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광해군 평가의 극과 극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 등에 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밖에 없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가리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고 평가했다. 결국 '반정'이니 '재조지경'이니 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분위기 아래에서는─설사 광해군에게 평가받을 만한 치적과 장점이 있었고, 그의 시대에 무엇인가 배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광해군이나 그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19)


"(반대로 만선사관학자 이나바가)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며 부패가 극에 이르렀던 명이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행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탁월성'을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와 한 묶음인 만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웠던' 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들의 집권이 이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죽이기'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본 모습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재평가는 식민사관이 노린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 위험성이 적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쪽 입장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다."(31)


# 만선사관滿鮮史觀 : 조선의 역사는 만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자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다.


2장 어린 시절


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은 선조에게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했다."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열세 명이나 되는 왕자들 가운데서 다음의 주군이 될 인물을 함부로 천거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누구를 의중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뿐더러 당시 선조는 한창 장년의 나이인 마흔할 살에 불과했다." 침묵 속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선조는 광해군을 칭찬했고 신하들은 얼떨결에 선조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선조 자신이 오랫동안 광해군을 의중에 두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잡의 건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여 그를 왕세자로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전격적'인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후계자 논의를 거론한) 정철을 쫓아낼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의 상황이 선조에게는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46-7)


3장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것은 1592년 6월 14일이었다. 그는 이후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희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伊川),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흩어진 민십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왜란 초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조선 조정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 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분조를 이끄는 동안 광해군이 겪었던 고초는 대단히 컸다. 특히 산악지역에서의 노숙은 후유증이 커서 1593년의 봄과 여름 동안 광해군은 해주에 머물면서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52-3)


"1593년 10월, 선조와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화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장기주둔 태세에 돌입했다." "명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 카드'를 빼어 들었다. 광해군을 전라도,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보내 선조를 대신하여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선조 대신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내려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할 요량이었다. 1593년 윤달 11월 19일, 광해군은 다시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분조가 아니라 '무군사(撫軍司)'라는 것을 이끌었는데 사실상 두 번째의 분조 활동이었다." "분조와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 광해군은 조선 팔도의 남과 북을 거의 주유한 셈이 되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를 직접 보았고, 왜란 중의 밑바닥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67-9)


"왜란이 끝날 무렵부터는 명 조정이 광해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왜란 시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명 조정에 계속 요청했지만 명은 번번이 거부했다. 이유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서를 북경에 보냈지만 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명이 조선의 요청을 집요하게 거부한 이유는 "명의 신종이 당시까지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번국의 황태자 책봉을 먼저 승인할 수는 없었다. 둘째이자 '첩의 자식'을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었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하고, 책봉하는 과정에서 명이 보였던 미온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광해군이 '반명감정'을 품는 데 충분한 소지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71-4)


4장 정인홍, 이이첨과의 인연


"선조의 죽음은 광해군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이었지만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과 이이첨에게도 화려한 부활의 서곡이었다. 이제 그들은 선조에게 불충했던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광해군의 즉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신'으로서 복귀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해군에게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은인이었지만 궁극에는 광해군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기도 하다.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치가 흔들릴 때 정인홍은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이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폐모논의를 제기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반대파였던 남인과 서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에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인목대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광해군과 맺은 '악연'의 끈도 참으로 질겼다."(83-4)


"광해군이 벼슬을 내려도 받아들이지 않고 향리에 머물려고 했던 정인홍의 행태는 독특한 것이었다. 한말의 지사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의 그 같은 행태를 언급하면서 그를 조선시대 산림의 원조로서 지목했다." "그는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싸웠던 의병장 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와 곽재우의 의병활동 덕분에 경상우도는 보전될 수 있었다."(87-8) "정인홍이 보기에 남인 유성룡이나 서인 성혼 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유성룡은 적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혼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이 지척에서 지나가고 있음에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성혼을 일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자'라고 매도했다. 정인홍의 이 같은 태도는 유성룡과 성혼 등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제자들과 두고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90)


"조식의 학문과 훈도 방식은 이황의 그것과는 사뭇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조식에 비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심이었고, 전수했던 학문 역시 이론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조식의 그것은 확연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칼이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결단을 강조했다. 정인홍은 조식에게 훈도를 받으면서 입신을 도모하는 학자보다는 활달한 실천가가 될 기질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천가로서의 기질은 선조 초반 조정에 초빙되어 나아갔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인홍은 1573년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1577년에는 정5품 직인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곧이어 정4품 직인 장령으로 뛰어올랐다. 척신정치가 남긴 잔재가 채 가시지 않았고, 동인과 서인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정치판에서 정인홍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백관을 규찰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직무였던 사헌부 장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던 것이다."(93)


"이이첨 또한 광해군대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역량과 정치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정인홍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중에 피난하지 않고 의병활동을 벌임으로써 의롭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또한 이이첨은 일본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임진왜란 초 광릉참봉(光陵參奉)이란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릴 위기에 처했던 세조의 영정을 보전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맞아 거의 모든 역대 국왕들의 영정이 불에 타거나 없어졌다. 겨우 보전된 것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었다. 그런데 태조의 영정은 조정 차원에서 보전에 힘을 기울였고 여러 고을에서 그것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세조의 영정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이첨의 활약 덕분이었다. 어쨌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으로서 체면을 구겼던 선조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경사였기 때문이었다."(95-7)


5장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자.' 즉위 직후 광해군이 내놓았던 인사 정책의 화두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실천된다. 광해군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임명했다. '오리 정승'으로 불렸던 그는 정치적 색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지만 선조대 이래 원로 대신으로서 쌓은 명망과 경륜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광해군은 그가 원만하게 붕당 사이의 대립을 추스려 조정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광해군은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하여 즉위 초반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정승직을 주고 받았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각각 국방과 외교와 관련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항복은 선조대 이래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지내 군사업무에 밝았다. 이덕형은 왜란 초 대동강에서 일본군 장소 겐소(玄蘇)와 담판을 벌인 적도 있는 당대 최고의 '일본 전문가'였다."(105)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하던 광해군은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로 쌀 16말만을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앴다.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방납으로 먹고살던 모리배들, 지방의 향리들, 각 관청의 하인들, 땅이 많은 양반들은 아우성을 쳤다. 대동법을 아예 원수처럼 여겼다. 그들은 틈만 나면 대동법을 비방했다. 그들은 대동법을 관할하는 선혜청의 관리들에게 정치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고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운운하며 퇴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법은 하층민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백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당시 민생의 피폐가 심각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111-2)


6장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권위를 높이고 그를 대북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는 한편 이황처럼 문묘에 모시기 위해 상소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이첨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훈구파의 후예인데다 변변한 학연조차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조식과 연결시키고 싶어서였다. 한마디로 이이첨은 '조식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이황과 이이의 문하생이라는 학연으로 뭉친 남인과 서인계의 재야사림들이 보여준 '단체행동'의 위력을 절감한 탓이기도 했다." "비록 정권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이첨 등은 사림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복을 얻어내는 것이 권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과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그를 빌미로 자신들이 권력을 확대해 가는 방식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비극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124-5)


# 회퇴변척晦退辨斥 : 오현 문묘 종사에 분노한 정인홍이 척신정치기인 명종대에 벼슬을 한 사실을 들어 이언적과 이황을 '변변치 못한 인물들'이라면서 비난한 상소 사건


"1613년 5월 23일, 대북파 이위경은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 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서인, 남인들 대부분이 '역모' 가담자로 몰려 제거됨으로써 조정 내에서의 폐모논의에 대한 반대는 비교적 잠잠했지만 문제는 재야 사림들의 반발이었다. 팔도의 유생들은 서로 통문을 돌려 폐모논의를 '금수(禽獸)의 행동'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대북파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것은 충이 먼저냐, 아니면 효가 먼저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주자성리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정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당시 사림사회의 분위기에서 우선 덕목은 역시 효였다. '효' 중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에 대해 '폐모' 운운하는 대북파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었다."(132-3)


# 계축옥사(1613) : 문경 새재에서 은상銀商 살해사건을 벌인 양반 명문가의 서얼들(칠서七庶)이 역모 혐의에 휘말린 사건. 이들은 국문 중에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실토했고, 이 진술은 이후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폐비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은상살해사건'이 역모로 비화되고 다시 영창군 살해와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정치적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치적 긴장상태의 지속은 '토역 담당자'로서 대북파, 그 중에서도 이이첨의 정치적 기반을 굳혀주었다." "폐모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이첨 등이 몰아갔던 상황은 일종의 '공안정국'이었다. '광해군 왕권의 보위'라는 절대적 명제를 앞세워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호역(護逆)'이라는 낙인을 찍어 정치적으로 제거해버렸다. 이이첨 등에게 강상윤리로는 '충'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효' 등 다른 덕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려 했다." "거듭되는 역모사건을 거치며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했던 광해군이 그를 방임하게 되면서 '토역담당자'로서 이이첨의 권력은 비대해져갔다. 나중에는 광해군의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요컨대 이이첨은 사림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권간이 되었던 것이다."(136-8)


7장 '절대군주'를 꿈꾸다


"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석연치 않은 것은 또 있었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면서도 왜란 당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에게 왜란이라는 대전쟁이 남긴 충격은 대단했다. 전쟁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돌림병에 걸려 죽고,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고,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가 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것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140-1)


"왜란 이후 선조는 신하들과의 경연 자리에서 다른 경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주역』만을 강독했다. 그만큼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운수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광해군 역시 술사들을 몹시 가까이했다. 1612년(광해군 4) 9월 불거져 나왔던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산군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광해군은 (술사) 이의신의 (천도) 주장에 계속 흔들렸고, 그것이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실현되기 어려워지자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1615년(광해군 7)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을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시쳇말로 '대조전은 어둡고 칙칙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창경궁 등을 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수순으로 연결되었다."(142-4)


궁궐 건설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토지에 공사비용으로 포목을 부과하면서 백성들이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부가세는 엄청난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원병을 보내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파병 문제의 본질 역시 따지고 보면 돈 문제, 재정 문제였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공명첩을 나눠주고 실직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는가 하면 죄수들에게도 속죄은(贖罪銀)의 명목으로 은을 거둬들였다." "은을 바치고 당상에 올라 이른바 납은당상(納銀堂上)이 된 백성들 가운데는 폐모논의가 벌어질 때 인목대비를 처벌하라는 정치적 의사표시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나 광해군과 대북파를 가뜩이나 '흘겨보고' 있던 남인계나 서인계 사대부들이 보기에 그것은 분명 '말세'였다."(150-1)


8장 대륙에서 부는 바람


조선에 주둔하던 명군은 턱없이 부족한 상점 수와 면포와 쌀을 이용한 상거래 관행으로 곤란을 겪었다. "명군 지휘부가 생각해낸 대책은 명나라 상인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장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과 거리가 가까운 요동의 상인들이 주목되었다. 명군 지휘부는 상인들에게 노인(路引)을 발급했다. 일종의 통행증명서였다. 그것을 소지한 상인들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상행위를 하도록 권장했다." "일단 그들이 노린 것은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이었다. 명군 지휘관들은 상인들을 아예 각 부대별로 배속시켰다. 병력이 이동하면 상인들도 따라서 이동했다." "수천리 길을 마다않고 조선까지 들어온 상인들이 명군과의 거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이 조선에 널려 있는 은광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뒤를 봐주는 명군 지휘관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게 은광을 개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159-60)


"명군에 보기에 은을 이용하여 거래할 줄도 모르고, 그것을 채굴하는 데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조선 신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161) "본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올 경우, 그들에게 모시나 부채, 화문석과 같은 토산물을 예물로 주었다. 하지만 왜란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데다, 은이 부족해지고 은가가 치솟고 있던 명 내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 명사들은 은만을 요구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색은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 냥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했거니와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가서 한밑천 잡자"는 풍조가 생겨났다."(167-8)


9장 외교 전문가! 광해군


광해군 외교전술의 기본 방침인 '기미책'은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침략 근성을 버리지 않는데 언제까지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으론 기미책을 써서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선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려고 했다. '자강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쳐들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광해군이 명청교체기에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 노력이었다."(187-8)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던 광해군의 혜안은 일본에 대한 정책과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후금을 막는 데 필요한 무기 확보에 열성이었던 그는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일본산 장검과 조총의 우수성을 인식한 터라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그를 구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비밀리에 타진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밖에 안되어 일본을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퍼져 있던 상황에서 그 같은 탄력적인 태도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609년(광해군 2)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켜 점증하고 있던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전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북방의 후금과 동북방의 일본,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로부터 협공당하는 시대적,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했던 그가 조정 내외의 비판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택한 것은 고민 끝에 선택한 고육책이었다."(194)


10장 명청교체의 길목에서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뒤인 1627년 (심하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강홍립은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정묘호란 당시 그는 향도로서 차출되었던 것이다. 그는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강화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인조는 의외로 그를 감싸주었다." 강화가 성립한 후 조선군 지휘관 정충신은 철군하는 강홍립에게 편지를 보내 후금군을 단속하여 살육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정이 강화로 피난 간 와중에 한강 이북의 조선 백성들은 '도마 위의 고기'였다. 강홍립은 정충신의 부탁대로 후금군의 살육을 막기 위해 노력했거니와 강화협상을 주선하여 후금군을 철수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뒷날 강홍립은 '매국노'로 매도되는가 하면 철저히 잊혀졌다. 요컨대 '심하 전투'는 강홍립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211-2)


11장 광해군, 명을 주무르다


"절강 출신인 모문룡은 1621년 7월, 요동 전체가 후금에게 점령되었던 직후 압록강변의 진강으로 잠입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이후 후금의 목표는 고정되었다. 이제는 북경을 향하여, 그 북경으로 건너가는 관문인 산해관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서진(西進), 또 서진만을 염두에 두었던 후금에게 갑자기 나타난 모문룡은 한마디로 '목에 걸린 가시'였다. 하지만 모문룡이 진강에 어렵사리 마련한 거점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우선 그가 거느린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데다 그의 진영이 명 본토로부터 고립되어 증원군을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대병력이 압박해오자) 모문룡은 1621년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긴급 장계를 통해 그가 미곶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바짝 긴장했다."(224-5)


# 요민遼民 : 요동에 살던 명나라 주민들이 후금군을 피해 조선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발생한 난민들


조선은 세 가지의 난제에 직면했다. "우선 '천조(天朝)의 장수'인 그를 접대하는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모문룡뿐 아니라 당시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장수들 가운데는 처자식을 동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에게 식량과 거처의 제공을 요청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은 후금과의 접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1621년 정탐을 위해 정충신을 후금 진영에 파견하면서도 모문룡이 알까 봐 그것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실제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조선을 견제하여 후금측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주문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은 무엇보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모문룡이 "조선과 연결하여 후금의 배후를 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영토에서 장기간 주둔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데다 그가 들어온 뒤로는 조선으로 드나드는 명 장졸들과 요민들의 수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226-7)


"모문룡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광해군의 선견지명은 1629년에 입증되었다. 그해 모문룡이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열렬한 중화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모문룡이 해마다 수십만 석의 군량을 챙기면서도 후금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요동을 수복하려면 모문룡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모문룡의 행태를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원숭환은 그를 쌍도(雙島)라는 섬으로 유인하여 처형하면서 12가지의 '죄악'을 들이댔다." "배부른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꾀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조선으로 가는 사신이 섬에 들를 때 후금을 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지천으로 널린 재물을 밑천 삼아 뇌물로써 환관 위충현을 비롯한 부패한 조정 요인들을 구워 삶았다. 자신에 대한 감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627년경부터는 아예 후금과 내통하고 있었다."(230-1)


"광해군은 '심하 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에 감돌고 있던 조선에 대한 불온한 분위기를 탐지하고,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포석이었다. 1619년 11월, 광해군은 측근 윤휘를 보내 요동경략(遼東經略)에게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명이 조선에 대해 더 이상 재징병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명에 대한 '외교적 역공'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심하 전투' 이후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신료들의 주장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신료들과 격렬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보냈던 원병이 대패했기 때문이었다."(240-1)


# 광해군이 명의 징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

1. 임진왜란 당시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후금의 강성한 위세

2. 왕권 강화 사업(특히, 토목공사)과 병행 불가

3. 즉위 이후 수시로 자신을 괴롭힌 명에 대한 ‘반명감정’


# 심하 전투가 국내에 미친 영향

1. 전투병 1만 명 징집, 군량 마련, 방한복 준비 등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다.

2. 그 와중에 전라도와 충청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배가되다. 화적떼가 늘어나다.

3. 병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억류되어 노동력 및 군사력이 훼손되고, 유족들의 슬픔이 끊이지 않다.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와 충청도, 도성 주변에서는 화적까지 날뛰었다. 후금에 대한 두려움에 방어대책 마련 과정에서 부과되었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강홍립의 항복과 그 이후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을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것이 화이론자인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제기된 이후 조정에서 마음이 떠난 그들이었다.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 들더니 이제는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는 명의 요청마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 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정에서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하층민들은 또 그들대로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커져가면서 사회 전반이 동요하고 있었다."(249-51)


12장 반정인가 찬탈인가


"반정의 핵심 주체인 김류, 이귀, 김자점, 구굉 등은 대개 서인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특히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이, 성혼, 김장생의 문하들이 많았다. 이처럼 반정 주체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 관계로 연결된 학연적 기반이 확실하고, 성리학을 배운 '학인(學人)'으로서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의 견제에 밀리거나 계축옥사 등을 계기로 대북파의 '토역 대상'이 되어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 정권이 계속될 경우 주변부를 빙빙 돌다가 일생을 마쳐야 했을 것이고, 아니면 또 무슨 명목의 역모죄에 걸려 비명횡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해군대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설사 벼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해군 정권 하에서 입신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었다."(263-6)


# 반정공신들의 밀약 :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처럼) 왕과 국혼國婚관계를 맺고, (정인홍처럼) 위세 있는 산림을 중용한다.


"'난신적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 조정의 강경한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군신(君臣)' 사이의 명분이나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면 조선의 반정 주체들을 토벌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명의 현실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분만 따지기에는 너무 급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후금과의 대립 구도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이제이'를 하려면 조선을 다독거려야 했다. 신료들 가운데는 인조를 잠정적으로 승인하되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가를 살펴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명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이었다." "1625년(인조 3) 1월 희종황제는 모문룡에게 칙서를 내려 마침내 인조를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그 사실을 조선에 전달할 것과 조선과 힘을 합쳐 후금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275-6)


13장 권력 16년, 춘몽 16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한 직후 문회, 이우 두 사람이 이괄을 밀고했다. 이괄과 한명련, 기자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624년 1월 17일 인조가 이괄을 잡아오라고 보낸 금부도사가 이괄의 병영으로 들이닥쳤다. 이괄은 그들을 베어 죽이고 남하했다. 이윽고 정부군의 주력인 장만 휘하의 병력을 깨뜨리자 임진강을 지키던 이귀는 도망쳐서 인조에게 파천하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결국 파천했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은 서울 점령 직후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선조의 열번째 아들로 인조에게는 숙부뻘이었다. 한번 배반한 인물은 계속 배반한다고 했던가? 인조가 경기 방어사로 임명한 이홍립은 이괄에게 투항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당일 훈련대장으로서 반정군에게 투항했던 바로 그 이홍립이었다."(282)


"이괄에게 혼쭐이 난 반정공신들이 반란 진압 이후 내놓은 대책은 표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찰(譏察)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반(反)혁명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방위적으로 사찰을 강화했다." "기찰로 불리는 공작정치가 강화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신 풍조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들의 훈련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무관들은 습진(習陣, 병사들을 모아 진을 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피했다. 혹시라도 역모를 꾀하기 위한 병력 동원훈련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반정공신들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욕(私慾)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3-4)


"(강화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들과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으로 옮겨졌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뒤부터 인조나 반정공신들이 보기에 광해군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그를 '처리'해버릴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로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광해군은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해였다. 후금과 사단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해군인만큼 인조나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세월보다 더 길었던 셈이다. 그는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다."(2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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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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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에 정립된 삼사는 외척들이 부당하게 얻어낸 각종 특권과 포상에 반대하는 의견을 수시로 제출했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삼사의 이런 언론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삼사가 비판한 대상이 자신과 사적인 친밀도가 높은 외척들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불쾌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삼사의 언론활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며, 국왕이 일정한 타협한을 제시하거나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해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달리 보면 이것은 당시의 삼사가 그만큼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던 국왕에게는 더욱 심각한 폐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신들도 국왕의 그런 판단에 공감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능상陵上'으로 규정했다."(101)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즉위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난 지(성종 13년 8월) 14년 만이었다." "그날 수라水刺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18세였던 국왕의 충격과 비통을 깊게 비춰준다." "폐비의 추숭과 그 친족의 우대라는 두 가지 사안은 연산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한 문제였다. 삼사는 즉각 반대했다. 그들의 주요한 논거는 성종이 전하를 생각해 묘소를 가려서 장사했고 지키는 군사를 두었으며 현지의 관원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했으니 고장藁葬이 아니고, 폐비한 조치는 성종의 독단이 아니라 대비들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며, (폐비의 추숭을 건의한 창원부사) 조지서 같은 미관이 국가의 막중한 일을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폐모의 추숭 작업은 일단 중지되었지만, 곧 재개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묘소를 옮기고 사당·석물 같은 시설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었다."(105-6)


"가장 중요한 권력의 하나인 인사권을 계속 문제 삼는 삼사의 언론에 국왕은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대간의 말 때문에 육경六卿을 모두 바꾼다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대들을 삼공에 제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너희는 자질구레한 문서 업무나 처리하는 관리[刀筆之吏]"라고 질타했다." "삼사는 정승의 임명을 반대해 관철시켰고, 의정부·육조에 재직하던 거의 모든 현직 대신들의 능력과 품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이수공과 최부의 상소에서 나타났듯이 거기에 동원된 수사는 대단히 과격하고 직설적이었다. 탄핵받은 대신들은 즉시 사직했으며, 인사권을 국왕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어로 대응할 뿐이었다. "대신을 탄핵하는 것은 국왕을 탄핵하는 것이며 대간의 말 때문에 대신을 교체하면 권력이 대간에 있는 것"이라는 국왕의 심각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대신과 삼사의 역학관계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116-8)


"삼사에게 성종은 이상에 가까운 국왕이었고, 그의 시정施政은 후대의 임금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중요한 모범이었다. 삼사는 연산군에게 모든 일에서 성종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누차 간언했다. 그 핵심적 덕목은, 예상할 수 있듯이, 너그러운 납간이었다. 우선 성종 자신부터 그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삼사의 회고에 따르면 성종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상서』의 구절을 읽고 커다란 깨달음과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임금의 도리 중에서 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내가 즉위한 이래 간언을 이유로 죄준 신하는 한 명도 없었으니, 그대들은 내 뜻에 거슬릴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잘못되는 일이 있거든 모두 말해야 한다." 삼사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이처럼 간언을 처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며 삼사를 우대한 성종의 시책 덕분에 나라가 융성했다고 평가했다."(133)


그러나 연산군은 "능상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삼사도 무수히 사직했지만, 연산군도 삼사를 체직하거나 국문하라는 지시를 거리끼지 않고 빈번히 하달했다. 예컨대 재위 1년 6월 윤탕로의 처벌과 관련된 논란에서 그를 용서한다는 단자를 네 차례나 내렸지만 삼사가 받아들이지 않자 연산군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면서 모두 체직하고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재위 2년에도 동료를 하옥해 국문하라는 왕명에 반발해 삼사가 모두 함께 투옥되겠다고 하자 국왕은 기꺼이 승낙했으며, 폐비의 신주와 사당 건립에 반대하는 삼사를 모두 의금부에 내려 당일 안에 국문을 마치고 모두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에는 부제학 이승건이 제수祭需의 과다와 경연의 불참을 지적하자 국왕은 가소롭다면서 술과 고기를 내리니 실컷 먹고 돌아가라는 조롱에 가까운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138-9)


"무오사화는 그 처벌 대상과 지속 기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매우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규모의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으며, 그런 파국을 감행하기에 앞서 일단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인 사건으로 생각된다."(144) "사화는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그 사건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혐의로 시작되어, 그와 교유한 젊은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었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逆心을 품은 사건으로 규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김일손의 사초는 단종·사육신·소릉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 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 가까운 세조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었다."(146-7)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계기를 이용해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아가 국왕은 국무에 관련된 발언과 기록 전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동안 그가 가장 불만스러워했고, 따라서 가장 이루고 싶어한 목표는 아마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김일손과 김종직의 불온한 문서에서 촉발된 사화에는 삼사도 적지 않게 연루되었다. 전자의 죄목은 사제관계를 매개로 현실과 역사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그들과 붕당을 맺어 비호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붕당과 능상이었다. 국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삼사의 행동을 교정하고 새로운 선발 지침을 하교함으로써 그동안 가장 불만스러웠던 집단을 자신의 의도와 부합되게 바꾸려고 시도했다."(159-160)


"사화 이후 일단 삼사가 상당히 순치順致됨으로써 그동안 그들의 반대로 행동을 제약받아온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유례없는 파국인 갑자사화였다는 점에서 그런 실천의 과정과 방법은 순조롭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국왕의 일탈이었다. 재위 중반 강력해진 왕권을 갖게 된 국왕이 그런 권력을 가장 집중적으로 행사한 분야는 정치나 제도의 개혁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비정치적이며 비본질적인 사안들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국왕에게 동조해온 대신들도 왕권의 자의적 행사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치 세력의 협력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해갔다. 갑자사화가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 까닭은 이런 정치적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77-8)


# 왕권 일탈의 증거들

1. 늘어난 사치 : 왕실 씀씀이를 충당하는 공안貢案 확대

2. 사냥 탐닉 : 사냥 준비에 실수한 관원들을 혹독하게 처벌

3. 응방의 확대 : 각종 사냥용 짐승들을 궁궐에서 사육

4. 연회와 음행 : 재위 8~9년 이후 본격화(갑자사화 이후 흥청興淸 등과 관련해 폭발적으로 증가)

5. 정보 차단 : 궁궐에 인접한 도로의 통행금지와 민가 철거

6. 언로 통제 : 국왕/궁궐과 관련된 발언을 극단적으로 통제


# 갑자사화의 특징

1.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신하들이 연루되었다.

2. 능상 척결과 폐모 사건 보복이라는 원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집요한 소급 처벌이 행해졌다.

3.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유례없이 ‘장기적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자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능상의 표본으로 판단했고, 그 결과 집요하고 거대한 피의 숙청을 벌였다." "이세좌가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한 좌승지였다는 공교로운 우연이 겹쳐지면서 그 사안은 능상의 처벌과 폐모 사건의 복수라는 갑자사화의 도화선을 형성했다."(227-8) "이세좌가 방면되었을 때 거기에 반대하지 않은 삼사와 그를 문안한 신하들을 낱낱이 적발해 석 달에 걸쳐 가혹하게 처벌했다. 요컨대 연산군의 의지는 "지금 사건을 계기로 불경하는 풍습을 통렬히 고치려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폐해인 능상에 저촉되었다고 국왕이 판단한 죄목은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모후의 폐비와 사사였다. 사건은 곧 그리로 번져갔고, 숙청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234-5)


"재위 8년 2월 연산군은 "국왕이 첩의 침소를 살피지 않고 왕후를 폐위시킬 때 조정의 신하들은 목숨을 잊고 간언하는 것이 옳은가, 죽음을 두려워해 순종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폐모 사건을 지칭한 발언이라는 것은 또렷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오판을 유도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런 오판을 막지 못한 신하들에게 그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이 있다는 판단도 명백히 담겨 있었다. 아울러 그 비극은 지존의 국왕인 자신을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점에서 바로 가장 중대한 능상이었다. 이런 판단은 2년 뒤 갑자사화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236-7) "300명에 가까운 대규모의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갑자사화 이후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50)


처절한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제압된 신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재위 11년 후반부터 시작된 허한패許閑牌의 사용으로 생각된다. "한가롭게 쉬는 것을 허락한다"는 그 패의 의미대로 국왕의 소집이나 업무로 예궐한 신하들은 그 패가 내려진 뒤에야 퇴궐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국왕이 사냥이나 유흥으로 금표에 늦게 행차해 늦게 환궁하는 날이면 재상들은 한밤이 되어도 귀가하지 못하고 대기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런 억압에 시달렸지만, 도리어 더욱 신실한 충성을 강요받았다. 모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판자에 새겨 벽에 걸어놓고 보아야 했다. 관원들의 사모 앞뒤에 각각 '충忠·성誠'이라는 글자를 새기게 한 조처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연산군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를 국문하고 재상과 대간이 서로를 탄핵하게 했으며 조하·조참 때는 대간과 감찰이 신하들을 규찰케 함으로써 신하들끼리 감시하고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254-5)


"연산군은 주요 제도를 크게 변개하거나 완전히 혁파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폐기한 대상은 그동안 가장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웠던 경연과 삼사였다. 연산군은 경연관을 진독관으로 고쳤다가 아예 폐지했으며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그리고 대간의 서경도 없앴다. 궁궐과 너무 가까워 금표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여러 관서들의 위치도 옮겨졌다. 유교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상징성을 지닌 두 기관인 성균관과 문묘는 각각 원각사와 도성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성균관 관원과 유생은 태평관으로 옮겨졌다." "이런 행동의 주요 동기는 불만스러운 제도를 완전히 종식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거대한 사치에서 비롯된 재정의 고갈을 해소하려는 경제적 필요였다. 전자는 흡족스럽게 달성되었지만,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긴요하지 않은 모든 비용을 줄여 계평 등에게 지급하는 데 사용하라는 왕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시도였다."(262-3)


"여색의 탐닉과 관련된 사항은 지금까지 보아온 연산군의 자의적인 왕권 행사에서 극점을 형성했다고 할 만하다. 엽색행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은 갑자년 후반부터 폐위될 때까지 만연했다." "그는 순 임금이 요 임금의 두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자주 거론했으며 예부터 호걸스러운 제왕들은 풍류와 여색에 많이 빠졌지만 국가의 흥망은 거기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 신하의 충성과 간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갑자년 이후 당唐 현종玄宗은 여색(양귀비) 때문이 아니라 이임보·양국충 같은 간신들 때문에 나라가 멸망한 사례로만 자주 거론되었으며, 그가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사실도 추가되면서 국왕의 황음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선례로 기능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한漢 성제成帝와 송宋 휘종徽宗도 조비연과 이사사라는 애첩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유희를 즐겼다면서 자신의 역사적 논거를 보강하기도 했다."(281-3)


"연산군 12년 9월 1일 저녁,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訓練院에 집결한 반정군은 먼저 진성대군晉成大君에게 반정의 경위와 추대 의사를 아뢴 뒤 3경(밤 11~1시)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연산군은 턱이 떨려 말을 잇지 못했다. 겁에 질린 국왕의 모습대로, 상황은 금방 판가름났다. 동틀 무렵까지 창덕궁은 숙위宿衛하던 군사와 시종·환관·나인들이 모두 도망가 텅 비었고 결국 정문인 돈화문이 열렸다. 박원종 등은 환관을 보내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고 동궁으로 옮기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며, 연산군은 순순히 따랐다. 가장 중요한 장소인 창덕궁의 상황을 종결한 반정군은 경복궁으로 가서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정현왕후에게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켰다는 사실과 진성대군을 옹립하겠다는 계획을 아뢰었다. 그날 신시(오후 3~5시)에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반정은 만 하루도 안 되어 성공했다."(311-2)


"세자 시절부터 삼사의 언론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온 연산군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언론을 용인하거나 지원했던 성종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능상의 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폐모 사건이라는 개인적인 원한과 맞물리면서 증오의 수준으로 비화했다. 삼사가 연산군을 비판하는 논거로 거의 언제나 성종의 선정善政을 거론한 것도 부왕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치세의 종결을 몇 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라는 성종의 자평대로 성종 후반, 그리고 연산군대 초반의 삼사는 분명히 일정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중요한 오류는 "본질적 문제와 비본질적 사안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꿈으로써 본래의 목표에서 이탈해간 것이었다. 그런 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거대한 폭정과 강제적인 폐위였다."(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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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객체를 본뜬 형태만으로는 그림문자일 수는 있어도 문자가 될 수는 없다. 형태가 객체를 상기시킬 뿐, 말은 개재介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객체를 본뜬 형태는 객체를 일컫는 언어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비로소 문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메커니즘인 <상형>에서는, <형形>이 <음音>을 불러일으키고, 그 <음>은 <주체 안에서 상기되는 객체>인 <의意>를 불러일으킨다. <형>도 <상기되는 객체인 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의>는 그 뜻을 일컫는 <음>을 불러일으킨다. 한자의 이러한 <형음의> 트라이앵글이야말로 언어음이 문자가 되는, 즉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로 태어나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국에서도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을 핵심으로 한 이 <육서의 원리>와 <형음의> 통일체라는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였다."(88-9)


# 음소(音素, phoneme) : 단어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 가령, '말/달/날/살'에서는 'ㅁ/ㄷ/ㄴ/ㅅ'이 음소이고, '말/물'에서는 'ㅏ/ㅜ'이 음소이다.


"<음소>를 탐구하는 언어학의 분야는 <음운론>(phonology)이라 불리며, 언어음 자체의 발음법이나 물리적 성질 등을 연구하는 <음성학>(phonetics)으로부터 독립했다."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모든 음소를 확정하고, 각각의 음소에 하나씩 자모字母로서의 형태를 할당해 주면 된다. 문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자모는 음의 평면에서도 다른 소리가 되며, 그것이 각각의 의미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한편, 발음하는 단위로 언어음을 나누면 <음절音節>이라는 단위를 추출할 수 있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국어 모어화자라면 모두 '어·머·니'라는 3개 단위로 분절하여 발음한다. 아무도 '엄·언·이'처럼은 발음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어·머·니'라는 3개의 단위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음절>이다."(144)


"<정음>은 언어음을 내는 사람의 음성기관의 모양을 <상형>했다. 왜? 다름 아닌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요컨대 <정음>은 <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형태>를 찾고,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제자들은 <정음>의 근원, <음>이 <형태>를 얻는 근원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158) "소쉬르는 언어의 근본원리로서 <선조성線條性>을 제2원리로, <자의성恣意性>을 제1원리로 보고 있다. 언어음이 나타내는 의미와 소리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으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오노마토페이다. 개 짖는 소리는 '왕왕', '멍멍', '바우와우', '바우바우' 등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언어의 음과 의미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오노마토페를 제외하면. 그리고 문자와 음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훈민정음>을 제외하면."(160-1)


# 오노마토페 : 의성의태어


"『훈민정음』은 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終聲(종성)은 復用初聲(부용초성)하니라.' 종성은 다시 초성을 사용한다." "먼저 음절의 첫 자음 또는 제로 자음, 즉 초성을 분리한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이 이미 한 일이다. 성모聲母(initial)가 그것이다. 단 중국 음운학은 여기에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남은 부분 중에서 모음마저 떼어내지 않으면 종성은 단위로서 추출할 수 없다. 모음과 종성을 추출하는 음성학적 차원의 관찰과, 그것을 음소로 다루는 음운론적 차원의 사고가 없다면, 종성은 추출할 수 없고, 하물며 그 종성에 게슈탈트를 부여할 수도 없다." "종성자모로 초성자모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정음>의 창제자들은 이론 무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되는 것은, 음이 양이 되고 양이 다시 음이 되는 이치에 근거한다는 식으로 말이다."(167-8)


# <게슈탈트> = <형태> = 개개의 요소로 환원해서는 얻을 수 없는, 지각상知覺上의 총체로서 통합된 모양


라틴문자나 키릴문자와 달리 "<정음>에서 자모는 아직 하나의 <글자>가 아니다. 자모는 설명을 위해 자모 자체를 표기할 때 이외에는 그것만으로 쓰여지는 일은 없다. 자모는 어디까지나 글자를 구성하기 위한 유닛일 뿐이다. <자모≠글자>, 요컨대 자모는 원자原子요, 글자는 분자分子이다. 이들 자모의 유닛을 조합해서 하나의 글자 유닛을 완성한 후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음이 하나의 자모인 <단음문자單音文字>라는 성격과, 하나의 음절이 하나의 글자라는 <음절문자音節文字>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문자체계가 완성된다. <단음=음절문자> 시스템의 성립이다." "<훈민정음>은 음의 평면을 다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하여 바라보고 있다. 음의 평면을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한다. 그 계층화는 문자의 평면에서도 게슈탈트상으로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하는 동시에 통합하는 표기 시스템이다."(179-80)


"음의 최소 차원에 있는 음소에 하나의 자모를 부여하고, 음소가 합쳐진, 음의 더 고차원적 레벨인 음절에, 자모의 결합체로서 하나의 글자를 부여한다. <음소=자모>를 조합해서 <음절=글자>를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단음=음소>의 배열을 나타냄과 동시에 음절이라는 단위의 <외부 경계>뿐 아니라 음절의 <내부 구조>도 나타낸다. 'ㅂ'p, 'ㅏ'a, 'ㅁ'm과 같은 단음문자 유닛(음소의 평면)과, '밤'pam과 같은 음절문자 유닛(음절의 평면)이 음소와 음절 각각의 층에서 <형태>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두 가지 층의 표현 방법 면에서도, 그 두 층을 꿰뚫는 단음문자 유닛만으로 두 층의 <형태>가 성립하는 경제적인 구조이다. 게슈탈트로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ㄱ', 'ㄴ', 'ㅏ', 'ㅗ' 등 단음문자 유닛뿐이며, 음절 유닛을 나타낼 별도의 게슈탈트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181)


"<음>을 해석하고 여기에 <문자>라는 형태를 부여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 음운학에서는 음의 높낮이인 <성조>까지 '운모'韻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지만 실제로 <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에는 <높낮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음의 높낮이>는, 언어에 따라서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기능을 한다. 현대 베이징어에서는 음절 내부에 있는 음의 고저가 단어의 의미를 구별한다. 그것이 성조이다."(191) 15세기 한국어에서 "고저 악센트는 중국어의 성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용어를 써서 '평성'平聲, '거성'去聲, '상성'上聲으로 구별된다." "<정음>은 이런 악센트의 구별을 문자의 좌측에 점을 찍음으로써 형상화하였다. 해례본에 이르기를,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소리를 낸다. 왼쪽에 점을 하나 찍으면 거성이요, 점을 두 개 찍으면 상성, 점이 없으면 평성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 <방점傍點>이라고 불린다."(196)


# 첫 자음 : 성모聲母 / 나머지 요소 : 운모韻母


# 평성 : 가장 낮은 음 / 거성 : 가장 높은 음 / 상성 : 처음은 낮고 나중은 높은 음


"언어학에서는 의미를 가지는(실현할 수 있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를 <형태소形態素>(morpheme)라고 한다." "영어의 'playing'과 'dancing'에서 {play}와 {dance}는 어휘적인 형태소이고, {-ing}은 문법적인 기능을 하는 형태소이다."(203) "<정음>은 <초성+중성+종성>을 하나의 <형태>상의 단위로 묶는 입체적인 구조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그리고 형태음운론의 평면이라는 세 가지 층을 통합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선택이 가능하다."(211) "문자체계가 형태음운론적인 표기를 채용한다는 것은, 문자가 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문자의 <형태>가 의미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밥'이라는 <정음>의 한 글자가 나타내는 단위가 음절인 동시에 형태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명 음을 표현하던 글자가 언제부터인지 형태소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고, 사실상 단어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221)


# <정음>의 3층 구조

1 [음운론의 평면] ㅂ ㅏ ㅁ ㅣ(pami)

2 [음절구조론의 평면] 바 미

3 [형태음운론의 평면] 밤 이


# 형태음운론적 표기 : 음의 평면에서 음절 구조의 변용(종성의 초성화)이 일어나더라도 형태소를 만드는 음의 <형태>를 문자의 평면에서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표기법


최만리가 상소문에 쓴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음을 사용하여 글자로 합친다> 혹은 <음을 이용하여 글자를 만든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친다> 정도로 풀이하면 좋을 것이다. 요컨대 음으로써 글자를 만드는, 즉 음을 나타내는 자모字母를 조립해 문자를 만든다는 그런 방법은 모두 옛 사적事績을 어기는 것이며 옛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용음합자>라는 것은 예부터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다. <정음>처럼 완성된 형태로서의 형태음운론적인 알파벳 시스템은 중국 대륙에도 없었고 지중해에도 없었다." "<정음>의 사상을 <용음합자>라는 간결한 구절로 파악하고 있는 최만리의 안목은 정확하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은 단순히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정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용음합자>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 자체를 향한 이의이다."(240-1)


# 用音合字 盡反於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치는 것은 모두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정음>은 세포여야 하는 하는 문자를 분자分子 단위로 해체해 버린다. 나아가 분자는 원자原子로 해체된다. 당연히, 분자는 음절이고 원자는 음소이다. 의미가 되는 세포를 분해해 나간다. 분자로, 원자로. 『훈민정음』은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니? <문자=한자>란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음을 이룬다. 문자란 합치거나 떼어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음>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문자가 무기적인 요소(element)로 해체되어 있질 않은가.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쓰여진 역사가 존재한 이래, 우리는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살아왔다. <사고思考>란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이고, <쓰는 것>이란 그러한 세포를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키우는 것이다." "성리학의 에크리튀르야말로 그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244)


# 에크리튀르 = <쓰는 것> <쓰여진 것> <쓰여진 지知>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이러한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대응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이데올로그인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後序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有天地自然之聲이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이니라"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다.) 이 땅에 <글>이 있음은 이 땅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황제를 초월한 <천지 자연>이며 이 땅에 이 땅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이다."(247) "그리고는 괄목할 만한 다음의 언설에 이른다. "雖風聲鶴戾와 鷄鳴狗吠도 皆可得而書矣니라"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써서 나타낼 수 있다.) 온갖 살아 있는 것의 <소리>를 쓰기, 한자한문이 쓸 수 없었던 조선어의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쓰기. 그것은 <정음>의 창제자들에게는 한자한문을 뛰어넘기 위한 결정적인 목표였을 것이다."(251-2)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가 있다. <말해진 언어>는 <쓰여진 언어>보다 앞서 실현되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가 될 때, <음>의 모든 리얼리티는 사라진다. <쓰여진 언어>에는 말하는 속도도, 강약도, 높낮이도, 인토네이션도 없다." "<말해진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상호 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 가지 선율로써 생기는 듯한 대위법對位法적 구조를 보여 준다. <말해진 언어>는 결코 한 사람의 발화의 연속으로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쓰여진 언어>는 그러한 대위법적인 구조를 상실하는 반면, 시각적인, 그리고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때로는 촉각적이기도 한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가 하나하나의 말을 규정하고 제약하고 하나하나의 말이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를 만드는 양상을 보인다.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차이를 묻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258-9)


『용비어천가』 2장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면적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을 본다. "한자漢字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왕조의 송가頌歌를 소리 높여 부르는 서사시의 한 장, 단어의 리스트가 아니라, 내적인 연결과 동적인 전개를 가지는 문장(sentence)이자 글(text)인 <쓰여진 언어>. 그곳에서 <나·랏:말싸·미> 약동한다. "소리에 따랐기에 음은 칠조七調에 맞는다." 방점傍點으로 나타나는 선율과 함께 조선어로 연주되는, <바람에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음양의 암유暗喩는 우리 누구나가 지금 처음으로 체험하는,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금 샘물과 같이 넘쳐 솟아나는 이 땅의 말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국어의 <쓰여진 언어>였다."(264)


# 『용비어천가』 2장 : 한자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를 형성한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후서後序에서 "모양의 본떴으되 자字는 고전古篆을 따랐다"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했다. <정음>은, 발음되는 모양을 본뜨고 글자는 고전(옛 전서)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만리는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전문篆文을 본떴을지라도 음音으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어긋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篆文이란 중국 전국시대의 전서인 대전大篆과 그것을 간략화한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소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음>의 자획字劃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과 비교할 때 전서와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字倣古篆' 즉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라는 언급에 관해서는, 문자의 게슈탈트를 전서에서 가져왔다기보다는 한 획 한 획의 자획에 대해 전서를 본떴다는 편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혹은, 널리 한자의 고체古體를 총괄하여 대표적으로 '고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321-2)


"서양 인쇄술에서는 로마자 'I'의 처음과 끝 부분에 들어가는 장식을 <세리프serif>라고 한다. 로마자 극한의 서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문에서는 이 세리프가 형태상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상세리프sans serif라고 부른다. '세리프 없음'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고싯쿠'Gothic체라는 것은, 이렇게 장식 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상세리프 계통의 서체를 말한다. 이 명칭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고딕체'라고 불린다. 정음의 자획은, 전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붓으로 생기는 돌기가 없는, 거의 완전한 상세리프체 즉 고딕체이다. 기필起筆도 종필終筆도 없어─기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직선이기에─붓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전서는 붓으로 쓰는 서체인 데 비해 정음의 자획은 완전히 붓 쓰기를 거부한 형태이다. 갈고리나 삐침도 부정하고, 두 글자 이상을 이어서 쓰는 <연면連綿>도 부정한다."(326-7)


"붓에 의한 선은 정신성과 지知,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형태> 역시 정신성이나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한반도의 문자사를 관통하는 원리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자는 마치 살아 있는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한자의 <형태> 역시 살아 있는 정신성을 묻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눈과 손에 의한 수련을 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묻는 <형태>이다. 이에 비해 정음은 그 세포를 음절이라는 분자로, 그리고 음소라는 원자로 해체하였다. 정음의 구조 자체가 그런 로지컬한 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지에 걸맞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다. 정음의 <지>는 원자인 자모를 조합하여 완성되는 분자 구조로서, 나아가 텍스트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분자구조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자의 정신성과 결별하고 정음 <형태> 자체에 새로운 <지>를 당당히 각인한 일이었다."(331-2)


# 궁체 : 신체성을 얻은 정음의 아름다움


"문자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로제타스톤이든 광개토대왕비든, 파피루스든, 갑골이든, 서적이든, 그것이 단편斷片이든 전체든, 문자란 항상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란 항상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 히스토리에Historie이다. 문자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에게, 이야기된 무엇인가를 과거에 이야기된 것으로 읽게끔 한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原初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이다. 문자를 읽는 이에게 <읽기>라는 언어장言語場에서 그 문자 자신의 원초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이다. 물론 『훈민정음』 역시 과거의 책이며, 과거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순간 그곳에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는 아니다. <음이 문자가 된다>는, <말이 문자가 된다>는 원초가 항상 읽는 이 자신에게 <지금 이곳에서> 사건으로서 생겨나는(geschehen) 역사, 즉 게쉬히테Geschichte이다."(356-7)


# 한글 발전의 시대구분(이윤재, 1933)

1. 정음시대(창제기) : 세종 28년(1446)~성종 대까지 50년간

2. 언문시대(침체기) : 연산군 대~고종 30년(1893)까지 400여 년간

3. 국문시대(부흥기) : 갑오개혁~경술년(1910)까지 17년간

4. 한글시대(정리기) : 주시경의 한글운동~현재까지 20여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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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민주주의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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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는 점에서 언어와 문자는 해당 공동체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의 도구이기에 언어와 문자의 선택과 유지에는 구성원의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국어정책과 국어 인식에서 민주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한글이 공용 문자로 쓰인 뒤에도 한글은 여러 번 그 모습을 바꾸었다. 모아쓴 글자(한)를 풀어쓴 적(ㅎㅏㄴ)도 있었고,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쓴 적(ㅇㅍ)도 있었고, 소리 나는 대로 쓴 적(사람이 → 사라미)도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대중의 호응을 얻어 현재까지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새로운 시도가 성공했다면 한글 표기가 간편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한 개혁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문자의 선택이 역사적 선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관습의 힘과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원칙이다."(16)


"동경어를 표준으로 삼은 표준어 정책은 지방분권적 봉건국가였던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민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근대 일본의 열망이 표준어 정책에 투영되면서 표준어 정책은 국민정신의 함양을 목적으로 강력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곧 새로운 국어를 정립하기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조선의 표준어 정립 과정은 이미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통어를 공식화하는 일에 가까웠다. 따라서 서울말을 표준어로 공식화하는 일은 설득과 투쟁의 문제라기보다는 교육과 보급의 문제였다." "이처럼 표준을 정하는 일이 막연한 상황에서 '대체로 쓰이는 말'과 '중류 사회의 말'이라는 기준은 '규칙에 맞는 표현' 혹은 '바른 본'이 대신하게 되었다. 언어의 표준화 사업이 바람직한 말을 찾아 중류 계층에게 걸맞은 말을 건설한다는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바람직한 말을 익힌다는 것은 표준어를 권리로 인식하기보다는 의무로 인식하게 하는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했다."(44-5)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결성되던 1929년 민족문화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에게 조선어의 표준을 정하는 것은 조선 문화의 사활을 결정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조선의 문화가 향상되지 못한 것이 모두 언어의 표준을 마련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조선어의 표준화가 얼마나 절박한 일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표준어 사정안은 민족어사전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의 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1936년 10월 28일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대중 집회가 금지되었고,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화 정책이 더욱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표준어 제정의 역사적 의미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용어로서의 표준어를 정립하고자 한 노력은 더 큰 억압을 불러왔지만, 억압 속에서 강화된 절박감은 우리말 사전을 완성하는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찬된 사전은 해방 후 우리의 국어생활을 이끄는 기준이 되었다."(53-4)


"대부분의 근대 민족국가는 순수한 모국어를 국어로 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언어 정화 운동을 국가사업으로 진행하였다. 방언을 제약하면서 표준어를 확립하였고, 이와 함께 철자와 문법을 정비하면서 이상적인 언어 모델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규범에 어긋나는 표현은 국어의 순수성을 해치는 옳지 못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순수한 국어를 지향하는 것은 언어 규범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풍조와 맞물려 외래어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처럼 외래어를 배척하는 언어 정화 운동이 시작되고 국가주의 교육이 등장하면서, 언어는 교섭과 변화를 통해 발전해가는 것이고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이 소홀히 인식되었다. 그리고 언어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을 국가 정체성 유지와 관련지으면서 외래어 문제는 언어 규범의 문제라기보다 도덕과 이념의 문제가 되었다."(98)


"한국적 어문민족주의는 식민지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역사성 때문에 어문민족주의는 해방 이후 국어정책과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외래어가 폭넓게 쓰이는 현실과 별도로 우리의 외래어관이 서구나 일본에 비해 더 폐쇄적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외래어 의식의 특이성은 외래어에 대한 저항의식에서 나타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외래어의 기원에 따라 이를 대하는 의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 일본어 표현과 일본 한자어는 사용하는 이의 무지를 질타하거나 고루함을 비판하는 예시로 사용되곤 하지만, 서구 외래어는 현학적인 또는 과시적인 표현 태도를 비판하는 예시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언어순혈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을 경우 국어 속 한자어를 외래어로 보고, 한자어의 존재를 중국 문화에 대한 종속으로 판단하기도 한다."(102)


"우리의 근대의식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탈중화(脫中華)'를 모토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도 마찬가지였는데, 동아시아 중세 질서가 중화주의를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다. 근대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문화적으로는 한자 문화로부터의 독립을 내세우게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정치·문화적 독립에 대한 열망은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운동은 다른 어떤 문화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고유의 것을 찾고자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신문물을 받아들여 새롭게 우리 문화를 건설하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근대 국어 운동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러한 흐름에서는 서구 외래어보다 한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외래어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국어 순화의 결과를 왜곡시키기도 한다."(111)


"관례를 떠나 현지 발음대로 외래어를 표기하자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찬반이 팽팽히 맞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주장이 공감을 얻는 이유는 실용성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효율성과 실용성 면에서 뒤떨어져 있음에도 관습이나 전통에 매달려 필요한 변화를 과감히 실천 못하면 퇴보나 제자리걸음밖에 안 된다"(이익훈, <어륀지 발음 옳다>)라는 일갈에 '오렌지는 국어, 어륀지는 영어', '국어정책의 주체성' 따위의 말은 초라한 변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효율성과 실용성을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는 이들의 '실용주의'는 특정 계층의 편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말하는 '실용'과 '효율'은 '관습'을 부정하고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실용주의자들은 대중들의 낯설어함과 곤혹스러움을 개의치 않는다. '일반인들이 낯설어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선점한다는 것은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토대가 된다."(153-4)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민족어가 생활의 언어에서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민족어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어진 것은 민족어의 역할을 생활 언어로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대 민족어의 탄생은 민족어의 역할 확대를 의미했다. 따라서 민족어를 유지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민족어가 정치, 경제, 학술의 언어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는 일본어 상용 정책에 맞서 민족어 운동을 전개한 선조들도 뻐저리게 느꼈던 문제다." "규범을 강조하고, 표준어를 완고하게 고수하려는 조선어학회의 태도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융통성이 없는 근대주의자의 모습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어를 국어인 일본어와 같은 반열에 올리려는 의욕적인 민족주의자의 모습이다. 일제의 일본어 상용 정책이 심화되면서 조선어의 위상이 추락하는 현실에서 조선어의 규범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들은 이런 점에서 선각자였다."(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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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 책과함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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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세종 2) 세종은 집현전을 확대 개편해 왕실 연구기관이자 국왕의 자문기관으로 키웠다. 이는 집현전의 주 임무가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세종은 문신 가운데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집현전 학사로 삼아 강론에 참여시켰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을 편찬하게 했고 일부 학사에게는 사관史官의 일을 겸하게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학술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고 당부하면서 여러 특혜를 베풀었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현전 학사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서적을 구입해 집현전에 보관케 했다. 또한 재주 있는 소장 학사에게는 집현전의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만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29)


"1444년 2월 16일자 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라 명하고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이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게 했다. 한글과 관련해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린 최초의 공식적인 지시였다."(32) "한글이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나서도 새 문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새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나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 세종은 창제 다음해인 1444년 2월에 한자음에 관한 책인 운회를 번역하라고 명했고, 1445년 1월에 신숙주,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한자음을 질의하도록 명했으며, 같은 해 4월에 권제, 정인지 등이 편찬해 올린 《용비어천가》의 간행을 명했다. 이 세 가지는 한글이 세상에 나온 이후 3년 동안에 일어난 일 중 언어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38)


왜 세종은 한자음 정리 사업에 매진했던 것일까? "한자음 정리 사업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가 옛부터 써오던 중국의 고대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 한자음은 옛 한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세종은 《고금운회거요》와 같은 운서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중국의 한자음, 즉 중국 명나라의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중국 사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정확한 중국발음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표준 한자음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것이 《홍무정운역훈》이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조선에서 사용하던 한자음의 표준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현실 한자음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대와 고대를 망라하여 가장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와 명나라 운서들을 모두 참조하여 세종 29년(1447)에 완성된 《동국정운》이 바로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43-4)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어지御旨는 세종의 자주의식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중국말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조선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의 차이를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종 당시에도 한글의 창제와 사용은 한자와 한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세종 또한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국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기록하고 자신의 모어母語를 기록할 수 있는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도 했다. 몽골, 만주, 말갈 등 중국 주변 민족들이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고유 문자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글 창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되었고, 한글의 위상 또한 이 맥락에서 결정되었다."(46-7)


"한글 창제의 정치적인 목적은 한글 창제 이전인 1434년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고, 1442년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준비하기 시작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핵심 이념인 충과 효를 강조한 《삼강행실도》와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한 《용비어천가》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불교에서 유교로 국가의 이념이 바뀌었으니 바뀐 이념을 홍보해야 했으며,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바뀌었으니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해야 했다. 그런데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서는 홍보 책자의 내용을 탄탄히 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사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신문자 한글이 이 사업에 활용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세종 스스로도 《삼강행실도》를 쉬운 문자로 번역해 가르친다면 백성을 교화하기 쉬워진다는 논리로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반박한 적이 있었다."(100)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한글이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천자문》을 가르칠 때 교육 문자로 한글을 사용했듯이 한글은 양반 계층의 한문 학습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言路가 트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성들과 사대부 남성 간의 소통에도 한글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가 신하에게 한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신하들이 중전이나 대비에게 한글로 문서를 올리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글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한글이 한문보다 사용층이 더 두터웠던 문자라고 볼 수 있다."(49)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이 불온한 내용으로 탄압받은 때가 1511년인데, 이때는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는 새 문자가 창제된 후 50여 년이 지나서 일반 백성들이 한글 소설을 탐독할 정도로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빠르게 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면 한글 소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세책(貰冊,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쓴 다음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식)과 방각(坊刻, 판매 목적으로 서방書坊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한글 소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 소설을 빌려보거나 사고파는 방법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이즈음 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벌었던 이야기꾼(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이 등장하기도 했다."(135)


"상업 출판과 한글 보급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바로 천주교 교리서다. 1801년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나왔을 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는 한글로 된 이 책이 특히 무식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 이를 간행한 바 있다. 또한 1801년(순조 1) 1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신유박해 당시 죄인을 심문하던 심문관이 "서민이라도 삼사십 권의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으니 책을 숨긴 곳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한글 교리서의 출판과 유통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네 권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881년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가 한글로 간행되었으니 서학이든 동학이든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한글로 교리를 출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에 한글의 위력이 매우 컸으며, 한글의 대중적 보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40-1)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일본어 상용화를 전제로 한 교육도 본격화됐다.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어가 명실상부한 권력언어인 국어로 되고, 우리말은 피지배 민족의 언어로 그 위상이 급락하였다." "교육, 행정, 법률, 학술 등의 영역에서 밀려난 조선어는 금세 이류 언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본어를 강요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언어에서 밀려난 언어는 생활어로 쓰이다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도태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 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고 권했으며, 총독부 관리들에게는 조선어 습득을 장려하면서 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대상으로 조선어 급수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154)


"주시경은 《보중친목회보》(1910.6)에서 '國語'를 '한나라말', '國文'을 '한나라글'로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한말'이란 말과 '한글'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글'의 '한'은 대한제국의 '韓'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한글은 곧 '대한제국의 글자'라는 말을 나타낸다." "주시경의 제자인 권덕규는 "韓文을 조선말로 그냥 읽어 '한글'이라 한 것이요, 韓文이라고 그냥 음대로 정음으로 쓰면 지나글 漢文과 음이 혼동될 혐의도 있어 이것도 피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한글이라는 명칭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한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명칭을 '한글'이라고 한 것도 '한글'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의 어문 정책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본다면 당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국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못하는 현실이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을 수 있다."(244-5)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이 조선어를 용인하는 상황(이개언어병용정책)을 활용해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조선어 사전 편찬, 철자법 및 표준어 제정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문맹 상태에 있었던 현실은 조선어학회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38년 3차 교육령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은 강제적인 국어 상용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그 이전에 이미 한글 강습과 같은 대중사업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1940년 10월에 1933년의 철자법 통일안을 개정한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고, 1940년 6월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여, 이를 1941년 1월 《외래어표기법통일안》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는 어문 규범과 관련한 모든 사업을 완결했음을 의미한다."(159-60)


"근대 어문정리기에 우리 맞춤법을 기초했던 주시경과 같은 선각자들은 (본래의 단어 형태를 중시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표기법을 채택함으로써 형태상의 일관성을 중요시했던 세종의 손을 들어주었다." "1930년대 철자법 논쟁에서 형태주의 표기법을 채택한 조선어학회와 (발음을 중시한) 음소주의 표기법을 주장한 정음파의 대립은 일단 조선어학회의 승리로 마감된다. 이러한 갈등은 해방 이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음소주의 표기법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의 철자법을 자신들의 철자법으로 개정했고, 이 철자법을 바탕으로 편찬한 사전을 온갖 어려움을 뚫고 편찬해 왔는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자신들의 철자법 원칙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명 한글파동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전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던 철자법 논쟁은 결국 한글학회의 승리로 끝난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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