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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 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김범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9월
평점 :
성종대에 정립된 삼사는 외척들이 부당하게 얻어낸 각종 특권과 포상에 반대하는 의견을 수시로 제출했다.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삼사의 이런 언론은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제약하는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삼사가 비판한 대상이 자신과 사적인 친밀도가 높은 외척들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불쾌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삼사의 언론활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짧게는 두 달부터 길게는 1년까지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며, 국왕이 일정한 타협한을 제시하거나 부분적으로 요구를 수용해도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완전하게 관철시키려고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달리 보면 이것은 당시의 삼사가 그만큼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왕권의 자유로운 행사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를 지니고 있던 국왕에게는 더욱 심각한 폐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신들도 국왕의 그런 판단에 공감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능상陵上'으로 규정했다."(101)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즉위한 지 넉 달 만의 일이었다. 윤씨가 세상을 떠난 지(성종 13년 8월) 14년 만이었다." "그날 수라水刺를 들지 않았다는 짧은 기록은 18세였던 국왕의 충격과 비통을 깊게 비춰준다." "폐비의 추숭과 그 친족의 우대라는 두 가지 사안은 연산군이 가장 집중적으로 노력한 문제였다. 삼사는 즉각 반대했다. 그들의 주요한 논거는 성종이 전하를 생각해 묘소를 가려서 장사했고 지키는 군사를 두었으며 현지의 관원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했으니 고장藁葬이 아니고, 폐비한 조치는 성종의 독단이 아니라 대비들이 충분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며, (폐비의 추숭을 건의한 창원부사) 조지서 같은 미관이 국가의 막중한 일을 논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폐모의 추숭 작업은 일단 중지되었지만, 곧 재개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묘소를 옮기고 사당·석물 같은 시설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었다."(105-6)
"가장 중요한 권력의 하나인 인사권을 계속 문제 삼는 삼사의 언론에 국왕은 강경하게 맞섰다. 그는 "대간의 말 때문에 육경六卿을 모두 바꾼다면 권세가 대간에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대들을 삼공에 제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면서 "너희는 자질구레한 문서 업무나 처리하는 관리[刀筆之吏]"라고 질타했다." "삼사는 정승의 임명을 반대해 관철시켰고, 의정부·육조에 재직하던 거의 모든 현직 대신들의 능력과 품성을 전면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이수공과 최부의 상소에서 나타났듯이 거기에 동원된 수사는 대단히 과격하고 직설적이었다. 탄핵받은 대신들은 즉시 사직했으며, 인사권을 국왕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정도의 소극적인 방어로 대응할 뿐이었다. "대신을 탄핵하는 것은 국왕을 탄핵하는 것이며 대간의 말 때문에 대신을 교체하면 권력이 대간에 있는 것"이라는 국왕의 심각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대신과 삼사의 역학관계를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116-8)
"삼사에게 성종은 이상에 가까운 국왕이었고, 그의 시정施政은 후대의 임금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중요한 모범이었다. 삼사는 연산군에게 모든 일에서 성종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누차 간언했다. 그 핵심적 덕목은, 예상할 수 있듯이, 너그러운 납간이었다. 우선 성종 자신부터 그런 태도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삼사의 회고에 따르면 성종은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이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진다"는 『상서』의 구절을 읽고 커다란 깨달음과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임금의 도리 중에서 이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 내가 즉위한 이래 간언을 이유로 죄준 신하는 한 명도 없었으니, 그대들은 내 뜻에 거슬릴 것을 염려하지 말고 잘못되는 일이 있거든 모두 말해야 한다." 삼사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은 이처럼 간언을 처벌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며 삼사를 우대한 성종의 시책 덕분에 나라가 융성했다고 평가했다."(133)
그러나 연산군은 "능상을 다스리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보였다." "삼사도 무수히 사직했지만, 연산군도 삼사를 체직하거나 국문하라는 지시를 거리끼지 않고 빈번히 하달했다. 예컨대 재위 1년 6월 윤탕로의 처벌과 관련된 논란에서 그를 용서한다는 단자를 네 차례나 내렸지만 삼사가 받아들이지 않자 연산군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면서 모두 체직하고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재위 2년에도 동료를 하옥해 국문하라는 왕명에 반발해 삼사가 모두 함께 투옥되겠다고 하자 국왕은 기꺼이 승낙했으며, 폐비의 신주와 사당 건립에 반대하는 삼사를 모두 의금부에 내려 당일 안에 국문을 마치고 모두 교체하라고 명령했다. 이듬해에는 부제학 이승건이 제수祭需의 과다와 경연의 불참을 지적하자 국왕은 가소롭다면서 술과 고기를 내리니 실컷 먹고 돌아가라는 조롱에 가까운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138-9)
"무오사화는 그 처벌 대상과 지속 기간 등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매우 제한된 규모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대규모의 전면적인 숙청이 아니었으며, 그런 파국을 감행하기에 앞서 일단 소수의 핵심 인물들을 처벌함으로써 그 배후의 전체에게 경고하려는 상징적이며 심층적인 의도를 지닌 정치적인 사건으로 생각된다."(144) "사화는 크게 세 단계로 전개되었다. 그 사건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와 관련된 불충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혐의로 시작되어, 그와 교유한 젊은 관원·선비들이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제로 확대되었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되면서 사제관계를 매개로 붕당을 결성해 역사와 현실에 역심逆心을 품은 사건으로 규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실제로 김일손의 사초는 단종·사육신·소릉 같은 중대한 정치적 사안부터 홀로 된 며느리를 취하려는 패륜에 가까운 세조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대단히 민감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었다."(146-7)
"이 사건을 계기로 사화의 주요한 처벌 대상은 김종직 일파와 삼사라는 두 부류로 좁혀졌다.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서로 붕당을 맺어 그릇된 발언과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이 계기를 이용해 그동안 불만스러웠던 대간의 행태를 일소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나아가 국왕은 국무에 관련된 발언과 기록 전체를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동안 그가 가장 불만스러워했고, 따라서 가장 이루고 싶어한 목표는 아마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김일손과 김종직의 불온한 문서에서 촉발된 사화에는 삼사도 적지 않게 연루되었다. 전자의 죄목은 사제관계를 매개로 현실과 역사에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고, 후자는 그런 그들과 붕당을 맺어 비호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공통된 죄목은 붕당과 능상이었다. 국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삼사의 행동을 교정하고 새로운 선발 지침을 하교함으로써 그동안 가장 불만스러웠던 집단을 자신의 의도와 부합되게 바꾸려고 시도했다."(159-160)
"사화 이후 일단 삼사가 상당히 순치順致됨으로써 그동안 그들의 반대로 행동을 제약받아온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유례없는 파국인 갑자사화였다는 점에서 그런 실천의 과정과 방법은 순조롭지도 정당하지도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국왕의 일탈이었다. 재위 중반 강력해진 왕권을 갖게 된 국왕이 그런 권력을 가장 집중적으로 행사한 분야는 정치나 제도의 개혁 같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비정치적이며 비본질적인 사안들이었다." "따라서 그동안 국왕에게 동조해온 대신들도 왕권의 자의적 행사를 비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치 세력의 협력관계는 대신과 삼사가 가까워지고 국왕이 고립되는 형태로 변모해갔다. 갑자사화가 대신과 삼사를 아우른 신하 대부분에 대한 국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으로 귀결된 까닭은 이런 정치적 지형의 재편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177-8)
# 왕권 일탈의 증거들
1. 늘어난 사치 : 왕실 씀씀이를 충당하는 공안貢案 확대
2. 사냥 탐닉 : 사냥 준비에 실수한 관원들을 혹독하게 처벌
3. 응방의 확대 : 각종 사냥용 짐승들을 궁궐에서 사육
4. 연회와 음행 : 재위 8~9년 이후 본격화(갑자사화 이후 흥청興淸 등과 관련해 폭발적으로 증가)
5. 정보 차단 : 궁궐에 인접한 도로의 통행금지와 민가 철거
6. 언로 통제 : 국왕/궁궐과 관련된 발언을 극단적으로 통제
# 갑자사화의 특징
1. 대신과 삼사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신하들이 연루되었다.
2. 능상 척결과 폐모 사건 보복이라는 원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집요한 소급 처벌이 행해졌다.
3. 연산군이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유례없이 ‘장기적인 숙청’으로 이어졌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발단은 이세좌 사건과 홍귀달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전자는 잔치에서 어의에 술을 엎지른 실수였고, 후자는 손녀를 입궐시키라는 왕명을 즉시 이행하지 않은 사안이었다. 연산군은 두 사건을 능상의 표본으로 판단했고, 그 결과 집요하고 거대한 피의 숙청을 벌였다." "이세좌가 폐비에게 사약을 전달한 좌승지였다는 공교로운 우연이 겹쳐지면서 그 사안은 능상의 처벌과 폐모 사건의 복수라는 갑자사화의 도화선을 형성했다."(227-8) "이세좌가 방면되었을 때 거기에 반대하지 않은 삼사와 그를 문안한 신하들을 낱낱이 적발해 석 달에 걸쳐 가혹하게 처벌했다. 요컨대 연산군의 의지는 "지금 사건을 계기로 불경하는 풍습을 통렬히 고치려는 것"이었다. 핵심적인 폐해인 능상에 저촉되었다고 국왕이 판단한 죄목은 수없이 많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모후의 폐비와 사사였다. 사건은 곧 그리로 번져갔고, 숙청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234-5)
"재위 8년 2월 연산군은 "국왕이 첩의 침소를 살피지 않고 왕후를 폐위시킬 때 조정의 신하들은 목숨을 잊고 간언하는 것이 옳은가, 죽음을 두려워해 순종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폐모 사건을 지칭한 발언이라는 것은 또렷했다. 여기에는 국왕의 오판을 유도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런 오판을 막지 못한 신하들에게 그 사건의 핵심적인 원인이 있다는 판단도 명백히 담겨 있었다. 아울러 그 비극은 지존의 국왕인 자신을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빠뜨렸다는 점에서 바로 가장 중대한 능상이었다. 이런 판단은 2년 뒤 갑자사화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236-7) "300명에 가까운 대규모의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갑자사화 이후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50)
처절한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제압된 신하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재위 11년 후반부터 시작된 허한패許閑牌의 사용으로 생각된다. "한가롭게 쉬는 것을 허락한다"는 그 패의 의미대로 국왕의 소집이나 업무로 예궐한 신하들은 그 패가 내려진 뒤에야 퇴궐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국왕이 사냥이나 유흥으로 금표에 늦게 행차해 늦게 환궁하는 날이면 재상들은 한밤이 되어도 귀가하지 못하고 대기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런 억압에 시달렸지만, 도리어 더욱 신실한 충성을 강요받았다. 모든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판자에 새겨 벽에 걸어놓고 보아야 했다. 관원들의 사모 앞뒤에 각각 '충忠·성誠'이라는 글자를 새기게 한 조처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연산군은 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를 국문하고 재상과 대간이 서로를 탄핵하게 했으며 조하·조참 때는 대간과 감찰이 신하들을 규찰케 함으로써 신하들끼리 감시하고 대결하는 구도를 만들었다."(254-5)
"연산군은 주요 제도를 크게 변개하거나 완전히 혁파하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폐기한 대상은 그동안 가장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웠던 경연과 삼사였다. 연산군은 경연관을 진독관으로 고쳤다가 아예 폐지했으며 홍문관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그리고 대간의 서경도 없앴다. 궁궐과 너무 가까워 금표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여러 관서들의 위치도 옮겨졌다. 유교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상징성을 지닌 두 기관인 성균관과 문묘는 각각 원각사와 도성 남쪽으로 쫓겨갔으며, 성균관 관원과 유생은 태평관으로 옮겨졌다." "이런 행동의 주요 동기는 불만스러운 제도를 완전히 종식시키려는 정치적 목적과 거대한 사치에서 비롯된 재정의 고갈을 해소하려는 경제적 필요였다. 전자는 흡족스럽게 달성되었지만, 후자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긴요하지 않은 모든 비용을 줄여 계평 등에게 지급하는 데 사용하라는 왕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시도였다."(262-3)
"여색의 탐닉과 관련된 사항은 지금까지 보아온 연산군의 자의적인 왕권 행사에서 극점을 형성했다고 할 만하다. 엽색행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은 갑자년 후반부터 폐위될 때까지 만연했다." "그는 순 임금이 요 임금의 두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자주 거론했으며 예부터 호걸스러운 제왕들은 풍류와 여색에 많이 빠졌지만 국가의 흥망은 거기에 좌우된 것이 아니라 신하의 충성과 간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갑자년 이후 당唐 현종玄宗은 여색(양귀비) 때문이 아니라 이임보·양국충 같은 간신들 때문에 나라가 멸망한 사례로만 자주 거론되었으며, 그가 삼천 궁녀를 거느렸다는 사실도 추가되면서 국왕의 황음을 정당화하는 역사적 선례로 기능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한漢 성제成帝와 송宋 휘종徽宗도 조비연과 이사사라는 애첩을 거느리고 후원에서 유희를 즐겼다면서 자신의 역사적 논거를 보강하기도 했다."(281-3)
"연산군 12년 9월 1일 저녁, 동대문 부근의 훈련원訓練院에 집결한 반정군은 먼저 진성대군晉成大君에게 반정의 경위와 추대 의사를 아뢴 뒤 3경(밤 11~1시)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연산군은 턱이 떨려 말을 잇지 못했다. 겁에 질린 국왕의 모습대로, 상황은 금방 판가름났다. 동틀 무렵까지 창덕궁은 숙위宿衛하던 군사와 시종·환관·나인들이 모두 도망가 텅 비었고 결국 정문인 돈화문이 열렸다. 박원종 등은 환관을 보내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고 동궁으로 옮기라는 의사를 전달했으며, 연산군은 순순히 따랐다. 가장 중요한 장소인 창덕궁의 상황을 종결한 반정군은 경복궁으로 가서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의 생모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정현왕후에게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켰다는 사실과 진성대군을 옹립하겠다는 계획을 아뢰었다. 그날 신시(오후 3~5시)에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반정은 만 하루도 안 되어 성공했다."(311-2)
"세자 시절부터 삼사의 언론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온 연산군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언론을 용인하거나 지원했던 성종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능상의 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정치적 견해의 차이는 폐모 사건이라는 개인적인 원한과 맞물리면서 증오의 수준으로 비화했다. 삼사가 연산군을 비판하는 논거로 거의 언제나 성종의 선정善政을 거론한 것도 부왕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치세의 종결을 몇 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지금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우는 것과 같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라는 성종의 자평대로 성종 후반, 그리고 연산군대 초반의 삼사는 분명히 일정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중요한 오류는 "본질적 문제와 비본질적 사안을 혼동하거나 우선순위를 뒤바꿈으로써 본래의 목표에서 이탈해간 것이었다. 그런 과정의 최종적 결과는 거대한 폭정과 강제적인 폐위였다."(3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