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ㅣ 너머의 역사담론 4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 조선 후기 한국 사회의 특징 : 고도로 구조화된 부계 출계집단(patrilineal decent group)을 기초로 한 친족제도
1장 신유학 수용 전의 과거, 고려 사회의 재구성
"고려에서 사람들이 성장하는 데 가장 있을 법한 사회 환경은 모친이 원래 출생한 집단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부친은 혼인하면서 정치적·경제적 이유에서 신부집으로 이주할지 선택하였다. 처가 거주제도[婦處制]는 고려에서 흔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출생 서열에 따라 각기 다른 혈연 용어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아마도 아이의 인생 초기에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외가 생활은 부친이 자기 출생 집단으로 가족을 데리고 오면서 끝났을 것이다. 그 동기는 다양하다. 가장 중요한 동기는 부친이 부모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부친의 정치 관직을 계승하는 것도 그 동기였다. 중년이 되면 남자는 본족, 외족, 처족(이 중 후자 둘은 일치할 수 있었다) 세 친족 집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 것 같다. 부친은 이 세 집단의 잠재적 성원이었다. 궁극적으로 이들 집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충원되는지 결정한 것은 정치적·경제적 이해였다."(116-7)
"고려의 맥락에서 볼 때, '족族'은 후손뿐 아니라 선조들까지 묶는 출계집단을 지칭한다. 혈통은 남성과 여성의 연결 고리 모두로 추적할 수 있다. 특별히 왕조 초기의 다양한 출계 계통은 근친혼으로 얽히거나 후손이 여전히 유명한 줄기를 구성하는 그들 선조의 특권을 누리면서 그 선조에 관하여 기억하는 데 불과했다. 유명한 출계집단은 공계(共系, cognatic) 친족체계라는 큰 저수조에 새로운 구성원을 충원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하였을 것이다. 계승의 융통성 역시 많은 경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출계집단이 부계친이 없어 거의 끊어지게 될 때 사위나 그들의 자식을 통하여 새로운 활기를 얻었을 것이다." "출계집단은 중국식 성姓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인식하였는데, 성은 6세기 무렵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신라의 왕실이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 원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신라의 왕족인 김씨족과 박씨족은 성을 사용한 첫 번째 가문이다."(122-3)
점차 성이 '본관'과 동일시되면서, "어느 개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이 더는 출생지나 거주지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것은 고위 신분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속되었다."(124) "확산되는 중국의 영향으로 부계 중심 철학이 공계적인 한국의 원래 친족 체제에 미묘하게 덧붙어갔다. 그 결과는 전통으로부터의 거대한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 한국 체제가 개인과 집단에 부여하는 선택의 폭을 점차 좁혔다. 고려 사회조직 고유의 융통성과 전략은 부계를 기초로 한 규칙에 점차 제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게 되었다. 위로부터 추진된 이러한 발전이 정부에 몸담고 있는 엘리트 계층의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준 것이다. 반면 귀족의 사적 생활로는 거의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사회의 하위 계층에도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왕조 말기에 신유학이 도래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때맞춰 한국 사회가 부계적 변환을 완결한 것은 바로 이 신유학 이데올로기의 추진력 덕분이다."(126)
2장 신유학, 조선 초기 개혁 입법의 이데올로기적 기초
"고려 왕조를 '불교시대'로 규정한 신유학자들은 신유학을 기초로 한 사회 질서 확립을 새 시대 출발을 보여주는 역사의 구분선으로 그으려 했다." "신유학 수용 초기에 주자를 추종한 한국의 신유학자들은 고대 중국의 고전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 모델로서 적합한 이상적인 사회 질서를 찾아냈다." "고대의 제도와 의례를 만든 이들은 이 제도와 의례가 인간의 본성을 면밀히 검토하고 사회제도를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뒤 확립되었으므로 모델로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제도를 기술한 텍스트의 권위를 신봉한 신유학자들은 "고전 문헌에서 적절한 증거를 찾지 못할 때는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며 때로는 결정을 몇 년간 미루기도 했다. 고대의 모델은 편리하지만 이단의 정책으로 손상받지 않을지 경계하면서 유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중국 성현들의 전통적 지혜에 가감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51-3)
"통치는 백성의 거친 본성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고 우주와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교육적이면서 규제를 수반하는 절차였다. 그것은 풍속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구조적 원리인) '강기(綱紀)'를 활성화함으로써 백성을 새롭게 하는 신민新民의 문제였다." "풍속의 기본 정수는 인간 사회에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구조, 다시 말해 군신, 부자, 부부 관계를 제공하는 삼강三綱에 들어 있다. 삼강은 군신 사이의 의[義], 부자 사이의 친[親], 부부 사이의 구분[別], 형제 사이의 출생 서열을 인정하는 서[序], 친구 사이의 신[信]같은 오륜으로 다시 강화된다. 이들 관계는 적절한 의례 행위라고 할 수 있는 예의 관념으로 유지되는데 이것은 백성이 질서를 잘 지키도록 교화하는 핵심이 된다. 예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이다." "법은 단순히 백성을 통제하는[治] 수단만은 아니다. 법은 백성의 타고난 도덕적 잠재력을 발전시킴으로써 통치를 도와주는 보조 요소이다."(155-7)
"신유학자들은 중국 고대 성왕들이 고안한 모델을 기초로 이상적인 인간 질서를 개념화한 뒤 이데올로기적 외형을 내용으로 채워야 했다. 이데올로기에 구현된 원칙은 일상에서 사회 행위의 지표가 될 실행할 수 있는 계율로 축소되어야 했다."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이를 정의하고 해석한 가장 대표적인 저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1403년에는 처음 입사入仕한 관리들과 이미 입사한 관리들 중 7품 이하는 모두 『주자가례』를 시험 보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주자가 고대와 당대의 시간 격차를 메우고, 의례와 법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안에서 천지의 원리를 구현하여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주자가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자는 백성이 불교 전통에서 해방되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상적 의례 편람을 제공하였다고 했다. 특히 상례와 제사에 대한 입법은 불교의 오용을 막는 유익한 해독제로 평가되었다."(159)
"주자의 『근사록近思錄』과 『소학』도 사서와 함께 일관된 몸체를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유학의 정수를 담은 『근사록』은 특히 15세기 후반 사회적 입법화에서 중요한 책이었다. 이 책은 철학적 개념을 일상생활의 관심사와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바탕에 두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출계집단을 분명히 밝혀 조상 숭배를 제도화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이 문헌은 수신에서부터 국가를 굳건한 도덕적 기반 위에 올려놓는 것까지 몇 단계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기본 텍스트이자 유용한 길잡이로 간주되었다. 한편 어린이의 초급 독본이라 할 『소학』은 교육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1407년 권근은 이 책을 모든 학생의 필수 입문 텍스트로 만들자고 추천하였다. 말하자면 과거에 응시하는 모든 이도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는 합격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162-3)
"신유학의 행동 강령은 조선 왕조가 전개되면서 제기된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적 이슈에 착수함으로써 스스로 추진력을 얻게 된 웅장한 구성체였다. 우선 현존하는 사회적 무질서에 대처할 실용적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고전들 속의 교훈을 사회 정책으로 치환하였다. 그 다음에는 유학자로서 사명감이 점차 차별화되었다. 끝으로 유학자들은 고유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였다. 이 과정은 중국의 사회제도를 모방하는 데 집중된 초기 사업부터 유교를 한국의 사회 상황에 융합하는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것까지를 포함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관습'[國俗]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조선 사회에는 재구성된 문인계급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혈통과 세습을 기초로 하는 신유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송나라의 신유학자들이라면 꿈에도 가능하지 않았을 정도로까지 사회정치적 환경을 다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176-7)
3장 종법과 계승 문제, 그리고 제사
"한국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宗法, agnatic principle)을 사회 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 안에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제사보다 더 적절한 방법은 없었다." "제사는 친족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종교적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교 구도 속에서 제사는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준다. 무엇보다도 제사는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예를 들어 부계친에서 의례를 수행하는 서열의 위치는 출계집단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며, 정치의 장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한다."(180) "계승 문제에 장자상속을 도입한 것은 한국 사회가 고려 전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첫걸음이었으며, 1471년의 법전 편찬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을 법적 장치로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198)
"서자(또는 첩자) 문제는 1413년(태종 13)에 적실(처)과 첩 사이의 엄격한 차별을 법제화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특히 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가 먼 친척, 심지어 같은 형제의 아들보다 후사로서 선호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친의 선대를 봉사하는 서자는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인물이 되었고, 경제적 혜택도 조금 누렸다. 더 나아가 봉사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 없는 관직에도 나아가는 등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그렇지만 남녀가 정식으로 결합하지 않은 사례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었으므로 존엄한 가문에서는 서자에게 제사의 우선권을 맡기는 것을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구나 차자가 형이 죽은 뒤 후사로 세운 형의 서자에게서 봉사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통상적으로 일어나는 종족 내분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서자를 승중자承重者로 지명하는 것은 도덕적·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이었다."(207-8)
"서자 봉사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출계 계통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서자 계승은 본가가 단절되면서 결과적으로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더구나 서자에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폐기하여 사회 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서자의 지위가 갖는 넓은 사회적 함의의 관점에서 볼 때, 『경국대전』이 서자를 가능한 한 입후자 또는 봉사자로 언급하려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첩의 아들을 조금은 인정함으로써 첩의 운명을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인간의 감정과 법적 합리성이 타협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왕조 후반 이후까지 존속하지는 못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법 관념에도 불구하고) 서자를 봉사에서 강제로 배제하려는 경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두드러졌다.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서자에 대하여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211)
"공신들은 특별히 친손 개념을 의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외손은 계속해서 봉사 자격을 가진 후보였다." "외손봉사는 금지되지 않았다. 『경국대전』 편찬자들은 이것을 무시하였으나 이 같은 관행은 16세기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관리들이 종법을 계속 내세우면서 외손봉사 관행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냈다. 이황(1501~1570)은 하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의 뿌리만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당에 서로 다른 두 출계집단이 제사지내는 것은 자연 법칙에도 어긋나며, 그같이 부정확한 제물은 조상의 영도 좋아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황도 후계자가 없는 어머니 쪽 조상들에 대한 딜레마를 인식하였다. 그는 임시방편으로 특별히 방을 따로 마련하여 외조의 위패를 봉안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뒤 예학자들은 이황의 이러한 관점을 되풀이하였는데, 이 같은 관점은 주자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지만 뿌리 깊은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221-2)
4장 상장례의 변화
"상례는 죽은 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동시에 죽음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결 고리를 다시 구성한다. 죽음을 기념하는 이 과정은 친족 사이에 그 어떤 사회적 의례보다도 특별한 감정과 행동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통과 의례이다." "부계 친족을 확실하게 분류하는 오복제는 '사회적 혈족의 멀고 가까운[親疎] 관계'를 기초로 5등급으로 나누어 상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은 (부모의 경우에 해당하는) 3년부터 3개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상복 재료도 거친 베부터 고운 베까지 다양하다. 상복을 입는 친척은 위아래로 4대까지이며, 방계는 육촌까지로 한정하였다. 오복제는 부계친을 특히 강조하며 비부계친과 모계친 그리고 아내의 친족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구조화된 도해인 「오복도」는 사람의 애정과 감정의 정도를 표현한 것만은 아니다. 공자가 주장한 것처럼 이것은 애도를 넘어 사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규범적인 친족 행동의 패러다임이었다."(244-5)
"조선 전기의 입법가들은 부모상의 경우, 3년상을 치르는 것이 기본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3년상은 중국 고대 성현들이 사람의 감정을 기초로 고안한 것이므로 사대부들이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완벽한 제도'라고 믿었다. 이 같은 성현들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3년상을 지지하는 기본적인 논의는 『논어』에 포함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아이는 3살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므로 3년 동안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례』에 따르면 모친에 대한 3년상은 부친이 먼저 사망한 뒤에만 적용되었다. 『의례』에는 모친이 부친보다 일찍 사망하면 모친이 하위에 있다는 표시로 재최장기를 갖추고 1년상만 치르도록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자는 "가장인 부친이 살아 있는 동안 아들은 모친에게 개인적으로 느끼는 존경을 감히 완전하게 나타낼 수 없다"라고 설명하였다."(251)
"상복을 입는 규정은 상주가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야 하는 특별한 행동을 수반했다. 죽음은 오염을 의미했으며, 상喪은 길한 일과는 분리되어야 하는 흉한 일에 속했다. 길과 흉이라는 삶의 서로 다른 두 영역의 거리는 상을 지내는 동안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전해졌다. 상주는 조악하고 색깔 없는 복을 입었는데, 이것을 지은 천이 조악하다는 것은 애도의 정도를 의미했다. 상주는 고기와 술, 양념을 삼가야 했으며 여자들의 거처에 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대신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켜야 했다. 시끄럽고 즐거운 오락거리와 말 타기, 성행위는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으로 비난받았다. 상중에는 혼례식을 치를 수 없었고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상중에 겪어야 하는 고초와 옹색한 일상생활을 피하려고 부모의 죽음을 숨기는 것은 큰 범죄가 되었다." "가장 흔한 위반은 부모 상중에 혼인하여 의도적으로 신부집에 거처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이는 자식의 도리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261)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와 유교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상호대립적이었다." "불교에서는 주검이 흩어져서 '물고기와 새들이 먹이'가 되는 반면, 유교에서는 주검을 매장하여 삶과 죽음 사이를 순환한다고 여겨지는 기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만일 조상이 땅에서 평안을 찾는다면 자손은 세상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즉 나무뿌리가 불탄다면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은 말라죽으므로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성현들은 시체가 너무 빨리 부식할 것을 우려하여, 안팎이 견고한 관을 짜고 시체에 두꺼운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관 속에 침입한 해충이 주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류를 넣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볼 때 묘는 이승[冥]과 저승[幽]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하였다."(267-8)
5장 상속, 균분에서 장자 우대로
"아들과 딸에게 고르게 상속하는 고려의 관행은 조선 초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관행은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당시에는 아들과 딸 사이의 차별이 아니라 아버지의 여러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사이의 차별이 오히려 더 큰 문제였다." "서자 상속에 관한 규정은 모든 부계 후손에게 상속 특권을 주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의 사회적 출신이 여전히 개인 몫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적실이 낳은 아들이 있을 경우, 양첩자는 7분의 1을, 천첩자는 10분의 1을 받았다. 양첩자가 없을 때는 천첩자의 몫이 7분의 1로 늘어났다. 천첩자가 유일한 남자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완전한 후사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양첩자는 후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양첩자는 아버지와 가까운 방계친인 아버지 형제들과 공동으로 상속받아야 했다. 1405년 법규는 서자의 입지를 후사로 승격했지만 동시에 고려의 수평적 상속 전통을 마찬가지로 재확인하였다."(283-5)
"법에는 딸도 남자형제와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 가질 권리가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조선 왕조 전반기에 딸의 상속권은 상당히 변하였다. 사실 16세기 초반까지도 아들이 없으면 외손이라도 조상 제사는 지내야 한다는 특별한 바람과 더불어 딸이 아버지 쪽 재산의 주요한 수여자로 지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와 같이 각별한 목적으로 딸에게 재산을 주는 사례(유교적 시각에서는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었다)가 있었는데도 딸이 점차 재산 상속 자격을 잃는 경향이 뚜렷하였으며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나마 친정에 있던 여성의 상속 재산은 결국 양도할 수 없는 남편의 혼인 자산에 크게 보태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그 같은 재산이 혼인할 때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것이라면 이는 신부가 첫 부인이 되기 위한 부가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하여 상속받았으면 남편 재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303-4)
양대 전란 이후 노비들이 대거 흩어지면서 토지 소유의 중요성은 한층 높아졌다.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응책이 절박해졌으며 이에 따라 제례를 시급히 혁신해야만 했다.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은 현존하는 상속 관행을 개정하여 토지 분산을 과감하게 줄이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의례편람에서 주장하듯이 장자를 세습 재산의 주요 상속자로 인정하면서 조상을 봉사하기 위해 세습 재산의 상당 몫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습 재산은 조상들이 자손 모두에게 물려주는 일종의 경제적 보험이라는 성격 대신 부계 자손들이 조상들에게 적절한 제례 행위를 하도록 지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렇듯 달라진 관점은 대를 잇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 자신의 권리에서 후사로서 여성의 입지를 손상시켰다. 여성이 남편 집안에 통합되면서 이전에 받은 상속이나 지참금 형태로 가져온 재산은 그녀가 출생한 가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306-7)
6장 신유학의 입법화와 여성에게 일어난 결과
"유교는 남성 중심 철학이지만 남녀의 결합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이것을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 즉 인간 도덕성의 토대로 간주한다. 그뿐만 아니라 부자관계에서 군신관계로 확대되는 사회화 과정의 원천으로도 본다. 우주론적 용어에서 볼 때 하늘[陽]은 땅[陰] 위에 군림하며,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위에 있다. 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명확한 위계질서는 우주론적으로 공인되어 인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 질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유학자들은 여성의 내부·가사 영역과 남성의 외부·공식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성적 타락이나 이기심이 사회 불안이나 부부간의 역할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보았으므로 남녀 구분이 그러한 현상을 억제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여성은 사회 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사회 변화는 종종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316-7)
"1413년에 처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조처는 인간관계와 사회 지위를 분명하게 하는 결정적 수단으로 환영받았다. 이것은 유교 법제화의 이정표로 왕조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많은 것을 함축하였다. 한 명의 배우자를 처와 합법적 후사의 어머니로 격상한 것은 종법 원리에 명확한 개요를 마련하였으며, 여성을 남편의 출계집단에 굳게 결속해놓았다. 아울러 이 조처는 결과적으로 출신 계급과 연관되어 있는 여성의 세계에 구조적 불평등을 가져왔다. 대체로 처는 양반 엘리트에서 고른 반면 첩은 더 낮은 계급에서 고르기 때문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부인들을 서열화하는 것은, 사회를 존비尊卑와 귀천貴賤으로 이분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양반을 다른 계급과 분리하고 신분 내혼적 지위 집단으로 만드는 '사회적 방어막'은 한국을 세운 기자가 가져온 금법에서 유래한다고 믿어, 한국 사회의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322-3)
"신유학을 신봉한 입법가들은 '여성의 길을 바로잡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가사 영역에 가두기 위해 여성이 절에 자주 출입하는 것에 특별히 주목하였다. 1404년 여성이 부모를 추모하는 목적 이외에 절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성은 법으로 절에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풍속을 해치는 온상이 된다고 하여 1431년에는 무당집 출입도 금지되었다." "여성의 사찰 출입을 제한하려는 사간원의 노력은 1447년 열매를 맺었는데, 여성이 이런 위반을 하게 되면 최고 연장자와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국왕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중반 새로운 복장과 장식 형태는 보이지 않지만 여성은 옷을 어떠한 불온한 눈길도 닿을 수 없도록 입어야 했다. 특히 적처가 바깥에 나갈 때는 얼굴을 완전히 덮고 위로 올려서는 안 되는 쓰개치마를 사용하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에서는 눈으로 쉽게 사회 계층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의복 재료와 색깔 선택에 제한을 두었다."(353-4)
"조선 왕조의 유학자들은 아내를 내칠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법적 가치보다는 도덕적 압력으로 인식하였다. 혼인으로만 인정받고 사회 지위를 얻는 여성에게 남편 가족으로부터 쫓겨나는 것과 재혼할 경우 따라오는 사회적 오명이 가져다주는 위협은 여성을 복종적이고 순종적으로 만드는 효율적 수단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 책임을 천성적으로 열등한 아내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돌리기 때문에 사간원은 큰 이유 없이 아내를 내쫓는 남편을 엄하게 다루었다." "남편이 아내와 이혼하기를 요구하는 이유를 질투·중병·수다라고 해서 올린 사건은 대개 기각당했는데, 그런 것들은 단지 여성의 천성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배우자끼리 협의할 수 있는 것[完聚, 復合]으로 간주되었다." "남편이 호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효인데, 최고 불효는 계승자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369-70)
"혼인은 출계집단 전체의 일이므로 남편이 죽은 뒤에도 혼인관계는 지속되었다. 배우자가 죽으면 아내의 지향점은 다음 세대로 향한다. 어머니로서 그녀는 집안의 어른이 된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가장 큰 미덕으로 남편과 출계집단에 대한 아내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혼인관계의 이러한 배타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여성이 재혼할 정당성을 제거하였다." "유교 입법가들은 '정절을 지킨' 과부들을 특별한 경제적 수단으로 지원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적처로 인정받은 과부는 남편의 과전科田 일부를 받았는데, 아들이 있는 경우는 3분의 2를, 없는 경우는 3분의 1을 받았다. 이 토지는 '절의를 지키기 위한 토지'[守身田]라고 불렸으며 과부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으나 오래 지속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1466년 과전이 공전公田으로 전환됨에 따라 수신전은 폐지되었다. 수신전을 복원하자는 요구가 자주 있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374-5)
결론 종족사회의 출현
여말선초에 "가장 눈길을 끄는 분명한 변화는 출계 범위를 엄격하게 좁히는 것이다. 남성은 물론 여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후손을 망라한 고려의 출계집단은 이제 엄격하게 부계 체계가 되어야 했다." 출계집단의 구성원을 충원하는 기반은 "모든 후손을 망라하는 출계 원칙에서 배타적 원칙으로 교체되었다. 이것은 모변의 친족 대부분에게 작용했다. 모변의 친족이 고려의 친족 구조에서 차지하던 압도적 위치를 점차 잃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남계친 가운데 유명한 조상이 있는 후손은 대체로 자신의 남계 출계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출발점을 확보하려고 그 조상을 기억하였다. 결국 고려시대 출계집단이 이렇듯 부계로 출계 범위가 축소된 것은 장자상속이 제도화되어 우애에 입각한 계승과 균분 상속을 종식하면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2세기 이상 제도화와 교화를 거친 후 수평적 사고방식에서 수직적으로 힘겨우면서도 복잡한 이동이 마무리되었다."(382-3)
출계 범위를 현저히 좁히는 변동을 가져온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조상 숭배였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자접합親子接合, patrifiliation을 인간의 가장 기본 고리로 찬미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구조적 중요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더 큰 계보적 출계의 맥락에 깊숙이 뿌리내려야 했다. 출계집단 내에서 각 남계 구성원의 위치를 바꿀 수 없는 세대[世] 체계와 방계 구도에 따라 규정하면서 제사는 남계의 친족관계agnation를 이데올로기에서 살아 있는 실재로 바꾸었다. 제사는 종(출계 계통)을 분명히 하고 친족의 경계를 그었다. 이와 함께 조상의 사당 앞에 모인 남계친 사이에 같은 후손이라는 의식과 더불어 결속력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조상 의례는 정치경제적 상황과 분리된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단체를 창안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부계 출계집단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384)
16-17세기의 신유학 이론가들은 중국 고전 및 신유학 이론과 배치되는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국속國俗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 개념은 한국적 가치의 지속적인 힘, 특히 그중에서도 출계 및 사회 지위와 관련된 것을 서슴없이 인정하고 있다." 국속의 주요 요소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엘리트의 지위를 결정하고 재생산하는 출계에서 모계가 지속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각각의 부계를 대표하면서 그들의 출생을 완전하게 만드는 중요한 세습적 정수精粹를 전하며, 그들에게 이러한 정수가 부족하다면 그들 남편의 출계집단은 반쪽 구성원이 된다. 엘리트에게 지위의 재생산은 앙변적兩邊的이다. 여성의 혈통에 대하여 여성 자신의 자녀를 합법화하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신유학 수용 이전 과거 사회의 중요한 유풍이었다. 유교에서 부계친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지만 이것은 사실상 한국인의 부계 출계집단의 배타성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3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