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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크스 당대의 혁명가들은 "도덕적 목적을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행동의 원천으로 삼을 수 있으며, 그 목적을 정당화시키려면 보편적인 가치 척도에 호소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럽 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먼저 확정해야 한다. 둘째, 이에 비추어 현재의 사회구조 중 어느 부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는 "가치란 사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실을 보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성적 존재는 역사 과정의 본성과 법칙을 올바로 통찰하기만 하면 독립적으로 알려진 도덕적 기준들에 의지하지 않고도 어떤 수단을 채택하는 것이 좋은지, 다시 말해 어떤 길이 자신이 속한 질서의 요구에 가장 잘 부합하는지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21-3)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서의 위치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불변의 보편적 자연권과 양심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을 자기방어적인 자유주의적 환상이라는 이유로 단호하게 거부한다. 사회주의는 호소하지 않고 요구하며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회구조의 제약에서 벗어난 새로운 생활 방식에 관해 말한다."(26) "그가 서명한 성명서나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의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런 말들은 한때는 민주주의 운동의 이상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상투어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28) 마르크스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면밀히 검토해 그 중에서 옳고 독창적이며 중요해 보이는 것을 전부 추려낸 다음, 그 자료를 근거로 사회를 분석하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냈다." 그 학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기본 원리들을 포괄적이면서도 상세하고 현실성 있게 결합한 비범함에 있다."(34)
볼테르와 루소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상이 거둔 승리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끼친 영향에 거의 맞먹을 정도이다.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자유로이 탐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이성의 법정에 세우는 정신은 인간생활의 모든 면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광범위하고 다양한 사회계층 속으로 파고들었다. 지적 용기는 당시 유행하는 미덕이 되었고 지적 공정함은 그 이상의 미덕이었다."(73) 헤겔에게 이러한 "급진적 경험주의는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그는 과학적 독단주의는 신학을 대체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자연과학에서 성공한 방법들만이 그 밖의 모든 경험 분야에서 타당할 수 있다는 오류를 가지고 있으며, 신학보다도 훨씬 더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시대는 그 자궁 속에 미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고 앞으로 올 시대의 윤곽을 예시하고 있다."(76-7)
"기계적 모델은 사물의 작용을 예측하거나 통제하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합리적 설명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사건들이 인간의 역사를 구성할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적 방법만으로는 특정한 예술작품이나 과학 속에 구현되어 있는 특정한 인물이나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개별적 특성, 개별적 본질, 목적 등을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그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특성들이 그것의 전후에 일어난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 전체는 유일무이하며 단 한 번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과학적 방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역사와는 정반대로, 과학적 방법은 동일한 현상이라든가 특징들의 동일한 결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규칙적으로 되풀이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79-80)
"투쟁과 긴장이라는 개념은 역사에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동적 원리를 제공한다. 사유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 현실이며 사유 과정은 가장 명료한 형태로 표현된 자연의 과정이다. 전보다 더 높은 동일성으로서의 영속적인 흡수와 해소의 원리, 즉 지양止揚, Aufheben은 논증적 사유에서와 같이 자연에서도 일어나며, 자연의 과정들이 유물론이 전제하는 기계적 운동처럼 목적 없는 과정이 아니라 내적 원리를 보유하고 있고 점점 더 자기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88) 마르크스는 "자신이 다루는 모든 것을 합리적 통제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이 유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외적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 인류의 발전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에 이 새로운 견해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관념론적 형이상학을 격렬히 비판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위대한 철학자 헤겔을 변함없이 믿고 찬미했다."(94)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난 마르크스는 "한편으로는 가치 있는 헤겔의 방법으로 무장을 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그 허울뿐인 건물을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서로 관찰 가능한 경험적 관계를 맺고 있는 현실 대상들을 가리키는 기호들로 대체하는 것이 자기세대의 의무로 보았다."(118) 1843년 11월,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영토를 떠나 이틀 뒤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민주적 개혁을 너무나 격렬하게 옹호했기 때문에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통렬한 문필 능력을 갖춘 자유주의적 저널리스트로 받아들여졌다." 1843-5년에 걸친 파리 생활 동안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분명히 가다듬은 마르크스는 "많은 국가의 경찰에게 비타협적인 혁명적 공산주의자이자 개량주의적 자유주의의 적이며 국제적 지부들을 갖춘 단체에서 체제전복 운동을 꾀하는 악명 높은 지도자로 알려지게 된다."(119-120)
파리에서 마르크스가 가진 의문은 "프랑스 혁명이 실패한 궁극적 원인이 무엇인가? 이론과 실천에서 어떤 결함이 있었기에 총재 정부와 제1제정이 등장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부르봉 왕가가 복귀할 수 있었는가? 반세기가 지나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는데, 그들이 피해야 할 오류는 어떤 것들인가? 사회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 즉, 미리 알기만 했더라면 대혁명을 지켜낼 수도 있었을 법칙들은 없는가? 등에 대한 것이었다."(129) 그는 "케네와 아담 스미스를 위시해 시스몽디, 리카르도 세이, 프루동 및 이들의 추종자 등 주로 경제학자들의 저서를 읽었다. 이들의 명쾌하고, 냉철하고, 비감상적인 태도는 독일인들의 혼란스러운 주정주의나 현란한 수사와는 대조적이었다. 경험적 탐구를 강조하고 실천적으로 기민하면서도 대담하고 독창적인 일반 가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은 마르크스를 매료시켰다."(130)
"마르크스가 판단하기에 파리에서 만난 공산주의자들 중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그는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였다."(149) 마르크스는 자신이 세우고 있는 역사적 테제의 "정당성 여부를 입증해 줄 수 있는 물질적 증거인 발전하는 산업사회의 실태에 관한 풍부하고 구체적인 자료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엥겔스가 이것을 제공해 주었다. 반면에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통해서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엥겔스가 보기에는 당시 개혁가들 내에서는 추상적 개념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추상적 개념이 기초를 이루고 있는 철학은 진정한 혁명적 철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수집한 사실들을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공격하는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끼워넣을 굳건한 틀이 필요했는데, 마르크스에게는 바로 그러한 틀이 있었던 것이다."(153-4)
"마르크스는 인간을 핵심 요소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인간이란 쾌락이라든가 지식, 안전, 혹은 무덤 너머의 구원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의 원리에 따라 인간적 능력 전체의 조화로운 실현이라는, 지성에 의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 목적들을 추구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들은 이러한 목적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그 결과 어떤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이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다른 집단이나 세대 혹은 문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결정하고 설명하게 된다. 아울러 인간들 사이의 상태와 가치들 자체는 부분적으로 실현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좌절되기도 하면서 그러한 상태와 가치들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모든 노동과 창조의 핵심인 이러한 끊임없는 자기 변혁은 시간을 초월해 있는 고정된 원리라든가 불변의 보편적 목적, 인간의 영원불변의 상태 따위의 개념을 불합리한 것으로 만든다."(188)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 체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노동 개념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때때로 그는 노동을 행복과 해방의 정수이자 인간들 사이의 대립 없는 이성적 조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인 동시에 자유로운 인간 본성의 가장 완전한 표현인 자유로운 창조 행위와 동일시한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노동을 여가와 대비시키고는 계급투쟁이 폐지되면 노동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노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사회화된 삶을 만들어가는 노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양립적 태도와 이 때문에 후대에 미친 영향은 마르크스가 "진화론적 결정론과 자유 의지론을 결합시켜 자유 선택을 설명하는 데서도 나타난다."(190-1)
마르크스는 당대의 특성을 결정하는 핵심 현상을 '계급투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륀과 헤스 같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 계급투쟁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 목표인 자신들의 권리와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애초부터 인간은 말 그대로 인간이라는 평등한 존재로, 다시 말해 폭력을 거부하고 인간들의 연대 의식과 평등한 정의에 대한 의식, 인류의 고결한 감정에 호소함으로써만, 상이한 이해관계들이 지속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엇보다도 자기 계급이 지고 있는 짐을 다른 계급의 어깨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벗어 버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을 내세워 마르크스 일당의 이론은 단지 현존하는 계급들의 역할을 뒤바꿔놓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현존하는 모순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립하는 이해관계들을 하나의 동일한 이상으로 융합하는 것뿐이다."(212-3)
마르크스는 "1845년 기조 정권의 탄압으로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이는 프랑스의 기조 정권이 당대를 호령하던 프로이센 왕의 자질에 관해 공격적인 논평을 싣고 있던 사회주의 잡지 <전진>에 폐간 조치를 내리라는 프러시아 측의 요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브뤼셀에 도착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는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임박한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업에 착수했다."(232-4) "1847년에 <공산주의자 동맹>의 런던 본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자기 조직의 신조와 목적을 분명히 나타내는 문서를 작성하도록 부탁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그 부탁을 최근 들어 머릿속에 완성된 새 학설을 정리, 요약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1848년 초에 문건을 작성해 넘겨주었고, 이 문건은 파리 혁명이 일어나기 몇 주 전에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238)
마침내, 파리를 필두로 "도처에서 전제주의 정부들이 전복되고 제후들이 새로운 법령들을 약속하고 온건한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관리들을 임명하고 있었지만, 프로이센 군대만은 여전히 왕에게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반동 정부의 타도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노동자와 급진적 부르주아지가 잠정적으로 동맹을 맺을 것을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는 1789년에 봉건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그 때문에 1848년에 다음 단계로 전진할 수 있었던 반면, 독일은 지금까지는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만 혁명들을 달성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사상가들은 견해의 급진성에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앞섰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18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후진적인 독일은 발전된 산업주의 단계에 도달해 이웃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전진하려면 먼저 두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고 보았다.(249-50)
혁명의 불길이 번진 프랑크푸르트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공허한 잡담'과 '의회의 정신박약'에 반발해 격렬한 폭동들이 일어났지만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처참한 실패로 끝난 원인을 부르주아지의 취약함과 의회적 자유주의자들의 무능함에서도 찾았지만, 주된 원인은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대중의 정치적 맹목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대중은 자신들을 기만하고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다가 결국에는 아주 쉽사리 자신들을 파멸시키고 마는 가장 악랄한 적과 그 대리인들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그는 여생을 혁명의 현실적인 조건들을 분석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 못지않게 혁명 지도자들이 무지한 군중을 위해 어떤 방법을 택하는 것이 최선인가와 같은 순전히 전술적인 문제들을 고찰하는 데 바쳤다. 이것은 주로 이때의 독일 혁명에서 얻은 교훈의 영향이었다."(253-4)
"프로이센 정부는 1849년 7월 (선동적인 논설을 써대는) 마르크스를 라인란트에서 추방했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갔다. 파리의 정치적 상황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중요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마르크스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 "프랑스를 떠나거나 아니면 브리타니에 있는 모비한으로 가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자유 국가들 중에서 벨기에의 문은 그에게 닫혀 있었고, 바이틀링을 추방한 바 있으며 바쿠닌에게도 거의 호의를 보이지 않았던 스위스는 그의 체류를 승인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7월에 라인란트를 떠나 파리에 도착한 지 1달 후에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혁명의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영국으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49년 8월 24일 런던에 도착했다."(259-61)
마르크스는 본래 "혁명은 소규모의 잘 훈련된 혁명가 집단에 의한 쿠데타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집단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직접 인민을 대표하는 집행 위원회를 구성해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여 공격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광범위한 노동 대중은 속박과 암흑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탓에 새로운 국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역량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영구 혁명의 상태라고 말했다. 이 불가피한 과도기를 이끄는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나머지 모든 계급에 대해 행하는 계급 독재이다." 영구 혁명 원리는 레닌에 의해 채택되어 1917년 러시아에서 문자 그대로 가장 충실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1848년의 사건을 계기로 적어도 실천에서는 이 원리의 중요한 측면들을 포기해 버렸다."(271-3)
마르크스에 따르면, 결국 "1848년의 사건이 가르쳐 준 중요한 교훈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운명과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 주는 것이 혁명적 지도자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길고도 힘든 과정이겠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한 혁명은 단지 모험가들과 성급한 자들의 산발적 폭동 속에서 에너지만 낭비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는 "1871년의 파리 코뮌을 탄생시킨 혁명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 그 혁명에 대한 지지를 거절했다." 부르주아지와의 협력 여부 역시, 공산주의의 전단계로서 의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강력한 힘과 동맹 세력인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부르주아지의 공공연한 결정을 지켜보고는, 부르주아지의 협력이 그들에 비해 힘이 약한 노동자 계급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274-5)
"1850년 경 마르크스의 명성과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1851년의 쾰른 재판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계속 줄어들었다. 공업과 상업의 눈부신 발전으로 자유주의와 과학 및 문명의 평화로운 진보에 대한 믿음이 또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거의 흘러간 역사상의 인물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즉 이전 세대에는 강력한 이론가이자 선동가였지만 지금은 망명하여 런던의 한 구석진 변두리에서 그때그때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써서 먹고 살아가는 인물 정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5년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다. 물론 영국에서는 그때까지도 예외였다." 마르크스를 "이런 위치(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지도자이자 구세주)에 오르게 한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유럽 사회주의의 성격과 역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꿔놓은 1864년의 제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창설이었다."(314-6)
"1857년에 최악의 경제 공황이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공황이 불만과 폭동을 불러올 것이라고 보고 유럽이 여태껏 겪었던 것 중에 가장 가혹한 이 공황을 열렬히 환영했다."(330) 밤낮으로 인터내셔널 활동에 매진한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을 장악하면서 예전의 정력적인 모습을 되찾은 듯 했다. 이 당시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거의 쾌활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 심지어 그의 이론적 저작들에서까지도 이 새로 찾은 활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흔히 그렇듯이, 한 분야의 작업을 열심히 하게 되면 그동안 손을 놓고 있던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미 1859년에 자신의 경제이론을 개략적으로 제시한 바 있었다. 그는 빈곤과 건강 문제 때문에 그동안 중단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마침내 마르크스의 역작이 완성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332-3)
<자본론> 1권에서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던 핵심 테제는, 소비하는 것 이상의 부를 생산해내는 유일한 사회 계급이 있는데 그것이 곧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과, 순전히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천연자원, 기계, 운송수단, 신용 대부 등의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그 잉여 가치를 차지하는 자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348) 그러나 마르크스는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고 그에 따라 민주적 저항이 증가하면서 생길 결과를 고려하지 못했다. 또한 정치적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을 방해하고 변형시키는 힘이나 무제한적인 착취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 혹은 부르주아지 중에서 점차 빈곤해지는 계층이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게 될 운명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반동 세력과 동맹을 맺게 될 때 그들이 구체제를 지키는 보루가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파시즘도 복지 국가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352-3)
마르크스는 "실레지엔에서 방직공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1842년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측하고는 하이네를 격려해 그 봉기에 관한 유명한 시를 쓰게 해서 당시에 자신이 맡고 있던 파리의 잡지에 실었다. 또한 1851년, 1857년, 1872년에도 혁명을 예상했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윤율이 저하할 것이고, 산업과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집중화되는 경향을 보일 것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 수준은 떨어질 것이며,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긴밀하게 결합할 것이라는 등의 예언들은 대체로 당대에는 그가 예상한 형식대로 들어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가 중앙으로 집중될 것이고, 대기업의 생산 방식과 낡은 분배 방식 사이의 갈등이 점차 커져 양립할 수 없게 됨으로써 사회와 정치 영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산업화와 과학이 전쟁 형태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이런 모든 현상으로 말미암아 생활 방식이 급격하게 변화할 것"이라고 올바르게 예측했다.(361)
마르크스는 비록 파리 코뮌을 정치적인 대실책이라고 보았지만,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코뮌에서 활동하다 코뮌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최초의 순교자들로 자리매김했다. 코뮌을 격찬한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은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연설문으로 쓰인 것이었다. 이 연설문의 공표는 인터내셔널의 회원들에게 당혹과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인터내셔널의 해체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울러 "경찰과 일반 대중은 인터내셔널 하면 곧 코뮌의 무자비한 악행들을 떠올리게 되었다."(372-3)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력이 기껏해야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자,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에 대한 여러 세대에 걸친 희망을 송두리째 파괴할 수도 있는 혹독한 투쟁보다는 차라리 바쿠닌주의자들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한 후에 인터내셔널이 평화적으로 해체되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심했다."(378)
"마르크스는 세상을 단순히 흑백의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은 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자기 친구들 중에 더 조용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겪은 신념의 위기들, 이를테면 헤스나 하이네 같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내적 천착(?)에 전혀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신념의 위기들을 사적인 감정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 더 심하게 말하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싸움이 목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 예술적 목적을 위해 사회 불안을 이용하는 경박함과 무책임한 방종을 보여주는 부르주아적 타락의 징후라고 보았다. 개인감정에 대한 극도의 엄격함과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자기희생적인 규율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모든 나라의 후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적들에 의해 모방되었으며, 모든 영역에서 그의 진정한 계승자들과 관용적인 자유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구분 짓는 특징이 되었다."(4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