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 정치.문화생활 이야기(개정판), 청년학술 52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청년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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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권의 약화와 외척의 권력 집중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세도정치는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 아니라 영·정조대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지배 세력의 당파 결성이 여전했고 훈척勳戚 세력이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비중이 커졌기 때문이다.

2. 조종祖宗은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부여되는 묘호廟號로서, 생전의 행적을 평가하고 추존하는 뜻을 담는다. 통상 조는 창업을 하거나 공이 있는 왕에게 붙이고, 종은 수성守成한 왕에게 붙이는 게 원칙이나 당시의 정치적 형편에 좌우되곤 했다.

3. 사도세자의 죽음은 흔히 그의 발작하는 정신병을 원인으로 간주하지만, 영조 즉위를 전후한 노/소론 대립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신임의리) 그리고 이 사태를 바라보는 세자의 어긋한 견해가 종묘사직의 안위와 맞물리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4. 세도정치기에는 핵심 가문들이 과점한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었고 국왕의 견제조차 없이 국가의 정책을 사적 영역에서 결정하다시피 했는데, 이에 맞선 흥선대원군이 국왕의 생부라는 권위와 강력한 개혁 추진력을 바탕으로 실권을 거머쥐었다.

5.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는 역성혁명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조준을 필두삼아 토지·정치·지방제도를 개혁하고 창왕을 공양왕으로 교체했다. 이후에도 민심을 잃는 왕의 행위를 강조하고 자연재해를 왕조의 쇠락과 연결시켜 마침내 조선을 개창했다.


6. 임진왜란 이후 선조와 집권층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성리학 이외의 사상을 ‘요언혹중지설妖言惑衆之說’로 규정, 단속하고, 지방에서 향약을 재보급하여 정부와 지배층의 무능을 가리고 백성들을 단속하는 일에 몰두했다.

7. 왕의 동정에 관심을 집중하는 사간원이 자유로운 분위기인 반면, 관료들을 탄핵하여 기강을 세우는 사헌부는 관서 내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홍문관을 포함한 삼사는 계啓나 소疏, 경연에서의 발언을 통해 인사에 대한 이의나 정책을 제안했다.

8. 문반관료를 뽑는 문과는 초시나 복시를 막론하고 초장에서는 경학에 대한 이해를 중시하여 사서오경 습득력을 평가하고, 중장에서는 문학시험인 부와 외교문서 문체인 표·전의 문장 능력을, 종장에서는 당면한 현안에 대한 의견 논술을 평가했다.

9. 백성들이 신문고를 치기 위해서는 자기 고을의 수령과 관찰사, 사헌부의 처리를 거쳤다는 확인서가 있어야만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왕의 행차에 글을 올리는 상언과 왕이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만이 남았다.

10.『경국대전』은 정부 조직법에서 사회규범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데 <이전>은 관리 체계, <호전>은 토지와 조세 규정, <예전>은 의례와 풍속, <병전>은 군사 제도, <형전>은 형벌과 노비, <공전>은 토목과 도량형 관련 규정을 담고 있다.


11. 왜란 이후 환관 출신의 명 사신들은 수만 냥에 달하는 은화 뇌물을 요구했는데,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요구받은 선조나 차자次子로 즉위하여 명의 책봉 승인이 필요했던 광해군, 반정의 정당성을 갈구했던 인조 모두 여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2.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이전 지도가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적 지리관에 따라 외형보다 이념을 중시한 측면을 벗어났지만, 서구식 세계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구의 천문 지리 지식도 응용하지 않은 채 오로지 국토 인식에 열렬히 집중했다.

13. 조선 후기 지역 및 국제 교역의 확대와 도시의 성장(인구 밀집) 등이 야기한 역병은 종종 양대 전란보다 많은 목숨을 앗아가 도망과 유랑, 굶주림을 낳았고 산 자들은 여제(역신을 쫓는 제사)와 수륙제(극락왕생을 비는 불교 의식)로 슬픔을 달랬다.

14. 조선시대에 장치기라고 불리는 놀이는 타구打毬(방희, 골프 형태)와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기마격구騎馬擊毬(폴로 형태), 말을 타지 않고 골문에 골을 넣는 장구杖球(필드하키 형태)가 있었는데, 15세기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즐겼다.

15. 사대부 출신 화가들과 더불어 조선시대 회화의 발달을 이끈 것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이었다. 화원들은 기록사진사 같은 역할을 하여 국왕이나 명망가들의 초상화, 지도 삽화, 의궤도(국가 공식 행사의 의례 과정) 등을 그렸다.


16. 전라도에서 유행하던 서사무가敍事巫歌를 개조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판소리는 점차 세련된 사설과 재미로 정형을 갖추었고, 지주·양반층까지 저변을 넓혀갔다. 상업도시를 기반 삼아 유행한 꼭두각시놀음과 탈놀이는 민중예술의 전형이다.

17. 남자 옷은 유행을 별로 타지 않았지만 점차 외투의 폭이 넓어지고 갓이 커지면서 유행을 나타냈고, 여자 옷은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풍성해졌으며, 치마 안팎에 노리개를 착용하여 멋을 냈다. 조선 후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가체가 유행했다.

18. 명종대에 문정왕후의 후원에 힘입어 불교 부흥을 주도한 보우普雨는 모든 유학자들에게 요승妖僧이라고 비난받았다. 불교 부흥책에 힘입어 봉은사와 봉선사가 선종과 교종의 중심 사찰로 선정(1550)되었고, 승과에서 여러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19. 동양의 우주론은 재이론災異論과 천원지방天圓地方 개념으로 대표되며, 조선은 송대 이후 강화된 중화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중화 조선’적 세계관을 형성했다. 지동설이라는 서양 우주론이 가져온 변혁은 중화 관념에 점차 균열을 가져왔다.

20.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약무기는 주로 대형화포 위주였고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은 사격순간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명과 일본의 신형 화기를 접한 조선은 자체 제작과 개량에 힘을 쏟았고 기병 중심의 진법은 중무장 보병 중심으로 재정비했다.


21.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출판의 본산은 불교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 국가적 출판 사업은 유가 경전, 농서農書, 의학서 등에 편중되었다. 제지 기술도 고려시대에 이미 확립되었지만, 여전히 종이가 귀하여 한 번 사용한 종이는 대개 재생되었다.

22. 조선에서 융성한 성리학은 정통론과 명분론에 집착하고 성리학적 가치관만을 주입하면서 여타의 사상은 철저히 배격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농업 및 상공업의 발전으로 사회 변화가 감지되었지만 성리학은 자기 본위적 논리에 자족할 뿐이었다.

23. 조선 왕조 내내 아악과 민요의 두 축으로 전개되던 음악 문화는 19세기 말 민요만 살아남아 민중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했다. 최초의 전국 민요 아리랑은 지역 특색과 서민 애환을 담아 널리 불리웠으며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노래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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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사회.경제생활 이야기(개정판), 청년학술 5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청년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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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가호를 기준으로 측정했는데, 이는 군역 같은 각종 역역자力役者를 파악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과 왕이 덕정德政을 펼치면 호구가 늘어난다는 생각을 근거로 가호의 증감을 파악하는 이념적인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2. 조선왕조는 칠거지악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흠결을 이혼사유로 나열했으나 실상은 재혼을 금기시하는 정절 이데올로기를 수호하기 위해서 나쁜 병에 걸렸거나 간통을 한 경우, 시부모에게 불효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3. 가짜 족보는 족보 편찬 과정에서 조작과 윤색을 하는 경우, 조선시대에 지방의 군현제도가 개편되면서 고려의 속현, 촌, 향·소·부곡을 본관으로 삼던 성씨가 사라진 경우, 천민층이 양인화하면서 기존의 유명 성씨를 채택하는 경우 등으로 생겼다.

4. 사족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는 조선 초 수령을 견제하고 향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다가, 성종대 이후 향약 보급과 함께 향촌을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고 백성들에 대한 통제와 영향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5. 이황은 문묘 종사 운동과 더불어 늘어나는 서원을 독자적인 교육 기관으로 정착시켰는데, 그는 도학 실천의 주체를 사림士林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습속을 바로잡아 학문의 방향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서원은 붕당정치와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6. 사족들의 지배력이 강고하던 시기에 광역의 리里 아래 존재하던 자연촌들이 18세기 후반 이후 독립된 마을로 분화하면서,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고, 자작·소작 농민들의 일상 의례·공동 행사·공동 노역을 담당하는 두레 조직이 늘어났다.

7. 조선왕조는 조세 확대 차원에서 백정에게도 양인 신분을 부여했지만 이들은 강제로 특정 방坊 및 촌村에 거주했고, 사회적 멸시와 가혹한 통제에 시달렸다. 백정에는 도축업자, 유랑 재인才人, 회자수(망나니), 피혁 제조업자(갖바치) 등이 있다.

8. 흉년과 기근, 과중한 조세 부담, 수령의 탐학에 반발하여 일어난 임꺽정 무리는 재상, 관료, 양반층을 적으로 삼고 도사, 수령, 부장들을 서슴없이 처단하는 등 봉건국가의 권위에 정면도전하다가 국가 기틀을 뒤흔드는 반적으로 몰려 토벌당했다.

9.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보면 수령은 태형에 처할 만한 가벼운 범죄를, 장형 이상의 죄는 관찰사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국왕이 최종 집행권을 행사했다. 유배의 경우 신체형이 수반되는데, 사대부는 속전贖錢을 내고 이를 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10. 조선은 물물교환 경제 위주로 쌀과 삼베와 같은 물품화폐가 널리 통용되었고, 17세기 이후에야 장시의 발달과 더불어 금속화폐가 서서히 보급되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구매력과 여전히 취약한 시장경제 그리고 동銅 생산 부진으로 한계가 뚜렷했다.


11. 조선 초기에는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하다가 16세기 후반부터 이앙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앙법은 김매기 횟수를 줄여주었고, 수확량이 많았으며, 모내기 기간 동안 논에 비료를 주기도 수월했지만, 가뭄이 들면 농사를 그르칠 위험성이 높았다.

12. 시전 상인들이 대대로 독점권을 남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가운데 영·정조대에 이르러 서울로 상품이 들어오는 길목을 거점으로 상업을 하는 사상들이 시전의 독점권을 무너뜨렸지만(신해통공, 1791) 폭리를 취하는 행태는 사상들도 마찬가지였다.

13. 대다수 지방 농촌에는 시전과 같은 상설 점포가 없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리는 장시 역시 조선 초기에는 드물었다. 이 공백을 메운 행상(장돌뱅이)의 활발한 활동에 발맞춰 간선도로와 해로海路가 생겨나고(발견되고) 주막촌이 형성되었다.

14. 공식적으로 국경을 오가는 역관들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의 후시後市 무역(사私무역)을 주도하고,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틈을 타 중계무역을 행하면서 큰 이익이 보았지만 청·일간 국교 재개(1687)로 사상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15. 중국과의 교역 확대로 은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을 중심으로 개발이 전개되고, 18세기 말에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민영 광업도 등장한다. 금맥을 찾아내고 작업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물주를 업고 혈주穴主나 덕대가 되어 직접 광산을 경영했다.


16. 조선 초기에는 개인의 염분 소유 및 소금의 생산·판매를 허용하는 대신 국가가 생산자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세종 말에는 흉년의 기민飢民 구제를 위해 전매제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소금 품귀 현상이 심해지자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7. 조세 제도는 양천제良賤制를 기반으로 삼았는데, 애초에 제외 대상인 천인층은 18세기까지도 30~35퍼센트에 달했다. 한정된 양인층에게 가급적 많은 세원을 징수하기 위해 직접세 외에 걷는 인두세와 가호세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18.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法宮은 경복궁이고, 경복궁에 대하여 이궁離宮으로 조성된 궁궐이 창덕궁이다. 창경궁은 상왕 태종이 머무르던 수강궁을 수리한 궁궐인데, 창덕궁에 부족한 주거 생활 기능을 보완하면서 하나의 궁역宮域을 이룬다.

19. 농민의 한해살이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정한 24절기에 맞춰 파종·제초·이앙 등의 농사일을 하면서 진행되었다. 조정은 춘분에서 추분에 이르는 시기를 농절農節이라고 하여 민간의 소송 사건처럼 농사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일을 금하였다.

20. 조선시대에는 하루 두 끼가 일반적이어서 식사를 ‘조석朝夕’이라 했고, 점심은 ‘뱃속에 점을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켰다. 북부지역은 주식이 조였고, 남부지역은 대개 논농사를 지었기에 보리나 잡곡을 섞은 쌀밥을 주로 먹었다.


21. 조선시대의 술은 탁주濁酒·청주淸酒·소주燒酒로 나뉘는데, 탁주는 막걸리(마구 걸러낸 술)를 뜻하고, 청주는 술을 체로 거르지 않고 술독에 넣은 용수에 고인 맑은 술을 떠낸 것이며, 소주(불태운 술)는 증류기를 이용하여 ‘고아 내린’ 술을 말한다.

22. 담배가 전래된 17세기는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던 때로서 상놈이 양반 앞에서, 아이가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흡연 문화가 형성되고, 흡연 행위가 사회적 권위와 연결 지어지면서 담뱃대의 길이가 신분의 높낮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23. 양인남자는 원칙적으로 16~60세라는 긴 기간동안 군역의 의무(1년에 2~6개월)를 져야 했고, 종종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나 복장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또한 부대마다 신분에 따라 편제되어 차별을 받았고, 군정의 가혹한 수취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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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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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정도전, 맹자의 혁명론을 읽다


"정도전은 조선조 500여 년 동안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곤 줄곧 간신으로 남았다. 1398년 9월 12일 정종이 내린 교지에는 "불행하게도 간신 정도전·남은 등이 연줄을 타서 권세를 부리고 몰래 권력을 마음대로 하기를 도모하였다"고 해 정도전을 간신으로 규정하고 그의 처단을 정당화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고종 2년(1865)에 와서다. 경복궁을 지을 때 전각에 이름을 붙이는 등 경복궁 설계에 공이 있다는 것이 복권의 이유였다." "정몽주가 태종 때 충신으로 추대되고 중종 때 문묘에 종사된 것에 비하면 정도전에 대한 조선왕조의 평가는 매우 인색했다." "신숙주의 평가대로, 개국 초기에 실시된 큰 정책은 다 정도전이 만든 것으로 당시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하였으나 그에게 견줄 사람이 없었다. 그의 「졸기」卒記에는 "무릇 임금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대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20)


"정도전이 제시한 혁명의 논리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정도전에게 역성혁명易姓革命론은 자신이 마련한 정치적 구상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민심이 등을 돌리고 천명이 떠난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는 정도전 정치 철학의 대전제다. 그의 정치적 각본에서 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백성이었다."(29) 정도전의 혁명론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어진 정치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정보위」正寶位 편에서 "천지가 만물을 낳고 기르듯 임금도 백성을 낳고 기르는 정치, 즉 인정仁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에게 인이라는 것은 천지의 본질인 동시에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셈이다. 정도전의 혁명론이 주자학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인정, 즉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인은 단순히 인간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천지의 본질, 즉 천리이다."(31-2)


"『심기리편』에서 보듯 정도전의 철학 이론에서 최고 범주는 이理이다. 그의 철학에서 이는 우주의 원리인 동시에 그것이 구체화된 형태인 인간의 도덕규범이다. 인간은 바로 천리를 인식하고 천리를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도덕의식을 가지고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정도전이 이해한 불교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떨쳐버리는 무념망정의 상태를 지향하며, 도교는 장생불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정도전에 따르면, 그러한 삶을 사는 존재는 거북과 뱀, 흙덩이와 나무토막과 다르지 않다. 이처럼 정도전은 천리를 실천하는 인간, 천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했다."(39) "정도전에게 조선왕조의 건국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왕씨에서 이씨로 왕을 교체하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를 바꾸는 정치의 혁명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성혁명을 넘어 문화의 혁명이고 사상의 혁명이었다. 불교적 사유에서 주자학적 사유로의 전환, 바로 그것이 여말선초에 진행됐던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었다."(45)


2장 정몽주, 간신에서 조선 성리학의 종주로


"권근은 (정몽주를 평가하여) "한번 섬겼던 마음을 지키고 그 지조를 꺾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큰 절개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영웅 만들기의 극치는 역시 적의 신하를 충신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를테면 한통이 주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송 태조가 추증했고, 문천상이 송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원 세조가 추증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규정한 것도 마찬가지다."(54-5)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된 것은 중종 12년(1517)이었다. 하지만 그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처음 제기된 것은 61년 전인 세조 2년(1456)이었다. 최고의 충신이자 학자인 정몽주가 문묘에 종사되는데 왜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법도 하지만, 문묘 종사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문묘에 종사된 사람은 최치원·설총·안향 등 고작 세 사람뿐이었다."(58)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추진한 사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였다. 이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을 도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림파가 구사한 전략은 충절과 학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정몽주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규정하고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들의 학문, 즉 도학이 정몽주에게서 기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정몽주에서 자신들로 이어지는 도학의 족보를 공인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권전이 정몽주를 지칭해 "학교를 세우고 교학을 베풀어 유술儒術을 크게 일으키고 이 도를 밝혀 후학을 깨우친 것은 동방에서 이 사람뿐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바로 요·순에서 시작되는 도통을 정몽주가 계승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몽주는 단순히 훌륭한 도학자를 넘어 도통의 계승자가 된다."(62)


"사림들이 정몽주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의 충절만이 아니라 그가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祖]라는 점이었다. 고려 말 이색이 정몽주를 우리나라 이학의 시조로 평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기록됨으로써 정몽주는 일찍이 우리나라의 이학, 즉 주자학의 효시를 인정받은 셈이다.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그를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 공식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학의 계보, 즉 도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시조라는 말은 계승·전통·계보 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더욱이 김굉필을 함께 종사하자는 주장을 감안하면, 그의 문묘 종사는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도통을 승인한 것이고, 나아가 정몽주의 후예이자 김굉필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조광조 및 그를 따르는 사림파에게 도통의 계승자임을 승인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 즉 도학적 가치를 공인받으려는 내밀한 의도가 사림파에게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68)


3장 조광조, 조선 선비의 영원한 이상


# 중종 대의 정치적 쟁점을 다루는 조광조의 태도

1. 소릉昭陵(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능호) 복위 문제 : "전날의 뜻있는 선비들이 행하고자 한 일"이라면서 정당화

2. 단종의 후사 문제 : "매우 아름다우면서 행하기도 어렵지 않다"는 말로 적극 찬성

3.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 :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크게 이치가 있다'면서 잘못된 주장이 아님을 인정

4. 정국공신 개정 문제 : 무리하게 공신에 포함된 자들의 위훈 삭제를 요구하여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


"조광조는 중종시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하나는 연산시대의 악습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다는 관점이다. "지금 세상에는 공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 소인들은 조금이라도 불만의 뜻이 있으면 곧바로 국가에 난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만일 조정에 조그만 변고가 있다면 그 세력은 반드시 벌떼같이 일어날 것입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봄에 풀이 싹트듯 인심이 비로소 스스로 새로워지게 되었습니다"라든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0여 년에 선비의 습성이 점점 교화되어서 지금은 서민들도 역시 예로써 상喪을 치르는 경우가 있습니다"라는 견해가 그것이다."(103) "인간이 따라야 할 실천의 길, 즉 도라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따라서 정성[誠]을 다해 정치를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 조광조 정치 철학의 근본이다."(106)


"조광조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강직하게 쓰는 데 있다. 마음 씀이 진실로 강직하다면 선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조광조가 정치적 사안을 두고 늘 왕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촉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렇게 되면 개혁이라는 것은 왕의 인격 수양과 이로 인한 자발적인 동의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 왕과의 대립,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 된다. 이념적인 왕은 이상 사회로 가는 길의 동반자이고 후원자이지만 현실의 왕은 그 길에서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인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훈구 세력과의 투쟁, 나아가 왕과의 투쟁을 통해서 진행됐다. 소격서의 철폐가 그렇고 정국공신의 개정이 그렇다." "수차례에 걸친 개정 요구와 사직 압력 등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중종 14년 11월 11일 정국공신 개정이 확정되지만, 그 결과 초래된 것은 11월 15일에 시작된 기묘사화였다."(119-20)


# 정국공신 개정 4일 후 기묘사화 발생, 다시 6일 후 정국공신 개정 취소


훈구와 사림 세력, 그리고 왕권이 이중 삼중으로 충돌하는 권력의 장에서 "임금의 도덕적 성취와 이것에 의한 도덕적 감화, 그리고 도덕적 사회의 건설은 그저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광조가 현실 정치에서 선택한 방법은 임금의 도덕적 성취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고 소인을 퇴출시키거나 나아가 왕과의 투쟁도 불사하지 않았다. 왕이 투쟁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왕은 더 이상 개혁의 동반자가 아니라 적이 된다." "하지만 조광조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개혁의 방법은 군주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왕과의 투쟁이라는 것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투쟁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고, 교감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왕에 대한 의존을 포기하고 왕을 넘어서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림파 도학자들이 그토록 비판해마지 않았던 반정이고 혁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몽주, 길재로부터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그들의 존재 기반, 즉 도학의 정신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123-4)


4장 오현, 조선 성리학의 계보를 완성하다


# 오현五賢이 확립된 이유

1. 기묘사화 이후 사림의 정신적 지주로 조광조의 입지가 굳건해졌다.

2.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 계보를 처음 언급한 이황의 권위가 높아졌다.

3. 이理에 대한 인식과 『소학』 실천을 기준으로 도학의 기준이 엄격해졌다.

4. 16세기 중반만 해도 불가나 도가 혹은 유교 내 다른 분파의 학설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많았기에 도학의 이론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시급했다.


"오현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문묘의) 대성전이 재건되던 선조 35년이었다. 이 해 8월 성균관 진사 최극겸 등이 두 차례에 걸쳐 오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날 사관은 "오현이 도학을 천명하여 중화[華]로써 오랑캐[夷]를 변화시켰으니, 공맹의 가르침[斯文]에 끼친 공이 크다. 따라서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무례한 일이 아니다"면서 오현의 문묘 종사가 시행되지 못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도학의 존재 여부로 중화와 오랑캐를 이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에 따르면 오현은 단순히 도학을 밝힌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야만을 문명으로 바꾼 인물들이다. 그래서 오현은 우리나라를 야만의 구렁텅이에서 문명 세계로 구출해낸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제 도학이냐 도학이 아니냐는 단순히 특정한 하나의 학문이나 사상을 선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이냐 야만이냐를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이 된 셈이다."(145)


"광해군이 오현의 문묘 종사를 결정한 것은 정치적인 배경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영창대군과 임해군이 있는 상황에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은 정통성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대북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하기는 했으나 사림 전체의 지지라는 측면에서 매우 취약했다." "따라서 광해군은 사림들의 공론인 오현의 문묘 종사를 받아들임으로써 사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당시에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북 세력을 일정하게 견제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오현에는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오현의 문묘 종사는 퇴계학파의 정치 세력인 남인들에게 정치적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하지만 주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로 구성된 북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현의 문묘 종사는 조식이 문묘 종사에서 배제됨으로써 상대적으로 학통의 권위에 손상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한쪽 날개가 꺾이는 조치였다. 157)


"김성일의 기록에 따르면, 이황은 이단에 대해 자극적인 소리나 미색처럼 여거서 그것을 엄하게 끊어버리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심지어 "학자는 다만 마땅히 성현의 책을 읽어서 그것을 알고 깊이 믿는 것이지 이단의 문자는 전혀 알지 못해도 관계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단을 물리치려는 이황의 노력은 오래지 않아 장유張維가 우리나라에는 주자학만 있다고 비판했을 정도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다양성과 경쟁이 사라진, 단일하고 순수한 학문과 이념에 대한 집착은 파멸적이다. 더욱이 단일성과 순수성에 대한 고집은 자신의 기원을 고집하는 원리주의와 결합되는 퇴행성을 띠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변화를 포함한 다양한 환경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과 진지한 자기 성찰이 동반되지 않은 학문은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생명력마저 갉아먹고 퇴락하게 된다. 우리는 조선 후기의 교조화된 주자주의에서 그 퇴행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170-2)


5장 조식, 이황의 마지막 라이벌


"이황은 조식曺植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학문과 실천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이황은 명종 13년(1558)에 제자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운成運과 조식의 학문에 대해 "노장이 빌미가 되어 우리 학문에 힘씀이 깊지 않았고, 그 결과 의리義理를 꿰뚫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성운의 삶을 '청은'淸隱으로 규정한 것도 이 편지에서다. '청은'은 글자 그대로 맑은 은둔인데, 그 속뜻은 엄격하고 철저한 은둔이라는 의미다." "문제는 은둔이 지나쳐 현실을 완전히 저버리고 노장의 경지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성운과 조식을 가리켜 "의리를 꿰뚫지 못했다"고 했을 때, 의리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를 관통하는 천리이자 두 세계 전체를 규율하는 질서를 뜻한다. 이황이 위 언급에서 의도했던 것은 자연에 은거하더라도 천리를 깨닫고 실천하려는 도학적 삶의 태도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조식과 성운은 한 번도 관직에 나간 적이 없는 산림처사, 즉 재야의 선비라는 공통점이 있다."(175-6)


"조식의 제자 정인홍은 (오현이 문묘에 종사된 지 여섯 달 쯤 지난 광해군 3년(1611)에 차자箚子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의 출처가 오히려 중도를 잃은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특히 이황에 대해서는 "과거로 벼슬길에 나와 완전히 나아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비웃으면서 스스로 중도라 여겼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정인홍은 더욱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날 을사년과 정미년 사이에 아주 높은 벼슬을 했고, 혹은 청요직淸要職을 맡았으니,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을사사화 때 이언적은 좌찬성이었고 양재역 벽서사건 때 이황은 홍문관 응교였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당연히 물러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유교의 출사 원칙에 비춰보면, 간신과 외척의 전횡으로 뜻있는 선비들이 죽어가던 시기에 주요 관직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정인홍은 바로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178-9)


"하지만 정인홍의 이언적·이황 비판은 오히려 반대 세력의 결속을 강화시킴으로써 (영창대군 사사와 인목대비 유폐라는 강경책으로 일관한) 북인 정권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해군은 조식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받을 때마다 '후일을 기다리자'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마땅히 의논해야 한다'와 같은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이다." "광해군이 비록 대북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왕위에 올랐고 국정을 운영했지만, 기반은 기반에서 멈춰야 하는 것이 정치의 철칙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대북 세력은 왕권을 떠받치는 기반이 아니라 왕권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광해군으로서는 대북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갖는 것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조식의 문묘 종사를 극구 저지했던 것은 살아 있는 권력인 대북 세력에게 성현의 후예라는 권위까지 주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188-9)


6장 이이·성혼, 당쟁에 빛바랜 영광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들이 반정의 타도 대상을 정인홍·이이첨의 대북 일파로 한정시킴으로써 얻은 효과는 대북 세력과 대북 이외의 세력 사이의 대립 구도를 만든 것이었다." 서인들은 남인들을 적극 끌어들이고 일부 북인 인사들을 등용하기는 했지만 "애써 잡은 권력을 다른 정파와 나누어 가진다거나 권력 자체를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인조반정 직후에 공신들이 국혼國婚을 놓치지 않고 산림山林, 즉 신망이 높은 재야 선비를 우대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국혼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들의 당파에서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겠다는 것으로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왕실과의 결탁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산림을 우대하겠다는 것은 학문과 신망이 높은 선비들을 등용함으로써 사림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겠다는 생각이었다."(215-6)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면 선비들이 만족할 것이라고 했지만,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는 문묘 종사를 경솔하게 처리할 수 없으며, 더욱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것은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인조는 권력이 서인들에게 집중된다는 사실과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218-9)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숙종 8년(1682) 5월 20일이었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논의가 일찍부터 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와 같이 논의되고, 결국 이들의 문묘 종사가 문묘의 개정 작업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에는 몇 가지 숨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송나라 3현과 함께 논의함으로써 문묘 종사의 초점을 흐리고, 결과적으로 남인들의 반발을 완화할 전략일 수 있다. 둘째는 이이와 성혼의 지위를 송나라 3현과 마찬가지로 도의 전승이라는 맥락에서 평가하겠다는 전략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는 사태를 겪은 후) 숙종 20년(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기에 이르렀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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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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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선 중종 대라는 시공간


"필자는 병인정변(중종반정, 1506)부터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까지 118년에 걸친 시기를 조선 중기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를 가장 조선답게 만든 결정적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가치들이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인 힘을 얻고 본격적으로 작동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추동한 전환기의 특징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의 충효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천명했음에도 권좌를 노린 정변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주자가례』 보급에 힘을 쏟았지만 전통적 가족제도와 의례 제도는 여전히 건재했다. 사대 정책을 표방했음에도 명을 유일한 상국上國으로서가 아닌, 이웃에 있는 한 대국大國 정도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천명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가 사회혁명에 준하는 급격한 변화를 단기간에 가져온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23-4)


2장 찬탈과 반정의 시대 : 조선 초기 왕위 계승 문제


"(중종 이전) 열 명의 군왕 가운데 태조(r. 1392~1398), 정종(r. 1398~1400), 단종(r. 1452~1455), 연산군(r. 1494~1506) 등 무려 네 명이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찍 죽는 바람에 일반적인 경우의 수로 보기 어려운 문종과 예종(r. 1468~1469)을 제외하고 본다면, 여덟 명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네 명이 타의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난 셈이다. 게다가 타의로 왕위에서 물러난 이 네 명 가운데 노산군(단종)과 연산군 두 명(50%)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유배를 당한 뒤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뿐 아니라 중종 당대의 시점에서 볼 때 열 명의 선왕 가운데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즉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이 공정왕恭靖王(영안군, 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 등 무려 세 명(30%)이었다. 이런 수치는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인물 뒤에 가려져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15세기 조선 국왕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40-1)


# 중종 이전 왕들의 왕위 계승의 특징

1. 왕위 계승이 힘의 역학 관계에 좌우되는 경우가 잦았다.

2. 총 10명 중 종법에 부합한 계승자가 4명(문종·단종·예종·연산군), 타의로 권좌에서 물러난 왕이 4명(태조·정종·단종·연산군)이다.

3. 그 중 3명(공정왕(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은 중종대까지도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4. 장자 승습이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왕권의 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5.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경우에도 실제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충분한 정지 작업을 거쳤다.


"조선시대가 이전과 다른 점은 어떤 권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고려 무신정권 때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일은 이미 조선 사회에서는 발생할 수 없었다. 조선의 권력 구조가 유림이라는 지식인 사회에 폭넓게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 참여 가능 인구가 이전에 비해 대폭 증가했으며, 또한 상당한 수준의 문치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시대는 왕의 권위가 한편으로 무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확립된 어떤 원칙이나 이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발생한 같은 정변임에도 태종의 즉위와 달리 세조의 즉위만 찬탈로 규정되어 이후 정치 무대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그 사건이 바로 이런 장기사적長期史的 변화가 시작된 일종의 전환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55-6)


"조선왕조의 정치 구조와 관련해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특징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정치는 현재 권좌에 앉아 있는 인물의 개인 성향에 따라 쉽게 좌우된다기보다는 국왕의 권위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어떤 가치, 이를테면 성리학에서 추구한 도道가 지식인 사회 전반에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고 실제로 수용되고 있었다. 둘째, 반정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조선 최초의 사례라는 데서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반정 이후 5년 동안 도성에서 발생한 역모 사건이 무려 다섯 차례에 이를 정도로, 정변 주도 세력이 반정의 명분에 부합하는 새 정치를 추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상태가 그런 예이다. 중종의 즉위가 그나마 반정으로 인정받고 새 정권이 왕조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연산군의 폭정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62)


"이렇듯 파란만장한 정치 현실을 정正으로 되돌린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침내 중종은 즉위했다. 그 방법도 정변이라는 비상수단이었다. 따라서 일단 급선무는 왕실과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변(반란)을 반정으로 미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했다. 이는 중종 정권이 반역과 찬탈을 반정으로 뒤바꾼 패러독스를 어떻게 풀 것인가의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출범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으로 점철된 과거 정치사의 청산 문제도 중종 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같은 시대적 과제는 과거 청산이 유교적 가치를 현실 정치에 좀 더 충실하게 적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조야에 널리 확산되었던 분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중종과 사림은 본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정 직후부터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임과 동시에 길항 관계에 놓여 있었다."(64-5)


3장 사대의 시대 : 중종의 사대 정책과 조명 관계


재위 8년째인 1513년, 친정을 선언한 다음날 내린 첫 인사가 "모두 정변(반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등용 이후 반정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첫 친정 인사에 임한 중종의 의도는 잘 드러난다. 이후 조광조(1482~1519)의 발탁을 신호로 반정공신에 비판적인 이른바 사림을 대거 등요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교 도덕을 앞세워 반정공신들의 권력 독점과 전횡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그들을 통해 왕의 권위를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일거에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다시 공신들이 장악했다. 중종은 그런 반전을 정당화해줌으로써, 자신이 견제하고자 했던 반정공신들의 품 안에서 왕위를 유지하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무력을 보유한 공신들의 압력에 굴복한 중종의 위상은 이제 즉위 초기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었다." 여기서 "중종이 새롭게 찾은 돌파구는 바로 명 황제였다."(98-9)


"세조 대 이후 조선의 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국내에서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천자의 권위를 빌리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이미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천자의 질서 안에 확실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건국 초기의 불안하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조선의 국왕(태종, 세종)은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 황제와 돈독한 군신 관계를 통해 조선이라는 신생 왕조의 국제적 위상과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반해 새 왕조의 정당성과 왕실의 정통성이 온 백성에게 이미 확실하게 각인된 15세기 중엽 세조 대를 기점으로 해서 대명 사행은 의례적으로 흐르고, 왕실의 권위를 국내에서 스스로 높이는 흐름이 이어졌다."(79) "근 40년에 달하는 중종 대(1506~1544)의 진하사 파견 사례에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중종 자신이 특별 진하사 파견에 매우 예민했다는 점이다."(81)


"가정제는 (구묘九廟 건립을) 공식적으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조선이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에 대해 중종을 크게 치하하고 특별히 푸짐한 하사품을 내려 중종의 위세를 높여주었다. 이에 고무된 중종은 이후로 사행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진하나 진위를 하기 위해 명 내부 사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알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을 가정제가 각별히 치하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조정에서 거의 모든 논의는 공문과 상관없이 가급적 빨리 진하하려는 중종이 주도권을 쥐고 전개되었다." "이후 사행에 대한 중종의 관심은 거의 집착 수준으로 높아져, 정기 사행과 당연 사행 외에도 갖가지 명목의 특별 사행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진위나 진하를 한 번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가정제가 답으로 칙서를 내린다거나 조선 사신에게 좀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보고를 들으면 곧바로 사은사를 파견하는 식의 사행이 줄을 이었다."(89-90)


# 중종대 대명 진하와 국내 진하 비율

1. 기묘사화 이전 : 17% - 83%

2. 기묘사화 이후 : 76% - 24%


"조선 왕조의 양대 국시는 유교와 사대였다.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는 유교적 군신 관계에 기초한 유교적 이념으로 개념화됨으로써 유교와 사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종 대에 이르러 명·조선 관계에 부자 관계가 더해짐으로써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우선 부자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절대 가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군주의 사명보다 더 강조한 맹자의 교시는 유교적 부자 관계라는 도덕률이 안고 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중종이 왕위에 '앉혀진' 것은 조선의 대명 태도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따라서 공신·권신들의 전횡과 도학정치론자들의 배타성 모두에 위협을 느낀 중종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상위의 권위인 명 황제, 다른 말로 자기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해 준 천자에게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105-6)


4장 소중화의 시대 : 명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


# 명의 파병 요구와 조선의 대처 양상

1. 1449년(세종 31) : 야선也先이 이끄는 몽골을 공격하는 대규모 원정에 파병 요청 - 조선 출병시 왜나 여진이 그 틈을 노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

2. 1467년(세조 13) : 요동 변경을 침탈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공격하는 원정에 파병 요청 - 독자적으로 변경 지역의 안정화 계획을 짜고 있던 조선은 기꺼이 출병

3. 1479년(성종 10) : 건주여진 공격 원정에 재차 파병 요청 - 명에 대한 사대 정책도 조선에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해 파병 결정 철회

4. 1543년(중종 38) : 건주여진 정벌 시도 재등장 - 북방 사민 정책까지 보류하면서 징병을 시행했으나, 몽골 위협이 높아지면서 여진 정벌 계획이 보류되어 파병 중단


"명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와 관련해 중종 대에 발생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사림) 사이에서 강하게 확산된 소중화 의식 및 그에 따라 화이華夷 구분을 중시하는 풍조의 유행과도 관련 있다." "명 사신이 조선을 소중화로 인정했다는 기록이 성종 대에 처음 등장한 점은 이전의 명 사신들이 조선을 천자의 교화를 받은 동번東藩 또는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 특별히 생각하면서도 대체로 이夷로 인식했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135-6) "동아시아 사회에서 음양론이 갖는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감안할 때, 중화와 이적의 관계를 음양의 논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중종 대라는 점, 특히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추구한 사림이 득세하던 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황은 천자에 대한 사대를 불사이군不事二君과 같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이이 역시) 보편적 중화국인 명에 갖추는 사대의 예란 상황을 초월해 지켜야 할 절대 의리라고 규정하였다."(140-1)


중종 대에는 대명 관계에서 기존의 군신 관계에 더해 부자 관계가 추가되었다. "중종 이전의 사례들은 모두 외교문서에서 명 황제 개인을 칭송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부모라는 말이 사용되었지만,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명 자체를 실제로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는 표현이 조정의 일반적인 논의 중에도 등장했다. 이는 명과 조선의 관계가 이전의 군신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자 관계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유교화와 대명 사대를 새 왕조의 양대 근간으로 천명하고 출범한 조선 왕조에서 그 둘이 군신(忠) 및 부자(孝)라는 유교적 가치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결합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신 관계와 부자 관계는 같은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두었을지라도 그 가치의 절대성과 지속성에서 확연히 다르다." "효를 강조한 『소학』이 바로 이 시기에, 특히 중종 대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점도 이런 시대 분위기의 산물이었다."(145-6)


5장 사림의 시대 : 정치쇄신운동과 사림


훈구/사림 이론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첫째, 사회경제적 기반이나 특정 정치 현안에 대한 태도 등을 기준으로 훈구와 사림을 구분하는 설명 틀은 사실과 어긋나는 사례가 너무 많다. 둘째, 사림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라 기존 지배 엘리트층의 일원이었다. 셋째, 대체로 서울에 기반을 둔 명문거족 출신들이 사림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넷째, 그들은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 과정에서 당시 훈척勳戚이라 불린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했다. 다섯째,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명문거족 집안들과 긴밀한 혈연관계를 유지했다." 태조부터 중종 대까지 쓰인 '사림'이라는 단어는 "모두 '유교적 선비 그룹' 정도의 뜻으로, 이를테면 유림이나 유교적 식자층의 뜻으로 쓰였다. 또한 "조정에 (들어와) 있는 여러 사림"이라는 구체적인 용례가 있는 점으로 보아, 사림은 관료만도 아니고 유생만도 아닌, 성리학적 가치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모든 지식인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176-7)


"시기와 공간을 초월해 유교 문명권에서 두루 쓰이던 사림이라는 용어가 유독 조선 전기의 성종-중종 연간에 정치 무대의 한복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182) "조선왕조가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을 내세우고 유교를 천명한 이상, 유교적 가치를 정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특히 세조의 패륜적 찬탈 행위, 연산군의 반유교적 폭정, 그리고 아무리 연산군의 잘못이 컸을지라도 간쟁이 아닌 쿠데타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태생적 약점, 더 나아가 반정공신들의 부도덕성 등등, 당시의 혼탁한 정치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 쇄신이 절박하다는 공감대를 조야에 폭넓게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의 수가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림의 외연도 더욱 확대되어갔다."(185)


"결국 성종-중종 대에 걸쳐 발생한 숱한 정치적 충돌은 서로 다른 세력 기반을 지닌 이질적 계층(계급) 간의 충돌이 아니라, 유교 이념과 현실이 동떨어진 모순적인 조선 사회에서 일종의 정치쇄신운동과 정풍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다. 선조 즉위 초기에 "마침내 사림의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사림운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전체 양반 사회로 계속 확산된 결과이지, 물질적 기반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사회계층 사이에서 발생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즉 유교적 가치와 정치 현실 사이의 모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던 세조 때부터 명종 때까지 약 100년을 거치면서 조선의 유학 성향은 힘과 칼의 논리로 유지되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계속 진화해갔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 힘으로 막아내기 어렵게 되자, 기성 정치권의 대신들 일부는 사림운동을 인정하는 쪽으로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188-9)


"한편 이런 사림의 성격과 관련해서 조선 전기 정치사를 중앙(center)과 지방(periphery)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사림의 대두는 특정 사회계층이 성장해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결과도 아니고, 길재(1353~1419)처럼 지방에 은둔했던 절의파의 학문이 심화된 결과도 아니며, 지방에서 발생한 어떤 힘이 중앙(정부)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림 및 사림운동의 대두는 학문·사상적으로는 조선 건국 이후 국가(중앙)가 일면 강제성을 띠면서까지 보급하고 장려했던, 그래서 한양에서부터 시작된 유교화 정책의 산물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세조 이후 파행적으로 진행된 정치 현실에 대해 유생과 유학자들이 반발한 결과였다. 따라서 사림은 사실상 중앙에서 발생한 현상이자 운동이었다. 더 크게 보면 중앙에서 발생한 사림운동이 사화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향약이나 서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195)


6장 실천의 시대 : 유교적 가치의 실천 문제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보급 과정에서 그 핵심 공간으로 기능한 곳은 바로 중앙이었고, 주요 인물들 또한 대개 중앙에서 공부하고 급제하여 관계에 들어선 자들이었다. 성리학은 불교의 세속화와 몽골 지배의 후유증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 규범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 논쟁보다는 사회윤리나 정치 이념 중심의 현실적 사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불교 비판이나 토지제도 개혁과 같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기론理氣論 자체보다는 오륜에 바탕을 둔 충忠·효孝·제悌 및 의리와 명분 등 윤리적인 가치와 그 실천을 매우 중시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의 성리학은 그 출발부터 철학적인 면보다는 사회윤리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성향을 띠었다."(205)


"역설적이게도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성리학은 16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유학의 정통 계보에서 제외된 인물들에 의해 발전했다. 그들은 대개 조선의 건국 과정이나 새 문물 정비 과정에 적극 참여한 유신儒臣들이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정도전(1342~1398)과 권근(1352~1409)을 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새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불교보다 유교가 우월하다는 점을 이론적 철학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국책 담당자로서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도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그 가치의 현실 적용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쪽은 바로 이들, 곧 이른바 관학파 유학자들이었다. 조선 초기(15세기) 성리학의 특성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조선의 건국 주체 세력이 새 왕조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209-10)


건국 후 어느 정도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자 역성혁명 논리를 대체하는 절의의 가치와 성리학적 왕도정치 사상이 체제 이념으로 부상했다. "'사림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정치적 충돌이 일어났을지언정 정치 무대에서 성리학 이념을 최대한 타협 없이 추구한다는 대명제에 관한 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국가에서 주도한 이런 시대 분위기는 성리학 입문서 가운데 하나인 『소학』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학』은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과 인륜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입문서이자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의 가치를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 실천하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둔 책으로, 치인治人의 조건을 강조한 『대학연의』와 짝을 이루는 성리학 기본서이다." "조광조 등이 득세한 뒤인 1518년(중종 13)에는 국가에서 『소학』 1300부를 간행해 신료들과 종친에게 나눠주고 아동을 훈육하도록 조치했다."(216-8)


"『소학』과 함께 성리학적 유교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주자가례』의 보급 과정에서도 그 주체는 언제나 중앙의 조정이었으며, 이른바 사림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 차원에서 꾸준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린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성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적의 보급과 장려를 통한 유교화는 향촌에 기반을 둔 특정 사회경제적 계층의 출현 때문이 아니라, 유교를 표방하고 건국된 이래 중앙에서 꾸준히 추진한 유교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 관련 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비롯해 건국 이후 유교화 과정에서 핵심 독립변수로 기능한 것은 중앙, 곧 국가였다는 점이다. 16세기 전반의 중종 대는 이런 장기적인 유교화 흐름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곡점을 찍은 시대였다."(224-5)


공리功利에 대한 인식은 15세기만 해도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한 상대적 가치로 간주했지만 16세기, 특히 중종 대에 들어서면 공리의 행태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조광조 등 '사림운동'의 주동자들은 공리를 추구하는 무리라는 이유로 공신들을 공격했으며, 자신들끼리는 서로 공리를 배격한다며 칭찬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자의 품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소인의 품성을 비난하는 추세로 정쟁이 진행된 사실은 성리학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자리할 때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덕德과 인仁, 그리고 도道를 강조함으로써 군자상의 실현을 서로 독려하고 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공명과 사리를 좇는 소인으로 몰고 가 제거하는 식의 논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는 이른바 사림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조정에서 벌어진 실상이자, 이후에 붕당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벌어질 장기적 정쟁(당쟁)의 속성까지도 암시한다."(230-1)


"문묘종사 논의는 세종 대까지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문묘 제도의 강화가 필연적으로 문신 우대 분위기로 귀결될 것을 우려한 무신 계열 공신들의 반대도 있거니와, 군왕과 별도로 성현의 계보를 만드는 일을 왕권에 대한 견제로 인식한 태종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뿐 아니라 고려를 섬기던 권근이 절의를 버리고 새 왕조를 섬긴 일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왕의 재가를 받는 데도 실패했다." "새 왕조가 일단 건설되고 나니, 상황에 따라 절의를 보류할 수 있다는 혁명론보다는 왕조에 끝까지 충성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의론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가 우세했고, 이에 힘입어 정몽주의 복권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생사를 초월해 신하의 의리를 몸소 실천해 보인 정몽주를 추앙해야 한다는 논의를 제기한 이는 권근이었다." "더 나아가 중종 때 기묘사림은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여론을 크게 일으켰고, 논란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중종 12)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되었다."(239-40)


# 문묘 : 공자를 비롯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한 선유先儒를 기리고 제사하기 위해 설치한 묘당


"기묘사화 이후에 사림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학 계보를 만들었다." "이런 도통은 겉으로는 도학의 계보를 나타냈으나, 그 기준은 도학에 대한 학문적 성취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문적 심화보다는 절의의 실천 여부가 계보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학문적 수준을 보여줄 만한 성리학적 우주론이나 심성론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242) "그런데 문묘종사 논의는 단순히 5현에 대한 종사 문제로 끝나지 않고, 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는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이들이 문묘에 종사되고 국가가 이 도통을 공인한다면, 정통·비정통의 대립적 구분을 매우 중시하는 성리학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도통에서 제외되거나 도통 정립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성리학자들(학문)은 경우에 따라 이단으로 취급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244)


"조식(1501~1572)이 남명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성리학의 한 학파를 이루었음에도 그의 학문에 노자와 장자의 풍이 가미되었다는 이유로 이황에게 배척당한 일이나, 뜻과 행실은 뛰어나지만 학문에 주견이 없으니 도학군자라고 칭할 수 없다고 이이에게 무시당한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 조선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서경덕의 학문이 수론數論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현의 문묘종사는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을사사화(1545)로 이어지는 4대 사화가 잘못이었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였으며, "더 나아가 무오사화가 확대된 발단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음을 감안할 때, 5현 문묘종사운동은 곧 세조의 즉위와 그 정치를 '비非'로, 그 정치에 희생된 이들을 '시是'로 공인함으로써 시비를 분명히 하라는 사림의 외침이었다."(246-7)


# 1610년(광해군 2) 5현의 문묘종사 성사


7장 중종 대의 의미 : 사대와 유교의 만남


조선왕조가 추구한 유교적 가치의 실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의義, 곧 의리義理라 할 수 있다. "의리는 명분名分에 기초한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규범으로, 한 인간이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규정하는 이치를 말한다. 의리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유교적 행동 규범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충과 효도 따지고 보면 의리의 실천 규범에 해당된다."(252) "조선의 건국 주체는 명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어디까지나 중화 문명의 보편적 질서 안에서 향유하고자 했다. 달리 말하면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는 명에 사대함으로써 중화 질서를 따르고 보편적 중화 문명인 유교의 가치를 적극 수용하고 따르는 데 있었다." "의가 이런 보편성을 지닌 개념임을 감안하면, 조선 건국과 동시에 조정에서 스스로 환구단의 천제天祭를 폐지하고 그 후에도 조선의 천제는 참람한 일이라며 1897년까지 사실상 재개하지 않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254)


# 명분名分 : 각 사람의 칭호(名)에 따라 그 신분이 나누어진다는(分) 것으로,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분수(分數)와 직결되는 개념


조선 왕조의 유교화·중국화 정책은 당대에 가장 적절한 세계화 시도였다. "다만 문제는, 제국을 형성한 중원에서는 다양한 유교 학파들이 여러 의견과 해석을 내놓고 논쟁하면서 비교적 평화적으로 공존한 데 비해, 제국의 주변에 위치한 조선에서 유교는 어느 한 가지에만 몰입해 그것만을 정통으로 보고 다른 의견이나 해석을 죄다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배타적 폭력적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세계사에서 보면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경향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교화의 방향이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확실히 가닥을 잡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치 분야를 넘어 사회의 각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른바 변곡점이 바로 16세기 전반 중종 대였다."(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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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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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특징 :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출계집단(patrilineal decent group)을 기초로 한 친족제도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외가 생활은 부친이 자기 출생 집단으로 가족을 데리고 오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 동기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부친이 부모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부친의 정치 관직을 계승하는 것도 그 동기였다. 중년이 되면 남자는 본족, 외족, 처족(이 중 후자 둘은 일치할 수 있었다) 세 친족 집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 것 같다. 부친은 이 세 집단의 잠재적 성원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들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충원되는지 결정한 것은 정치적·경제적 이해였다."(116-7)


"고려의 맥락에서 볼 때, '족族'은 후손뿐 아니라 선조들까지 묶는 출계집단을 지칭한다. 혈통은 남성과 여성의 연결 고리 모두로 추적할 수 있다. 특별히 왕조 초기의 다양한 출계 계통은 근친혼으로 얽히거나 후손이 여전히 유명한 줄기를 구성하는 그들 선조의 특권을 누리면서 그 선조에 관하여 기억하는 데 불과했다. 유명한 출계집단은 공계(共系, cognatic) 친족체계라는 큰 저수조에 새로운 구성원을 충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것이다. 계승의 융통성 역시 많은 경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출계집단이 부계친이 없어 거의 끊어지게 될 때 사위나 그들의 자식을 통하여 새로운 활기를 얻었을 것이다." "출계집단은 중국식 성姓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인식하였는데, 성은 6세기 무렵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라의 왕실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 원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씨족과 박씨족은 성을 사용한 첫 번째 가문이다."(122-3)


점차 성이 '본관'과 동일시되면서, "어느 개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이 더는 출생지나 거주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것은 고위 신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속되었다."(124)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어갔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혔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 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126)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고려 왕조를 '불교시대'로 규정한 신유학자들은 신유학을 기초로 한 사회 질서 확립을 새 시대 출발을 보여주는 역사의 구분선으로 그으려 했다." "신유학 수용 초기에 주자를 추종한 한국의 신유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고전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 모델로서 적합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를 찾아냈다."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제도를 기술한 텍스트의 권위를 신봉한 신유학자들은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증거를 찾지 못할 때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며 때로는 결정을 몇 년간 미루기도 했다. 고대의 모델은 편리하지만 이단의 정책으로 손상받지 않을지 경계하면서 유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중국 성현들의 전통적 지혜에 가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1-3)


"통치는 백성의 거친 본성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고 우주와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교육적이면서 규제를 수반하는 절차였다. 그것은 풍속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구조적 원리인) '강기(綱紀)'를 활성화함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신민新民의 문제였다." "풍속의 기본 정수는 인간 사회에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구조, 다시 말해 군신, 부자, 부부 관계를 제공하는 삼강三綱에 들어 있다. 삼강은 군신 사이의 의[義], 부자 사이의 친[親], 부부 사이의 구분[別], 형제 사이의 출생 서열을 인정하는 서[序], 친구 사이의 신[信]같은 오륜으로 다시 강화된다. 이들 관계는 적절한 의례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의 관념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백성이 질서를 잘 지키도록 교화하는 핵심이 된다. 예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이다." "법은 단순히 백성을 통제하는[治] 수단만은 아니다. 법은 백성의 타고난 도덕적 잠재력을 발전시킴으로써 통치를 도와주는 보조 요소이다."(155-7)


"신유학자들은 중국 고대 성왕들이 고안한 모델을 기초로 이상적인 인간 질서를 개념화한 뒤 이데올로기적 외형을 내용으로 채워야 했다. 이데올로기에 구현된 원칙은 일상에서 사회 행위의 지표가 될 실행할 수 있는 계율로 축소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이를 정의하고 해석한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1403년에는 처음 입사入仕한 관리들과 이미 입사한 관리들 중 7품 이하는 모두 『주자가례』를 시험 보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주자가 고대와 당대의 시간 격차를 메우고, 의례와 법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안에서 천지의 원리를 구현하여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자가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자는 백성이 불교 전통에서 해방되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상적 의례 편람을 제공하였다고 했다. 특히 상례와 제사에 대한 입법은 불교의 오용을 막는 유익한 해독제로 평가되었다."(159)


"주자의 『근사록近思錄』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한편 어린이의 초급 독본이라 할 『소학』은 교육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1407년 권근은 이 책을 모든 학생의 필수 입문 텍스트로 만들자고 추천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에 응시하는 모든 이도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합격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162-3)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 과정은 중국의 사회제도를 모방하는 데 집중된 초기 사업부터 유교를 한국의 사회 상황에 융합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관습'[國俗]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하는 신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176-7)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한국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宗法, agnatic principle)을 사회 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 안에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사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제사는 친족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교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교 구도 속에서 제사는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준다. 무엇보다도 제사는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예를 들어 부계친에서 의례를 수행하는 서열의 위치는 출계집단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며, 정치의 장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한다."(180) "계승 문제에 장자상속을 도입한 것은 한국 사회가 고려 전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으며, 1471년의 법전 편찬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을 법적 장치로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98)


"서자(또는 첩자) 문제는 1413년(태종 13)에 적실(처)과 첩 사이의 엄격한 차별을 법제화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특히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가 먼 친척, 심지어 같은 형제의 아들보다 후사로서 선호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친의 선대를 봉사하는 서자는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경제적 혜택도 조금 누렸다. 더 나아가 봉사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 없는 관직에도 나아가는 등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그렇지만 남녀가 정식으로 결합하지 않은 사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었으므로 존엄한 가문에서는 서자에게 제사의 우선권을 맡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차자가 형이 죽은 뒤 후사로 세운 형의 서자에게서 봉사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종족 내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서자를 승중자承重者로 지명하는 것은 도덕적·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207-8)


"서자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법 관념에도 불구하고) 서자를 봉사에서 강제로 배제하려는 경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두드러졌다.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서자에 대하여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211)


"공신들은 특별히 친손 개념을 의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외손은 계속해서 봉사 자격을 가진 후보였다." "외손봉사는 금지되지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으나 이 같은 관행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관리들이 종법을 계속 내세우면서 외손봉사 관행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냈다. 이황(1501~1570)은 하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의 뿌리만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당에 서로 다른 두 출계집단이 제사지내는 것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며, 그같이 부정확한 제물은 조상의 영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황도 후계자가 없는 어머니 쪽 조상들에 대한 딜레마를 인식하였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특별히 방을 따로 마련하여 외조의 위패를 봉안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뒤 예학자들은 이황의 이러한 관점을 되풀이하였는데, 이 같은 관점은 주자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뿌리 깊은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221-2)


4장 상장례의 변화


"상례는 죽은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동시에 죽음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결 고리를 다시 구성한다. 죽음을 기념하는 이 과정은 친족 사이에 그 어떤 사회적 의례보다도 특별한 감정과 행동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통과 의례이다." "부계 친족을 확실하게 분류하는 오복제는 '사회적 혈족의 멀고 가까운[親疎] 관계'를 기초로 5등급으로 나누어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은 (부모의 경우에 해당하는) 3년부터 3개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상복 재료도 거친 베부터 고운 베까지 다양하다. 상복을 입는 친척은 위아래로 4대까지이며, 방계는 육촌까지로 한정하였다. 오복제는 부계친을 특히 강조하며 비부계친과 모계친 그리고 아내의 친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조화된 도해인 「오복도」는 사람의 애정과 감정의 정도를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공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애도를 넘어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적인 친족 행동의 패러다임이었다."(244-5)


"조선 전기의 입법가들은 부모상의 경우, 3년상을 치르는 것이 기본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3년상은 중국 고대 성현들이 사람의 감정을 기초로 고안한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완벽한 제도'라고 믿었다. 이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3년상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논의는 『논어』에 포함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아이는 3살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므로 3년 동안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례』에 따르면 모친에 대한 3년상은 부친이 먼저 사망한 뒤에만 적용되었다. 『의례』에는 모친이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면 모친이 하위에 있다는 표시로 재최장기를 갖추고 1년상만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자는 "가장인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모친에게 개인적으로 느끼는 존경을 감히 완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251)


"상복을 입는 규정은 상주가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 특별한 행동을 수반했다. 죽음은 오염을 의미했으며, 상喪은 길한 일과는 분리되어야 하는 흉한 일에 속했다. 길과 흉이라는 삶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의 거리는 상을 지내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전해졌다. 상주는 조악하고 색깔 없는 복을 입었는데, 이것을 지은 천이 조악하다는 것은 애도의 정도를 의미했다. 상주는 고기와 술, 양념을 삼가야 했으며 여자들의 거처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대신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켜야 했다. 시끄럽고 즐거운 오락거리와 말 타기, 성행위는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상중에는 혼례식을 치를 수 없었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상중에 겪어야 하는 고초와 옹색한 일상생활을 피하려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는 것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가장 흔한 위반은 부모 상중에 혼인하여 의도적으로 신부집에 거처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자식의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261)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상호대립적이었다." "불교에서는 주검이 흩어져서 '물고기와 새들이 먹이'가 되는 반면, 유교에서는 주검을 매장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순환한다고 여겨지는 기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만일 조상이 땅에서 평안을 찾는다면 자손은 세상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즉 나무뿌리가 불탄다면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은 말라죽으므로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성현들은 시체가 너무 빨리 부식할 것을 우려하여, 안팎이 견고한 관을 짜고 시체에 두꺼운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관 속에 침입한 해충이 주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류를 넣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묘는 이승[冥]과 저승[幽]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하였다."(267-8)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상속하는 고려의 관행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관행은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당시에는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러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사이의 차별이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서자 상속에 관한 규정은 모든 부계 후손에게 상속 특권을 주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사회적 출신이 여전히 개인 몫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적실이 낳은 아들이 있을 경우, 양첩자는 7분의 1을, 천첩자는 10분의 1을 받았다. 양첩자가 없을 때는 천첩자의 몫이 7분의 1로 늘어났다. 천첩자가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완전한 후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첩자는 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양첩자는 아버지와 가까운 방계친인 아버지 형제들과 공동으로 상속받아야 했다. 1405년 법규는 서자의 입지를 후사로 승격했지만 동시에 고려의 수평적 상속 전통을 마찬가지로 재확인하였다."(283-5)


"법에는 딸도 남자형제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조선 왕조 전반기에 딸의 상속권은 상당히 변하였다. 사실 16세기 초반까지도 아들이 없으면 외손이라도 조상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특별한 바람과 더불어 딸이 아버지 쪽 재산의 주요한 수여자로 지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와 같이 각별한 목적으로 딸에게 재산을 주는 사례(유교적 시각에서는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었다)가 있었는데도 딸이 점차 재산 상속 자격을 잃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나마 친정에 있던 여성의 상속 재산은 결국 양도할 수 없는 남편의 혼인 자산에 크게 보태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 같은 재산이 혼인할 때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것이라면 이는 신부가 첫 부인이 되기 위한 부가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하여 상속받았으면 남편 재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303-4)


양대 전란 이후 노비들이 대거 흩어지면서 토지 소유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응책이 절박해졌으며 이에 따라 제례를 시급히 혁신해야만 했다.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현존하는 상속 관행을 개정하여 토지 분산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의례편람에서 주장하듯이 장자를 세습 재산의 주요 상속자로 인정하면서 조상을 봉사하기 위해 세습 재산의 상당 몫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습 재산은 조상들이 자손 모두에게 물려주는 일종의 경제적 보험이라는 성격 대신 부계 자손들이 조상들에게 적절한 제례 행위를 하도록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관점은 대를 잇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 자신의 권리에서 후사로서 여성의 입지를 손상시켰다. 여성이 남편 집안에 통합되면서 이전에 받은 상속이나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재산은 그녀가 출생한 가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306-7)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유교는 남성 중심 철학이지만 남녀의 결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 즉 인간 도덕성의 토대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군신관계로 확대되는 사회화 과정의 원천으로도 본다. 우주론적 용어에서 볼 때 하늘[陽]은 땅[陰] 위에 군림하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명확한 위계질서는 우주론적으로 공인되어 인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유학자들은 여성의 내부·가사 영역과 남성의 외부·공식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성적 타락이나 이기심이 사회 불안이나 부부간의 역할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으므로 남녀 구분이 그러한 현상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316-7)


"1413년에 처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조처는 인간관계와 사회 지위를 분명하게 하는 결정적 수단으로 환영받았다. 이것은 유교 법제화의 이정표로 왕조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함축하였다. 한 명의 배우자를 처와 합법적 후사의 어머니로 격상한 것은 종법 원리에 명확한 개요를 마련하였으며, 여성을 남편의 출계집단에 굳게 결속해놓았다. 아울러 이 조처는 결과적으로 출신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 여성의 세계에 구조적 불평등을 가져왔다. 대체로 처는 양반 엘리트에서 고른 반면 첩은 더 낮은 계급에서 고르기 때문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부인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사회를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으로 이분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양반을 다른 계급과 분리하고 신분 내혼적 지위 집단으로 만드는 '사회적 방어막'은 한국을 세운 기자가 가져온 금법에서 유래한다고 믿어, 한국 사회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322-3)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성은 법으로 절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온상이 된다고 하여 1431년에는 무당집 출입도 금지되었다." "여성의 사찰 출입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 새로운 복장과 장식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은 옷을 어떠한 불온한 눈길도 닿을 수 없도록 입어야 했다. 특히 적처가 바깥에 나갈 때는 얼굴을 완전히 덮고 위로 올려서는 안 되는 쓰개치마를 사용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눈으로 쉽게 사회 계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의복 재료와 색깔 선택에 제한을 두었다."(353-4)


"조선 왕조의 유학자들은 아내를 내칠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법적 가치보다는 도덕적 압력으로 인식하였다. 혼인으로만 인정받고 사회 지위를 얻는 여성에게 남편 가족으로부터 쫓겨나는 것과 재혼할 경우 따라오는 사회적 오명이 가져다주는 위협은 여성을 복종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효율적 수단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 책임을 천성적으로 열등한 아내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돌리기 때문에 사간원은 큰 이유 없이 아내를 내쫓는 남편을 엄하게 다루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기를 요구하는 이유를 질투·중병·수다라고 해서 올린 사건은 대개 기각당했는데, 그런 것들은 단지 여성의 천성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배우자끼리 협의할 수 있는 것[完聚, 復合]으로 간주되었다." "남편이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효인데, 최고 불효는 계승자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369-70)


"혼인은 출계집단 전체의 일이므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혼인관계는 지속되었다. 배우자가 죽으면 아내의 지향점은 다음 세대로 향한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집안의 어른이 된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남편과 출계집단에 대한 아내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혼인관계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재혼할 정당성을 제거하였다." "유교 입법가들은 '정절을 지킨' 과부들을 특별한 경제적 수단으로 지원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적처로 인정받은 과부는 남편의 과전科田 일부를 받았는데, 아들이 있는 경우는 3분의 2를, 없는 경우는 3분의 1을 받았다. 이 토지는 '절의를 지키기 위한 토지'[守身田]라고 불렸으며 과부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래 지속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1466년 과전이 공전公田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신전은 폐지되었다. 수신전을 복원하자는 요구가 자주 있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374-5)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여말선초에 "가장 눈길을 끄는 분명한 변화는 출계 범위를 엄격하게 좁히는 것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후손을 망라한 고려의 출계집단은 이제 엄격하게 부계 체계가 되어야 했다." 출계집단의 구성원을 충원하는 기반은 "모든 후손을 망라하는 출계 원칙에서 배타적 원칙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모변의 친족 대부분에게 작용했다. 모변의 친족이 고려의 친족 구조에서 차지하던 압도적 위치를 점차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남계친 가운데 유명한 조상이 있는 후손은 대체로 자신의 남계 출계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출발점을 확보하려고 그 조상을 기억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출계집단이 이렇듯 부계로 출계 범위가 축소된 것은 장자상속이 제도화되어 우애에 입각한 계승과 균분 상속을 종식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제도화와 교화를 거친 후 수평적 사고방식에서 수직적으로 힘겨우면서도 복잡한 이동이 마무리되었다."(382-3)


출계 범위를 현저히 좁히는 변동을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조상 숭배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자접합親子接合, patrifiliation을 인간의 가장 기본 고리로 찬미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구조적 중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더 큰 계보적 출계의 맥락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했다. 출계집단 내에서 각 남계 구성원의 위치를 바꿀 수 없는 세대[世] 체계와 방계 구도에 따라 규정하면서 제사는 남계의 친족관계agnation를 이데올로기에서 살아 있는 실재로 바꾸었다. 제사는 종(출계 계통)을 분명히 하고 친족의 경계를 그었다. 이와 함께 조상의 사당 앞에 모인 남계친 사이에 같은 후손이라는 의식과 더불어 결속력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상 의례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분리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단체를 창안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부계 출계집단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384)


16-17세기의 신유학 이론가들은 중국 고전 및 신유학 이론과 배치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속國俗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 개념은 한국적 가치의 지속적인 힘, 특히 그중에서도 출계 및 사회 지위와 관련된 것을 서슴없이 인정하고 있다." 국속의 주요 요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엘리트의 지위를 결정하고 재생산하는 출계에서 모계가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각각의 부계를 대표하면서 그들의 출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세습적 정수精粹를 전하며, 그들에게 이러한 정수가 부족하다면 그들 남편의 출계집단은 반쪽 구성원이 된다. 엘리트에게 지위의 재생산은 앙변적兩邊的이다. 여성의 혈통에 대하여 여성 자신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신유학 수용 이전 과거 사회의 중요한 유풍이었다. 유교에서 부계친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것은 사실상 한국인의 부계 출계집단의 배타성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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