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라인하르트 코젤렉.오토 브루너.베르너 콘체 엮음,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원석영 옮 / 푸른역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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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 고대 그리스어에서의 사용


"그리스어에서 '위기' 개념은 중요한 정치적 개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분열〉과 〈불화〉를 의미했다." "한편 '위기'라는 말은 확정판결과 유죄판결이라는 뜻의 〈결정〉도 의미했는데, 이 의미는 오늘날 '비판Kritik'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어에서는 동일한 개념이 나중에 분리된 〈주관적인〉 비판과 〈객관적인〉 위기라는 두 의미 영역을 담당한 셈이다." "법률상의 청구권으로서, 그리고 권리설정으로서의 '위기'는 시민공동체의 질서를 규정했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도 권리를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무게감을 획득한다. 이 개념은 선거를 통한 결정, 정부의 결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정, 사형제도와 형벌의 결정, 해명에 대한 검토, 단적으로 말해서, 정부 정책에 대한 결정을 목표로 한다. 이 때문에 공동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유익한 동시에 올바른 '위기'이다. 따라서 '위기'는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올바른 결정들을 거쳐 올바름과 통치질서를 조율하는 중요한 개념이었다."(16-7)


"기독교인들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시간과 장소와 날짜는 일려져 있지 않았지만, 최후의 심판에 대한 확신만은 분명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다. 경건한 자들이건, 믿음이 없는 자들이건, 살아있는 자들이건 죽은 자들이건 말이다. 그 심판은 재판으로 이어진다. 요한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신의 말씀에 따른다면 이미 구원된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최후의 심판에 대한 확신 이상으로 나아갔다. 다가오는 위기Krisis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삶으로의 해방을 보장하는 은혜의 확신 속에서 선취된다. 신의 심판이 예수의 고지告知를 통해 이미 저기에 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긴장 속에서 기대지평이, 즉 다가올 역사적인 순간을 신학적으로 특징짓는 기대지평이 그려진다. 묵시록은 믿음을 통해 선취되어 현재적인 것으로 겅혐된다. 위기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아직은 미결인 상태로 남아있지만, 양심 속에서는 이미 실행된다."(18)


"법률 개념으로서의 위기 개념의 영향사史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신학적인 가르침을 통해서만 진행된 반면, 그리스어에서의 보다 광범위한 사용은 근대 위기 개념의 의미 지평을 적잖이 밝혀준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전서》에서 유래하고 갈렌에 의해 대략 1,500년 동안 고착된 의학적인 위기 이론이 그러하다. 병이 위기Krisis일 때는 관찰 가능한 증세뿐만 아니라 그 진행에 대한 판단, 즉 환자의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시기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이때 병의 진행에서 규칙성을 진단하려면, 발병일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위기Krise가 완치로 귀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들은 완전한 위기와 재발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위기를 구분했다." "라틴어에 수용된 이 개념은 사회 정치 영역에서 은유적인 의미의 확장을 용인했다. 그것은 법률적 재판과 마찬가지로 결정으로 인도하는 과정의 개념이다. 그것은 결정이 예정되어 있지만 아직 내려지지 않은 기간을 의미했다."(18-9)


3. 각국어로 수용


4. 사전 분야


5. 정치학적 개념에서 역사철학적 개념으로 : 18세기와 프랑스혁명


"'위기Krise' 개념의 외교 군사적 사용에 대한 초기 증거들은 프리드리히 대제에게서 발견된다. 유럽 국가들이 1740년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전혀 대비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이를 결정하고 마음을 굳혔을 때, 왕은 〈그의 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위기〉를 슐레지엔으로 진입하는 계기로 삼았다." "'위기' 개념은 구체적인 내전 상태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내전 상태는 시민들의 충성심을 찢어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기' 개념이 사용되는 정치적 영역이 넓어졌다. 이 개념은 결정적인 시기로 몰아가는 외교 혹은 군사적 상황들을 특징지었으며 근본적인 체제 변화를 가리켰다. 이 경우 정치적 집단 행위와 헌법 시스템의 유지나 몰락이 대안을 이루지만, 단순한 정권 교체도 그렇게 표현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 개념은 정치 혹은 군사적 행위를 진단하는 기준으로도, 또한 기술記述 범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34-6)


"역사적인 시간과 관련된 위기 개념에 대한 의미론은 전형화된 4가지 가능성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1) 의학-정치-군사적 사용에 의거해서, '위기'는 결정적인 시점으로 향해가는 다양한 행위자들에 의한 사건의 연속을 의미할 수 있다. 2) 다가올 〈최후의 날〉이라는 약속에 의거하여, '위기'는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최종적인 역사적 결정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는 반복될 수 없다. 3) 신조어들은 이미 의학 혹은 신학적인 의미와는 많이 분리되었다. 지속 혹은 상태 범주로서의 '위기', 이는 과정, 즉 부단히 재생산되는 위험한 상황들이나 결정이 충만한 상황을 의미한다. 4) '위기'는 역사에 내재하는 과도기적인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이때 과도기가 더 나은 상태에 이르게 될지 아니면 더 나쁜 상태에 이르게 될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지속되게 될지는 진단에 달려 있다. 어떤 경우에든, 시대를 특징짓는 표현을 얻고자하는 시행착오적인 시도가 문제다. '위기'는 새로운 시대의 구조적인 징표이다."(39-40)


"루소는 '위기' 개념을 1762년에 처음 근대적인 의미로, 즉 역사철학적인 동시에 예측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이는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뿐만 아니라 동적인 순환이론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방향성에 힘입어, '위기'는 새로운 개념이 된 듯하다. 《에밀》에서 주인과 종의 위상을 자연적 욕구를 지닌 인간임을 근거로 동일한 것으로 환원시킨 후, 루소는 시사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존속할 것이라고 덧없이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견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불가피한 혁명에 노출되어 있다. 유럽의 거대한 왕정들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다.〉 루소는 자신이 받아들인 지배 형태의 계승을 다루는 순환 모델에서 자신의 예측을 이끌어냈다. 왕들이 몰락한 후에, 사회 전반에 미치는 극단적인 변혁에 대한 비전이 나타난다. 〈우리는 위기 상황과 혁명의 시기에 다가가고 있다.〉" "반은 예언으로, 반은 예측으로 미래의 역사가 선취되었다."(40-1)


"미국의 독립운동과 함께 위기 개념은 시대의 경제 개념 차원을 획득한 동시에 세계사적인 최후의 결정을 고지했다. 이 때문에 토마스 페인은 '위기The Crisis'라는 표현을 자신의 잡지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1776부터 1783년에 일어난 사건들에 도덕을 강제하는 도전을, 즉 덕과 부덕, 자연법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부패한 전제정치 사이에 필요한 도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추세들이다.〉 그는, 젊은 루소로서, 자신의 비전이 구세계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등장과 함께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었다. 식민지의 붕괴는 그에게 단순히 정치·군사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사적인 심판이 실현된 것이었다. 독재의 몰락이자 생지옥에 대한 승리인 것이다." "이것이 개념사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정치학적 위기 개념에 최후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많이 더해져서 역사철학적 시대 개념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43-4)


"버크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페인이 주문呪文한 동일한 현상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 그렇지만 위기 개념이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상황을 개념화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나에게는 마치 내가 거대한 위기 속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혹은 유럽을 넘어서는 거대한 위기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모든 상황들을 고려해볼 때, 프랑스혁명은 지금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일이다.〉" "'위기'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진단과 예측적 기능은 페인과 버크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진단 내용과 기대와 관련해서 그 둘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버크는 의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페인은 신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세계사적인 대안들을 해석 내지 제시할 수 있는 '위기'의 새로운 의미론적 특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 개념은 공통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그러나 서로 대립적으로 적용된 투쟁 개념Kampfbegriff이 된다."(44-6)


6. '위기'와 위기들 : 19세기


"로렌츠 폰 슈타인은 1850년에 독일 관념론의 전제들을 가지고 역사를 체제 내재적으로 해석하면서, 유럽 역사가 〈두 개의 커다란 시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고대에는 소유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부자유가 동시에 지배적이었다. 게르만 왕국의 시대는 〈자유로운 직업과 자유로운 소유 사이의 반복된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이러한 투쟁의 마지막 단계에 불과하다. 유럽에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고 유지될 수 없다는 느낌이 퍼지고 있다. 강력하고 두려운 운동들이 눈앞에 놓여있다. 그 누구도 이것들이 어디에 이를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래의 한 개인에 불과한 그 누구도 실제로 그 구호를 제시할 권리가 없다.〉" "위기 개념은 생시몽에서처럼 전全 역사에서 도출되었고, 장기적으로 이 세기 모든 혁명들의 기초에 놓여있는 산업사회로의 과도기를 특징짓는다. 그럼에도 슈타인은 단지 두 가지 가능성만을 예측한다. 파멸 혹은 공정한 사회조직이 바로 그것이다."(60-1)


"유럽 정신의 위기를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격 속에 개념화하고자 하는 철학의 고삐들이 니체의 진단과 도발적인 대답 속에 모두 묶여 있다. 〈언젠가 나의 이름에 괴물의 기억이 붙여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믿어온, 요구된, 신성시된 모든 것에 대항하여 불러내어진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기와 가장 강렬한 양심의 알력과 결정에 대한 기억이.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다이너마이트이다. ····· 그러나 나의 진리는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사람들은 거짓을 진리라고 했다.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이 인류의 최고의 자각 행위에 대한 나의 공식인데, 그 행위는 나의 살과 천재성이 되었다.〉 도덕 혹은 형이상학 혹은 기독교로 포장되어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삶의 거짓이 드러나게 되면, 정치는 정신들의 전쟁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옛 사회의 모든 권력구조를 허공에 날려버릴 것이며, 지구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65)


"1840년대 이후 경제학적으로 채색된 위기 개념은 모든 사회 비판적인 글들에 스며든다. 당시에 모든 정치사회 진영들로부터 나온 그런 글들이 시장에 넘쳤다. 위기 개념은 헌법이나 계급에 의해 야기된 난관들과 산업과 기술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의해 야기된 난관들을 총체적으로, 병이나 균형 장애의 증상으로,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 적절했다." "무역 정치망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조건의 국제화는 새로운 종류의 위기에 속했다." "그러나 그동안 축적된 경험에 따르면, 모든 위기들은─그 모든 고난과 낙담에도 불구하고─역사철학적으로 과도기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위기Krise가 자유주의 낙관론자들에게는 진보라는 사다리의 디딤돌이 되었다." "사회주의 해석가들 역시 이 점에 동의한다. 위기에 대한 일상 경험의 비참함이 기대지평을 보다 더 많은 종말론적인 요소들로 채우더라도 말이다. 혁명의 기대와 경제학적인 분석 사이를 오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위기 개념이 이를 증언한다."(69-71)


7. 전망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기원전 1세기와 르네상스를 비교하면서 자기 소외와 냉소주의와 거짓 영웅주의와 흔들리는 확신, 수박 겉핥기식의 교육과 야만화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세기의 위기를 해석하고자 했다. 근대 인간의 종말은 대중의 봉기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후이징가는 결정되지 않은 미래로의 길을 강조했다. 그는 〈그것이 어떤 상태이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위기Krisis가 진보적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과정의 한 단계라는 확신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이전에 우리의 위기 의식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다.〉 후설은 '위기'라는 주제를 역사철학적으로 확장했고, 〈유럽 학문의 위기〉를 점점 더 드러나는 〈유럽 인간성의 위기〉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했다. 이성의 계시를 따르는 그리스어 '목적Telos'은 데카르트 이후 주체-대상 간의 분리에 의해 점점 더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과 일상 세계 간의 틈을 다시 메우려는 것이 현상학의 과제이다."(79)


"물론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이미 위기 개념이 지난 세기에 확장시킨 역사철학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위기'는 과도기로 해석되는 우리 시대의 새로움을 계속 입증해준다." "'위기'는 연관을 필요로 하듯이 연관을 지을 능력이 있으며, 의미를 추구하듯이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 말의 모든 사용을 특징짓는다. '위기'라는 말은 그 의미가 상대적으로 애매해서 격앙된 분위기나 문제 상황들을 에둘러 표현할 수 있듯이 '소요', '갈등', '혁명' 등과 교체 사용이 가능하다. 〈불명확하다는 것은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만약의 대안적 해석을 위해 내용의 진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개념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추월될 수 없고, 강력하고, 교체 불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하는 힘은 임의의 대안들의 불확실성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처럼 그 말의 사용 자체가 정확한 규정을 회피하는 역사적인 '위기'의 증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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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평전 - 고난의 길, 신념의 길
고명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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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가 김대중과 함께한 세월의 태반은 핍박과 죽음의 불길이 어른거리는 환난의 시간이었다. 그 시절 내내 신념과 의지를 지키고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준 것이 신앙이었다. (···) 이희호의 신앙 안에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하나로 만났다. 사회의 고통을 외면하고 개인의 기복에만 매달리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었다. 이희호에게 신앙은 자유, 정의,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으려는 싸움의 보이지 않는, 최후의 무기였다. 이희호가 남편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늘에 간구했던 것은 남편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느님의 사업에 일꾼으로 동참하는 것이 남편이 할 일이었다. 그 신앙이 용기의 원천이었다. 김대중은 "용기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희호가 낸 용기야말로 '진리에 대한 헌신', 곧 이희호 자신이 믿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헌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희호의 용기는 용서로도 나타났다. 자신의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이희호는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1977년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오직 악은 악으로 이길 수 없고 선으로만 이긴다는 것을 우리는 다 같이 알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고 가르친 이런 사랑을 생각하고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이니, 원수까지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해야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것은 남편이 유신정권의 폭압에 저항하다 5년형을 받고 서울에서 가장 먼 진주교도소 독방에 갇혀 있을 때였다. 수난의 한가운데서 용서를 이야기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희호는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남편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을 받은 직후에도 똑같이 기도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도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옵소서." 

  이희호가 보여준 이 용서의 정신은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에서 했던 유언과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때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반드시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공유한 용서는 신앙적 차원의 결단이고 신념이었다. pp.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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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2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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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20세기를 지나 새 천 년으로 이어졌지만 돌아보면 한줄기 섬광 같은 것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것들, 사랑한 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름을 연호하던 군중들은 어디에 있고 나를 협박하고 욕하던 무리들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인가. 거짓과 증오가 닳아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과 다시 만나고 싶다.


  나는 많이 흘러왔으니 곧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한반도 남쪽 바다 조그만 섬에서 태어나 지구촌을 떠돌았다. 온갖 무늬의 시간들이 주어졌지만, 위대한 신은 내게 용기와 지혜를 내려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일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을 내려 주셨다.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용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목숨을 잃는 칼날 위에 섰고, 때로는 부귀영화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매번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돌아 보면 아득하지만 들춰 보면 격정의 순간들이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다. 우리들은 한때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지만 역사를 속일 수는 없다.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pp.60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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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자서전 1 김대중 자서전
김대중 지음 / 삼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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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 1년이 가까워 옵니다. 우리 집은 당신이 살아 계시던 그때 그대로입니다. 올해에도 마당에 우리가 좋아하던 사피니아, 백일홍, 천일홍, 팬지꽃을 심었습니다. 당신이 저 아름다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당신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 한구석이 저려 옵니다.

  우리는 자주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바라보았지요. 우리 집을 찾아온 참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것이 당신의 유일한 즐거움이었죠. 요새는 더 많은 참새들이 와서 모이를 먹고 있습니다.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면 당신 생각에 눈시울을 적십니다.


  당신이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실 때 "모든 것을 진실하게 기록하여 역사와 후손에게 바치겠다"고 하신 말이 떠오릅니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해 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뒤돌아보면 우리 앞에 그토록 험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로마서」에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할 바 아니다"라 했습니다. 이 성구같이 당신의 생애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며 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의 고비를 몇 차례 넘기셨고 망명, 연금, 감옥 생활 등의 괴로움에도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탄압하는 세력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용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민주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당신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일했습니다.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나라를 정보화 강국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평생소원인 통일을 위해 남북 화해에 나서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으로 남북 공동 선언도 발표했습니다.

  이 나라를 민주, 자유, 평화의 꽃이 피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당신의 꿈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바라던 것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의 벽을 허물고 서로 하나가 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힘쓸 것으로 믿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이 바라는, 아니 우리 모두 바라는 통일의 그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행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평화를 이룩해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후손들이 반드시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생은 고난이 가득했고 그 고난을 극복한 당신의 생애를 담은 자서전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들이 수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존경하고 친구처럼 가까웠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께서 자서전을 위해 좋은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이 세상을 떠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을 보낸 슬픔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당신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이라 생각하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온 47년의 생애를 매일같이 떠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내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헤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느님 품에 편안히 쉬시옵소서.

2010년 여름, 당신의 아내 이 희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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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5-05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 노동과 노동자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베르너 콘체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이진모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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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


1. 서문


2. 노동 개념의 변천 과정


"호메로스에 나타나는 초기 그리스의 귀족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사戰士 귀족의 육체노동이 품위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자유농민의 경작은 신들이 인간을 위해 정해준 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데 화폐경제, 도시경제, 해양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사회질서가 변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토대를 잃었고, 육체노동으로서의 노동(농사나 제조 활동)은 완전 시민이 아니고 노예에 이르는 하층민에게 부과되었으며, 그로 인해 평가절하되었다." "플라톤은 게으름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육체노동을 하는 자들의 생활방식은 시민적 덕목과 합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에는 덕을 가진 자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고전고대의 정치관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폴리스에 적합한 덕목 위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윤리적, 정치적 행위인 Praxis가 Poiesis(노동)를 지배했으며, 행위의 현명함은 누구나가 아니라 오직 지배자와 정치가에게 걸맞은 통치학이었다."(16-8)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전부터 라틴어 labor는 '수고'뿐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키케로는 labor를 분명하게 delor와 구별했다. 〈수고와 고생 사이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들은 전반적으로 비슷하지만, 그런데도 뭔가 차이가 있다.〉 그는 이어서 labor를 이렇게 정의했다. 〈수고는 마음 혹은 몸의 중대한 활동과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고생은 뜻하는 바와는 무관한 몸의 거친 움직임에 불과하다.〉 labor가 수고스럽고 목표 달성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라는 의미를 얻었을 때 이 개념은 미덕virtus과 연결되어, 높은 가치를 지닌 근면industria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labor, 즉 활동을 통해 (특히 군사적인) 용감함을 검증함으로써 명예를 얻기 원했던 로마인들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비천한 노예 노동 또는 수공업 노동이란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은 중세에도 이어졌으며, 기독교적인 노동 전통과 결합되었다."(20-1)


"신이 창조자로서 스스로 그의 노동을 수행했으며, 인간에게 〈이를 가꾸고 유지하라〉고 맡겼던 '에덴동산'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시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노동은 창조주로서 노동하는 신이 인간에게 이미 파라다이스부터 창조 작업을 계속하라고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노동이 주어졌으며, 이 사실에 근거해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노동에 가치가 부여되었고, 중세 후기 탁발 수도자들의 설교에서는 흔히 사회비판적이고 특히 귀족 비판적인 어조와 함께 사용되었다." "노동은 생계 유지 또는 물질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신을 위해서, 그와 함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자의 기쁨〉으로 가득 찬 채 수행되어야 한다. 종교적이고 선교적인 활동도 노동으로 파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동은 기독교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수행되는 한, 인생의 성취였다."(21-3)


"중세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제자와 성자에 대한 박해, 최후의 심판 앞의 공포 역시 아픔, 고난, 유혹/시련, 곤경, 궁핍, 투쟁 욕구, 위험과 마찬가지로 'arbeit'라고 불렸다. 이런 관점에서 기사, 성직자 내지 수도사 신분에서 이루어지던 중세적, 기독교적 선행에 관한 윤리를 파악해야 한다. 이는 '게으름'은 배제하지만 각각의 신분에 적당한 'arbeit'는 요구하는 식이었다. 기도와 성직자적 고행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빈자와 병자에 대한 자선 구호 활동에서도 나타나는 수도자적 순종의 노고labor oboedientiae가 그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것이 12~13세기 작가들이 말한 〈기사적 노동〉, 다시 말해 기사들이 명예와 사랑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수고와 고통이었다." "노동 그 자체가 내적 존엄성을 갖거나 미덕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은 오히려 전과 다름없이 수고이자 고통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노동' 속에서 입증해야 했던 징표는 품위와 명망, 명예를 가져다주었다."(26-7)


"종교개혁의 직업 이론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노동 개념을 기초로 하며, 다만 이 개념이 다시금 새롭게 급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로써 기독교 노동자 개념이 관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독교적 순종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은 동일하게 평가된다는 주장은 진지하게 여겨야 했다. 수도자들의 노동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생각은 부정되거나 게으름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농민과 수공업자의 힘든 노동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예배로 인식되었으며 기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몇몇 인간들은 입으로는 적게 기도하지만 손으로 하는 그들의 노동을 신은 기도로 여긴다.〉 루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이 주장을 반복했다.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은 더 이상 명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의 하위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는 〈노동 자체를 위해〉 노동을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간혹 주장되었던 이러한 오해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이론에서 발전, 재해석된 견해가 드러난다."(30-2)


"막스 베버를 뒤따르는 잘못된 해석과 달리, 기독교적 노동 개념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새로운 해석을 통해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신·구약성서》에 대한 직접적인 재접목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경제의 동력(자본주의)은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개념을 통해 용이해지거나 가능해졌지만, 결코 그로 인해 촉발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칼뱅주의나 개혁된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강조할 수 있다. (루터파의 경우보다) 노동을 통한 고행의 경향이 더욱 강해지면서, 개인적 검소가 계속될 경우 이는 실질적으로 이익의 축적을 초래하며 예정론은 '현세'에서의 노동 성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주는 쪽으로 발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런 결과를 가능하게 해줄 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이는 원치 않았던 결과로, 칼뱅주의 이론이나 노동론 자체가 이를 직접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이론적 근거는 되지 않는다."(36-7)


기술적 토대 위에 세워진 중상주의 국가를 배경 삼아 "베이컨은 노동 개념이 처음엔 영국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그 전통에서 해방되는 시대가 다가옴을 특징적으로 알렸다. '신학문'의 목적은 스콜라철학과 정반대로 논쟁이 아니라 기술artes, 논쟁을 통한 적의 정복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자연의 정복이다." "홉스는 이러한 해방 과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모든 이론은 결국 활동actio이나 노동operatio으로 끝난다. 학문의 유익은 육체와 내적 운동을 측정하고, 짐을 움직이고, 배를 띄우며, 기계를 제조하는 등의 〈기술〉에 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홉스가 활동 내지 노고와 힘potentia을 서로 연결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힘/권력Macht'은 인류학적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노동'은 사회적 기본 개념이 되었다. 로크는 노동이 사물을 변화시킴으로써 권리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로크에 따르면, 노동은 1) 인간에게는 사물 및 토지에 대한 본래적인 소유권을, 2) 사물에는 가치를 부여해준다."(39-40)


"이와 함께 근대적인 노동 개념의 역사, 즉 인간 활동 서열의 최하위로부터 (더 이상 기독교적 근거가 없는) 노동이 해방되고, 특별하게 인간적인 능력으로 노동이 고양되며, 마지막으로 인간에서 노동이 분리되고 추상적이면서 영향을 미치는 주체('노동이 만드는labour makes')로 상승되기 시작한다. 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노동에 의해 얻어지며 우리의 욕망은 노동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의 투쟁으로서 노동이 사회적인 기능 가치를 획득하면서 노동 개념의 독립 과정이 시작되었다. 노동 개념은 빈곤과 결합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노동 개념은 그것이 연결되어 있던 '수고'와 '짐'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술artes은 노동을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데카르는 〈모든 기술들을 용이하게 하고 인간의 노동을 줄이는〉 경향을 언급했는데, 이는 이미 모어와 캄파넬라의 유토피아에서 펼쳐졌던 생각이었다."(41)


"'노동'은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주의자'들에게서, 계몽된 행복주의가 경제적 근거를 갖게 되면서 그 체제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스미스주의자들은 〈토지가 국부의 어머니이듯이, 노동은 국부의 아버지이자 적극적 원칙〉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행복론의 무게중심이 〈도덕적 상태, 정신의 만족도〉로부터 명백하게 〈외적인 상태〉, 〈즐거움을 누리려는 인간의 자연권〉 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결과 〈물질적인 행복〉이 인간의 〈도덕적 행복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토대를 둔 채 '생산물'의 '배가'를 향한 요구, 개인적 부와 '국부'의 '성장'을 향한 요구가 새로운 노동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라는 이론 체계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노동은 생산 요소, 생존 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를 넘어 성장하는 '자본' 형성을 위한 수단이 되었는데, 자본마저도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기초Fond'로 이해되었다."(52-3)


"〈노동이 '부의 본래적인 원천', 즉 경제적 의미에서 유일한 생산 요소라는 주장〉으로 나아가던 당시의 '경제주의자들'의 경향을 스미스가 종합하고 깊이 있게 숙고하며 무엇보다 계속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유일하게 가치 생산적인 노동(중농주의자)으로서 농업 노동이 지닌 우선적 지위로부터 노동 개념을 해방하여 경제 순환에서 노동 개념이 차지하는 중심적 지위를 발전시켰다. 노동은 모든 가치 창조와 가격 형성에 우선적인 토대가 되며 〈모든 재화의 교환가치를 측정하는 진정한 척도다.〉 노동은 새로운 영토와 토지재산의 취득이나 노동 일손(인구)의 증가뿐 아니라 무엇보다 개선된 노동 기술과 조직(분업)을 통해 성과를 높일 수 있게, 다시 말해 '더 생산적'이 되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하는 경제에 토대가 되는 생산 요소의 하나로서 노동은 장애 없이 조화롭게 기능하는 화폐와 재화의 순환 속에서 마치 상품처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때에만 그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59-60)


"프랑스혁명은 노동의 개념사에서 지침이 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까지 유럽 대륙에서 오직 정신세계에만 존재해왔던 것이 혁명 과정에 실현되었기 때문이다(아니면 실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이 혁명은 노동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된 생산적인 계급과 비생산적인 계급 사이의 구분 또는 노동하는 '제3신분'과 특권을 가진 '빈둥거리는' 귀족, 성직자 계층 사이의 구분이 정치적으로 현실화되었다. 제3신분이 〈민족Nation〉과 동일시되면서, 민족은 〈기생충〉들로부터 해방되고 보편적인 노동에 토대를 둔 성과주의 사회가 되었다. 1791년 헌법의 1장에 수록된 총론이 바로 이 사실을 명시했다. 〈모든 국민은 도덕과 능력 이외의 차별 없이 고용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의 문헌에 흔히 나오는 노동과 민족의 관계가 이로 인해 정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당시 대두되던 새로운 사회 개념에 맞게 민주화되었다."(67)


"헤겔에게 '노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욕구 충족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이었다. 그런데 노동이 점차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노동 분업화로 인한 부르주아 사회가 드러내는 '욕구의 체계' 속에서 노동은 점차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헤겔이 〈생산이 점점 더 추상화되면서〉 기계적으로 변해가는 노동에 의해 인간이 결국 밀려난다고 기술했을 때, 그는 기술적으로 전진하는 노동 발전의 한 경향을 표현한 것이며, 이로써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를 접고 그 대신 기계화된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추락〉에 주목했다." "이로써 산업 체제 안에서 (훗날 그렇게 불리게 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된다는 사실이 예견된 셈인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대 경제 체제 안에서 노동은 전반적으로, 다시 말해 단지 공장 노동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소의의 움직임(소외 과정)이 되었다."(73-4)


"마르크스의 생각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조합체를 실현하는 것은 오히려 〈자동 기계 설비 시스템〉이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품위 있는 노동 생활로 이끌 가능성을 지님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생산에서 노동을 〈자기실현〉, 〈주체의 대상화, 다시 말해 그의 활동이 바로 노동인 실제적 자유reale Freiheit〉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외적으로 강요된 〈강제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대비되는 〈무노동Nicht-Arbeit〉이 〈자유와 행복〉인 것 같다는 주장에 분명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해방된 인간의 노동은 서로 침투하면서 영향을 주는, 그리고 인간 존재를 분열시키지 않고 연합시키는 〈필연성〉의 〈제국들〉과 〈자유의 제국들〉 안에서 과학적, 기술적 방식으로 수행되며, 그 결과 필연성 안에는 자유가, 자유 안에는 필연성이 포함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노동으로 자기 실현을 하면서 〈하나의 다른 주체로 변모했다.〉"(103-5)


3. 전망


"니체는 〈노동의 시대〉에 어떤 형태의 한가함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반면, 〈노동은 점점 더 많은 양심의 만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가게 하는〉, 〈숨가뿐 노동의 정신없음〉을 통해 인간 존재가 의미를 상실해가는 현상에 아연실색했다. 니체는 〈노동의 존엄〉이나 〈노동의 축복〉 같은 부르주아적 평가를 비열한 왜곡이라고 폭로했으며, 이에 대해 노예 노동에 토대를 두면서 시민에게 〈고상함〉, 〈탁월함otium〉, 〈아름다움bellum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던 고대 문화를 대비시켰다. 막스 셸러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적 노동 개념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노동 개념이 비대하다고 비판했으며, 근대적인 인간의 〈원자화〉와 〈공리화〉에 맞서서 인간 본질에 적합한 등급의 개념을 설정하고자 했다." "셸러는 무엇보다 쉴 새 없는 노동의 통치가 인간의 삶 전체를 장악하는 데 반대했다. 셸러는 그것이 인간이 자기만족을 발견하는 〈다양하고 객관적인 목적 지향적 관계들〉을 무가치하고, 단순히 기능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보았다."(125)


- 노동자


1. 서론


"'Arbeit'에서 파생되고, 중세 후기에 '노동하는 사람Arbeitsmann'이나 '일하는 사람arbeitende Leute'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 Arbeiter는 그 의미 면에서 '노동'이 지닌 여러 가지 개념적 가능성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 단어는 게르만인들이 사용하던 어원적 기본 의미에 따라 힘들게 〈얼굴에 땀을 흘리며〉 육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 땅을 경작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뜻하기도 해서 농부와 구별해서 사용될 필요가 없었는데, 다시 말해 이 개념은 농부를 포함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천한 민중〉 가운데 손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로 노동자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궁정) 농민과 수공업자(장인과 도제)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신분관과 육체노동자들보다 상위에 고유의 직업 명칭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Arbeiter'가 주로 자영 수공업자와 농민보다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자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일용직 일꾼을 지칭하는 경향이 지속되었다."(134-5)


"성서적, 기독교적인 전승은 '노동' 개념, 그리고 훗날 '직업'(Beruf)에 대한 평가와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자'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론 〈천하고 낮은〉 육체적 노동이 높게, 또는 가장 높게 평가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론 '노동'은 모든 인간 활동, 즉 정신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에도 사용되므로 '빈둥거림/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모든 인간은 '노동자'라는 의미에서 그러했다." "노동자를 기독교적으로 '소명받은 사람'으로 보거나, 활동하는 모든 사람으로 보는 두 가지 생각은 19세기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1차적으로 하층민 남자를 칭하는 노동자의 사회적 개념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문제〉, 〈노동자 문제〉 또는 〈제4신분〉의 해방 문제가 혁명적인 사회 변혁기에 주요 사안이 되었을 때, 그리고 노동자가 사회적 영향력을 키울 뿐 아니라 〈전 인류〉의 대변인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 때, 이 두 가지 개념 모두가 동시대인들의 의식에 효과적인 토대가 되었다."(136-7)


2. 노동자 개념의 변천 과정


"1830~1840년대에 학자들에 의해 유행어가 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는 새로운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았던 옛 단어 '노동자Arbeiter'를 점점 자주 대체해갔다. 프롤레타리아는 처음에는 과도하게 재생산되는 〈천민〉의 집단 빈곤에 시달리는 인간을 위한 개념으로 제시되었는데, 품행이 방정하고 부지런하며 질서를 사랑하는 유형인 '노동자'에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반면에 로렌츠 폰 슈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이 부정적인 의미 부여로부터,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부터도 벗어났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단어의 역사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벗어나서, 불합리한 변증법을 통해 매우 훌륭하게 사회적 발전 과정 또는 역사 자체에 대한 혁명적 해석을 제공해주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를 혁명 주체로 고양시키도록 표현되었다."(154-5)


"'노동자' 개념의 이데올로기화는 계몽을 통한 노동자의 새로운 상황 의식,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구호를 자신의 실존에 연결시킬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수반한 사회경제적 변화(한편으로 시작되고 있는 산업적인 유통 경제, 다른 한편으로 수공업과 가내 노동자의 위기, 빈곤)가 움직이는 맥락을 통해 주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맥락은 1830~1848년에 계몽된 혁명적 지식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상황을 토대로 깨어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 노동자와 만난 곳, 곧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잉글랜드의 독일인 노동자/수공업자 협회에서 등장했다." "〈강한 협동적인 상호 소속감〉, 〈집단의식〉과 〈연대의식〉 속에 '노동자'는 전승된 수공업자의 명예를, 모든 빈곤층과 권리 박탈자들Entrechrete의 선두에 선 노동자의 공동체에서 인권과 시민권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명예의식과 결합함으로써, 일종의 결속 개념이 되었다. '노동자'는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156)


3.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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