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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왜의 쓸모 - 관계와 힘의 구조를 파악하는 네 가지 프레임
찰스 틸리 지음, 최지원 옮김 / 유유 / 2025년 8월
평점 :
1장 왜 이유를 제시하는가
#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이유(서로 중첩되는 네 가지 범주)
1. 관습Convention: 태업, 파격, 비범함, 행운에 관해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기차가 연착됐어요, 이제 너도 때가 된 거야, 그 여자는 집안이 좋아, 그 남자는 그저 재수가 좋은 거야 등등.
2. 이야기Stories: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서술. 생소한 현상이나 9·11 참사와 같은 특수한 사건뿐 아니라, 친구에게 배신당했거나, 큰 상을 받았거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20여 년 만에 고교 동창을 만난 일 등에도 사용된다.
3. 코드Codes: 법원 판결, 종교적 참회, 메달 수여 등의 행위에 관여한다.
4. 앞의 세 가지 범주에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학술적 논고Technical Accounts: 9·11 사건에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여객기가 충돌했을 때 88층에 있던 일레인 더치에게 일어난 일을 건축 공학자, 피부과 의사, 정형외과 의사는 각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관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엄청나게 달라진다. 가령 똑같은 태업이나 파격, 행운을 설명하더라도 버스에서 옆 사람을 납득시키는 정도의 이유로는 배우자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지 못할 것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확증하거나, 개선하거나, 거부한다. 따라서 현재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건이나 생소한 현상에는 다른 종류의 이유가 요구된다. 바로 이야기이다. 지독한 실패나 값진 승리, 대대적인 실수, 공동체적 비극, 한밤중에 들리는 의문의 소리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말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당면한 상황과 사회적 관계에 이유를 맞추려 하지만, 이제는 이유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결혼이나 이혼, 부모의 죽음 같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도 관습이 제공하는 것보다 무게감 있는 설명이 필요해진다. 예외적인 사건의 이유를 제시할 때, 우리는 대체로 약간의 정당화나 비난으로 설명을 보완한다. 23)
이야기와 달리 코드는 유효한 규칙을 준수하는 한, 설명에 큰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그냥 규정이 그래!”). 종교적 지령, 법규, 권위 있는 시상 제도에는 이유가 넘쳐나지만, 그러한 이유는 실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아니라, 벌어진 일이 현재의 코드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학술적 논고는 구조와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신뢰할 만한 인과 관계를 밝히려 한다는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구조공학자는 인과 관계의 초점을 기계적 원리에, 내과 의사는 유기체의 역학에, 경제학자는 시장 주도적인 작용에 둔다. 이런 전문가들은 이따금 반대 의견에 부딪히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정당화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널리 인정되는 전문적 방법에 따라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열정적으로 변론한다.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잠정적인 원인과 결과에 집중되어 있다. 전문 분야와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직된 모든 기관은 이들의 학술적 논고를 뒷받침한다. 24-5)
2장 관습
에티켓은 예의와 이기심의 결합이다. 에티켓 컨설턴트 페기 포스트Peggy Post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경영인에게 이러한 조언을 해 준다. “어떤 사람과 약속을 마쳤는데 그 사람이 떠날 기미가 없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하라. ‘정말 죄송한데, 제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좋은 에티켓은 당신이 하는 일이나 하지 않는 일에 관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것으로 상당 부분 완성된다. 좋은 에티켓에는 관습적인 이유가 들어간다. 그러한 이유가 사실일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대체로 공손한 행동이 요구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관습은 이야기나 코드, 학술적 논고보다 더 적절하게 작동한다. 이럴 때 다른 이유들은 오히려 의사 전달을 복잡하게 할 뿐이다. 관습은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거나 개선한다. 당면한 상황과 관계에 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는 일은 우리가 아는 인간적인 사회생활을 꾸려 나가는 데 도움을 준다. 부적절한 이유를 제공하면 사회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 37-8)
미국의 사회과학자 어빙 고프먼은 소규모 사회적 상호작용에 관한 독창성, 통찰력, 영향력을 두루 갖춘 연구를 발표했다. 고프먼은 에밀리 포스트를 전거로 삼는 자신의 대중 행동 분석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에티켓 서적에 기술된 규범들이 중산층의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미국에서 공적 행위의 체계를 제안하는 몇 안 되는 출처 중 하나”를 끌어다 사용했다. 고프먼이 반복해서 관찰한 바와 같이, 적절한 이유를 제시하는 능력은 사회적 역량의 중요한 표지가 된다. 반대로, 적절한 이유를 제시할 능력이 없으면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고프먼이 “해설”accounts이라고 부르는 분석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실수와 태업을 바로잡거나 감추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더욱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고프먼은 다른 무엇보다 즉흥적인 팬터마임이 구두로 제시되는 이유를 대신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몸짓 주석’body gloss이라 명명했다. 고프먼의 연구는 사람들이 타인과 주고받는 상호작용보다 개인이 남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38-9)
자기표현에 관한 고프먼의 비범한 연구는 이 책의 한 가지 주안점을 명백히 강조해 준다. 언어든 팬터마임이든 혹은 둘 다이든, 이유의 제시는 일종의 자기표현을 성립시키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진다. 고프먼의 책을 피상적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일들은 모두 개인의 정신 내부에서 벌어진다는, 즉 사람들은 주로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즉 불안정한 개인의 신호를 수신하는 타인, 그리고 그 신호에 대한 반응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게 된다. 불안정한 개인은 타인의 반응을 조작하거나 적어도 예측하려 애쓰며 신호를 전송하기 때문이다. 고프먼이 기술한 ‘연기하는 인물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유를 제시하는 일은 언제나 당사자 간의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규정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사자 간의 관계를 위험하고, 희생이 크고, 불명확하고, 당혹스러울 수 있는 다른 관계와 구별한다. 40-2)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는 전문적 지식이 거의 혹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인과적 타당성보다 적합성의 규칙을 따른다. 우리는 보통 양식화된 단순함과 추가적인 논의가 없다는 점을 통해 관습적 이유가 오갔다는 걸 알아차린다. 문제는 설명이 인과적으로 불충분할 때가 아니라, 화자가 제시한 이유를 청자가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에 부적절하다고 해석할 때 주로 발생한다. 가령 정신과 환자가 자신의 입원 사유를 일반화하여 말하는데 의사가 그러한 설명을 거부할 때이다. 이럴 때 청자는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가 아니라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라며 항의한다. 어떠한 이유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 적절한지 여부는, 그때 제시되는 이유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목격할 것인지,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에 관해 그들이 어떠한 추론을 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고프먼이 말하는 몸짓 주석은 사람들이 혼자이거나 남들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구태여 방어적인 이미지를 투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43)
3장 이야기
이야기는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에 단순화된 인과적 해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전문적인 지식이 아닌 널리 통용되는 지식에 기대어 세상을 이해하게 해 준다. 이 특별한 종류의 서술에는 행위자와 그들의 행위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한 결과가 포함된다.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인간 행위자를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경우, 가령 동물이나 영혼, 조직, 혹은 태풍 같은 물리적 환경인 경우에도 대체로 인간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그들이 재현하는 이야기는 종종 칭찬이나 비난의 뜻을 전달한다.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사회적 발명품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늘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적인 곳이다. 동시적 인과 관계, 점증 효과, 환경 효과, 오류, 예상치 못한 결과, 피드백은 물리적·생물학적·사회적 과정을 악마의 소행(혹은 신의 작업)처럼 지독하게 꼬아 놓는다. 이야기는 이처럼 불편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배제한다. 63)
이야기는 특정 행위자에게 주요한 영향을 귀속시킴으로써, (그러한 행위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거나 신적 존재인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에 관한 일반적인 규칙을 따른다. X는 그 행위를 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발생한 일에 관한 칭찬이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야기는 극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관습과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고전 희곡에 가깝다. 이야기는 시간적·지리적 환경을 넘나들지 않고 대체로 시공간의 통일성을 유지한다. 제한된 수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시적인 행동이 모든 후속 행동과 그로 인한 주요한 결과를 야기한다. 이야기에는 종종 교훈이 포함되어 있다. 관습은 행위를 정당화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하고 개선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고유한 작업을 수행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일들을 일상생활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을 키워 나간다. 64-6)
수사학은 변증법과 유사하지만, 주장과 예시를 결합해 상대를 설득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과학은 반박할 수 없는 보편적 원칙을 수립하는 것이기에, 변증법과 수사학은 둘 다 과학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①정치 연설: 제안된 행동 방침에 찬성 혹은 반대함, ②법정 변론: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변호함, ③선전 연설: 누군가를 칭찬하거나 비난함. 수사학의 효과는 견고한 논리뿐 아니라 인간의 특성과 감정에 관한 날카로운 이해에 달려 있다. 이는 화자와 논점, 청중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 필연적으로 관계적 해명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두 가지 결론이 따라온다. 첫째, 수사학적 노력의 성공은 청중이 화자와 논점의 조합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수사학자가 얼마나 잘 추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둘째, 논점과 화자가 같더라도 청중이 달라지면 그 영향도 달라진다. 두 가지 결론은 동일한 명령을 이끌어 낸다. 청중을 파악하고 반응을 관찰하라. 70-1)
이야기는 사회적 작용을 한다. 당황스럽거나 예외적인, 극적이거나 골치 아픈, 또는 본보기가 되는 사건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확증 혹은 재규정하거나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게 해 준다.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원형에 수시로 의존하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한 신호로 해석되며, 때로는 자존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야기는 깊이 묻혀 있는 무언가를 파낸다. 이야기는 그 본연의 특징 때문에 순수주의자를 좌절시킨다. 원인과 결과들을 턱없이 많이 쳐내어 복합적인 삶을 단순한 플롯으로 압축시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평범한 삶에서 희극과 비극, 도덕과 비도덕, 승리와 패배를 강조한다. 이야기는 관습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제공하고,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코드와 학술적 논고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부득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이야기로 변환해야 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이유를 진지하게 여길수록 그 이유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된다. 86-8)
4장 코드
범주, 절차, 규칙이 결합된 코드는 이유의 정당화뿐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언어학자들이 문법으로 단순화하고 표준화한 코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작가, 독자 사이에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시대든 간에 회화, 음악, 시 그리고 기타 대중예술은 코드를 따름으로써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게 쉽게 할 뿐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이 거기에 담긴 창의적 혁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민간에서 혹은 종교적으로 행해지는 엄숙한 의식은 공동의 약속을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는 코드들은 반드시 이유의 제공과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코드에는 고유한 역학이 작용한다. 범주는 변화하고, 관련 증거를 처리하는 절차도 변화하며, 해석상의 규칙 역시 변화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상호작용을 한다. 어떠한 분야에서든 기관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규칙을 변경한다. 따라서 축적된 규칙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직면했던 과거의 주요 문제들에 관해 알려준다. 94-5)
법적 분쟁은 그 성격상 코드를 작동시킨다. 이러한 분쟁에서 진술과 판결은 대체로 인과적 설명보다 법적으로 확립된 사실과 유효한 원칙 사이의 일치를 강조한다. 과실의 주장은 진술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보다 유효한 원칙을 잘못 적용하거나 소홀히 했다는 주장일 때가 더 많다. 법적 분쟁의 이러한 특성은 코드에 기반한 불일치와 다른 종류의 불일치를 명확히 구분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논제에서 중요하다. 관습은 전문 지식에 의존하지 않아도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해 준다. 관습에서의 논쟁은 주로 그러한 관습적 이유가 사용 가능한 프로토콜에 명쾌하게 들어맞는지보다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관해 그것이 무엇을 암시하는지에 중점을 둔다. 이야기는 서로 대립되는 설명에 토론의 장을 열어 주지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관용어를 사용한다. 학술적 논고 간의 이견은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코드와 유사하지만, 적합성의 논리보다 무엇이 무엇을 초래했는지에 관한 상충되는 주장에 의존한다. 99)
법률 및 의료 분쟁은 코드가 지배하는 희귀한 세계에서 발생한다. 코드는 랍비, 변호사, 공무원, 심판, 의료 윤리학자와 같은 전문가들의 영역에 속해 있다. 설교, 강의, 프레젠테이션, 교과서, 설명서 등은 원칙을 간략히 설명한 후 현실에서의 적용을 덧붙이는 형태로 코드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코드는 형식 자체가 일상적인 사회적 교류와 현저히 다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묘사와 설명을 제시한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들은 이야기를 듣고 코드로 변환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응급실에서 중증도 환자를 분류하는 간호사들은 환자를 임시로 진단 및 치료의 범주에 배정하는 기록을 작성한다. 사회복지사는 수급 지원자를 면담하여 자격 여부를 결정한다. 성직자는 참회의 근거가 되는 고해성사를 주관한다. 경찰 심문관은 형사재판에 제시하기 위한 자백을 끄집어낸다. 이러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인과적 설명을 공식으로, 대중적인 관용어를 전문적인 담론으로 바꾸는 이중 변환을 시행한다. 108)
우리 같은 외부인들은 관습과 이야기, 학술적 논고로 이유를 조직하기 때문에 코드를 성가시게 여길 때가 많다. 요컨대, 코드에 속하는 적합성의 논리는 이야기에 속하는 인과적·윤리적 논리와 모순된다. 우리는 상속, 조직 행동, 의학적 분석, 의료 과실 그리고 범죄 문제에서 그러한 모순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을 확인했다. 윤리학이나 목회 신학, 건축 표준, 입법 절차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전문적 규제 영역에서 이야기와 코드 사이에는 그와 같은 격차가 발생한다. 코드는 개념과 자원, 활동 및 사람에게 질서를 부여하려는 조직들의 점진적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일단 코드가 실행되면, 그것은 해당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그 조직의 지배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한 영역에서 코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실행하지 못한 일에 관해 제시하는 이유를 구성한다. 우리가 코드를 피하거나 파괴하려 할 때조차 코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11-2)
5장 학술적 논고
학술적 논고는 이야기, 관습, 코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그 정의상 (적합성의 논리가 아닌) 인과적 설명을 (일상적 지식이 아닌)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학문적 근거와 결합시킨다. 하지만 학술적 논고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특수한 코드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첫째, 코드가 그 실행자에게 비전문가에게는 금지된 형식의 조사를 수행할 권한을 부여하고, 둘째, 코드가 관련 근거의 유용성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며, 셋째, 실행자들 스스로가 적절한 절차와 부적절한 절차를 구분하는 코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학술적 논고는 이미 축적된 정의, 관행, 결과에 관해 공유된 지식을 가정하여, 그러한 정의, 관행, 결과의 참조를 줄이게 해 준다. 자신에게 공감하는 다른 전문가들에게 당신도 우리 편에 속한다고 말하며, 저자와 의견이 다른 타 분야 사람들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초심자나 의뢰인에게 해당 분야의 개론을 제공하며, 존경받는 비전문가에게 맞서 저자의 권위를 확립한다. 117)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펼친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류가 처음으로 전 세계의 주요 대륙에 도달했을 때(기원전 1만 1,000년) 각 대륙은 가축화가 가능한, 따라서 체계적인 식량 생산이 가능한 야생 동식물의 수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아메리카는 홍적세 후기에 대형 포유류가 거의 다 멸종해 버린 상태였다. 여기서 지리적 유리함이라는 두 번째 요인이 발생한다. 위상학적으로 심각한 장벽이 없는 데다 기후, 일조량, 위도와 관련된 그 밖의 환경적 변화가 적은 동서축으로의 확산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진 것이다. 셋째, 대륙 간의 확산에도 차이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아메리카는 상대적으로 고립된 데 반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는 서로 가까웠다. 아프리카에서 사육되는 가축은 대부분 유라시아에서 건너왔다. 마지막으로, 대륙의 면적과 인구 규모가 클수록 경쟁이 심화되고 혁신의 요소가 늘어났다. 고립된 섬들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인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134-5)
이러한 주장을 할 때, 다이아몬드는 주요한 지리적 영역 간의 차이를 밝힌 다음 그러한 차이를 만든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일련의 미스터리를 구성하여 자신의 학술적 논고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이 책에는 인종주의와 지리적 결정론에 관한 비교적 간단한 주장부터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한 조금 더 복잡한 주장은 물론이고, 특수한 현상에 관한 미묘한 (그리고 종종 추측에 근거한) 주장이 결부되어 있다. 다이아몬드의 글은 두 가지 면에서 학술적 논고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인과 관계를 진지하게 탐색하고 엄청난 범위의 전문 지식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이아몬드의 말을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논리가 관습적으로 익숙해서도 아니고, 표준적인 코드에 부합해서도 아니며, 단순화된 이야기를 능숙하게 제공하기 때문도 아니다. 유효한 전문적 근거를 활용해 가능한 원인의 일부를 제외하고 다른 원인의 설득력을 높인 그의 설명 방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135-6)
다이아몬드의 저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책들은)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당신과 내가 서로 근황을 나눌 때 사용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와는 매우 다르다. 이와 같은 최상의 진화론적 설명은 양질의 이야기superior stories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인과적 과정을 단순화하여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지만, 논리적이고 전면적인 학술적 논고에서와 같은 자격과 인과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설명이 작동하는 공간을 단순화하고, 행위와 행위자의 수를 간추리며, 점증, 간접, 상호, 동시, 환경 및 피드백 효과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한다. 설명(특히 인과적 메커니즘에 관한 설명)은 당신이 근거를 취하는 전문 분야 내에서 명백하고 변론 가능한 요소로만 제한한다. 마지막으로, 청중을 유념한다. 양질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의 지식과 열정에 따라 달리 전달되어야 한다. 양질의 스토리텔링은 관계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37-8)
6장 네 가지 이유의 조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나는 대상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학부생들은 사회적 과정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서 내 수업에 들어온다. 이런 학생들에게는 같은 현상에 관한 설명이라도 학술적 논고보다 양질의 이야기가 더 효율적이고 유용하다. 그들은 학술적 논고를 알아보는 법과 그 안에서 타당성의 표식을 찾아내는 법을 배워야 하지만, 사회적 과정에 관한 인과적 추론까지 낱낱이 파악할 필요는 없다. 내가 대학원생들에게 전달하는 건 대부분 학술적 논고와 관련 코드이다. 이러한 수업 방식이 결국에 가서 성공한다면, 그들은 연구를 통해 유효한 학술적 논고와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코드(적절한 증거와 절차, 결과 보고에 관한 코드)를 개선해 나갈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훗날 나처럼 학부생들에게 양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모든 건 그들이 학술적 논고와 그에 수반되는 코드를 숙지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와 대학원생들은 외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를 사용한다. 151-2)
나와 학생들의 관계는 매우 큰 현상 가운데 하나의 작은 사례, 즉 이유를 주고받는 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이 책의 두 가지 기본 논제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첫째, 적절한 이유의 제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학술적 논고와 이야기의 경우에도 관습이나 코드와 마찬가지로 이 점이 강력하게 적용된다. 둘째, 이유의 제시는 당사자 간의 관계를 설립, 확증, 조정, 혹은 개선한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관한 분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관찰할 수 있었다. 관습은 일상적인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수행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계속해서 코드나 학술적 논고, 이야기를 제시해야 한다면 우리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엄청나게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고 융통성과 설득력이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할 만하다. 삶이 복잡해질 때는 이야기가 관계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이유는 관계와 긴밀한 상호작용을 한다.152)
사람들이 당신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관계 접근 방식을 반영한다. 관습과 이야기는 대부분 당신이 이미 인지하고 있는 관계들을 확증한다.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관계를 주장하는 ‘잘못된’ 관습이나 이야기가 제시되면, 당신은 그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낯선 관용어로 된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제공하면, 재빨리 두 가지 해석 중 하나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사람이 당신과의 관계를 오해했거나 난해한 지식을 내세워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존경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 사람에게 관련 코드나 학술적 논고를 간추려 달라고 요청했다면, 당신은 적어도 이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이미 불평등한 관계를 확립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영리하고 호의적인 대화 상대라면 당신의 요청을 받은 후 관습과 이야기에 가깝게 설명함으로써 관계의 균형추를 옮겨 줄 것이다. 이유의 제시는 폭넓은 사회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 작업에는 언제나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포함된다. 1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