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반양장) -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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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관찰되는 안정 조건의 하나는 "상위 계급들의 경제적 힘이 제약되면서, 경제적 파이의 훨씬 더 많은 몫을 노동자들이 갖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소득자의 상위 1퍼센트가 갖는 국가 소득의 몫이 전쟁 전 17퍼센트에서 전쟁 직후에는 8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으며 거의 30년 동안 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성장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러한 제약이 문제되지 않았다. 파이는 계속 커져갔으므로 그 파이의 안정적인 몫을 챙기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1970년대 성장이 붕괴되어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매우 낮은 배당 및 이윤만을 받게 되는 생활이 일반화되자, 세계 곳곳의 상위 계급들은 위협을 느꼈다." 자산 가치(주식, 부동산, 저축) 하락으로, 20세기 전반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상위 1퍼센트의 통제 권력은 급속히 약화됐고, "상위 계급들은 정치적·경제적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해야만 했다."(31-3)


"1979년 10월 카터가 대통령이었을 때 연방준비은행장이었던 볼커는 미국 통화정책에 엄중한 변화를 추진했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국가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뉴딜 원칙들에 대한 집착─이는 기본 목표로서 완전고용과 결부된 케인스적 종합재정통화정책을 의미함─은 폐기되고, 고용에 대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든지 간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이 선호되었다. 1970년대 두자릿수의 인플레이션 파도가 일었던 시기에 마이너스였던 실질이자율은 연방준비은행의 지시에 의해 플러스로 변했다. 명목 이자율은 밤새 인상되어, 그 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1981년 7월에는 20퍼센트에 가깝도록 뛰어올랐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공장을 텅 비게 하고 노조를 와해시켰으며 채무국들을 파산의 고비로 몰고 갔던 깊고 오래된 경기후퇴와 연이은 긴 구조조정기"가 시작되었다."(41)


볼커의 통화주의 정책을 계승한 레이건은 다음 단계로 노동권력에 대한 전면 공격에 나섰다. 1981년 항공관제사 노조PATCO의 파업 분쇄는 결정적인 분기점이었다. "PATCO는 일반적 노조 이상의 것이었다. 숙련된 전문직 협회 성격을 가진 백인 노조였고, 따라서 노동계급이라기보다 중산층 조합주의의 징표였다. (PATCO의 좌절이) 국경을 가로질러 노동 조건에 미친 효과는 극적이었다. 이 점은 1980년대 빈곤선과 동등한 수준이었던 연방 최저임금이 1990년에는 그 수준의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파악될 수 있다. 그 이후 실질임금 수준의 지속적 감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43) 노동 권력을 제압하고 나자, 석유파동으로 쌓인 오일머니의 유입과 미국이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벌인 은밀한 폭력과 체제 길들이기 속에서 뉴욕 투자은행들을 통해 재순환된 유휴 기금들은 세계 전역에 파급되었다.


"1973년 이전에 미국의 해외투자 대부분은 주로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에서 원료 자원(석유, 광물, 농업 생산물)의 활용이나 또는 특정한 시장(원거리 통신, 자동차 등)의 육성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었다. 뉴욕의 투자은행들은 언제나 국제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했지만, 1973년 이후에는 (외국 정부들에 대한 자본 대출에 좀 더 초점을 두기는 했지만) 그런 성향을 훨씬 더 많이 보였다. 이 점은 국제 신용 및 금융 시장의 자유화를 필요로 했으며, 미국 정부는 1970년대 동안 이 전략을 세계적으로 촉진하고 지원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출에 목말랐던 개발도상국들은 뉴욕 은행가들에게 유리한 이자율인데도 많이 빌리도록 장려되었다. 그러나 채무는 미국 달러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미국 이자율이 급등할 때는 물론 아주 조금 인상되는 경우에도 취약한 국가들은 쉽게 채무불이행으로 내몰렸다. 이는 뉴욕 투자은행들을 심각한 손실에 노출시키는 위험 요소이기도 했다."(47)


"자유주의적 관행은 잘못된 투자 결정에 의해 발생하는 손실을 대출자가 떠안게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관행은 현지 주민들의 생계나 복지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용자가 부채 지불의 비용을 떠맡도록 국가나 국제적 권력들에 의해 강제된다."(48) 전세계적 교환 관계를 금융화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의 다른 모든 영역들과 국가 장치는 물론, 마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금융의 장악을 심화시켰다. 이는 또한 세계적 교환관계에 가속적인 변동을 유발했다. 의심할 바 없이 생산으로부터 금융의 세계로 권력 이행이 있었다. 이제 제조 능력에서의 이익이 필수적으로 1인당 소득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게 된 반면, 금융 서비스에의 집중은 분명 소득의 증가를 의미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금융 제도의 지원과 금융시스템의 보전은 신자유주의 국가들의 집합체(G7처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로 구성된 집단)의 핵심적 관심사항이 되었다."(52)


칠레나 아르헨티나에서 국가 폭력이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주요 수단이었다면 "1979년 이후 대처와 레이건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혁명은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뤄져야만 했다. 이처럼 중대한 이행이 가능하려면, 선거에서 이길 정도로 충분히 큰 범위에 걸친 정치적 동의가 사전에 구축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가 ('공동으로 보유되는 지각'으로 정의하는) '상식(common sense)'이 전형적으로 동의의 기반을 이룬다." 당대 이슈를 비판적으로 고려하면서 구축되는 '양식(good sense)'과 달리 상식은 "문화적 편견하에서 실제 문제를 중대하게 오도하고, 모호하게 하며, 가장할 수도 있다. (신이나 국가에 대한 믿음, 또는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관한 견해와 같은) 문화적·전통적 가치와 (공산주의자, 이민자, 이방인, 또는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현실을 숨기기 위해 동원될 수 있다."(59-60) '개인적 자유'라는 명분은 대중 기반에 호소함으로써 계급 권력을 회복하려는 본래 의도를 감추는 데 성공했다.


"개인의 자유가 신성불가침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정치적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습곡으로 편입되기 쉽다. 가령 1968년의 세계적인 정치적 격변은 좀 더 위대한 개인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소망에 의해 크게 굴절되었다." 개인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수사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자유지상주의, 정체성의 정치, 다문화주의, 그리고 자기중심적 소비자주의로 분할하는 힘을 갖고 있다."(61-2) 신자유주의화는 "차별화된 소비주의와 개인적 자유지상주의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시장 기반적 대중문화의 구축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요청했다. 신자유주의화는 (새로운) 문화적 충격, 즉 오랫동안 날개 밑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커져서 문화적으로나 지성적으로 지배적이게 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당히 잘 병존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1980년대에 기업과 계급 엘리트가 기교를 부리고자 했던 도전이었다."(63)


"노조가 강했던 북동부 및 중서부 주들로부터 노조가 없고 '일할 권리'가 강조되었던 남부 주들─멕시코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지 않았다면─로 산업 활동이 이전하는 것은 일반적 관행이 되었다." 아울러 "집단행동을 와해하기 위해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에게 제공될 수 있는 수많은 '당근'도 있었다. 노조의 엄격한 규율과 관료주의적 구조는 노조를 이러한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노동시장에서 "더 큰 행동의 자유(freedom)와 자율(liberty)을 선사하겠다는 것은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덕목으로 여겨졌고, 이는 여기에서도 많은 노동자들의 '상식'에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통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적극적 잠재력이 유연적 축적의 매우 착취적인 체계(시공간 모두에서의 노동 할당 유연성 증가로 인해 생겨난 혜택은 모두 자본에 돌아갔다)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실질임금이 정체 또는 하락하고 수혜가 감소된 현상을 설명하는 열쇠이다."(75)


영국은 "도덕적 다수로 동원될 수 있는 기독교 우파" 같은 세력이 없었기에, 매우 다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구축했다. 특히 "세계지향적 금융자본의 권력 성장이라는 점에서 런던 시의 위상을 보호 및 고양"했다. "(이자율 조작을 통한) 금융자본의 보호는 국내 제조업 자본의 요구와 적지 않게 갈등을 일으켰으며 (자본가 계급 내 구조적 분화를 촉진하면서) 국내시장의 팽창을 억제했다." 금융중심지로서 런던 시는 "케인스적 정책보다는 통화주의적 정책을 오랫동안 선호했으며, 이에 따라 착근된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거점을 형성했다."(77-8) 대처는 "주택 소유, 사유재산, 개인주의, 그리고 기업적 기회의 해방을 즐기는 중간계급의 배양을 통해 동의 연합을 형성했다. 어려움 속에서 약화되는 노동계급의 결속력과 탈산업화를 통해 급격히 변화하는 일자리 구조와 더불어, 중간계급의 가치는 한때 확고한 노동계급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면서 좀 더 널리 전파되었다."(84)


# 신자유주의 국가 이론의 허점

1. (경쟁을 저해하는) 독점 권력의 처리 혹은 정반대로 전력, 수도, 가스처럼 국가 개입이 불가피한 자연 독점의 처리 문제

2. 시장 실패(비용의 외부화) 혹은 사회 관계와 제도를 훼손하는 기술혁신의 처리 문제

3. 매력적이지만 소외를 낳는 소유적 개인주의와 의미 있는 집단 생활을 추구하는 소망 간의 모순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이다.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치는 개인적 권리와 헌정적 자유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만주주의는 사치스러우며, 단지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강력한 중간계급의 등장과 결합된 상대적 풍요의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90) "완전한 정보와 경쟁을 가능케 하는 평등한 행위의 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가정은 순수하게 유토피아적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부의 집중과 이에 따른 계급 권력의 회복을 유도하는 과정을 감추려는 신중한 연막으로 보인다."(92) 국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진압하기 위해 설득 및 선전, 또는 필요하다면 적나라한 폭력과 경찰력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자유주의적 (확장하면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권위주의에 의존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다. 대중의 자유는 소수의 자유를 위해 제한된다."(94)


신자유주의 국가는 "전형적으로 탈규제를 통해 금융 제도들의 영향을 확산시키지만, 또한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금융 제도의 통합성과 지급 능력을 보장한다. 이러한 집착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국가 정책의 기반을 (신자유주의 이론의 어떤 변형 속에서 정당화된) 통화주의─화폐의 통합성과 건전성은 이 정책의 핵심적 부분이다─에 의존하는 데 있다."(97) 위기가 닥쳤을 때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필요를 우선하고 채무국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관행은 국제적 맥락에서 바라봤을 때, "국제 은행가들에게 보상하려고 빈곤한 제3세계 국민들로부터 잉여를 추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 메커니즘을 통한 공물(tribute)의 추출은 "계급 권력─특히 세계의 주요 금융 중심지에 있는─의 회복에 매우 도움이 되며, 또한 이의 작동은 항상 구조조정의 위기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98)


"왜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를 통한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되는 데 그리도 성공적이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변동이 가속화되고, 어떤 영토들에서는 다른 영토들의 손실을 전제로 (최소한 일정 기간 동안이나마)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예로, 1980년대가 주로 일본, 아시아의 '호랑이', 그리고 서독의 시기였고, 1990년대는 미국과 영국의 시기였다고 한다면, 이처럼 세계 어딘가에는 '성공'이 이뤄진다는 사실은 신자유주의화가 성장을 촉진하고 복리를 증진하는 데 일반적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한다. 둘째, 이론이라기보다 실제 과정으로서 신자유주의화는 상위 계급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이는 (미국이나 부분적으로 영국에서처럼) 지배 엘리트들에게 계급 권력을 회복시키거나, (중국, 인도, 러시아 또는 다른 국가들에서처럼) 자본가계급 형성을 위한 조건을 창출했다."(191)


신자유주의화는 "상품화化의 선線을 의심할 바 없이 후퇴시켰고, 법적 계약의 범위를 크게 확대시켰다. 이는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 이론의 대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짧은 수명과 단기 계약을 찬양한다."(202) 신자유주의화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도 상품이라고 강조함으로써, 노동·여성 및 토착민 집단이 사회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전환시켰다." 강도와 범죄 카르텔, 마약 밀매망, 소규모 마피아와 슬럼가 두목들에서부터 공동체, 민중, NGO에 이르기까지 "이 조직들은 국가권력, 정당, 그리고 다른 제도적 형태들이 활발하게 분해되거나 집단적 노력과 사회적 연대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소진하게 됨에 따라 남겨진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대안적 사회형태이다. 종교로의 현저한 전환은 이러한 관점에서 흥미롭다(파룬궁)." 미국에서 근본주의적 복음주의 기독교의 확산은 "고용 불안정의 증대, 다른 형태의 사회적 결속의 상실,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의 공허함과 어떤 연관성을 가진다."(207-8)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ssion은 산업 및 농업에서 임금노동의 확대를 통한 축적과는 상이한 일단의 관행들을 동반한다. 1950년대 및 1960년대 자본축적 과정을 지배했던 후자의 축적은 착근된 자유주의를 창출한 (노조와 노동계급 정당에 착근된 것과 같은) 저항문화를 유발했다. 다른 한편 탈취는 (여기에서는 민영화, 저기에서는 환경 퇴락, 또 다른 곳에서는 부채에 의한 금융 위기가 일어나는 식으로) 파편적이며 특정적이다. 보편적 원칙들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특이성과 특정성 모두에 반대하기는 어렵다."(215) 신자유주의 아래 살아가는 것은 "자본축적에 필요한 일단의 권리들을 수용하거나 준수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적 소유와 이윤율에 대한 개인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그리고 법인들은 법 앞에서 개인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상기하라)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개념화를 압도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218)


"1935년 연두교서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대공황의 경제적·사회적 문제의 근원에는 지나친 시장 자유가 있었다는 견해를 분명히 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과도하게 이윤을 추구해 부당한 개인적 힘을 키워도 된다는 부의 획득 개념을 반드시 폐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궁핍한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없다.(221) 마르크스 역시 허기진 배는 자유를 전도하지 못한다는 굉장히 급진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는 "필요성과 일상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야 자유의 영역이 시작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는 "실제 물질적 생산 영역 너머에 놓여 있다"라고 덧붙인다.(223) 저자가 신자유주의적 권리 체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적·생태적·정치적 결과가 어떠하든지 무한한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의 체제 아래 살아가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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