 위에서 행사되는 권력 없이 '러시아'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길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붕괴의 위협과 자신에 대한 서방 지도자들의 지지만으로 공화국 실력자들을 공동의 정치적 프로젝트로 이끌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실상 그는 옐친과 공화국 실력자들을 위해 정치적 짐을 떠맡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의 언론 비서관 안드레이 그라초프가 나중에 말했듯이,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463)


13장 불협화음 


"9월 4일, 부시와 각료들은 허약한 소련과 소련의 해체 중 어느 쪽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지 토론했다. 펜타곤의 수장인 딕 체니는 고르바초프를 버리고 진짜 민주주의자이자 서방의 가치를 수용하는 옐친을 택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체니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인정하라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단체들과 NED의 청원을 지지했다.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 휘하의 허약한 연방이 독립 공화국들의 예측 불가능한 불협화음보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휘하의 보좌관들처럼 폭력적 혼돈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 치닫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외교의 눈앞에는 두 장의 와일드카드가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소련 경제를 안정화할 서방의 대규모 금융 지원 방안이었다." "부시는 니컬러스 브래디 재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 이 방안에 확고히 반대했다. 미국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데 소련에 납세자들의 돈을 쓰자고 제안할 수는 없었다."(472-4)


"우크라이나 독립은 두 번째 와일드카드였다. 대통령의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체니는 다시금 '공격적' 접근법을 들고나왔다. 그는 미국이 소비에트 공간에 보유한 거대한 지렛대를 이용해 그곳을 쪼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니의 발언 요지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민주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민주국가가 될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인정은 어쨌거나 좋은 정책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러시아가] 작은 게 우리한테는 낫다.〉 베이커는 체니에게 딜레마의 다른 측면도 상기시켰다. 만약 소련 해체가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어쩔 건가? 〈우린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를 원치 않았다〉라고 스코크로프트는 회고했다. 그는 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공공연하게 소련의 해체를 지지한다면, 〈소련의 다수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장기적으로 적대감을 이끌어낼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을 방치했다.〉"(474-5)


14장 독립 


"이 역사적인 순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미하일 베른스탐은 소련의 해체가 〈하나의 목표로 합쳐진 이원 정책〉이었다고 썼다. 첫 번째 정책은 '잔여' 소련을 인수하여 고르바초프 없이 운영하려는 러시아 개혁가들의 시도였다. 두 번째 정책은 다른 공화국들과 합의하고 보조금과 지원금 시스템을 중지시키려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는데, 소련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다종족적인 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한 가지는 버려야 했다. 그에 따른 갈등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 경제학자는 네 번째 목표를 간과했는데,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소련의 폐허로부터 강한 러시아 국가를 재건하길 바랐고, 이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러시아적인 이 목표는 연방 해체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512-3)


"옐친의 자문이었던 부르불리스는 자신과 동료들이 우크라이나 독립에 전적으로 찬성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르불리스는 우크라이나와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자기처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연방을 별개의 존재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인에게 우크라이나는 잉글랜드인에게 스코틀랜드와 같았으며, 더 가깝게 느낄 뿐이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합의 없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격이었다. 모스크바의 그 누구도 우크라이나라는 방주가 소련-러시아라는 선거(船渠)를 떠나는 것을, 그리고 즉시 침몰하지 않고 항해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심적 태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커다란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528-9)


15장 청산 


"크라우추크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한다.〉 증거는 이런 주장과 상충한다.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는 소련의 붕괴를 반영한 것이지, 그 원인이 아니었다. 1991년 12월 2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뒤이어 옐친의 가차 없는 분리주의 노선으로 파괴되어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소련에 대한 재정적 부고(루블화 가치 폭락)는 그 파괴를 가장 잘 설명한다. 국가의 주요 기능인 통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일어난 일은 고르바초프와 자발적 연방이라는 그의 환상을 끝장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격은 옐친의 새로운 노선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예상한 가이다르와 그의 팀은 이미 허구에 불과한 중앙의 기능을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민투표 이후, 러시아 개혁가들은 드디어 자유롭게 이 중앙을 청산할 수 있었다."(546-7)


"비스쿨리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사냥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찾은 외빈들로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에리히 호네커도 있었다. 1991년 12월 7일 토요일 저녁, 세 슬라브 공화국 간 회담의 절대적 보안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KGB 특수부대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크라우추크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인들과 벨라루스(이제는 벨로루시가 아니었다) 관리들은 향후 협정에서 '연방'이란 단어는 빼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그들은 중심부와 식민지들의 품위 있는 결별을 가져온 국제기구 영연방의 예를 따라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하기로 했다." "회담 과정이 궁금한 160여 명의 기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서 음식도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전날 밤을 보냈다. 이제 그들은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영토상의 모든 연방 조직과 기관의 효력이 없어졌다. CIS의 본부는 민스크로 정해졌다. 연합 창립의 기반이 되는 문서는 배포되지 않았다."(549-52)


"술을 빼면, 불안을 잠재울 자연스러운 치료법은 정당성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거둔 압도적 승리에 기댈 수 있었다. 옐친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가 정당화한 논리는 부정적으로, 고르바초프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 지도자에게 전화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가이다르는 〈핵무기가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전면적 내전을 용케 피했던 게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부르불리스도 〈제국의 유혈 분할〉을 막았다고 동의했다. 또 비스쿨리회담이 〈냉전을 끝냈〉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기적적인 전망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 크라우추크는 수년 뒤에 자신도 내전을 걱정했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경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정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연합이] 느린 결별이라고 강조했다.〉 이 마지막 요점이 향후 몇 년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규정했다."(554-7)


결론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를 품은 개혁가적 열성과 정치적 소심함을, 도식적인 메시아주의와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비전이 넘치고 숨 막히는 외교 정책과 결정적인 국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폭력과 무력에 대한 혐오감은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할 만큼 그의 세대에 전형적이었다. 이것은 스탈린 사후 몇십 년 동안 소련 엘리트의 더 깊은 문화적·사회적 변모를 가리킨다. 그들은 정치적·경제적 폭풍이 들이닥쳤을 때 놀랄 만큼 무기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국의 누구도 고통스러운 개혁을 실시하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눈감고 해낼 뚝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선호한 정책,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했다."(588-9)


"서방의 지도자들에게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전대미문의 역사적인 기회를 붙잡으려는 정치적 의지나 상상력이 없었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이 서방의 궤도 안으로 통합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예측하기 힘들다는 시각이 만연했다. 무엇보다도 동유럽과 발트 지역에서 냉전 승리의 손쉬운 성과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덩샤오핑이 중국을 사업에 재개방함에 따라 막대한 금액이 공산주의 중국으로도 곧 쏟아져 들어갔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세계 단기 금융시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을 곤경에 내버려뒀다. 발트 3국만이 예외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경쟁하듯 서방의 관대함,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지정학적 혜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을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되었고, 그것은 두 나라가 모두 지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글로벌 금융 기구들은 국가 주권과 자존심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595-6)


"러시아는 거대한 사회적 전위와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1980년~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의 최악을 경험했다. 현대화 대신 대규모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지만 대체로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민영화는 급성장하는 중간계급을 낳지 못했다. 국가 자산의 분배는 뻔뻔할 정도로 불공정했고, 자국 시민들에는 무관심한 라틴아메리카의 수출 지향 매판 부르주아를 닮은 새로운 파벌인 이른바 '올리가르히'를 탄생시켰다." "많은 이가 자신들의 친미·친서방 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재정적 통제력을 파괴하면서 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갔던 1991년의 반공 열기는 돌이켜보니 이데올로기적 광기로 비치기 시작했다." "국내적·국제적 시장 세력들과 지정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합이 아닌 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옛 로마 경구 '바이 빅티스(Vae Victis)', 즉 〈패자는 비참하도다〉라는 말은 변함없이 진실한 예언으로 드러났다."(597-8)


"소련이라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에 서구 정부들은 1988~1991년 소련의 파괴적인 정책들과 유사하게 국민의 세금과 심지어 저축을 이용해 기업들을 긴급 구제해야 했다. 고고한 레토릭으로 둘러싸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버락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 수렁에 빠졌을 때 고르바초프와 비교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해법으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관찰자들에게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국민투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소련 '제국'에 의한 '러시아'의 희생을 운운하던 옐친의 수사법을 아득하게 일깨웠다." "역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극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고조되는 자유의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60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전자책]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부 개관

1. 신이 된 ‘시장’


나는 경제학자-신학자들의 주장에서 현대 종교 사상의 변증론을 발견했다. 특히 기업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간혹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라고 불리는 사조와 비슷하다. 제임스는 ‘유한한 신성’, 즉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궁극적인 속성을 향해 나아갈 뿐인 신성을 옹호했다. 이런 추론은 분명한 이유로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신정론theodicy이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 즉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며 자애로운 신이 묵인할 것 같지 않은 갖가지 나쁜 일이 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 신학자들이 보기에 능력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끝없이 확대되는 시장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탈구dislocation, 고통, 방향성 상실이라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신Market God’이 궁극적으로 자애롭다는 사실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11-2)


‘시장’의 궁극적인 전지적 능력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칼뱅의 불가사의한 신이 그렇듯이 ‘시장’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결국 ‘시장’은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장’ 종교의 시대에 회의론자와 자유사상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짜 기적을 폭로한 볼테르들이나 종교를 빙자한 사기를 날카롭게 고발한 멩켄Henry Louis Mencken들은 어떻게 됐나? 현재의 정통 신앙이 워낙 지배적이기 때문에 ‘시장’의 전지적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은 섭리의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게 진짜라고 말하면(코카콜라를 생각해보라 〔코카콜라는 1969년 광고에서 ‘이것이 진짜’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그것은 진짜임이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말했듯이,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이제 ‘시장’의 지치지 않는 탐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다. 17-8)


2. 왕의 과학과 신의 과학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심각한 분열을 낳은 신학 논쟁은 ‘교황 무오류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오늘날 무오류성을 둘러싼 견해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묘하게 비교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슷한 논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 무척 흥미로웠다. 이처럼 논쟁적인 경제학 교의 항목의 창시자는 시카고대학교의 유진 파마Eugene Fama다. 그는 일련의 저서와 논문에서 ‘시장’은 현존하는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에 근거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틀리지 않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교황의 무오류성이 교황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즉 교황좌에서ex cathedra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관해 전체 교회를 상대로 발언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변명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시장 무오류 가설 역시 오직 ‘효율적인’ ‘시장’에서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파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장의 효율성이란 시장이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활용한다는 뜻이다.” 26)


이 두 가지 유사한 논의를 숙독할 때면 가끔 놀라운 결론에 거의 이를 뻔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신학자나 경제학자도 내리지 않은 결론이다. 두 경우에서 ‘오류가 없다’와 ‘올바르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용법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두 교의가 이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로 볼 때, 어떤 발언이 진실일 뿐만 아니라 오류가 없는 진실인 것은 단지 교황이 선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이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이라고 부른다)를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교황이 어떤 것을 공식 교의로 반포하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에서 ‘진실’이 된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교의 반포 전날에 어떤 견해가 있었든, 이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장’은 (효율적일 때) 언제나 올바르다. ‘시장’은 원래 그런 것, 즉 구매자와 판매자, 투자자가 행하는 무수히 많은 결정의 정확한 반영이자 증류물이기 때문이다. 27)


3. ‘시장’은 어떻게 신성한 존재가 되었는가


고대 제국의 도시에서 시장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중심인 사원 구역에 자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신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낸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라. 환전상이 펼쳐놓은 상을 뒤엎고 그들을 강도라고 꾸짖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엄청난 오해를 받은 주제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가 신성한 장소의 담장 안에서 이런 상업 활동을 한다고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전후의 여느 신전처럼 이 유대교 신전에도 담장, 즉 바깥마당 안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 무엇보다 희생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가 많았다. 순례자들은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의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왔으니 서로 다른 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지역 화폐로 짐승 값을 치러야 하니 ‘환전’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 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32)


강과 마찻길이 합류하는 지점마다 점차 상설 시장 천막촌이 등장했다. 고대의 또 다른 관습이다. 시장을 뜻하는 수메르의 표의문자는 Y로, 교차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서 등장하든 시장은 신전 담장 안에서 장사할 때부터 통용된 도덕적·종교적 제약 아래 거래해야 했다. 도시와 자치구 그리고 회원들이 ‘공정가격’이라는 신학적 개념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저울을 누르고 이중 바닥을 깐 바구니를 사용하는 사기꾼에 속지 않게 구매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내면화하던 길드와 동업조합이 이런 제약을 강제했다. ‘구매자가 조심해야 한다caveat emptor’는 인식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구매자는 자신의 신중함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의 약탈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도덕적 교훈의 오랜 전통에도 도움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시장이 자동적으로 자기 조정을 한다는 사고를 기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래자나 구매자, 판매자는 모두 그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에 엮인 신뢰, 예절, 의무가 가정된 관계에서 거래했다. 34)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이제 멀리 떨어진 도시들 사이에, 심지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도 교역이 발전함에 따라 묘하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담보대출, 환전, 운송보험, 합자 사업 등이 등장했다. 지폐가 황금 자루를 대체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추상적 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용장을 비롯한 여러 ‘증서’가 등장함에 따라 노점과 가판대는 필요 없어졌다. 돈으로 돈을 벌고 빚을 져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자비함과 사기에 매혹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커진 돈 상자를 억제할 가능성은 줄었다. 이제 구매자와 판매자, 차용인과 대부자가 만나서 암묵적이거나 공공연한 도덕규범 안에서 거래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시장을 단순히 특정한 구역이나 여러 사회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시장주의’ 시대에 산다. 이제 ‘시장’은 우리의 사회적 상상에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태도의 변화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35-6)


4. ‘시장’은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그리스 종교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보여준다. 신은 남을 속이고 질투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천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죽일 듯한 원한을 품는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은 불사의 존재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ecce homo novus. 현대의 법인corporation-person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산의 지위에 다다랐다. 법인 기업은 생명을 무기한 이을 수 있다. 구식 모델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나타내는 새로운 법인의 다른 특징은, 많은 경우 법률이 법인에 ‘유한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 모델을 새롭게 주조된 법인 모델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다. 구식 인간은 우리가 꿈틀거릴수록, ‘비극적 얽힘’에도 우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다(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유의지와 죄와 책임이라는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었다. 39-40)


'유한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성 외에도 ‘시장’이 창조한 ‘인격’은 어느 작가가 ‘변신shape shifting’이라고 말한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비교종교학, 특히 민속 종교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개념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 코요테나 사슴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은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이런 변신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능력은 늑대 인간과 커다란 검은 박쥐와 사람이 거의 자유자재로 바뀌는 최근 뱀파이어 영화의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법인의 세계에서 변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인 기업은 불멸의 존재지만, 예를 들어 성가신 소송을 피해야 할 때는 다른 법인 기업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간단히 몸을 숨길 수 있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변신이지만, 화신化身과도 기괴한 유사성이 있다. 그 결과 이전의 법인은 사멸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이전에 한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40)


법인 기업은 1790년대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을 때 소규모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각 주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 기업들의 주식은 보통 해당 기업의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지역 주민이 샀다. 설립 취지문에는 보통 기업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규정되었고, 이 기업들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인 기업에 설립 허가를 내준 정부는 기업이 대중에 의해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대중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주주shareholder뿐만 아니라 이해 당사자stakeholder (법인 기업이 이해를 충족해야 하는 사람과 기관 )도 있었다. 초창기 법인 기업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획득하는 일부 특질을 갖춘 것 같다. 법인 기업은 덩치가 훨씬 더 커지고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쌓으면서 이윤 획득에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기는 정부 감독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는 그 유명한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시대를 열었다. 46-7)


5. 고리대금업과 피싱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주교이자 유명한 설교자 바실리우스Basilius(329~379)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자를 물리고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궁핍을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소리로 비난했다. 대신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선물은 하느님에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교회와 문화 일반 모두 고리대금업을 혐오스럽고 부도덕한 행위로 보았다. 단테가 지옥을 점점 깊어지는 아홉 단계 원형 구덩이로 묘사했을 때, 고리대금업자는 가장 깊숙한 일곱 번째 고리에 자리하는데, 그 옆에는 신성모독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폭력을 가했다’고 여겨지는 남색자가 있다. 고리대금업자는 아는 사람과 이방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죄인보다 나빠서, 살을 물어뜯는 뜨거운 바람(‘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물다’라는 뜻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벌이다)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떨쳐내려고 헛되이 애쓰는 존재로 묘사된다. 57-8)


장 칼뱅이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상업적인) 도시국가 제네바에서 적당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다. 칼뱅의 교의에서 ‘허용’ 부분은 금세 받아들여졌지만, ‘적당한’이라는 부분은 이내 무시되었다. 종종 버티려는 시도는 있었다. 1552년, 구두쇠 정신과 약삭빠른 사업 관행으로 이름을 날린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등장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개신교 가운데 칼뱅파〕는 탐욕스러운 상인, 임금을 주지 않는 주인, 소작인을 혹사하는 지주 등과 나란히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교리문답을 발간했다. 하지만 분주한 상업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 설교자와 도덕가의 훈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1572년 〈고리대금업에 관한 토론Discourse upon Usury〉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널리 읽힌 소책자에서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은 이자를 물리는 대부는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이며, 상인을 비롯한 사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 등의 집단에게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58-9)


일부 길드와 교구, 수도원에서 구사한 좀 더 창의적인 책략은 가난한 사람이 훨씬 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대안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1462년,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프란치스코회는 경건은행mont-de-piété 〔교회에서 자선사업으로 운영하는 공공 전당포〕 모델을 만들어 이탈리아 전역과 나중에는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뜨렸다. 뒷날 프로테스탄트도 이 모델을 채택했는데, 지금도 교회가 후원하는 신용조합에서 그 후예를 볼 수 있다. 이런 고귀한 시도는 경제 변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세상의 모든 교회 세력도 계약, 식민지, 무역 회사, 합자회사, 신용 기법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17세기에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 신부가 런던의 성공회 성당인 세인트메리울노스에서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설교를 한 일은 상징적인 클라이맥스다. 설교문은 다음과 같다. “탐욕스러운 바리새인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신부는 그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59-60)


6.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희년은 예수 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인 토지 규제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자신의 사명을 발표하며 성경 구절을 읽는다(〈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는 ‘두루마리를 말기’ 직전에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학자들은 이것이 희년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주시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파에서는 빚이라는 용어 대신 ‘죄trespass’,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문구는 원래의 경제적 내용이 사라졌다. 65)


2부 장애와 질환

7. 상층부의 합선


가톨릭교회는 4세기 무렵부터 많은 이에게 합리적인 해법으로 보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대수도원장과 주교는 말했다. “우리에게 재산을 내놓아라. 우리는 정당하게 임명된 그리스도의 후계자이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 재산을 맡아놓고 신중하게 분배할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현생과 다음 생에서 여러분과 그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와 대리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으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수도원과 교구를 통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관리하게 기부한 재산은 ‘가난한 사람의 세습재산’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기부나 유산 증여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중세 사학자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이런 관념이 엄격한 윤리적 권고와 전례를 통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기금을 고갈시킨 이들은 ‘빈민 살인자necatores pauperum’라고 불렸다. 79-80)


1305년에 프랑스 고위 성직자 다수가 장악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했고, 신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인 교황 다섯 명이 아비뇽에 남아 가톨릭 세계를 통치했다. 아비뇽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 종교 상품을 생산하는 국제 카르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제품은 교회 직책으로 유급 직책이나 ‘고위 성직’, 당시 교회의 거대한 위계질서에서 부른 말은 ‘성직록을 받는 성직’이다. 당시 주교가 700명, 그 아래 성직자가 수천 명이었다. 성직자도 때가 되면 죽었기 때문에 채울 자리가 계속 생겼다. 이런 성직은 대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이고, 때로는 피임명자가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아무 부끄럼 없이 공공연하게 직책이 매매되었다. 마술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simony(성직 매매)’라고 불린 관행이다. 마술사 시몬은 영적인 힘을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인물이다(〈사도행전〉 8장 9~24절). 81)


8. 거대 은행과 거대 교회


초대형 교회가 기업과 가장 흡사한 특징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혹독하게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매리언 매덕스는 초대형 교회가 자신이 소망하는 사고의 요소를 담아 지칭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른 비평가들이 ‘성장주의growthism’라고 부르는 현상의 신봉자인 초대형 교회는 교인 숫자를 늘리고 더 많은 헌금을 모으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이런 활동이 대부분 노골적인 물질주의고, 진정한 영적 의미는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말라기〉 3장 10절). 번영 설교자는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화가 부족한 사람은 분명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교회에 충분히 헌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7-8)


구조적으로 볼 때, 초대형 교회는 종종 성서의 해석보다 현대 경영 기법에 관심 있는 대표 성직자를 둔 대기업 조직을 모방한다. 초대형 교회는 계속 움직이는 존재로, 미래의 강한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곳은 당신 할아버지가 다니던 교회가 아닙니다.’ 앞 세대가 교회에 갈 때 준수하던 복장 규칙이 대부분 폐기되고 반바지, 심지어 짧은 청바지를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현상은 초대형 교회의 느슨한 스타일이 널리 퍼진 ‘시장’ 정신에 깔끔하게 순응한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초대형 교회 성직자들이 항상 이런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회중에는 종종 한 세대 이상이 포함되며, 음악과 의상의 선호도 서로 다르다. 미국에서 일부 초대형 교회는 시간대에 따라 다른 예배를 제공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특이한 취향에 맞춘다. 컨템포러리 예배는 오전 9시, 전통 예배는 오전 11시, ‘가스펠’ 예배는 오후 2시, 포크 예배는 오후 5시 같은 식이다. 91)


3부 역사: 돈을 좇다

9. 주교와 수사: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기를 꺼렸음에도 그와 추종자들이 마침내 펠라기우스에게 승리했을 때, 단순히 신학적 관념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싸움을 치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파벌은 앞서 도나투스파(자신들이 보기에 기꺼이 타협하는 기독교인과 친교를 받아들이기 거부한 순수주의자)라 불리는 운동과 싸움에서 이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쪽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도나투스파의 토지는 로마제국에 압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던 가톨릭교도는 이후 그 토지와 그에 따르는 수입까지 물려받았다. 교회가 거둔 승리의 결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펠라기우스를 상대로 제국 법정에서 새로운 소송을 벌일 때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자원을 끌어모았다. 현금의 조용한 속삭임은 종교의 정치를 포함해 정치에서 언제나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종교에서도 그만큼 설득력을 보였다. 98)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의 재력은 많은 귀족 가문의 재정적 혼란 때문에 특히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족 가문들은 제국 법정에 가까웠을 테지만, 당시 그들 지역을 휩쓸면서 재산을 유린한 반달족 침입자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팀은 적재적소에 돈을 썼고, 돈을 뒷받침하는 정치 공작에도 능숙했다. 이 가문 중 일부는 워낙 사정이 쪼들려서 야만족 침입자를 매수하기 위해 모금하는 공동 자금에 돈을 내지 않았고,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다른 귀족과 사이에 불화와 긴장이 생겼다. 다시 통일을 확립하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반달족이 침략하기 전에는 상충하는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일치가 용납할 수 없는 분열로 간주되었다. 알프스산맥 너머에서 온 약탈자에 맞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야 할 때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이단자로 규정한 것은 이런 지배적인 정서에 영합한 것이다. 분열은 나쁘고, 돈은 환영받았다. 98)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부는 일종의 ‘은사charisma’, 즉 하느님이 준 신비로운 선물이며, 문제는 재부가 있는지 혹은 재부를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아니라 그 재부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사고를 내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에서 재부와 세속 권력이 수행한 커다란 역할은, 이후 벌어진 표면상 신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논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중세 후기에 수도원 운동과 이른바 ‘이단’ 그룹이 부상한 이면에는 교회의 재부가 커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종교개혁은 원래 면벌부 판매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맘몬Mammon은 심지어 지성소에도 전혀 없지는 않다. ‘돈을 따라’의 렌즈로 교회사를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 논쟁, 인물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가르침과 교의에 관한 일반적인 책자에서는 현금 흐름이라는 요소를 자주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기 때문에, 이 렌즈로 종종 작은 활자나 행간에서 드러나는 내용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99-100)


10. 애덤 스미스: 창시자이자 수호성인?


스미스는 경쾌한 18세기 산문으로 인간의 도덕 감정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 우리의 이기적인 애정은 억제하고 남에 대한 자비로운 애정은 내버려두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성하는 길이다.” 일종의 칼뱅주의자인 스미스는 때로 종교 속의 ‘열정’을 비난하지만 (감리교도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핵심적 사고를 빌렸다. 인간은 원죄의 속박을 벗어나서,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도한 ‘완전함perfection’을 향해 ‘나아갈’ 힘이 있다. 그러므로 칭찬할 만한 욕망과 비천한 욕망 둘 다 존재한다. 진정한 공화국commonweal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진보에 기여하는 욕망과 그렇지 못한, 심지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욕망. 여기서 성인 후보 스미스는 분명히 무제한적인 소비자주권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는 순전한 이단, 기껏해야 ‘시장신’을 찬미하지 않는 교의를 가르친다. 106-7)


스미스는 우리를 위해 정해진 도전해볼 만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문제에서 정통 교의와 크게 견해가 갈린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시장’의 교리문답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제시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 가운데 자기 이익을 선별할 힘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실망스러운 것임이 밝혀질 때 그것은 어떤 내적인 약점 때문이 아니라 둘 중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많은 규제 탓에 선택의 범위가 왜곡되거나, 선택하는 사람이 합리적인 구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떤 실체적인 선의 개념은 배제된다. 좋은 것은 선택되고, 선택되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고귀한 본성과 천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 똑같이 싸우는 것을 인정하며 고귀한 본성을 ‘공정한 관찰자’, 즉 우리 머릿속 양심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개인의 만족뿐만 아니라 공동의 안녕에 대한 인식에도 근거하는 선택을 옹호한다. 107)


11. 애덤 스미스: 신학자이자 예언자?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 패턴을 따른다.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 전통의 흐름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성서 연구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국부론》의 원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는 〈이사야〉 60장 5절에서 빌려온 ‘이방 나라의 재산the wealth of the nations’이라는 구절이 있다〕.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에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도덕 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하다. 111-2)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인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13)


12. 은행가, 철학자, 트릭스터, 작가


농담, 장난, 잔꾀, 골려 먹기. 이는 신화와 민간신앙 연구자들이 사실상 알려진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형인 ‘트릭스터trickster(장난꾸러기)'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저장고에 담긴 책략이다. 트릭스터는 신일 수도 있고 반신반인이나 동물, 인간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특징은 전통에 따라 다르지만, 트릭스터는 언제나 똑똑하고 빈틈없고 창의적이며 일반적인 예절 규칙과 관습을 조롱하는 농담과 책략의 원천이다. 히브리 족장 야곱이 트릭스터 유형의 좋은 사례인 것은 그가 비록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 빼앗지만, 우리가 그의 용기와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릭스터의 꼴사나운 광대 짓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미소 짓고 어여삐 여기며 심지어 존경한다. 트릭스터가 종종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삶이 온통 불공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트릭스터가 적어도 불행과 정면 대결하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27-8)


1857년, 멜빌은 고향 땅의 영혼을 소설적으로 탐사한 작품 《사기꾼: 그의 변장The Confidence Man: His Masquerade》을 발표했다. 《사기꾼》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외륜선 피델호Fidele호의 승객이 유창한 사기꾼에게 속아서 차례로 돈을 빼앗기는 풍자적인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있으며, 이야기가 펼쳐짐에 따라 독자는 질문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거지?” 마침내 멜빌은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문학적 눈속임으로 독자가 이 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우리 역시 속았음을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의 삶 전체가 거대한 순회 서커스 천막이나 월 스트리트 안에서 진행된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이곳에서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피델호에 탄 사람처럼 다른 모든 이들을 속이는 것 같다. 멜빌은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속임수의 잔치에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지어내는 작가이며, 소설은 독자가 기꺼이 공모하는 거짓말의 직조다. 128-9)


연구자들은 멜빌이 《사기꾼》 에 집어넣지 않은 초고 한 장을 발견했다. 여기서 소설가는 자신이 ‘저자들의 저자’라고 부르는 하느님조차 인간이 처한 조건의 온갖 모순과 수수께끼를 피하지 못한다고 숙고한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근거한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신이 고전 신학자들이 생각한 완전성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심지어 그런 완전성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신 역시 인간이 부여잡고 고투하는 유한성의 한계를 일부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서의 하느님은 신인 동형이 아니라 신인 동정이라고 주장(신도 인간처럼 기쁘고 괴로운 감정이 있다는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일명 ‘케노시스kenosis’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신적 완전성을 갖췄음에도 성육신에서는 이런 완전성을 밀쳐두고 유한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한을 완전히 공유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멜빌 역시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130-1)


13. 하느님의 숨결과 시장의 정신


‘시장’은 불균등하거나 비대칭적인 것은 죄다 혐오한다. 마케팅, 생산, 유통은 사회 환경이 획일적일 때 더 효율적이다. 다양한 문화적 풍경과 사회적 제도, 국지적 취향과 전통 관습에 맞추기 위해 광고 카피를 끊임없이 고쳐 쓰고 판매 기법을 조정하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시장’은 〈시편〉의 작자처럼 산과 언덕은 깎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기 원한다. 주형이 깨질 때만 중요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런 사실을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혼란을 불쾌하게 여기며, 가급적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열망한다. ‘시장’은 단색 외부 지형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예측 가능성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개심에 열려야 하는 것이다. ‘시장’의 복음은 복잡한 게 아니다. 물론 어지러울 만큼 갖가지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그 밑바탕에 놓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 복음이 하는 말은 간단하다. “이걸 사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136-7)


14. “세상으로 나가라”


성서학자들은 오순절을 다양성의 단호한 찬양으로 해석한다. 성서는 방 안에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사도행전〉 2장 9~10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성령 덕분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 모두 그리스어나 라틴어,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아님에 주목하자. 그들은 언어적 획일성에 종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말했고 서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들이 문화적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를 뒤집은 일화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써서 갑자기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 오순절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우지 않은 채 좀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화소의 오순절은 그런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새로운(획일적인) 집단을 창조한다. 142-3)


15. ‘시장’의 교회력


‘시장’ 종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력을 만든다. 때로는 독자적인 축일을 고안한다. 하지만 대개 종전 종교 축제에서 생겨난 정서와 관행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며, 나름의 취지를 위해 이런 감정을 활용한다. 이런 취지가 항상 해당 축일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은 대체로 흡수 전략을 선호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 축일의 활기에 편승하는 게 무에서 고유한 축일을 창조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어떤 축일도 판매를 확대할 기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특별한 날은 충분히 많은 잠재적 고객을 끌어들일 만큼 유명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내가 최근에 직접 목격한 사례는 타미힐피거가 이슬람교 성월인 라마단을 추가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활용하려고 벌이는 캠페인이다. 타미힐피거는 이런 매혹적인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카프탄caftan과 카울 넥cowl neck, 검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 청록색 긴소매 드레스 등을 출시했다. 150-1)


16. 모든 소원을 아시며


기업은 이른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업체와 연결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미국 최대 데이터 중개업체는 액시엄Acxiom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액시엄은 컴퓨터 서버 2만 3,000개를 보유하고 1년에 데이터 거래 50조 건을 처리한다. 이 회사는 개인별로 13자리 숫자 고유 번호를 붙인 미국인 2억 명에 관한 ‘디지털 기록’에 평균 2,500개 데이터 포인트를 저장한다. 이 조사의 특징이 무엇이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전통적인 고해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은밀한 욕망을 발견하는 것을 훌쩍 넘어선다. 그들은 이런 욕망을 창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매일같이 우리 공간을 침범하는 광고(스팸 메일, 텔레비전 광고, 길거리 광고판, 인터넷 광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한 사람은 주변에 흘러넘치는 광고가 대부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욕망을 창조하려는 가차 없는 시도임을 안다. 이 과정은 과거 고해실처럼 종전의 열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열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165-6)


17. ‘시장’과 세상의 종말


신학자들은 세계의 종말에 대한 관념 연구에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마지막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a’에서 유래했지만, 종말은 이따금 시초로 돌아가는 것이고 일부 신학에서 ‘종말’은 ‘끝finis’뿐만 아니라 ‘목적telos’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론은 점차 ‘역사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학교 벽에 있던 일곱seven ‘시대dispensations’ 도표에 빠져든 것은 ‘최후의 심판 날’을 묘사한 방식 때문이라기보다 가차 없는 시대의 흐름에서 내 위치에 관한 표시가 묘한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많은 사람이 대재앙을 예상하는 종말론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론은 비록 이따금 틀린 것이라도 의미와 방향, 중요성에 대한 느낌을 제시한다. 때로 사람들이 태평한 왕국 같은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한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이 잔인하고 과격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172)


히브리 신앙은 일신교가 아니라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핵심은 신들에게 부족해 보이는 진정한 신의 의무를 자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느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주어라. /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시편〉 82편 1~7절. 진정한 신에 대한 이런 기준을 감안할 때, ‘시장’은 자격 미달이다. 178-9)


18. ‘시장’의 영혼 구하기


라틴어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라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화神化(theosis)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로마 종교의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지만 결국 등장한 지배적인 모티프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182-3)


이스라엘 학자 아비바 고틀리브 존버그Avivah Gottlieb Zornberg는 〈창세기〉에 관한 통찰력 있는 저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힘을 다른 중심으로 분산하느라 분주했다고 설명한다. 존버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한 일은 ‘복잡성을 증대’하는 ‘원초적인 해체’ 작업이다.  “그날 〔첫째 날〕의 주된 업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하나 됨oneness에서 하나 이상의 가능성으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것이었다.” ‘시장’도 마찬가지로, 재창조 ‘첫째 날’ 혹은 ‘1단계’ 목표는 ‘시장’에 어울리는 건전한 자리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탈집중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날 하느님은 탈집중화를 계속한다. 하느님은 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물과 물 사이를 가른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자기 것이 아닌 현실을 갈라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은 새롭게 생긴 그 갈라진 영역 안에서 ‘권력 이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일한 과정을 도입하고, 이 요소 사이에 존재할 상호 관계의 성격을 만들었다. 1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순자를 읽다 - 유가를 중국 사상의 주류로 만든 순자를 공부하는 첫걸음 ㅣ 유유 고전강의 14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순자에게 공정한 평가를 돌려주자


"공자는 서주西周 봉건제도의 왕관학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와 법을 서로 관련되면서도 대립적인 두 가지 힘으로 간주했습니다. 법과 형벌을 사용하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죄를 지으려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수치심이 없고 자발적인 극기克己의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로써 규제하면 진심으로 정당한 행위 법칙을 준수합니다. 확실히 예는 법보다 근본적입니다. 예는 외적인 것이지만 예의 작용은 누가 외적인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의 내적 원리를 인지하고 이해하게끔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윗사람을 존중하는 그의 내적인 천성을 일깨워서, 그가 예의 배후에 있는 정신을 이해하고 더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또 무의식적 습관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윗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입니다. '예'와 '예의 근본'을 강조하고 예가 사람의 내적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확실히 성선의 가설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32-4)


# 왕관학王官學 : 군자의 도리와 치국 방법의 전수에 중점을 둔 고대의 귀족 교육 체계


"맹자의 시대는 장자의 시대와 대단히 가까웠습니다. 기원전 4세기 말부터 3세기 초에 해당하는 그 시대에는 수많은 유세객의 온갖 의견이 쏟아져 나왔지요. 기준이 될 만한 답도 없고 고정된 상하관계의 틀도 없어서 모두가 의견을 발표할 수 있었고, 또 모두가 미망 속에서 분주히 답을 찾아 헤맸습니다." "당시 유세객은 누구에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을까요? 안팎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군주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귀에 거슬리고 황당한 의견이라도 그 시대의 군주들은 참고 듣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만약 듣지 않거나 두루 경청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면 좋은 의견과 주장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는 인재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 불안하고 위기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 각국의 군주 앞에서 의견을 제시할 기회를 갖고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유리하고 이치에 맞는지, 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비해 얼마나 뛰어난지 과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웅변'의 풍조가 생겨났습니다."(40-3)


"하지만 전국시대 말기, 웅변의 풍조는 이미 막바지에 다다랐고, 유세객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미 칠웅은 나란히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진나라가 열국列國 가운데 가장 강대하고 무시무시한 위치를 점유했지요. 또한 이에 상응해 진나라의 부상에 관한 한 견해가 점점 더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진나라가 강대해질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진효공秦孝公이 상앙商鞅을 등용해 ‘변법’變法을 시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앙의 변법의 핵심적인 의의는 어떤 구체적인 법을 제정한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법의 지위를 봉건 종법의 규범을 능가하는 위치까지 끌어올린 데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왕자가 법을 어겨도 서민과 똑같이 죄를 지은 것”王子犯法與庶民同罪이라는 말이 그 정신을 대표합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그 형세에서 치국治國의 가장 훌륭한 답이 이미 검증된 셈이 아니겠습니까? 웅변의 유행과 확장은 이 시점에 이르러 법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43-5)


"따라서 순자의 핵심 사상도 공자나 맹자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예가 인위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공통의 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는 성인의 지혜가 사람마다 내면에 갖고 있는 예의 정신적 질서를 정리하고 통합해 외부에 제도화하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순자는 보통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성인의 차별점은 초월적 지혜로 예를 창조해 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에 따르면 성인이 창조한 예는 보통 사람의 천성에서 비롯되지 않았을뿐더러 거꾸로 보통 사람의 천성을 다스리고 바로잡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예가 보통 사람의 천성에 위배되는 까닭은 예의 구속과 훈련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보통 사람의 천성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악한 천성’을 제한해야만 비로소 훌륭하고 질서 있는 예의 환경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예는 성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며, 보통 사람은 배움을 통해 예의 바르게 변하여 성인에 가까워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춥니다."(47-8)


2. 유가의 변모


"'분分은 순자의 사상에서 핵심 개념입니다. 분은 사람이라면 응당 주어지는 신분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분을 이해하고 지킨다면 사회에는 당연히 영속적인 질서가 생기고 나라도 다스리기 쉬워질 겁니다. 반대로 가정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집단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분을 안 지키고 분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순자는 생각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묵가의 문제점은 가정, 국가, 천하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법도(어떠한 신분과 지위도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행위를 수반하는데, 이것 역시 ‘예’입니다)가 있는 것도 모르고 실제적인 공리와 실용만 중시하고 있어 마땅한 상하 신분 차이조차 무시한  데에 있었습니다." "순자는 법가 역시 인위적으로 제정한 법령만 중시하고 그 배후의 더 크고 높은 총체적 원칙은 소홀히 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니 그런 법령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도 없고, 사람마다 당연히 가져야 할 ‘본분’分을 확립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60-3)


"순자의 「비십이자」非十二子의 초점은 사실 자사와 맹자이며, 이 두 명 중에서도 시간상 순자와 더 가까웠던 맹자가 초점 중의 초점입니다. 순자는 그들이 고대의 선왕을 추종한다고 하면서도 흉내만 낼 뿐 그 원리는 몰랐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멋대로 자기 능력을 과신해 원대한 목표를 추구했으며, 보고 들은 것이 많아 잡다해서 전혀 가다듬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의 핵심은 큰 줄기統를 몰랐던 데에 있다고도 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그들이 옛날 자료에 근거해 만든 오행(다섯 가지 옳은 행위),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학설도 부적절하고 진리를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이 학설은 난삽하기만 하고 제대로 된 설명이 없는데도, 그들은 논리의 허점을 가리고 꾸미기에만 열중하며 “이것은 공자의 진정한 사상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자사가 그런 주장을 했는데, 그는 공자의 손자여서 더더욱 그 주장에 힘이 실렸을 겁니다. 맹자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세속의 무지한 유자들을 미혹시켰습니다."(67)


"이어서 순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공자와 염옹의 도리를 이야기합니다. 〈방법과 책략을 아우르고, 말과 행동을 같게 하고, 여러 부류를 통일하면서 천하의 인재를 모아 옛날 일을 알려 주고 가장 옳은 이치를 가르친다. 若夫總方略, 齊言行, 壹統類, 而群天下之英杰, 而告之以大古, 教之以至順.〉 “아우르고”總, “같게 하고”齊, “통일해야”壹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통합의 원리가 있어야 하고, 백성의 말과 행동은 가지런하고 일치해야 하며, 사회질서에는 고정적이며 변치 않는 신분의 차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천하의 능력 있는 사람을 다 모아서 상고시대 선왕들의 사적을 배우게 하고, 궁극적이며 절대적이라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순자는 어지럽고 복잡한 현상을 선호하지 않았고, 인재가 개성을 발휘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더욱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효과적으로 엄밀하게 분류해 통일된 원리 원칙으로 귀납해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69-70)


"유가는 특수한 이중성을 보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존 전통의 내용을 개량한 새로운 왕관학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주의 새로운 환경과 혼란에 대응해 나타난 ‘제자학’諸子學 중 가장 일찍 성립된 학파였습니다. ‘주례’周禮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주장은 단순한 계승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춘추시대의 변란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은 백성이 편안히 살도록 해 주려면 정신적인 측면에서 기존 전통을 부흥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왕관학과 제자학이라는, 시대적으로도 내용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 지식의 조류가 유가에서 기묘하게 통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더 심각하게 쇠퇴했고, 주나라의 전통문화도 점점 더 홀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유가의 이중성도 바뀌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관학을 계승한 부분은 갈수록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제자학 부분은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다른 학설들과 경쟁하면서 갈수록 강화되었습니다."(93-4)


3. 유가는 쓸모가 있는가


"주공은 종법상으로 방계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적장자인 무왕의 아들을 대신해 천자가 되었지만 그것은 참람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친형제인 관숙을 죽이긴 했지만 관숙은 다른 형제인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상나라의 잔여 세력을 이끌던 무경武庚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그를 죽인 것은 포악한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신하로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당시 형세에 대응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었고 다시 그 자리를 성왕에게 돌려주었으므로 역시 예에 어긋난 짓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사이 천하는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공 같은 성인 혹은 대유大儒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명의 대유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중요한 시기에 혈연적 신분 관계까지 뛰어넘어 천자가 되어서 막대한 책임을 지고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순자의 마음 속에서 주공은 ‘유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儒之最大者이자 유자의 극치였습니다."(105-6)


"유자와 유가는 공자 시대에는 특수한 왕관학 훈련을 받은 ‘사인’士人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은 예와 정치의 도를 잘 알아서 군주와 대부를 보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자는 주공 같은 과거의 군주도 대유라고 하여 역시 유자로 간주하면서, 유자가 군주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진소왕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위와 권력을 갖고 옳은 방식으로 권력을 이용해 위기를 해결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는 사람은 공자의 개념에서는 유자가 아니라 ‘성인’이었습니다. 이때에 와서 유자는 일종의 특수한 태도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본래 사인의 신분과는 무관해져 군주도 유자가 될 수 있고 유자도 군주를 맡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렀습니다." "군주는 법가의 학설을 받아들여 ‘법가적 군주’가 될 수 있었으므로, 순자는 당연히 유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가적 군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순자는 군주가 유가를 지지하고 수용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114-5)


"군자 혹은 유자의 능력은 선택적이며 어떤 포인트가 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팔거나 측정 도구를 능숙히 다루는 일은 당연히 농부, 상인, 장인보다 못합니다. 진정한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 검은 것은 희다 하고 틀린 것은 맞다 하며 입으로만 상대를 이겨 먹는 점에서도 혜시와 등석 같은 명가에 못 미칩니다. 군자와 유자는 일반적인 책사나 유세객이 아닙니다. 말을 위한 말을 일삼고 군주 앞에서 다른 사람을 압도하며 부귀를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자는 그런 일에 능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더 깊은 의미에서 보면 유자는 그런 일을 경시합니다." "사람의 덕과 능력을 비교해 그 높고 낮음에 따라 벼슬과 지위를 분배하고, 만물과 사물의 변화에도 그 기본 성격에 맞춰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유자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는 말 잘하는 신도나 묵적 같은 이도 유자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분석 잘하는 혜시와 등석 같은 이도 역시 유자 앞에서 방자하게 궤변을 늘어놓지 못하지요."(119-20)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유가는 효용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유가는 배움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순자는 맹자처럼 “사람은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요순과 성인은 특정한 역사의 시공간적 조건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공로를 세운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이 아닙니다. 전국시대의 유가는 요순과 성인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요순이 상징하던, 사람들이 가장 대단하다고 상상한 성취는 안으로 인의와 덕성을 갖추고 밖으로 인의를 실천해 천하를 복되게 할 만큼 충분한 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요순이어도, 다시 말해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어도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은 없다고 생각한 점입니다. 맹자가 보기에 범인과 성인 사이의 접점은 공동의 선한 인성이었습니다. 순자가 보기에 그것은 배움이었고요. 누구나 배움을 원하고 배움의 방법만 알면 사인에서 군자로, 또 군자에서 성인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27-30)


4. 배우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 없다


"〈나는 온종일 생각만 해 본 적이 있는데 잠깐 배우느니만 못했다. 나는 발돋움해 멀리 바라본 적이 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드넓게 바라보느니만 못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손짓을 하면 팔이 길어지지는 않지만 먼 곳에서도 잘 보인다. 바람을 따라 소리치면 소리가 커지지는 않지만 명확하게 들린다. 또한 수레와 말을 빌리면 걸음이 빠르지 않아도 수천 리를 갈 수 있고, 배와 노를 빌리면 물에 익숙하지 않아도 강을 건널 수 있다. 군자는 나면서부터 달랐던 것이 아니라 사물의 힘을 빌려 훌륭해진 것이다. 吾嘗終日而思矣, 不如須臾之所學也; 吾嘗跂而望矣, 不如登高之博見也. 登高而招, 臂非加長也, 而見者遠; 順風而呼, 聲非加疾也, 而聞者彰. 假輿馬者, 非利足也, 而致千里; 假舟楫者, 非能水也, 而絕江河. 君子生非異也, 善假於物也.〉" "순자는 배움의 가장 근본적인 장점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옛날과 오늘날의 지식을 통해 능력을 확장시켜 타고난 한계를 넘어 군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62-3)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받쳐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개흙 안에 있으면 더불어 모두 까매진다. 구릿대의 뿌리는 백지白芷인데, 그것을 구정물에 적셔 두면 군자도 가까이하지 않고 서민도 몸에 지니지 않는다. 이것은 그 바탕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담가 둔 것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거주할 때 반드시 고을을 가리고 여행할 때도 반드시 가까이할 사람을 가림으로써 사악하고 편벽됨을 방지하고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蓬生麻中, 不扶而直; 白沙在涅, 與之俱黑. 蘭槐之根是爲芷, 其漸之滫, 君子不近, 庶人不服. 其質非不美也, 所漸者然也. 故君子居必擇鄉, 遊必就士, 所以防邪僻而近中正也.〉 환경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초를 제공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은 영향과 감화를 주기도 하지요.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신중하게 자기가 살 곳을 고르며, 다른 곳을 여행할 때도 역시 신중하게 가까이할 사람을 고릅니다. 그래야만 편벽되고 사악해질 위험을 피하고 언제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165-6)


"배움은 변화시키는 것 말고도 한 가지 특성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축적’積입니다. 조금씩 쌓아 이루는 것이지요." "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산을 이루고 그 위로 비바람 같은 기상 현상이 늘 펼쳐집니다. 마찬가지로 물이 고이고 또 고여 연못을 이루면 그 속에 이무기가 생깁니다. 선한 마음과 행동이 쌓이고 또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내면의 덕이 생겨 자연히 정확한 판단력과 성인의 정신이 갖춰집니다. 다리를 들어 앞으로 반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절대로 천 리 밖에 닿을 수 없습니다. 작은 물줄기가 쌓이지 않으면 강과 바다도 절대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또한 가장 빨리 달리는 준마도 한 번 뛰어 열 걸음이나 되는 먼 거리를 가지 못하지만, 느려 터진 말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가고 또 가면 열흘이나 걸리는 긴 여정을 주파할 수 있습니다. 조각을 할 때도 칼을 대자마자 포기하면 썩은 나무조차 새기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기고 또 새기면 가장 단단한 쇠와 돌에도 원하는 모양과 무늬를 새길 수 있습니다."(169-71)


"축적은 집중력과 인내심 그리고 집요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변치 않는 굳은 의지가 없으면 배움으로 얻은 밝은 지혜가 있을 리 없고, 힘들게 몰두하는 정신이 없으면 크고 놀라운 공을 이루기가 불가능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호파가 물가에서 비파를 뜯으면 물고기가 깊은 곳에서 떠올라 들었고, 백아가 거문고를 뜯으면 꼴을 먹던 말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고 합니다. 쌓은 것이 충분하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들리게 마련이고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도 눈길을 끌게 마련입니다(인내심을 갖고 쌓아 나가면 틀림없이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옥이 있는 산에서는 풀과 나무가 유난히 무성하고 아름다우며, 진주가 있는 연못에서는 물가의 언덕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선행을 실천하면 틀림없이 반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배움을 수단으로 삼아 집중하고 계속 쌓아 나가면 결국에는 사람들을 더 훌륭하게 변화시켜 더 훌륭한 사회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순자가 고수한 신념입니다."(17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전자책] 왜의 쓸모 - 관계와 힘의 구조를 파악하는 네 가지 프레임
찰스 틸리 지음, 최지원 옮김 / 유유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왜 이유를 제시하는가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이유(서로 중첩되는 네 가지 범주)

1. 관습Convention: 태업, 파격, 비범함, 행운에 관해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연착됐어요, 이제 너도 때가 된 거야, 그 여자는 집안이 좋아, 그 남자는 그저 재수가 좋은 거야 등등.

2. 이야기Stories: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서술. 생소한 현상이나 9·11 참사와 같은 특수한 사건뿐 아니라, 친구에게 배신당했거나, 큰 상을 받았거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20여 년 만에 고교 동창을 만난 일 등에도 사용된다.

3. 코드Codes: 법원 판결, 종교적 참회, 메달 수여 등의 행위에 관여한다.

4. 앞의 세 가지 범주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s: 9·11 사건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을 때 88층에 있던 일레인 더치에게 일어난 일을 건축 공학자, 피부과 의사, 정형외과 의사는 각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관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가령 똑같은 태업이나 파격, 행운을 설명하더라도 버스에서 옆 사람을 납득시키는 정도의 이유로는 배우자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못할 것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확증하거나, 개선하거나, 거부한다. 따라서 현재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건이나 생소한 현상에는 다른 종류의 이유가 요구된다. 바로 이야기이다. 지독한 실패나 값진 승리, 대대적인 실수, 공동체적 비극, 한밤중에 들리는 의문의 소리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당면한 상황과 사회적 관계에 이유를 맞추려 하지만, 이제는 이유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결혼이나 이혼, 부모의 죽음 같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도 관습이 제공하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설명이 필요해진다. 예외적인 사건의 이유를 제시할 때, 우리는 대체로 약간의 정당화나 비난으로 설명을 보완한다. 23)


이야기와 달리 코드는 유효한 규칙을 준수하는 한, 설명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그냥 규정이 그래!”). 종교적 지령, 법규, 권위 있는 시상 제도에는 이유가 넘쳐나지만, 그러한 이유는 실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이 현재의 코드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학술적 논고는 구조와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신뢰할 만한 인과 관계를 밝히려 한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구조공학자는 인과 관계의 초점을 기계적 원리에, 내과 의사는 유기체의 역학에, 경제학자는 시장 주도적인 작용에 둔다. 이런 전문가들은 이따금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널리 인정되는 전문적 방법에 따라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열정적으로 변론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잠정적인 원인과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전문 분야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직된 모든 기관은 이들의 학술적 논고를 뒷받침한다. 24-5)


2장 관습


에티켓은 예의와 이기심의 결합이다. 에티켓 컨설턴트 페기 포스트Peggy Post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경영인에게 이러한 조언을 해 준다. “어떤 사람과 약속을 마쳤는데 그 사람이 떠날 기미가 없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라. ‘정말 죄송한데,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좋은 에티켓은 당신이 하는 일이나 하지 않는 일에 관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상당 부분 완성된다. 좋은 에티켓에는 관습적인 이유가 들어간다. 그러한 이유가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대체로 공손한 행동이 요구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관습은 이야기나 코드, 학술적 논고보다 더 적절하게 작동한다. 이럴 때 다른 이유들은 오히려 의사 전달을 복잡하게 할 뿐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거나 개선한다. 당면한 상황과 관계에 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인간적인 사회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부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면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 37-8)


미국의 사회과학자 어빙 고프먼은 소규모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한 독창성, 통찰력, 영향력을 두루 갖춘 연구를 발표했다. 고프먼은 에밀리 포스트를 전거로 삼는 자신의 대중 행동 분석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에티켓 서적에 기술된 규범들이 중산층의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미국에서 공적 행위의 체계를 제안하는 몇 안 되는 출처 중 하나”를 끌어다 사용했다. 고프먼이 반복해서 관찰한 바와 같이,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는 능력은 사회적 역량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 반대로, 적절한 이유를 제시할 능력이 없으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고프먼이 “해설”accounts이라고 부르는 분석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실수와 태업을 바로잡거나 감추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고프먼은 다른 무엇보다 즉흥적인 팬터마임이 구두로 제시되는 이유를 대신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몸짓 주석’body gloss이라 명명했다. 고프먼의 연구는 사람들이 타인과 주고받는 상호작용보다 개인이 남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38-9)


자기표현에 관한 고프먼의 비범한 연구는 이 책의 한 가지 주안점을 명백히 강조해 준다. 언어든 팬터마임이든 혹은 둘 다이든, 이유의 제시는 일종의 자기표현을 성립시키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고프먼의 책을 피상적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일들은 모두 개인의 정신 내부에서 벌어진다는, 즉 사람들은 주로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즉 불안정한 개인의 신호를 수신하는 타인, 그리고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불안정한 개인은 타인의 반응을 조작하거나 적어도 예측하려 애쓰며 신호를 전송하기 때문이다. 고프먼이 기술한 ‘연기하는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유를 제시하는 일은 언제나 당사자 간의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규정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 간의 관계를 위험하고, 희생이 크고, 불명확하고, 당혹스러울 수 있는 다른 관계와 구별한다. 40-2)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는 전문적 지식이 거의 혹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인과적 타당성보다 적합성의 규칙을 따른다. 우리는 보통 양식화된 단순함과 추가적인 논의가 없다는 점을 통해 관습적 이유가 오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문제는 설명이 인과적으로 불충분할 때가 아니라, 화자가 제시한 이유를 청자가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에 부적절하다고 해석할 때 주로 발생한다. 가령 정신과 환자가 자신의 입원 사유를 일반화하여 말하는데 의사가 그러한 설명을 거부할 때이다. 이럴 때 청자는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가 아니라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라며 항의한다. 어떠한 이유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적절한지 여부는, 그때 제시되는 이유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목격할 것인지,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에 관해 그들이 어떠한 추론을 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고프먼이 말하는 몸짓 주석은 사람들이 혼자이거나 남들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구태여 방어적인 이미지를 투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3)


3장 이야기


이야기는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에 단순화된 인과적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널리 통용되는 지식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이 특별한 종류의 서술에는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가 포함된다.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인간 행위자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경우, 가령 동물이나 영혼, 조직, 혹은 태풍 같은 물리적 환경인 경우에도 대체로 인간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그들이 재현하는 이야기는 종종 칭찬이나 비난의 뜻을 전달한다.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적인 곳이다. 동시적 인과 관계, 점증 효과, 환경 효과, 오류, 예상치 못한 결과, 피드백은 물리적·생물학적·사회적 과정을 악마의 소행(혹은 신의 작업)처럼 지독하게 꼬아 놓는다. 이야기는 이처럼 불편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배제한다. 63)


이야기는 특정 행위자에게 주요한 영향을 귀속시킴으로써, (그러한 행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신적 존재인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따른다. X는 그 행위를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에 관한 칭찬이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야기는 극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관습과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고전 희곡에 가깝다. 이야기는 시간적·지리적 환경을 넘나들지 않고 대체로 시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제한된 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시적인 행동이 모든 후속 행동과 그로 인한 주요한 결과를 야기한다. 이야기에는 종종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관습은 행위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고 개선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고유한 작업을 수행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일들을 일상생활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을 키워 나간다. 64-6)


수사학은 변증법과 유사하지만, 주장과 예시를 결합해 상대를 설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과학은 반박할 수 없는 보편적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기에, 변증법과 수사학은 둘 다 과학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정치 연설: 제안된 행동 방침에 찬성 혹은 반대함, ②법정 변론: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변호함, ③선전 연설: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함. 수사학의 효과는 견고한 논리뿐 아니라 인간의 특성과 감정에 관한 날카로운 이해에 달려 있다. 이는 화자와 논점, 청중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 필연적으로 관계적 해명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두 가지 결론이 따라온다. 첫째, 수사학적 노력의 성공은 청중이 화자와 논점의 조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수사학자가 얼마나 잘 추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논점과 화자가 같더라도 청중이 달라지면 그 영향도 달라진다. 두 가지 결론은 동일한 명령을 이끌어 낸다. 청중을 파악하고 반응을 관찰하라. 70-1)


이야기는 사회적 작용을 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 혹은 재규정하거나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게 해 준다.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원형에 수시로 의존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한 신호로 해석되며, 때로는 자존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는 깊이 묻혀 있는 무언가를 파낸다. 이야기는 그 본연의 특징 때문에 순수주의자를 좌절시킨다. 원인과 결과들을 턱없이 많이 쳐내어 복합적인 삶을 단순한 플롯으로 압축시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평범한 삶에서 희극과 비극, 도덕과 비도덕, 승리와 패배를 강조한다. 이야기는 관습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제공하고,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부득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이야기로 변환해야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이유를 진지하게 여길수록 그 이유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 86-8)


4장 코드


범주, 절차, 규칙이 결합된 코드는 이유의 정당화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언어학자들이 문법으로 단순화하고 표준화한 코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작가, 독자 사이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시대든 간에 회화, 음악, 시 그리고 기타 대중예술은 코드를 따름으로써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게 쉽게 할 뿐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이 거기에 담긴 창의적 혁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민간에서 혹은 종교적으로 행해지는 엄숙한 의식은 공동의 약속을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코드들은 반드시 이유의 제공과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코드에는 고유한 역학이 작용한다. 범주는 변화하고, 관련 증거를 처리하는 절차도 변화하며, 해석상의 규칙 역시 변화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상호작용을 한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기관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규칙을 변경한다. 따라서 축적된 규칙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직면했던 과거의 주요 문제들에 관해 알려준다. 94-5)


법적 분쟁은 그 성격상 코드를 작동시킨다. 이러한 분쟁에서 진술과 판결은 대체로 인과적 설명보다 법적으로 확립된 사실과 유효한 원칙 사이의 일치를 강조한다. 과실의 주장은 진술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 유효한 원칙을 잘못 적용하거나 소홀히 했다는 주장일 때가 더 많다. 법적 분쟁의 이러한 특성은 코드에 기반한 불일치와 다른 종류의 불일치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논제에서 중요하다. 관습은 전문 지식에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해 준다. 관습에서의 논쟁은 주로 그러한 관습적 이유가 사용 가능한 프로토콜에 명쾌하게 들어맞는지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중점을 둔다. 이야기는 서로 대립되는 설명에 토론의 장을 열어 주지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학술적 논고 간의 이견은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코드와 유사하지만, 적합성의 논리보다 무엇이 무엇을 초래했는지에 관한 상충되는 주장에 의존한다. 99)


법률 및 의료 분쟁은 코드가 지배하는 희귀한 세계에서 발생한다. 코드는 랍비, 변호사, 공무원, 심판, 의료 윤리학자와 같은 전문가들의 영역에 속해 있다. 설교, 강의, 프레젠테이션, 교과서, 설명서 등은 원칙을 간략히 설명한 후 현실에서의 적용을 덧붙이는 형태로 코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코드는 형식 자체가 일상적인 사회적 교류와 현저히 다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묘사와 설명을 제시한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듣고 코드로 변환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응급실에서 중증도 환자를 분류하는 간호사들은 환자를 임시로 진단 및 치료의 범주에 배정하는 기록을 작성한다. 사회복지사는 수급 지원자를 면담하여 자격 여부를 결정한다. 성직자는 참회의 근거가 되는 고해성사를 주관한다. 경찰 심문관은 형사재판에 제시하기 위한 자백을 끄집어낸다. 이러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인과적 설명을 공식으로, 대중적인 관용어를 전문적인 담론으로 바꾸는 이중 변환을 시행한다. 108)


우리 같은 외부인들은 관습과 이야기, 학술적 논고로 이유를 조직하기 때문에 코드를 성가시게 여길 때가 많다. 요컨대, 코드에 속하는 적합성의 논리는 이야기에 속하는 인과적·윤리적 논리와 모순된다. 우리는 상속, 조직 행동, 의학적 분석, 의료 과실 그리고 범죄 문제에서 그러한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했다. 윤리학이나 목회 신학, 건축 표준, 입법 절차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전문적 규제 영역에서 이야기와 코드 사이에는 그와 같은 격차가 발생한다. 코드는 개념과 자원, 활동 및 사람에게 질서를 부여하려는 조직들의 점진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일단 코드가 실행되면, 그것은 해당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그 조직의 지배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영역에서 코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실행하지 못한 일에 관해 제시하는 이유를 구성한다. 우리가 코드를 피하거나 파괴하려 할 때조차 코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11-2)


5장 학술적 논고


학술적 논고는 이야기, 관습, 코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그 정의상 (적합성의 논리가 아닌) 인과적 설명을 (일상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학문적 근거와 결합시킨다. 하지만 학술적 논고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수한 코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 코드가 그 실행자에게 비전문가에게는 금지된 형식의 조사를 수행할 권한을 부여하고, 둘째, 코드가 관련 근거의 유용성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며, 셋째, 실행자들 스스로가 적절한 절차와 부적절한 절차를 구분하는 코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학술적 논고는 이미 축적된 정의, 관행, 결과에 관해 공유된 지식을 가정하여, 그러한 정의, 관행, 결과의 참조를 줄이게 해 준다. 자신에게 공감하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당신도 우리 편에 속한다고 말하며, 저자와 의견이 다른 타 분야 사람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초심자나 의뢰인에게 해당 분야의 개론을 제공하며, 존경받는 비전문가에게 맞서 저자의 권위를 확립한다. 117)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펼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가 처음으로 전 세계의 주요 대륙에 도달했을 때(기원전 1만 1,000년) 각 대륙은 가축화가 가능한, 따라서 체계적인 식량 생산이 가능한 야생 동식물의 수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아메리카는 홍적세 후기에 대형 포유류가 거의 다 멸종해 버린 상태였다. 여기서 지리적 유리함이라는 두 번째 요인이 발생한다. 위상학적으로 심각한 장벽이 없는 데다 기후, 일조량, 위도와 관련된 그 밖의 환경적 변화가 적은 동서축으로의 확산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 대륙 간의 확산에도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고립된 데 반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는 서로 가까웠다. 아프리카에서 사육되는 가축은 대부분 유라시아에서 건너왔다. 마지막으로, 대륙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클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혁신의 요소가 늘어났다. 고립된 섬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인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134-5)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이아몬드는 주요한 지리적 영역 간의 차이를 밝힌 다음 그러한 차이를 만든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일련의 미스터리를 구성하여 자신의 학술적 논고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 책에는 인종주의와 지리적 결정론에 관한 비교적 간단한 주장부터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한 조금 더 복잡한 주장은 물론이고, 특수한 현상에 관한 미묘한 (그리고 종종 추측에 근거한) 주장이 결부되어 있다. 다이아몬드의 글은 두 가지 면에서 학술적 논고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인과 관계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엄청난 범위의 전문 지식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논리가 관습적으로 익숙해서도 아니고, 표준적인 코드에 부합해서도 아니며, 단순화된 이야기를 능숙하게 제공하기 때문도 아니다. 유효한 전문적 근거를 활용해 가능한 원인의 일부를 제외하고 다른 원인의 설득력을 높인 그의 설명 방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135-6) 


다이아몬드의 저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책들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당신과 내가 서로 근황을 나눌 때 사용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와 같은 최상의 진화론적 설명은 양질의 이야기superior stories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과적 과정을 단순화하여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지만, 논리적이고 전면적인 학술적 논고에서와 같은 자격과 인과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설명이 작동하는 공간을 단순화하고, 행위와 행위자의 수를 간추리며, 점증, 간접, 상호, 동시, 환경 및 피드백 효과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한다. 설명(특히 인과적 메커니즘에 관한 설명)은 당신이 근거를 취하는 전문 분야 내에서 명백하고 변론 가능한 요소로만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청중을 유념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의 지식과 열정에 따라 달리 전달되어야 한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은 관계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37-8)


6장 네 가지 이유의 조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대상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학부생들은 사회적 과정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내 수업에 들어온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같은 현상에 관한 설명이라도 학술적 논고보다 양질의 이야기가 더 효율적이고 유용하다. 그들은 학술적 논고를 알아보는 법과 그 안에서 타당성의 표식을 찾아내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사회적 과정에 관한 인과적 추론까지 낱낱이 파악할 필요는 없다.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전달하는 건 대부분 학술적 논고와 관련 코드이다. 이러한 수업 방식이 결국에 가서 성공한다면, 그들은 연구를 통해 유효한 학술적 논고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코드(적절한 증거와 절차, 결과 보고에 관한 코드)를 개선해 나갈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훗날 나처럼 학부생들에게 양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들이 학술적 논고와 그에 수반되는 코드를 숙지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와 대학원생들은 외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한다. 151-2)


나와 학생들의 관계는 매우 큰 현상 가운데 하나의 작은 사례, 즉 이유를 주고받는 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이 책의 두 가지 기본 논제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첫째, 적절한 이유의 제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학술적 논고와 이야기의 경우에도 관습이나 코드와 마찬가지로 이 점이 강력하게 적용된다. 둘째, 이유의 제시는 당사자 간의 관계를 설립, 확증, 조정, 혹은 개선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관한 분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습은 일상적인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수행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코드나 학술적 논고, 이야기를 제시해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엄청나게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고 융통성과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삶이 복잡해질 때는 이야기가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이유는 관계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152)


사람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관계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관습과 이야기는 대부분 당신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관계들을 확증한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를 주장하는 ‘잘못된’ 관습이나 이야기가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낯선 관용어로 된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제공하면, 재빨리 두 가지 해석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사람이 당신과의 관계를 오해했거나 난해한 지식을 내세워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존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관련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간추려 달라고 요청했다면, 당신은 적어도 이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미 불평등한 관계를 확립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영리하고 호의적인 대화 상대라면 당신의 요청을 받은 후 관습과 이야기에 가깝게 설명함으로써 관계의 균형추를 옮겨 줄 것이다. 이유의 제시는 폭넓은 사회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 작업에는 언제나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포함된다. 15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근대를 살다 - 한국 근대의 인물과 사상 ㅣ 知의 회랑 43
김경일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장| 문명론과 인종주의: 아시아연대론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을 개화와 반半개화 그리고 미未개화의 3단계로 구분한다. 이는 문명을 야만과 반개半開 그리고 문명의 3단계로 구분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명론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놓여 있다. 후쿠자와에게 문명이란 야만에 대한 문명이다. 즉,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역사주의보다 구조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유길준의 경우는 미개화-반개화-개화라는 등급 체계에서 단계론의 사고가 강하게 나타난다." "유길준은 자신이 설정한 각 단계가 변할 수 있는 잠정 상태로 간주하고 비록 현 시점에서는 조선이 반개 상태에 속하더라도 개화 노력을 통해 문명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 했다. 지식사회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후쿠자와가 이미 일본이 도달한 문명 단계에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면, 반개 상태에서 벗어날 출로가 여전히 보이지 않던 1880년대 후반 조선의 현실에서 유길준은 발전 단계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28-32)


"그런데 진보와 문명 단계에서 유길준 앞에 놓인 이러한 존재 피구속 상황이 당시 유행하던 인종주의의 덫으로부터 그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종에 대한 유길준의 논의를 보면, 문명-야만의 틀을 인종에 적용하거나 인종을 차별화하는 인종주의의 혐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저작 『서유견문』에서 인종은 형질 특성과 거주 지역을 소개하는 등 단순한 인지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의 황색인이 구미 양주의 백색인과 비교함에 그 천질天質의 불급함이 없음은 분명〉하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유길준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인종에 내재한 고유 속성으로 바라보는 인종주의의 사고방식을 부정했다. 환언하자면 서양이 아시아보다 부강한 까닭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쿠자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한다〉는 그의 탈아론 주장에서 아시아 인종은 문명 기준에 의해 열등하고 사악한 것으로 재단되는 차별받는 존재다."(32-3)


"후쿠자와가 선과 악의 대조를 통해 문명과 야만을 강조한 것처럼, 윤치호는 자연에 대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들어 문명과 야만을 대비하려 했다. 나아가 두 대립 범주의 내용을 이루는 대행자로서 그가 민족이나 인종을 설정한 점도 주목된다. 다가올 문명의 담지자로서 황인종이나 비서구 민족을 설정한 것은 현시점에서 야만 상태에 있는 이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조선을 반개 상태로 본 유길준과 달리, 조선이 아직 야만 상태를 못 벗어났다고 인식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3년 6개월 동안 유학 생활을 경험한 윤치호에게 중국은 악취, 불결, 낙후, 무기력, 완고, 교만 같은 부정적 속성으로 묘사되는 나라였다." "윤치호는 청일전쟁이 문명 전쟁이라는 통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것은 〈갱생하는 서구 문명과 동양의 퇴락하는 야만 사이의 갈등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관되게 일본에 동경과 찬사를 보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친일 경력으로 이어졌다."(37-40)


"그의 일본 선호에 문명개화국으로서 일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어려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문명 기준에서는 미국이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점에서, 그 또한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과 인식을 함께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 윤치호는 표방되는 바로서의 문명과 실제로서의 문명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강하게 인식했다. 1890년 2월 14일자 일기에서 그는 미국인이 말하는 천부인권이나 자유 같은 이상이 실제로는 단지 허울 좋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이른바 천부의 인권을 누리고자 한다면, 백인이어야만 한다며 그는 야유한다." "이렇게 〈고귀한 이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추악한 현실〉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힘의 논리였다. 힘이 곧 정의라는 그의 생각은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교리를 원론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점에서 윤치호는 선택과 제한적 방식으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유길준과 달랐다."(43-4)


|제2장| 열린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 보편주의로의 지평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의 벽을 초월하는 열린 민족주의의 자세를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다. 오늘날 잘 알려진 휘호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는 관동도독부의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이 서양에 다녀오면서 양말 두 켤레를 안중근에게 선물로 넣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적은 것이고, 휘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은 사형 당일 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간수였던 일본군 육군 상등병 치바 도히치에게 적어준 것으로 그의 마지막 유품이다." "당시 상황이나 안중근의 인격으로 미루어보아 이 유묵들은 당사자에게 잘 어울리면서 또 그에게 절실한 내용을 적어주고 싶은 안중근의 마음을 드러내는 선물이었다는게 보다 사실에 부합해 보인다. 이렇게 안중근의 유묵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의미의 탈맥락화와 그에 대한 성찰은 그가 생명을 놓는 시점에도 민족과 국가에 대해 열린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국가와 민족의 벽을 실감하면서도 안중근 자신은 그 벽을 간단히 뛰어넘어버렸다."(73-6)


"보통 이 시기 지식인 전반은 이른바 일본발 아시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찍이 아시아 연대에 공감한 김옥균은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제휴를 의미하는 '삼화三和'를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그 실현에 몰두했다. 그의 삼화주의는 일제 말기 대동아공영권이 제창된 시기에 동양주의와 대아시아주의의 선구로 추앙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창호 역시 이토와의 회견에서 3국의 정립 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서양 세력의 아시아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과 일본, 중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가 추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아시아연대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면서 아시아를 단위로 한 지역 연대 구상이 외면받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추구가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던 점을 고려해볼 때, 민족주의 사학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조차 1909년에 이르러서야 동양주의에 대한 비판을 발표한 것은 뒤늦은 감이 있었다."(80-1)


"필자는 동양 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방책을 적극 평가하는 일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는 해도, 마치 그것을 안중근의 고유한 제안으로 부각하려는 시도는 결국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칫 동양 평화에 관한 일련의 실천적 제안들을 안중근에게 독점 귀속시킴으로써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려는 의도로 이끈다. 나아가 안중근의 민족주의에 대한 왜곡과 연동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 폐쇄와 고립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신화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동양 평화를 위한 안중근의 실천 방안들은 그 자신의 독창적 고안이라기보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언론 매체를 통해 논의되어온 제안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동아시아 지식 공간을 떠돌아다니면서 안중근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비평받고 보완되며 전유되는 역사 과정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 공동의 지식 자산이자 제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87-8)


"하얼빈 역 의거 후 자신이 어떤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안중근은 〈그것은 간단하다. 나는 한국의 의병으로서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만국공법에 따라〉야 한다고 답변한다. 여기서 안중근이 동아시아 특정 국가가 아닌 만국공법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보편적 세계주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보편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은 그의 동아시아 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시기 동아시아 지식인에 의한 동아시아 구상 대부분이 입으로는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따져 들어가면 자기 민족과 국가에 한정된 폐쇄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것과 달리, 그의 동양평화론은 보편 세계를 지향하는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이 시기 회자되던 아시아주의와 동양평화론의 일부 부정적 속성이 반영된 시대적 한계에 구속된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동아시아 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91-2)


|제3장| 한상룡을 말한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


"1900년 초반 러시아는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화하려던 일본의 조선 진출을 이른바 3국 간섭을 통해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종에게 경제 차관 500만 원을 자국으로부터 빌릴 것을 강요했다. 철도를 부설하거나 산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하되 운용의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 지배를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외무성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앞세워 그곳에서 경제 차관을 융통한다는 구실로 러시아 차관을 거절하는 묘책을 찾아냈다." "극비리의 교섭 끝에 일본은 새로 은행을 인가받는 것은 러시아의 시선을 끌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고, 관료이자 〈서울 재계의 거족〉인 김종한이 1, 2년간 경영하다가 유명무실 상태에 있던 한성은행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03년 2월 사립 한성은행이 발기되었다. 같은 해 12월 설립 인가를 받았고, 이재완은 은행장, 한상룡은 우총무에 취임했다."(99-100)


"상업이나 실업 활동을 천시하는 사회 통념이 지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신분 배경이나 친일 경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보다 정치를 택했던 시기에, 한상룡은 주저 없이 경제를 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일찍 신문물을 접한 그의 식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존경했고, 또 그렇게 되고자 했던 인물이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3대에 걸쳐 일본 재계 최대 지도자이자 통솔자〉로 평가받는 시부사와는 일본의 조선·중국 침략 과정에서 '재계의 첨병' 역할을 했다. 3년 남짓한 대장성 관료 생활을 청산하고 1873년에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한 뒤 일찌감치 이 은행을 조선에 진출시켰다. 청일전쟁 후 철도 건설과 광산 개발에 주력하면서 일본의 대외 침략을 적극 조장한 제국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식민지에서 실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동경의 대상인 일본을 오가면서 한창룡은 점차 예속 친일 자본가로 성장했다."(103-5)


"한성은행은 일제가 강제 병합의 대가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금으로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으며, 일제에 대한 예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치열한 자본 경쟁의 복판에서 일정 기간 생존할 수 있었지만, 결국 1928년 일제 자본에 의해 강탈당하고 말았다." "금융계에서 한평생 외길을 가고 싶다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 경영권을 양도하고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살아 있어도 사실상 죽은 몸이었고, 죽는다 해도 이미 껍데기뿐인 인생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듯 식민 권력과 연계된 부문에서 적극 활동했다. 환언하자면 친일 행각이 노골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전시 체제로 이행한 이유도 있었지만, 금융계 기반 자체가 취약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한창룡은 일제에 더욱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식민지 권력과 밀착해 전시 체제에서 일제의 정책 수립과 집행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예속 부르주아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110, 120-2)


"완전 식민지 아래서 근대화는 식민지 모국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 시기 근대성은 불가피하게 식민지성을 내포한다. 근대성이 식민지성을 수반하고, 식민지성은 근대성을 가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깥에서 위로부터 부과된 근대화 과정에 토착민의 참여나 개입은 불가능하거나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다. 따라서 근대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획득하는 일은 식민지 모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망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파농식으로 말하자면, 흔히 이 관계는 자기 열등감이나 막연한 동경 혹은 비주체의 모방에서 시작해 자기 비하의 굴종이나 비인격적 예속 혹은 맹신에 가까운 복종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한상룡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는 친일 예속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주나 진보로 불리는 다른 발전의 길이 애초부터 그와 무연했다고 한다면, 이 시기 그가 택한 삶은 식민성을 수반하는 근대성의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을 보지 못하게 했다."(129-30)


|제4장| 여운형의 사상 노선: 노동 인식과 마르크스주의


"노동이나 노동자와 관련해 여운형이 직접 경험하거나 언급한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평민주의자' 혹은 인민 대중에게 헌신해온 이로 평가받은 그의 삶에 비추어볼 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운형의 실제 삶은 중앙 정치와 지도자나 엘리트 위주의 사회 상층부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여운형은 노동·노동자·노동운동을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 속에서 대상화된 실체로 인식하면서 노동을 타율적이고 무능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여운형이 관찰한 노동의 실제는 무기력과 수동성, 침체로 점철된 어떤 것이었다." "여운형의 눈에 비친 조선인 노동자는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부터 고난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전통과 인습에 지배당해온 침체와 운명, 수동과 타율의 존재다. 그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아세아적 농민'이란 당대를 풍미했던 비트포겔의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묘사된 아시아에 대한 정체와 불변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다."(142, 146-7)


"그럼에도 여운형은 인민이나 노동 대중의 역량을 신뢰하는 만큼,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에 대해 불신과 의구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936년 1월의 한 연설에서 그가 각 분야의 실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학생계의 지도자는 학생에서 나고 공장의 지도자는 공장에서 나고 농촌의 지도자는 농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노동에 대한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 지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선을 그음으로써 노동자, 농민, 학생을 주요 구성 분자로 하는 인민 대중의 주도성과 자발성의 함양을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운형이 대중과 지도자를 구분해 전자에 신뢰와 기대의 눈길을 보내는 만큼, 후자에 대해서는 불신, 회의, 비판, 때로는 조소의 시각까지 지니고 인식했던 경향이 있어 보인다."(156)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후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기를 그는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과 더불어 살았다. 젊고 의식 활동이 왕성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걸친 나이였다. 당대를 풍미했던 이 이념은 다른 식민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여운형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이 사상을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마르크스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답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 중국에서는 삼민주의로 정착한 사실을 환기하면서 〈조선에서는 러시아, 중국과 사정을 달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산주의 이념을 그 자체로 수용했다기보다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해 적용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조선 해방의 첩경으로 그가 제시한 여운형주의의 실체라 할 수 있다."(161-3)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게 혁명운동의 주체를 농민으로 설정했다. 바로 이들이 일제의 착취와 억압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이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주체로 노동자를 설정한 마르크스의 논거와 같은 맥락이었다. 여운형이 보기에 조선은 아직 농민이 주류를 이루는 (반半)봉건 사회였고, 이러한 점에서 당면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닌 농민이 되어야 했다." "나아가 그는 민중 생존이 위협받는 비참의 상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지목하면서 조선이 독립해야 할 필요를 정당화한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착취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민족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조선 독립의 신념을 오직 민족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편협한 이해를 조장할 뿐이다. 여운형에게 독립은 민족의 생존권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민족의 배후에는 늘 민중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83-4)


|제5장| 좌절된 중용: 지식 생산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된 초기 역사학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과 근대에 대한 선망에서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요소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신채호에 의해 '무정신의 역사'로 비판받은 이 흐름은 합방 이후 민속학, 종교학, 예술, 철학 등으로 점차 분화되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의 탄압 아래서 역사학을 비롯한 토착 학문이 존립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학문과 지식, 나아가 포괄적인 의미에서 문화를 정치와 엄격하게 분리하고, 둘째 현재의 현실을 벗어난 다른 시간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구속받지 않는 문화와 비非현재(특히 고대) 영역에서 이들은 민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정신과 애국주의를 고취하려 했다. 이 시기 연구자들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일제 강점 초기를 다룬 박은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고대나 중세 한국 혹은 조선 시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했다."(202)


"1930년대 이후 또 다른 흐름으로 등장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가치들이 결코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학이란 가치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해명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랑케 류의 개별 기술 방식을 그저 단순한 방법론으로만 보지 않고 이론 차원으로까지 고양시켰다. 비슷한 시기 사회과학 영역에서 미국 신역사학자들의 보편주의 지향이나 프랑스 아날학파의 사회과학 종합이론에 대한 열망 대신, 이들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특수성을 추구했다. 따라서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전통 역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보편 역사나 역사의 법칙성을 거부하고 개별 사실에 관한 실증 연구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과학'의 이름으로 문헌 고증의 방법을 내세운 전통 역사학의 함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의도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간에 이들은 과학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04)


"이처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가 서로 수렴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나름의 입장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려 한 이가 바로 안재홍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먼저 일본의 특수주의가 식민지 현실에서 일종의 보편주의 억압으로 가해지는 상황에 주목했다. 물론 그가 일본의 문화와 사상만 문제 삼은 건 아니었다. 그가 정당하게 파악했듯이, 1930년대는 파시즘의 고양과 블록 경제의 형성 그리고 사회주의의 국제주의 주창으로 상징되는 바로서 국제주의와 세계주의가 처음으로 지구 곳곳에서 느껴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서구의 진보 지식인들처럼 그 역시 때로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이렇게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국제주의와 보편주의가 지니는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과 전통의 특수성을 역사 발전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무시해버린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다."(218-21)


"국제화의 경향을 필연과 자동으로 본 것만큼이나 안재홍은 민족의 특수성을 고양하는 작업 역시 준엄한 역사의 철칙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제성은 '천하일률天下一律'이 아니고 특수성은 '고립유아孤立唯我'가 아니기 때문에, 양자가 각기 상호 작용하면서 발전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국제화와 특수화의 교호 작용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민족과 전통에 대한 특수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 연구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민족주의 우파와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에 포섭되고 말았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화해를 꾀하고자 한 그의 시도는 이미 좌절이 예정된 것이었다. 국제화와 세계화가 소리 높이 외쳐진 현실에서 보편주의에 대한 전망, 나아가 다가올 근대에 대한 비전을 설정하지 못하고 전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그의 비극이었다."(222-4)


|제6장| 신여성의 미국 체험과 자아 정체성


"낙후된 식민지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뒤, 발전한 선진 문명을 목도하면서 세 명의 신여성은 모두 일종의 문화 충격에 직면했지만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있다. 김마리아에겐 민족 정서가 두드러지는 토착 요소도 있었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받은바 서구와의 친화력이 있었다. 하지만 일종의 망명객 신분으로 어려운 경제 형편 속에서 인종 차별 등에 민감했던 김마리아에게 미국 생활은 동경이나 경이보다 괴로움과 어려움 그리고 아픔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었다." "반면 박인덕은 적극적인 추구형이었다. 상대적으로 미국 사회 밑바닥에서 차별과 고통을 겪지 않은 그녀는 미국 문명에 대해 동경과 찬사를 수반한 피상적이고 무비판적인 평가로 일관했다. 의미 맥락은 달랐지만, 김마리아처럼 박인덕에게도 미국은 〈제2의 고향〉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허정숙은 미국 문명과 거리를 두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녀는 거대함과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물질에 대한 추구로 미국 문명의 특징을 요약했다."(248-51)


"허정숙은 미국 문명의 핵심을 금전 추구로 요약했다. 사회주의 이념의 원칙에 충실한 경제적 해석이었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극복의 대안으로 사회운동과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미국 체험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혀나간 셈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 그녀는 귀국 후 근우회 운동과 이후 중국에서 민족 혁명 운동에 헌신했다."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김마리아는 먼저 독립을 위해선 교육을 통해 민력을 키우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 양성론과 준비론에 철저히 공감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의 단결과 조직을 강조했다." "박인덕 역시 혁명보다 교육의 길을 선택한 데서 김마리아와 실천이 겹친다. 이러한 믿음으로 귀국 후 교육, 저술, 농촌 사업에 투신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으며, 1941년 현대의 〈현명순량賢明順良한 주부를 양성〉하기 위해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한다."(255-9)


"김마리아는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여성해방을 이해했다. 여성은 〈남녀동등, 여자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체류 중 '평등'이 아닌 '동등'의 개념으로 여성해방을 이해한 그녀의 생각은 귀국 후 보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봉건 결혼제도의 모순을 직접 체험했던 박인덕은 조선에서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언급하지만, 곧이어 여기에 〈그렇다고 함부로 해방을 부르짖으라는 말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다. 김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급진주의나 사회주의의 입장과는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허정숙은 두 여성과는 달리 미국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미국 부인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의 놀라움을 그녀는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는 완전한 인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본주의 미국은 〈인간인 여자를 돈 잘 아는 인형으로 제조화製造化하는 공장〉이라고 그녀는 덧붙인다."(267-72)


"미국 문명에 대한 경이와 동경보다 거기서 겪은 고통과 아픔에 익숙했던 김마리아는 정치 운동 같은 거대 담론보다 앎의 욕구로서 지식과 그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궁핍과 억압에 시달리던 낙후한 식민지 현실에 공감과 연민을 감추지 못했으며, 귀국 후엔 오롯이 여성 교육에 전념했다." "박인덕의 미국 문명 이상화 경향은 민족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는 즉각적 반응과 결부되었지만, 자기 경험과 욕구에 의거해 서구 사례들 가운데 자유결혼, 자유이혼, 직업 활동의 필요성 등을 선택적으로 부각시켰다. 본격적으로 친일의 걸으면서부터는 이를 침략 전쟁을 위한 모성 보호와 여성 참여에 관한 주장으로 수렴시켰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허정숙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형이자 물질적 동기와 자본에 지배당한 채 세속적 욕구와 범죄가 횡행하는 세계로서 미국을 이해했다. 그녀의 미국 체험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다가올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기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273-4)


|제7장| 차이와 구별로서의 신여성


"1900~1910년대에 이르는 계몽주의 시기 여권 사상에는 고유한 모순이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시대사조로서 자아 각성이나 개성 실현을 여성에 적용하면서도 그것을 여성의 고유 역할로 상정한 현모양처와 결부시키려 했다. 계몽주의 시대 어머니 세대가 여성의 근대 교육을 열렬히 지지한 것과 달리, 신여성들은 당대 여자 교육의 이러한 목표와 방향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했다." "또한 어머니 세대 여성들은 남성 계몽주의자들의 근대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으로서 민족 독립과 의식 각성을 표방했다. 물론 신여성들 또한 이러한 민족의 정조情調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의 정조에도 불구하고, 신여성들의 주된 관심은 어머니 세대 여성들과 달리 결코 민족에 있지 않았다. 신여성들은 자아와 개성, 자유와 이상이라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성과 친밀성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 사사 차원에서의 쟁점에 몰두했으며, 민족이나 계급 같은 거대 서사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289, 292-3)


"급진주의 부류 안에서도 다양하고 미묘한 시각차는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 '성性'은 사적 영역의 문제로서 오롯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의 자기 결정권에 관한 주장과 함께 이들은 자유로운 성과 성 해방 실천을 지향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에서 이들은 여성의 자의식과 정체성 차원에서 성과 사랑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여성의 정조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때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남녀 간 인격적 결합이나 정신의 일치 혹은 인간으로서의 합일처럼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려 했다. 무엇보다 이론 차원에서의 주장만 되풀이하지 않았다. 몸소 주장을 실행에 옮겼고, 이로 말미암아 비참한 파국을 맞기도 했다. 주류 사회의 극심한 반발과 비판에 직면했으며, 같은 여성들로부터 질책과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양성 간 사랑과 화합, 인간으로서의 친밀성 같은 비전에 대한 헌신은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고립과 파멸이라는 대가를 요구했다."(304-5)


|제8장| 지배와 연대 사이에서


"이규수는 재조 일본인은 '제국'과 '식민지'의 접점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현살들에 접근하는 통로로서, '근대성'과 '식민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재일 조선인과 재조 일본인 모두 역사 속에서 늘 주변인이었다는 전제 아래, 〈어느 한쪽 끝을 더듬다보면 결국에는 그 경계의 어디에선가 또 다른 한쪽〉에 맞닿을 수 있다는 바람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다. 그런가 하면 기유정은 재조 일본인에 대해, 식민지 정주 과정에서 원주민보다도 더 '혼성hybrid'이 될 수 있는 극단적 조건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혈통 근거지인 본토와 생활 근거지인 식민지 가운데 어디를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원래 제국이 의도했던 주체 구성 원리를 비껴가거나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오구마 에이지 등이 말하는 제국 정체성의 양가 성격, 즉 순혈론 대 혼혈론의 대립과 긴장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존재라는 것이다."(322-3)


|제9장| 사상 전향과 식민지 근대


"근대 법은 특정 시민의 행위에 적용되는 것일 뿐, 그 행위 배후에서 작용하는 사상이나 신념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향은 사정이 달랐다. 전향은 행위 동기를 이루는 사상을 공식화하고 공공연히 비판함으로써 행위뿐 아니라 사상 자체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통해 국가는 개인 내면 깊숙이 침투했고, 개인은 권력 작용 범위를 넘어서는 사고를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서 전향은 지배와 통제 방식의 하나로서 그 억압적·폭력적 성격이 인정되는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애정과 자애'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체포와 고문 같은 지배 권력의 역할 수행 못지않게 가족이나 천황 같은 심리 요소와 문화 전통이 중요했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사상 변화와 함께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사상 변화로 전향을 정의하는 방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향의 양면성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일제 식민 정책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더 주목하는 반면, 일본은 그 온정성을 강조하는 셈이다."(342-4)


"전향 정책 초기에는 외래 사상 가운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주요 이념으로 주목되면서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전향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전향의 기준이 서구 기원을 가진 '비일본인 사상'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자유주의자와 기독교도 역시 이 정책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1936-37년에 걸친 정책 전환 단계에 이르면 권력은 개인이 단순히 사상 포기를 선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정신을 적극 받아들여 스스로 개조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도록 요구했다. 한 일본인 작가가 고백하듯이, 이 단계가 되면 〈전향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인간의 갱생〉이 되는 것이다. 급진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나 기독교도들까지로 전향의 대상이 확대된 것도 이때 이후다. 전향의 적극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이 단계야말로 전향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대동아공영권'내의 다른 국가와 지역들로 확대되었다."(350-2)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의 전향자들은 내재적 동기보다 외적 강압에 의해 움직였다. 전향의 효과가 '일본 정신'으로 상징되는 국가관의 주입이라면, 식민지 전향자들이 그러한 동기로 추동된 사례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내재적 동기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애와 가정 관계로서, 이는 일본의 전향 동기를 가운데서 마찬가지로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가족과 가족애에 대한 배려가 '국민적 자각'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그것이 순수한 가족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관심'이 그 과정에서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조선의 작가는 전향해도 돌아갈 조국이 없다〉라고 선언한 바 있지만, 식민지 지식인들은 전향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지 내재적 동기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중심에 민족 정체성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359-60)


"전향자들은 공통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민족 사상에 대한 감정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민족 해방이나 독립을 주장해온 민족주의의 대의는 협애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이 파악한 식민지의 〈냉정한 현실〉이란 〈조선의 민족적 생활 상태〉가 〈일본의 국민 생활 기구로부터 이탈해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1936년 9월 전향자들에 의해 조직된 대동민우회는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조선의 전향'이며, 그 이상으로 하는 바는 '내일의 조선'을 건설하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필수 조건으로 〈내선일여內鮮一如의 공고한 결합〉을 들었다." "당시의 표현대로 전선의 유지가 일본의 '생명선'인 것과 비슷하게 완전한 일본인 됨을 실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선이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해방이라는 또 다른 현실의 부과 외에 이들이 그로부터 벗어날 길은 거의 없었다."(365-7)


|제10장| 식민주의와 동화주의: 복합과 균열


"조선을 지배하면서 일본이 내세운 논리 가운데 하나는 조선과 일본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同文同種]이기 때문에 '합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이는 먼 과거에 하나였다가 현재 분리된 상태에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식민지 정복 행위가 아니라 민족의 (재)통합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식민지 피지배민은 분리보다 공통성을 의미하는 '신부국민新付國民'으로 지칭되었고, 조선은 '신영토' 혹은 '외지'로 통용되었다. 식민지를 의미하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라는 쟁점은 의도적으로 기피되었다. 일제가 식민 지배의 공식 기조로 채택한 동화주의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 당장 강자에 의한 약자의 종속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의 시각과는 대조되어 보인다. 흥미로운 건 1910년 강제 병합을 두고 조선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의지한 설명이 우세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동화주의 입장이 우세했다는 점이다."(381-2)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 정책이 단순히 동화주의라는 단일체로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동화주의에 비판적인 흐름 또한 그 '평등화' 요소에 주목하고, 도리어 이것이 식민지 민중에 대한 차별이라는 근거에서 동화주의를 부정했다. 즉, 이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동화의 가능성은 부정되며, 식민지 피지배 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들에 대한 일본 문화의 이식 또한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대신 동화주의 반대론자들은 현지 전통과 관습을 온존시키고, 재래의 지배층인 양반을 활용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제시했다. 이렇게 일본인 배제와 식민지 자치를 주장하는 간접 통치론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화주의는 식민 통치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이 오랫동안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이라는 주장은 서구 열강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일본에게 이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385-6)


"1910-1920년대 일본에선 자유주의와 혁신주의의 기운이 분출했고, 바깥 나라들에 대해 구미 협조 노선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들을 반영하면서 전통적인 동화주의를 대신해 등장한 것이 내지연장주의였다. 메이지 시기 동화주의가 문화와 정신의 '일본화'를 강조했다면, 새 변형태로서 수정주의는 이른바 문화정치의 시행에서 보듯이 제도의 문명화를 의도했으며, 동시에 일본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을 지향하는 미묘한 강조점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즉, 무력을 통해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강제로 주입한다던 이전 원칙을 대신해, 이제 동화주의는 일본을 근대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설정하는 세계관을 반영했다. 결국 일본인에의 동화란 서구를 준거 삼은 문명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일본 문화 그 자체의 이식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대적 관점에서 일본 전통에 소홀해지는 이러한 사유 방식은 식민지로 확장되었고, 식민지의 '야만' 전통 또한 문명화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88-9)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동화주의는 직접 무력을 동원하고 행사하기보다 그 과시와 위협을 통해 식민지인의 정신에 극도의 억압을 강제했다. 그것은 비상 전시 체제 아래서 끊임없이 피지배자들의 긴장을 유도하고 끝없이 피지배자들을 동원한 열광의 광기였다. 따라서 황민화 정책을 단순한 일본 문화의 동질화가 아니라 〈정신의 정복〉, 〈정신의 총동원 체제〉라고 본 것은 일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 안에선 조선과 일본을 별개로 보는 호칭 자체가 소거되었다. 예컨대 '선인'이나 '조선인'은 차별어로 불렸고, 대신 '반도인'이나 '반도 동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일본어'라는 호칭도 일본을 외국처럼 본다는 이유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국어'가 올바른 용어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조선어 사용 금지는 민족어 말살이라기보다 표준어나 공통어를 보급하는 차원의 하나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전시 체제 아래서 동화주의는 민족과 관련된 모든 형태의 표지를 소거함으로써 〈조선인을 근본에서 일본인화〉하려 했다."(40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