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살다 - 한국 근대의 인물과 사상 ㅣ 知의 회랑 43
김경일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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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문명론과 인종주의: 아시아연대론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을 개화와 반半개화 그리고 미未개화의 3단계로 구분한다. 이는 문명을 야만과 반개半開 그리고 문명의 3단계로 구분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명론 사이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놓여 있다. 후쿠자와에게 문명이란 야만에 대한 문명이다. 즉,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역사주의보다 구조의 성격이 강하다. 반면 유길준의 경우는 미개화-반개화-개화라는 등급 체계에서 단계론의 사고가 강하게 나타난다." "유길준은 자신이 설정한 각 단계가 변할 수 있는 잠정 상태로 간주하고 비록 현 시점에서는 조선이 반개 상태에 속하더라도 개화 노력을 통해 문명 영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 했다. 지식사회학의 시각에서 보자면, 후쿠자와가 이미 일본이 도달한 문명 단계에 인식론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면, 반개 상태에서 벗어날 출로가 여전히 보이지 않던 1880년대 후반 조선의 현실에서 유길준은 발전 단계에 유연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28-32)


"그런데 진보와 문명 단계에서 유길준 앞에 놓인 이러한 존재 피구속 상황이 당시 유행하던 인종주의의 덫으로부터 그를 벗어날 수 있게 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인종에 대한 유길준의 논의를 보면, 문명-야만의 틀을 인종에 적용하거나 인종을 차별화하는 인종주의의 혐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저작 『서유견문』에서 인종은 형질 특성과 거주 지역을 소개하는 등 단순한 인지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주의 황색인이 구미 양주의 백색인과 비교함에 그 천질天質의 불급함이 없음은 분명〉하다는 언급에서 보듯이, 유길준은 인간의 자질과 능력을 인종에 내재한 고유 속성으로 바라보는 인종주의의 사고방식을 부정했다. 환언하자면 서양이 아시아보다 부강한 까닭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쿠자와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한다〉는 그의 탈아론 주장에서 아시아 인종은 문명 기준에 의해 열등하고 사악한 것으로 재단되는 차별받는 존재다."(32-3)


"후쿠자와가 선과 악의 대조를 통해 문명과 야만을 강조한 것처럼, 윤치호는 자연에 대한 주인과 노예의 비유를 들어 문명과 야만을 대비하려 했다. 나아가 두 대립 범주의 내용을 이루는 대행자로서 그가 민족이나 인종을 설정한 점도 주목된다. 다가올 문명의 담지자로서 황인종이나 비서구 민족을 설정한 것은 현시점에서 야만 상태에 있는 이들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조선을 반개 상태로 본 유길준과 달리, 조선이 아직 야만 상태를 못 벗어났다고 인식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3년 6개월 동안 유학 생활을 경험한 윤치호에게 중국은 악취, 불결, 낙후, 무기력, 완고, 교만 같은 부정적 속성으로 묘사되는 나라였다." "윤치호는 청일전쟁이 문명 전쟁이라는 통념에서 훨씬 더 나아가 그것은 〈갱생하는 서구 문명과 동양의 퇴락하는 야만 사이의 갈등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관되게 일본에 동경과 찬사를 보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친일 경력으로 이어졌다."(37-40)


"그의 일본 선호에 문명개화국으로서 일본에 대한 동경과 선망이 어려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문명 기준에서는 미국이 당대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본 점에서, 그 또한 당대 개화파 지식인들과 인식을 함께했다. 하지만 5년에 걸친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 윤치호는 표방되는 바로서의 문명과 실제로서의 문명 사이의 괴리와 모순을 강하게 인식했다. 1890년 2월 14일자 일기에서 그는 미국인이 말하는 천부인권이나 자유 같은 이상이 실제로는 단지 허울 좋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 〈자유의 나라〉에서 이른바 천부의 인권을 누리고자 한다면, 백인이어야만 한다며 그는 야유한다." "이렇게 〈고귀한 이상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추악한 현실〉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이 바로 힘의 논리였다. 힘이 곧 정의라는 그의 생각은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교리를 원론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점에서 윤치호는 선택과 제한적 방식으로 사회진화론을 수용한 유길준과 달랐다."(43-4)


|제2장| 열린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 보편주의로의 지평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의 벽을 초월하는 열린 민족주의의 자세를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다. 오늘날 잘 알려진 휘호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는 관동도독부의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이 서양에 다녀오면서 양말 두 켤레를 안중근에게 선물로 넣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적은 것이고, 휘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은 사형 당일 형장으로 떠나기 직전 간수였던 일본군 육군 상등병 치바 도히치에게 적어준 것으로 그의 마지막 유품이다." "당시 상황이나 안중근의 인격으로 미루어보아 이 유묵들은 당사자에게 잘 어울리면서 또 그에게 절실한 내용을 적어주고 싶은 안중근의 마음을 드러내는 선물이었다는게 보다 사실에 부합해 보인다. 이렇게 안중근의 유묵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의미의 탈맥락화와 그에 대한 성찰은 그가 생명을 놓는 시점에도 민족과 국가에 대해 열린 자세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국가와 민족의 벽을 실감하면서도 안중근 자신은 그 벽을 간단히 뛰어넘어버렸다."(73-6)


"보통 이 시기 지식인 전반은 이른바 일본발 아시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일찍이 아시아 연대에 공감한 김옥균은 한중일 삼국의 상호 제휴를 의미하는 '삼화三和'를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그 실현에 몰두했다. 그의 삼화주의는 일제 말기 대동아공영권이 제창된 시기에 동양주의와 대아시아주의의 선구로 추앙되었다. 그런가 하면 안창호 역시 이토와의 회견에서 3국의 정립 친선이 동양 평화의 기초라는 의견에 공감하면서 서양 세력의 아시아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선과 일본, 중국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에 의한 조선의 '보호'국화가 추진된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 아시아연대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면서 아시아를 단위로 한 지역 연대 구상이 외면받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추구가 일정한 세력을 형성했던 점을 고려해볼 때, 민족주의 사학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조차 1909년에 이르러서야 동양주의에 대한 비판을 발표한 것은 뒤늦은 감이 있었다."(80-1)


"필자는 동양 평화에 대한 안중근의 방책을 적극 평가하는 일이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고는 해도, 마치 그것을 안중근의 고유한 제안으로 부각하려는 시도는 결국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칫 동양 평화에 관한 일련의 실천적 제안들을 안중근에게 독점 귀속시킴으로써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숭배하려는 의도로 이끈다. 나아가 안중근의 민족주의에 대한 왜곡과 연동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에 폐쇄와 고립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신화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결과를 낳는다. 동양 평화를 위한 안중근의 실천 방안들은 그 자신의 독창적 고안이라기보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언론 매체를 통해 논의되어온 제안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동아시아 지식 공간을 떠돌아다니면서 안중근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에 의해 비평받고 보완되며 전유되는 역사 과정을 통해 형성된, 동아시아 공동의 지식 자산이자 제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87-8)


"하얼빈 역 의거 후 자신이 어떤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안중근은 〈그것은 간단하다. 나는 한국의 의병으로서 적국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에 만국공법에 따라〉야 한다고 답변한다. 여기서 안중근이 동아시아 특정 국가가 아닌 만국공법의 관할권을 주장한 것은 보편적 세계주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보편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그의 열린 민족주의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은 그의 동아시아 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시기 동아시아 지식인에 의한 동아시아 구상 대부분이 입으로는 동아시아의 연대와 단결을 외치면서도 따져 들어가면 자기 민족과 국가에 한정된 폐쇄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것과 달리, 그의 동양평화론은 보편 세계를 지향하는 열린 민족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안중근은 이 시기 회자되던 아시아주의와 동양평화론의 일부 부정적 속성이 반영된 시대적 한계에 구속된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동아시아 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91-2)


|제3장| 한상룡을 말한다: 친일 예속 자본가의 전형


"1900년 초반 러시아는 청일전쟁 승리로 본격화하려던 일본의 조선 진출을 이른바 3국 간섭을 통해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고종에게 경제 차관 500만 원을 자국으로부터 빌릴 것을 강요했다. 철도를 부설하거나 산업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차관 형식으로 제공하되 운용의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 지배를 강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외무성을 중심으로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은행을 앞세워 그곳에서 경제 차관을 융통한다는 구실로 러시아 차관을 거절하는 묘책을 찾아냈다." "극비리의 교섭 끝에 일본은 새로 은행을 인가받는 것은 러시아의 시선을 끌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고, 관료이자 〈서울 재계의 거족〉인 김종한이 1, 2년간 경영하다가 유명무실 상태에 있던 한성은행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03년 2월 사립 한성은행이 발기되었다. 같은 해 12월 설립 인가를 받았고, 이재완은 은행장, 한상룡은 우총무에 취임했다."(99-100)


"상업이나 실업 활동을 천시하는 사회 통념이 지배하던 분위기 속에서 신분 배경이나 친일 경력을 통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보다 정치를 택했던 시기에, 한상룡은 주저 없이 경제를 택했다. 이러한 선택에는 일찍 신문물을 접한 그의 식견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존경했고, 또 그렇게 되고자 했던 인물이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 3대에 걸쳐 일본 재계 최대 지도자이자 통솔자〉로 평가받는 시부사와는 일본의 조선·중국 침략 과정에서 '재계의 첨병' 역할을 했다. 3년 남짓한 대장성 관료 생활을 청산하고 1873년에 제일국립은행을 설립한 뒤 일찌감치 이 은행을 조선에 진출시켰다. 청일전쟁 후 철도 건설과 광산 개발에 주력하면서 일본의 대외 침략을 적극 조장한 제국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식민지에서 실업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했다. 동경의 대상인 일본을 오가면서 한창룡은 점차 예속 친일 자본가로 성장했다."(103-5)


"한성은행은 일제가 강제 병합의 대가로 친일파들에게 준 공채금으로 발전의 단초를 마련했으며, 일제에 대한 예속성을 강화함으로써 치열한 자본 경쟁의 복판에서 일정 기간 생존할 수 있었지만, 결국 1928년 일제 자본에 의해 강탈당하고 말았다." "금융계에서 한평생 외길을 가고 싶다던 그의 포부는 한성은행 경영권을 양도하고 신탁회사 운영에서 배제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살아 있어도 사실상 죽은 몸이었고, 죽는다 해도 이미 껍데기뿐인 인생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라는 듯 식민 권력과 연계된 부문에서 적극 활동했다. 환언하자면 친일 행각이 노골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 전시 체제로 이행한 이유도 있었지만, 금융계 기반 자체가 취약했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한창룡은 일제에 더욱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식민지 권력과 밀착해 전시 체제에서 일제의 정책 수립과 집행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예속 부르주아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110, 120-2)


"완전 식민지 아래서 근대화는 식민지 모국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 시기 근대성은 불가피하게 식민지성을 내포한다. 근대성이 식민지성을 수반하고, 식민지성은 근대성을 가장한다고 할 수 있겠다." "바깥에서 위로부터 부과된 근대화 과정에 토착민의 참여나 개입은 불가능하거나 일정한 한계를 내포한다. 따라서 근대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접근하거나 그것을 획득하는 일은 식민지 모국과의 불평등한 관계망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파농식으로 말하자면, 흔히 이 관계는 자기 열등감이나 막연한 동경 혹은 비주체의 모방에서 시작해 자기 비하의 굴종이나 비인격적 예속 혹은 맹신에 가까운 복종으로 끝나는 경향이 있다. 한상룡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는 친일 예속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주나 진보로 불리는 다른 발전의 길이 애초부터 그와 무연했다고 한다면, 이 시기 그가 택한 삶은 식민성을 수반하는 근대성의 길 이외에 다른 대안을 보지 못하게 했다."(129-30)


|제4장| 여운형의 사상 노선: 노동 인식과 마르크스주의


"노동이나 노동자와 관련해 여운형이 직접 경험하거나 언급한 글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평민주의자' 혹은 인민 대중에게 헌신해온 이로 평가받은 그의 삶에 비추어볼 때 의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여운형의 실제 삶은 중앙 정치와 지도자나 엘리트 위주의 사회 상층부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여운형은 노동·노동자·노동운동을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 속에서 대상화된 실체로 인식하면서 노동을 타율적이고 무능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여운형이 관찰한 노동의 실제는 무기력과 수동성, 침체로 점철된 어떤 것이었다." "여운형의 눈에 비친 조선인 노동자는 오랜 세월 지배계급으로부터 고난과 굴욕을 인내하면서 전통과 인습에 지배당해온 침체와 운명, 수동과 타율의 존재다. 그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아세아적 농민'이란 당대를 풍미했던 비트포겔의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에서 묘사된 아시아에 대한 정체와 불변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다."(142, 146-7)


"그럼에도 여운형은 인민이나 노동 대중의 역량을 신뢰하는 만큼,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에 대해 불신과 의구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936년 1월의 한 연설에서 그가 각 분야의 실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학생계의 지도자는 학생에서 나고 공장의 지도자는 공장에서 나고 농촌의 지도자는 농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노동에 대한 관찰자의 객관적 시각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 지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선을 그음으로써 노동자, 농민, 학생을 주요 구성 분자로 하는 인민 대중의 주도성과 자발성의 함양을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운형이 대중과 지도자를 구분해 전자에 신뢰와 기대의 눈길을 보내는 만큼, 후자에 대해서는 불신, 회의, 비판, 때로는 조소의 시각까지 지니고 인식했던 경향이 있어 보인다."(156)


"1920년 5월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후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기를 그는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념과 더불어 살았다. 젊고 의식 활동이 왕성한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에 걸친 나이였다. 당대를 풍미했던 이 이념은 다른 식민지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여운형의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이 사상을 무조건 추종하지는 않았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를 묻는 검사의 질문에 〈마르크스 이론에는 찬성하지만 실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그는 답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에서는 레닌주의, 중국에서는 삼민주의로 정착한 사실을 환기하면서 〈조선에서는 러시아, 중국과 사정을 달리하고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산주의 이념을 그 자체로 수용했다기보다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재해석해 적용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야말로 조선 해방의 첩경으로 그가 제시한 여운형주의의 실체라 할 수 있다."(161-3)


"여운형은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다르게 혁명운동의 주체를 농민으로 설정했다. 바로 이들이 일제의 착취와 억압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인데, 이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주체로 노동자를 설정한 마르크스의 논거와 같은 맥락이었다. 여운형이 보기에 조선은 아직 농민이 주류를 이루는 (반半)봉건 사회였고, 이러한 점에서 당면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닌 농민이 되어야 했다." "나아가 그는 민중 생존이 위협받는 비참의 상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지목하면서 조선이 독립해야 할 필요를 정당화한다. 〈일본은 조선 민족을 착취하기 위해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 민족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독립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이때 그의 조선 독립의 신념을 오직 민족에만 귀속시키는 것은 편협한 이해를 조장할 뿐이다. 여운형에게 독립은 민족의 생존권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민족의 배후에는 늘 민중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183-4)


|제5장| 좌절된 중용: 지식 생산에서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된 초기 역사학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과 근대에 대한 선망에서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요소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신채호에 의해 '무정신의 역사'로 비판받은 이 흐름은 합방 이후 민속학, 종교학, 예술, 철학 등으로 점차 분화되면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의 탄압 아래서 역사학을 비롯한 토착 학문이 존립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학문과 지식, 나아가 포괄적인 의미에서 문화를 정치와 엄격하게 분리하고, 둘째 현재의 현실을 벗어난 다른 시간대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현실 정치에 구속받지 않는 문화와 비非현재(특히 고대) 영역에서 이들은 민족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강조하면서 민족정신과 애국주의를 고취하려 했다. 이 시기 연구자들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통해 일제 강점 초기를 다룬 박은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고대나 중세 한국 혹은 조선 시기를 분석 대상으로 선택했다."(202)


"1930년대 이후 또 다른 흐름으로 등장한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가치들이 결코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학이란 가치나 선입견에서 벗어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해명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랑케 류의 개별 기술 방식을 그저 단순한 방법론으로만 보지 않고 이론 차원으로까지 고양시켰다. 비슷한 시기 사회과학 영역에서 미국 신역사학자들의 보편주의 지향이나 프랑스 아날학파의 사회과학 종합이론에 대한 열망 대신, 이들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특수성을 추구했다. 따라서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전통 역사학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보편 역사나 역사의 법칙성을 거부하고 개별 사실에 관한 실증 연구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과학'의 이름으로 문헌 고증의 방법을 내세운 전통 역사학의 함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의도적이었든 무의식적이었든 간에 이들은 과학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04)


"이처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가 서로 수렴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나름의 입장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려 한 이가 바로 안재홍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먼저 일본의 특수주의가 식민지 현실에서 일종의 보편주의 억압으로 가해지는 상황에 주목했다. 물론 그가 일본의 문화와 사상만 문제 삼은 건 아니었다. 그가 정당하게 파악했듯이, 1930년대는 파시즘의 고양과 블록 경제의 형성 그리고 사회주의의 국제주의 주창으로 상징되는 바로서 국제주의와 세계주의가 처음으로 지구 곳곳에서 느껴지던 시기였다." "이 시기 서구의 진보 지식인들처럼 그 역시 때로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안재홍은 이렇게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국제주의와 보편주의가 지니는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과 전통의 특수성을 역사 발전의 장애물로 생각하고 무시해버린 대다수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그는 조선의 특수성을 강조하고자 했다."(218-21)


"국제화의 경향을 필연과 자동으로 본 것만큼이나 안재홍은 민족의 특수성을 고양하는 작업 역시 준엄한 역사의 철칙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제성은 '천하일률天下一律'이 아니고 특수성은 '고립유아孤立唯我'가 아니기 때문에, 양자가 각기 상호 작용하면서 발전해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겠는가. 국제화와 특수화의 교호 작용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민족과 전통에 대한 특수성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역사 연구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민족주의 우파와의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그에 포섭되고 말았다.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화해를 꾀하고자 한 그의 시도는 이미 좌절이 예정된 것이었다. 국제화와 세계화가 소리 높이 외쳐진 현실에서 보편주의에 대한 전망, 나아가 다가올 근대에 대한 비전을 설정하지 못하고 전통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그의 비극이었다."(222-4)


|제6장| 신여성의 미국 체험과 자아 정체성


"낙후된 식민지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 뒤, 발전한 선진 문명을 목도하면서 세 명의 신여성은 모두 일종의 문화 충격에 직면했지만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있다. 김마리아에겐 민족 정서가 두드러지는 토착 요소도 있었지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받은바 서구와의 친화력이 있었다. 하지만 일종의 망명객 신분으로 어려운 경제 형편 속에서 인종 차별 등에 민감했던 김마리아에게 미국 생활은 동경이나 경이보다 괴로움과 어려움 그리고 아픔으로 표현되는 어떤 것이었다." "반면 박인덕은 적극적인 추구형이었다. 상대적으로 미국 사회 밑바닥에서 차별과 고통을 겪지 않은 그녀는 미국 문명에 대해 동경과 찬사를 수반한 피상적이고 무비판적인 평가로 일관했다. 의미 맥락은 달랐지만, 김마리아처럼 박인덕에게도 미국은 〈제2의 고향〉이었다." "두 사람과 달리 허정숙은 미국 문명과 거리를 두면서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녀는 거대함과 그 배후에서 작용하는 물질에 대한 추구로 미국 문명의 특징을 요약했다."(248-51)


"허정숙은 미국 문명의 핵심을 금전 추구로 요약했다. 사회주의 이념의 원칙에 충실한 경제적 해석이었다.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극복의 대안으로 사회운동과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미국 체험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굳혀나간 셈이었다. 이 신념에 따라 그녀는 귀국 후 근우회 운동과 이후 중국에서 민족 혁명 운동에 헌신했다." "전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김마리아는 먼저 독립을 위해선 교육을 통해 민력을 키우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했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실력 양성론과 준비론에 철저히 공감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의 단결과 조직을 강조했다." "박인덕 역시 혁명보다 교육의 길을 선택한 데서 김마리아와 실천이 겹친다. 이러한 믿음으로 귀국 후 교육, 저술, 농촌 사업에 투신했던 그녀는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으며, 1941년 현대의 〈현명순량賢明順良한 주부를 양성〉하기 위해 덕화여숙德和女塾을 설립한다."(255-9)


"김마리아는 매우 실용적인 방식으로 미국의 여성해방을 이해했다. 여성은 〈남녀동등, 여자해방을 말함보다 실지로 남자와 같은 학식을 가졌으며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체류 중 '평등'이 아닌 '동등'의 개념으로 여성해방을 이해한 그녀의 생각은 귀국 후 보수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봉건 결혼제도의 모순을 직접 체험했던 박인덕은 조선에서 〈여성해방을 부르짖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언급하지만, 곧이어 여기에 〈그렇다고 함부로 해방을 부르짖으라는 말은 아니〉라는 단서를 달았다. 김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급진주의나 사회주의의 입장과는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허정숙은 두 여성과는 달리 미국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리를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미국 부인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의 놀라움을 그녀는 〈조금도 부족한 점이 없는 완전한 인형〉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자본주의 미국은 〈인간인 여자를 돈 잘 아는 인형으로 제조화製造化하는 공장〉이라고 그녀는 덧붙인다."(267-72)


"미국 문명에 대한 경이와 동경보다 거기서 겪은 고통과 아픔에 익숙했던 김마리아는 정치 운동 같은 거대 담론보다 앎의 욕구로서 지식과 그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궁핍과 억압에 시달리던 낙후한 식민지 현실에 공감과 연민을 감추지 못했으며, 귀국 후엔 오롯이 여성 교육에 전념했다." "박인덕의 미국 문명 이상화 경향은 민족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라는 즉각적 반응과 결부되었지만, 자기 경험과 욕구에 의거해 서구 사례들 가운데 자유결혼, 자유이혼, 직업 활동의 필요성 등을 선택적으로 부각시켰다. 본격적으로 친일의 걸으면서부터는 이를 침략 전쟁을 위한 모성 보호와 여성 참여에 관한 주장으로 수렴시켰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허정숙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형이자 물질적 동기와 자본에 지배당한 채 세속적 욕구와 범죄가 횡행하는 세계로서 미국을 이해했다. 그녀의 미국 체험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다가올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자기 신념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273-4)


|제7장| 차이와 구별로서의 신여성


"1900~1910년대에 이르는 계몽주의 시기 여권 사상에는 고유한 모순이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시대사조로서 자아 각성이나 개성 실현을 여성에 적용하면서도 그것을 여성의 고유 역할로 상정한 현모양처와 결부시키려 했다. 계몽주의 시대 어머니 세대가 여성의 근대 교육을 열렬히 지지한 것과 달리, 신여성들은 당대 여자 교육의 이러한 목표와 방향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했다." "또한 어머니 세대 여성들은 남성 계몽주의자들의 근대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으로서 민족 독립과 의식 각성을 표방했다. 물론 신여성들 또한 이러한 민족의 정조情調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의 정조에도 불구하고, 신여성들의 주된 관심은 어머니 세대 여성들과 달리 결코 민족에 있지 않았다. 신여성들은 자아와 개성, 자유와 이상이라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성과 친밀성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 사사 차원에서의 쟁점에 몰두했으며, 민족이나 계급 같은 거대 서사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289, 292-3)


"급진주의 부류 안에서도 다양하고 미묘한 시각차는 존재하지만, 이들 모두 '성性'은 사적 영역의 문제로서 오롯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의 자기 결정권에 관한 주장과 함께 이들은 자유로운 성과 성 해방 실천을 지향했다. 남성이 지배하는 식민지 사회에서 이들은 여성의 자의식과 정체성 차원에서 성과 사랑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여성의 정조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때로는 그를 부정하고 그에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를 통해 남녀 간 인격적 결합이나 정신의 일치 혹은 인간으로서의 합일처럼 더욱 근본적인 가치를 추구하려 했다. 무엇보다 이론 차원에서의 주장만 되풀이하지 않았다. 몸소 주장을 실행에 옮겼고, 이로 말미암아 비참한 파국을 맞기도 했다. 주류 사회의 극심한 반발과 비판에 직면했으며, 같은 여성들로부터 질책과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양성 간 사랑과 화합, 인간으로서의 친밀성 같은 비전에 대한 헌신은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고립과 파멸이라는 대가를 요구했다."(304-5)


|제8장| 지배와 연대 사이에서


"이규수는 재조 일본인은 '제국'과 '식민지'의 접점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현살들에 접근하는 통로로서, '근대성'과 '식민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재일 조선인과 재조 일본인 모두 역사 속에서 늘 주변인이었다는 전제 아래, 〈어느 한쪽 끝을 더듬다보면 결국에는 그 경계의 어디에선가 또 다른 한쪽〉에 맞닿을 수 있다는 바람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다. 그런가 하면 기유정은 재조 일본인에 대해, 식민지 정주 과정에서 원주민보다도 더 '혼성hybrid'이 될 수 있는 극단적 조건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혈통 근거지인 본토와 생활 근거지인 식민지 가운데 어디를 중심으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원래 제국이 의도했던 주체 구성 원리를 비껴가거나 횡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오구마 에이지 등이 말하는 제국 정체성의 양가 성격, 즉 순혈론 대 혼혈론의 대립과 긴장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존재라는 것이다."(322-3)


|제9장| 사상 전향과 식민지 근대


"근대 법은 특정 시민의 행위에 적용되는 것일 뿐, 그 행위 배후에서 작용하는 사상이나 신념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향은 사정이 달랐다. 전향은 행위 동기를 이루는 사상을 공식화하고 공공연히 비판함으로써 행위뿐 아니라 사상 자체를 처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통해 국가는 개인 내면 깊숙이 침투했고, 개인은 권력 작용 범위를 넘어서는 사고를 포기해야 했다." "일본에서 전향은 지배와 통제 방식의 하나로서 그 억압적·폭력적 성격이 인정되는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애정과 자애'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 체포와 고문 같은 지배 권력의 역할 수행 못지않게 가족이나 천황 같은 심리 요소와 문화 전통이 중요했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강제된 사상 변화와 함께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사상 변화로 전향을 정의하는 방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전향의 양면성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일제 식민 정책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더 주목하는 반면, 일본은 그 온정성을 강조하는 셈이다."(342-4)


"전향 정책 초기에는 외래 사상 가운데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이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주요 이념으로 주목되면서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전향의 집중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에는 전향의 기준이 서구 기원을 가진 '비일본인 사상'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자유주의자와 기독교도 역시 이 정책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1936-37년에 걸친 정책 전환 단계에 이르면 권력은 개인이 단순히 사상 포기를 선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 정신을 적극 받아들여 스스로 개조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도록 요구했다. 한 일본인 작가가 고백하듯이, 이 단계가 되면 〈전향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인간의 갱생〉이 되는 것이다. 급진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나 기독교도들까지로 전향의 대상이 확대된 것도 이때 이후다. 전향의 적극적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이 단계야말로 전향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대동아공영권'내의 다른 국가와 지역들로 확대되었다."(350-2)


"일본과 비교해보면 조선의 전향자들은 내재적 동기보다 외적 강압에 의해 움직였다. 전향의 효과가 '일본 정신'으로 상징되는 국가관의 주입이라면, 식민지 전향자들이 그러한 동기로 추동된 사례는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내재적 동기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애와 가정 관계로서, 이는 일본의 전향 동기를 가운데서 마찬가지로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가족과 가족애에 대한 배려가 '국민적 자각'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그것이 순수한 가족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관심'이 그 과정에서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조선의 작가는 전향해도 돌아갈 조국이 없다〉라고 선언한 바 있지만, 식민지 지식인들은 전향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지 내재적 동기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중심에 민족 정체성 문제가 가로놓여 있었다."(359-60)


"전향자들은 공통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하면서 동시에 〈민족 사상에 대한 감정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민족 해방이나 독립을 주장해온 민족주의의 대의는 협애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현실적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이 파악한 식민지의 〈냉정한 현실〉이란 〈조선의 민족적 생활 상태〉가 〈일본의 국민 생활 기구로부터 이탈해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1936년 9월 전향자들에 의해 조직된 대동민우회는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바는 '조선의 전향'이며, 그 이상으로 하는 바는 '내일의 조선'을 건설하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는 필수 조건으로 〈내선일여內鮮一如의 공고한 결합〉을 들었다." "당시의 표현대로 전선의 유지가 일본의 '생명선'인 것과 비슷하게 완전한 일본인 됨을 실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명선이었는지도 모른다. 1945년 해방이라는 또 다른 현실의 부과 외에 이들이 그로부터 벗어날 길은 거의 없었다."(365-7)


|제10장| 식민주의와 동화주의: 복합과 균열


"조선을 지배하면서 일본이 내세운 논리 가운데 하나는 조선과 일본은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同文同種]이기 때문에 '합방'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이는 먼 과거에 하나였다가 현재 분리된 상태에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따라서 식민지 정복 행위가 아니라 민족의 (재)통합이라는 논리다. 따라서 식민지 피지배민은 분리보다 공통성을 의미하는 '신부국민新付國民'으로 지칭되었고, 조선은 '신영토' 혹은 '외지'로 통용되었다. 식민지를 의미하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라는 쟁점은 의도적으로 기피되었다. 일제가 식민 지배의 공식 기조로 채택한 동화주의는 이러한 인식에 기반을 두었다. 당장 강자에 의한 약자의 종속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진화론의 시각과는 대조되어 보인다. 흥미로운 건 1910년 강제 병합을 두고 조선에서는 사회진화론에 의지한 설명이 우세했던 반면, 일본에서는 동화주의 입장이 우세했다는 점이다."(381-2)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 정책이 단순히 동화주의라는 단일체로만 결정된 것은 아니다. 동화주의에 비판적인 흐름 또한 그 '평등화' 요소에 주목하고, 도리어 이것이 식민지 민중에 대한 차별이라는 근거에서 동화주의를 부정했다. 즉, 이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공유할 수 없으므로 동화의 가능성은 부정되며, 식민지 피지배 민족이 일본 민족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들에 대한 일본 문화의 이식 또한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대신 동화주의 반대론자들은 현지 전통과 관습을 온존시키고, 재래의 지배층인 양반을 활용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제시했다. 이렇게 일본인 배제와 식민지 자치를 주장하는 간접 통치론이 파장을 불러일으켰지만, 동화주의는 식민 통치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이 오랫동안 같은 문화를 공유한 같은 인종이라는 주장은 서구 열강과의 식민지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일본에게 이 지역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명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385-6)


"1910-1920년대 일본에선 자유주의와 혁신주의의 기운이 분출했고, 바깥 나라들에 대해 구미 협조 노선이 득세하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들을 반영하면서 전통적인 동화주의를 대신해 등장한 것이 내지연장주의였다. 메이지 시기 동화주의가 문화와 정신의 '일본화'를 강조했다면, 새 변형태로서 수정주의는 이른바 문화정치의 시행에서 보듯이 제도의 문명화를 의도했으며, 동시에 일본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 문명을 지향하는 미묘한 강조점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즉, 무력을 통해 일본 정신과 문화를 강제로 주입한다던 이전 원칙을 대신해, 이제 동화주의는 일본을 근대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설정하는 세계관을 반영했다. 결국 일본인에의 동화란 서구를 준거 삼은 문명화를 의미하게 되었고, 일본 문화 그 자체의 이식은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대적 관점에서 일본 전통에 소홀해지는 이러한 사유 방식은 식민지로 확장되었고, 식민지의 '야만' 전통 또한 문명화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388-9)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동화주의는 직접 무력을 동원하고 행사하기보다 그 과시와 위협을 통해 식민지인의 정신에 극도의 억압을 강제했다. 그것은 비상 전시 체제 아래서 끊임없이 피지배자들의 긴장을 유도하고 끝없이 피지배자들을 동원한 열광의 광기였다. 따라서 황민화 정책을 단순한 일본 문화의 동질화가 아니라 〈정신의 정복〉, 〈정신의 총동원 체제〉라고 본 것은 일리가 있었다. 더구나 그 안에선 조선과 일본을 별개로 보는 호칭 자체가 소거되었다. 예컨대 '선인'이나 '조선인'은 차별어로 불렸고, 대신 '반도인'이나 '반도 동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일본어'라는 호칭도 일본을 외국처럼 본다는 이유에서 사용되지 못하고, '국어'가 올바른 용어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조선어 사용 금지는 민족어 말살이라기보다 표준어나 공통어를 보급하는 차원의 하나로 해석되었다. 이처럼 전시 체제 아래서 동화주의는 민족과 관련된 모든 형태의 표지를 소거함으로써 〈조선인을 근본에서 일본인화〉하려 했다."(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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