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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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퍼즐 


"나는 소련 붕괴가 불가피했다는 지배적인 서사, 즉 서방과 소련 내 반공주의 집단 내부에서 생겨난 서사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소련 붕괴의 역사는 사전에 알려진 대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이상, 두려움, 열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가 전개되며 펼쳐진 드라마였다." "이 책은 고르바초프를 중심에서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소련 행위자와 목소리, 이니셔티브(주도적 행동이나 조치)를 소개한다." "또한 소련 붕괴에 서방, 특히 미국이 미친 영향의 궤적을 고찰한다. 정부 및 비정부 행위자들과 언론은 소련 정치와 상상력에 기대 이상의 역할을 했다." "멀리서 보면 잘 알려진 증거도 달리 보인다. 소련사의 최종 국면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내가 그 사건의 참여자이자 목격자였을 때보다 지금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소련의 종말에서 무엇보다도 돈이 결정적이고 가차 없는 역할을 했음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소련 시절에 경제적 무지라는 내 사회적 배경을 고려해보면, 예전에는 완전히 놓친 것이었다."(25-8)


1부 희망과 오만, 1983~1990년


1장 페레스트로이카 


"1980년대 소련의 세입과 재정 상태는 위태로웠다. 문제는 서방의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막대한' 국방 지출이 아니었다. 문제는 소련이 세계경제에 점차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과 소련의 재정이었다. 소련의 무역수지는 높은 유가에만 전적으로 의존했다. 사근사근하고 태평한 브레즈네프는 스탈린과 달리 안정화 자금의 축적, 다시 말해 미래에 대비한 저금에 신경 쓰지 않았다. 1982년 11월 당 총회에서, 안드로포프는 곡물, 지방, 육류를 비롯한 식품의 수입이 늘어나는 상황을 비판했다. 〈누굴 겁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우린 지난 몇 년간 수십억 루블과 금을 낭비했소.〉 소련은 석유에서 나온 이윤을 서방의 과학기술을 수입하는 대신 식량을 수입하고 위성국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데 써버렸다. 적어도 폴란드는 서방에 진 빚더미에서 깔리면 스스로 어떻게든 해야 할 테고, 미국은 이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미국인들이 소비에트 블록에 속한 국가들을 상대로 벌이는 '통화 전쟁'에 관해 불길하게 언급했다."(36-7)


"안드로포프는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당 개혁가를 찾았다. 그렇게 만난 고르바초프의 공산주의적 신념은 공포와 배신, 학살의 세월로 얼룩지지 않았다. 1950년대에 모스크바대학을 다닌 학생으로서, 고르바초프는 불셰비키 지도자를 낭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친애하는 일리치'는 전제정과 불의에 맞섰고, 대중 테러 수단을 마지못해 채택했으며, 스탈린을 몰아내려다 비극적이게도 일찍 죽었다. 이 신화는 고르바초프 일파에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레닌은 이상이었고, 스탈린은 결함 있는 현실이었다." "1985년 12월, 야코블레프는 고르바초프에게 미래 정치 개혁을 위한 요강을 보냈다. 그는 지도자의 임무가 소련 사회에 억눌린 좌절감을 급진적 변화로 돌리는 것이라고 썼다. 초점은 정치적 개혁에 맞춰져야 한다.야코블레프는 당을 경제 관리에서 배제할 것을 제안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탈집중화, 글라스노스트(문제점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는 '관료제라는 독재'에서 소련을 해방해줄 것이다."(40-3)


"신레닌주의적 웅변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집권하고 첫 2년 동안 어떤 개혁 전략을 취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레닌의 숭배자로서, 소련 사회와 경제를 소생시킬 핵심 수단을 모색했다. 하지만 안드로포프의 보수적인 충고도 유념했다. 야코블레프가 제시한 급진적 정치 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소련 인민이 경제에서 실질적인 개선을 실감해야 한다는 충고였다. 그러므로 집권 직후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다뤄야 할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목록으로 작성했다. 〈1) 품질 2) 금주 투쟁 3) 빈곤층 4) 과수원과 텃밭을 위한 토지 5)  의약품.〉 놀랍게도 안드로포프가 소련의 거시경제 안정성에 관해 제기했던 시급한 문제는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식량 수입을 줄이고, 무역수지 균형을 회복하고, 그림자 경제를 강력히 단속하고, 노동력을 규율할 필요성 말이다. 고르바초프의 작성문은 소련 경제를 괴롭히는 경제적·재정적 문제점에 대한 진단은 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제 성장의 공식 표어는 '가속화'였다."(44-5)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 소련 경제학자들이 장기적 관점에서 무엇을 계산했든 간에, 1986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참사는 모든 것을 망쳤다. 소련 예산 중 체르노빌 참사 복구 비용은 사고 후 첫 한 달간만 30억 루블에 달했다. 1989년 초, 리시코프는 복구 비용이 8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무신론자지만 미신을 믿었던 라이사 고르바초바는 체르노빌을 매우 나쁜 징조로 여겼고, 수백만 명이 똑같이 생각했다.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소련 지도자는 물론 격노했지만, 레닌을 재연하기도 했다. 그는 위기를 이용해 포괄적인 결론으로 비약했다. 구체제 전체가 심하게 병들고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위기는 또 다른 혁명을 요구했다. 주된 메시지는 소련이 벼랑 끝에 있는데, 지난 15년간 국가와 인민은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았고 고약한 습관에 빠진 탓이라는 것이다. 당이 이 수렁에서 그들을 끌어내지 못하면 소련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늪'으로 다시 가라앉을 것이었다."(48-9)


"국영기업법은 1988년 1월에 시행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개혁가들이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법은 과거 소비에트 경제를 안정화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 무엇보다도 당의 역할을 약화시켰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자들은 당원이자 노멘클라투라였다. 이제부터 기업의 수장은 노동자와 직원의 '조합'에 의해 선출된 예정이었다. 더 이상 위에서 해고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개혁은 진정한 자유화와 경제 회생을 불러오지 못했다. 경영자와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기업 조합들은 엄청난 이윤을 축적했지만 이를 새로운 장비에 투자하고 능률과 생산 품질을 개선할 동기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 이윤으로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임금과 봉급을 불릴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소련 소비자 중 절대다수가 원하는 값싼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고, 값비싼 품목의 생산에 초점을 맞췄다. 단 몇 년 만에 고르바초프와 리시코프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소비에트 경제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을 터였다."(53-4)


2장 해방 


"소련 경제를 개혁하는 데 열심인 서기장이 서방 국가를 방문할 때 경제학자, 기획자, 군수 산업 경영자, 은행가, 여타 기술 관료와 동행했을 것이라고 예상할지도 모르겠다. 그 대신, 고르바초프는 언론인과 사회과학자, 작가, 연극 연출가, 영화제작자를 비롯하여 문화 인사들로 구성된 거대한 수행단을 데려갔다. 대다수는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서방의 모든 것에 대해 매혹과 찬탄,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급진적 개혁을 위해 소련 인민을 준비시키는 데 일조하도록 고무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열심히 모색하던 '진정한 사회주의'의 주요 원천은 모두 서방에 있다고 믿었다." "내부 담론에서 사용된 적 없는 언어와 개념이 들어올 길이 열렸다. 소련은 이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고, '다원주의', '위기', '전체주의', '스탈린주의' 같은 단어를 수용할 수 있었다. 서방에서 들여온 어휘들과 소련 언론인, 사회과학자, 작가의 저작에서 나온 어휘들이 소련의 옛 어휘를 점차 대체해나갔다."(74-5)


"고르바초프가 전 지구적인 세계관을 발전시키기 시작했을 때는 투철한 신레닌주의자였다. 정치국과 측근들과 함께 외교 정책을 논의하면서, 그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은유를 활용하곤 했다. 이것은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 3월에 독일제국과 강화 조약을 체결한 도시다. 이 조약으로 레닌은 영토를 내주는 대신 시간을 벌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소비에트 정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국내 개혁에 집중하기 위해 후퇴와 긴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데 이 은유를 이용했다. 고르바초프에게 브레스트-리토프스크가 주는 교훈은 지정학적 양보 이상을 뜻했다. 그는 냉전의 상대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의를 하고 싶었다. '공동의 이해관계'와 '인류 공통의 가치'를 토대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함께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소련 지도자는 현실정치의 각본을 따르는 대신, 도덕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보편적 비전을 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제안을 경제 및 정치 개혁의 시작과 일치시켰다."(75)


3장 혁명들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소련 최초의 핵무기를 설계했지만,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권 옹호자가 되었고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항의했으며 1980~1986년 KGB의 감시 아래 망명 생활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하로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1989년 봄의 모스크바 민주파 모임에서, 사하로프는 법의 지배, 시민사회, 인권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적 의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한때는 꾸밈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이제 막 탄생한, 말하자면 젊은 정치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빙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죠. 1주일, 아니면 2주일? 정말이지, 한 시간 만에 끝나버릴 수도 있어요.〉 그는 러시아 민주주의자들에게 최고의 전술은 불가능을 이루려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연단에서 허용되는 한 '진살의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것은 고르바초프가 기대하거나 원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111-2)


"인민대표대회가 만든 새로운 최고소비에트의 주요 메시지는 '행정적-관료적 시스템의 타도'였다. 입법 활동의 상당 부분은 '전체주의적'이지도, 자본주의적이지도 않은 경제를 수립하려는 욕망에 영감을 받았다. 갓 당선된 의원들은 유권자들에 대한 열의를 과시하며, 사회 안전망 프로그램을 확대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드는 다양한 요구를 정부에 쏟아냈다. 하지만 필요한 수단과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부 위원회들은 기업체와 협동조합 및 수출 지향 이해집단을 대변하는 새로운 로비 활동가들을 위한 정보 교환소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최고소비에트는 그러한 경제 행위자들에게 이익은 더 많이 배분해주고 세금은 낮춰주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 긴축 프로그램의 기획자인 아발킨은 1989년 7월 말에 최고소비에트가 〈[경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법안을 단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으며〉, 그 결과 〈국가 불능〉의 기운이 짙어지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했다."(118-9)


"1989년의 (동유럽) 혁명은 같은 해에 일어난 소련의 급진화처럼, 서구식 소비주의가 대중을 유혹하면서 야기되었다. 수천 명의 동독인들이 베를린장벽 위에서 자유에 취해 춤추는 동안, 수십만 명이 서베를린의 호화로운 상점을 뒤덮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보고 만지고 맛보고 싶었다." "1989년 봄과 여름에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자유화 노선은 상당한 급진화를 가져왔지만, 이번에는 국경지대가 아니라 나라의 핵심부, 무엇보다 모스크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공업 지대, 지배 엘리트 내부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전면이 먼저 무너졌고, 그다음은 동유럽에 위치한 외부 제국의 차례였다. 12월 16일, 동유럽의 마지막 공산 정권이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소련 지도자와 엘리트들에게 내부의 위기가 외부의 사건을 점차 압도했다."(139, 144)


4장 분리주의 


"옐친은 처음에는 보수주의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로 기울었지만, 미국을 방문한 후로는 자유주의적 의제로 전향했다. 1989년 12월 초, 그는 '러시아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러시아의 민주적·국가적·정신적 부활〉이라고 선언했다. 옐친의 '러시아'는 러시아연방만이었다. 그는 소련의 핵심부가 완전한 주권을 얻고, 자체적으로 헌법을 보유하고, EEC에 가입하고, 미국, 일본, 영국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길 원햇다. 터무니없이 야심 찬 목표였지만, 그 덕분에 옐친은 급진적인 포퓰리즘적 의제를 세웠다.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것이다.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옐친이 보내는 메시지는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들이 오랫동안 보유했던 경제적·정치적·사회적·과학적 기관이 없는, 국가성이 없는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인텔리겐치아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달랐는데, 러시아연방이 민주파에게 더 나은 목표라는 것이었다."(150-1)


"1990년 5월 31일 정상회담 첫날, 부시가 독일과 NATO에 관해 묻자 고르바초프는 갑자기 헬싱키최종의정서에 따라 독일은 가입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부시와 미국 관리들은 귀를 의심했다. 고르바초프가 거래하려 들거나 자문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매우 중요한 것을 그냥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체르냐예프가 소련대표단 가운데 놀라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비전을 위해 외교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크렘린 지도자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소련이 〈더 강하지만 민주적이고 ······ 진보적이고, 역동적이고, 자유로워져서, 바깥 세계와 미국을 향해 돌아서도록〉 도와주길 바랐다. 그 외에 나머지 소련 대표단은 그런 고고한 염원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공통의 목표 의식, 고르바초프나 나라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더는 없었다. 미국인들과의 동맹이 고르바초프의 실패한 개혁을 구해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사람은 없었다."(173)


"부시 행정부는 소련 정부에 대한 지렛대로서 계속해서 미국의 지원이라는 미끼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부시는 소련 경제 계획의 지침을 IMF와 세계은행의 전문가들에게 맡기기로 한 터였다. 부시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의 개혁 정책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제 개혁이 실패하더라도 부시 행정부가 책임질 일은 없었다." "1990년 전반기 동안, 고르바초프는 공화국 엘리트층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갈수록 거침없어지는 러시아 대항 엘리트층을 결국엔 상대해야 했다. 한쪽은 러시아연방 최고소비에트에서 옐친이 이끄는 집단이고, 다른 한쪽은 '러시아공산당' 집단이었다. 대항 엘리트층은 러시아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 포퓰리즘,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상충하는 세력들을 대변했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권위는 추락했고 정치적 기반은 좋게 말해서 위태로웠다.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유일하게 유리한 입지는 세계 정치가라는 독특한 위상이었다."(177-8, 181)


5장 갈림길 


"1989년 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 노브는 소련 경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의 끝에 빛이 보이기는커녕 터널도 안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연석회의에서 경제 위기의 심각성과 '갑작스러운' 출현에 대해 짐짓 놀라워한 유일한 참석자였다. 그는 페트라코프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는 대신, 리시코프가 정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길 기다렸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경제 전략 논의를 의회 기구에 위임했다. 둘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양극화, 급진적 포퓰리즘, 희생양 찾기의 분위기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대통령뿐이었다. 최고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최저임금 인상과 돈이 많이 드는 사회 보호 프로그램에 투표했다. 그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돈은 지폐를 더 찍어내야 하고,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심화된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리시코프 정부는 마침내 국영기업의 수익에 55퍼센트를 과세하는 방안을 내놨지만, 포퓰리즘적인 최고소비에트는 거부권을 행사했다."(182, 187)


"사실, 옐친은 강력한 연방 국가인 소비에트연방을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는 러시아와 같은 주권국가들로 구성되고, 상위에 강력한 중앙 정부가 없는 연합만 수용할 태세였다. 옐친의 구체적 요구 사항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이었다. 그는 리시코프 정부와 재무부, 국영은행, 대외무역은행의 수장들도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재무부는 개별 공화국들에서 파견한 이사들이 감독해야 한다. 러시아연방은 자체 KGB와 경찰을 두고, 수도인 모스크바와 자체 세관, 대륙붕·삼림·어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러시아 영토상의 무수한 산업 단지와 MIC(군산복합체)의 '폐쇄' 도시들도 관리해야 한다. 러시아 정부는 금 보유고와 다이아몬드, 석유, 여타 자원에서 러시아의 몫을 받아야 한다. 러시아의 과학아카데미, TV 방송, 항공사도 설립될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옐친은 〈크렘린은 러시아 소유〉라고 선언했다. 공화국 의회에서 아주 근소한 차로 선출된 지난날의 추방자는 최후통첩의 언어를 구사했다."(197-8)


6장 리바이어던 


"소련군이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철수하기로 하자 이는 모스크바에서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인 야로센코는 〈우리는 거대한 소련 군사력을 파괴하기로 동의했다. 그것도 공짜로. ······ 하지만 최고소비에트를 비롯한 누구도 그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 신뢰? 대출? 지원? 코콤(COCOM) 제재의 끝?〉 … 국방부장관 야조프는 전쟁으로 형제들과 형제들과 일가친척 서른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참모총장 모이세예프는 전쟁에서 형제들을 잃었다. 그들의 경력 전체가 냉전기에 이뤄졌다." "장성들은 고르바초프가 신세계 질서라고 말하는 사명감 가득한 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의무감과 규율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뜻을 따랐지만, 속으로는 대후퇴에 반대했다. 고르바초프의 군사 자문은 좀 더 유연해져서 군축 회담에서 양보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통일독일이 NATO에 가입하리라는 전망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228-9)


2부 쇠퇴와 몰락1991년


7장 대치 


"소련 지도자는 걸프에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에게 걸프전은 그와 부시가 함께 건설하기로 다짐한 평화로운 세계 질서라는 비전에 타격을 입힐 것이었다." "걸프전의 결과로 고르바초프는 체면을 잃고 위축되었다. 체르냐예프는 상관이 불만을 터트렸다고 기록했다. 〈워싱턴에서는 옛 시절과 옛 방식을 더욱 그리워했다. 그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열광적 도취를 끝내려는 모양이다.〉 미국의 걸프전 준비 과정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주의자들과의 유혈 충돌은 마찬가지로 미국이 세운 음모의 일환이었다. 미국의 자문들이 〈반대파, 누구보다도 옐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라고 고르바초프는 말했다. 분명 고르바초프는 KGB 보고서에 의존했지만, 체르냐예프조차도 새로운 세계 질서라는 고르바초프의 꿈을 전쟁이 묻어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체르냐예프와 그의 상관 모두, 소련은 미국의 하위 파트너 위치를 받아들이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277-9)


"1991년 3월 17일의 전 연방 국민투표는 고르바초프가 간절히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1억 4857만 4606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중 1억 1350만 명이 개혁된 연방을 보존하자고 찬성표를 던졌다." "사실, 국민투표는 공화국들에서 분리주의에 대한 요구를 무효화하지 않았다. 발트 3국과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까지 여섯 공화국이 투표에 불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두 공화국 국민의 과반수 이상은 독립공화국이 '주권국가연합'에 가입하는 데 '찬성' 표를 던졌다. 다시 말해, 그들은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지만 그러고 나서는 연방정부가 없는 연합에 가입한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 주 세 곳은 자체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소련으로부터의 분리에 찬성했다." "러시아연방 내 84개 자치구에서 옐친의 프로젝트는 확고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 투표 결과는 러시아연방 내 민족적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그의 정책을 확인해주었다."(283-4)


8장 이양 


"5월 21일,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의의 또 다른 특별 회기가 상당한 비용을 들여 크렘린에서 개최되었다. 4일간의 회기 동안, 러시아 대의원들은 선거 규정을 승인하고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으로 제한했다. 대회는 또한 옐친과 그 외의 다섯 후보자를 대통령 경선 후보자로 승인했다." "민주러시아는 옐친의 풀뿌리 선거 운동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를 제공했다. 대부분은 저항적인 '과학-기술 인텔리겐치아' 출신이었다. 옐친 선거 운동의 최말단은 그의 열성 팬, 다시 말해 혁명가적인 카리스마를 추종하는 수십만 개인이었다. 그들로서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식의 통치와 구질서의 붕괴로 인한 고통스러운 권력 공백을 채워주었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준종교적인 숭배심과 믿음도 불어넣었다. 서방 관측통들은 많은 러시아인이 그저 옐친이 그들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러시아식 사우나를 즐기며, 얼음장 같은 찬물에 첨벙 뛰어들었던 것이다."(304-7)


"옐친은 새로운 대통령직에 국가적 수단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불만스러웠다. 옐친은 여전히 국가 관료 기구에는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포퓰리즘적인 연설에서, 옐친은 중앙 관료제가 터무니없이 돈이 많이 들고, 특권의 중심지이며, 인민이 더 잘 살 수 있게 재정 지원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론 생각이 달랐다. 부르불리스가 회고하길, 옐친은 관료 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 계획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소련 관료 중 최고의 인력을 새로운 러시아 국가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옐친은 KGB가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의심했지만, 그런 막강한 조직의 적대감을 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러시아 지도자가 러시아연방 내 비러시아계 '민족' 자치구들에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공산당 없이, 러시아의 영토적·정치적 주권을 공고히 할 다른 국가적 수단을 찾아야 했다. KGB는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318-9)


9장 합의 


"1991년 여름은 소련의 미래와 소련 경제를 세계 시장에 적응시킬 방안에 관한 합의 없이 시작되었다. 가능한 서방의 선택지는 단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이곳의 비판가들은 준종교적 성격 때문에 이 개념을 '십계명'이라고 불렀다." "1991년 4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일부 러시아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로 구성된 한 그룹은 라틴아메리카에서 1980년대에 경제 성장을 유일하게 경험한 칠레를 방문했다. 그룹의 리더인 비탈리 나이슐은 수학을 연구한 적 있는 41세의 경제학자로, 고스플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나이슐과 친구들은 소련의 관료 체제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고 해체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는데, 소련의 노동력은 수십 년에 걸친 공산당 전체주의로 인해 변질되고 저하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시장 충격만이 노동 윤리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정상' 경제로 향하려면 완전한 붕괴와 고통, 그에 따른 생존의 과정을 불가피하게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322-4)


"야블린스키의 해법은 대기업들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종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하는 것이었다. 민영화는 안정화 기금에서 인민이 대출한 돈으로 이뤄지며, 이 기금은 서방 국가들에 의해 조성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혁이 소련 경제에 시동을 걸고 초인플레이션을 억제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개인적으로는, 소련을 위한 '마셜플랜'이라고 불렀다." "미국 언론은 이 계획을 신나게 공격했다. 윌리엄 새파이어는 《뉴욕타임스》에서 앨리슨과 야블론스키를, 〈자본주의가 돈을 댄 버팀목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긴급 구제하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들고나온 선의의 얼간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련이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하고 싶다면, 붉은군대의 규모를 축소하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아프가니스탄 정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주택과 아파트, 토지와 공장을 매각하고, 이윤 동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에 요구되는 정치적 기후를 자유라고 한다〉라고 말했다."(329-30, 334-5)


"6월 3일, 행정부의 주요 일원들이 소련에 관해 토론했다. 국무부의 베이커 팀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존중과 관여'라는 입장을 대변했다. 그들은 공동의 경제 공간을 지닌 개혁된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딕 체니와 펜타곤 소속 보좌관들은 소련 '제국'의 해체를 환영하면서 소련 의존국인 쿠바와 아프가니스탄을 버리고, 핵무기를 감축하고, MIC의 해체 과정에 착수하도록 고르바초프에게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무부 장관 니컬러스 브래디와 국제문제 특별보좌관 데이비드 멀퍼드는 재정적 근거에서 소련에 대한 대규모 지원에 단호히 반대했다." "브래디는 솔직하게 미국의 전략적 우선 사항을 표명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련 사회가 국방 시스템을 감당할 수 없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소련이 시장 체제로 간다면, 그들은 대규모 국방 조직을 감당할 수 없다. 진짜 개혁 프로그램은 그들을 3류 국가로 전락시킬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다.〉"(335-6)


10장 음모 


"불청객의 난입[쿠데타]으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고대하던 휴가는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훨씬 중요한 무엇이 툭 끊어졌다.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줄 알던 정치적 마법사 고르바초프가 끝났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미국과 맺은 모든 국제적 합의와 위대하고 민주적인 유럽 공동의 집에 대한 환상의 끝이기도 했다." "러시아연방의 모든 지역과 주요 도시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통치하기로 했다. 셰닌과 모스크바 당 조직의 수장인 유리 프로코피에프 같은 일부 당료들은 쿠데타 음모를 열렬히 지지했고, 당 연락망을 이용해 공화국별, 지역별, 지구별 조직의 동료들에게 비밀 지령을 보내기 시작했다. 공모자들은 당 기반 시설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셰닌의 이름은 위원회 명단에서 빼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반동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라고 바클라노프는 회상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새로운 것의 탄생을 상징해야 했다.〉"(384-6)


11장 훈타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옐친은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코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탱크 위에 올라선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허세였다. 옐친의 총파업 선언은 통하지 않았다. 군에 대한 그의 주장도 엄포일 뿐이었다." "누구도 옐친이 돌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소련 헌정 질서의 주요 파괴자에서 수호자로 변신했는데 말이다. 미국의 방송국 자유라디오는 러시아 의회 내에 특파원을 두고 옐친의 발언을 소련 전역에 중계했다. CNN 카메라맨이 탱크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해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이 보도 방송은 옐친을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중심에 두었고, 사태 전개에 엄청난 중요성을 띠었다."(392-4)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가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면 대중적 정당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쿠데타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 그리고 러시아 역사의 교훈이었다. KGB 의장 크류치코프는 눈앞의 딜레마를 고민했다. 옐친과 러시아의 여타 선출 공직자들을 체포했다가는 서방에서 공분이 빗발치고 냉전으로 회귀할 수도 있었다. 소련의 경제와 재정은 서방의 제재를 버틸 수 없었다. 크류치코프는 야조프, 야나예프, 루캬노프가 폭력사태를 각오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대 책임을 이용하는 점진적인 단계별 전술에 의해 비상통치가 필요하다고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옐친을 잡지 않고 놔둔 것은 크류치코프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 다른 잘못도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공모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가장 막강한 무기인 TV를 활용하는 방법을 몰랐다." "TV에서 소련 인민들은 무자비한 훈타 대신, 권력 의지가 없는 한 무리의 썰렁한 관료를 목도하고 있었다."(396-400)


"훗날 정치적 목적을 위해 8월의 사건을 미화할 필요가 더 이상 없어졌을 때, 옐친은 훈타의 구성원이 무자비한 냉소주의자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니라 〈평균적이고, 평범한 소련 사람〉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들이 인명과 합법성을 존중했다고도 시인했다. 그리고 그들이 투항하고 권력을 잃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1993년 10월, 모스크바의 헌정 위기 동안에 옐친은 아주 딴판으로 행동했는데, 러시아 의회가 자신에게 대항하자 탱크 부대 지휘관들에게 의사당을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고, 정적들을 모조리 잡아들였으며, 6년을 더 집권했다." "국가 기구의 일부 목격자들은 8월 21일에 일어난 일을 '정치적 멜트다운(붕괴)'이라고 묘사했다. 공모자들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을 이뤄냈으니, 바로 중앙 정부의 행정부가 완전히 항복한 것이었다. 실패한 비상통치는 옐친과 그의 민주파 추종자 및 지지자에게 고르바초프와 헌정 질서를 대신해 집행 권한의 수단을 장악할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했다."(420-1)


12장 종말 


"소련 지도자는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사흘간의 개인적 드라마에 몰두해 있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훈타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지만, 서방 기자들을 제외하면 언론은 적대적이었다. 옐친의 자문이자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유리 카랴킨은 고르바초프에게 왜 그런 〈명백한 악당들〉을 정부의 중요 직위에 임명했는지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크류치코프와 야조프를 '신뢰했다'고 맥없이 시인했다. 또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현명하지 못하게 덧붙였다. 이 발언은 그 후 여러 음모론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동안 일부 인사들은 〈진짜 민주주의자〉처럼 처신했다고 말하며 당 기구를 변호했다. 영국 대사 로드릭 브레이스웨이트는 소련 대통령을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봉 왕가에 비유하며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라고 말했다."(433)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고르바초프는 다시금 굴복했다. 그는 자신이 고른 후보자를 임명하라는 옐친의 요구에 동의했다. 이 시점부터 소련 지도자는 명목상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군과 KGB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한때 신성불가침한 권력의 본산이었던 당 본부는 이제 서류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이 줄지어 놓여 있는, 환기가 되지 않은 채 버려진 건물이었다. 당은 거대한 단체였기에, 누구도 그곳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갑자기,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날 늦게,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이끌던 권력 구조를 어쩔 수 없이 해산해야 했다. 옐친은 러시아 의회의 긴급 회기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문서 한 장을 떠밀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가 〈[소련] 정부 전체가 사임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옐친은 의기양양하게 소련의 다음 총리는 러시아연방에서 지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반대하지 않았다."(435-8)


"중앙 국가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소련 경제의 무정부적 와해 과정이 시작되었다. 고전 명작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에는 그리스의 마을 주민들이 부유한 부인의 집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단 몇 분 만에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탈탈 털려서 텅 빈 잔해만 남는다. 소련의 조르바 같은 환경에는 명백한 승자가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기간에 이미 출발하는 데 유리했으며,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돈을 버는 것이 진짜 목표인 젊은 기업가였다. 그들 중 다수는 콤소몰 출신이었다. 소련 당국은 콤소몰 활동가에게 최초의 상업은행을 비롯해 '사회주의적 협동조합'을 출범시킬 독보적인 특권을 부여했다. 폴 클렙니코프는 KGB와 당이 〈한 세기 전 차르 비밀경찰이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라고 나중에 썼는데, 말하자면 혁명가들을 통제할 요량으로 그들의 뒤를 봐줬던 것이다. 신진 자본가들이 소련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역할이 무엇이든 간에, 훈타의 실패 뒤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 자유를 느꼈다."(453)


"고르바초프의 임시정부 도박은 마지막이자 가장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소련의 대통령이라는 헌법적 지위와 국제적 명성, 완전한 경제적 붕괴에 대한 공화국들의 두려움이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무대 중앙을 차지하도록 당분간은 내버려뒀다. 그러나 새로운 연방이란 전망은 고작 두 달 만에 모스크바의 인디언 서머처럼 사라져버릴 터였다. 옐친은 자신보다 위에서 행사되는 권력 없이 '러시아'가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길 원했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붕괴의 위협과 자신에 대한 서방 지도자들의 지지만으로 공화국 실력자들을 공동의 정치적 프로젝트로 이끌 수 있다고 착각했다. 실상 그는 옐친과 공화국 실력자들을 위해 정치적 짐을 떠맡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의 언론 비서관 안드레이 그라초프가 나중에 말했듯이, 소련의 대통령은 스스로 리어왕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의를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대가로 유형의 자산을 내준 것이다."(463)


13장 불협화음 


"9월 4일, 부시와 각료들은 허약한 소련과 소련의 해체 중 어느 쪽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지 토론했다. 펜타곤의 수장인 딕 체니는 고르바초프를 버리고 진짜 민주주의자이자 서방의 가치를 수용하는 옐친을 택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체니는 우크라이나 독립을 인정하라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단체들과 NED의 청원을 지지했다.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 휘하의 허약한 연방이 독립 공화국들의 예측 불가능한 불협화음보다는 미국의 이해관계에 더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휘하의 보좌관들처럼 폭력적 혼돈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 치닫고 있는 유고슬라비아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 외교의 눈앞에는 두 장의 와일드카드가 있었다. 하나는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소련 경제를 안정화할 서방의 대규모 금융 지원 방안이었다." "부시는 니컬러스 브래디 재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 이 방안에 확고히 반대했다. 미국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데 소련에 납세자들의 돈을 쓰자고 제안할 수는 없었다."(472-4)


"우크라이나 독립은 두 번째 와일드카드였다. 대통령의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체니는 다시금 '공격적' 접근법을 들고나왔다. 그는 미국이 소비에트 공간에 보유한 거대한 지렛대를 이용해 그곳을 쪼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니의 발언 요지는 분명했다. 러시아는 민주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민주국가가 될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인정은 어쨌거나 좋은 정책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패한다면, [러시아가] 작은 게 우리한테는 낫다.〉 베이커는 체니에게 딜레마의 다른 측면도 상기시켰다. 만약 소련 해체가 폭력으로 이어진다면 어쩔 건가? 〈우린 또 다른 유고슬라비아를 원치 않았다〉라고 스코크로프트는 회고했다. 그는 체니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이 공공연하게 소련의 해체를 지지한다면, 〈소련의 다수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장기적으로 적대감을 이끌어낼 게 거의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아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상황을 방치했다.〉"(474-5)


14장 독립 


"이 역사적인 순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스탠퍼드대학의 경제학자 미하일 베른스탐은 소련의 해체가 〈하나의 목표로 합쳐진 이원 정책〉이었다고 썼다. 첫 번째 정책은 '잔여' 소련을 인수하여 고르바초프 없이 운영하려는 러시아 개혁가들의 시도였다. 두 번째 정책은 다른 공화국들과 합의하고 보조금과 지원금 시스템을 중지시키려는 시도였다. 개혁가들은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는데, 소련 자산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다종족적인 연합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는 불가능했다. 한 가지는 버려야 했다. 그에 따른 갈등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국 경제학자는 네 번째 목표를 간과했는데, 옐친과 부르불리스는 소련의 폐허로부터 강한 러시아 국가를 재건하길 바랐고, 이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공화국 지도자들의 불안을 부추겼다. 러시아적인 이 목표는 연방 해체의 주요 원동력 중 하나였다."(512-3)


"옐친의 자문이었던 부르불리스는 자신과 동료들이 우크라이나 독립에 전적으로 찬성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부르불리스는 우크라이나와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자기처럼 피가 섞인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연방을 별개의 존재로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인에게 우크라이나는 잉글랜드인에게 스코틀랜드와 같았으며, 더 가깝게 느낄 뿐이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는 합의 없이 이혼 신청을 하는 격이었다. 모스크바의 그 누구도 우크라이나라는 방주가 소련-러시아라는 선거(船渠)를 떠나는 것을, 그리고 즉시 침몰하지 않고 항해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심적 태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향후 몇십 년 동안 커다란 긴장과 갈등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었다."(528-9)


15장 청산 


"크라우추크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로 이어진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야 한다.〉 증거는 이런 주장과 상충한다.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는 소련의 붕괴를 반영한 것이지, 그 원인이 아니었다. 1991년 12월 2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뒤이어 옐친의 가차 없는 분리주의 노선으로 파괴되어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소련에 대한 재정적 부고(루블화 가치 폭락)는 그 파괴를 가장 잘 설명한다. 국가의 주요 기능인 통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12월에 일어난 일은 고르바초프와 자발적 연방이라는 그의 환상을 끝장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 일격은 옐친의 새로운 노선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예상한 가이다르와 그의 팀은 이미 허구에 불과한 중앙의 기능을 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국민투표 이후, 러시아 개혁가들은 드디어 자유롭게 이 중앙을 청산할 수 있었다."(546-7)


"비스쿨리는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가 사냥했던 곳이었다. 그곳을 찾은 외빈들로는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에리히 호네커도 있었다. 1991년 12월 7일 토요일 저녁, 세 슬라브 공화국 간 회담의 절대적 보안과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KGB 특수부대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크라우추크를 달래기 위해, 러시아인들과 벨라루스(이제는 벨로루시가 아니었다) 관리들은 향후 협정에서 '연방'이란 단어는 빼기로 합의했다. 그 대신 그들은 중심부와 식민지들의 품위 있는 결별을 가져온 국제기구 영연방의 예를 따라 '독립국가연합(CIS)'을 구성하기로 했다." "회담 과정이 궁금한 160여 명의 기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서 음식도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전날 밤을 보냈다. 이제 그들은 소비에트연방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영토상의 모든 연방 조직과 기관의 효력이 없어졌다. CIS의 본부는 민스크로 정해졌다. 연합 창립의 기반이 되는 문서는 배포되지 않았다."(549-52)


"술을 빼면, 불안을 잠재울 자연스러운 치료법은 정당성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거둔 압도적 승리에 기댈 수 있었다. 옐친은 그런 것이 없었다. 그가 정당화한 논리는 부정적으로, 고르바초프 정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련 지도자에게 전화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가이다르는 〈핵무기가 있는 나라에서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전면적 내전을 용케 피했던 게 자랑스럽다〉고 회고했다. 부르불리스도 〈제국의 유혈 분할〉을 막았다고 동의했다. 또 비스쿨리회담이 〈냉전을 끝냈〉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를 위한 기적적인 전망을 내놓았다〉고 평가했다. 크라우추크는 수년 뒤에 자신도 내전을 걱정했고 안도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우크라이나는 자국 경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협정에 가입했다. 〈러시아는 [연합이] 느린 결별이라고 강조했다.〉 이 마지막 요점이 향후 몇 년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러시아와의 관계를 규정했다."(554-7)


결론


"고르바초프는 이데올로기를 품은 개혁가적 열성과 정치적 소심함을, 도식적인 메시아주의와 현실과의 거리 두기를, 비전이 넘치고 숨 막히는 외교 정책과 결정적인 국내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모두 갖췄다. 그러나 폭력과 무력에 대한 혐오감은 보수주의자들도 공유할 만큼 그의 세대에 전형적이었다. 이것은 스탈린 사후 몇십 년 동안 소련 엘리트의 더 깊은 문화적·사회적 변모를 가리킨다. 그들은 정치적·경제적 폭풍이 들이닥쳤을 때 놀랄 만큼 무기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치국의 누구도 고통스러운 개혁을 실시하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눈감고 해낼 뚝심이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선호한 정책, 인텔리겐치아를 달래고 공화국의 지배 엘리트에게 책임을 이양하는 정책은 더 나은 개혁이 아니라 혼란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는 발트 지역과 남캅카스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핵심 슬라브 공화국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분리주의를 가능케 하고 정당화했다."(588-9)


"서방의 지도자들에게는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전대미문의 역사적인 기회를 붙잡으려는 정치적 의지나 상상력이 없었다. 포스트소비에트 공간이 서방의 궤도 안으로 통합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예측하기 힘들다는 시각이 만연했다. 무엇보다도 동유럽과 발트 지역에서 냉전 승리의 손쉬운 성과들에 집중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이었다." "그리고 1992년 덩샤오핑이 중국을 사업에 재개방함에 따라 막대한 금액이 공산주의 중국으로도 곧 쏟아져 들어갔다. 워싱턴 컨센서스와 세계 단기 금융시장은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공화국들을 곤경에 내버려뒀다. 발트 3국만이 예외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경쟁하듯 서방의 관대함,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 그리고 지정학적 혜안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들은 탐욕스러운 투자자들을 놓고 다투는 처지가 되었고, 그것은 두 나라가 모두 지는 제로섬 게임이었다. 글로벌 금융 기구들은 국가 주권과 자존심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595-6)


"러시아는 거대한 사회적 전위와 부의 불평등을 비롯해 1980년~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자본주의의 최악을 경험했다. 현대화 대신 대규모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어느 정도는 불가피했지만 대체로 야만적이고 무의미한 일이었다. 민영화는 급성장하는 중간계급을 낳지 못했다. 국가 자산의 분배는 뻔뻔할 정도로 불공정했고, 자국 시민들에는 무관심한 라틴아메리카의 수출 지향 매판 부르주아를 닮은 새로운 파벌인 이른바 '올리가르히'를 탄생시켰다." "많은 이가 자신들의 친미·친서방 태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경제적·재정적 통제력을 파괴하면서 자본주의적 불확실성을 향해 달려갔던 1991년의 반공 열기는 돌이켜보니 이데올로기적 광기로 비치기 시작했다." "국내적·국제적 시장 세력들과 지정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합이 아닌 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옛 로마 경구 '바이 빅티스(Vae Victis)', 즉 〈패자는 비참하도다〉라는 말은 변함없이 진실한 예언으로 드러났다."(597-8)


"소련이라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에 서구 정부들은 1988~1991년 소련의 파괴적인 정책들과 유사하게 국민의 세금과 심지어 저축을 이용해 기업들을 긴급 구제해야 했다. 고고한 레토릭으로 둘러싸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버락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 수렁에 빠졌을 때 고르바초프와 비교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해법으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관찰자들에게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국민투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소련 '제국'에 의한 '러시아'의 희생을 운운하던 옐친의 수사법을 아득하게 일깨웠다." "역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극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고조되는 자유의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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