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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시대 - 조선의 유교화와 사림운동
계승범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7월
평점 :
1장 조선 중종 대라는 시공간
"필자는 병인정변(중종반정, 1506)부터 계해정변(인조반정, 1623)까지 118년에 걸친 시기를 조선 중기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조선왕조를 가장 조선답게 만든 결정적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성리학적 가치들이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인 힘을 얻고 본격적으로 작동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추동한 전환기의 특징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의 충효 사상을 정치 이념으로 천명했음에도 권좌를 노린 정변이 꼬리를 물고 발생했다. 『주자가례』 보급에 힘을 쏟았지만 전통적 가족제도와 의례 제도는 여전히 건재했다. 사대 정책을 표방했음에도 명을 유일한 상국上國으로서가 아닌, 이웃에 있는 한 대국大國 정도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천명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성행했다. 이 같은 현상은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가 사회혁명에 준하는 급격한 변화를 단기간에 가져온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23-4)
2장 찬탈과 반정의 시대 : 조선 초기 왕위 계승 문제
"(중종 이전) 열 명의 군왕 가운데 태조(r. 1392~1398), 정종(r. 1398~1400), 단종(r. 1452~1455), 연산군(r. 1494~1506) 등 무려 네 명이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일찍 죽는 바람에 일반적인 경우의 수로 보기 어려운 문종과 예종(r. 1468~1469)을 제외하고 본다면, 여덟 명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네 명이 타의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난 셈이다. 게다가 타의로 왕위에서 물러난 이 네 명 가운데 노산군(단종)과 연산군 두 명(50%)은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유배를 당한 뒤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뿐 아니라 중종 당대의 시점에서 볼 때 열 명의 선왕 가운데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즉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이 공정왕恭靖王(영안군, 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 등 무려 세 명(30%)이었다. 이런 수치는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인물 뒤에 가려져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15세기 조선 국왕의 자리가 얼마나 불안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40-1)
# 중종 이전 왕들의 왕위 계승의 특징
1. 왕위 계승이 힘의 역학 관계에 좌우되는 경우가 잦았다.
2. 총 10명 중 종법에 부합한 계승자가 4명(문종·단종·예종·연산군), 타의로 권좌에서 물러난 왕이 4명(태조·정종·단종·연산군)이다.
3. 그 중 3명(공정왕(정종)·노산군(단종)·연산군)은 중종대까지도 사후에 묘호를 받지 못하고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다.
4. 장자 승습이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왕권의 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5.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경우에도 실제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충분한 정지 작업을 거쳤다.
"조선시대가 이전과 다른 점은 어떤 권신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고려 무신정권 때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런 일은 이미 조선 사회에서는 발생할 수 없었다. 조선의 권력 구조가 유림이라는 지식인 사회에 폭넓게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치 참여 가능 인구가 이전에 비해 대폭 증가했으며, 또한 상당한 수준의 문치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조선시대는 왕의 권위가 한편으로 무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확립된 어떤 원칙이나 이념에 기초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발생한 같은 정변임에도 태종의 즉위와 달리 세조의 즉위만 찬탈로 규정되어 이후 정치 무대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 것은 그 사건이 바로 이런 장기사적長期史的 변화가 시작된 일종의 전환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55-6)
"조선왕조의 정치 구조와 관련해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특징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조선의 정치는 현재 권좌에 앉아 있는 인물의 개인 성향에 따라 쉽게 좌우된다기보다는 국왕의 권위보다 더 상위에 위치한 어떤 가치, 이를테면 성리학에서 추구한 도道가 지식인 사회 전반에 폭넓게 확산되어 있었고 실제로 수용되고 있었다. 둘째, 반정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해도, 그것이 조선 최초의 사례라는 데서 필연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반정 이후 5년 동안 도성에서 발생한 역모 사건이 무려 다섯 차례에 이를 정도로, 정변 주도 세력이 반정의 명분에 부합하는 새 정치를 추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상태가 그런 예이다. 중종의 즉위가 그나마 반정으로 인정받고 새 정권이 왕조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연산군의 폭정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62)
"이렇듯 파란만장한 정치 현실을 정正으로 되돌린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침내 중종은 즉위했다. 그 방법도 정변이라는 비상수단이었다. 따라서 일단 급선무는 왕실과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정변(반란)을 반정으로 미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했다. 이는 중종 정권이 반역과 찬탈을 반정으로 뒤바꾼 패러독스를 어떻게 풀 것인가의 문제를 태생적으로 안고 출범했음을 잘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세조의 찬탈과 연산군의 폭정으로 점철된 과거 정치사의 청산 문제도 중종 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 같은 시대적 과제는 과거 청산이 유교적 가치를 현실 정치에 좀 더 충실하게 적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공감대가 조야에 널리 확산되었던 분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중종과 사림은 본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반정 직후부터 매우 긴밀한 협력 관계임과 동시에 길항 관계에 놓여 있었다."(64-5)
3장 사대의 시대 : 중종의 사대 정책과 조명 관계
재위 8년째인 1513년, 친정을 선언한 다음날 내린 첫 인사가 "모두 정변(반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을 뿐 아니라 등용 이후 반정공신들의 전횡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첫 친정 인사에 임한 중종의 의도는 잘 드러난다. 이후 조광조(1482~1519)의 발탁을 신호로 반정공신에 비판적인 이른바 사림을 대거 등요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교 도덕을 앞세워 반정공신들의 권력 독점과 전횡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그들을 통해 왕의 권위를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일거에 사림세력을 숙청한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다시 공신들이 장악했다. 중종은 그런 반전을 정당화해줌으로써, 자신이 견제하고자 했던 반정공신들의 품 안에서 왕위를 유지하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무력을 보유한 공신들의 압력에 굴복한 중종의 위상은 이제 즉위 초기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었다." 여기서 "중종이 새롭게 찾은 돌파구는 바로 명 황제였다."(98-9)
"세조 대 이후 조선의 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국내에서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천자의 권위를 빌리는 데 급급해 하지 않았다. 이미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된 천자의 질서 안에 확실하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건국 초기의 불안하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조선의 국왕(태종, 세종)은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 황제와 돈독한 군신 관계를 통해 조선이라는 신생 왕조의 국제적 위상과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반해 새 왕조의 정당성과 왕실의 정통성이 온 백성에게 이미 확실하게 각인된 15세기 중엽 세조 대를 기점으로 해서 대명 사행은 의례적으로 흐르고, 왕실의 권위를 국내에서 스스로 높이는 흐름이 이어졌다."(79) "근 40년에 달하는 중종 대(1506~1544)의 진하사 파견 사례에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은 중종 자신이 특별 진하사 파견에 매우 예민했다는 점이다."(81)
"가정제는 (구묘九廟 건립을) 공식적으로 알리지도 않았는데 조선이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에 대해 중종을 크게 치하하고 특별히 푸짐한 하사품을 내려 중종의 위세를 높여주었다. 이에 고무된 중종은 이후로 사행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진하나 진위를 하기 위해 명 내부 사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알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와 진하한 일을 가정제가 각별히 치하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 조정에서 거의 모든 논의는 공문과 상관없이 가급적 빨리 진하하려는 중종이 주도권을 쥐고 전개되었다." "이후 사행에 대한 중종의 관심은 거의 집착 수준으로 높아져, 정기 사행과 당연 사행 외에도 갖가지 명목의 특별 사행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진위나 진하를 한 번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않고, 가정제가 답으로 칙서를 내린다거나 조선 사신에게 좀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는 보고를 들으면 곧바로 사은사를 파견하는 식의 사행이 줄을 이었다."(89-90)
# 중종대 대명 진하와 국내 진하 비율
1. 기묘사화 이전 : 17% - 83%
2. 기묘사화 이후 : 76% - 24%
"조선 왕조의 양대 국시는 유교와 사대였다. 명 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는 유교적 군신 관계에 기초한 유교적 이념으로 개념화됨으로써 유교와 사대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중종 대에 이르러 명·조선 관계에 부자 관계가 더해짐으로써 변화가 발생했다. 이런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우선 부자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뀔 수 없는 불변의 절대 가치라는 점에서 그렇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군주의 사명보다 더 강조한 맹자의 교시는 유교적 부자 관계라는 도덕률이 안고 있는 특성을 잘 보여준다." "중종이 왕위에 '앉혀진' 것은 조선의 대명 태도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따라서 공신·권신들의 전횡과 도학정치론자들의 배타성 모두에 위협을 느낀 중종이 기묘사화를 계기로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돌파구를 찾고, 상위의 권위인 명 황제, 다른 말로 자기를 조선 국왕으로 책봉해 준 천자에게 의존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105-6)
4장 소중화의 시대 : 명나라에 대한 인식의 변화
# 명의 파병 요구와 조선의 대처 양상
1. 1449년(세종 31) : 야선也先이 이끄는 몽골을 공격하는 대규모 원정에 파병 요청 - 조선 출병시 왜나 여진이 그 틈을 노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완곡하게 거절
2. 1467년(세조 13) : 요동 변경을 침탈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공격하는 원정에 파병 요청 - 독자적으로 변경 지역의 안정화 계획을 짜고 있던 조선은 기꺼이 출병
3. 1479년(성종 10) : 건주여진 공격 원정에 재차 파병 요청 - 명에 대한 사대 정책도 조선에 이익이 있을 경우에만 유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해 파병 결정 철회
4. 1543년(중종 38) : 건주여진 정벌 시도 재등장 - 북방 사민 정책까지 보류하면서 징병을 시행했으나, 몽골 위협이 높아지면서 여진 정벌 계획이 보류되어 파병 중단
"명을 대하는 조선의 태도와 관련해 중종 대에 발생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당시 조선 지식인들(사림) 사이에서 강하게 확산된 소중화 의식 및 그에 따라 화이華夷 구분을 중시하는 풍조의 유행과도 관련 있다." "명 사신이 조선을 소중화로 인정했다는 기록이 성종 대에 처음 등장한 점은 이전의 명 사신들이 조선을 천자의 교화를 받은 동번東藩 또는 예의지국禮義之國으로 특별히 생각하면서도 대체로 이夷로 인식했던 것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135-6) "동아시아 사회에서 음양론이 갖는 거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감안할 때, 중화와 이적의 관계를 음양의 논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중종 대라는 점, 특히 성리학적 도학 정치를 추구한 사림이 득세하던 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황은 천자에 대한 사대를 불사이군不事二君과 같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가치로 자리매김했다. (이이 역시) 보편적 중화국인 명에 갖추는 사대의 예란 상황을 초월해 지켜야 할 절대 의리라고 규정하였다."(140-1)
중종 대에는 대명 관계에서 기존의 군신 관계에 더해 부자 관계가 추가되었다. "중종 이전의 사례들은 모두 외교문서에서 명 황제 개인을 칭송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으로 부모라는 말이 사용되었지만,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명 자체를 실제로 부모의 나라로 인식하는 표현이 조정의 일반적인 논의 중에도 등장했다. 이는 명과 조선의 관계가 이전의 군신 관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자 관계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유교화와 대명 사대를 새 왕조의 양대 근간으로 천명하고 출범한 조선 왕조에서 그 둘이 군신(忠) 및 부자(孝)라는 유교적 가치에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결합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신 관계와 부자 관계는 같은 유교 이념에 바탕을 두었을지라도 그 가치의 절대성과 지속성에서 확연히 다르다." "효를 강조한 『소학』이 바로 이 시기에, 특히 중종 대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점도 이런 시대 분위기의 산물이었다."(145-6)
5장 사림의 시대 : 정치쇄신운동과 사림
훈구/사림 이론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첫째, 사회경제적 기반이나 특정 정치 현안에 대한 태도 등을 기준으로 훈구와 사림을 구분하는 설명 틀은 사실과 어긋나는 사례가 너무 많다. 둘째, 사림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계급이나 계층이 아니라 기존 지배 엘리트층의 일원이었다. 셋째, 대체로 서울에 기반을 둔 명문거족 출신들이 사림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넷째, 그들은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 과정에서 당시 훈척勳戚이라 불린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했다. 다섯째, 그럼에도 그들은 그런 명문거족 집안들과 긴밀한 혈연관계를 유지했다." 태조부터 중종 대까지 쓰인 '사림'이라는 단어는 "모두 '유교적 선비 그룹' 정도의 뜻으로, 이를테면 유림이나 유교적 식자층의 뜻으로 쓰였다. 또한 "조정에 (들어와) 있는 여러 사림"이라는 구체적인 용례가 있는 점으로 보아, 사림은 관료만도 아니고 유생만도 아닌, 성리학적 가치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모든 지식인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176-7)
"시기와 공간을 초월해 유교 문명권에서 두루 쓰이던 사림이라는 용어가 유독 조선 전기의 성종-중종 연간에 정치 무대의 한복판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182) "조선왕조가 건국이념으로 성리학을 내세우고 유교를 천명한 이상, 유교적 가치를 정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주장에는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특히 세조의 패륜적 찬탈 행위, 연산군의 반유교적 폭정, 그리고 아무리 연산군의 잘못이 컸을지라도 간쟁이 아닌 쿠데타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 병인정변(중종반정)의 태생적 약점, 더 나아가 반정공신들의 부도덕성 등등, 당시의 혼탁한 정치 현실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 쇄신이 절박하다는 공감대를 조야에 폭넓게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지식인들의 수가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림의 외연도 더욱 확대되어갔다."(185)
"결국 성종-중종 대에 걸쳐 발생한 숱한 정치적 충돌은 서로 다른 세력 기반을 지닌 이질적 계층(계급) 간의 충돌이 아니라, 유교 이념과 현실이 동떨어진 모순적인 조선 사회에서 일종의 정치쇄신운동과 정풍운동으로 자연스럽게 발생했던 것이다. 선조 즉위 초기에 "마침내 사림의 세상이 되었다"는 말이 나온 것은 사림운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전체 양반 사회로 계속 확산된 결과이지, 물질적 기반을 달리하는 이질적인 사회계층 사이에서 발생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즉 유교적 가치와 정치 현실 사이의 모순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던 세조 때부터 명종 때까지 약 100년을 거치면서 조선의 유학 성향은 힘과 칼의 논리로 유지되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유교적 가치의 현실 적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계속 진화해갔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흐름을 더 이상 힘으로 막아내기 어렵게 되자, 기성 정치권의 대신들 일부는 사림운동을 인정하는 쪽으로 서서히 선회하기 시작했다."(188-9)
"한편 이런 사림의 성격과 관련해서 조선 전기 정치사를 중앙(center)과 지방(periphery)이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사림의 대두는 특정 사회계층이 성장해 정치의 전면에 나선 결과도 아니고, 길재(1353~1419)처럼 지방에 은둔했던 절의파의 학문이 심화된 결과도 아니며, 지방에서 발생한 어떤 힘이 중앙(정부)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림 및 사림운동의 대두는 학문·사상적으로는 조선 건국 이후 국가(중앙)가 일면 강제성을 띠면서까지 보급하고 장려했던, 그래서 한양에서부터 시작된 유교화 정책의 산물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세조 이후 파행적으로 진행된 정치 현실에 대해 유생과 유학자들이 반발한 결과였다. 따라서 사림은 사실상 중앙에서 발생한 현상이자 운동이었다. 더 크게 보면 중앙에서 발생한 사림운동이 사화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는 했지만 향약이나 서원과 같은 제도를 통해 지방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다."(195)
6장 실천의 시대 : 유교적 가치의 실천 문제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보급 과정에서 그 핵심 공간으로 기능한 곳은 바로 중앙이었고, 주요 인물들 또한 대개 중앙에서 공부하고 급제하여 관계에 들어선 자들이었다. 성리학은 불교의 세속화와 몽골 지배의 후유증으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들은 성리학적 가치 규범을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철학 논쟁보다는 사회윤리나 정치 이념 중심의 현실적 사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불교 비판이나 토지제도 개혁과 같은 현실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기론理氣論 자체보다는 오륜에 바탕을 둔 충忠·효孝·제悌 및 의리와 명분 등 윤리적인 가치와 그 실천을 매우 중시했다. 이런 까닭에 고려의 성리학은 그 출발부터 철학적인 면보다는 사회윤리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성향을 띠었다."(205)
"역설적이게도 조선 건국을 전후한 시기의 성리학은 16세기에 만들어진 조선 유학의 정통 계보에서 제외된 인물들에 의해 발전했다. 그들은 대개 조선의 건국 과정이나 새 문물 정비 과정에 적극 참여한 유신儒臣들이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정도전(1342~1398)과 권근(1352~1409)을 꼽을 수 있다. 새 왕조의 건국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새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불교보다 유교가 우월하다는 점을 이론적 철학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국책 담당자로서 유교 이념을 현실 정치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도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그 가치의 현실 적용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쪽은 바로 이들, 곧 이른바 관학파 유학자들이었다. 조선 초기(15세기) 성리학의 특성이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조선의 건국 주체 세력이 새 왕조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209-10)
건국 후 어느 정도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자 역성혁명 논리를 대체하는 절의의 가치와 성리학적 왕도정치 사상이 체제 이념으로 부상했다. "'사림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정치적 충돌이 일어났을지언정 정치 무대에서 성리학 이념을 최대한 타협 없이 추구한다는 대명제에 관한 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국가에서 주도한 이런 시대 분위기는 성리학 입문서 가운데 하나인 『소학』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소학』은 성리학의 핵심인 수기치인과 인륜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입문서이자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의 가치를 먼저 자신에게 적용해 실천하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둔 책으로, 치인治人의 조건을 강조한 『대학연의』와 짝을 이루는 성리학 기본서이다." "조광조 등이 득세한 뒤인 1518년(중종 13)에는 국가에서 『소학』 1300부를 간행해 신료들과 종친에게 나눠주고 아동을 훈육하도록 조치했다."(216-8)
"『소학』과 함께 성리학적 유교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주자가례』의 보급 과정에서도 그 주체는 언제나 중앙의 조정이었으며, 이른바 사림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 차원에서 꾸준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에 이르는 약 200년 동안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린 성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성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서적의 보급과 장려를 통한 유교화는 향촌에 기반을 둔 특정 사회경제적 계층의 출현 때문이 아니라, 유교를 표방하고 건국된 이래 중앙에서 꾸준히 추진한 유교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성리학 관련 서적의 출판과 보급을 비롯해 건국 이후 유교화 과정에서 핵심 독립변수로 기능한 것은 중앙, 곧 국가였다는 점이다. 16세기 전반의 중종 대는 이런 장기적인 유교화 흐름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변곡점을 찍은 시대였다."(224-5)
공리功利에 대한 인식은 15세기만 해도 상황에 따라 조정 가능한 상대적 가치로 간주했지만 16세기, 특히 중종 대에 들어서면 공리의 행태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조광조 등 '사림운동'의 주동자들은 공리를 추구하는 무리라는 이유로 공신들을 공격했으며, 자신들끼리는 서로 공리를 배격한다며 칭찬하는 모습을 보였다." "군자의 품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소인의 품성을 비난하는 추세로 정쟁이 진행된 사실은 성리학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자리할 때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덕德과 인仁, 그리고 도道를 강조함으로써 군자상의 실현을 서로 독려하고 교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공명과 사리를 좇는 소인으로 몰고 가 제거하는 식의 논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는 이른바 사림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조정에서 벌어진 실상이자, 이후에 붕당들 사이에서 처절하게 벌어질 장기적 정쟁(당쟁)의 속성까지도 암시한다."(230-1)
"문묘종사 논의는 세종 대까지도 결실을 보지 못했다. 문묘 제도의 강화가 필연적으로 문신 우대 분위기로 귀결될 것을 우려한 무신 계열 공신들의 반대도 있거니와, 군왕과 별도로 성현의 계보를 만드는 일을 왕권에 대한 견제로 인식한 태종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뿐 아니라 고려를 섬기던 권근이 절의를 버리고 새 왕조를 섬긴 일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왕의 재가를 받는 데도 실패했다." "새 왕조가 일단 건설되고 나니, 상황에 따라 절의를 보류할 수 있다는 혁명론보다는 왕조에 끝까지 충성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의론이 더 강조되는 분위기가 우세했고, 이에 힘입어 정몽주의 복권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생사를 초월해 신하의 의리를 몸소 실천해 보인 정몽주를 추앙해야 한다는 논의를 제기한 이는 권근이었다." "더 나아가 중종 때 기묘사림은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여론을 크게 일으켰고, 논란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17년(중종 12) 정몽주는 문묘에 종사되었다."(239-40)
# 문묘 : 공자를 비롯하여 유학 발전에 기여한 선유先儒를 기리고 제사하기 위해 설치한 묘당
"기묘사화 이후에 사림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학 계보를 만들었다." "이런 도통은 겉으로는 도학의 계보를 나타냈으나, 그 기준은 도학에 대한 학문적 성취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문적 심화보다는 절의의 실천 여부가 계보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학문적 수준을 보여줄 만한 성리학적 우주론이나 심성론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242) "그런데 문묘종사 논의는 단순히 5현에 대한 종사 문제로 끝나지 않고, 조광조→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는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이들이 문묘에 종사되고 국가가 이 도통을 공인한다면, 정통·비정통의 대립적 구분을 매우 중시하는 성리학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도통에서 제외되거나 도통 정립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성리학자들(학문)은 경우에 따라 이단으로 취급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244)
"조식(1501~1572)이 남명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성리학의 한 학파를 이루었음에도 그의 학문에 노자와 장자의 풍이 가미되었다는 이유로 이황에게 배척당한 일이나, 뜻과 행실은 뛰어나지만 학문에 주견이 없으니 도학군자라고 칭할 수 없다고 이이에게 무시당한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 조선의 여러 학파들 중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서경덕의 학문이 수론數論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5현의 문묘종사는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을사사화(1545)로 이어지는 4대 사화가 잘못이었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였으며, "더 나아가 무오사화가 확대된 발단이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음을 감안할 때, 5현 문묘종사운동은 곧 세조의 즉위와 그 정치를 '비非'로, 그 정치에 희생된 이들을 '시是'로 공인함으로써 시비를 분명히 하라는 사림의 외침이었다."(246-7)
# 1610년(광해군 2) 5현의 문묘종사 성사
7장 중종 대의 의미 : 사대와 유교의 만남
조선왕조가 추구한 유교적 가치의 실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의義, 곧 의리義理라 할 수 있다. "의리는 명분名分에 기초한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규범으로, 한 인간이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규정하는 이치를 말한다. 의리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유교적 행동 규범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충과 효도 따지고 보면 의리의 실천 규범에 해당된다."(252) "조선의 건국 주체는 명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것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어디까지나 중화 문명의 보편적 질서 안에서 향유하고자 했다. 달리 말하면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는 명에 사대함으로써 중화 질서를 따르고 보편적 중화 문명인 유교의 가치를 적극 수용하고 따르는 데 있었다." "의가 이런 보편성을 지닌 개념임을 감안하면, 조선 건국과 동시에 조정에서 스스로 환구단의 천제天祭를 폐지하고 그 후에도 조선의 천제는 참람한 일이라며 1897년까지 사실상 재개하지 않은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254)
# 명분名分 : 각 사람의 칭호(名)에 따라 그 신분이 나누어진다는(分) 것으로,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분수(分數)와 직결되는 개념
조선 왕조의 유교화·중국화 정책은 당대에 가장 적절한 세계화 시도였다. "다만 문제는, 제국을 형성한 중원에서는 다양한 유교 학파들이 여러 의견과 해석을 내놓고 논쟁하면서 비교적 평화적으로 공존한 데 비해, 제국의 주변에 위치한 조선에서 유교는 어느 한 가지에만 몰입해 그것만을 정통으로 보고 다른 의견이나 해석을 죄다 이단으로 몰아버리는 배타적 폭력적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세계사에서 보면 보편적인 현상이다.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경향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교화의 방향이 조선의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확실히 가닥을 잡고, 더 나아가 그것이 정치 분야를 넘어 사회의 각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한 이른바 변곡점이 바로 16세기 전반 중종 대였다."(2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