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크스 당대의 혁명가들은 "도덕적 목적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행동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 목적을 정당화시키려면 보편적인 가치 척도에 호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둘째, 이에 비추어 현재의 사회구조 중 어느 부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가치란 사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실을 보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는 역사 과정의 본성과 법칙을 올바로 통찰하기만 하면 독립적으로 알려진 도덕적 기준들에 의지하지 않고도 어떤 수단을 채택하는 것이 좋은지, 다시 말해 어떤 길이 자신이 속한 질서의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지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21-3)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불변의 보편적 자연권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자기방어적인 자유주의적 환상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회주의는 호소하지 않고 요구하며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회구조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해 말한다."(26) "그가 서명한 성명서나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의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한때는 민주주의 운동의 이상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상투어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28) 마르크스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그 중에서 옳고 독창적이며 중요해 보이는 것을 전부 추려낸 다음, 그 자료를 근거로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냈다." 그 학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기본 원리들을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하고 현실성 있게 결합한 비범함에 있다."(34)


볼테르와 루소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이 거둔 승리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끼친 영향에 거의 맞먹을 정도이다.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자유로이 탐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의 법정에 세우는 정신은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계층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적 용기는 당시 유행하는 미덕이 되었고 지적 공정함은 그 이상의 미덕이었다."(73) 헤겔에게 이러한 "급진적 경험주의는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그는 과학적 독단주의는 신학을 대체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자연과학에서 성공한 방법들만이 그 밖의 모든 경험 분야에서 타당할 수 있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보다도 훨씬 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시대는 그 자궁 속에 미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고 앞으로 올 시대의 윤곽을 예시하고 있다."(76-7)


"기계적 모델은 사물의 작용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합리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건들이 인간의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방법만으로는 특정한 예술작품이나 과학 속에 구현되어 있는 특정한 인물이나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개별적 특성, 개별적 본질, 목적 등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특성들이 그것의 전후에 일어난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 전체는 유일무이하며 단 한 번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과학적 방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와는 정반대로, 과학적 방법은 동일한 현상이라든가 특징들의 동일한 결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규칙적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79-80)


"투쟁과 긴장이라는 개념은 역사에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동적 원리를 제공한다. 사유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현실이며 사유 과정은 가장 명료한 형태로 표현된 자연의 과정이다. 전보다 더 높은 동일성으로서의 영속적인 흡수와 해소의 원리, 즉 지양止揚, Aufheben은 논증적 사유에서와 같이 자연에서도 일어나며, 자연의 과정들이 유물론이 전제하는 기계적 운동처럼 목적 없는 과정이 아니라 내적 원리를 보유하고 있고 점점 더 자기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88) 마르크스는 "자신이 다루는 모든 것을 합리적 통제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이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외적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에 이 새로운 견해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위대한 철학자 헤겔을 변함없이 믿고 찬미했다."(94)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가치 있는 헤겔의 방법으로 무장을 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허울뿐인 건물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서로 관찰 가능한 경험적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 대상들을 가리키는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 자기세대의 의무로 보았다."(118) 1843년 11월,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영토를 떠나 이틀 뒤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민주적 개혁을 너무나 격렬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통렬한 문필 능력을 갖춘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로 받아들여졌다." 1843-5년에 걸친 파리 생활 동안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분명히 가다듬은 마르크스는 "많은 국가의 경찰에게 비타협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개량주의적 자유주의의 적이며 국제적 지부들을 갖춘 단체에서 체제전복 운동을 꾀하는 악명 높은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다."(119-120) 


파리에서 마르크스가 가진 의문은 "프랑스 혁명이 실패한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가? 이론과 실천에서 어떤 결함이 있었기에 총재 정부와 제1제정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부르봉 왕가가 복귀할 수 있었는가? 반세기가 지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들이 피해야 할 오류는 어떤 것들인가? 사회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 즉, 미리 알기만 했더라면 대혁명을 지켜낼 수도 있었을 법칙들은 없는가? 등에 대한 것이었다."(129) 그는 "케네와 아담 스미스를 위시해 시스몽디, 리카르도 세이, 프루동 및 이들의 추종자 등 주로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이들의 명쾌하고, 냉철하고, 비감상적인 태도는 독일인들의 혼란스러운 주정주의나 현란한 수사와는 대조적이었다. 경험적 탐구를 강조하고 실천적으로 기민하면서도 대담하고 독창적인 일반 가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은 마르크스를 매료시켰다."(130)


"마르크스가 판단하기에 파리에서 만난 공산주의자들 중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그는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149) 마르크스는 자신이 세우고 있는 역사적 테제의 "정당성 여부를 입증해 줄 수 있는 물질적 증거인 발전하는 산업사회의 실태에 관한 풍부하고 구체적인 자료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엥겔스가 이것을 제공해 주었다. 반면에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엥겔스가 보기에는 당시 개혁가들 내에서는 추상적 개념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추상적 개념이 기초를 이루고 있는 철학은 진정한 혁명적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수집한 사실들을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공격하는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끼워넣을 굳건한 틀이 필요했는데, 마르크스에게는 바로 그러한 틀이 있었던 것이다."(153-4)


"마르크스는 인간을 핵심 요소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인간이란 쾌락이라든가 지식, 안전, 혹은 무덤 너머의 구원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의 원리에 따라 인간적 능력 전체의 조화로운 실현이라는,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목적들을 추구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그 결과 어떤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결정하고 설명하게 된다. 아울러 인간들 사이의 상태와 가치들 자체는 부분적으로 실현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좌절되기도 하면서 그러한 상태와 가치들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모든 노동과 창조의 핵심인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변혁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고정된 원리라든가 불변의 보편적 목적, 인간의 영원불변의 상태 따위의 개념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든다."(188)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노동 개념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노동을 행복과 해방의 정수이자 인간들 사이의 대립 없는 이성적 조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인 동시에 자유로운 인간 본성의 가장 완전한 표현인 자유로운 창조 행위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노동을 여가와 대비시키고는 계급투쟁이 폐지되면 노동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노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사회화된 삶을 만들어가는 노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양립적 태도와 이 때문에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마르크스가 "진화론적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을 결합시켜 자유 선택을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190-1)


마르크스는 당대의 특성을 결정하는 핵심 현상을 '계급투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륀과 헤스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 계급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 목표인 자신들의 권리와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부터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이라는 평등한 존재로, 다시 말해 폭력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연대 의식과 평등한 정의에 대한 의식, 인류의 고결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만, 상이한 이해관계들이 지속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보다도 자기 계급이 지고 있는 짐을 다른 계급의 어깨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벗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을 내세워 마르크스 일당의 이론은 단지 현존하는 계급들의 역할을 뒤바꿔놓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현존하는 모순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하나의 동일한 이상으로 융합하는 것뿐이다."(212-3)


마르크스는 "1845년 기조 정권의 탄압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이는 프랑스의 기조 정권이 당대를 호령하던 프로이센 왕의 자질에 관해 공격적인 논평을 싣고 있던 사회주의 잡지 <전진>에 폐간 조치를 내리라는 프러시아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브뤼셀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임박한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업에 착수했다."(232-4) "1847년에 <공산주의자 동맹>의 런던 본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기 조직의 신조와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그 부탁을 최근 들어 머릿속에 완성된 새 학설을 정리, 요약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1848년 초에 문건을 작성해 넘겨주었고, 이 문건은 파리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에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238)


마침내, 파리를 필두로 "도처에서 전제주의 정부들이 전복되고 제후들이 새로운 법령들을 약속하고 온건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관리들을 임명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 군대만은 여전히 왕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반동 정부의 타도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노동자와 급진적 부르주아지가 잠정적으로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는 1789년에 봉건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그 때문에 1848년에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지금까지는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만 혁명들을 달성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사상가들은 견해의 급진성에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앞섰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18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인 독일은 발전된 산업주의 단계에 도달해 이웃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전진하려면 먼저 두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보았다.(249-50)


혁명의 불길이 번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공허한 잡담'과 '의회의 정신박약'에 반발해 격렬한 폭동들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원인을 부르주아지의 취약함과 의회적 자유주의자들의 무능함에서도 찾았지만, 주된 원인은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대중의 정치적 맹목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대중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다가 결국에는 아주 쉽사리 자신들을 파멸시키고 마는 가장 악랄한 적과 그 대리인들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는 여생을 혁명의 현실적인 조건들을 분석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못지않게 혁명 지도자들이 무지한 군중을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는 것이 최선인가와 같은 순전히 전술적인 문제들을 고찰하는 데 바쳤다. 이것은 주로 이때의 독일 혁명에서 얻은 교훈의 영향이었다."(253-4)


"프로이센 정부는 1849년 7월 (선동적인 논설을 써대는) 마르크스를 라인란트에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다. 파리의 정치적 상황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중요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 "프랑스를 떠나거나 아니면 브리타니에 있는 모비한으로 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자유 국가들 중에서 벨기에의 문은 그에게 닫혀 있었고, 바이틀링을 추방한 바 있으며 바쿠닌에게도 거의 호의를 보이지 않았던 스위스는 그의 체류를 승인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7월에 라인란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지 1달 후에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혁명의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영국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49년 8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259-61)


마르크스는 본래 "혁명은 소규모의 잘 훈련된 혁명가 집단에 의한 쿠데타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집단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직접 인민을 대표하는 집행 위원회를 구성해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공격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광범위한 노동 대중은 속박과 암흑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탓에 새로운 국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역량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영구 혁명의 상태라고 말했다.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이끄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나머지 모든 계급에 대해 행하는 계급 독재이다." 영구 혁명 원리는 레닌에 의해 채택되어 1917년 러시아에서 문자 그대로 가장 충실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1848년의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실천에서는 이 원리의 중요한 측면들을 포기해 버렸다."(271-3)


마르크스에 따르면, 결국 "1848년의 사건이 가르쳐 준 중요한 교훈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이 혁명적 지도자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혁명은 단지 모험가들과 성급한 자들의 산발적 폭동 속에서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1871년의 파리 코뮌을 탄생시킨 혁명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그 혁명에 대한 지지를 거절했다." 부르주아지와의 협력 여부 역시, 공산주의의 전단계로서 의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힘과 동맹 세력인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부르주아지의 공공연한 결정을 지켜보고는, 부르주아지의 협력이 그들에 비해 힘이 약한 노동자 계급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274-5)


"1850년 경 마르크스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1851년의 쾰른 재판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줄어들었다. 공업과 상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유주의와 과학 및 문명의 평화로운 진보에 대한 믿음이 또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거의 흘러간 역사상의 인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즉 이전 세대에는 강력한 이론가이자 선동가였지만 지금은 망명하여 런던의 한 구석진 변두리에서 그때그때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인물 정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5년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다. 물론 영국에서는 그때까지도 예외였다." 마르크스를 "이런 위치(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지도자이자 구세주)에 오르게 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유럽 사회주의의 성격과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은 1864년의 제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이었다."(314-6)


"1857년에 최악의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공황이 불만과 폭동을 불러올 것이라고 보고 유럽이 여태껏 겪었던 것 중에 가장 가혹한 이 공황을 열렬히 환영했다."(330) 밤낮으로 인터내셔널 활동에 매진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을 장악하면서 예전의 정력적인 모습을 되찾은 듯 했다. 이 당시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거의 쾌활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심지어 그의 이론적 저작들에서까지도 이 새로 찾은 활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흔히 그렇듯이, 한 분야의 작업을 열심히 하게 되면 그동안 손을 놓고 있던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1859년에 자신의 경제이론을 개략적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그는 빈곤과 건강 문제 때문에 그동안 중단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내 마르크스의 역작이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332-3)


<자본론> 1권에서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핵심 테제는, 소비하는 것 이상의 부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사회 계급이 있는데 그것이 곧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과, 순전히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천연자원, 기계, 운송수단, 신용 대부 등의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 잉여 가치를 차지하는 자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348) 그러나 마르크스는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저항이 증가하면서 생길 결과를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정치적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을 방해하고 변형시키는 힘이나 무제한적인 착취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점차 빈곤해지는 계층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될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동 세력과 동맹을 맺게 될 때 그들이 구체제를 지키는 보루가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파시즘도 복지 국가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352-3)


마르크스는 "실레지엔에서 방직공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1842년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측하고는 하이네를 격려해 그 봉기에 관한 유명한 시를 쓰게 해서 당시에 자신이 맡고 있던 파리의 잡지에 실었다. 또한 1851년, 1857년, 1872년에도 혁명을 예상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윤율이 저하할 것이고, 산업과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집중화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수준은 떨어질 것이며,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긴밀하게 결합할 것이라는 등의 예언들은 대체로 당대에는 그가 예상한 형식대로 들어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가 중앙으로 집중될 것이고, 대기업의 생산 방식과 낡은 분배 방식 사이의 갈등이 점차 커져 양립할 수 없게 됨으로써 사회와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산업화와 과학이 전쟁 형태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이런 모든 현상으로 말미암아 생활 방식이 급격하게 변화할 것"이라고 올바르게 예측했다.(361)


마르크스는 비록 파리 코뮌을 정치적인 대실책이라고 보았지만,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코뮌에서 활동하다 코뮌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최초의 순교자들로 자리매김했다. 코뮌을 격찬한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은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연설문으로 쓰인 것이었다. 이 연설문의 공표는 인터내셔널의 회원들에게 당혹과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인터내셔널의 해체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경찰과 일반 대중은 인터내셔널 하면 곧 코뮌의 무자비한 악행들을 떠올리게 되었다."(372-3)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력이 기껏해야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자,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에 대한 여러 세대에 걸친 희망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는 혹독한 투쟁보다는 차라리 바쿠닌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한 후에 인터내셔널이 평화적으로 해체되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심했다."(378)


"마르크스는 세상을 단순히 흑백의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자기 친구들 중에 더 조용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겪은 신념의 위기들, 이를테면 헤스나 하이네 같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내적 천착(?)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신념의 위기들을 사적인 감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 더 심하게 말하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싸움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 예술적 목적을 위해 사회 불안을 이용하는 경박함과 무책임한 방종을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라고 보았다. 개인감정에 대한 극도의 엄격함과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규율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모든 나라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적들에 의해 모방되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의 진정한 계승자들과 관용적인 자유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구분 짓는 특징이 되었다."(40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의 17가지 모순 - 이 시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대안
데이비드 하비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 기본 모순


1.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 사용가치 : (같은 품목이라 하더라도)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다.

  - 교환가치 : (정상적인 상황에서) 균일하고 질적으로 같다.

  → 교환가치는 모든 상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독립적인 척도인 화폐로 환산된다.


2. 화폐와 사회적 노동의 가치

  - 화폐 : 타인의 사회적 노동을 청구하는 수단

  - 사회적 노동 :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의 합

  → 시장가격은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조건의 공급과 수요에 좌우된다. 따라서, 재현물(화폐)과 재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재(사회적 노동) 사이에는 간극(우연적 누락 & 고의적 조작)이 존재한다.  


3. 사유재산과 자본주의 국가의 집합성

  - 사유재산 : 소유물과 그 소유물을 처분할 권리를 가진 법률적 개인으로 규정된 한 사람 간의 사회적 결합

  - 자본주의 국가의 집합성 : 국가권력은 강압적으로 사유재산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다. (시장 실패와 같은 외부 효과 규제)

  → 국가는 사유재산권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산화불가능한' 형태의 화폐 자원을 독점하고, 무력을 사용하여 사유재산권을 수호한다.


4. 사적 전유와 공동의 부 (사적 개인이 사회적 노동의 결실을 합법적으로 전유)

  - 사적 전유 : 사회적 가치와 분리된 화폐는 탈취와 약탈, 시장 교환을 통해 개인이 무제한적으로 축적할 수 있다.

  - 공동의 부 : 사회적 노동이 만들어내는 부의 총합 (common wealth)

  → 토지, 노동, 화폐가 대상화되고 그 뿌리에 있는 문화적 삶이 떨어져 나가면서, 공동의 부는 국가가 승인한 사유재산권 원칙에 따라 재구성된다.


5. 자본과 노동 (소외된 사회적 노동)

  - 자본 : (사회적) 노동이 창출하는 잉여가치를 통해 재생산되는 가치

  - (사회적) 노동 :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

  → 사회적 노동이 화폐 수익을 산출하는 상품의 교환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자본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고, 노동의 피지배 조건은 강화된다.


6. 자본의 고정성과 이동성

  - 고정성 : 화폐, 생산활동, 상품 같은 물질적 형태로 표현되는 자본

  - 이동성 : 화폐에서 생산수단으로, 노동에서 상품으로, 상품에서 다시 화폐로 돌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자본

  → 과정과 사물 양자를 오가는 자본순환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은, 자본 일반의 이익보다는 개별 자본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쓰인다.


7. 자본 생산과 실현

  - 생산 : 노동 과정에서 순환하는 자본

  - 실현 : 시장에서 순환하는 자본

  → 생산 과정에서 지불되는 노동의 몫을 줄이려는 각종 시도는 시장의 총수요를 제한하고, 유효수요 부족은 결국 자본 축적의 지속성을 저해한다.



※ 움직이는 모순


8. 기술 혁신과 일회용 인간

  - 기술 혁신 : 자본의 수익성을 지탱하거나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물신의 대상

  - 일회용 인간 : 기술혁신은 육체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자기규율, 노동의 질, 문화적 관습, 임금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작용

  → 불안정한 잠재 노동인구의 과잉은 화폐가 가치의 역사적 재현물이라는 의무를 벗어던질 수 있게 하며, 자본의 약탈성을 억제하는 규제를 제거한다.


9. 분업

  - 기술적 분업 : 원칙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특정한 공정 내에서 결합되는 업무들

  - 사회적 분업 : 적절한 훈련이나 사회적 위치를 요구하는 특화된 업무들 (가령, 젠더 관점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노동을 비숙련노동으로 분류하는 일)

  → 자본은 세분화되어 내부경쟁이 치열한 노동시장(탈숙련화와 국제분업)을 창출하여, 통일성을 갖춘 노동조직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10. 독점과 경쟁

  - 집중 : 사유재산에 내재한 독점권력은 교환의 기초가 되며, 나아가 경쟁의 기초가 된다. (계급독점권력)

  - 분산 : '시간을 통한 공간의 절멸' 가속화로 공간적인 장벽이 줄어들면서, 많은 지역 산업과 서비스가 보호막과 독점특권을 상실했다.

  → 자본은 경쟁을 환영하지 않고, 독점지위를 구축하고 보존하는 방법을 갈망한다. (초超대기업, 시장을 지배하는 느슨한 동맹, 지적재산권 부여)


11.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과 공간의 생산

  - 불균등한 지리적 발전 : 다양한 자본이 군집을 형성하여 '집적의 경제'를 이룰 때, 해당 지역의 우월적 지위는 기존 장소의 고정된 가치를 위협한다.

  - 공간의 생산 : 투기자본은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흡수하는 역동적인 공간을 생산하지만, 자본 팽창과 질적 전화를 위해 이를 파괴해야 한다.

  → 자본은 언제나 사회적 부의 사적 전유와 축적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인위적으로] 구성된 충성과 갈등을 빚는다.


12. 소득과 부의 격차

  - 다양한 사회집단 : 자본은 노동 통제를 공고히 하는 사회집단 내/간의 갈등을 조장하며, 노동통제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사회적 해방을 지원한다.

  - 부의 분배 : 자본이 재생산되려면 자본과 노동 간의 소득 분배는 한쪽으로 치우쳐야 한다. (이윤 극대화와 임금률 감소 혹은 노동생산성 향상의 공존)

  → 자본은 일자리 창출만큼이나 실업 양산에도 주력하여 잉여노동을 통제하고, 예비 노동력의 '부분적 프롤레타리아트화'를 통해 임금 하한선을 끌어내린다.


13. 사회적 재생산

  - 숙련 노동 : 공교육은 분업에 적절한 기술집합의 생산과 자본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적 순응을 충족시키는 역할을 한다.

  - 비숙련 노동 : 노동이 아주 낮은 임금을 받는 경우는 노동자가 자신의 인적자본을 형성하는 데 충분히 투자하지 않음을 반영한다.

  → 사유화와 사용료 지불이 전통적인 공교육 영역에 침투하면서, 이제 교육을 원하는 이들[특히 저소득층]은 사회적 재생산 비용을 직접 부담해야 한다.


14. 자유와 지배

  - 자유 : 자신이 추구하는 자유를 지키려는 노력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과 조응한다.

  - 지배 : 개개인이 시장교환 특유의 사회적 관계와 규약을 내면화하면서, '시장의 자유' 이면에 자리한 국가의 폭력과 지배를 자명하게 받아들인다.

  →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권력과 강제가 부재한 사회, 물리력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을 역설하지만, 이때의 자유는 '통치성'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 위험한 모순


15. 무한한 복률 성장

  - 복률 성장 : 자본의 본성은 '무한한' 이윤 추구이기 때문에, 제로성장 상태의 자본주의 경제란 성립불가능하다.

  - 평가절하 비용 : 자본이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일정한 비중의 창조적 파괴를 실행할 때,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라는 지정학적 투쟁이 발생한다.

  → 지식과 정보의 과잉, 부채와 금융 전략 같은 스펙터클의 급속한 확장은 복률 성장의 '물질적'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조바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6. 자본과 자연의 관계

  - 상품화된 자연권 : 사적 개인이 자연을 화폐자산처럼 자본화하면서, 막강한 잠재 권력을 가진 불로소득 계급이 형성되는 기초를 마련한다.

  - 환경운동 : 변덕스러운 환경재난이 자본이 만들어 낸 불행의 책임을 덮어쓰게 되면서, 환경운동은 반자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 자본이 자연을 상품화·화폐화하면서, 자연의 다양성과 인간의 잠재력이 억압당한다. 자본은 자연과 인간본성을 극도로 소외시킨다.


17. 보편적인 소외

  - 노동의 경제적 합리화 : 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소비에서도 소외되고, 결국 자신의 필요에서 소외된 개인으로 전락한다.

  - 인간본성의 반란 : 어떤 가치 있는 연결의 상태에서 고립되고 떨어져 나온 소외alienation 상태는 회복불능의 상실감과 비통의 감정을 내면화한다.

  → "노동시간이 절감되었음에도 자유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이 '개인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에 사용되지 않는다면, 이 노동시간 절감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앙드레 고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본이라는 수수께끼 -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들
데이비드 하비 지음, 이강국 옮김 / 창비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동의 약화는 저임금을 의미하고 노동자가 가난해지면 시장은 위축된다. 임금억압이 지속되면 결국 기업의 증가하는 산출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축적의 한 장애물인 노동문제는 극복되지만 시장의 부족이라는 다른 장애물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두 번째 장애를 어떻게 우회할 수 있었을까? 노동자가 버는 소득과 지출할 수 있는 금액 사이의 차이는 신용카드 산업의 등장과 부채의 증가로 메워졌다."(32-3) 수요문제를 해결하는 또다른 방법은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개도국들에게 대규모로 자본을 수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 더 많은 과잉자본이 생산에, 특히 중국의 생산에 투입되자,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가격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저임금과 저이윤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화폐가 자산가치에 대한 투기에 몰려들었다. 바로 그곳이 이윤이 창출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49)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악명높은 닷컴버블의 형성과 함께, 부채가 폭발적으로 늘고 새로운 파생상품시장이 발전하면서 엄청난 액수의 과잉자본이 흡수"되었다. "이 모든 기회 앞에서 누가 굳이 생산에 투자하려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자본주의 위기의 금융화(financialisation) 경향이 시작된 시점이었다."(49) "1973년 이후 전개된 금융화는 필요에 의한 산물이었다. 그것은 잉여흡수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과잉화폐, 즉 과잉유동성은 어디서 나왔을까? 1990년대가 되자 해답이 명확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레버리지의 증가였다." 과잉자본의 금융화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마침내 "2005년, 레버리지 비율은 30 대 1까지 높아졌다. 세계가 과잉유동성으로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당연하다. 은행시스템 내에서 만들어진 과다한 가공자본이 잉여를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50)


"자본의 순환에서는 그 흐름의 연속성이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이 중단되면 언제나 손실이 발생한다. 또한 순환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강력한 유인이 존재한다. 자본순환의 다양한 국면들에서 더욱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경쟁자들보다 더 높은 이윤을 얻는다. 유통의 가속화는 거의 언제나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주로 그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는 혁신이 추구된다."(67) 자본의 순환은 또한 "공간 이동을 수반한다. 화폐는 어떤 곳에서 한데 모아져(assembled), 다른 어떤 곳에서 온 노동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특정한 장소로 이동한다." 이러한 공간 이동의 "마찰이나 장애물은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며 자본순환을 느리게 만든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전 역사에 걸쳐, 이동을 더디게 하는 거리와 장애물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어져왔다. 운송과 통신의 혁신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68)


"자본가들은 왜 그들의 이윤을, 쾌락을 위해 소비해버리지 않고 생산확장에 재투자하는가? 이것이 '경쟁의 강제법칙'(coercive law of competition)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자본가로서 내가 확장에 재투자하지 않았는데, 만약 경쟁자가 그렇게 한다면, 얼마 후에 나는 파산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시장에서 자신의 몫을 지켜내고 또 투자를 늘려야 한다. 나는 자본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재투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쟁적 환경의 존재를 가정한다." 경쟁적 환경과 별개로 "자본가의 재투자를 추동하는 또다른 동인이 존재한다. 화폐는 개인들이 전유할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의 형태다. 게다가 그것은 내재적 한계를 지니지 않는 사회적 권력의 형태다." 즉, 화폐의 무한성과 "그것이 제공하는 사회적 권력을 통제하려는 필연적 욕망이 더 많은 화폐를 갈구하는 사회적·정치적 유인을 두루 제공한다."(69-70)


"자본가들이 자본을 재투자할 때, 그들은 시장에서 사용 가능한 추가적인 생산수단을 찾아야 한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입요소는 두 종류다. 하나는 생산과정에서 쓰일 수 있는 (이미 인간노동에 의해 가공된) 중간생산물(외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옷감 등)이고 다른 하나는 기계류와 공장 건물, 생산활동을 지원하는 운송시스템, 운하, 항구 같은 물적 인프라 등을 포함하는 고정자본 설비다." 이때 "상품 혹은 생산에 투입되는 공급체인의 한 부분에서 나타나는 기술혁신은 다른 부분에도 필연적으로 혁신을 유발한다." 따라서 과거의 이윤을 새로운 자본으로 변환하는 과정은 "추가로 고용되는 노동자들의 생활을 위한 임금재뿐 아니라 생산수단의 수량이 계속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 있다. 여기서 과제는 자본순환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물적 투입요소의 공급을 조직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은 확장에 앞서 그 스스로의 지속적 확장을 위한 조건들을 창출해야만 한다!"(102-3)


"국가계획 대 시장에 관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차치하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회적 노동분업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계에서 자본 흐름의 연속성이 공간과 시간에 걸친 흐름의 연속성을 촉진하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들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불행히도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가치생산과 가치평가의 형태들을 공격한다. 간단히 말해, 비시장적인 그리고 비자본주의에 기초한 생활방식은 자본축적의 장애물로 간주되고, 따라서 이들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구성하는 3퍼센트의 지속적 성장률에 길을 내주기 위해 소멸되어야만 한다."(105-6) 이처럼 생산수단을 자본가에게 집중시키는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방식에는 "잠재적인 자연의 한계라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108) 경제학자 짐 오코너의 주도하에 몇몇 맑스주의자들은 "자연의 장애를 '자본주의의 두 번째 모순'(첫 번째는 물론 자본-노동 관계다)이라 불렀다."(115)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8세기 영국 자본주의 발전에서 잠재적인 자연의 한계 가운데 가장 심각해 보였던 한계가 화석연료의 도입과 증기엔진의 발명으로 훌륭하게 극복되었다는 사실이다."(117) 자본은 적절한 화폐 수익을 얻기 위해 스스로 인프라에 투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환경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그 사용에 대한 댓가를 수혜자에게 직접 부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여기가 바로 다시 한번 국가가 개입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 그 결과, "국가의 투자가 그 자체로 회수될 뿐 아니라 더 많은 인프라에 투입될 추가 수입을 확보하는, 국가-자본 순환의 한 형태가 만들어진다." 공간과 장소의 생산은 "오랫동안 엄청난 규모의 자본잉여를 흡수해왔다. 그 내부에서 자본이 깊은 모순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순환하는, 새로운 광경과 지리가 만들어져왔다."(128-9)


"끊임없는 축적의 마지막 잠재적인 장애는 투입된 화폐 더하기 이윤으로 교환되기 위해 새로운 상품이 재화 혹은 일종의 서비스로서 시장에 들어가는 지점에 존재한다. 상품의 특수성이 화폐의 보편성으로 전환되어야만 하는데, 이는 (가치의 일반적인 표상인) 화폐로부터 상품으로의 전환보다 훨씬 더 어렵다. 판매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특정한 상품을 필요로 하고, 바라며 혹은 욕망해야 한다." 잠재적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를 조작하는 광고 이상으로, "특정한 상품과 서비스의 묶음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일상생활의 조건을 형성"해야만 한다.(155-6) "유효수요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답은 자본가들의 소비가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더욱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어제의 잉여생산물에 대한 유효수요는 노동자의 소비와 자본가의 소비, 그리고 내일의 추가적인 생산의 확장으로 인해 유발되는 새로운 수요에 의존한다."(160-1)


"어제의 잉여상산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바로 생산의 확장이며 그 시간차를 메우기 위해 신용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으면, 신용이 추동하는 지속적인 자본축적이 자본주의의 생존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외부 가능성이 고갈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는 사실상 스스로의 유효수요를 만들어내고 내부화해야만 한다. 현재의 경우처럼 이것이 실패한다면 생산의 지속적 확장에 대한 장애들로 인해 위기가 발생한다."(163-4) 자본주의에서 "유효수요 부족으로 인한 이윤저하와 감가의 문제는 신용시스템의 책동을 통해 잠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신용이 작동하여 여러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낸다. 신용은 위험을 분산함과 동시에 위험을 축적한다. 진정한 문제는 유효수요의 부족이 아니라, 어제의 생산에서 얻어진 잉여의 수익성 있는 재투자 기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167)


위기에 대응하는 자본주의 진화의 궤적 안에는 7개의 특정 '활동 영역'이 있다. "기술과 조직형태, 사회적 관계, 제도적·행정적 장치, 생산과 노동 과정, 자연과의 관계, 일상생활과 종의 재생산, 그리고 (문화 규범과 믿음 체계로 대표되는) '세계에 관한 정신적 개념'. 이 가운데 어떤 영역도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지만 동시에 어떤 영역도 지배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다른 모든 것들에 의해 집합적으로조차 결정되지 않는다. 각각의 영역은 스스로 진화하지만 언제나 다른 영역과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한다."(178) 즉, 집단적으로 공존하고 공진화(co-evolution)한다. "영역들 간의 불균등발전은 갈등과 모순뿐 아니라 우연적 사건을 만들어낸다(다윈주의 이론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이가 우연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게다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느 영역의 폭발적인 발전은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185-6)


"전세계의 늘어나는 인구의 대부분이 현재 살아가는 '도시'의 생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제 각각을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자본축적에 점점 더 통합되어왔다."(212) "화폐, 상품, 그리고 사람들의 지리적 흐름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모든 다양성이 효율적인 교통통신 시스템을 통해 함께 결합되어야만 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생산과 소비의 지리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시간과 비용에 매우 민감하다. 이 시간과 비용은 기술적·조직적 혁신과 에너지 비용의 하락으로 인해 크게 감소해왔다. 거리의 장벽은 이제 자본주의의 지리적 이동성을 제한하는 데 점점 더 적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지리적 차이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즉 매우 작은 비용의 지역적 차이도 이윤을 크게 높여주기 때문에, 이동성이 높은 자본은 그것에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인다."(231)


# 사회적 재생산과 자본 축적을 이해하기 위한 지리적 원칙들

1. 시공간압축(time-space compression) : 자본축적에 관한 모든 지리적 한계를 극복한다. 자본가계급은 공간에 대한 우월한 지배와 이동성을 갖고 있다.

2. 자본의 순환은 태생적으로 매우 좁은 공간(the head of a pin)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 축적은 화폐를 지닌 누군가가 이윤을 얻기 위해 임노동을 고용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다.


그 시작부터, "도시들은 잉여식량과 잉여노동의 사용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잉여들은 어딘가에서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으레 농촌인구의 착취 혹은 농노와 노예의 착취로부터) 동원되고 추출되었다. 잉여의 사용과 분배는 (종교적 과두제 또는 강력한 군사지도자 같은) 소수에 의해 통제되었다. 따라서 도시화와 계급의 형성은 언제나 함께 진행되었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관계가 지속되지만, 이와는 다른 동학도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잉여의 영속적인 생산을 위한 사회의 계급형태다. 이는 자본주의가 언제나 도시화가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잉여의 흡수와 인구증가가 문제가 되는 만큼, 도시화는 이 둘 모두를 흡수하는 결정적인 방법을 제공한다."(238) "미국의 교외화는 단지 새로운 인프라의 문제가 아니었다. 파리 제2제정기에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생활방식의 극적인 변화, 즉 고속도로와 자동차에 기초한 새로운 생활을 의미했다."(242)


"도시지리의 개조에는 생활방식의 전환이 뒤따른다. 미국에서 나타난 이러한 전환은 대부분 1960년대 도시지역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했다. 스펙터클한 경제에 대한 끊임없는 의존뿐 아니라 소비주의, 관광, 틈새 마케팅, 문화·지식 기반 산업이 도시 정치경제의 주요한 측면이 되었다." 아울러 "틈새시장의 형성을 도와주는 포스트모던 취향은 현대의 도시 경험을,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자유라는 향기 가득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도시의 변화를 통한 "잉여흡수의 어두운 측면은 '창조적 파괴'를 통한 도시의 재구조화가 여러차례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 창조적 파괴는 도시 재구조화의 기회로서 위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주로 고통받는 이들은 불우하고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빈곤층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급적 차원도 지닌다."(248-50) 베블런은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부는 "산업생산의 영역만큼이나 토지와 도시개발과 관련된 투기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말했다.(257)


"이제 세계경제 내에서 지역과 국가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드는 것이 공공정책 형성의 기본이 되는데, 이는 보통 이웃을 더욱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더 나은 종류의 사람들을 유치하는 것이 그 지역 시민조직의 핵심목표가 되는 것(이는 지역의 수많은 '님비' 정치를 만들어낸다)과 비슷하다. 이로써 지역의 정부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한다. 이제 계급적 차이를 넘어서는 지역의 단결이, 이동하는 자본을 마을로 끌어들이는 노력에서 중요해진다. 자본의 투자와 고용의 기회를 모두 가져올 지역개발 프로젝트에 관해서라면, 지역의 상공회의소와 노조는 서로 싸우기보다는 협력하게 된다. 장소의 판매와 브랜드화 그리고 (국가를 포함한) 어떤 장소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경쟁이 작동하는 데 불가결해진다. 역사, 문화 그리고 소위 자연적 우위에 의해 주어진 요소들을 토대로 한 지리적 차이의 생산이 자본주의의 재상산 속에 내부화된다."(286-7)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개인적 해방과 자유가 "사유재산과 시장이라는 제도적 장치들을 통해 조정되면 엄청난 불평등이 나타난다. 맑스가 오래전에 지적했듯이, 17세기의 사상가 존 로크가 주장했던 개인의 권리에 관한 자유주의 이론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이들로 구성되는 계급과 신흥자본가 계급 사이에 심화된 급격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이론은 "이러한 관계성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폭력(즉, 파시즘과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급진적 평등주의와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신성불가침의 사유재산권을 사회질서의 핵심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본축적과 계급권력의 재생산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이 뿌리깊고 굳건한 견해에 도전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급진적 평등주의가 진정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들의 영역에 소유권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사적 소유권이 아닌 공동의 소유권─이 필요하다."(329)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해 급진적인 경영자 평등주의(enterpreneurial egalitarianism)에 기초하지만, 자본주의 생존의 핵심 기둥은 사적 소유와 그 제도적 형태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데 헌신하는 국가다." 맑스의 유명한 표현대로 "동등한 권리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는) 권력이 결정한다." 좋든 싫든, "계급투쟁이 급진적 평등주의의 정치에 핵심사안이다."(330) 자본주의 혁명의 긍정적인 면은 "그것이 (군주와 교회 같은) 전제적 봉건제로부터 권력을 빼앗았고, 창조적 에너지를 해방시켰으며, 새로운 공간을 열어젖혔고, 교환관계를 통해 세계를 더욱 긴밀하게 엮었으며, 사회를 기술과 조직적 변화의 강력한 흐름에 개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신과 무지에 기초한 세계를 극복하고, 그것을 물질적 필요와 요구로부터 모든 인류를 해방할 잠재력을 지닌 계몽된 과학에 기초한 세계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빼앗기지 않았다면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35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들은 전체 경제를 다룬 수리 모델들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자유로운 경쟁적 시장은 생산, 분배, 소비에 있어 최적의 결과들을 낳게 되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1890년대가 되면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또한 경쟁적 시장경제가 중앙계획경제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신고전파 이론과 분석 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중앙계획당국과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실현되는 모종의 '사회주의국가' 모델들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순수한 시장경제와 중앙계획 사회주의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중심에 나란히 존재하게 된다. 물론 이는 경제학자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한 일이다."(29-30)


"둘째,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에서 사회주의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몇십 년에 걸쳐 사회주의와 시장에 대한 대화를 진행할 수가 있었다." 경제학계의 여러 지도적 인사들이 참여한 이러한 "초국가적 대화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근본적 중요성을 갖는 여러 기여를 가져왔고, 이렇게 해서 발전하게 된 신고전파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셋째,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초국가적으로 벌어졌던, 경쟁적 시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논의를 자신의 일부로 통합했으나,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외침은 들어내버리고 그 자리에 위계적 제도들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주장을 가져다 놓았다."(33-5)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자유롭고 아무 구속이 없는 경쟁적 시장을 옹호한다는 점, 즉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말을 빌자면 그 '시장 근본주의'에 있다."(24)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부와 소득의 분배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는 정치경제학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가 생산되는 조건과 법칙들은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부의 분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오로지 인간 세상의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의 문제다." 무수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퍼붓는 비난에 대응하여 여러 경제학자 또한 그들 직종이 전통적으로 보여왔던 자유방임에 대한 지지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중에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지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 으뜸가는 이유는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론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고전파 경제학과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이론은 물론 정체성까지도 구축했다."(53) 신고전파 이론의 핵심은 경제적 법칙의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이었다.


발라가 개발한 "일반 균형 모델은 전체 경제를 일련의 방정식들로 묘사하며, 이를 통해 이 경제가 어떻게 수요와 공급의 최적의 균형 지점인 균형 상태에 도달하며 또 거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제에서는 기업들이나 개인들이나 모두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취하는 균형가격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 과정을 발라는 '탐색tatonnement'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분석에서 참으로 흥미롭고도 중요한 부분은, 발라가 이 과정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모종의 경매자를 상상했다는 점이다. 이 경매자가 여러 상품의 가격을 공표하고 또 그 가격을 변화시켜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에 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발라의 일반 균형 모델에서 기업들은 한계비용에 근거하여 시장에서 경쟁하고 균형가격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만족을 극대화시키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최소화한다."(55)


발라가 보기에 "사회주의란 자유경쟁과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데 필요한 여러 제도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주의가 성립하면 토지와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 소유가 나타날 것이며 소득세는 폐지될 것이다. 그 다음엔 국가가 토지와 천연자원의 소유자로서 이를 무수한 개인 및 집단들에 임대해줄 것이며, 이로써 여러 독점체가 제거되고 자유경쟁이 가능해진다. 토지와 천연자원의 임대를 통해 국가는 충분한 수입을 얻게 되므로 소득세는 불필요하며, 노동자들은 자신의 저축을 투자로 돌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로써 '계속해서 노동자이기는 하겠으나 그와 동시에 소유자 혹은 자본가'가 될 수 있다. 발라에게 "완전경쟁, 사회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수학 등은 단순히 서로를 보완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관계에 있었다."(56)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자유경쟁 경제를 창출하는 도구적 개념인 셈이다.


파레토는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를 사용하여 "신고전파 경제학을 좀더 일반적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파레토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는 모든 생산을 안배하며,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안의 모든 개개인에게 안녕─혹은 효용─을 극대화할 것을 추구한다다. 이렇게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해주는, 따라서 파레토 최적이라 할 수 있는 안배 상태로부터 무슨 변동이라도 있을 경우, 그 덕분에 누군가는 더 잘 살게 될지 모르지만 또 동시에 다른 누군가는 더 못살게 될 것이다. 파레토는 '생산 전담부Ministry of Production'라는 것을 상상해내어 이것으로 발라의 경매자 개념을 대체한다. 이 '생산 전담부'란 곧 발라가 완전경쟁 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방정식을 풀어주어 균형가격을 계산해내며, 그 다음에는 이 가격을 사용하여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하게 된다."(59-60)


"폴라니는 국가가 아니라 생산자 결사체들과 소비자 결사체들이 생산과 가격에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모종의 '시장'을 갖추고 있는 사회주의의 '현실적인 경제 학설positive economic doctrine'을 추구했고, '사회주의 이행 경제의 한 유형'을 발전시켰다. 폴라니가 지지했던 것은 케인스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이나 혼합경제가 아니었다. 그가 옹호했던 것은 경쟁적인 시장과 여기에 탈중앙화된 민주적인 여러 노동자들의 제도가 곁들여져 있는 것으로서, 이는 널리 퍼져 있었던 신고전파의 관점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모종의 새로운 신고전파 모델을 창조한 셈이다. 이 시장사회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중앙 국가를 넘어서서 급진적인 경제 및 정치 제도들을 갖춘 사회민주주의에 더욱 적합한 모델로 개발된 것이었다."(64-5)


반면, 미제스는 사회주의 경제란 "사적 소유와 시장가격을 뿌리 뽑고서 그 자리에 중앙계획의 현물교환을 가져다 놓는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그 점에서 노이라트와 같은 견해였다. 미제스가 보기에 노이라트의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 어떤 난점들이 숨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시장, 사적 소유, 시장가격 등이 없다면 경제에서 합리적인 행동의 결정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시장이란 서로를 배제하는 범주들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미제스에 따르자면 사회주의─중앙계획경제로 이해된다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제스와 시장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신고전파 경제학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고 경제학 자체에 대해서도 견해가 달랐다.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이해했던 점에서 미제스는 (오히려) 시장사회주의자들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더 많은 점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68-9)


하이에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완전히 분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 개념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1931년 런던정경대학LSE에 도착한 하이에크는 자유시장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신봉하는 당대의 학생들에 맞서 "1920년대의 미제스, 1902년의 피르손이 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문과 게오르게 할음과 하이에크 그리고 엔리코 바로네가 1908년에 제시했던 사회주의 수리 모델 등을 게재했다. 사회주의를 놓고 벌어졌던 논쟁에서 이렇게 여러 다른 시대에 쓰인 저작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하이에크는 이 저작들을 그 역사적 상황과 논쟁의 맥락으로부터 탈각시켜버렸다. 그는 사회주의를 탈역사화시켜, 그 정의를 오직 국가 소유 및 모든 물적 생산자원의 중앙계획만을 뜻하는 것으로 좁혀버렸다. 하이에크는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와 시장을 날카롭게 구별해버린 미제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73)


193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은 국가의 자기정당성의 기초가 되었고, 군부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병참학적 계획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순수 시장 모델과 중앙계획 사회주의 모델을 자유롭게 오고 갔었던 바, 중앙계획으로 조직되는 군부야말로 신고전파 경제학에 밀접한 연관을 가진 곳이었다."(109) 1951년 애로는 권위주의적 경제계획을 거부하고 "투표와 시장이 최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기능하도록 해줄 여러 제도를 옹호"했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당대의 분위기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 혹은 경제적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제도들"을 논의할 수 있는 통로를 막아버렸다. "서방에서나 동유럽에서나 좀 더 권위주의적인 정치 및 군부 엘리트들은 기존의 위계적 제도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여 그들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협소한 형태의 신고전파 경제학만을 지지했던 것이다."(119)


사회주의 자주 노선을 주창하여 어려움에 처한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와 미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두가 절망적으로 관료적·독점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나아갈 길은 국가의 사멸을 진전시킴으로써 공산주의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고슬라비아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한 연구자는 이 체제를 '자유방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국가의 여러 임무를 산하의 공화국들 그리고 기업 수준으로 내려 보냄으로써 국가의 탈집중화와 해체를 꾀했다. 첫째, 개별 공화국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전력, 광산, 농업, 임업, 경공업, 공공근로 등의 감독 등과 같은 많은 행정 임무를 넘겨받았다. 둘째,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 대신에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들의 통제권을 쥐고 작업장 내에서의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노동자 자주관리worker self-management라고 불린 것이다."(157-8)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는 오스카르 랑게의 이론과 유사하다. "랑게의 모델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직업과 소비 품목을 스스로 선택하며, 이것들의 가격 혹은 임금은 경쟁적 시장에서 결정된다. 생산 활동 혹은 자본에 대해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중앙계획 이사회가 최초의 가격(혹은 이자율)을 임의로 정한다. 랑게에 따르면, 그후에는 경쟁적 시장이 스스로를 교정하면서 과도한 공급 혹은 수요에 대응하여 가격(혹은 이자율)이 변동하게 된다.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다음 두 가지 규칙을 따른다. 첫째, (평균)생산비용을 최소화할 것. 둘째, 가격과 (한계)생산비용을 일치시킬 것. 이 모델은 국가가 자본 및 천연자원을 포함한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점에서도 사회주의이지만, 피고용자들이 자기들 소득에 덧붙여서 자본과 천연자원에서 발생하는 몫의 일부를 사회적 배당금으로(이는 자본주의에서는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다) 수취한다는 점에서도 사회주의이다."(166-7)


헝가리의 당-국가는 "1968년 1월 1일 신경제메커니즘NEM을 도입했다. 이 NEM은 헝가리의 사회주의 실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NEM 하에서는 국가가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갖지만, 소련식 중앙계획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기업에 대한 의무적 생산 목표가 폐지되었다. NEM은 국가의 계획을 오직 국민경제의 주된 목표들을 정하는 것과 또 경제 발전의 주요한 여러 사항들의 비례에 대한 것으로만 제한했다. 경제계획가들은 강제적인 행정 수단 대신 간접적인 금융적 혹은 경제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기업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짜놓은 계획을 실행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랑게의 시장사회주의 모델 그리고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기업들은 정부가 방향을 지휘하는 큰 투자들 이외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고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상정되었던바, 이윤 극대화가 기업을 움직이는 인센티브로 대두되었다."(246-7)


1950년대 초·중반에 "새로운 사회적 운동과 사회적 행위자들이 나타났으며 미국에서는 메카시즘에 대해,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해 반작용이 생겨났다. 여러 집단이 서방 자본주의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CESES(밀라노의 경제 및 사회문제 연구센터)와 같은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어 두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형태들을 토론하면서 이 냉전의 양대 축 내부와 사이와 그 너머에 간극적 공간을 확장했다."(257) "간극적 공간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 강력한 공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262) 이탈리아 공산당을 거부한 "전직 공산당원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탈리아 내부에 이미 존재하던, 소수의 반소련 사회주의 문화와 연계를 맺게 된다. 이탈리아는 파시즘과 냉전 때문에 가로막힌 상이한 여러 형태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창출하려는 오랜 노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264)


1960년대 미국과 여타 지역의 소련학 학자들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공격 이후 "정태적인 전체주의 모델의 단점들을 인정하고 동유럽 블록에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도구들을 찾아 헤맸다."(271) 이념적으로 안전한 소련학을 동원하여 좌파를 무찌르고 우익의 신봉자들을 길러내고자 했던 우익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한때 "냉전 지형의 변동, 현실 사회주의의 변화, 소련학 혁명,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간극적 공간의 이질적 성격 등으로 인해 잠식당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이념적으로 좀더 안정된 시대가 오자 "우익들은 CESES와 같은 간극적 공간들을 서방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냐 끝장나버린 소련 사회주의냐라는 이분법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그 틀 안에 넣어버림으로써 자기들 멋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간극적 공간으로부터 나온 지식이 서방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서방 자본주의를 바꾸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294-5)


"사실상 통화주의자들과 케인스주의자들은 신고전파 경제학 방법을 공유하며, 이 방법은 경쟁적 시장과 중앙계획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여러 비판과 논쟁의 원인은 시장이냐 국가냐 따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1960년대에 걸쳐서 "시카고 신고전파 경제학은 보수 세력들에게 오래도록 꼭 맞게 되는 협소한 버전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더욱 더 발전시킨다. 다른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접근에 반대했다." 프리드먼 등은 신고전파 경제학을 "개개인들이 완전히 합리적이며 시장들이 완전히 경쟁적이라고 가정하는 아주 편리한 허구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프리드먼의 논리에는 "사적 소유권을 법으로 강제하는 강력한 국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의 시카고 학파 전통과 달리 경쟁을 잠식하는 대기업들 사이와 그 내부의 중앙집중화된 권력의 문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323-5)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었다. 1987년에는 사회주의를 쇄신하는 방법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재구조화) 그리고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개혁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전체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적 개혁과 자유, 다원주의적 경제(사유화, 자유 기업, 주식 소유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소유권) 그리고 자유시장경제 등을 도입하는 것을 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는 꼭 자본주의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동유럽에서나 서방에서나 경제학자들 사이에 가장 진보된 사회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것들은 초국가적으로 사회주의경제학에서의 최상의 예라고 여겨졌던 것들이다. 여러 동유럽 사회주의자가 보기에는 드디어 소련도 다른 동유럽 나라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었다."(340)


"1989년 이후의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지형과 선택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마이클 부라보이와 캐서린 버더리가 주장하듯이, 당-국가의 몰락은 '거시구조들macrostructures'을 무너뜨렸고 새로운 규칙들과 한계 내에서 '미세세계들microworlds'과 지역적인 임기응변의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젖혔다."(356) 제프리 색스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시장에 대해 모든 족쇄를 풀어줄 것이냐 아니면 경제에 국가가 개입해야 하느냐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 아니었고, 시장을 단단히 박아 넣을 것이냐 뽑아낼 것이냐를 놓고 싸운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차이점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도들이 권위적인 것이냐 민주적인 것이냐에 있었다."(358-9) "1990년 1월 1일, 폴란드는 동유럽 블록에서 최초로 충격요법을 실행에 옮겼고, 199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가, 1992년에는 에스토니아가, 1993년에는 라트비아가 그 뒤를 따랐다."(360)


"립턴과 색스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포퓰리즘' 혹은 여타 정치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들을 재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들은 국가가 후퇴하면 시장이 출현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제도들을 스스로 창조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렇게 국가와 시장을 마치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언어는, 이러한 경제학자들이 다른 한편으로 주장하는 바 시장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국가와 기업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아주 명쾌한 주장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360-1) 이들의 이행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구사했던 자유주의적인 수사학과 정반대로 강력한 권위주의적인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동유럽 경제학자들이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탈중앙집권화를 요구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들은 포퓰리즘적 저항을 묵살하고 충격요법을 실행하는 일은 오로지 강력한 정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천명한다."(363-4)


"이 기간에는 '이행'이라는 생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의미들을 가지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수십 년 간 '이행'을 옹호해왔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든 국가사회주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든 아니면 국가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체제 내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든 말이다. 그런데 세계은행이 1980년대 말에 이 말을 이해했던 방식은 바로 마지막 의미로서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이행이라는 용어를 오래도록 사용해왔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이 '이행'이라는 말을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지면서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자본주의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모종의 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다시 해석했다." 이렇게 경제적 개념들이 "여러 가지의 이해 방식을 동시에 가지게 된 것은 또한 시장으로의 이행을 이전에 있던 여러 시장개혁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380-1)


"신자유주의란 경쟁적 시장, 더 작고 권위주의적인 국가, 위계적인 기업, 경영진, 소유자들 그리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한 묶음의 사상과 그와 연결된 정책들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세계에서 시장이란 자본주의를 도울 수도 또 사회주의를 도울 수도 있다. 게다가 시장은 사적 소유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소유 구조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비에 따르면, 시장의 이름으로 국가의 종식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유토피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1970년대 초 경제위기와 사회주의의 대안 및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 등에 맞서서 "자본 축적의 조건을 다시 확립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는 목적으로 국가를 변혁하고 동원한다는 정치적인 프로젝트로서의 현실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노동자 소유의 재국유화, 임금 동결, 노동자 대량 해고, 자주관리의 근절, 민주주의의 협소화 등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388-9)


1970년대 보수주의 정치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협소한 버전의 신고전파 경제학은, "사회적 맥락에서 뽑혀져 나온 경제학으로서, 경쟁적 시장 혹은 효과적 중앙계획을 위해 필요한 제도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는 현재의 권력 배분 상태에 존재하는 위계적 제도들과 이 지도자들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경제학이다." 급격하게 뒤바뀐 정치적 지형 위에서, 구엘리트와 신엘리트가 국제 자본주의 기관들과 동맹을 맺자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진정한 시장'과 급진적인 경제민주주의 및 정치민주주의를 창출하려고 했던 시장 이행은 자본주의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변형되어버렸다."(407-8)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민주적 시장사회주의의 여러 모델을 개발하여 1989년 이후의 기간에 이를 실행에 옮기기를 희망했던 경제학자들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승리하고 만 것이었다."(409)


#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1. 사회적 가치나 비용 같은 개인의 경제적 효용 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는 종류의 경제적 계산에 대해 무력하다. 

2. 권력의 문제가 이론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행위자가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적 행위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자유주의 (반양장) -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관찰되는 안정 조건의 하나는 "상위 계급들의 경제적 힘이 제약되면서, 경제적 파이의 훨씬 더 많은 몫을 노동자들이 갖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소득자의 상위 1퍼센트가 갖는 국가 소득의 몫이 전쟁 전 17퍼센트에서 전쟁 직후에는 8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으며 거의 30년 동안 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장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러한 제약이 문제되지 않았다. 파이는 계속 커져갔으므로 그 파이의 안정적인 몫을 챙기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1970년대 성장이 붕괴되어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매우 낮은 배당 및 이윤만을 받게 되는 생활이 일반화되자, 세계 곳곳의 상위 계급들은 위협을 느꼈다." 자산 가치(주식, 부동산, 저축) 하락으로, 20세기 전반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상위 1퍼센트의 통제 권력은 급속히 약화됐고, "상위 계급들은 정치적·경제적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해야만 했다."(31-3)


"1979년 10월 카터가 대통령이었을 때 연방준비은행장이었던 볼커는 미국 통화정책에 엄중한 변화를 추진했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뉴딜 원칙들에 대한 집착─이는 기본 목표로서 완전고용과 결부된 케인스적 종합재정통화정책을 의미함─은 폐기되고, 고용에 대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든지 간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이 선호되었다. 1970년대 두자릿수의 인플레이션 파도가 일었던 시기에 마이너스였던 실질이자율은 연방준비은행의 지시에 의해 플러스로 변했다. 명목 이자율은 밤새 인상되어, 그 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1981년 7월에는 20퍼센트에 가깝도록 뛰어올랐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공장을 텅 비게 하고 노조를 와해시켰으며 채무국들을 파산의 고비로 몰고 갔던 깊고 오래된 경기후퇴와 연이은 긴 구조조정기"가 시작되었다."(41)


볼커의 통화주의 정책을 계승한 레이건은 다음 단계로 노동권력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다. 1981년 항공관제사 노조PATCO의 파업 분쇄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PATCO는 일반적 노조 이상의 것이었다. 숙련된 전문직 협회 성격을 가진 백인 노조였고, 따라서 노동계급이라기보다 중산층 조합주의의 징표였다. (PATCO의 좌절이) 국경을 가로질러 노동 조건에 미친 효과는 극적이었다. 이 점은 1980년대 빈곤선과 동등한 수준이었던 연방 최저임금이 1990년에는 그 수준의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파악될 수 있다. 그 이후 실질임금 수준의 지속적 감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43) 노동 권력을 제압하고 나자, 석유파동으로 쌓인 오일머니의 유입과 미국이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벌인 은밀한 폭력과 체제 길들이기 속에서 뉴욕 투자은행들을 통해 재순환된 유휴 기금들은 세계 전역에 파급되었다.


"1973년 이전에 미국의 해외투자 대부분은 주로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에서 원료 자원(석유, 광물, 농업 생산물)의 활용이나 또는 특정한 시장(원거리 통신, 자동차 등)의 육성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었다. 뉴욕의 투자은행들은 언제나 국제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했지만, 1973년 이후에는 (외국 정부들에 대한 자본 대출에 좀 더 초점을 두기는 했지만) 그런 성향을 훨씬 더 많이 보였다. 이 점은 국제 신용 및 금융 시장의 자유화를 필요로 했으며, 미국 정부는 1970년대 동안 이 전략을 세계적으로 촉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출에 목말랐던 개발도상국들은 뉴욕 은행가들에게 유리한 이자율인데도 많이 빌리도록 장려되었다. 그러나 채무는 미국 달러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국 이자율이 급등할 때는 물론 아주 조금 인상되는 경우에도 취약한 국가들은 쉽게 채무불이행으로 내몰렸다. 이는 뉴욕 투자은행들을 심각한 손실에 노출시키는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47)


"자유주의적 관행은 잘못된 투자 결정에 의해 발생하는 손실을 대출자가 떠안게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관행은 현지 주민들의 생계나 복지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용자가 부채 지불의 비용을 떠맡도록 국가나 국제적 권력들에 의해 강제된다."(48) 전세계적 교환 관계를 금융화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의 다른 모든 영역들과 국가 장치는 물론, 마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금융의 장악을 심화시켰다. 이는 또한 세계적 교환관계에 가속적인 변동을 유발했다. 의심할 바 없이 생산으로부터 금융의 세계로 권력 이행이 있었다. 이제 제조 능력에서의 이익이 필수적으로 1인당 소득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게 된 반면, 금융 서비스에의 집중은 분명 소득의 증가를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금융 제도의 지원과 금융시스템의 보전은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집합체(G7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로 구성된 집단)의 핵심적 관심사항이 되었다."(52)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국가 폭력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주요 수단이었다면 "1979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혁명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뤄져야만 했다. 이처럼 중대한 이행이 가능하려면, 선거에서 이길 정도로 충분히 큰 범위에 걸친 정치적 동의가 사전에 구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공동으로 보유되는 지각'으로 정의하는) '상식(common sense)'이 전형적으로 동의의 기반을 이룬다." 당대 이슈를 비판적으로 고려하면서 구축되는 '양식(good sense)'과 달리 상식은 "문화적 편견하에서 실제 문제를 중대하게 오도하고, 모호하게 하며, 가장할 수도 있다. (신이나 국가에 대한 믿음, 또는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관한 견해와 같은) 문화적·전통적 가치와 (공산주의자, 이민자, 이방인, 또는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현실을 숨기기 위해 동원될 수 있다."(59-60) '개인적 자유'라는 명분은 대중 기반에 호소함으로써 계급 권력을 회복하려는 본래 의도를 감추는 데 성공했다.


"개인의 자유가 신성불가침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정치적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습곡으로 편입되기 쉽다. 가령 1968년의 세계적인 정치적 격변은 좀 더 위대한 개인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소망에 의해 크게 굴절되었다." 개인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수사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자유지상주의,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기중심적 소비자주의로 분할하는 힘을 갖고 있다."(61-2) 신자유주의화는 "차별화된 소비주의와 개인적 자유지상주의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시장 기반적 대중문화의 구축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요청했다. 신자유주의화는 (새로운) 문화적 충격, 즉 오랫동안 날개 밑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커져서 문화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지배적이게 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당히 잘 병존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1980년대에 기업과 계급 엘리트가 기교를 부리고자 했던 도전이었다."(63)


"노조가 강했던 북동부 및 중서부 주들로부터 노조가 없고 '일할 권리'가 강조되었던 남부 주들─멕시코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지 않았다면─로 산업 활동이 이전하는 것은 일반적 관행이 되었다." 아울러 "집단행동을 와해하기 위해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에게 제공될 수 있는 수많은 '당근'도 있었다. 노조의 엄격한 규율과 관료주의적 구조는 노조를 이러한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노동시장에서 "더 큰 행동의 자유(freedom)와 자율(liberty)을 선사하겠다는 것은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덕목으로 여겨졌고, 이는 여기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상식'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적극적 잠재력이 유연적 축적의 매우 착취적인 체계(시공간 모두에서의 노동 할당 유연성 증가로 인해 생겨난 혜택은 모두 자본에 돌아갔다)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실질임금이 정체 또는 하락하고 수혜가 감소된 현상을 설명하는 열쇠이다."(75)


영국은 "도덕적 다수로 동원될 수 있는 기독교 우파" 같은 세력이 없었기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구축했다. 특히 "세계지향적 금융자본의 권력 성장이라는 점에서 런던 시의 위상을 보호 및 고양"했다. "(이자율 조작을 통한) 금융자본의 보호는 국내 제조업 자본의 요구와 적지 않게 갈등을 일으켰으며 (자본가 계급 내 구조적 분화를 촉진하면서) 국내시장의 팽창을 억제했다." 금융중심지로서 런던 시는 "케인스적 정책보다는 통화주의적 정책을 오랫동안 선호했으며, 이에 따라 착근된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형성했다."(77-8) 대처는 "주택 소유, 사유재산, 개인주의, 그리고 기업적 기회의 해방을 즐기는 중간계급의 배양을 통해 동의 연합을 형성했다. 어려움 속에서 약화되는 노동계급의 결속력과 탈산업화를 통해 급격히 변화하는 일자리 구조와 더불어, 중간계급의 가치는 한때 확고한 노동계급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면서 좀 더 널리 전파되었다."(84)


# 신자유주의 국가 이론의 허점

1. (경쟁을 저해하는) 독점 권력의 처리 혹은 정반대로 전력, 수도, 가스처럼 국가 개입이 불가피한 자연 독점의 처리 문제

2. 시장 실패(비용의 외부화) 혹은 사회 관계와 제도를 훼손하는 기술혁신의 처리 문제

3. 매력적이지만 소외를 낳는 소유적 개인주의와 의미 있는 집단 생활을 추구하는 소망 간의 모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이다.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치는 개인적 권리와 헌정적 자유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만주주의는 사치스러우며, 단지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강력한 중간계급의 등장과 결합된 상대적 풍요의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90) "완전한 정보와 경쟁을 가능케 하는 평등한 행위의 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가정은 순수하게 유토피아적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부의 집중과 이에 따른 계급 권력의 회복을 유도하는 과정을 감추려는 신중한 연막으로 보인다."(92) 국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진압하기 위해 설득 및 선전, 또는 필요하다면 적나라한 폭력과 경찰력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유주의적 (확장하면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권위주의에 의존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대중의 자유는 소수의 자유를 위해 제한된다."(94)


신자유주의 국가는 "전형적으로 탈규제를 통해 금융 제도들의 영향을 확산시키지만,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금융 제도의 통합성과 지급 능력을 보장한다. 이러한 집착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국가 정책의 기반을 (신자유주의 이론의 어떤 변형 속에서 정당화된) 통화주의─화폐의 통합성과 건전성은 이 정책의 핵심적 부분이다─에 의존하는 데 있다."(97) 위기가 닥쳤을 때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필요를 우선하고 채무국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관행은 국제적 맥락에서 바라봤을 때, "국제 은행가들에게 보상하려고 빈곤한 제3세계 국민들로부터 잉여를 추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 메커니즘을 통한 공물(tribute)의 추출은 "계급 권력─특히 세계의 주요 금융 중심지에 있는─의 회복에 매우 도움이 되며, 또한 이의 작동은 항상 구조조정의 위기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98)


"왜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를 통한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되는 데 그리도 성공적이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변동이 가속화되고, 어떤 영토들에서는 다른 영토들의 손실을 전제로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예로, 1980년대가 주로 일본, 아시아의 '호랑이', 그리고 서독의 시기였고, 1990년대는 미국과 영국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이처럼 세계 어딘가에는 '성공'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화가 성장을 촉진하고 복리를 증진하는 데 일반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둘째, 이론이라기보다 실제 과정으로서 신자유주의화는 상위 계급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이는 (미국이나 부분적으로 영국에서처럼) 지배 엘리트들에게 계급 권력을 회복시키거나, (중국, 인도, 러시아 또는 다른 국가들에서처럼) 자본가계급 형성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다."(191)


신자유주의화는 "상품화化의 선線을 의심할 바 없이 후퇴시켰고, 법적 계약의 범위를 크게 확대시켰다. 이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 이론의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짧은 수명과 단기 계약을 찬양한다."(202) 신자유주의화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도 상품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노동·여성 및 토착민 집단이 사회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환시켰다." 강도와 범죄 카르텔, 마약 밀매망, 소규모 마피아와 슬럼가 두목들에서부터 공동체, 민중, NGO에 이르기까지 "이 조직들은 국가권력, 정당, 그리고 다른 제도적 형태들이 활발하게 분해되거나 집단적 노력과 사회적 연대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소진하게 됨에 따라 남겨진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대안적 사회형태이다. 종교로의 현저한 전환은 이러한 관점에서 흥미롭다(파룬궁)." 미국에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기독교의 확산은 "고용 불안정의 증대, 다른 형태의 사회적 결속의 상실,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공허함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207-8)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은 산업 및 농업에서 임금노동의 확대를 통한 축적과는 상이한 일단의 관행들을 동반한다. 1950년대 및 1960년대 자본축적 과정을 지배했던 후자의 축적은 착근된 자유주의를 창출한 (노조와 노동계급 정당에 착근된 것과 같은) 저항문화를 유발했다. 다른 한편 탈취는 (여기에서는 민영화, 저기에서는 환경 퇴락, 또 다른 곳에서는 부채에 의한 금융 위기가 일어나는 식으로) 파편적이며 특정적이다. 보편적 원칙들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특이성과 특정성 모두에 반대하기는 어렵다."(215) 신자유주의 아래 살아가는 것은 "자본축적에 필요한 일단의 권리들을 수용하거나 준수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적 소유와 이윤율에 대한 개인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그리고 법인들은 법 앞에서 개인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상기하라)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개념화를 압도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218)


"1935년 연두교서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의 경제적·사회적 문제의 근원에는 지나친 시장 자유가 있었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과도하게 이윤을 추구해 부당한 개인적 힘을 키워도 된다는 부의 획득 개념을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궁핍한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다.(221) 마르크스 역시 허기진 배는 자유를 전도하지 못한다는 굉장히 급진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는 "필요성과 일상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야 자유의 영역이 시작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실제 물질적 생산 영역 너머에 놓여 있다"라고 덧붙인다.(223) 저자가 신자유주의적 권리 체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적·생태적·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지 무한한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