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광해군 평가의 극과 극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 등에 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 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 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일 수밖에 없다. 인조반정이 성공했던 직후, 쿠데타를 주도한 서인이나 그에 동조했던 남인들은 반정이 성공한 것을 가리켜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再造之慶)'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써 "윤리가 다시 맑아졌다"고 평가했다. 결국 '반정'이니 '재조지경'이니 하는 용어들이 사용되는 분위기 아래에서는─설사 광해군에게 평가받을 만한 치적과 장점이 있었고, 그의 시대에 무엇인가 배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광해군이나 그의 시대를 다시 볼 수 있는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19)


"(반대로 만선사관학자 이나바가)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며 부패가 극에 이르렀던 명이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행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탁월성'을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와 한 묶음인 만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웠던' 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극단적이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광해군을 쫓아냈던 서인들의 집권이 이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지속적이고 의도적인 '죽이기'를 계속함으로써 그의 본 모습을 가리는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재평가는 식민사관이 노린 정치적 노림수에 말려들 위험성이 적지 않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양쪽 입장 모두 지극히 정치적이다."(31)


# 만선사관滿鮮史觀 : 조선의 역사는 만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독자적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을 정당화한다.


2장 어린 시절


임진왜란 초기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피난 보따리를 싸고 있던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은 선조에게 종묘사직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하라고 건의했다." "대신들의 입장에서는 열세 명이나 되는 왕자들 가운데서 다음의 주군이 될 인물을 함부로 천거하는 것은 엄청난 도박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누구를 의중에 두고 있는지도 모를 뿐더러 당시 선조는 한창 장년의 나이인 마흔할 살에 불과했다." 침묵 속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선조는 광해군을 칭찬했고 신하들은 얼떨결에 선조의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했다. 선조 자신이 오랫동안 광해군을 의중에 두어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신잡의 건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여 그를 왕세자로 결정한 것은 그야말로 '전격적'인 것이었다. 불과 1년 전, (후계자 논의를 거론한) 정철을 쫓아낼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의 상황이 선조에게는 그만큼 절박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의 반증이었다."(46-7)


3장 임진왜란의 한복판에서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이끌고 처음 출발했던 것은 1592년 6월 14일이었다. 그는 이후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희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伊川),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면서 흩어진 민십을 수습하는 한편 의병의 모집과 전투의 독려, 군량과 말먹이의 수집 운반 등 전란 수행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왜란 초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유린되었던 조선 조정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 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백성들은 조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분조를 이끄는 동안 광해군이 겪었던 고초는 대단히 컸다. 특히 산악지역에서의 노숙은 후유증이 커서 1593년의 봄과 여름 동안 광해군은 해주에 머물면서 계속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다."(52-3)


"1593년 10월, 선조와 광해군은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화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장기주둔 태세에 돌입했다." "명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 명나라 조정은 '광해군 카드'를 빼어 들었다. 광해군을 전라도, 경상도 지역으로 내려보내 선조를 대신하여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선조 대신 광해군을 삼남지방으로 내려보내 명군을 지원토록 할 요량이었다. 1593년 윤달 11월 19일, 광해군은 다시 서울을 떠나 남행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분조가 아니라 '무군사(撫軍司)'라는 것을 이끌었는데 사실상 두 번째의 분조 활동이었다." "분조와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 광해군은 조선 팔도의 남과 북을 거의 주유한 셈이 되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전쟁이 백성들에게 남긴 상처를 직접 보았고, 왜란 중의 밑바닥 민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67-9)


"왜란이 끝날 무렵부터는 명 조정이 광해군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조선 조정은 왜란 시기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고 명 조정에 계속 요청했지만 명은 번번이 거부했다. 이유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닌 둘째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결정한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서를 북경에 보냈지만 명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명이 조선의 요청을 집요하게 거부한 이유는 "명의 신종이 당시까지 황태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가 있다. 명 조정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아직 황태자를 세우지 않은 상황에서 번국의 황태자 책봉을 먼저 승인할 수는 없었다. 둘째이자 '첩의 자식'을 세운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었다."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하고, 책봉하는 과정에서 명이 보였던 미온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광해군이 '반명감정'을 품는 데 충분한 소지를 제공했다고 여겨진다."(71-4)


4장 정인홍, 이이첨과의 인연


"선조의 죽음은 광해군에게 역설적으로 '복음'이었지만 귀양길에 올랐던 정인홍과 이이첨에게도 화려한 부활의 서곡이었다. 이제 그들은 선조에게 불충했던 '죄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광해군의 즉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신'으로서 복귀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광해군에게 둘도 없는 협력자이자 은인이었지만 궁극에는 광해군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기도 하다.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치가 흔들릴 때 정인홍은 목숨을 걸고 그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이 왕권강화를 명분으로 폐모논의를 제기하는 등 정치적 무리수를 둠으로써 반대파였던 남인과 서인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에는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특히 이이첨이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은 자신뿐 아니라 정인홍과 광해군도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 인목대비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광해군과 맺은 '악연'의 끈도 참으로 질겼다."(83-4)


"광해군이 벼슬을 내려도 받아들이지 않고 향리에 머물려고 했던 정인홍의 행태는 독특한 것이었다. 한말의 지사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정인홍의 그 같은 행태를 언급하면서 그를 조선시대 산림의 원조로서 지목했다." "그는 먼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싸웠던 의병장 출신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정인홍은 고향인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와 곽재우의 의병활동 덕분에 경상우도는 보전될 수 있었다."(87-8) "정인홍이 보기에 남인 유성룡이나 서인 성혼 등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유성룡은 적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혼은 피난길에 오른 임금이 지척에서 지나가고 있음에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정인홍은 성혼을 일러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자'라고 매도했다. 정인홍의 이 같은 태도는 유성룡과 성혼 등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제자들과 두고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90)


"조식의 학문과 훈도 방식은 이황의 그것과는 사뭇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황은 조식에 비해 제자들을 키우는 데 열심이었고, 전수했던 학문 역시 이론적인 측면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조식의 그것은 확연히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칼이 상징하는 이미지처럼 결단을 강조했다. 정인홍은 조식에게 훈도를 받으면서 입신을 도모하는 학자보다는 활달한 실천가가 될 기질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천가로서의 기질은 선조 초반 조정에 초빙되어 나아갔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인홍은 1573년 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것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1577년에는 정5품 직인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곧이어 정4품 직인 장령으로 뛰어올랐다. 척신정치가 남긴 잔재가 채 가시지 않았고, 동인과 서인이 분열되어 있던 당시 정치판에서 정인홍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백관을 규찰하여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직무였던 사헌부 장령의 역할을 유감없이 해냈던 것이다."(93)


"이이첨 또한 광해군대 정치판에서 나름대로 '큰소리'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역량과 정치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도 정인홍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중에 피난하지 않고 의병활동을 벌임으로써 의롭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또한 이이첨은 일본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임진왜란 초 광릉참봉(光陵參奉)이란 미관말직에 있으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타버릴 위기에 처했던 세조의 영정을 보전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을 맞아 거의 모든 역대 국왕들의 영정이 불에 타거나 없어졌다. 겨우 보전된 것이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었다. 그런데 태조의 영정은 조정 차원에서 보전에 힘을 기울였고 여러 고을에서 그것을 옮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세조의 영정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이이첨의 활약 덕분이었다. 어쨌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국왕으로서 체면을 구겼던 선조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경사였기 때문이었다."(95-7)


5장 전란의 상처를 다독이다


"'당파를 불문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나가자.' 즉위 직후 광해군이 내놓았던 인사 정책의 화두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실천된다. 광해군은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남인 이원익을 임명했다. '오리 정승'으로 불렸던 그는 정치적 색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지만 선조대 이래 원로 대신으로서 쌓은 명망과 경륜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광해군은 그가 원만하게 붕당 사이의 대립을 추스려 조정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광해군은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하여 즉위 초반에는 이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정승직을 주고 받았다. 특히 이항복과 이덕형은 각각 국방과 외교와 관련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항복은 선조대 이래 여러 차례 병조판서를 지내 군사업무에 밝았다. 이덕형은 왜란 초 대동강에서 일본군 장소 겐소(玄蘇)와 담판을 벌인 적도 있는 당대 최고의 '일본 전문가'였다."(105)


전란의 상처를 수습하기 위해 고심하던 광해군은 "즉위 직후인 1608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대동법을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봄과 가을로 쌀 16말만을 내도록 하고 여타의 비용은 완전히 없앴다. 경기도 백성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것은 한마디로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반발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방납으로 먹고살던 모리배들, 지방의 향리들, 각 관청의 하인들, 땅이 많은 양반들은 아우성을 쳤다. 대동법을 아예 원수처럼 여겼다. 그들은 틈만 나면 대동법을 비방했다. 그들은 대동법을 관할하는 선혜청의 관리들에게 정치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고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고 운운하며 퇴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동법은 하층민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백성들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당시 민생의 피폐가 심각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111-2)


6장 왕권강화의 의지와 집착


"정인홍은 스승 조식의 권위를 높이고 그를 대북파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노력했다. 그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는 한편 이황처럼 문묘에 모시기 위해 상소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이이첨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훈구파의 후예인데다 변변한 학연조차 없는 자신을 어떻게든 조식과 연결시키고 싶어서였다. 한마디로 이이첨은 '조식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이황과 이이의 문하생이라는 학연으로 뭉친 남인과 서인계의 재야사림들이 보여준 '단체행동'의 위력을 절감한 탓이기도 했다." "비록 정권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이이첨 등은 사림들의 여론을 움직이고 그들의 심복을 얻어내는 것이 권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결국 광해군과 더욱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등에 업고 '왕권강화'를 외치면서 그를 빌미로 자신들이 권력을 확대해 가는 방식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비극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124-5)


# 회퇴변척晦退辨斥 : 오현 문묘 종사에 분노한 정인홍이 척신정치기인 명종대에 벼슬을 한 사실을 들어 이언적과 이황을 '변변치 못한 인물들'이라면서 비난한 상소 사건


"1613년 5월 23일, 대북파 이위경은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 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宗社)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는 국모로서 대우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서인, 남인들 대부분이 '역모' 가담자로 몰려 제거됨으로써 조정 내에서의 폐모논의에 대한 반대는 비교적 잠잠했지만 문제는 재야 사림들의 반발이었다. 팔도의 유생들은 서로 통문을 돌려 폐모논의를 '금수(禽獸)의 행동'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대북파를 처벌하라고 요구하는 상소를 연이어 올렸다. 그것은 충이 먼저냐, 아니면 효가 먼저냐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주자성리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정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당시 사림사회의 분위기에서 우선 덕목은 역시 효였다. '효' 중심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에 대해 '폐모' 운운하는 대북파의 주장은 용인될 수 없었다."(132-3)


# 계축옥사(1613) : 문경 새재에서 은상銀商 살해사건을 벌인 양반 명문가의 서얼들(칠서七庶)이 역모 혐의에 휘말린 사건. 이들은 국문 중에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실토했고, 이 진술은 이후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폐비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은상살해사건'이 역모로 비화되고 다시 영창군 살해와 폐모논의가 불거지면서 정치적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정치적 긴장상태의 지속은 '토역 담당자'로서 대북파, 그 중에서도 이이첨의 정치적 기반을 굳혀주었다." "폐모논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이첨 등이 몰아갔던 상황은 일종의 '공안정국'이었다. '광해군 왕권의 보위'라는 절대적 명제를 앞세워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호역(護逆)'이라는 낙인을 찍어 정치적으로 제거해버렸다. 이이첨 등에게 강상윤리로는 '충'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효' 등 다른 덕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려 했다." "거듭되는 역모사건을 거치며 신경이 더욱 예민해지고 불안했던 광해군이 그를 방임하게 되면서 '토역담당자'로서 이이첨의 권력은 비대해져갔다. 나중에는 광해군의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요컨대 이이첨은 사림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권간이 되었던 것이다."(136-8)


7장 '절대군주'를 꿈꾸다


"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이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석연치 않은 것은 또 있었다. 광해군은 새 궁궐을 지으려 했으면서도 왜란 당시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에게 왜란이라는 대전쟁이 남긴 충격은 대단했다. 전쟁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돌림병에 걸려 죽고, 사람이 사람 고기를 먹고, 강간당하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꼈던 사람들은 자연히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가 하면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것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140-1)


"왜란 이후 선조는 신하들과의 경연 자리에서 다른 경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오로지 『주역』만을 강독했다. 그만큼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이야기다. 운수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광해군 역시 술사들을 몹시 가까이했다. 1612년(광해군 4) 9월 불거져 나왔던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산군과 연산군이 쫓겨났던 장소인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기던 광해군은 (술사) 이의신의 (천도) 주장에 계속 흔들렸고, 그것이 신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 실현되기 어려워지자 이상한 행동을 시작했다. 1615년(광해군 7)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을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시쳇말로 '대조전은 어둡고 칙칙해서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창경궁 등을 수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수순으로 연결되었다."(142-4)


궁궐 건설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토지에 공사비용으로 포목을 부과하면서 백성들이 아우성이 들려왔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의 부가세는 엄청난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는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원병을 보내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파병 문제의 본질 역시 따지고 보면 돈 문제, 재정 문제였다."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금이나 은을 바치는 하층민들에게 공명첩을 나눠주고 실직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하는가 하면 죄수들에게도 속죄은(贖罪銀)의 명목으로 은을 거둬들였다." "은을 바치고 당상에 올라 이른바 납은당상(納銀堂上)이 된 백성들 가운데는 폐모논의가 벌어질 때 인목대비를 처벌하라는 정치적 의사표시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나 광해군과 대북파를 가뜩이나 '흘겨보고' 있던 남인계나 서인계 사대부들이 보기에 그것은 분명 '말세'였다."(150-1)


8장 대륙에서 부는 바람


조선에 주둔하던 명군은 턱없이 부족한 상점 수와 면포와 쌀을 이용한 상거래 관행으로 곤란을 겪었다. "명군 지휘부가 생각해낸 대책은 명나라 상인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여 장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과 거리가 가까운 요동의 상인들이 주목되었다. 명군 지휘부는 상인들에게 노인(路引)을 발급했다. 일종의 통행증명서였다. 그것을 소지한 상인들에게 조선으로 들어와 상행위를 하도록 권장했다." "일단 그들이 노린 것은 명군의 봉급으로 뿌려지는 은이었다. 명군 지휘관들은 상인들을 아예 각 부대별로 배속시켰다. 병력이 이동하면 상인들도 따라서 이동했다." "수천리 길을 마다않고 조선까지 들어온 상인들이 명군과의 거래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들이 조선에 널려 있는 은광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뒤를 봐주는 명군 지휘관들을 통해 조선 조정에게 은광을 개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159-60)


"명군에 보기에 은을 이용하여 거래할 줄도 모르고, 그것을 채굴하는 데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던 조선 신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161) "본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에 올 경우, 그들에게 모시나 부채, 화문석과 같은 토산물을 예물로 주었다. 하지만 왜란을 거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조선에서도 은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데다, 은이 부족해지고 은가가 치솟고 있던 명 내부의 사정이 맞물리면서 명사들은 은만을 요구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색은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이르렀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 냥에 육박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했거니와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서는 "조선에 가서 한밑천 잡자"는 풍조가 생겨났다."(167-8)


9장 외교 전문가! 광해군


광해군 외교전술의 기본 방침인 '기미책'은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다독거려 '온다고 하면 막지 않고, 간다고 하면 잡지 않는' 소극적인 현상유지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미개하고 사나운 오랑캐'에게 의리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쇠귀에 경 읽기'이므로 잘 구슬려 평화를 유지하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침략 근성을 버리지 않는데 언제까지나 유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한편으론 기미책을 써서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선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려고 했다. '자강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 광해군은 누르하치가 쳐들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광해군이 명청교체기에 취한 외교적 대응책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정보 수집 노력이었다."(187-8)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 노심초사했던 광해군의 혜안은 일본에 대한 정책과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후금을 막는 데 필요한 무기 확보에 열성이었던 그는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다. 왜란 중의 경험을 통해 일본산 장검과 조총의 우수성을 인식한 터라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그를 구입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비밀리에 타진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밖에 안되어 일본을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퍼져 있던 상황에서 그 같은 탄력적인 태도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609년(광해군 2)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던 것도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켜 점증하고 있던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전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북방의 후금과 동북방의 일본,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로부터 협공당하는 시대적, 지정학적 현실을 인식했던 그가 조정 내외의 비판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택한 것은 고민 끝에 선택한 고육책이었다."(194)


10장 명청교체의 길목에서


"광해군이 이미 쫓겨난 뒤인 1627년 (심하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강홍립은 후금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정묘호란 당시 그는 향도로서 차출되었던 것이다. 그는 강화도로 피난했던 인조를 알현했다. 강화협상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인조 주변의 신료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하지만 인조는 의외로 그를 감싸주었다." 강화가 성립한 후 조선군 지휘관 정충신은 철군하는 강홍립에게 편지를 보내 후금군을 단속하여 살육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정이 강화로 피난 간 와중에 한강 이북의 조선 백성들은 '도마 위의 고기'였다. 강홍립은 정충신의 부탁대로 후금군의 살육을 막기 위해 노력했거니와 강화협상을 주선하여 후금군을 철수시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뒷날 강홍립은 '매국노'로 매도되는가 하면 철저히 잊혀졌다. 요컨대 '심하 전투'는 강홍립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211-2)


11장 광해군, 명을 주무르다


"절강 출신인 모문룡은 1621년 7월, 요동 전체가 후금에게 점령되었던 직후 압록강변의 진강으로 잠입하여 그곳을 점령했다." "1621년 요동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이후 후금의 목표는 고정되었다. 이제는 북경을 향하여, 그 북경으로 건너가는 관문인 산해관을 향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오로지 서진(西進), 또 서진만을 염두에 두었던 후금에게 갑자기 나타난 모문룡은 한마디로 '목에 걸린 가시'였다. 하지만 모문룡이 진강에 어렵사리 마련한 거점은 오래갈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우선 그가 거느린 병력이 너무 미약했던데다 그의 진영이 명 본토로부터 고립되어 증원군을 끌어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금의 대병력이 압박해오자) 모문룡은 1621년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의 미곶에 상륙했다. 평안감사가 올린 긴급 장계를 통해 그가 미곶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바짝 긴장했다."(224-5)


# 요민遼民 : 요동에 살던 명나라 주민들이 후금군을 피해 조선으로 대거 몰려들면서 발생한 난민들


조선은 세 가지의 난제에 직면했다. "우선 '천조(天朝)의 장수'인 그를 접대하는 문제가 간단치 않았다. 모문룡뿐 아니라 당시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장수들 가운데는 처자식을 동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에게 식량과 거처의 제공을 요청했다." "모문룡이 조선 영내에 머물게 되면서 조선은 후금과의 접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1621년 정탐을 위해 정충신을 후금 진영에 파견하면서도 모문룡이 알까 봐 그것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실제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에게 조선을 견제하여 후금측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감시자' 역할을 주문했던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은 무엇보다 모문룡 때문에 후금을 자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모문룡이 "조선과 연결하여 후금의 배후를 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 영토에서 장기간 주둔할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데다 그가 들어온 뒤로는 조선으로 드나드는 명 장졸들과 요민들의 수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226-7)


"모문룡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던 광해군의 선견지명은 1629년에 입증되었다. 그해 모문룡이 영원순무(寧遠巡撫)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원숭환은 열렬한 중화민족주의자였다. 그는 모문룡이 해마다 수십만 석의 군량을 챙기면서도 후금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요동을 수복하려면 모문룡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모문룡의 행태를 관찰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원숭환은 그를 쌍도(雙島)라는 섬으로 유인하여 처형하면서 12가지의 '죄악'을 들이댔다." "배부른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꾀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다만 가끔씩 조선으로 가는 사신이 섬에 들를 때 후금을 치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지천으로 널린 재물을 밑천 삼아 뇌물로써 환관 위충현을 비롯한 부패한 조정 요인들을 구워 삶았다. 자신에 대한 감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627년경부터는 아예 후금과 내통하고 있었다."(230-1)


"광해군은 '심하 전투' 이후 그야말로 '뻔질나게' 명 조정으로 사신을 보냈다. 명 조정에 감돌고 있던 조선에 대한 불온한 분위기를 탐지하고, 명의 재징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포석이었다. 1619년 11월, 광해군은 측근 윤휘를 보내 요동경략(遼東經略)에게 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만주의 진강과 관전에 명군을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후금이 조선에 쳐들어 올 경우 명군이 달려와 구원하기 쉽도록 하기 위한 깜냥이었다. 이제 명과 후금의 대립 구도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궁극에는 명이 조선에 대해 더 이상 재징병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한마디로 명에 대한 '외교적 역공'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심하 전투' 이후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때 신료들의 주장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신료들과 격렬한 찬반 논의를 벌인 끝에 보냈던 원병이 대패했기 때문이었다."(240-1)


# 광해군이 명의 징병 요구를 거부한 이유

1. 임진왜란 당시 겪은 전쟁의 참혹함과 후금의 강성한 위세

2. 왕권 강화 사업(특히, 토목공사)과 병행 불가

3. 즉위 이후 수시로 자신을 괴롭힌 명에 대한 ‘반명감정’


# 심하 전투가 국내에 미친 영향

1. 전투병 1만 명 징집, 군량 마련, 방한복 준비 등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다.

2. 그 와중에 전라도와 충청도에 심각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배가되다. 화적떼가 늘어나다.

3. 병사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억류되어 노동력 및 군사력이 훼손되고, 유족들의 슬픔이 끊이지 않다.


"병력을 징발하고 세금을 더 거두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던 전라도와 충청도, 도성 주변에서는 화적까지 날뛰었다. 후금에 대한 두려움에 방어대책 마련 과정에서 부과되었던 경제적 부담에 대한 반감이 더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강홍립의 항복과 그 이후 광해군이 취했던 대외정책을 '강상 윤리를 무너뜨린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강홍립이 후금군에게 항복했던 것이 화이론자인 그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영창군이 죽고 폐모논의가 제기된 이후 조정에서 마음이 떠난 그들이었다.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하려 들더니 이제는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는 명의 요청마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 했다. 그들이 보기에 조정에서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하층민들은 또 그들대로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만이 커져가면서 사회 전반이 동요하고 있었다."(249-51)


12장 반정인가 찬탈인가


"반정의 핵심 주체인 김류, 이귀, 김자점, 구굉 등은 대개 서인계열의 사대부들이거나 인조와 연결된 외척들이었다. 특히 사대부들 가운데는 이이, 성혼, 김장생의 문하들이 많았다. 이처럼 반정 주체들은 대북파에 비해 사제 관계로 연결된 학연적 기반이 확실하고, 성리학을 배운 '학인(學人)'으로서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의 견제에 밀리거나 계축옥사 등을 계기로 대북파의 '토역 대상'이 되어 조정에서 쫓겨남으로써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해 강한 비판의식과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광해군 정권이 계속될 경우 주변부를 빙빙 돌다가 일생을 마쳐야 했을 것이고, 아니면 또 무슨 명목의 역모죄에 걸려 비명횡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해군대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설사 벼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해군 정권 하에서 입신할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 '주변인'들이 대부분이었다."(263-6)


# 반정공신들의 밀약 :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처럼) 왕과 국혼國婚관계를 맺고, (정인홍처럼) 위세 있는 산림을 중용한다.


"'난신적자들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 조정의 강경한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군신(君臣)' 사이의 명분이나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려면 조선의 반정 주체들을 토벌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명의 현실은 조선과의 관계에서 명분만 따지기에는 너무 급박했다. 어떻게 해서든 조선을 후금과의 대립 구도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이제이'를 하려면 조선을 다독거려야 했다. 신료들 가운데는 인조를 잠정적으로 승인하되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명을 도와 후금을 치는가를 살펴본 뒤에 최종 결정을 내리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명이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순간이었다." "1625년(인조 3) 1월 희종황제는 모문룡에게 칙서를 내려 마침내 인조를 조선국왕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또 그 사실을 조선에 전달할 것과 조선과 힘을 합쳐 후금을 정벌하라고 지시했다."(275-6)


13장 권력 16년, 춘몽 16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괄이 평안병사로 부임한 직후 문회, 이우 두 사람이 이괄을 밀고했다. 이괄과 한명련, 기자헌 등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624년 1월 17일 인조가 이괄을 잡아오라고 보낸 금부도사가 이괄의 병영으로 들이닥쳤다. 이괄은 그들을 베어 죽이고 남하했다. 이윽고 정부군의 주력인 장만 휘하의 병력을 깨뜨리자 임진강을 지키던 이귀는 도망쳐서 인조에게 파천하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결국 파천했고 이괄은 서울을 점령했다. 이괄은 서울 점령 직후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선조의 열번째 아들로 인조에게는 숙부뻘이었다. 한번 배반한 인물은 계속 배반한다고 했던가? 인조가 경기 방어사로 임명한 이홍립은 이괄에게 투항했다. 인조반정이 있었던 당일 훈련대장으로서 반정군에게 투항했던 바로 그 이홍립이었다."(282)


"이괄에게 혼쭐이 난 반정공신들이 반란 진압 이후 내놓은 대책은 표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찰(譏察)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공작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반(反)혁명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방위적으로 사찰을 강화했다." "기찰로 불리는 공작정치가 강화되면서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불신 풍조를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감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군사들의 훈련이었다. 기찰이 강화되면서 지방의 무관들은 습진(習陣, 병사들을 모아 진을 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을 기피했다. 혹시라도 역모를 꾀하기 위한 병력 동원훈련으로 오해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훈련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후유증은 후금의 침입을 받았을 때 그대로 나타났다." "반정공신들은 직무 유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욕(私慾)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3-4)


"(강화도로 유배된) 광해군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들과 연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으로 옮겨졌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뒤부터 인조나 반정공신들이 보기에 광해군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쉽사리 그를 '처리'해버릴 수는 없었다. 광해군이 영창군을 죽였다는 것을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그들로서는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 광해군은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이듬해인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바로 그해였다. 후금과 사단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던 광해군인만큼 인조나 서인들의 입장에서는 그가 자신들과 가까이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세월보다 더 길었던 셈이다. 그는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눈을 감았다."(2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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