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최경봉.시정곤.박영준 지음 / 책과함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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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년(세종 2) 세종은 집현전을 확대 개편해 왕실 연구기관이자 국왕의 자문기관으로 키웠다. 이는 집현전의 주 임무가 왕에게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書筵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교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세종은 문신 가운데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집현전 학사로 삼아 강론에 참여시켰으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을 편찬하게 했고 일부 학사에게는 사관史官의 일을 겸하게도 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학술만을 오로지 일로 삼아 종신토록 계속하라"고 당부하면서 여러 특혜를 베풀었다. 예를 들어 국가에서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현전 학사들이 볼 수 있게 했고, 연구를 돕기 위해 많은 서적을 구입해 집현전에 보관케 했다. 또한 재주 있는 소장 학사에게는 집현전의 업무에서 벗어나 오로지 독서만 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29)


"1444년 2월 16일자 실록 기사를 보면, 세종은 집현전 교리 최항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라 명하고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이 일을 감독하고 관리하게 했다. 한글과 관련해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내린 최초의 공식적인 지시였다."(32) "한글이 세종 25년(1443)에 창제되고 나서도 새 문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새 문자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나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 세종은 창제 다음해인 1444년 2월에 한자음에 관한 책인 운회를 번역하라고 명했고, 1445년 1월에 신숙주,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한자음을 질의하도록 명했으며, 같은 해 4월에 권제, 정인지 등이 편찬해 올린 《용비어천가》의 간행을 명했다. 이 세 가지는 한글이 세상에 나온 이후 3년 동안에 일어난 일 중 언어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38)


왜 세종은 한자음 정리 사업에 매진했던 것일까? "한자음 정리 사업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첫 번째가 옛부터 써오던 중국의 고대 한자음을 정리하는 것이다. 고대 한자음은 옛 한시를 지을 때 운을 맞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세종은 《고금운회거요》와 같은 운서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했다. 두 번째로는 당시 중국의 한자음, 즉 중국 명나라의 한자음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중국 사신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 정확한 중국발음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표준 한자음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것이 《홍무정운역훈》이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조선에서 사용하던 한자음의 표준을 만들고자 했다. 당시에 사용하던 현실 한자음을 정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당대와 고대를 망라하여 가장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중국의 송나라와 명나라 운서들을 모두 참조하여 세종 29년(1447)에 완성된 《동국정운》이 바로 그 결과로 나온 것이다."(43-4)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어지御旨는 세종의 자주의식을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중국말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조선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의 차이를 인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종 당시에도 한글의 창제와 사용은 한자와 한문의 지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세종 또한 한 번도 한자와 한문의 권위를 부정한 적이 없었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국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기록하고 자신의 모어母語를 기록할 수 있는 표음문자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기도 했다. 몽골, 만주, 말갈 등 중국 주변 민족들이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고유 문자를 갖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글 창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되었고, 한글의 위상 또한 이 맥락에서 결정되었다."(46-7)


"한글 창제의 정치적인 목적은 한글 창제 이전인 1434년 《삼강행실도》를 간행하고, 1442년 《용비어천가》의 편찬을 준비하기 시작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유교의 핵심 이념인 충과 효를 강조한 《삼강행실도》와 왕권의 정당성을 강조한 《용비어천가》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불교에서 유교로 국가의 이념이 바뀌었으니 바뀐 이념을 홍보해야 했으며, 왕씨에서 이씨로 왕조가 바뀌었으니 새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해야 했다. 그런데 성공적인 홍보를 위해서는 홍보 책자의 내용을 탄탄히 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사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 이런 점에서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신문자 한글이 이 사업에 활용된 것은 필연적이었다. 세종 스스로도 《삼강행실도》를 쉬운 문자로 번역해 가르친다면 백성을 교화하기 쉬워진다는 논리로 한글 반포를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장을 반박한 적이 있었다."(100)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했던 한글의 역할은 한글이 사회 계층 간 의사소통을 도왔다는 데 있다." 《천자문》을 가르칠 때 교육 문자로 한글을 사용했듯이 한글은 양반 계층의 한문 학습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글로 상소를 올리거나 한글로 방을 붙임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언로言路가 트이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글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반들은 하층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한글이 필요했고, 하층민들은 자신들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성들과 사대부 남성 간의 소통에도 한글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중전이나 대비가 신하에게 한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신하들이 중전이나 대비에게 한글로 문서를 올리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반적인 일이었다. 한글은 다양한 계층에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할 때에는 한글이 한문보다 사용층이 더 두터웠던 문자라고 볼 수 있다."(49)


채수가 지은 《설공찬전》이 불온한 내용으로 탄압받은 때가 1511년인데, 이때는 "한글이 창제되고 불과 5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는 새 문자가 창제된 후 50여 년이 지나서 일반 백성들이 한글 소설을 탐독할 정도로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빠르게 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면 한글 소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세책(貰冊,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쓴 다음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식)과 방각(坊刻, 판매 목적으로 서방書坊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는 방식)이라는 새로운 유통 방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한글 소설의 상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 소설을 빌려보거나 사고파는 방법이 없지 않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과 개인 간에 이루어진 거래였다. 이즈음 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면서 돈을 벌었던 이야기꾼(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이 등장하기도 했다."(135)


"상업 출판과 한글 보급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바로 천주교 교리서다. 1801년 정약종의 《주교요지》가 나왔을 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는 한글로 된 이 책이 특히 무식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 이를 간행한 바 있다. 또한 1801년(순조 1) 100여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신유박해 당시 죄인을 심문하던 심문관이 "서민이라도 삼사십 권의 천주교 서적은 가지고 있으니 책을 숨긴 곳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초기 교회에서 한글 교리서의 출판과 유통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864년에는 서울에 있는 두 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네 권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881년 동학의 경전인 《용담유사》가 한글로 간행되었으니 서학이든 동학이든 모든 종교와 사상은 한글로 교리를 출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당시에 한글의 위력이 매우 컸으며, 한글의 대중적 보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40-1)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가 본격화하면서 일본어 상용화를 전제로 한 교육도 본격화됐다. 조선어를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어가 명실상부한 권력언어인 국어로 되고, 우리말은 피지배 민족의 언어로 그 위상이 급락하였다." "교육, 행정, 법률, 학술 등의 영역에서 밀려난 조선어는 금세 이류 언어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굳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일본어를 강요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권력의 언어에서 밀려난 언어는 생활어로 쓰이다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도태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조선총독부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 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고 권했으며, 총독부 관리들에게는 조선어 습득을 장려하면서 총독부 관리와 경찰을 대상으로 조선어 급수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154)


"주시경은 《보중친목회보》(1910.6)에서 '國語'를 '한나라말', '國文'을 '한나라글'로 바꾸었는데, 이로부터 '한말'이란 말과 '한글'이란 말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글'의 '한'은 대한제국의 '韓'과 일치한다. 다시 말해 한글은 곧 '대한제국의 글자'라는 말을 나타낸다." "주시경의 제자인 권덕규는 "韓文을 조선말로 그냥 읽어 '한글'이라 한 것이요, 韓文이라고 그냥 음대로 정음으로 쓰면 지나글 漢文과 음이 혼동될 혐의도 있어 이것도 피한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는 한일병합 이후에도 한글이라는 명칭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한다.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명칭을 '한글'이라고 한 것도 '한글'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고려할 때 대한제국의 어문 정책을 지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 통해 본다면 당시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국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못하는 현실이지만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웠을 수 있다."(244-5)


"1930년대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첫째는 일본이 조선어를 용인하는 상황(이개언어병용정책)을 활용해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조선어 사전 편찬, 철자법 및 표준어 제정 등 조선어 규범화 사업에 매진하는 것이었다. 이때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문맹 상태에 있었던 현실은 조선어학회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38년 3차 교육령 이후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은 강제적인 국어 상용 정책으로 전환되었고, 그 이전에 이미 한글 강습과 같은 대중사업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1940년 10월에 1933년의 철자법 통일안을 개정한 '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간하고, 1940년 6월 로마자표기법과 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여, 이를 1941년 1월 《외래어표기법통일안》으로 출판하게 된다. 이는 어문 규범과 관련한 모든 사업을 완결했음을 의미한다."(159-60)


"근대 어문정리기에 우리 맞춤법을 기초했던 주시경과 같은 선각자들은 (본래의 단어 형태를 중시한)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표기법을 채택함으로써 형태상의 일관성을 중요시했던 세종의 손을 들어주었다." "1930년대 철자법 논쟁에서 형태주의 표기법을 채택한 조선어학회와 (발음을 중시한) 음소주의 표기법을 주장한 정음파의 대립은 일단 조선어학회의 승리로 마감된다. 이러한 갈등은 해방 이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음소주의 표기법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의 철자법을 자신들의 철자법으로 개정했고, 이 철자법을 바탕으로 편찬한 사전을 온갖 어려움을 뚫고 편찬해 왔는데 조선어학회의 후신인 한글학회가 자신들의 철자법 원칙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명 한글파동이라고 불릴 만큼 당시 전 사회를 들끓게 만들었던 철자법 논쟁은 결국 한글학회의 승리로 끝난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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