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신이 된 시장 : 시장은 어떻게 신적인 존재가 되었나
하비 콕스 지음, 유강은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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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개관

1. 신이 된 ‘시장’


나는 경제학자-신학자들의 주장에서 현대 종교 사상의 변증론을 발견했다. 특히 기업 신학자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윌리엄 제임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간혹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라고 불리는 사조와 비슷하다. 제임스는 ‘유한한 신성’, 즉 무한한 시간 동안 이런 궁극적인 속성을 향해 나아갈 뿐인 신성을 옹호했다. 이런 추론은 분명한 이유로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 신정론theodicy이 부딪히는 당혹스러운 문제, 즉 전지전능하고 편재하며 자애로운 신이 묵인할 것 같지 않은 갖가지 나쁜 일이 왜 생기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장’ 신학자들이 보기에 능력이 아직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끝없이 확대되는 시장 영역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탈구dislocation, 고통, 방향성 상실이라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겪는 고난은 비극적이지만, 그렇다고 ‘시장신Market God’이 궁극적으로 자애롭다는 사실에 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11-2)


‘시장’의 궁극적인 전지적 능력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칼뱅의 불가사의한 신이 그렇듯이 ‘시장’ 역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결국 ‘시장’은 누구보다 잘 안다. 우리는 때로 이런 ‘시장’ 종교의 시대에 회의론자와 자유사상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한다. 가짜 기적을 폭로한 볼테르들이나 종교를 빙자한 사기를 날카롭게 고발한 멩켄Henry Louis Mencken들은 어떻게 됐나? 현재의 정통 신앙이 워낙 지배적이기 때문에 ‘시장’의 전지적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은 섭리의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그게 진짜라고 말하면(코카콜라를 생각해보라 〔코카콜라는 1969년 광고에서 ‘이것이 진짜’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그것은 진짜임이 확실하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말했듯이,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 이제 ‘시장’의 지치지 않는 탐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다. 17-8)


2. 왕의 과학과 신의 과학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심각한 분열을 낳은 신학 논쟁은 ‘교황 무오류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싸움이다. 오늘날 무오류성을 둘러싼 견해차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묘하게 비교되는 문제를 둘러싸고 비슷한 논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고 무척 흥미로웠다. 이처럼 논쟁적인 경제학 교의 항목의 창시자는 시카고대학교의 유진 파마Eugene Fama다. 그는 일련의 저서와 논문에서 ‘시장’은 현존하는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에 근거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결코 틀리지 않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교황의 무오류성이 교황은 일정한 조건 아래서(즉 교황좌에서ex cathedra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관해 전체 교회를 상대로 발언할 때)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고 변명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시장 무오류 가설 역시 오직 ‘효율적인’ ‘시장’에서 무오류성을 주장한다. 파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장의 효율성이란 시장이 입수 가능한 모든 정보를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활용한다는 뜻이다.” 26)


이 두 가지 유사한 논의를 숙독할 때면 가끔 놀라운 결론에 거의 이를 뻔했다. 내가 아는 한 어떤 신학자나 경제학자도 내리지 않은 결론이다. 두 경우에서 ‘오류가 없다’와 ‘올바르다’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의 용법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두 교의가 이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로 볼 때, 어떤 발언이 진실일 뿐만 아니라 오류가 없는 진실인 것은 단지 교황이 선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이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신학자들은 이것을 신앙 감각sensus fidelium이라고 부른다)를 귀로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도 교황이 어떤 것을 공식 교의로 반포하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에서 ‘진실’이 된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은 교의 반포 전날에 어떤 견해가 있었든, 이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의무가 있다. 마찬가지로 ‘시장’은 (효율적일 때) 언제나 올바르다. ‘시장’은 원래 그런 것, 즉 구매자와 판매자, 투자자가 행하는 무수히 많은 결정의 정확한 반영이자 증류물이기 때문이다. 27)


3. ‘시장’은 어떻게 신성한 존재가 되었는가


고대 제국의 도시에서 시장은 항상 도시의 물리적 중심인 사원 구역에 자리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신전에서 환전상을 쫓아낸 유명한 일화를 떠올려보라. 환전상이 펼쳐놓은 상을 뒤엎고 그들을 강도라고 꾸짖은 이야기는 오랫동안 엄청난 오해를 받은 주제다. 많은 설교자들이 예수가 신성한 장소의 담장 안에서 이런 상업 활동을 한다고 비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전후의 여느 신전처럼 이 유대교 신전에도 담장, 즉 바깥마당 안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장소가 있었다. 무엇보다 희생 제물로 사용하는 짐승과 새를 파는 장사치가 많았다. 순례자들은 팔레스타인과 로마제국의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왔으니 서로 다른 돈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지역 화폐로 짐승 값을 치러야 하니 ‘환전’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예수가 환전상에게 채찍을 휘두른 것은 그들이 하는 장사나 희생 의례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수수료가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32)


강과 마찻길이 합류하는 지점마다 점차 상설 시장 천막촌이 등장했다. 고대의 또 다른 관습이다. 시장을 뜻하는 수메르의 표의문자는 Y로, 교차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디서 등장하든 시장은 신전 담장 안에서 장사할 때부터 통용된 도덕적·종교적 제약 아래 거래해야 했다. 도시와 자치구 그리고 회원들이 ‘공정가격’이라는 신학적 개념과, 엄지손가락으로 슬쩍 저울을 누르고 이중 바닥을 깐 바구니를 사용하는 사기꾼에 속지 않게 구매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내면화하던 길드와 동업조합이 이런 제약을 강제했다. ‘구매자가 조심해야 한다caveat emptor’는 인식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구매자는 자신의 신중함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의 약탈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는 도덕적 교훈의 오랜 전통에도 도움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시장이 자동적으로 자기 조정을 한다는 사고를 기괴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거래자나 구매자, 판매자는 모두 그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에 엮인 신뢰, 예절, 의무가 가정된 관계에서 거래했다. 34)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정신이 퍼져 나갔다. 이제 멀리 떨어진 도시들 사이에, 심지어 다른 민족들 사이에도 교역이 발전함에 따라 묘하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담보대출, 환전, 운송보험, 합자 사업 등이 등장했다. 지폐가 황금 자루를 대체했다.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추상적 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용장을 비롯한 여러 ‘증서’가 등장함에 따라 노점과 가판대는 필요 없어졌다. 돈으로 돈을 벌고 빚을 져서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자비함과 사기에 매혹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나치게 커진 돈 상자를 억제할 가능성은 줄었다. 이제 구매자와 판매자, 차용인과 대부자가 만나서 암묵적이거나 공공연한 도덕규범 안에서 거래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날 시장을 단순히 특정한 구역이나 여러 사회제도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시장주의’ 시대에 산다. 이제 ‘시장’은 우리의 사회적 상상에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태도의 변화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다. 35-6)


4. ‘시장’은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그리스 종교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보여준다. 신은 남을 속이고 질투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천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죽일 듯한 원한을 품는다. 하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은 불사의 존재다. 이제 새로운 인간을 보라ecce homo novus. 현대의 법인corporation-person을 보라. 지난 세기에 장황하게 얽힌 법률과 판례를 통해 등장한 현대의 법인 기업은 제우스와 아테나 같은 올림포스산의 지위에 다다랐다. 법인 기업은 생명을 무기한 이을 수 있다. 구식 모델에 비해 상당한 변화를 나타내는 새로운 법인의 다른 특징은, 많은 경우 법률이 법인에 ‘유한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 모델을 새롭게 주조된 법인 모델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너무나 분명하다. 구식 인간은 우리가 꿈틀거릴수록, ‘비극적 얽힘’에도 우리는 자기 행동에 책임이 있다(책임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자유의지와 죄와 책임이라는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었다. 39-40)


'유한책임'이라는 이례적인 특성 외에도 ‘시장’이 창조한 ‘인격’은 어느 작가가 ‘변신shape shifting’이라고 말한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비교종교학, 특히 민속 종교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 개념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인간이 코요테나 사슴으로 변할 수 있는 힘은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관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이런 변신 능력이 나타난다. 이런 능력은 늑대 인간과 커다란 검은 박쥐와 사람이 거의 자유자재로 바뀌는 최근 뱀파이어 영화의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법인의 세계에서 변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인 기업은 불멸의 존재지만, 예를 들어 성가신 소송을 피해야 할 때는 다른 법인 기업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간단히 몸을 숨길 수 있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변신이지만, 화신化身과도 기괴한 유사성이 있다. 그 결과 이전의 법인은 사멸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며, 이전에 한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40)


법인 기업은 1790년대 미국에서 처음 설립되었을 때 소규모였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각 주에서 인가를 받았다. 이 기업들의 주식은 보통 해당 기업의 활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수 있는 지역 주민이 샀다. 설립 취지문에는 보통 기업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지 규정되었고, 이 기업들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설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인 기업에 설립 허가를 내준 정부는 기업이 대중에 의해 허가를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대중에게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주주shareholder뿐만 아니라 이해 당사자stakeholder (법인 기업이 이해를 충족해야 하는 사람과 기관 )도 있었다. 초창기 법인 기업은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획득하는 일부 특질을 갖춘 것 같다. 법인 기업은 덩치가 훨씬 더 커지고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쌓으면서 이윤 획득에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여기는 정부 감독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변화는 그 유명한 ‘강도 귀족robber baron’의 시대를 열었다. 46-7)


5. 고리대금업과 피싱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의 주교이자 유명한 설교자 바실리우스Basilius(329~379)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자를 물리고 돈을 빌려주는 식으로 궁핍을 악용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큰소리로 비난했다. 대신 무조건적인 선물을 주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선물은 하느님에게 투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세에는 교회와 문화 일반 모두 고리대금업을 혐오스럽고 부도덕한 행위로 보았다. 단테가 지옥을 점점 깊어지는 아홉 단계 원형 구덩이로 묘사했을 때, 고리대금업자는 가장 깊숙한 일곱 번째 고리에 자리하는데, 그 옆에는 신성모독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폭력을 가했다’고 여겨지는 남색자가 있다. 고리대금업자는 아는 사람과 이방인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죄인보다 나빠서, 살을 물어뜯는 뜨거운 바람(‘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물다’라는 뜻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벌이다)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떨쳐내려고 헛되이 애쓰는 존재로 묘사된다. 57-8)


장 칼뱅이 극단적인 종교개혁을 이룬 (상업적인) 도시국가 제네바에서 적당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다. 칼뱅의 교의에서 ‘허용’ 부분은 금세 받아들여졌지만, ‘적당한’이라는 부분은 이내 무시되었다. 종종 버티려는 시도는 있었다. 1552년, 구두쇠 정신과 약삭빠른 사업 관행으로 이름을 날린 스코틀랜드에서 새로 등장한 개혁파교회Reformed Church〔개신교 가운데 칼뱅파〕는 탐욕스러운 상인, 임금을 주지 않는 주인, 소작인을 혹사하는 지주 등과 나란히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교리문답을 발간했다. 하지만 분주한 상업의 소리가 커짐에 따라 설교자와 도덕가의 훈계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1572년 〈고리대금업에 관한 토론Discourse upon Usury〉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서 널리 읽힌 소책자에서 토머스 윌슨Thomas Wilson은 이자를 물리는 대부는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이며, 상인을 비롯한 사업가들은 “자신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 등의 집단에게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58-9)


일부 길드와 교구, 수도원에서 구사한 좀 더 창의적인 책략은 가난한 사람이 훨씬 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릴 수 있는 대안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1462년, 전통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프란치스코회는 경건은행mont-de-piété 〔교회에서 자선사업으로 운영하는 공공 전당포〕 모델을 만들어 이탈리아 전역과 나중에는 프랑스와 독일까지 퍼뜨렸다. 뒷날 프로테스탄트도 이 모델을 채택했는데, 지금도 교회가 후원하는 신용조합에서 그 후예를 볼 수 있다. 이런 고귀한 시도는 경제 변화의 거대한 흐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세상의 모든 교회 세력도 계약, 식민지, 무역 회사, 합자회사, 신용 기법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다. 17세기에 데이비드 존스David Jones 신부가 런던의 성공회 성당인 세인트메리울노스에서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설교를 한 일은 상징적인 클라이맥스다. 설교문은 다음과 같다. “탐욕스러운 바리새인은 이 모든 말을 듣고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신부는 그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59-60)


6.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에 관한 성서 자료


희년은 서판을 깨끗이 지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새롭게 경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제도가 우리가 보통 가난한 이의 주된 옹호자로 보는 예언자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성스러운 율법에 한 층위로 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희년은 예수 시대에 실행되지 않은 것 같다. 로마 점령자의 가혹한 과세 정책과 억압적인 토지 규제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희년에 대해 알았다.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자신의 사명을 발표하며 성경 구절을 읽는다(〈누가복음〉 4장 16~19절). 예수는 ‘두루마리를 말기’ 직전에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 학자들은 이것이 희년을 가리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없애준 것같이 우리의 빚을 없애주시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교파에서는 빚이라는 용어 대신 ‘죄trespass’,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문구는 원래의 경제적 내용이 사라졌다. 65)


2부 장애와 질환

7. 상층부의 합선


가톨릭교회는 4세기 무렵부터 많은 이에게 합리적인 해법으로 보이는 조치를 내놓았다. 대수도원장과 주교는 말했다. “우리에게 재산을 내놓아라. 우리는 정당하게 임명된 그리스도의 후계자이므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그 재산을 맡아놓고 신중하게 분배할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현생과 다음 생에서 여러분과 그 가족을 위해 계속 기도와 대리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이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으로, 이후 여러 세기 동안 교회가 수도원과 교구를 통해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기관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가 관리하게 기부한 재산은 ‘가난한 사람의 세습재산’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므로 교회에 기부나 유산 증여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중세 사학자 피터 브라운Peter Brown은 이런 관념이 엄격한 윤리적 권고와 전례를 통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식으로든 교회 기금을 고갈시킨 이들은 ‘빈민 살인자necatores pauperum’라고 불렸다. 79-80)


1305년에 프랑스 고위 성직자 다수가 장악한 추기경단은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했고, 신임 교황은 클레멘스 5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인 교황 다섯 명이 아비뇽에 남아 가톨릭 세계를 통치했다. 아비뇽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간 종교 상품을 생산하는 국제 카르텔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요 제품은 교회 직책으로 유급 직책이나 ‘고위 성직’, 당시 교회의 거대한 위계질서에서 부른 말은 ‘성직록을 받는 성직’이다. 당시 주교가 700명, 그 아래 성직자가 수천 명이었다. 성직자도 때가 되면 죽었기 때문에 채울 자리가 계속 생겼다. 이런 성직은 대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이고, 때로는 피임명자가 자리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자리를 얻으려고 혈안이 되었으며, 아무 부끄럼 없이 공공연하게 직책이 매매되었다. 마술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simony(성직 매매)’라고 불린 관행이다. 마술사 시몬은 영적인 힘을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인물이다(〈사도행전〉 8장 9~24절). 81)


8. 거대 은행과 거대 교회


초대형 교회가 기업과 가장 흡사한 특징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혹독하게 성장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매리언 매덕스는 초대형 교회가 자신이 소망하는 사고의 요소를 담아 지칭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른 비평가들이 ‘성장주의growthism’라고 부르는 현상의 신봉자인 초대형 교회는 교인 숫자를 늘리고 더 많은 헌금을 모으는 데 노력을 집중한다. 이런 활동이 대부분 노골적인 물질주의고, 진정한 영적 의미는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너희는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여라. 이렇게 바치는 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서, 너희가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아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말라기〉 3장 10절). 번영 설교자는 이 구절을 들이대면서 필요한 물질적 재화가 부족한 사람은 분명 신앙이 부족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거나, 교회에 충분히 헌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7-8)


구조적으로 볼 때, 초대형 교회는 종종 성서의 해석보다 현대 경영 기법에 관심 있는 대표 성직자를 둔 대기업 조직을 모방한다. 초대형 교회는 계속 움직이는 존재로, 미래의 강한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곳은 당신 할아버지가 다니던 교회가 아닙니다.’ 앞 세대가 교회에 갈 때 준수하던 복장 규칙이 대부분 폐기되고 반바지, 심지어 짧은 청바지를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현상은 초대형 교회의 느슨한 스타일이 널리 퍼진 ‘시장’ 정신에 깔끔하게 순응한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초대형 교회 성직자들이 항상 이런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회중에는 종종 한 세대 이상이 포함되며, 음악과 의상의 선호도 서로 다르다. 미국에서 일부 초대형 교회는 시간대에 따라 다른 예배를 제공하는 식으로 사람들의 특이한 취향에 맞춘다. 컨템포러리 예배는 오전 9시, 전통 예배는 오전 11시, ‘가스펠’ 예배는 오후 2시, 포크 예배는 오후 5시 같은 식이다. 91)


3부 역사: 돈을 좇다

9. 주교와 수사: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를 지지하기를 꺼렸음에도 그와 추종자들이 마침내 펠라기우스에게 승리했을 때, 단순히 신학적 관념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싸움을 치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파벌은 앞서 도나투스파(자신들이 보기에 기꺼이 타협하는 기독교인과 친교를 받아들이기 거부한 순수주의자)라 불리는 운동과 싸움에서 이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쪽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도나투스파의 토지는 로마제국에 압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던 가톨릭교도는 이후 그 토지와 그에 따르는 수입까지 물려받았다. 교회가 거둔 승리의 결실이다. 그 결과 그들은 펠라기우스를 상대로 제국 법정에서 새로운 소송을 벌일 때 필요한 비용을 충당할 자원을 끌어모았다. 현금의 조용한 속삭임은 종교의 정치를 포함해 정치에서 언제나 위력을 발휘한 것처럼 종교에서도 그만큼 설득력을 보였다. 98)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의 재력은 많은 귀족 가문의 재정적 혼란 때문에 특히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귀족 가문들은 제국 법정에 가까웠을 테지만, 당시 그들 지역을 휩쓸면서 재산을 유린한 반달족 침입자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상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팀은 적재적소에 돈을 썼고, 돈을 뒷받침하는 정치 공작에도 능숙했다. 이 가문 중 일부는 워낙 사정이 쪼들려서 야만족 침입자를 매수하기 위해 모금하는 공동 자금에 돈을 내지 않았고, 이런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다른 귀족과 사이에 불화와 긴장이 생겼다. 다시 통일을 확립하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반달족이 침략하기 전에는 상충하는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일치가 용납할 수 없는 분열로 간주되었다. 알프스산맥 너머에서 온 약탈자에 맞서 정치적·종교적으로 똘똘 뭉쳐야 할 때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펠라기우스를 이단자로 규정한 것은 이런 지배적인 정서에 영합한 것이다. 분열은 나쁘고, 돈은 환영받았다. 98)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부는 일종의 ‘은사charisma’, 즉 하느님이 준 신비로운 선물이며, 문제는 재부가 있는지 혹은 재부를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아니라 그 재부로 무엇을 하는가라는 사고를 내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파와 펠라기우스파의 논쟁에서 재부와 세속 권력이 수행한 커다란 역할은, 이후 벌어진 표면상 신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논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중세 후기에 수도원 운동과 이른바 ‘이단’ 그룹이 부상한 이면에는 교회의 재부가 커지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종교개혁은 원래 면벌부 판매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폭발했다. 맘몬Mammon은 심지어 지성소에도 전혀 없지는 않다. ‘돈을 따라’의 렌즈로 교회사를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 논쟁, 인물 등도 들어간다. 하지만 가르침과 교의에 관한 일반적인 책자에서는 현금 흐름이라는 요소를 자주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기 때문에, 이 렌즈로 종종 작은 활자나 행간에서 드러나는 내용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99-100)


10. 애덤 스미스: 창시자이자 수호성인?


스미스는 경쾌한 18세기 산문으로 인간의 도덕 감정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 우리의 이기적인 애정은 억제하고 남에 대한 자비로운 애정은 내버려두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성하는 길이다.” 일종의 칼뱅주의자인 스미스는 때로 종교 속의 ‘열정’을 비난하지만 (감리교도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사실 그는 거기에서 핵심적 사고를 빌렸다. 인간은 원죄의 속박을 벗어나서, 존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이 우리에게 의도한 ‘완전함perfection’을 향해 ‘나아갈’ 힘이 있다. 그러므로 칭찬할 만한 욕망과 비천한 욕망 둘 다 존재한다. 진정한 공화국commonweal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진보에 기여하는 욕망과 그렇지 못한, 심지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욕망. 여기서 성인 후보 스미스는 분명히 무제한적인 소비자주권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는 순전한 이단, 기껏해야 ‘시장신’을 찬미하지 않는 교의를 가르친다. 106-7)


스미스는 우리를 위해 정해진 도전해볼 만한 목표를 실제로 달성하는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문제에서 정통 교의와 크게 견해가 갈린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시장’의 교리문답에서 보면 인간은 자신에게 제시된 무수히 많은 가능성 가운데 자기 이익을 선별할 힘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이 실망스러운 것임이 밝혀질 때 그것은 어떤 내적인 약점 때문이 아니라 둘 중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즉 지나치게 많은 규제 탓에 선택의 범위가 왜곡되거나, 선택하는 사람이 합리적인 구매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떤 실체적인 선의 개념은 배제된다. 좋은 것은 선택되고, 선택되는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고귀한 본성과 천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 똑같이 싸우는 것을 인정하며 고귀한 본성을 ‘공정한 관찰자’, 즉 우리 머릿속 양심의 목소리라고 설명한다. 스미스는 개인의 만족뿐만 아니라 공동의 안녕에 대한 인식에도 근거하는 선택을 옹호한다. 107)


11. 애덤 스미스: 신학자이자 예언자?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현재 경제학과 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전에 살면서 글을 썼다. 그의 저작은 21세기 경제학자나 신학자가 출간하는 저술과 닮은 점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하지만 스미스의 저술은 많은 고전적 신학자나 당대 신학자와 비슷한 추론 패턴을 따른다. 그는 당대 스코틀랜드 지식 문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종교와 철학 전통의 흐름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성서 연구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스미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서 《국부론》의 제목을 성서에서 빌렸음을 알 수 있다 〔《국부론》의 원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는 〈이사야〉 60장 5절에서 빌려온 ‘이방 나라의 재산the wealth of the nations’이라는 구절이 있다〕. 스미스는 ‘신학’에 포함되는 모든 분야를 장악하지는 않았지만, 그 흐름에서 헤엄쳤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인 1759년에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도덕 감정론》을 출간한 사실이 중요하다. 111-2)


스미스의 신학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당대 스코틀랜드를 지배한 온건한 칼뱅주의다. 그의 시대에 군림한 칼뱅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지 않았다. 당대 칼뱅주의는 오히려 칼뱅에게 중요한 다른 개념, 즉 세상에서 신의 섭리적 존재, 사회에 대한 종교의 유익한 기여, 신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서 이성의 중요한 역할, 신의 자애로운 인도 아래 인류의 축복받은 미래 등을 강조했다. 스미스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원천은 당시 명칭으로 하면 자연신학으로, 신이 인간을 위해 ‘두 권의 책’을 썼다는 전제에 입각한 것이다. 하나는 성서, 다른 하나는 자연인데 보통 대문자로 ‘Nature’라고 썼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학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사고에 미친 지배적인 영향은 그가 특히 독일식 표현으로 익숙한 자연법 전통이다. 이 학파는 보통 말하는 자연의 우주보다 윤리와 도덕에 관심이 많았다. 이 학파는 스미스가 글래스고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13)


12. 은행가, 철학자, 트릭스터, 작가


농담, 장난, 잔꾀, 골려 먹기. 이는 신화와 민간신앙 연구자들이 사실상 알려진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형인 ‘트릭스터trickster(장난꾸러기)'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저장고에 담긴 책략이다. 트릭스터는 신일 수도 있고 반신반인이나 동물, 인간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특징은 전통에 따라 다르지만, 트릭스터는 언제나 똑똑하고 빈틈없고 창의적이며 일반적인 예절 규칙과 관습을 조롱하는 농담과 책략의 원천이다. 히브리 족장 야곱이 트릭스터 유형의 좋은 사례인 것은 그가 비록 거짓말하고 남을 속여 빼앗지만, 우리가 그의 용기와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트릭스터의 꼴사나운 광대 짓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지 몰라도, 그들에게 미소 짓고 어여삐 여기며 심지어 존경한다. 트릭스터가 종종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삶이 온통 불공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트릭스터가 적어도 불행과 정면 대결하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127-8)


1857년, 멜빌은 고향 땅의 영혼을 소설적으로 탐사한 작품 《사기꾼: 그의 변장The Confidence Man: His Masquerade》을 발표했다. 《사기꾼》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외륜선 피델호Fidele호의 승객이 유창한 사기꾼에게 속아서 차례로 돈을 빼앗기는 풍자적인 사건을 다룬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있으며, 이야기가 펼쳐짐에 따라 독자는 질문한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거지?” 마침내 멜빌은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문학적 눈속임으로 독자가 이 긴 이야기를 읽는 내내 우리 역시 속았음을 깨닫게 만든다. 실제로 우리의 삶 전체가 거대한 순회 서커스 천막이나 월 스트리트 안에서 진행된다.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진 이곳에서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피델호에 탄 사람처럼 다른 모든 이들을 속이는 것 같다. 멜빌은 선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속임수의 잔치에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을 지어내는 작가이며, 소설은 독자가 기꺼이 공모하는 거짓말의 직조다. 128-9)


연구자들은 멜빌이 《사기꾼》 에 집어넣지 않은 초고 한 장을 발견했다. 여기서 소설가는 자신이 ‘저자들의 저자’라고 부르는 하느님조차 인간이 처한 조건의 온갖 모순과 수수께끼를 피하지 못한다고 숙고한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근거한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은 신이 고전 신학자들이 생각한 완전성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심지어 그런 완전성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신 역시 인간이 부여잡고 고투하는 유한성의 한계를 일부 공유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성서의 하느님은 신인 동형이 아니라 신인 동정이라고 주장(신도 인간처럼 기쁘고 괴로운 감정이 있다는 주장)했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 일명 ‘케노시스kenosis’야말로 하느님이 모든 신적 완전성을 갖췄음에도 성육신에서는 이런 완전성을 밀쳐두고 유한성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제한을 완전히 공유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멜빌 역시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130-1)


13. 하느님의 숨결과 시장의 정신


‘시장’은 불균등하거나 비대칭적인 것은 죄다 혐오한다. 마케팅, 생산, 유통은 사회 환경이 획일적일 때 더 효율적이다. 다양한 문화적 풍경과 사회적 제도, 국지적 취향과 전통 관습에 맞추기 위해 광고 카피를 끊임없이 고쳐 쓰고 판매 기법을 조정하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시장’은 〈시편〉의 작자처럼 산과 언덕은 깎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기 원한다. 주형이 깨질 때만 중요한 혁신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학자 슘페터는 이런 사실을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다. 하지만 ‘시장’은 이런 혼란을 불쾌하게 여기며, 가급적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열망한다. ‘시장’은 단색 외부 지형만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내면적인 예측 가능성도 필요하다. 사람들이 개심에 열려야 하는 것이다. ‘시장’의 복음은 복잡한 게 아니다. 물론 어지러울 만큼 갖가지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그 밑바탕에 놓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 복음이 하는 말은 간단하다. “이걸 사면 당신은 행복해질 것이다.” 136-7)


14. “세상으로 나가라”


성서학자들은 오순절을 다양성의 단호한 찬양으로 해석한다. 성서는 방 안에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리비아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사도행전〉 2장 9~10절)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지만, 성령 덕분에 상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 모두 그리스어나 라틴어,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아님에 주목하자. 그들은 언어적 획일성에 종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언어로 말했고 서로 이해했다. 이것은 그들이 문화적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탑 이야기를 뒤집은 일화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써서 갑자기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 오순절은 문화적 특수성을 지우지 않은 채 좀 더 포용적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 반면 화소의 오순절은 그런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새로운(획일적인) 집단을 창조한다. 142-3)


15. ‘시장’의 교회력


‘시장’ 종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력을 만든다. 때로는 독자적인 축일을 고안한다. 하지만 대개 종전 종교 축제에서 생겨난 정서와 관행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며, 나름의 취지를 위해 이런 감정을 활용한다. 이런 취지가 항상 해당 축일의 원래 취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은 대체로 흡수 전략을 선호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 축일의 활기에 편승하는 게 무에서 고유한 축일을 창조하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어떤 축일도 판매를 확대할 기회로 활용하려는 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특별한 날은 충분히 많은 잠재적 고객을 끌어들일 만큼 유명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런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내가 최근에 직접 목격한 사례는 타미힐피거가 이슬람교 성월인 라마단을 추가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활용하려고 벌이는 캠페인이다. 타미힐피거는 이런 매혹적인 시장을 활용하기 위해 카프탄caftan과 카울 넥cowl neck, 검은색 새틴 이브닝드레스, 청록색 긴소매 드레스 등을 출시했다. 150-1)


16. 모든 소원을 아시며


기업은 이른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 업체와 연결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미국 최대 데이터 중개업체는 액시엄Acxiom이다. 한 보도에 따르면, 액시엄은 컴퓨터 서버 2만 3,000개를 보유하고 1년에 데이터 거래 50조 건을 처리한다. 이 회사는 개인별로 13자리 숫자 고유 번호를 붙인 미국인 2억 명에 관한 ‘디지털 기록’에 평균 2,500개 데이터 포인트를 저장한다. 이 조사의 특징이 무엇이든, 마케팅 담당자들 역시 전통적인 고해실과 마찬가지로 마음속 은밀한 욕망을 발견하는 것을 훌쩍 넘어선다. 그들은 이런 욕망을 창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매일같이 우리 공간을 침범하는 광고(스팸 메일, 텔레비전 광고, 길거리 광고판, 인터넷 광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한 사람은 주변에 흘러넘치는 광고가 대부분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곳에서 욕망을 창조하려는 가차 없는 시도임을 안다. 이 과정은 과거 고해실처럼 종전의 열망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열망을 불어넣기도 한다. 165-6)


17. ‘시장’과 세상의 종말


신학자들은 세계의 종말에 대한 관념 연구에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eschatology’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마지막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eschata’에서 유래했지만, 종말은 이따금 시초로 돌아가는 것이고 일부 신학에서 ‘종말’은 ‘끝finis’뿐만 아니라 ‘목적telos’도 의미하기 때문에 종말론은 점차 ‘역사신학’이라 부를 수 있는 학문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 다닌 교회학교 벽에 있던 일곱seven ‘시대dispensations’ 도표에 빠져든 것은 ‘최후의 심판 날’을 묘사한 방식 때문이라기보다 가차 없는 시대의 흐름에서 내 위치에 관한 표시가 묘한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 많은 사람이 대재앙을 예상하는 종말론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말론은 비록 이따금 틀린 것이라도 의미와 방향, 중요성에 대한 느낌을 제시한다. 때로 사람들이 태평한 왕국 같은 어떤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고무한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이 잔인하고 과격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기도 한다. 172)


히브리 신앙은 일신교가 아니라 단일신교henotheism이다. 〈시편〉의 다음 구절에서 핵심은 신들에게 부족해 보이는 진정한 신의 의무를 자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 하느님께서 신들에게 말씀하셨다. /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주어라. /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분별력도 없이, / 어둠 속에서 헤매고만 있으니, / 땅의 기초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 너희도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다.” 〈시편〉 82편 1~7절. 진정한 신에 대한 이런 기준을 감안할 때, ‘시장’은 자격 미달이다. 178-9)


18. ‘시장’의 영혼 구하기


라틴어 ‘restoratio humani(인간의 회복)’라는 구절은 인간을 만물의 질서에서 적합한 자리, 즉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의는 안셀무스의 유명한 질문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에 답하고자 한다. 몇몇 이론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생명으로 화신한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화神化(theosis)라는 이 개념은 초기의 일부 기독교 신학과 그리스·로마 종교의 일부 경향으로 들어갔다. 후자의 경향에서는 인간이 때로 신이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성육신Incarnation에 대해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의 모습대로 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취하셨다.” 하지만 결국 등장한 지배적인 모티프는 약간 다르다. 신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온 것은 인간을 신성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되어야 하는 모습, 즉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 되도록 돕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회복’이란 말에 담긴 의미가 이것이다. 182-3)


이스라엘 학자 아비바 고틀리브 존버그Avivah Gottlieb Zornberg는 〈창세기〉에 관한 통찰력 있는 저서에서 하느님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힘을 다른 중심으로 분산하느라 분주했다고 설명한다. 존버그에 따르면, 하느님이 한 일은 ‘복잡성을 증대’하는 ‘원초적인 해체’ 작업이다.  “그날 〔첫째 날〕의 주된 업무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하나 됨oneness에서 하나 이상의 가능성으로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형하는 것이었다.” ‘시장’도 마찬가지로, 재창조 ‘첫째 날’ 혹은 ‘1단계’ 목표는 ‘시장’에 어울리는 건전한 자리로 그것을 회복하는 일(탈집중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날 하느님은 탈집중화를 계속한다. 하느님은 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물과 물 사이를 가른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자기 것이 아닌 현실을 갈라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은 새롭게 생긴 그 갈라진 영역 안에서 ‘권력 이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일한 과정을 도입하고, 이 요소 사이에 존재할 상호 관계의 성격을 만들었다. 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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