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3월
평점 :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신고전파 경제학의 창시자들은 전체 경제를 다룬 수리 모델들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서 자유로운 경쟁적 시장은 생산, 분배, 소비에 있어 최적의 결과들을 낳게 되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1890년대가 되면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또한 경쟁적 시장경제가 중앙계획경제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신고전파 이론과 분석 도구를 개발하기 위해 "중앙계획당국과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실현되는 모종의 '사회주의국가' 모델들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순수한 시장경제와 중앙계획 사회주의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중심에 나란히 존재하게 된다. 물론 이는 경제학자 개인의 정치적 입장과는 무관한 일이다."(29-30)
"둘째,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에서 사회주의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동구권과 자본주의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몇십 년에 걸쳐 사회주의와 시장에 대한 대화를 진행할 수가 있었다." 경제학계의 여러 지도적 인사들이 참여한 이러한 "초국가적 대화는 신고전파 경제학에 근본적 중요성을 갖는 여러 기여를 가져왔고, 이렇게 해서 발전하게 된 신고전파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모습을 만들어나가게 된다. 셋째,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초국가적으로 벌어졌던, 경쟁적 시장을 지지하는 사회주의 논의를 자신의 일부로 통합했으나,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외침은 들어내버리고 그 자리에 위계적 제도들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주장을 가져다 놓았다."(33-5) 한마디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자유롭고 아무 구속이 없는 경쟁적 시장을 옹호한다는 점, 즉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말을 빌자면 그 '시장 근본주의'에 있다."(24)
영국의 경제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부와 소득의 분배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는 정치경제학으로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가 생산되는 조건과 법칙들은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을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부의 분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이는 오로지 인간 세상의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의 문제다." 무수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퍼붓는 비난에 대응하여 여러 경제학자 또한 그들 직종이 전통적으로 보여왔던 자유방임에 대한 지지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중에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지적인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 으뜸가는 이유는 마르크스가 노동가치론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고전파 경제학과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이론은 물론 정체성까지도 구축했다."(53) 신고전파 이론의 핵심은 경제적 법칙의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이었다.
발라가 개발한 "일반 균형 모델은 전체 경제를 일련의 방정식들로 묘사하며, 이를 통해 이 경제가 어떻게 수요와 공급의 최적의 균형 지점인 균형 상태에 도달하며 또 거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는 경제에서는 기업들이나 개인들이나 모두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취하는 균형가격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 과정을 발라는 '탐색tatonnement'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분석에서 참으로 흥미롭고도 중요한 부분은, 발라가 이 과정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모종의 경매자를 상상했다는 점이다. 이 경매자가 여러 상품의 가격을 공표하고 또 그 가격을 변화시켜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에 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발라의 일반 균형 모델에서 기업들은 한계비용에 근거하여 시장에서 경쟁하고 균형가격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의 만족을 극대화시키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최소화한다."(55)
발라가 보기에 "사회주의란 자유경쟁과 사회 정의가 실현되는 데 필요한 여러 제도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주의가 성립하면 토지와 천연자원에 대한 국가 소유가 나타날 것이며 소득세는 폐지될 것이다. 그 다음엔 국가가 토지와 천연자원의 소유자로서 이를 무수한 개인 및 집단들에 임대해줄 것이며, 이로써 여러 독점체가 제거되고 자유경쟁이 가능해진다. 토지와 천연자원의 임대를 통해 국가는 충분한 수입을 얻게 되므로 소득세는 불필요하며, 노동자들은 자신의 저축을 투자로 돌리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로써 '계속해서 노동자이기는 하겠으나 그와 동시에 소유자 혹은 자본가'가 될 수 있다. 발라에게 "완전경쟁, 사회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수학 등은 단순히 서로를 보완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없다면 다른 것도 있을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관계에 있었다."(56)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주의는 자유경쟁 경제를 창출하는 도구적 개념인 셈이다.
파레토는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를 사용하여 "신고전파 경제학을 좀더 일반적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파레토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는 모든 생산을 안배하며, 생산수단의 집단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 안의 모든 개개인에게 안녕─혹은 효용─을 극대화할 것을 추구한다다. 이렇게 사회적 효용을 극대화해주는, 따라서 파레토 최적이라 할 수 있는 안배 상태로부터 무슨 변동이라도 있을 경우, 그 덕분에 누군가는 더 잘 살게 될지 모르지만 또 동시에 다른 누군가는 더 못살게 될 것이다. 파레토는 '생산 전담부Ministry of Production'라는 것을 상상해내어 이것으로 발라의 경매자 개념을 대체한다. 이 '생산 전담부'란 곧 발라가 완전경쟁 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여러 방정식을 풀어주어 균형가격을 계산해내며, 그 다음에는 이 가격을 사용하여 사회적 후생을 극대화하게 된다."(59-60)
"폴라니는 국가가 아니라 생산자 결사체들과 소비자 결사체들이 생산과 가격에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모종의 '시장'을 갖추고 있는 사회주의의 '현실적인 경제 학설positive economic doctrine'을 추구했고, '사회주의 이행 경제의 한 유형'을 발전시켰다. 폴라니가 지지했던 것은 케인스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이나 혼합경제가 아니었다. 그가 옹호했던 것은 경쟁적인 시장과 여기에 탈중앙화된 민주적인 여러 노동자들의 제도가 곁들여져 있는 것으로서, 이는 널리 퍼져 있었던 신고전파의 관점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모종의 새로운 신고전파 모델을 창조한 셈이다. 이 시장사회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중앙 국가를 넘어서서 급진적인 경제 및 정치 제도들을 갖춘 사회민주주의에 더욱 적합한 모델로 개발된 것이었다."(64-5)
반면, 미제스는 사회주의 경제란 "사적 소유와 시장가격을 뿌리 뽑고서 그 자리에 중앙계획의 현물교환을 가져다 놓는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그 점에서 노이라트와 같은 견해였다. 미제스가 보기에 노이라트의 문제는 그러한 과정에 어떤 난점들이 숨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시장, 사적 소유, 시장가격 등이 없다면 경제에서 합리적인 행동의 결정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와 시장이란 서로를 배제하는 범주들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미제스에 따르자면 사회주의─중앙계획경제로 이해된다면─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제스와 시장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신고전파 경제학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고 경제학 자체에 대해서도 견해가 달랐다. 마르크스주의자들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이해했던 점에서 미제스는 (오히려) 시장사회주의자들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더 많은 점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68-9)
하이에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완전히 분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 개념을 정립한 장본인이다. 1931년 런던정경대학LSE에 도착한 하이에크는 자유시장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신봉하는 당대의 학생들에 맞서 "1920년대의 미제스, 1902년의 피르손이 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문과 게오르게 할음과 하이에크 그리고 엔리코 바로네가 1908년에 제시했던 사회주의 수리 모델 등을 게재했다. 사회주의를 놓고 벌어졌던 논쟁에서 이렇게 여러 다른 시대에 쓰인 저작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하이에크는 이 저작들을 그 역사적 상황과 논쟁의 맥락으로부터 탈각시켜버렸다. 그는 사회주의를 탈역사화시켜, 그 정의를 오직 국가 소유 및 모든 물적 생산자원의 중앙계획만을 뜻하는 것으로 좁혀버렸다. 하이에크는 이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와 시장을 날카롭게 구별해버린 미제스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다."(73)
193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은 국가의 자기정당성의 기초가 되었고, 군부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병참학적 계획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순수 시장 모델과 중앙계획 사회주의 모델을 자유롭게 오고 갔었던 바, 중앙계획으로 조직되는 군부야말로 신고전파 경제학에 밀접한 연관을 가진 곳이었다."(109) 1951년 애로는 권위주의적 경제계획을 거부하고 "투표와 시장이 최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기능하도록 해줄 여러 제도를 옹호"했지만,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당대의 분위기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 혹은 경제적 민주주의 등과 같은 제도들"을 논의할 수 있는 통로를 막아버렸다. "서방에서나 동유럽에서나 좀 더 권위주의적인 정치 및 군부 엘리트들은 기존의 위계적 제도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여 그들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협소한 형태의 신고전파 경제학만을 지지했던 것이다."(119)
사회주의 자주 노선을 주창하여 어려움에 처한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와 미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두가 절망적으로 관료적·독점적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나아갈 길은 국가의 사멸을 진전시킴으로써 공산주의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유고슬라비아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한 연구자는 이 체제를 '자유방임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국가의 여러 임무를 산하의 공화국들 그리고 기업 수준으로 내려 보냄으로써 국가의 탈집중화와 해체를 꾀했다. 첫째, 개별 공화국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전력, 광산, 농업, 임업, 경공업, 공공근로 등의 감독 등과 같은 많은 행정 임무를 넘겨받았다. 둘째, 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 대신에 노동자 평의회가 공장들의 통제권을 쥐고 작업장 내에서의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노동자 자주관리worker self-management라고 불린 것이다."(157-8)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는 오스카르 랑게의 이론과 유사하다. "랑게의 모델에서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직업과 소비 품목을 스스로 선택하며, 이것들의 가격 혹은 임금은 경쟁적 시장에서 결정된다. 생산 활동 혹은 자본에 대해서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중앙계획 이사회가 최초의 가격(혹은 이자율)을 임의로 정한다. 랑게에 따르면, 그후에는 경쟁적 시장이 스스로를 교정하면서 과도한 공급 혹은 수요에 대응하여 가격(혹은 이자율)이 변동하게 된다.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다음 두 가지 규칙을 따른다. 첫째, (평균)생산비용을 최소화할 것. 둘째, 가격과 (한계)생산비용을 일치시킬 것. 이 모델은 국가가 자본 및 천연자원을 포함한 생산수단을 소유한다는 점에서도 사회주의이지만, 피고용자들이 자기들 소득에 덧붙여서 자본과 천연자원에서 발생하는 몫의 일부를 사회적 배당금으로(이는 자본주의에서는 주주들에게 돌아가는 몫이다) 수취한다는 점에서도 사회주의이다."(166-7)
헝가리의 당-국가는 "1968년 1월 1일 신경제메커니즘NEM을 도입했다. 이 NEM은 헝가리의 사회주의 실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NEM 하에서는 국가가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를 갖지만, 소련식 중앙계획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기업에 대한 의무적 생산 목표가 폐지되었다. NEM은 국가의 계획을 오직 국민경제의 주된 목표들을 정하는 것과 또 경제 발전의 주요한 여러 사항들의 비례에 대한 것으로만 제한했다. 경제계획가들은 강제적인 행정 수단 대신 간접적인 금융적 혹은 경제적 수단들을 사용하여 기업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짜놓은 계획을 실행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랑게의 시장사회주의 모델 그리고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기업들은 정부가 방향을 지휘하는 큰 투자들 이외에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고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상정되었던바, 이윤 극대화가 기업을 움직이는 인센티브로 대두되었다."(246-7)
1950년대 초·중반에 "새로운 사회적 운동과 사회적 행위자들이 나타났으며 미국에서는 메카시즘에 대해,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해 반작용이 생겨났다. 여러 집단이 서방 자본주의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고 CESES(밀라노의 경제 및 사회문제 연구센터)와 같은 새로운 기관들을 만들어 두 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형태들을 토론하면서 이 냉전의 양대 축 내부와 사이와 그 너머에 간극적 공간을 확장했다."(257) "간극적 공간이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탈리아에 강력한 공산당이 있었기 때문이다."(262) 이탈리아 공산당을 거부한 "전직 공산당원들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탈리아 내부에 이미 존재하던, 소수의 반소련 사회주의 문화와 연계를 맺게 된다. 이탈리아는 파시즘과 냉전 때문에 가로막힌 상이한 여러 형태의 민주적 사회주의를 창출하려는 오랜 노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264)
1960년대 미국과 여타 지역의 소련학 학자들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공격 이후 "정태적인 전체주의 모델의 단점들을 인정하고 동유럽 블록에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적 도구들을 찾아 헤맸다."(271) 이념적으로 안전한 소련학을 동원하여 좌파를 무찌르고 우익의 신봉자들을 길러내고자 했던 우익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한때 "냉전 지형의 변동, 현실 사회주의의 변화, 소련학 혁명,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간극적 공간의 이질적 성격 등으로 인해 잠식당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이념적으로 좀더 안정된 시대가 오자 "우익들은 CESES와 같은 간극적 공간들을 서방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냐 끝장나버린 소련 사회주의냐라는 이분법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그 틀 안에 넣어버림으로써 자기들 멋대로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간극적 공간으로부터 나온 지식이 서방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핵심을 유지하면서도 서방 자본주의를 바꾸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294-5)
"사실상 통화주의자들과 케인스주의자들은 신고전파 경제학 방법을 공유하며, 이 방법은 경쟁적 시장과 중앙계획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여러 비판과 논쟁의 원인은 시장이냐 국가냐 따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1960년대에 걸쳐서 "시카고 신고전파 경제학은 보수 세력들에게 오래도록 꼭 맞게 되는 협소한 버전의 신고전파 경제학을 더욱 더 발전시킨다. 다른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접근에 반대했다." 프리드먼 등은 신고전파 경제학을 "개개인들이 완전히 합리적이며 시장들이 완전히 경쟁적이라고 가정하는 아주 편리한 허구로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프리드먼의 논리에는 "사적 소유권을 법으로 강제하는 강력한 국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의 시카고 학파 전통과 달리 경쟁을 잠식하는 대기업들 사이와 그 내부의 중앙집중화된 권력의 문제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323-5)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의 총서기가 되었다. 1987년에는 사회주의를 쇄신하는 방법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재구조화) 그리고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 개혁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페레스트로이카는 전체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적 개혁과 자유, 다원주의적 경제(사유화, 자유 기업, 주식 소유를 포함한 여러 형태의 소유권) 그리고 자유시장경제 등을 도입하는 것을 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는 꼭 자본주의처럼 들리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동유럽에서나 서방에서나 경제학자들 사이에 가장 진보된 사회주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런 것들은 초국가적으로 사회주의경제학에서의 최상의 예라고 여겨졌던 것들이다. 여러 동유럽 사회주의자가 보기에는 드디어 소련도 다른 동유럽 나라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었다."(340)
"1989년 이후의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지형과 선택지가 근본적으로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마이클 부라보이와 캐서린 버더리가 주장하듯이, 당-국가의 몰락은 '거시구조들macrostructures'을 무너뜨렸고 새로운 규칙들과 한계 내에서 '미세세계들microworlds'과 지역적인 임기응변의 변화를 위한 공간을 열어젖혔다."(356) 제프리 색스와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시장에 대해 모든 족쇄를 풀어줄 것이냐 아니면 경제에 국가가 개입해야 하느냐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 아니었고, 시장을 단단히 박아 넣을 것이냐 뽑아낼 것이냐를 놓고 싸운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차이점은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도들이 권위적인 것이냐 민주적인 것이냐에 있었다."(358-9) "1990년 1월 1일, 폴란드는 동유럽 블록에서 최초로 충격요법을 실행에 옮겼고, 1991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가, 1992년에는 에스토니아가, 1993년에는 라트비아가 그 뒤를 따랐다."(360)
"립턴과 색스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포퓰리즘' 혹은 여타 정치적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책들을 재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들은 국가가 후퇴하면 시장이 출현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제도들을 스스로 창조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렇게 국가와 시장을 마치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언어는, 이러한 경제학자들이 다른 한편으로 주장하는 바 시장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국가와 기업 제도들이 필요하다는 아주 명쾌한 주장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360-1) 이들의 이행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구사했던 자유주의적인 수사학과 정반대로 강력한 권위주의적인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동유럽 경제학자들이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고 탈중앙집권화를 요구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들은 포퓰리즘적 저항을 묵살하고 충격요법을 실행하는 일은 오로지 강력한 정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천명한다."(363-4)
"이 기간에는 '이행'이라는 생각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의미들을 가지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수십 년 간 '이행'을 옹호해왔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든 국가사회주의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든 아니면 국가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체제 내 시장경제로의 이행이든 말이다. 그런데 세계은행이 1980년대 말에 이 말을 이해했던 방식은 바로 마지막 의미로서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이행이라는 용어를 오래도록 사용해왔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이제 이 '이행'이라는 말을 모든 종류의 사회주의로부터 멀어지면서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자본주의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모종의 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다시 해석했다." 이렇게 경제적 개념들이 "여러 가지의 이해 방식을 동시에 가지게 된 것은 또한 시장으로의 이행을 이전에 있던 여러 시장개혁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380-1)
"신자유주의란 경쟁적 시장, 더 작고 권위주의적인 국가, 위계적인 기업, 경영진, 소유자들 그리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한 묶음의 사상과 그와 연결된 정책들이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세계에서 시장이란 자본주의를 도울 수도 또 사회주의를 도울 수도 있다. 게다가 시장은 사적 소유와 동일시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소유 구조를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하비에 따르면, 시장의 이름으로 국가의 종식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유토피아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1970년대 초 경제위기와 사회주의의 대안 및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 등에 맞서서 "자본 축적의 조건을 다시 확립하고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회복"하는 목적으로 국가를 변혁하고 동원한다는 정치적인 프로젝트로서의 현실을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노동자 소유의 재국유화, 임금 동결, 노동자 대량 해고, 자주관리의 근절, 민주주의의 협소화 등과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388-9)
1970년대 보수주의 정치가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협소한 버전의 신고전파 경제학은, "사회적 맥락에서 뽑혀져 나온 경제학으로서, 경쟁적 시장 혹은 효과적 중앙계획을 위해 필요한 제도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는 현재의 권력 배분 상태에 존재하는 위계적 제도들과 이 지도자들의 권력을 유지해주는 경제학이다." 급격하게 뒤바뀐 정치적 지형 위에서, 구엘리트와 신엘리트가 국제 자본주의 기관들과 동맹을 맺자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진정한 시장'과 급진적인 경제민주주의 및 정치민주주의를 창출하려고 했던 시장 이행은 자본주의 그리고 대의제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변형되어버렸다."(407-8) 신자유주의의 승리는 "민주적 시장사회주의의 여러 모델을 개발하여 1989년 이후의 기간에 이를 실행에 옮기기를 희망했던 경제학자들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가 승리하고 만 것이었다."(409)
#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
1. 사회적 가치나 비용 같은 개인의 경제적 효용 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는 종류의 경제적 계산에 대해 무력하다.
2. 권력의 문제가 이론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우리는 순수한 경제적 행위자가 아니라 포괄적인 사회적 행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