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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 노동과 노동자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0
베르너 콘체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이진모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 노동
1. 서문
2. 노동 개념의 변천 과정
"호메로스에 나타나는 초기 그리스의 귀족 세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사戰士 귀족의 육체노동이 품위 있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자유농민의 경작은 신들이 인간을 위해 정해준 일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런데 화폐경제, 도시경제, 해양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사회질서가 변하면서 이러한 생각이 토대를 잃었고, 육체노동으로서의 노동(농사나 제조 활동)은 완전 시민이 아니고 노예에 이르는 하층민에게 부과되었으며, 그로 인해 평가절하되었다." "플라톤은 게으름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육체노동을 하는 자들의 생활방식은 시민적 덕목과 합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의 생각에는 덕을 가진 자만이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고전고대의 정치관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폴리스에 적합한 덕목 위에 성립되는 것이었다." "윤리적, 정치적 행위인 Praxis가 Poiesis(노동)를 지배했으며, 행위의 현명함은 누구나가 아니라 오직 지배자와 정치가에게 걸맞은 통치학이었다."(16-8)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전부터 라틴어 labor는 '수고'뿐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키케로는 labor를 분명하게 delor와 구별했다. 〈수고와 고생 사이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들은 전반적으로 비슷하지만, 그런데도 뭔가 차이가 있다.〉 그는 이어서 labor를 이렇게 정의했다. 〈수고는 마음 혹은 몸의 중대한 활동과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고생은 뜻하는 바와는 무관한 몸의 거친 움직임에 불과하다.〉 labor가 수고스럽고 목표 달성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라는 의미를 얻었을 때 이 개념은 미덕virtus과 연결되어, 높은 가치를 지닌 근면industria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labor, 즉 활동을 통해 (특히 군사적인) 용감함을 검증함으로써 명예를 얻기 원했던 로마인들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비천한 노예 노동 또는 수공업 노동이란 개념으로부터의 해방은 중세에도 이어졌으며, 기독교적인 노동 전통과 결합되었다."(20-1)
"신이 창조자로서 스스로 그의 노동을 수행했으며, 인간에게 〈이를 가꾸고 유지하라〉고 맡겼던 '에덴동산'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황금시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즉 노동은 창조주로서 노동하는 신이 인간에게 이미 파라다이스부터 창조 작업을 계속하라고 내린 '명령'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을 창조하면서 동시에 노동이 주어졌으며, 이 사실에 근거해서 기독교 전통에서는 노동에 가치가 부여되었고, 중세 후기 탁발 수도자들의 설교에서는 흔히 사회비판적이고 특히 귀족 비판적인 어조와 함께 사용되었다." "노동은 생계 유지 또는 물질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신을 위해서, 그와 함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된 자의 기쁨〉으로 가득 찬 채 수행되어야 한다. 종교적이고 선교적인 활동도 노동으로 파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노동은 기독교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지고 기도하며 수행되는 한, 인생의 성취였다."(21-3)
"중세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제자와 성자에 대한 박해, 최후의 심판 앞의 공포 역시 아픔, 고난, 유혹/시련, 곤경, 궁핍, 투쟁 욕구, 위험과 마찬가지로 'arbeit'라고 불렸다. 이런 관점에서 기사, 성직자 내지 수도사 신분에서 이루어지던 중세적, 기독교적 선행에 관한 윤리를 파악해야 한다. 이는 '게으름'은 배제하지만 각각의 신분에 적당한 'arbeit'는 요구하는 식이었다. 기도와 성직자적 고행에, 그러나 무엇보다도 빈자와 병자에 대한 자선 구호 활동에서도 나타나는 수도자적 순종의 노고labor oboedientiae가 그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것이 12~13세기 작가들이 말한 〈기사적 노동〉, 다시 말해 기사들이 명예와 사랑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수고와 고통이었다." "노동 그 자체가 내적 존엄성을 갖거나 미덕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은 오히려 전과 다름없이 수고이자 고통이었다. 그러나 기사가 '노동' 속에서 입증해야 했던 징표는 품위와 명망, 명예를 가져다주었다."(26-7)
"종교개혁의 직업 이론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노동 개념을 기초로 하며, 다만 이 개념이 다시금 새롭게 급진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이로써 기독교 노동자 개념이 관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독교적 순종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노동은 동일하게 평가된다는 주장은 진지하게 여겨야 했다. 수도자들의 노동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생각은 부정되거나 게으름으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농민과 수공업자의 힘든 노동은 이미 루터 이전부터 예배로 인식되었으며 기도와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몇몇 인간들은 입으로는 적게 기도하지만 손으로 하는 그들의 노동을 신은 기도로 여긴다.〉 루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이 주장을 반복했다.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은 더 이상 명상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의 하위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는 〈노동 자체를 위해〉 노동을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간혹 주장되었던 이러한 오해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이론에서 발전, 재해석된 견해가 드러난다."(30-2)
"막스 베버를 뒤따르는 잘못된 해석과 달리, 기독교적 노동 개념은 프로테스탄트적인 새로운 해석을 통해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신·구약성서》에 대한 직접적인 재접목을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경제의 동력(자본주의)은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개념을 통해 용이해지거나 가능해졌지만, 결코 그로 인해 촉발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칼뱅주의나 개혁된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강조할 수 있다. (루터파의 경우보다) 노동을 통한 고행의 경향이 더욱 강해지면서, 개인적 검소가 계속될 경우 이는 실질적으로 이익의 축적을 초래하며 예정론은 '현세'에서의 노동 성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주는 쪽으로 발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런 결과를 가능하게 해줄 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이는 원치 않았던 결과로, 칼뱅주의 이론이나 노동론 자체가 이를 직접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이론적 근거는 되지 않는다."(36-7)
기술적 토대 위에 세워진 중상주의 국가를 배경 삼아 "베이컨은 노동 개념이 처음엔 영국에서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그 전통에서 해방되는 시대가 다가옴을 특징적으로 알렸다. '신학문'의 목적은 스콜라철학과 정반대로 논쟁이 아니라 기술artes, 논쟁을 통한 적의 정복이 아니라 노동을 통한 자연의 정복이다." "홉스는 이러한 해방 과정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모든 이론은 결국 활동actio이나 노동operatio으로 끝난다. 학문의 유익은 육체와 내적 운동을 측정하고, 짐을 움직이고, 배를 띄우며, 기계를 제조하는 등의 〈기술〉에 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홉스가 활동 내지 노고와 힘potentia을 서로 연결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힘/권력Macht'은 인류학적 기본 개념이 되었으며, '노동'은 사회적 기본 개념이 되었다. 로크는 노동이 사물을 변화시킴으로써 권리를 창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로크에 따르면, 노동은 1) 인간에게는 사물 및 토지에 대한 본래적인 소유권을, 2) 사물에는 가치를 부여해준다."(39-40)
"이와 함께 근대적인 노동 개념의 역사, 즉 인간 활동 서열의 최하위로부터 (더 이상 기독교적 근거가 없는) 노동이 해방되고, 특별하게 인간적인 능력으로 노동이 고양되며, 마지막으로 인간에서 노동이 분리되고 추상적이면서 영향을 미치는 주체('노동이 만드는labour makes')로 상승되기 시작한다. 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은 노동에 의해 얻어지며 우리의 욕망은 노동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의 투쟁으로서 노동이 사회적인 기능 가치를 획득하면서 노동 개념의 독립 과정이 시작되었다. 노동 개념은 빈곤과 결합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노동 개념은 그것이 연결되어 있던 '수고'와 '짐'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기술artes은 노동을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데카르는 〈모든 기술들을 용이하게 하고 인간의 노동을 줄이는〉 경향을 언급했는데, 이는 이미 모어와 캄파넬라의 유토피아에서 펼쳐졌던 생각이었다."(41)
"'노동'은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주의자'들에게서, 계몽된 행복주의가 경제적 근거를 갖게 되면서 그 체제의 중심 개념이 되었다. 스미스주의자들은 〈토지가 국부의 어머니이듯이, 노동은 국부의 아버지이자 적극적 원칙〉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행복론의 무게중심이 〈도덕적 상태, 정신의 만족도〉로부터 명백하게 〈외적인 상태〉, 〈즐거움을 누리려는 인간의 자연권〉 쪽으로 옮겨졌으며, 그 결과 〈물질적인 행복〉이 인간의 〈도덕적 행복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위해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그것에 토대를 둔 채 '생산물'의 '배가'를 향한 요구, 개인적 부와 '국부'의 '성장'을 향한 요구가 새로운 노동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근본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라는 이론 체계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노동은 생산 요소, 생존 유지를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그를 넘어 성장하는 '자본' 형성을 위한 수단이 되었는데, 자본마저도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기초Fond'로 이해되었다."(52-3)
"〈노동이 '부의 본래적인 원천', 즉 경제적 의미에서 유일한 생산 요소라는 주장〉으로 나아가던 당시의 '경제주의자들'의 경향을 스미스가 종합하고 깊이 있게 숙고하며 무엇보다 계속 영향을 미치도록 한 것은 분명하다. 그는 유일하게 가치 생산적인 노동(중농주의자)으로서 농업 노동이 지닌 우선적 지위로부터 노동 개념을 해방하여 경제 순환에서 노동 개념이 차지하는 중심적 지위를 발전시켰다. 노동은 모든 가치 창조와 가격 형성에 우선적인 토대가 되며 〈모든 재화의 교환가치를 측정하는 진정한 척도다.〉 노동은 새로운 영토와 토지재산의 취득이나 노동 일손(인구)의 증가뿐 아니라 무엇보다 개선된 노동 기술과 조직(분업)을 통해 성과를 높일 수 있게, 다시 말해 '더 생산적'이 되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성장하는 경제에 토대가 되는 생산 요소의 하나로서 노동은 장애 없이 조화롭게 기능하는 화폐와 재화의 순환 속에서 마치 상품처럼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때에만 그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59-60)
"프랑스혁명은 노동의 개념사에서 지침이 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까지 유럽 대륙에서 오직 정신세계에만 존재해왔던 것이 혁명 과정에 실현되었기 때문이다(아니면 실현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이 혁명은 노동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발전된 생산적인 계급과 비생산적인 계급 사이의 구분 또는 노동하는 '제3신분'과 특권을 가진 '빈둥거리는' 귀족, 성직자 계층 사이의 구분이 정치적으로 현실화되었다. 제3신분이 〈민족Nation〉과 동일시되면서, 민족은 〈기생충〉들로부터 해방되고 보편적인 노동에 토대를 둔 성과주의 사회가 되었다. 1791년 헌법의 1장에 수록된 총론이 바로 이 사실을 명시했다. 〈모든 국민은 도덕과 능력 이외의 차별 없이 고용될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의 문헌에 흔히 나오는 노동과 민족의 관계가 이로 인해 정치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당시 대두되던 새로운 사회 개념에 맞게 민주화되었다."(67)
"헤겔에게 '노동'은 오직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욕구 충족을 위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이었다. 그런데 노동이 점차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노동 분업화로 인한 부르주아 사회가 드러내는 '욕구의 체계' 속에서 노동은 점차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헤겔이 〈생산이 점점 더 추상화되면서〉 기계적으로 변해가는 노동에 의해 인간이 결국 밀려난다고 기술했을 때, 그는 기술적으로 전진하는 노동 발전의 한 경향을 표현한 것이며, 이로써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를 접고 그 대신 기계화된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추락〉에 주목했다." "이로써 산업 체제 안에서 (훗날 그렇게 불리게 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된다는 사실이 예견된 셈인데, 이는 당시 사회에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대 경제 체제 안에서 노동은 전반적으로, 다시 말해 단지 공장 노동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행되는 소의의 움직임(소외 과정)이 되었다."(73-4)
"마르크스의 생각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인 조합체를 실현하는 것은 오히려 〈자동 기계 설비 시스템〉이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품위 있는 노동 생활로 이끌 가능성을 지님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생산에서 노동을 〈자기실현〉, 〈주체의 대상화, 다시 말해 그의 활동이 바로 노동인 실제적 자유reale Freiheit〉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근본적으로 외적으로 강요된 〈강제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대비되는 〈무노동Nicht-Arbeit〉이 〈자유와 행복〉인 것 같다는 주장에 분명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해방된 인간의 노동은 서로 침투하면서 영향을 주는, 그리고 인간 존재를 분열시키지 않고 연합시키는 〈필연성〉의 〈제국들〉과 〈자유의 제국들〉 안에서 과학적, 기술적 방식으로 수행되며, 그 결과 필연성 안에는 자유가, 자유 안에는 필연성이 포함될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노동으로 자기 실현을 하면서 〈하나의 다른 주체로 변모했다.〉"(103-5)
3. 전망
"니체는 〈노동의 시대〉에 어떤 형태의 한가함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 반면, 〈노동은 점점 더 많은 양심의 만족을 자기 편으로 끌어가게 하는〉, 〈숨가뿐 노동의 정신없음〉을 통해 인간 존재가 의미를 상실해가는 현상에 아연실색했다. 니체는 〈노동의 존엄〉이나 〈노동의 축복〉 같은 부르주아적 평가를 비열한 왜곡이라고 폭로했으며, 이에 대해 노예 노동에 토대를 두면서 시민에게 〈고상함〉, 〈탁월함otium〉, 〈아름다움bellum이라는 명예〉를 부여했던 고대 문화를 대비시켰다. 막스 셸러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적 노동 개념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노동 개념이 비대하다고 비판했으며, 근대적인 인간의 〈원자화〉와 〈공리화〉에 맞서서 인간 본질에 적합한 등급의 개념을 설정하고자 했다." "셸러는 무엇보다 쉴 새 없는 노동의 통치가 인간의 삶 전체를 장악하는 데 반대했다. 셸러는 그것이 인간이 자기만족을 발견하는 〈다양하고 객관적인 목적 지향적 관계들〉을 무가치하고, 단순히 기능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보았다."(125)
- 노동자
1. 서론
"'Arbeit'에서 파생되고, 중세 후기에 '노동하는 사람Arbeitsmann'이나 '일하는 사람arbeitende Leute'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 Arbeiter는 그 의미 면에서 '노동'이 지닌 여러 가지 개념적 가능성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 단어는 게르만인들이 사용하던 어원적 기본 의미에 따라 힘들게 〈얼굴에 땀을 흘리며〉 육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 개념은 무엇보다 땅을 경작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을 뜻하기도 해서 농부와 구별해서 사용될 필요가 없었는데, 다시 말해 이 개념은 농부를 포함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천한 민중〉 가운데 손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로 노동자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궁정) 농민과 수공업자(장인과 도제)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신분관과 육체노동자들보다 상위에 고유의 직업 명칭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Arbeiter'가 주로 자영 수공업자와 농민보다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자들, 특히 도시와 농촌의 일용직 일꾼을 지칭하는 경향이 지속되었다."(134-5)
"성서적, 기독교적인 전승은 '노동' 개념, 그리고 훗날 '직업'(Beruf)에 대한 평가와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자'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론 〈천하고 낮은〉 육체적 노동이 높게, 또는 가장 높게 평가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른 한편으론 '노동'은 모든 인간 활동, 즉 정신적 활동과 종교적 활동에도 사용되므로 '빈둥거림/게으름'에 빠지지 않는 모든 인간은 '노동자'라는 의미에서 그러했다." "노동자를 기독교적으로 '소명받은 사람'으로 보거나, 활동하는 모든 사람으로 보는 두 가지 생각은 19세기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1차적으로 하층민 남자를 칭하는 노동자의 사회적 개념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문제〉, 〈노동자 문제〉 또는 〈제4신분〉의 해방 문제가 혁명적인 사회 변혁기에 주요 사안이 되었을 때, 그리고 노동자가 사회적 영향력을 키울 뿐 아니라 〈전 인류〉의 대변인으로 등장할 수 있었을 때, 이 두 가지 개념 모두가 동시대인들의 의식에 효과적인 토대가 되었다."(136-7)
2. 노동자 개념의 변천 과정
"1830~1840년대에 학자들에 의해 유행어가 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는 새로운 모든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치 않았던 옛 단어 '노동자Arbeiter'를 점점 자주 대체해갔다. 프롤레타리아는 처음에는 과도하게 재생산되는 〈천민〉의 집단 빈곤에 시달리는 인간을 위한 개념으로 제시되었는데, 품행이 방정하고 부지런하며 질서를 사랑하는 유형인 '노동자'에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반면에 로렌츠 폰 슈타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경우에는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이 부정적인 의미 부여로부터, 따라서 노동자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로부터도 벗어났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단어의 역사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효과적으로 벗어나서, 불합리한 변증법을 통해 매우 훌륭하게 사회적 발전 과정 또는 역사 자체에 대한 혁명적 해석을 제공해주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를 혁명 주체로 고양시키도록 표현되었다."(154-5)
"'노동자' 개념의 이데올로기화는 계몽을 통한 노동자의 새로운 상황 의식,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구호를 자신의 실존에 연결시킬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수반한 사회경제적 변화(한편으로 시작되고 있는 산업적인 유통 경제, 다른 한편으로 수공업과 가내 노동자의 위기, 빈곤)가 움직이는 맥락을 통해 주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맥락은 1830~1848년에 계몽된 혁명적 지식인들이 그들의 특별한 상황을 토대로 깨어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 노동자와 만난 곳, 곧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잉글랜드의 독일인 노동자/수공업자 협회에서 등장했다." "〈강한 협동적인 상호 소속감〉, 〈집단의식〉과 〈연대의식〉 속에 '노동자'는 전승된 수공업자의 명예를, 모든 빈곤층과 권리 박탈자들Entrechrete의 선두에 선 노동자의 공동체에서 인권과 시민권의 정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명예의식과 결합함으로써, 일종의 결속 개념이 되었다. '노동자'는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156)
3.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