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
노마 히데키 지음, 김진아.김기연.박수진 옮김 / 돌베개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객체를 본뜬 형태만으로는 그림문자일 수는 있어도 문자가 될 수는 없다. 형태가 객체를 상기시킬 뿐, 말은 개재介在되지 않기 때문이다. 객체를 본뜬 형태는 객체를 일컫는 언어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비로소 문자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한자의 가장 원초적인 메커니즘인 <상형>에서는, <형形>이 <음音>을 불러일으키고, 그 <음>은 <주체 안에서 상기되는 객체>인 <의意>를 불러일으킨다. <형>도 <상기되는 객체인 의>를 떠올리게 하고, 그 <의>는 그 뜻을 일컫는 <음>을 불러일으킨다. 한자의 이러한 <형음의> 트라이앵글이야말로 언어음이 문자가 되는, 즉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로 태어나는 결정적인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한국에서도 천여 년에 걸쳐 소중히 간직해 왔던, <상형>을 핵심으로 한 이 <육서의 원리>와 <형음의> 통일체라는 시스템에 결별을 고하였다."(88-9)


# 음소(音素, phoneme) : 단어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 가령, '말/달/날/살'에서는 'ㅁ/ㄷ/ㄴ/ㅅ'이 음소이고, '말/물'에서는 'ㅏ/ㅜ'이 음소이다.


"<음소>를 탐구하는 언어학의 분야는 <음운론>(phonology)이라 불리며, 언어음 자체의 발음법이나 물리적 성질 등을 연구하는 <음성학>(phonetics)으로부터 독립했다." "문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언어의 모든 음소를 확정하고, 각각의 음소에 하나씩 자모字母로서의 형태를 할당해 주면 된다. 문자의 평면에서 서로 다른 자모는 음의 평면에서도 다른 소리가 되며, 그것이 각각의 의미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놀랍게도 15세기의 <훈민정음>은 언어학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마침내 조우한 <음소>라는 개념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한편, 발음하는 단위로 언어음을 나누면 <음절音節>이라는 단위를 추출할 수 있다. 한국어로 예를 들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한국어 모어화자라면 모두 '어·머·니'라는 3개 단위로 분절하여 발음한다. 아무도 '엄·언·이'처럼은 발음하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단어는 '어·머·니'라는 3개의 단위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이 <음절>이다."(144)


"<정음>은 언어음을 내는 사람의 음성기관의 모양을 <상형>했다. 왜? 다름 아닌 그 <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요컨대 <정음>은 <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 발생론적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형태>를 찾고,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형태로 <상형>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창제자들은 <정음>의 근원, <음>이 <형태>를 얻는 근원을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선언하고 있다."(158) "소쉬르는 언어의 근본원리로서 <선조성線條性>을 제2원리로, <자의성恣意性>을 제1원리로 보고 있다. 언어음이 나타내는 의미와 소리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으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유일한 예외가 오노마토페이다. 개 짖는 소리는 '왕왕', '멍멍', '바우와우', '바우바우' 등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언어의 음과 의미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오노마토페를 제외하면. 그리고 문자와 음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훈민정음>을 제외하면."(160-1)


# 오노마토페 : 의성의태어


"『훈민정음』은 종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終聲(종성)은 復用初聲(부용초성)하니라.' 종성은 다시 초성을 사용한다." "먼저 음절의 첫 자음 또는 제로 자음, 즉 초성을 분리한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이 이미 한 일이다. 성모聲母(initial)가 그것이다. 단 중국 음운학은 여기에 게슈탈트(형태)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 다음 남은 부분 중에서 모음마저 떼어내지 않으면 종성은 단위로서 추출할 수 없다. 모음과 종성을 추출하는 음성학적 차원의 관찰과, 그것을 음소로 다루는 음운론적 차원의 사고가 없다면, 종성은 추출할 수 없고, 하물며 그 종성에 게슈탈트를 부여할 수도 없다." "종성자모로 초성자모를 사용한다는 이러한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서도, <정음>의 창제자들은 이론 무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성이 종성이 되고 종성이 초성이 되는 것은, 음이 양이 되고 양이 다시 음이 되는 이치에 근거한다는 식으로 말이다."(167-8)


# <게슈탈트> = <형태> = 개개의 요소로 환원해서는 얻을 수 없는, 지각상知覺上의 총체로서 통합된 모양


라틴문자나 키릴문자와 달리 "<정음>에서 자모는 아직 하나의 <글자>가 아니다. 자모는 설명을 위해 자모 자체를 표기할 때 이외에는 그것만으로 쓰여지는 일은 없다. 자모는 어디까지나 글자를 구성하기 위한 유닛일 뿐이다. <자모≠글자>, 요컨대 자모는 원자原子요, 글자는 분자分子이다. 이들 자모의 유닛을 조합해서 하나의 글자 유닛을 완성한 후 사용하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음이 하나의 자모인 <단음문자單音文字>라는 성격과, 하나의 음절이 하나의 글자라는 <음절문자音節文字>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문자체계가 완성된다. <단음=음절문자> 시스템의 성립이다." "<훈민정음>은 음의 평면을 다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이라는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하여 바라보고 있다. 음의 평면을 두 개의 층으로 계층화한다. 그 계층화는 문자의 평면에서도 게슈탈트상으로 두 가지 층위를 구별하는 동시에 통합하는 표기 시스템이다."(179-80)


"음의 최소 차원에 있는 음소에 하나의 자모를 부여하고, 음소가 합쳐진, 음의 더 고차원적 레벨인 음절에, 자모의 결합체로서 하나의 글자를 부여한다. <음소=자모>를 조합해서 <음절=글자>를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단음=음소>의 배열을 나타냄과 동시에 음절이라는 단위의 <외부 경계>뿐 아니라 음절의 <내부 구조>도 나타낸다. 'ㅂ'p, 'ㅏ'a, 'ㅁ'm과 같은 단음문자 유닛(음소의 평면)과, '밤'pam과 같은 음절문자 유닛(음절의 평면)이 음소와 음절 각각의 층에서 <형태>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동시에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두 가지 층의 표현 방법 면에서도, 그 두 층을 꿰뚫는 단음문자 유닛만으로 두 층의 <형태>가 성립하는 경제적인 구조이다. 게슈탈트로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ㄱ', 'ㄴ', 'ㅏ', 'ㅗ' 등 단음문자 유닛뿐이며, 음절 유닛을 나타낼 별도의 게슈탈트를 기억할 필요는 없다."(181)


"<음>을 해석하고 여기에 <문자>라는 형태를 부여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중국 음운학에서는 음의 높낮이인 <성조>까지 '운모'韻母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모음이니 자음이니 하지만 실제로 <음>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음에는 <높낮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음의 높낮이>는, 언어에 따라서는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 버리는 기능을 한다. 현대 베이징어에서는 음절 내부에 있는 음의 고저가 단어의 의미를 구별한다. 그것이 성조이다."(191) 15세기 한국어에서 "고저 악센트는 중국어의 성조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용어를 써서 '평성'平聲, '거성'去聲, '상성'上聲으로 구별된다." "<정음>은 이런 악센트의 구별을 문자의 좌측에 점을 찍음으로써 형상화하였다. 해례본에 이르기를,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쳐서 소리를 낸다. 왼쪽에 점을 하나 찍으면 거성이요, 점을 두 개 찍으면 상성, 점이 없으면 평성이다'라고 하였다. 이 점은 오늘날 <방점傍點>이라고 불린다."(196)


# 첫 자음 : 성모聲母 / 나머지 요소 : 운모韻母


# 평성 : 가장 낮은 음 / 거성 : 가장 높은 음 / 상성 : 처음은 낮고 나중은 높은 음


"언어학에서는 의미를 가지는(실현할 수 있는) 언어음의 최소 단위를 <형태소形態素>(morpheme)라고 한다." "영어의 'playing'과 'dancing'에서 {play}와 {dance}는 어휘적인 형태소이고, {-ing}은 문법적인 기능을 하는 형태소이다."(203) "<정음>은 <초성+중성+종성>을 하나의 <형태>상의 단위로 묶는 입체적인 구조로, 음소의 평면과 음절의 평면 그리고 형태음운론의 평면이라는 세 가지 층을 통합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방법 중에서 선택이 가능하다."(211) "문자체계가 형태음운론적인 표기를 채용한다는 것은, 문자가 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문자의 <형태>가 의미와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밥'이라는 <정음>의 한 글자가 나타내는 단위가 음절인 동시에 형태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분명 음을 표현하던 글자가 언제부터인지 형태소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고, 사실상 단어를 나타내는 글자라는 성격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221)


# <정음>의 3층 구조

1 [음운론의 평면] ㅂ ㅏ ㅁ ㅣ(pami)

2 [음절구조론의 평면] 바 미

3 [형태음운론의 평면] 밤 이


# 형태음운론적 표기 : 음의 평면에서 음절 구조의 변용(종성의 초성화)이 일어나더라도 형태소를 만드는 음의 <형태>를 문자의 평면에서도 시각적으로 알 수 있는 표기법


최만리가 상소문에 쓴 "<용음합자用音合字>는 <음을 사용하여 글자로 합친다> 혹은 <음을 이용하여 글자를 만든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친다> 정도로 풀이하면 좋을 것이다. 요컨대 음으로써 글자를 만드는, 즉 음을 나타내는 자모字母를 조립해 문자를 만든다는 그런 방법은 모두 옛 사적事績을 어기는 것이며 옛부터 지금까지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용음합자>라는 것은 예부터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었다. <정음>처럼 완성된 형태로서의 형태음운론적인 알파벳 시스템은 중국 대륙에도 없었고 지중해에도 없었다." "<정음>의 사상을 <용음합자>라는 간결한 구절로 파악하고 있는 최만리의 안목은 정확하다. 최만리와 사대부들은 단순히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정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름 아닌 <용음합자>라는 사고방식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형태뿐만 아니라 문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 자체를 향한 이의이다."(240-1)


# 用音合字 盡反於古 (음에 의거하여 글자를 합치는 것은 모두 옛것을 거스르는 일이옵니다.)


"<정음>은 세포여야 하는 하는 문자를 분자分子 단위로 해체해 버린다. 나아가 분자는 원자原子로 해체된다. 당연히, 분자는 음절이고 원자는 음소이다. 의미가 되는 세포를 분해해 나간다. 분자로, 원자로. 『훈민정음』은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글자는 반드시 합쳐져서 음을 이룬다"니? <문자=한자>란 유기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음을 이룬다. 문자란 합치거나 떼어내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음>은 살아 있는 유기체인 문자가 무기적인 요소(element)로 해체되어 있질 않은가. 그런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했을 것이다. 쓰여진 역사가 존재한 이래, 우리는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살아왔다. <사고思考>란 그러한 세포를 단위로 생각하는 것이고, <쓰는 것>이란 그러한 세포를 살아 움직이는 몸으로 키우는 것이다." "성리학의 에크리튀르야말로 그 궁극적인 형태인 것이다."(244)


# 에크리튀르 = <쓰는 것> <쓰여진 것> <쓰여진 지知>


"최만리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이러한 한자한문 원리주의에 대응해, <정음> 에크리튀르 혁명파의 이데올로그인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후서後序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有天地自然之聲이면 則必有天地自然之文이니라" (천지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다.) 이 땅에 <글>이 있음은 이 땅의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황제를 초월한 <천지 자연>이며 이 땅에 이 땅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것은 천지 자연의 이치이다."(247) "그리고는 괄목할 만한 다음의 언설에 이른다. "雖風聲鶴戾와 鷄鳴狗吠도 皆可得而書矣니라" (바람 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가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써서 나타낼 수 있다.) 온갖 살아 있는 것의 <소리>를 쓰기, 한자한문이 쓸 수 없었던 조선어의 오노마토페를 <정음>이 쓰기. 그것은 <정음>의 창제자들에게는 한자한문을 뛰어넘기 위한 결정적인 목표였을 것이다."(251-2)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가 있다. <말해진 언어>는 <쓰여진 언어>보다 앞서 실현되는 것이다. <말해진 언어>가 <쓰여진 언어>가 될 때, <음>의 모든 리얼리티는 사라진다. <쓰여진 언어>에는 말하는 속도도, 강약도, 높낮이도, 인토네이션도 없다." "<말해진 언어>는 언어 그 자체가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상호 작용 안에서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두 가지 선율로써 생기는 듯한 대위법對位法적 구조를 보여 준다. <말해진 언어>는 결코 한 사람의 발화의 연속으로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쓰여진 언어>는 그러한 대위법적인 구조를 상실하는 반면, 시각적인, 그리고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때로는 촉각적이기도 한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가 하나하나의 말을 규정하고 제약하고 하나하나의 말이 <텍스트라는 쓰여진 총체>를 만드는 양상을 보인다. <말해진 언어>와 <쓰여진 언어>의 차이를 묻는 것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258-9)


『용비어천가』 2장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전면적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을 본다. "한자漢字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왕조의 송가頌歌를 소리 높여 부르는 서사시의 한 장, 단어의 리스트가 아니라, 내적인 연결과 동적인 전개를 가지는 문장(sentence)이자 글(text)인 <쓰여진 언어>. 그곳에서 <나·랏:말싸·미> 약동한다. "소리에 따랐기에 음은 칠조七調에 맞는다." 방점傍點으로 나타나는 선율과 함께 조선어로 연주되는, <바람에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라는 음양의 암유暗喩는 우리 누구나가 지금 처음으로 체험하는,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이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금 샘물과 같이 넘쳐 솟아나는 이 땅의 말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찍이 어느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한국어의 <쓰여진 언어>였다."(264)


# 『용비어천가』 2장 : 한자를 한 글자도 포함하지 않은 텍스트를 형성한 <정음> 에크리튀르의 탄생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후서後序에서 "모양의 본떴으되 자字는 고전古篆을 따랐다" (象形而字倣古篆)라고 했다. <정음>은, 발음되는 모양을 본뜨고 글자는 고전(옛 전서)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만리는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전문篆文을 본떴을지라도 음音으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어긋난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전문篆文이란 중국 전국시대의 전서인 대전大篆과 그것을 간략화한 진秦나라의 소전小篆을 총칭한 것으로, 사실상 소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실린 <정음>의 자획字劃이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과 비교할 때 전서와 비슷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字倣古篆' 즉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라는 언급에 관해서는, 문자의 게슈탈트를 전서에서 가져왔다기보다는 한 획 한 획의 자획에 대해 전서를 본떴다는 편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혹은, 널리 한자의 고체古體를 총괄하여 대표적으로 '고전'을 들었을지도 모른다."(321-2)


"서양 인쇄술에서는 로마자 'I'의 처음과 끝 부분에 들어가는 장식을 <세리프serif>라고 한다. 로마자 극한의 서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비문에서는 이 세리프가 형태상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세리프가 없는 서체를 상세리프sans serif라고 부른다. '세리프 없음'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 '고싯쿠'Gothic체라는 것은, 이렇게 장식 없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상세리프 계통의 서체를 말한다. 이 명칭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고딕체'라고 불린다. 정음의 자획은, 전서와 비슷하다고는 하나 붓으로 생기는 돌기가 없는, 거의 완전한 상세리프체 즉 고딕체이다. 기필起筆도 종필終筆도 없어─기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직선이기에─붓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아니다. 전서는 붓으로 쓰는 서체인 데 비해 정음의 자획은 완전히 붓 쓰기를 거부한 형태이다. 갈고리나 삐침도 부정하고, 두 글자 이상을 이어서 쓰는 <연면連綿>도 부정한다."(326-7)


"붓에 의한 선은 정신성과 지知,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형태> 역시 정신성이나 끊임없는 수련 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이 한반도의 문자사를 관통하는 원리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한자는 마치 살아 있는 세포와 같은 존재였다. 한자의 <형태> 역시 살아 있는 정신성을 묻는 것이었으며, 인간의 눈과 손에 의한 수련을 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묻는 <형태>이다. 이에 비해 정음은 그 세포를 음절이라는 분자로, 그리고 음소라는 원자로 해체하였다. 정음의 구조 자체가 그런 로지컬한 지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인 지에 걸맞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요구된다. 정음의 <지>는 원자인 자모를 조합하여 완성되는 분자 구조로서, 나아가 텍스트 속에서 움직이는 동적인 분자구조로서 출현하였다. 그것은 한자의 정신성과 결별하고 정음 <형태> 자체에 새로운 <지>를 당당히 각인한 일이었다."(331-2)


# 궁체 : 신체성을 얻은 정음의 아름다움


"문자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로제타스톤이든 광개토대왕비든, 파피루스든, 갑골이든, 서적이든, 그것이 단편斷片이든 전체든, 문자란 항상 어떤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란 항상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 히스토리에Historie이다. 문자란 그것을 읽고 이해하는 자에게, 이야기된 무엇인가를 과거에 이야기된 것으로 읽게끔 한다. 이에 비해 『훈민정음』이라는 책은, 그것을 펼쳐 읽는 이에게 문자의 탄생이라는 원초原初 그 자체를 만나게 하는 장치이다. 문자를 읽는 이에게 <읽기>라는 언어장言語場에서 그 문자 자신의 원초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이다. 물론 『훈민정음』 역시 과거의 책이며, 과거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는> 순간 그곳에 나타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이야기된 역사는 아니다. <음이 문자가 된다>는, <말이 문자가 된다>는 원초가 항상 읽는 이 자신에게 <지금 이곳에서> 사건으로서 생겨나는(geschehen) 역사, 즉 게쉬히테Geschichte이다."(356-7)


# 한글 발전의 시대구분(이윤재, 1933)

1. 정음시대(창제기) : 세종 28년(1446)~성종 대까지 50년간

2. 언문시대(침체기) : 연산군 대~고종 30년(1893)까지 400여 년간

3. 국문시대(부흥기) : 갑오개혁~경술년(1910)까지 17년간

4. 한글시대(정리기) : 주시경의 한글운동~현재까지 20여 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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