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종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2)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자가 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데, 서자는 적자가 될 수 없었으며 성씨가 같은 집안 아이만이 양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얼이 관직에는 나아갈 수 있었지만, 양반가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호준의 경우도 이미 서자인 이윤용이 있었지만 가문을 상속받을 적자가 필요했고,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의 이완용을 양자로 들여 그를 적장자로 삼았다."(25)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대단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종은 1881년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읽고 조미통상조약의 체결을 결정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유럽의 열강과 달리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에 대해 당시 중국도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인 조미통상조약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중에서 그나마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세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두 나라 사이를 조정하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갑신정변에 연루된) 신기선의 국문을 행했던 1887년의 이완용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정계 분위기에 조응하면서도 조용히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36-8)


"이완용이 귀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와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민영휘) 등의 민씨 척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우하고 있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외교 정책과 차관 도입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내무부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고종의 결정을 믿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했던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고종의 정책 실패와 함께 줄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완용에게 내부 참의직을 제수한 것은 고종의 신임이 이완용에게 쏠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더욱이 청과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한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통해 "이러한 총애가 미치자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는데, 신의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52-3)


"그는 사직상소가 아니면 병을 핑계로 임명받은 자리에 불참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계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반면에 왕과 세자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강원과 승정원의 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이완용보다 7살이 어린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 개혁은 급격한 정치 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왕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세력과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 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겸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55-7)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1차 갑오내각 때는 대원군과 민씨 척족의 첨예한 대립이 부각되었고,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때 이완용은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전권공사직을 마다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2차 갑오내각은 대원군과 민씨 척족 세력이 배제된 대신 친일적 색채를 띠면서 관료 중심의 개혁을 이끌려 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세력과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의 갑신파가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한편 앞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외교관들과 소통 가능한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이때 주목받은 세력이 친미 성향의 정동파였다. 이완용의 입각은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노우에의 정략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65)


"3차 갑오내각의 초기인 1895년 6월 초에는 아직 이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후 임시 대리공사였던 스기무라 후카시가 6월 16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정동파는 각국과 골고루 교제하여 각국 공동의 보조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강제를 피하려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는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완용이 열흘 사이에 일본을 배척하는 정치색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중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중전은 6월 7일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과 중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을 배척하고 고종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69)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진 후, "미국공사관에 기거하던 이완용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이범진과 함께 다시 고종을 빼내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을 자주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완용과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고종을 모시던 상궁 엄씨가 계획에 동참했다. 궁궐이 습격당하고 중전이 처참하게 죽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더구나 임오군란 때처럼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왔다." "이완용은 이범진,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세자를 맞이했다. 이완용과 고종은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관파천이 춘생문 사건처럼 사전에 발각되었다면 이완용은 망명을 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이 일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84-5)


# 춘생문 사건 :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된 사건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이범진의 축출 이후 갑오개혁에 따른 사회적 혼선이 빚어지자 양반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신식'에 대한 불만 여론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며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을 등용하여 축소된 왕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범진 퇴진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갈등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통해 왕의 권력 행사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과 내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권을 내각이 어느 정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과 정부의 분리라는 갑오개혁의 원칙이 관철될 경우 통치권의 일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켜 행정 권력을 다시 자신의 통치권 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102-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이완용은 고종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보수 세력에 맞서 정동파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정동파가 보수 세력의 반격에 맞서는 동안 고종과 러시아공사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은 이용익 등과 결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1896년 10월 21일,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러시아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채 러시아 군사교관 14명만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며 환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원조가 성사되지 않자 실망하는 한편 김홍륙 등을 후원하면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러시아공사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일본공사관원과 친분이 있는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를 통해 은밀히 일본과의 제휴를 도모했다."(118-9)


"김홍륙 등의 정치 공세로 인해 민영환, 박정양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이완용의 고종 환궁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고종의 '총신'에 의해 그는 점차 정계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동파는 아직 고종에게 유용한 세력이었다. 김홍륙 등의 득세로 실권은 상실했지만, 미국공사관과 소통할 수 있는 이완용 등을 내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다. 또한 보수 세력과 정동파 세력을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해가던 고종은 김홍륙 등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경운궁 수리가 마무리되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명분이 없어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환궁이 실현되었지만, 이완용은 환궁을 주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미국인 고문을 통한 내정 개혁 역시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계 개편의 주도권은 환궁으로 왕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던 고종의 손에 넘어갔다."(124-5)


"1898년 1월, 러시아는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 지역의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부산 절영도를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킨 후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김홍륙, 민종묵, 이용익 등의 친러세력은 한러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자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사회·정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다음 2월 13일 토론회를 개최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건의한다." 1898년 2월 27일, 양부의 병을 핑계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37-9)


"갑오개혁 이전의 정계에서 몇 안 되는 개화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완용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자신보다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이들은 정계에 안주하지 않고 인민을 향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가 겸 언론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양반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계를 주도해왔던 이완용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을 표명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3-5)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1894년과 1895년에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이였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71-2)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다시 내각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1905년 초에 일진회가 친일 집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완용은 친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야시 공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일본공사는 되도록 친일 인사를 입각시켜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반일 성향의 인물들은 대부분 내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적 이미지를 가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에 임명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사건으로 이완용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하영이 일본공사관을 통해 자신과 이완용 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완용은 이하영을 통해 일본공사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177-9)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도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0-1)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체결을 놓고 이토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토가 고종의 말에 찬성한 것은 당시 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가 의정부에서 각 대신들의 사안을 의논한 후 고종에게 올리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 의견을 표명하더라도 고종이 찬성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이토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완용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아래에서 대신들이 막아서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고종이 결정권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하들이 일본공사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하기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고종에게 조약 거부의 구실을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즉 고종이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니 지금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조약 체결을 미루고, 영국·미국·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195)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5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가(可)'에 서명하여 체결된 을사조약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동양 평화의 화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배신했고, 내각 대신이 임금과 백성을 저버리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을 이토와 내각 대신들에게 떠넘긴 채 대한제국 권력의 핵심인 고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의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민영환 역시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읍소했는데,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결국 자결한다."(198-9)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충심을 알고 있다'라는 비답을 내려왔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201-3)


"이완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 대한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다."(206-7)


"이완용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이완용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유학파 지식인들은 을사조약에서 명시했던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등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에 가깝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방의 형태로 통합된 나라들,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의 연방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보호국은 식민지와 다르며 대한제국이 부강해진다면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09-10)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고종의 양위와 정미7조약 체결로 이토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얻은 이완용은 자신의 세력과 친인척을 정계에 등용하는 한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몽 단체와 일진회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일진회는 6월 10일 일진회 특별평의원회를 열어 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직 권고안을 의결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완용 반대운동을 벌여 나간다.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여론을 이끌어내고, 일본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이완용 내각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던 군부 세력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한 반면, 이토는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군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토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어가고 있었다."(229-31)


"1909년 7월 10일 이토의 귀국 연회가 끝나자 소네 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기유각서'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사법권의 위탁으로 대한제국 언론은 이완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인 사법권 이양은 통치권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36-7)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던 통치권을 이양하되, 국호와 왕실을 그대로 두는 형태의 병합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수용한 국가연합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던 형태였다." "국호와 황실의 존재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의 제안 중 국호 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독립 제국임을 선포했던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존속시킬 경우, 일본 황족에 포섭된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 문제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의 속국인 왕조 국가란 이미지가 있는 조선이란 국호를 고집했던 것 같다. 데라우치는 대한제국 국호 사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왕의 칭호 존속 요구를 수용했다. 데라우치와의 협상을 마친 이완용은 8월 22일 순종을 알현하고 한일병햡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통감부에 가서 데라우치와 회견하고 조약에 조인했다."(253)


"순종은 이왕(李王)이란 호칭에 불만을 표했다. 병합 조칙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28일, 순종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일본 측이 제시한 '왕'을 '대왕'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의 지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8월 29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는 건'이 선포되고, 고종과 순종을 각각 덕수궁 이태왕과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황실 전범에 없는 '왕공족(王公族)'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254-5)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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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혁명의 기록 - 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이이화 지음 / 생각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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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이 행동으로 나선 기록은 1892년 11월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일어난 삼례 집회 때부터 나타난다. 교도들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소장을 낼 때 이를 들고 갈 사람이 없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험한 일이었다. 이때 전봉준이 선뜻 나선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에게 항의의 글을 내기도 하고 창의문倡義文(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직접 써서 돌리기도 했다. 또 동학교단에서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대궐 앞에 엎드려 소문을 올리는 절차)를 올릴 직전에 다시 삼례에서 집회를 열고 전라감사에게 글을 보냈다. 이때도 전봉준이 활동을 전개했다." "여기서는 교조 신원만이 아니라 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봉준은 이 무렵부터 척양척왜를 분명하게 표방했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인지 전봉준과 흥선대원군이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는 설도 널리 퍼져 있다."(49-50)


전봉군의 주도로 농민군이 거세게 일어나자 "1894년 2월 말경 신임 군수 박원명이 고부로 들어왔다. 박원명은 농민군 지도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위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약속하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잔치를 풍성하게 벌였다. 농민군들은 현저히 동요하는 빛을 보이며 해산을 서둘렀다." "해산의 원인은 첫째, 마을 단위의 집강으로 표현되는 토호와 부자들이 지도부에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러모로 수탈을 당한 분풀이로 민요를 일으켰으나 지경 바깥으로 진출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을 꺼려 적당하게 타협하려 들었다. 전봉준을 잡아 보내려 한 일부 무리도 이들 부류였을 것이다. 둘째, 하부 구조는 영세농과 머슴들이었고 무뢰배와 발피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전봉준은 공초에서 "동학의 무리는 적고 원민怨民(원한을 가진 백성)이 많았다"고 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분을 풀고 곡식을 나누어 받는 것 따위 재미를 보다가 토호와 부자들이 해산하려 하자 덩달아 흩어졌던 것이다."(83-4)


"전봉준은 일찍이 그의 부하들에게 "나는 신령스런 부적이 있어 몸을 보호해준다. 비록 대포 연기가 자욱한 속이나 총알이 비가 오듯 하는 속에서도 다치지 않는다. 너희들 보아라"라고 말하고는 몰래 탄환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어두고 친하고 믿을 만한 사람 십여 명에게 비밀히 알려준 뒤 그들로 하여금 에워싸고 총을 쏘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포였다." "땅에 떨어진 탄환을 본 무리들은 "장군은 신령스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본 부하들은 그 부적을 다투어 붙이고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다. 또 전봉준은 어느 때 밤을 이용해 총잡이와 짜고 미리 손아귀에 총탄을 숨겼다가 총수가 헛방을 놓으면 전봉준이 총알을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하고 나서 손을 펴 총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이를 바라보던 농민군들은 "우리 대장만 따라다니면 어떤 양총을 맞아도 죽지 않아"라고 떠들었다. 농민군들은 대장의 신통력을 믿어 더욱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113-4)


박원명의 후임으로 온 이용태는 포악한 인물로, 민요 두목들을 붙잡는다는 핑계로 각종 행악을 부렸다. 이를 참지 못하고 재봉기한 전봉준의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한 후 세력을 늘려나갔다.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승리한 뒤 정읍을 거쳐 고창·무장·영광으로 진출한 후, 마침내 전주성마저 함락했다. 그러나 전주성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전주성으로 장위영군을 이끌고 와 대포를 쏘며 포위망을 조여오던 홍계훈은 "항복 권고를 연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고 농민군은 승전의 빌미를 찾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봉준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머리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5월 7일, (농민군의 시정사항을 조정에 건의하기로 하면서) 화해 약속은 성립되었다. 이는 휴전의 의미와는 다르다. 전봉준과 홍계훈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화약을 성립한 것이 아니다.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건을 제시하다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판결선언서〉대로 화약이 아니라 합의라고 하는 것이 맞다."(121-2)


"농민군은 왜 '귀화'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화해 약속을 맺었을가? 첫째, (동학) 북접의 호응이 없었던 것이요 둘째, 외국 군대의 개입이 두려웠으며 셋째, 농민군의 내부 동요가 있었고 넷째, 양곡과 생필품의 결핍이 있었던 탓이다. 실제로 북접은 남접의 행동이 과격하다고 비난했으며 북접의 지시를 받는 호남의 동학 세력은 자기들의 고장에서 귀추를 엿보고 있었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원세개가 보낸 청군은 전주에 와서 농민군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들은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한편 농민군은 농군이어서 농사철을 맞아 들떠 있었다. 논에 물을 대야 하는데, 볍씨를 뿌려야 하는데, 모내기 날이 다가오는데 따위를 생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농심農心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전주성이 완전히 포위되어 시장도 열리지 않고 물품의 조달이 단절되어 당장 밥을 굶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124-5)


"그러면 관군 측은 왜 화전 약속을 급하게 맺으려 했던가? 첫째, 조정에서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서울로 들어왔으며 둘째, 일본군이 횡행하는 서울과 인천에는 수비병이 거의 없어 수도 방위가 위태했고 셋째,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의 사기가 거의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며 넷째, 농민군의 지원군이 언제 배후를 공격해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홍계훈 개인의 공명심이 작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홍계훈은 적당하게 화전을 맺어 농민군에 전주성을 내준 책임에서 벗어나 자신이 승리의 장수임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홍계훈은 농민군이 전주에서 썰물 빠지듯 물러나자 엉뚱하게도 "비적을 소탕한다"고 외치면서 호기를 부렸다." "(곧이어 홍계훈도 서울로 상경하고) 농민군 지도자들은 각기 지방에 흩어져 집강소 조직을 정비했다. 이제 새 국면은 서울과 인천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125-6)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봉준은 재봉기를 준비하는 장소를 삼례로 삼고 9월부터 직속부대를 이끌고 양반다리 언저리에 머물렀다. 그는 집강소 활동 기간에 양곡과 무기를 확보하고 말과 나귀를 모으며 군수전을 마련하는 등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재봉기를 서두르면서 여러 장령들에게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설득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군수전·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부호들에게 일종의 어음이라 할 표지標紙(액수를 쓴 종이)를 돌렸으며 집강소 활동 기간에 농민군에게서 거둔 무기를 삼례로 돌리게 했다. 또 유별나게 호남의 북접 교도들에게는 군량미와 말 먹일 꼴을 버겁게 배당해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북접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북접과 남접의 갈등이 깊어지자 최시형은) 교단의 지도자들을 불러 상의한 끝에 대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정부에서는 남·북접의 교도들을 가리지 않고 한 통속으로 보아 탄압을 가했고 교단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포교들을 풀어놓은 처지였다."(157-9)


# 최시형의 '대동원령'에 따라 북접 지도자들은 벌남기伐南旗(남접을 징벌하라는 기)를 찢어 버리고 연합전선을 구축


"10월 25일 벌어진 능치 전투에서는 일본군이 왼쪽에서 진격해왔고 관군이 반대편에서 협공을 했다. 농민군은 중간에서 좌우를 향해 맞받아 대응했다. 전투는 한낮까지 계속되었다. 농민군은 협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구덩이 속에서 인해전술로 적을 공략하려 했다. 잎이 떨어진 나목을 차폐물로 의지해 몸을 숨기기가 마땅치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효포의 들판에서 진용과 장비를 수습하고 있을 때 관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농민군은 경천점으로 후퇴했으나 관군이 다시 추격해와서 농민군들은 논산으로 물러났다. 능치의 골짜기와 효포의 길바닥과 하고개의 언덕이 시체로 쌓이고 피로 물들었다." "세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농민군은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농민군은 전투에 지치고 추위를 견디다 못해 연달아 달아났다. 특히 전투 경험이 적은 북접 농민군은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난 뒤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1차 공주 공방전의 대체적인 상황이다."(182-3)


"11월 9일 정오가 되기 직전, 모리오 대위는 기다리던 작전 개시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일본군은 봉우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포를 연달아 쏘아댔다. 농민군도 대응해 본격적으로 전투를 개시했다. 한꺼번에 밀려 올라가다가 대포를 쏘면 물러나고 잠시 대포 쏘기를 멈추면 밀려왔다. 제1대가 무너지면 제2대, 제3대가 꼬리를 이었다. 이날 오후까지 전진과 후퇴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농민군의 시체가 언덕과 고개 언저리에 쌓였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흥건하게 적셨다." "두 차례 전투를 벌이고 나서 점검해보니 1만여 명이던 군사가 3천여 명만 남았고 다시 두 차례 접전을 한 뒤 점검해보니 500여 명만이 남았다." "이런 형편에 놓여 있었으니 전봉준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우금재의 마지막 보루를 버리고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제 공주를 포위했던 농민군은 사라졌다. 내리 4일 동안 전개된 이 전투를 2차 공주 전투라 한다."(188-9)


"전봉준이 지휘하는 주력 농민군은 원평과 태인 전투를 끝으로 완전히 해산했다. 전봉준은 자신이 어릴 때 자라고 돌아다닌 원평과 태안을 최후의 격전지로 삼았다. 그런 연고로 하여 수백 명 정도 남은 농민군을 다시 수천 명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농민군으로는 한풀 꺾인 사기를 올릴 수 없었으며 일본군의 성능 좋은 신무기를 극복할 수도 없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죄인 심문 기록)에서 이때의 정황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전봉준은 금구 등지에서 다시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효는 많았으나 기율이 없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아주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와서 그들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어서 두 곳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는 태인 전투를 치른 뒤 대장으로서 정식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침통한 심정으로 명령했다."(204)


"전봉준의 죄목은 《대전회통大典會通》에 규정된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부대시참'이었다. 꽤나 긴 죄명이었다. 이를 풀이해보면, 군복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대항해 변란을 만든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하는 죄다. 그리하여 전봉준과 같은 사형언도를 받은 손화중·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 네 명은 판결이 난 날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갑오개혁 때 개정된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종전에는 역적죄에 해당하는 사형수들은 모조리 참형을 가해 목을 잘라 관아의 문 앞에 걸어두거나 여러 사람들이 보도록 조리를 돌렸다." "개화정부는 형법을 개정해 "모든 재판과 소송은 2심으로 한다"는 조항을 두고 4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이들 다섯 명에게는 그 시행을 불과 2일 앞두고 사형을 집행했다. 그러니까 사형 선고와 사형 집행을 전격적으로 단행해 2심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속전속결로 들뜬 민심을 가라앉히려 했던 것이다."(235-6)


"전봉준이 역적으로 처형을 당하고 난 뒤 고창의 당촌을 비롯해 주변의 전씨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은 전씨 마을을 덮쳐 재산을 약탈하거나 불태웠고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전씨 집성촌을 폐허가 되었으며 전씨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실의 언덕배기에 '녹두장군'의 묘소라 전해지는 초라한 무덤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끔 제물을 차려놓고 녹두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1990년대에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이 무덤을 발굴해보니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다. 가묘假墓(빈 무덤)를 조성할 때는 고인의 머리카락이나 쓰던 물건 따위 유물을 껴묻는 경우가 있으나 전봉준의 가묘에는 껴묻은 물건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봉준의 묘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가묘를 만들어서 추모제를 지냈던 것이다. 「파랑새」를 목 놓아 부르던 민중이 전봉준이 살던 마을의 언덕에 가묘를 조성해 모셨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하겠다."(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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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박맹수 외 지음, 한혜인 옮김 / 모시는사람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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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사상의 특징

1. 시천주侍天主 : 누구나 자신 안에 ‘천주’(만물의 생명의 근원)를 모실 수 있다는 만민평등 사상

2. 보국안민輔國安民 : “국가의 악정을 고쳐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민본주의적 사상

3. 후천개벽後天開闢 : 현세가 종말을 맞이하고 가까운 미래에 이상적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

4. 유무상자有無相資 :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공동체 정신


# 동학조직의 구성

1. 대도소大都所 : 2대 교주 최시형이 1893년 충청도 보은에 설치한 총본부

2. 포包(대접주) : 몇 개의 접을 묶어 만들어진 중간 조직

3. 접接(접주) : 35-70호 정도의 규모로 지역에 만들어진 기초 조직


#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최초의 무장봉기 : 1894년 2월 15일 전봉준 등이 중심이 되어 고부의 악덕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항의하면서 일어난 봉기

2. 혁명을 목표로 한 봉기: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의 대접주들이 뜻을 모아 전면 봉기하여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5월 10일)하고 전주마저 점령(5월 31일).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조선 출병.

3. 전주화약(全州和約) :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농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도소(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을 진행하기로 합의

4. 항일투쟁 :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이 전해지면서 10월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2차 봉기. 두 차례의 우금티 전투(11월 10-12일, 12월 4-7일)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5. 우금티전투 이후 : 일본군의 포위섬멸작전


후비 제19대대 3개 중대 중 일본군 서로 부대인 제2중대는 남·북접 합동 농민군의 북상을 논산평야 북부에 있는 금강 강변의 요지인 공주성에 들어가서 기다렸습니다. 11월 20일에 농민군이 북상해서 동학농민전쟁 최대의 격전이었던 공주전투가 두 차례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 후비 부대는 스나이더 소총이라는 라이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이플총은 탄구를 회전시키도록 총 내부에 나선형 홈이 새겨진 총으로, 당시의 소총과는 격이 다른 사정거리와 명중률, 살상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보병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최대의 격전이 되었던 이 공주전투가 전장의 최후로 서술되어 있는 우금티전투입니다. (···)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은 100명 단위로 병력이 훨씬 적은 일본군에게 개개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격파당하였습니다. 죽창과 화승총을 가진 농민군과 라이플총을 가진 훈련된 근대 보병대와의 싸움은 농민군 200명을 일본군 1명이 대적할 정도로 엄청난 전력 차가 있었던 것입니다.(94-6)


# 후비병 : 현역과 예비역 다음으로 병역에 임한 27-32세 가량의 최고령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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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술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대우휴먼사이언스 24
박상섭 지음 / 아카넷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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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고대의 전쟁 : 금속제 무기의 도입과 정치적 결과


"역사상 전차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첫 번째의 예로는 기원전 1700년경 힉소스인들에 의한 이집트 침공이 언급된다. 힉소스인들은 약 2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이집트에 전차의 제작술과 사용법을 전파했고 힉소스인들에게서 해방된 이집트는 자신의 군대에 전차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살상용 무기로 주로 합성궁과 도끼를 사용한) 힉소스인들은 투구와 전신용 갑옷을 착용했는데 이러한 무기들을 바탕으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에 비해 결정적인 군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나일강 상류 지역만을 지배하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1520년을 전후하여 힉소스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원래의 이집트 지역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했다. 이때 이집트는 전차 부대를 조직하여 사용했고 이와 함께 보병 부대도 조직했다. 이집트 병사들의 주된 무기는 도끼, 활, 곤봉, 창이었다. 특히 전차병과 궁수를 결합한 전법은 이집트에서 최초로 고안된 전투 방식이었다."(58-9)


"기원전 1500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있던 히타이트인들은 반복적인 가열과 담금질을 통해 단단한 철을 제작하는 제련법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반드시 큰 나라뿐 아니라 소국들도 대규모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는 전쟁 발발 빈도의 극적 증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철기시대의 도래는 역사 속에서 관찰되는 첫 번째의 군사혁명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된다." "이 점을 기반으로 메소포타미아 내 지역 국가들은 자신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병사 징집제도, 즉 상설 징집군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징집군 제도를 바탕으로 출현한 다수의 병사들을 훈련, 지휘하고 또한 이들의 충성을 확보할 전문 집단이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핵심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써 군사 업무는 항시적인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 점은 철기시대에 의해 나타난 군사혁명의 또 다른 핵심적 양상의 하나로 지적된다."(64-6)


"아시리아가 한 번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야전군의 병력 규모는 약 5만 정도였던 것으로 전문 학자들은 말한다. 이 군대는 보병군, 전차 부대 및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고 병사들 전부는 철제 무기로 무장했다. 병사 전부가 철제 무기로 무장했던 것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보병이 최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아시리아 군대의 중추부는 전차 부대였다. 기본 전법은 힉소스인들과의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채택한 것과 거의 유사하지만 전차 제조와 관련하여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예컨대 바퀴의 테두리는 철제로 바뀌었고 처음으로 바큇살spoke이 장착되어 바퀴의 마모도 줄어들고 회전 시의 안정성도 확보되었다. 이집트의 전차는 마부와 병사 1인 등 모두 2인으로 구성되었으나 아시리아에서는 후방 방어를 담당하는 또 다른 전사가 추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후방 방어 병사를 없애는 대신 마부와 궁수를 보호해주는 2인의 방패잡이 병사가 탑승하는 4인승으로 바뀌었다."(68-70)


"그리스식 밀집대형 전투는 인간의 본능인 공포심의 극복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공포심의 극복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강력한 기율과 자신이 지켜야 할 공동체 즉 폴리스에 대한 애향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밀집대형은 단순히 전투대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이면서 도덕 원리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일은 당시 그리스 시민들 전부가 전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밀집 방진대형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식 전법은 전투 참가자의 정신적·신체적 자원의 소진을 전제로 전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둔한' 전법이고 또한 그럼에도 어떤 결정적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를 갖는다. 이 한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거의 30년간 지속되면서도 어떤 분명한 결론이 나지 못하면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79-80)


"로마식 진형은 그리스식 팔랑크스와 마찬가지로 중무장 보병을 기반으로 한다. 팔랑크스 방식이 기본적으로 방어를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인 데 비해 로마식은 공격과 수비를 유연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팔랑크스 방식에서의 중심 무기는 창이었는데 로마 방식에서는 필룸pilum이라고 하는 창과 칼이 중심이었다. 원래 고대의 전쟁에서 칼은 창과 활을 보조하는 역할밖에 담당하지 않았으나 로마에 와서는 창과 함께 중심 공격 무기가 되었다. 밀집대형인 팔랑크스에서는 부족한 공간 때문에 칼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로마 군단의 전법에서는 칼의 효과적 사용을 위해서 1인당 사방 6자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60~80인의 중대maniple 조직을 기본 전투 단위로 하는 새로운 바둑판식 진형이 고안되었다. (갈리아 부족이 로마를 침공한) 기원전 390년의 약탈 사태 이후 군사 개혁의 일환으로 제정된 이 새로운 전법은 로마의 공격적인 제국 건설 정책의 이루는 것이었다."(92-3)


2장 서양 중세와 군사 기술의 발전


"샤를마뉴, 즉 카를 대제(742~814)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과의 접경 지역을 정복하여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독일 전 지역과 발칸 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로마제국이 멸망한 지 약 3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유럽 내의 단일 제국이 출현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봉건제에 입각하여 영주들의 군역軍役을 활용했다. 807년에 반포한 법령을 통해 제국 영역 안에서 봉토를 수여받은 모든 귀족들은 일정한 군역이 의무로 부과되었다. 카를 대제의 군대는 초기에는 보병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기마병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갔다. 804년에서 811년 사이에 반포된 법령을 통해 자신의 모든 봉신들이 말을 탈 것을 의무화하고 동시에 관련된 장비들, 즉 방패·랜스·검·단검·활·전통 및 화살 보유에 관한 규정을 발표했다."(111)


"샤를마뉴가 (중)기마병 중심의 군대를 발전시켰지만 그렇다고 경기마병 또는 보병군이 경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기마병의 효과적 전력 생산을 위해서는 경기병과 보병과의 긴밀한 작전상 협조와 상호 조정이 필수적인 일이었다. 중기마병의 역할은 전투 개시와 함께 적군의 진형陣形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일단 진형이 붕괴되면 그 뒤를 이어 경기병과 보병의 임무가 이어진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가면서 중기마병의 지배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전사·귀족의 이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었다. 이 점은 중세 사회에서 기마 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중세 기사 중심의 군사 조직 구조는 모체 사회구조의 축소판이었다. 보병군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2급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감수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300년 넘게 지속되었다."(113)


"19세기 증기선이 출현하기 이전의 선박 동력원은 기본적으로 둘이었다. 하나는 노櫓를 젓는 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범선에서 이용되는 풍력이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범선의 경우 노동력이 최소한으로 들었기 때문에 선박 재료와 제조 기술이 확보만 되면 얼마든지 크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강약과 방향에 따라 운행에 제한을 받는, 즉 기동성이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중세 말에 와선渦旋 방향타가 장착·사용될 때까지 방향 조정은 선미船尾 좌우 양측에 설치한 노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 설정이 어려웠던 한계도 존재했다. 따라서 속도와 기민한 방향 조정에 승패를 걸었던 해상 전투에서는 범선보다는 노로 운행하던 갤리선이 기술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갤리선은 상당히 오래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투선이 아닌 경우에는 보다 경제적인 범선이 많이 이용되었다."(125-6)


3장 화기혁명과 근대의 시작


"전쟁 관련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또는 전기轉機를 들라고 할 때 화기 또는 화약 무기의 등장을 제치고 먼저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화기는 전쟁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쟁의 주체인 국가 또는 정치 공동체의 역사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1500년 경부터 뚜렷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근대국가의 등장과 정착은 화약과 화기의 등장을 배경으로 한 전쟁 수행 양식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약이 처음 발견되었던 중국의 경우도 통일 제국 질서의 형성과 붕괴와 화약·화기 제작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중국에서 화약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800년대의 일로 이때는 당나라가 붕괴되고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또한 화기가 처음 제작된 1100년대는 송나라의 멸망에서 원나라의 성립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혼란의 시기와 일치한다."(137-9)


"과거의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높은 화기의 보급으로 예상치 못한 하나의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유혈적인 교전의 빈도가 줄어들고 전쟁의 진행 속도도 전반적으로 느려지게 되었다." "잘 훈련된 병사는 쉽게 소모되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투를 피하려고 했다. 대신 야전 참호나 성채 뒤에 숨어 대기하면서 보급품이 동나고 급료가 모자라 적군이 자동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당시 모든 전쟁 당사국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병사들은 전투 수단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새로이 확보된 영토나 점령한 지역 내의 민간인 인구들을 통제하고 또한 외부 공격자를 퇴치하는 등 유리한 위치를 지키는 수단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따라서 성채가 대규모 군대의 본거지로 사용되는 양상을 미루어보면 "대포의 출현으로 중세의 성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158-9)


"성채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공격군의 규모도 대단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공성 기간의 장기화에 따른 병참 및 재정 지원의 규모도 그에 비례하여 커졌다." "이제는 군대를 조직 및 보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정 능력이나 관료제적 조직 능력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국가(근대국가)만이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제국의 지위를 추구하던 스페인-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러한 시도에 걸맞은 재정 능력 및 군사력의 뒷받침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제국의 지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 상위의 제국도 아니고 하위의 영주국도 아닌 근대국가만이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조직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장기간의 투쟁 끝에, 구체적으로 백년전쟁 이후 만들어진 모든 갈등을 압축해서 전개되었던 30년전쟁의 종식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점은 주권sovereignty의 개념을 통해 요약되었다."(160-2)


"육상 전투와 관련된 주요 기술적 변화는 화기의 보급에서 비롯되었지만 해상 전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선박 자체 및 그와 관련된 항해 기술에서 발견된다. 1300년을 전후하여 북서 유럽에서 주로 사용된 코그선은 지중해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때 갤리선을 바탕으로 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독점적 해운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인들에 의해 침투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쪽의 선박과 남쪽의 선박은 서로 기술적으로 섞이게 되었는데 사각돛과 삼각돛이 서로 혼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 그 결과 모든 선박은 높은 기동성과 추진력을 고르게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3개의 돛을 장치한 전장범선full rigged sail이 출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카락carrack선과 카라벨caravel선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항해했을 때 사용한 배는 한 척의 카락선(산타 마리아 호)과 두 척의 카라벨선이었다."(171-3)


"1600년 전후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럽의 주요 해운국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가 있었다. 이들은 무역 전쟁국이면서 동시에 군사적 경쟁국, 즉 교전국이었다. 그런데 이 교전의 당사자는 국가 즉 해군이 아니었다. 원래 해군은 국가조직의 일부로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 점은 같은 시기 독일에서의 육상 전력이 개인적 군사경영인military entrepreuner에 의해 조직·보유되고 또한 사용되었던 점과 유사한 현상이다." "즉 해군력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아닌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에게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군사 활동을 인정하는 (적선)나포 면허장letter of marque이 발급되었는데 이 개인 소유의 전투 활동을 사략私掠, privateering 그리고 그 선박은 사략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활동했던 유명한 사략선 지휘관들은 1588년 스페인과의 해전 때 영국 해군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결국은 영국 해군의 창립자가 되었다."(175)


4장 절대주의 체제 : 무력 운영의 관료제화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주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근대 국가 외에 다른 모든 종류의 조직이나 개인의 폭력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주권국가 지위의 확보나 인정은 국가 간의 상호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주권국가들 사이에만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그 자체가 불법화되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30년전쟁이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참혹상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바탕으로 유럽은 당분간 평화 시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장 눈앞에 둔 전쟁은 없었으나 새로 마련된 평화 질서가 기본적으로 어느 때라도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놓이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대비는 각국의 필수 작업이 되었다. 각국은 내부적 제도의 정비와 경제·재정 능력의 확충 작업에 전념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에서는 국가 건설state-making 작업 또는 중상주의mercantilism 정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87)


"(대규모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전투기계로 탈바꿈한 보병 병사들을 기반으로 싸우는 전투 방식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산물이었음을 서양 학자들은 특히 강조한다." "이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적 훈련방식은 원래는 네덜란드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오라녜Orange 가문 출신으로 네덜란드 육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그는 당시 계속 개량되고 있던 화기로 무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효율적 전력의 생산을 위한 각종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 혁신성의 핵심은 군대를 공업 생산단위 조직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 있다." "반복 훈련을 통해 개개인의 병사는 평균적 숙련도를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 무기와 병력 규모를 표준화하면 개별 전투 단위들이 만들어내는 전투 효과를 미리 측정할 수 있었다."(193-4)


"기존의 통신장비, 도로망이나 병참조직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여러 단위 부대로 나누어 다른 경로를 통해 동시에 진격하는 부대의 구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단위 부대들은 자기 충족적인 항구적 전략 단위로 구상되었다. 자기 충족적이라는 말은 단일 지휘관에 의해 통솔되는 다양한 전문 부대, 즉 보병·기병·포병과 같은 전투 부대 외에 공병·의무병·통신병 같은 지원 부대들을 함께 꾸린다는 점을 지칭한다. 이러한 부대는 독자적인 전투 조직으로서 전체적인 전략 구상과 관련해서만 상급 지휘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친숙한 사단division의 출현이다." "뒤에 규모가 더 커지면서 군단corps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이 단위 부대들의 작전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총참모부general staff도 생겨나게 된다. 사단을 기초로 하는 작전을 처음 시도한 것은 7년전쟁 중인 1760년을 전후하여 독일 내에 진주한 프랑스 군대였다."(201-2)


"대포가 해상 전투의 중심 무기로 등장하면서 전투 방식도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활이나 소수의 대포 등을 사격한 후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면 적선에 승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기본 전법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적선에 승선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제는 대포로 적선을 무력화하는 방식을 우선으로 택하게 되었다. 새로운 포전砲戰 중심의 전투에서는 단위 시간 안에 될수록 많은 탄환을 적함에 명중시켜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살상하고 돛대나 다른 장비에 손상을 주어 적함의 기동력을 뺏는 편이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 전투 방식은 많은 수의 대포를 동시에 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대포를 뱃전舷側에 설치했다. 전투 시에는 참가하는 함정 모두가 1열로 도열하여 나란히 배치된 대포를 적함의 뱃전을 향하도록 했다." "또한 적함의 선체에 더 큰 손상을 주기 위해 직경이 큰 탄환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대포의 크기도 점차로 커지게 되었다."(218-9)


"최강의 해군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 조달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언급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영국 왕위계승 전쟁의 와중(1694)에 창립된 영국은행을 통한 '금융혁명'이었다. 전비에 사용될 자금을 자본시장을 상대로 한 국채 발행을 통해 마련하는 이 독특한 재원 조달 방식은 선진적 금융시장과 성숙한 상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건강한 조세체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인으로는 왕성한 무역 활동과 이것을 가능케 하는 식민지의 존재였다." "7년전쟁 때 소요된 영국의 군사 재정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의 세 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때의 두 배가 되었다. 이 비용을 모두 국내 조세로 충당할 수 없게 되면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고율의 조세 부과를 통해 새로운 재원을 찾았다. 이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른 지역이 미국이었다.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미국 식민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이 야기되었다."(227-8)


5장 산업혁명과 산업화


"철도가 군사용으로 잘 활용된 사례로 첫손에 꼽히는 일은 1846년 러시아의 병사 이동 작업이다. 이때 러시아는 체코의 우헤르스케 흐라디슈테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1만 4500명의 병력과 관련 장비를 철도를 이용하여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이로써 철도의 군사적 잠재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자체로는 군사 무기가 아닌 철도 수송은 당시까지 이루어졌던 무기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전쟁 수행에 미쳤다. 이것은 철도가 전략 수립에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핵심 요소인 힘, 시간 및 공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동 및 배치 가능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는 점에서 힘이 증가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더 큰 규모의 병력을 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은 군사력이 관장하게 될 지리적 공간의 엄청난 확장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철도의 또 다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251-3)


"군사적 관리의 대상에는 병력의 충원과 훈련, 철도 시스템의 정비, 필요한 테크놀로지의 개발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맹체제의 정비 등 한 나라의 군사적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관리는 전쟁 발발 시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견되는 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미리 준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계획war planning'이라는 개념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본격적 산업화 단계에 와서 전쟁 계획 노력은 대외 정책, 산업 정책, 인구 정책 등 한 국가의 국제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의 정책 조정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은 단순히 군인만의 업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일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이 사회의 중요한 업무로 올라섬에 따라 사회 조직 전반이 군사적 목적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이른바 군사지상주의가militarism가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257-8)


# 대전략grand strategy : 과거의 전략이 ‘전선의 결정적 지점에 최대의 힘을 집중하는 방안’이라는 의미였다면, 여기에 ‘전선에서 후방에 이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가 추가된 군사 전략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군사 분야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해군과 관련해서 볼 때 육상전에 비해 한층 더 심대했다. 해군의 경우 이동 수단인 선박은 그 존립의 물리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육군에 비해 더욱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육군의 경우 이동 수단이 없이도 싸움이 가능하지만 해군의 경우 선박이라는 이동 수단 없이는 해상 전투 또는 해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해군의 존립 기반인 선박 관련 기술 전부를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해군 기술의 변화는 세 개의 기본적·기술적 사항, 즉 선박의 재료, 선박의 동력원 그리고 무기라는 측면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재료 면에서는 목선에서 철선으로, 동력원 면에서는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그리고 무기 면에서는 작열탄의 채택이라는 점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졌다."(271-2)


# 작열탄 : 폭약을 내장한 탄환


"돛의 제거는 함포의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두꺼운 적함의 철갑을 관통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함포의 크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한 개의 무게가 60톤 또는 그 이상까지 나갔다. 이와 함께 함포의 수는 줄었고 동시에 과거와 같이 현측에 설치하지 않고 선회포자barbette로, 다시 뒤에는 회전포탑turret으로 바뀌었다. 함포의 위치가 바뀌게 된 것은 현측에 설치된 함포의 경우 한 방향으로밖에 사격할 수 없어 목표가 바뀌면 선박 자체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동력원으로서 바람이 포기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점이 생겼지만 전략적인 면에서는 무한정한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기동성 면에서 많은 손해가 따랐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별로 중요시되지 않던 (연료 재공급을 위한) 해외 해군 보급기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187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해진 해외 식민지 확장 노력은 이 해군 기지의 확보와도 무관하지 않았다."(277-8)


미국 해군대학의 해군 전술 교관이던 머핸은 1890년에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저술한다. "그의 논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해군력을 바탕으로 하는 제해권의 확립 없이는 세계 지위로의 부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해양력sea-power, 상업(무역) 및 식민지는 국가의 번영에서 불가결한 세 가지 기본 요소들인데 이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해양력은 단순히 해양을 지배하는 군사력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교역과 운송도 포함한다." "머핸의 논지는 마치 예언가의 주장처럼 많은 신봉자들을 낳았고 공개적인 제국주의 정책의 채택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여 열국의 해군 건설 정책을 고무했다." "독일의 해외 확장에 소극적이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해외 정책에 상당한 열의를 가졌던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머핸의 저술은 그의 의지를 정당화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288-9)


# 영국 : 전통적 외교정책인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원칙을 포기하고 기술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드레드노트함을 건조


6장 양차 대전 : 과학 기반 군사 기술의 급속한 발전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출현한 새로운 군사 기술로 볼 때 그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막 진행 중인 전쟁의 긴박감 속에서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기술 개발에 전쟁의 주체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은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거나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과거와 같이 단순한 시행착오나 우연한 발견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테크놀로지의 과학적 원리의 탐구와 적용을 통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일례로 전쟁의 3대 요소인 힘, 시간, 공간의 의미를 모두 뒤바꾼 철도가 철로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 것과 달리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는 어느 정도의 조건만 주어진다면 도로를 벗어나서도 운행할 수 있었다." 내연기관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전력화는 탱크로 실현되었다.(293-4)


"항공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전쟁에서의 승패는 기본적으로 전투장에서의 대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투 현장을 넘어서 후방 지역을 공격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정치혁명 이후 전선에서의 대결을 떠받치는 힘은 사회 전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모든 산업 능력과 경제 능력이 전쟁 노력에 투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항공기의 출현은 그러한 능력을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전략폭격' 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전쟁에서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더는 큰 의미가 없어지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전략폭격의 등장으로 전/후방 및 전투원/비전투원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점은 이 전략폭격의 개념을 더욱 확대시킨 현대 핵전략의 기본 전제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 이론을 가능케 하는 기초적 사실이 되면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310-1)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의 구조를 과거의 정치와 근본적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양식을 바꾼 첨단 무기를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컴퓨터 기술과 핵폭탄이 될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만 해도 적군의 암호 해독이라는 필요성을 군대가 먼저 갖게 되고 그 해결책을 위해 수학자들의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핵폭탄의 경우는 그것의 가능성부터 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핵폭탄의 개발은 군대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소 외의 다른 어떤 사회 조직과도 무관한 순수 자연과학, 특히 엘리트급 핵물리학자들의 초국가적 연계망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핵의 문제는 정치나 군사와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이론적 문제였다. 아무도 군사와의 연관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를 완전히 초월하여 자신들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던 물리학자들의 세계 속에서 핵물리학 학문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325-6)


7장 냉전 체제와 첨단 기술 경쟁


"과거와 비교하여 핵 시대에 와서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핵무기의 효능을 무효화하는 대항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의 지속적 개발의 사이클이 중단된 것이다. 핵무기에 대한 결정적 방어 수단으로 제출된 것은 다른 핵무기이다. 핵무기가 다른 핵무기에 대한 유일한 방어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핵무기가 갖는 엄청난 파괴력과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핵 보복이 만들어내는 더 엄청난 파괴적 결과에 대한 이론적 상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핵무기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킴으로써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즉 억지deterence에 있다. 실제 핵무기에 대한 효과적 방어 수단은 일단 먼저 이루어지는 핵 공격에 살아남은 후 여전히 남아 있는 핵무기를 바탕으로 보복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없다." "이것이 2차 대전 후 미소 간의 핵전략의 근간으로 자리 잡은 '상호확증파괴'라는 군사적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다."(353-4)


"유도무기의 급속한 개발은 1960년대 베트남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지대공 미사일surface-to-air missile, SAM은 특히 소련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고 그 실험은 주로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기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의 군사적 효과가 미미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부정확한 폭격과 베트남의 방공망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전체를 통해 미군 항공기가 1500대 이상 격추되었는데 그 95퍼센트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공포의 위험을 피하면서 시도된 항공기 폭격의 명중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까지 미군 폭격기의 명중률은 5~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페이브웨이paveway라는 이름이 붙여진 레이저 유도 폭탄이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소위 스마트 폭탄이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레이저 유도 폭탄 덕분에 1972~1973년의 폭격 명중률은 48퍼센트로 급속히 개선되었다."(359-60)


"전자 무기의 군사적 이용은 2차 대전 이전에도 시도되었지만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것은 전자부품의 소형화 덕분에 가능하게 되었다. 진공관 대신에 트랜지스터가 사용되었고 수많은 부품들은 납땜이 아니라 실리콘 칩에 인쇄된 형태로 제조되기에 이르렀다." "현대 전쟁의 기본 양상이 되고 있는 전자전의 경우도 다른 모든 종류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과 무기가 계속적으로 연구됨으로써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낡은 것이 된다. 특히 새로운 무기에 장착되는 전자기기는 다른 무기들에 비해 보다 쉽게 탐지되거나 파괴되기 쉬운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 무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무기가 바로 "전자기파동을 이용한, EMP탄 또는 전자폭탄e-bomb이다. 수소폭탄의 실험 때 모든 전자기기의 작동이 중단 또는 교란되었던 현상을 바탕으로 연구·고안된 이 신형 무기의 위력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전자화된 현대 무기에 대한 중요한 위협이다."(363-5)


"현대의 세계적 군사 질서와 주도국의 군사 전략 틀 자체를 고려할 때 육상전과 구분되고 그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상 전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 2차 대전 종식 후 과거와 같은 해전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었던 포클랜드 전쟁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없었다. 핵폭탄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대륙 너머로 발사할 수 있게 된 현대적 상황에서 공격자와 피공격자 사이에 놓여 있는 바다와 산악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더 이상 장애물도 아니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장으로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력은 발사되는 화력의 포대platform가 선박이라는 점에서 그 특수성이 인정되는 군사력을 의미할 뿐이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항공기나 대륙간탄도탄 같은 지상 발사 무기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과거 대형 전함들이 점차 퇴조하게 되고 대신 항공기를 작전 대상 지역 근처에 운반하는 항공모함이 해군의 주력이 되었다."(380-1)


"전략핵무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주력함은 항공모함에서 핵 추진 잠수함 쪽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은 잠수함발진탄도미사일SLBM 발사가 가능한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조지 워싱턴 호를 1959년 12월에 취역시켰고 1960년 7월에는 이 잠수함에 적재된 최초의 SLBM 폴라리스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이 핵 추진 탄도탄 발사용 잠수함은 미국의 2차 핵 가격력의 중심을 이루는 초기의 핵잠수함이었다." "무기를 볼 때 과거의 잠수함들은 어뢰 발사가 주된 무기였는 데 비해 핵잠수함들은 한 척당 20기가 넘는 (다탄두 발사 탄도탄을 갖춘) 트라이덴트 SLBM을 장착하고 있다. 이 트라이덴트 탄도탄은 일부가 유도guided 미사일로 교체되었고 일부 함정에는 각기 7발의 토마호크를 장착한 22문의 발사장치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첨단 무기로 볼 때 잠수함은 단순히 해군의 무기가 아니라 육·해·공 구분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초강대국의 중심적 전략무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383-4)


결론 군사 기술의 고도화와 새로운 전쟁 양상의 출현


"실제 전쟁의 맥락 속에서 어떤 특정 기술의 내재적 우월성은 큰 의미가 없다. 크레벨드 교수가 강조하듯이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무기나 기술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이러한 장비나 무기가 적군이 사용하는 장비와 무기의 관계 속에서 갖는 '적합도fit'이다. 베트남전을 다시 예로 든다면 미군은 상대편의 장비와 무기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가용한 모든 첨단 무기를 동원했던 반면에 북부 베트남군은 이러한 미군에 정면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미군의 첨단 무기의 효과성을 완전히 무색케 만들었다." "게릴라전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나 그에 의해 지원을 받는 정규 정부군을 상대로 싸울 때 재래전의 방식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약자가 승리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전쟁 수행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패배만을 피하면 되는 측과 반드시 승리를 얻어야 하는 측 사이의 전쟁은 일찍이 아롱 교수에 의해 '비대칭전쟁'이라는 이름을 얻은 바 있다."(395-7)


"재래식 전쟁의 기본 틀을 벗어난 게릴라전의 핵심적 특성은 기술적으로 우월한 적군을 상대로 우호적인 민간인 집단을 보호막으로 하면서 고도의 기동성을 바탕으로 기습 공격 위주의 임시적 전투 방식으로 맞선다는 점에 있다. 이 기습 공격이 초기 단계에서 취하는 가장 빈번한 공격 형태에는 테러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상위 전략 개념의 하위 전술로 여겨졌던 게릴라 전법이 점차로 독자적인 전략 원리로 독립되었듯이 게릴라 전술의 초기 단계의 부분으로 고안되었던 테러가 다시 게릴라 전략의 부분적·전술적 수단의 지위를 넘어서서 독립적 전략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20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테러리즘의 주체는 국가 또는 그것에 비견될 만한 조직에 의한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 범죄 집단 같은 활동 양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비대칭성을 바탕으로 테러리스트 조직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399-401)


# ISIS : 국가화된 테러리즘(국가와 테러리즘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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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과 일본 대학교양총서 2
조경달 지음, 최혜주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1장 일본의 군사 지배


"조선은 무엇보다도 강대한 군사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병합과 함께 한국주차군은 조선주차군으로 바뀌고, 군사령관은 총독의 통솔하에 두었다. 의병전쟁은 대략 종식되었지만, 잔병활동은 여전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주차군은 분산주의를 취해 각지에 소부대를 주둔시키고, 의병의 잔병을 뿌리째 '소탕'하려고 했다. 잔병은 평안남도나 강원도의 산간부에 숨어서 출몰하고 있었는데, 1915년경까지는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함경북도 나남에는 제19사단, 용산에는 제20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1921년까지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사이 1918년에 주차군은 조선군이라고 개칭되었다. 또한 경상남도 진해에는 1916년에 해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병합 초기의 총독정치는 당시부터 무단정치로 불렸다. 그것을 가장 상징하는 것이 헌병경찰제도다." "헌병대는 군사경찰로 육·해군대신의 지휘를 받고, 그 사령관은 '내지'의 헌병대 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16-7)


"식민지 조선 최대의 지주는 1908년 12월 28일에 설립된 동척(본점·경성)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1만 7714정보의 토지를 지급받아 발족한 동척은 그 후 1913년까지 4만 7148정보의 토지를 매수했고, 1919년에는 7만 8520정보를 소유한 거대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사업에서 금융업은 중요한 부문이었지만, 토지의 집적은 토지를 저당으로 취하는 대금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은 사적인 토지매매에도 간섭해 토지의 매각을 용이하게 허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농민에게 매각 기회를 잃게 하고 도리어 농민의 곤궁화를 촉진해 대금업을 하는 동척에게 유리하게 움직였다. 국책회사 동척은 스스로가 지주경영을 실시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 농업이민을 유치하는 데도 노력을 경주했다." "당초에는 자작농·소작농·지주를 각각 모집했지만, 1914년 이후에는 자작농과 지주만 되었고, 1921년 이후에는 10정보 이상을 소유하는 지주의 육성만을 다루게 되었다."(28-9)


"총독부의 동화정책은 국적문제에서 기이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에는 마지막까지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준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일본국적법이 적용된 타이완이나 카라후토(사할린)와는 대조적이다.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국적이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조선인은 제3국에의 귀화가 영원히 금지되었다. 예를 들면 귀화하는 것이 가능한 조선인이라도 이중국적인 채로 '일본신민'으로 취급되었다. 위험분자를 방임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본래 제국헌법이 시행되지 않은 이상 조선 반도에 있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이 있었지만, 그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 등은 친일파 조선인의 명예직이었고, 무단정치기에는 회의가 개최된 일도 없었다." "참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인에게 연동해서 일본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재조일본인의 큰 불만이 되었다."(34-6)


2장 3·1운동


"당초 3·1운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3대 원칙으로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거사 단계가 되어 학생·민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에서 일원적이고 대중적으로 운동을 추진해가는 것을 그만두고 비폭력만을 표방하였다. 결행일이 2일 빨라진 것도 장의 행렬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3일에 결행하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학생을 쫓아낸 후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고 한용운의 인사와 만세삼창만을 거행하고 이어서 축배를 들려고 할 때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미리 당국에 자수를 신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대표가 결국 나타나지 않았던 파고다공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학생과 일반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오후 2시가 지나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가 고창되어 태극기를 선두로 시내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시내 곳곳에서 독립연설을 거행하면서 3대로 나뉘어 시위행진을 실시했다."(55-6)


"대부분의 경우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에 시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의 작법이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이나 연설 뒤,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술기운으로 용기를 내어 참가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장시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받은 뒤에 무기를 빼앗아 항쟁으로 이행해갔다." "민중사적 시점에서 볼 때 민중은 민중대로 자율성을 발휘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점과 헌병의 숙사 등을 습격해도 물품은 거의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이었고, 절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보인 강제적 참가의 논리를 가지고 이루어져 만세를 환호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았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민란의 작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을 욕하는 만세(山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60-1)


3장 문화정치로의 전환


"3·1운동의 결과 무단정치의 한계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3·1운동의 흥기는 총독부가 조선 민족과 공유의 정치문화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서 최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조선 민족과 공유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이 모색된 통치책이 일시동인에 근거하는 내지연장주의를 슬로건으로 한 문화정치다. 이것은 조선 지배를 하는 데 조선인의 협력을 얻어서 간다는 정치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이른바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가 되었지만 이러한 방향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내지연장주의는 머지않아 조선을 '내지'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조선인을 일본인과 완전히 같게 하여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동화주의는 점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에 일정한 배려를 보였지만, 조선인을 서서히 일본에 심복시켜 일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동화하려는 것이었다."(77-8)


# 문화통치기의 주요 양상

1. 헌병경찰제도 폐지 : 보통경찰로 전환 및 증원, 조선인 순사보는 순사로 승격

2. 지방제도 개편 : 의결권 없는 각종 지방의회를 허용, 지방 유력층 가운데 협력자 물색

3. 공론사회 형성 : 언론·출판의 자유 완화로 조선어 신문·잡지 다수 간행, 각종 결사체 급증

4. 종교정책 전환 : 공인 종교(신도·불교·기독교) 외에 신흥 종교를 '종교 유사 단체'로 공인

5. 조선사 찬탈 : 총독부 주도로 〈조선사〉 편찬(민속학자 이능화와 역사학자 최남선 참여)


6. 청년회운동 :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청년회 활성화(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주요 통로)

7. 민립대학 설립운동 : 총독부에서 관립대학을 추진하면서 경성제국대학관제 공포(1924.5)

8. 물산장려운동 : 알맞은 조선 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무산계급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여 쇠퇴

9. 회사령 철폐 :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총독부에 협조하는 합작기업 위주로 증대


"〈민족개조론〉은 지배계급에게는 '허위'와 '사욕', 일반 민중에게는 '게으름' '겁이 많고 나약함' '신의가 없음' 등의 도덕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선 민족 재생의 길은 그 도덕적 결함을 극복해서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광수는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교화해 계속해야 할 영속적 과업이라고 했다." "이광수의 조선민족관은 총독부의 논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너무나 자학적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1922년 10월에 수양동맹회를 결성해 진심으로 민족개조의 과업에 착수해갔다. 주자학에서는 학문과 덕행을 쌓은 뛰어난 인격자가 뛰어난 정치를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덕을 겸비한 인격자가 교화의 주체다. 안창호나 이광수가 의식하고 있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러한 주자학적 전통의 선상에서 민족 엘리트의 육성을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95-6)


4장 민족운동의 전개


# 문화운동과 민중

1. 천도교와 기독교의 운동 : 천도교청년회에서 종합잡지 『개벽』 간행(1920.6), 기독교계는 교육 사업에 주력

2. 여성운동 :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1919.3~4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6)와 조선여성동우회 창립(1924.5)

3. 형평운동 : 백정의 인권 향상과 차별 철폐를 목표로 형평사 설립(1923.4)

4. 농촌계몽운동 : 천도교 주도로 조선농민사 창립(1925.10)

5. 생활개선운동 : 구관비판과 생활근대화를 촉구하는 각종 모임 창립

6. 브나로드 운동 :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해서 벌인 문자보급운동(1931~1934)


# 사회주의운동과 민중

1. 사회주의 단체 결성 : 다양한 연구서클과 노농조직이 난립하다가 조선노동총동맹으로 합류(1924.4)

2. 두 개의 공산당 : 이루크츠크 공산당 한인지부(1918.1)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1918.6)으로 분열

3. 조선공산당 탄생 : 코민테른의 통합 지시로 조선공산당 결성(1925.4)

4. 6·10만세운동 : 순종 장례식(1926.6.10)을 기해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력 상실

5. 조선공산당 해체 : 당국의 끈질긴 탄압과 내부 분열로 조직이 와해되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1928.11)


"조선의 사회주의는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청년과 지식인 사이에 퍼져갔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평등주의나 평균주의를 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받침 접시가 되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 중에는 지주의 자제나 양반 가문 출신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부수하는 명사의식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덕망가로 혹은 교양인으로 자격이 있는 것을 경쟁하려고 했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사(士)', 즉 지식인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영웅주의가 있었고, 민중을 소리높이 부르짖으면서도 민중으로부터 유리하는 지식인의 관념적인 모습이 있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소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작쟁의의 전형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소작쟁의라고 불리며 획기적인 사건이 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岩泰島)의 농민운동이다."(126-7)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년 8월 결성된 암태도소작인회가 소작료를 4할로 할 것을 요구하고 최대 지주 문재철이 이를 거부하면서 폭력충돌이 벌어졌으나 1924년 8월말 경찰의 중재 속에 소작인회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서 화해 성립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문화정치하의 자치운동과 문화운동을 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혁명"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국가주의자였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무정부주의자로 변하여 사(士)는 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정치는 민을 위해서라도 그 실천주체는 어디까지나 사(士)가 아니면 안 되지만, 신채호는 유교적 민본주의가 가진 평균주의나 평등주의의 이면을 받침 접시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면서, 사(士)와 민(民)의 논리에서 그것을 역전시킨다. 그것은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참으로 민중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그들이 의거하려고 해도 의거할 조선 민중은 간도 지방 등에 한정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진화는 분하게도 실천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133-4)


5장 식민지의 근대


"성곽 도시였던 경성은 그 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청계천에 의해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왕조 시대에는 각각 북촌·남촌이라 불렸다. 북촌은 상류 양반이, 남촌은 하급 양반이 사는 지역이었다. 남촌은 남산 기슭에 있었고, 일본인은 여기에 있는 진고개라고 하는 배수가 나쁜 장소에 살기 시작해 서서히 개발을 추진해갔다. 총독부는 1914년에 이제까지의 행정구획인 5부 8면제를 고쳐서 주로 조선인 거주지역의 북촌에는 동제,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에는 정제(町制)를 펼쳤다. 거리의 발전 방법도 양극적으로 진행되어 상업시설과 극장·영화관 등의 오락시설도 일본인용과 조선인용이 각각의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거리는 남의 본정통이나 황금통이 중심이고, 조선인 거리는 북의 종로통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프라 정비나 경관의 근대화 등은 압도적으로 남촌이 우선적으로 추진되고, 북촌에서는 상하수도 및 전기·가스 등의 보급이 늦어져 진행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5일에는 남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창건되었다."(148-150)


"경성 거리는 백화점 외에도 다방과 카페·빠·영화관 등으로 북적거렸다. 그 주요 소비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시민공원인 창경원(구 창경궁)과 남산공원 등에서 자유연애를 즐겼다. '그/그녀'들은 일본 문화나 서구 문화의 주요 소비자였고, 일본 가요나 서양 음악에 친숙했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기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들은 다방의 마담이나 가수·여우 등이 되었고, 자산가·지식인·예술가 등과 교제하며 근대 문화 전파의 중개자 노릇을 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부르주아'의 아이들이었고, 이기주의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식인도 역시 모던보이·모던걸처럼 근대문화를 강하게 동경했다."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인텔리를 자처했고, 전문학교나 대학을 나오면 아주 으스대는 풍토가 일반적이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도 강했는데, 일본에 유학하는 자 대부분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54-5)


"빈곤한 민중 사이에서는 무속이나 신흥종교는 근대의학에 대체할 기능을 일관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총독부가 근대성의 침투를 폭력적으로 도모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하나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흥종교는 치병에 그치지 않고 구제를 말했기 때문에 민중세계에 큰 힘을 가졌다. 종말종교는 민중의 안타까운 구제원망의 반영으로 있었지만 신흥종교의 대부분은 표면적으로는 통속적인 도덕을 부르짖는 한편, 이면에서는 종말의 도래와 교조에 의한 신 왕국의 탄생을 말한다." "신도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가난한 밑바닥 민중이었지만, 그중에서는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친일행위도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의 배격을 주장하는 각파 유지연맹에 자금을 원조하고 함께 할동한 적도 있었다. 종말종교는 민족주의적임과 동시에 그 구제사상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상태도 양의적, 다의적이었다."(162-3)


6장 문화정치의 종언과 일본인


"1931년 6월 17일 취임한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농공병진' 정책을 취했다. 농업에서는 미작·전작(畑作) 중시의 농업을 유지하면서, '남면북양(南棉北羊)' 정책과 '북선개척' 정책이 수행되었다. 작부 면적 50만 보, 실면 생산 6억 근을 목표로 한 '남면' 정책에서는 이전부터 있는 공동판매제를 강화하여, 염가 매상으로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북양' 정책에서는 면양 10만 두를 목표로 농가에 면양 사육을 강제했다. 이들 정책은 일본의 섬유산업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지만, 면양의 경우는 군사양모에 이바지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북선개척' 정책에서는 백두산 지역의 삼림 80만 정보의 벌채가 계획되어 이민장려의 미명 아래 화전민을 구축했다. 공업에 대해서는 슬로건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공업화는 군수공업의 필요성과도 어울려 서서히 중공업에 비중을 옮겨가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182)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은 그 목표로 ①국체관념의 명징, ②경신숭조사상의 함양, ③보은·감사·자립정신의 양성을 내걸었다. 거기에는 유교와 함께 신도·불교·기독교의 공인종교의 부흥을 호소하면서, 실은 국가신도 체제에 그것들을 짜넣어 국체관념을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공인종교의 부흥을 내거는 한편으로, 종말을 부르짖는 신흥종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로 임했다." "문화정치의 특징은 총독부 비판에는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도 마음의 자유는 묵인하려고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 탓도 있어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종교 유사의 단체'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그 공인은 문화정치 도래의 중요한 표지였다." "문화정치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심전개발운동의 개시야말로 문화정치 종언의 표시로 보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문화정치의 시기는 말할거리가 많지만 불과 15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193-4)


7장 전시체제와 조선


"(중일전쟁 발발 후 가속화된) 대륙병참기지화란 '내선일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일만지(日滿支, 일본·만주·중국) 블록의 전제조건이었으며, 조선은 '제2의 내지'  '내지의 분신'이 되었다. (1936년 8월 5일,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기치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내선융화' 표어를 진척시켜 '내선일체'로 하고, 차별 없는 조선을 맹렬하게 선전했다. 여기에 조선의 상층사회와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본제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한 기대의 고조에는 일본제국의 강대성에 새삼스럽게 압도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기대를 팽창시킨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자존의식이 싹터간다. '내지'가 제일선의 지위에 있는 데 대해서 조선은 제이선의 지위에 있다고 하는 아(亞)제국의식이다. 이 의식은 식민지인이라는 것을 망각해 자기를 일본제국의 정식 일원으로 규정하고, '이등신민'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끝없이 '내지신민'에 근접해가려고 한다."(210-1)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벌써 그 반달 후인 7월 22일에 정보통제와 국가 관념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활동을 기초로 해서 중일전쟁부터 1년 후인 1938년 7월 1일, 총력전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개시된다." "이 운동은 연맹조직의 정비를 통해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고, 근로보국의 정신을 앙양시켜 거국일치해서 시국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발족에 호응해서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운동으로 개편되어 조직명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직역연맹하의 애국반에서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하여 국기게양, 궁성요배, 신사참배, '국어'장려, 근로봉사,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214-5)


#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결정한 기본국책요강에 기초해 신체제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창립된 일본의 관제 국민조직


"(1939년 11월 10일, 개정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의 의도는 혈통지상주의의 조선적인 가(家)제도를 파괴해 일본적인 이에(家) 제도를 이입하고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의해 조선인을 포섭하려는 것에 있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던 지원병제나 시행예정의 징병제에 의해 조선인은 황군의 일원이 되지만, 황군은 문자 그대로 천황의 적자다. 일본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성명도 일본풍이 아니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가제도를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적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미나미 지로는 '내선결혼'도 이제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선전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해서 표창도 거행하고 있다." "결국 (신고를 마친) '설정 창씨'를 한 조선인은 80퍼센트 이상이 되었다. 창씨 소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폭풍과 같은 떠들썩함이었지만 20퍼센트의 조선인은 압력을 뿌리쳤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고 해도 조선 호적을 폐지해 일본 호적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220-1)


"당시 '내선일체'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몸도 마음도 피도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철저 일체론'이고, 현영섭과 이광수가 대표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황도'를 생활원리로 하면서도 이체동심에 의해 단결하면 좋다는 입장에 선 '협화적 내선일체론'인데, 조선지식인 대부분이 이 입장에 서 있었다. 전자는 단순한 황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 일본어만을 이야기하고, 문화적으로도 일본 문화를 완전 수용해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은 일본인과 혈통을 같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놀랄 만한 조선민족말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자는 황민화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조선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 같은 다문화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공체제론적이었고, 중화가 일본으로 대체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논의였다."(225-6)


8장 전쟁과 해방


"1941년 11월 28일에 한국독립당 주도의 임시정부에 의해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구체화되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보지를 균등'하게 할 것을 지향했다. 토지의 전면 국유화와 평등분배, 즉 토지혁명과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가 확인됨과 동시에 보통선거권, 남녀의 권리평등, 고등교육까지의 면비(免費) 수학 등이 선언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정책이 '선민(先民)의 명명(明命)'에 그 연원이 구해져, '성조(聖祖)의 지공분수(至公分授)의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해 선언되고 있는 점이다. 거기에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계승이 강하게 의식되어 그것을 진정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적 갈등을 한 18세기 이래의 실학의 전통이 생겨나고 있다. 본래 '대한민국'이라는 명칭도 왕조 시대부터 표방되고 있던 '민국' 이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흥의 조라고 불린 정조는 '민국' 이념을 명확히 했고, 그 이념은 고종의 정치에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중화민국'의 단순한 차용이 아니다."(250-1)


"1945년 8월 14일 밤 여운형에게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로부터의 회담 요청이 있었다. 다음 아침 6시 반경, 양자 사이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무조건 항복을 내용으로 하는 포츠담선언을 수탁했기 때문에 치안유지에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이다. 여운형은 ①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3개월분의 식량 확보,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불간섭, ④학생·청년조직에의 불간섭, ⑤노무자의 국가 신건설에 대한 동원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을 붙였고, 엔도는 이를 무조건 승낙했다. 여운형은 좌파인 동시에 민중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치안유지를 부탁할 인물로 가장 알맞은 인선이었다."(261) "한편 총독부는 모든 기관에 명해 대량의 서류를 소각했다. 그리고 9월 8일 엔도 정무총감이 인천에서 하지 중장을 마중했고, 다음 9일에 항복문서의 서명이 총독부에서 제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와의 사이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의 35년에 이르는 지배가 정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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