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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술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ㅣ 대우휴먼사이언스 24
박상섭 지음 / 아카넷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1장 고대의 전쟁 : 금속제 무기의 도입과 정치적 결과
"역사상 전차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던 첫 번째의 예로는 기원전 1700년경 힉소스인들에 의한 이집트 침공이 언급된다. 힉소스인들은 약 200년간 이집트를 지배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이집트에 전차의 제작술과 사용법을 전파했고 힉소스인들에게서 해방된 이집트는 자신의 군대에 전차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살상용 무기로 주로 합성궁과 도끼를 사용한) 힉소스인들은 투구와 전신용 갑옷을 착용했는데 이러한 무기들을 바탕으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에 비해 결정적인 군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나일강 상류 지역만을 지배하던 이집트 왕국은 기원전 1520년을 전후하여 힉소스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원래의 이집트 지역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했다. 이때 이집트는 전차 부대를 조직하여 사용했고 이와 함께 보병 부대도 조직했다. 이집트 병사들의 주된 무기는 도끼, 활, 곤봉, 창이었다. 특히 전차병과 궁수를 결합한 전법은 이집트에서 최초로 고안된 전투 방식이었다."(58-9)
"기원전 1500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에서 국가를 수립하고 있던 히타이트인들은 반복적인 가열과 담금질을 통해 단단한 철을 제작하는 제련법을 개발했다." "이에 따라 반드시 큰 나라뿐 아니라 소국들도 대규모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는 전쟁 발발 빈도의 극적 증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철기시대의 도래는 역사 속에서 관찰되는 첫 번째의 군사혁명을 가능케 했다고 평가된다." "이 점을 기반으로 메소포타미아 내 지역 국가들은 자신의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병사 징집제도, 즉 상설 징집군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징집군 제도를 바탕으로 출현한 다수의 병사들을 훈련, 지휘하고 또한 이들의 충성을 확보할 전문 집단이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핵심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써 군사 업무는 항시적인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 점은 철기시대에 의해 나타난 군사혁명의 또 다른 핵심적 양상의 하나로 지적된다."(64-6)
"아시리아가 한 번의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야전군의 병력 규모는 약 5만 정도였던 것으로 전문 학자들은 말한다. 이 군대는 보병군, 전차 부대 및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고 병사들 전부는 철제 무기로 무장했다. 병사 전부가 철제 무기로 무장했던 것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보병이 최대 다수를 차지했지만 아시리아 군대의 중추부는 전차 부대였다. 기본 전법은 힉소스인들과의 전투에서 이집트군이 채택한 것과 거의 유사하지만 전차 제조와 관련하여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었다. 예컨대 바퀴의 테두리는 철제로 바뀌었고 처음으로 바큇살spoke이 장착되어 바퀴의 마모도 줄어들고 회전 시의 안정성도 확보되었다. 이집트의 전차는 마부와 병사 1인 등 모두 2인으로 구성되었으나 아시리아에서는 후방 방어를 담당하는 또 다른 전사가 추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7세기에 이르면 후방 방어 병사를 없애는 대신 마부와 궁수를 보호해주는 2인의 방패잡이 병사가 탑승하는 4인승으로 바뀌었다."(68-70)
"그리스식 밀집대형 전투는 인간의 본능인 공포심의 극복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 공포심의 극복은 고도의 훈련을 통해 얻어지는 강력한 기율과 자신이 지켜야 할 공동체 즉 폴리스에 대한 애향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밀집대형은 단순히 전투대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방식이면서 도덕 원리의 근간이었다. 이러한 일은 당시 그리스 시민들 전부가 전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던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밀집 방진대형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식 전법은 전투 참가자의 정신적·신체적 자원의 소진을 전제로 전투를 벌인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둔한' 전법이고 또한 그럼에도 어떤 결정적 결론을 얻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를 갖는다. 이 한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거의 30년간 지속되면서도 어떤 분명한 결론이 나지 못하면서 치러졌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79-80)
"로마식 진형은 그리스식 팔랑크스와 마찬가지로 중무장 보병을 기반으로 한다. 팔랑크스 방식이 기본적으로 방어를 염두에 두고 고안된 것인 데 비해 로마식은 공격과 수비를 유연하게 전환시킬 수 있는 방식이었다. 팔랑크스 방식에서의 중심 무기는 창이었는데 로마 방식에서는 필룸pilum이라고 하는 창과 칼이 중심이었다. 원래 고대의 전쟁에서 칼은 창과 활을 보조하는 역할밖에 담당하지 않았으나 로마에 와서는 창과 함께 중심 공격 무기가 되었다. 밀집대형인 팔랑크스에서는 부족한 공간 때문에 칼을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로마 군단의 전법에서는 칼의 효과적 사용을 위해서 1인당 사방 6자의 공간을 필요로 했고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60~80인의 중대maniple 조직을 기본 전투 단위로 하는 새로운 바둑판식 진형이 고안되었다. (갈리아 부족이 로마를 침공한) 기원전 390년의 약탈 사태 이후 군사 개혁의 일환으로 제정된 이 새로운 전법은 로마의 공격적인 제국 건설 정책의 이루는 것이었다."(92-3)
2장 서양 중세와 군사 기술의 발전
"샤를마뉴, 즉 카를 대제(742~814)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과의 접경 지역을 정복하여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독일 전 지역과 발칸 지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로마제국이 멸망한 지 약 3세기 만에 처음으로 서유럽 내의 단일 제국이 출현했다.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마뉴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봉건제에 입각하여 영주들의 군역軍役을 활용했다. 807년에 반포한 법령을 통해 제국 영역 안에서 봉토를 수여받은 모든 귀족들은 일정한 군역이 의무로 부과되었다. 카를 대제의 군대는 초기에는 보병군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지만 지속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로 기마병에 더 많은 비중을 두어갔다. 804년에서 811년 사이에 반포된 법령을 통해 자신의 모든 봉신들이 말을 탈 것을 의무화하고 동시에 관련된 장비들, 즉 방패·랜스·검·단검·활·전통 및 화살 보유에 관한 규정을 발표했다."(111)
"샤를마뉴가 (중)기마병 중심의 군대를 발전시켰지만 그렇다고 경기마병 또는 보병군이 경시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기마병의 효과적 전력 생산을 위해서는 경기병과 보병과의 긴밀한 작전상 협조와 상호 조정이 필수적인 일이었다. 중기마병의 역할은 전투 개시와 함께 적군의 진형陣形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일단 진형이 붕괴되면 그 뒤를 이어 경기병과 보병의 임무가 이어진다.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가면서 중기마병의 지배적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고 이와 함께 전사·귀족의 이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었다. 이 점은 중세 사회에서 기마 귀족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에 의해 더욱 보강되었다. 중세 기사 중심의 군사 조직 구조는 모체 사회구조의 축소판이었다. 보병군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2급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감수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300년 넘게 지속되었다."(113)
"19세기 증기선이 출현하기 이전의 선박 동력원은 기본적으로 둘이었다. 하나는 노櫓를 젓는 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범선에서 이용되는 풍력이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범선의 경우 노동력이 최소한으로 들었기 때문에 선박 재료와 제조 기술이 확보만 되면 얼마든지 크게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강약과 방향에 따라 운행에 제한을 받는, 즉 기동성이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중세 말에 와선渦旋 방향타가 장착·사용될 때까지 방향 조정은 선미船尾 좌우 양측에 설치한 노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방향 설정이 어려웠던 한계도 존재했다. 따라서 속도와 기민한 방향 조정에 승패를 걸었던 해상 전투에서는 범선보다는 노로 운행하던 갤리선이 기술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갤리선은 상당히 오래 사용되었다. 그러나 전투선이 아닌 경우에는 보다 경제적인 범선이 많이 이용되었다."(125-6)
3장 화기혁명과 근대의 시작
"전쟁 관련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또는 전기轉機를 들라고 할 때 화기 또는 화약 무기의 등장을 제치고 먼저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화기는 전쟁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쟁의 주체인 국가 또는 정치 공동체의 역사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1500년 경부터 뚜렷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근대국가의 등장과 정착은 화약과 화기의 등장을 배경으로 한 전쟁 수행 양식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약이 처음 발견되었던 중국의 경우도 통일 제국 질서의 형성과 붕괴와 화약·화기 제작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중국에서 화약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800년대의 일로 이때는 당나라가 붕괴되고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또한 화기가 처음 제작된 1100년대는 송나라의 멸망에서 원나라의 성립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혼란의 시기와 일치한다."(137-9)
"과거의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높은 화기의 보급으로 예상치 못한 하나의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유혈적인 교전의 빈도가 줄어들고 전쟁의 진행 속도도 전반적으로 느려지게 되었다." "잘 훈련된 병사는 쉽게 소모되어서는 안 되는 자원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투를 피하려고 했다. 대신 야전 참호나 성채 뒤에 숨어 대기하면서 보급품이 동나고 급료가 모자라 적군이 자동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경향이 당시 모든 전쟁 당사국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병사들은 전투 수단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새로이 확보된 영토나 점령한 지역 내의 민간인 인구들을 통제하고 또한 외부 공격자를 퇴치하는 등 유리한 위치를 지키는 수단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따라서 성채가 대규모 군대의 본거지로 사용되는 양상을 미루어보면 "대포의 출현으로 중세의 성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158-9)
"성채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공격군의 규모도 대단히 커질 수밖에 없었고 공성 기간의 장기화에 따른 병참 및 재정 지원의 규모도 그에 비례하여 커졌다." "이제는 군대를 조직 및 보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정 능력이나 관료제적 조직 능력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국가(근대국가)만이 그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제국의 지위를 추구하던 스페인-합스부르크 제국은 그러한 시도에 걸맞은 재정 능력 및 군사력의 뒷받침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제국의 지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 상위의 제국도 아니고 하위의 영주국도 아닌 근대국가만이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조직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장기간의 투쟁 끝에, 구체적으로 백년전쟁 이후 만들어진 모든 갈등을 압축해서 전개되었던 30년전쟁의 종식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 사실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점은 주권sovereignty의 개념을 통해 요약되었다."(160-2)
"육상 전투와 관련된 주요 기술적 변화는 화기의 보급에서 비롯되었지만 해상 전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선박 자체 및 그와 관련된 항해 기술에서 발견된다. 1300년을 전후하여 북서 유럽에서 주로 사용된 코그선은 지중해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때 갤리선을 바탕으로 하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독점적 해운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및 독일인들에 의해 침투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쪽의 선박과 남쪽의 선박은 서로 기술적으로 섞이게 되었는데 사각돛과 삼각돛이 서로 혼합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변화이다. 그 결과 모든 선박은 높은 기동성과 추진력을 고르게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3개의 돛을 장치한 전장범선full rigged sail이 출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카락carrack선과 카라벨caravel선이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항해했을 때 사용한 배는 한 척의 카락선(산타 마리아 호)과 두 척의 카라벨선이었다."(171-3)
"1600년 전후에 이르는 시기까지 유럽의 주요 해운국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및 네덜란드가 있었다. 이들은 무역 전쟁국이면서 동시에 군사적 경쟁국, 즉 교전국이었다. 그런데 이 교전의 당사자는 국가 즉 해군이 아니었다. 원래 해군은 국가조직의 일부로서 출발하지 않았다. 이 점은 같은 시기 독일에서의 육상 전력이 개인적 군사경영인military entrepreuner에 의해 조직·보유되고 또한 사용되었던 점과 유사한 현상이다." "즉 해군력의 상당 부분은 국가가 아닌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로부터 공급되었다. 이러한 개인 선박 소유주/지휘관들에게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군사 활동을 인정하는 (적선)나포 면허장letter of marque이 발급되었는데 이 개인 소유의 전투 활동을 사략私掠, privateering 그리고 그 선박은 사략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활동했던 유명한 사략선 지휘관들은 1588년 스페인과의 해전 때 영국 해군 지휘관으로 변신하여 결국은 영국 해군의 창립자가 되었다."(175)
4장 절대주의 체제 : 무력 운영의 관료제화
"베스트팔렌 조약을 계기로 주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근대 국가 외에 다른 모든 종류의 조직이나 개인의 폭력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주권국가 지위의 확보나 인정은 국가 간의 상호 합의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주권국가들 사이에만 가능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그 자체가 불법화되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다." "30년전쟁이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참혹상에 대한 부정적 기억을 바탕으로 유럽은 당분간 평화 시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장 눈앞에 둔 전쟁은 없었으나 새로 마련된 평화 질서가 기본적으로 어느 때라도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놓이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대비는 각국의 필수 작업이 되었다. 각국은 내부적 제도의 정비와 경제·재정 능력의 확충 작업에 전념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학에서는 국가 건설state-making 작업 또는 중상주의mercantilism 정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된다."(187)
"(대규모 병력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전투기계로 탈바꿈한 보병 병사들을 기반으로 싸우는 전투 방식은 근대의 산물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산물이었음을 서양 학자들은 특히 강조한다." "이 고도의 기율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적 훈련방식은 원래는 네덜란드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에 의해 고안된 것이었다. 스페인에 대한 반란을 주도한 오라녜Orange 가문 출신으로 네덜란드 육군 전체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그는 당시 계속 개량되고 있던 화기로 무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효율적 전력의 생산을 위한 각종 개혁 작업을 추진했다." "그 혁신성의 핵심은 군대를 공업 생산단위 조직과 같은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 있다." "반복 훈련을 통해 개개인의 병사는 평균적 숙련도를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 무기와 병력 규모를 표준화하면 개별 전투 단위들이 만들어내는 전투 효과를 미리 측정할 수 있었다."(193-4)
"기존의 통신장비, 도로망이나 병참조직으로는 대규모 병력을 한꺼번에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여러 단위 부대로 나누어 다른 경로를 통해 동시에 진격하는 부대의 구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단위 부대들은 자기 충족적인 항구적 전략 단위로 구상되었다. 자기 충족적이라는 말은 단일 지휘관에 의해 통솔되는 다양한 전문 부대, 즉 보병·기병·포병과 같은 전투 부대 외에 공병·의무병·통신병 같은 지원 부대들을 함께 꾸린다는 점을 지칭한다. 이러한 부대는 독자적인 전투 조직으로서 전체적인 전략 구상과 관련해서만 상급 지휘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친숙한 사단division의 출현이다." "뒤에 규모가 더 커지면서 군단corps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이 단위 부대들의 작전을 조정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총참모부general staff도 생겨나게 된다. 사단을 기초로 하는 작전을 처음 시도한 것은 7년전쟁 중인 1760년을 전후하여 독일 내에 진주한 프랑스 군대였다."(201-2)
"대포가 해상 전투의 중심 무기로 등장하면서 전투 방식도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활이나 소수의 대포 등을 사격한 후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면 적선에 승선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기본 전법이었다. 그러나 적군의 포화를 뚫고 적선에 승선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 이제는 대포로 적선을 무력화하는 방식을 우선으로 택하게 되었다. 새로운 포전砲戰 중심의 전투에서는 단위 시간 안에 될수록 많은 탄환을 적함에 명중시켜 가능한 한 많은 인원을 살상하고 돛대나 다른 장비에 손상을 주어 적함의 기동력을 뺏는 편이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 전투 방식은 많은 수의 대포를 동시에 쏘는 것인데 이를 위해 대포를 뱃전舷側에 설치했다. 전투 시에는 참가하는 함정 모두가 1열로 도열하여 나란히 배치된 대포를 적함의 뱃전을 향하도록 했다." "또한 적함의 선체에 더 큰 손상을 주기 위해 직경이 큰 탄환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대포의 크기도 점차로 커지게 되었다."(218-9)
"최강의 해군 건설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 조달과 관련하여 첫 번째로 언급되어야 할 사항으로는 영국 왕위계승 전쟁의 와중(1694)에 창립된 영국은행을 통한 '금융혁명'이었다. 전비에 사용될 자금을 자본시장을 상대로 한 국채 발행을 통해 마련하는 이 독특한 재원 조달 방식은 선진적 금융시장과 성숙한 상업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건강한 조세체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의 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인으로는 왕성한 무역 활동과 이것을 가능케 하는 식민지의 존재였다." "7년전쟁 때 소요된 영국의 군사 재정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의 세 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때의 두 배가 되었다. 이 비용을 모두 국내 조세로 충당할 수 없게 되면서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고율의 조세 부과를 통해 새로운 재원을 찾았다. 이 새로운 재원으로 떠오른 지역이 미국이었다.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과정에서 미국 식민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항이 야기되었다."(227-8)
5장 산업혁명과 산업화
"철도가 군사용으로 잘 활용된 사례로 첫손에 꼽히는 일은 1846년 러시아의 병사 이동 작업이다. 이때 러시아는 체코의 우헤르스케 흐라디슈테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의 크라쿠프로 1만 4500명의 병력과 관련 장비를 철도를 이용하여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이로써 철도의 군사적 잠재력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자체로는 군사 무기가 아닌 철도 수송은 당시까지 이루어졌던 무기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전쟁 수행에 미쳤다. 이것은 철도가 전략 수립에서 고려해야 할 세 가지 핵심 요소인 힘, 시간 및 공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동 및 배치 가능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는 점에서 힘이 증가했다. 그리고 그러한 이동에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더 큰 규모의 병력을 더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은 군사력이 관장하게 될 지리적 공간의 엄청난 확장을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철도의 또 다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251-3)
"군사적 관리의 대상에는 병력의 충원과 훈련, 철도 시스템의 정비, 필요한 테크놀로지의 개발 그리고 나아가서는 동맹체제의 정비 등 한 나라의 군사적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중요한 요소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 관리는 전쟁 발발 시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견되는 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미리 준비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쟁계획war planning'이라는 개념이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했다." "본격적 산업화 단계에 와서 전쟁 계획 노력은 대외 정책, 산업 정책, 인구 정책 등 한 국가의 국제정치적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분야의 정책 조정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시와 평시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전쟁은 단순히 군인만의 업무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일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이 사회의 중요한 업무로 올라섬에 따라 사회 조직 전반이 군사적 목적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이른바 군사지상주의가militarism가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257-8)
# 대전략grand strategy : 과거의 전략이 ‘전선의 결정적 지점에 최대의 힘을 집중하는 방안’이라는 의미였다면, 여기에 ‘전선에서 후방에 이르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배분하는 문제’가 추가된 군사 전략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군사 분야에서의 혁명적 변화는 해군과 관련해서 볼 때 육상전에 비해 한층 더 심대했다. 해군의 경우 이동 수단인 선박은 그 존립의 물리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육군에 비해 더욱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육군의 경우 이동 수단이 없이도 싸움이 가능하지만 해군의 경우 선박이라는 이동 수단 없이는 해상 전투 또는 해군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해군의 존립 기반인 선박 관련 기술 전부를 바꾸어 놓았다." "산업혁명으로 야기된 해군 기술의 변화는 세 개의 기본적·기술적 사항, 즉 선박의 재료, 선박의 동력원 그리고 무기라는 측면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재료 면에서는 목선에서 철선으로, 동력원 면에서는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그리고 무기 면에서는 작열탄의 채택이라는 점에서 그 변화가 이루어졌다."(271-2)
# 작열탄 : 폭약을 내장한 탄환
"돛의 제거는 함포의 발전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두꺼운 적함의 철갑을 관통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함포의 크기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한 개의 무게가 60톤 또는 그 이상까지 나갔다. 이와 함께 함포의 수는 줄었고 동시에 과거와 같이 현측에 설치하지 않고 선회포자barbette로, 다시 뒤에는 회전포탑turret으로 바뀌었다. 함포의 위치가 바뀌게 된 것은 현측에 설치된 함포의 경우 한 방향으로밖에 사격할 수 없어 목표가 바뀌면 선박 자체의 방향을 틀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동력원으로서 바람이 포기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점이 생겼지만 전략적인 면에서는 무한정한 장거리 항해가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기동성 면에서 많은 손해가 따랐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별로 중요시되지 않던 (연료 재공급을 위한) 해외 해군 보급기지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187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해진 해외 식민지 확장 노력은 이 해군 기지의 확보와도 무관하지 않았다."(277-8)
미국 해군대학의 해군 전술 교관이던 머핸은 1890년에 『해양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저술한다. "그의 논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해군력을 바탕으로 하는 제해권의 확립 없이는 세계 지위로의 부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해양력sea-power, 상업(무역) 및 식민지는 국가의 번영에서 불가결한 세 가지 기본 요소들인데 이것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었다. 해양력은 단순히 해양을 지배하는 군사력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교역과 운송도 포함한다." "머핸의 논지는 마치 예언가의 주장처럼 많은 신봉자들을 낳았고 공개적인 제국주의 정책의 채택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여 열국의 해군 건설 정책을 고무했다." "독일의 해외 확장에 소극적이었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해외 정책에 상당한 열의를 가졌던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머핸의 저술은 그의 의지를 정당화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288-9)
# 영국 : 전통적 외교정책인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 원칙을 포기하고 기술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드레드노트함을 건조
6장 양차 대전 : 과학 기반 군사 기술의 급속한 발전
"1차 대전을 전후하여 출현한 새로운 군사 기술로 볼 때 그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막 진행 중인 전쟁의 긴박감 속에서 기술 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사항은 기술 개발에 전쟁의 주체인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입은 당시까지 축적된 과학의 기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거나 개발된 테크놀로지는 과거와 같이 단순한 시행착오나 우연한 발견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테크놀로지의 과학적 원리의 탐구와 적용을 통해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일례로 전쟁의 3대 요소인 힘, 시간, 공간의 의미를 모두 뒤바꾼 철도가 철로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 것과 달리 "내연기관 기반의 자동차는 어느 정도의 조건만 주어진다면 도로를 벗어나서도 운행할 수 있었다." 내연기관을 기반으로 한 이상적인 전력화는 탱크로 실현되었다.(293-4)
"항공기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전쟁에서의 승패는 기본적으로 전투장에서의 대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투 현장을 넘어서 후방 지역을 공격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정치혁명 이후 전선에서의 대결을 떠받치는 힘은 사회 전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모든 산업 능력과 경제 능력이 전쟁 노력에 투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항공기의 출현은 그러한 능력을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전략폭격' 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전쟁에서 전방과 후방의 구분은 더는 큰 의미가 없어지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도 사라지게 되었다." "전략폭격의 등장으로 전/후방 및 전투원/비전투원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점은 이 전략폭격의 개념을 더욱 확대시킨 현대 핵전략의 기본 전제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 이론을 가능케 하는 기초적 사실이 되면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310-1)
"2차 대전 후 세계 정치의 구조를 과거의 정치와 근본적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양식을 바꾼 첨단 무기를 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컴퓨터 기술과 핵폭탄이 될 것이다. 컴퓨터의 등장만 해도 적군의 암호 해독이라는 필요성을 군대가 먼저 갖게 되고 그 해결책을 위해 수학자들의 지원이 요청되었지만 핵폭탄의 경우는 그것의 가능성부터 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핵폭탄의 개발은 군대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연구소 외의 다른 어떤 사회 조직과도 무관한 순수 자연과학, 특히 엘리트급 핵물리학자들의 초국가적 연계망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핵의 문제는 정치나 군사와는 전혀 무관한 순전히 이론적 문제였다. 아무도 군사와의 연관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를 완전히 초월하여 자신들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던 물리학자들의 세계 속에서 핵물리학 학문 활동이 지속될 수 있었다."(325-6)
7장 냉전 체제와 첨단 기술 경쟁
"과거와 비교하여 핵 시대에 와서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핵무기의 효능을 무효화하는 대항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으로 반복되었던 공격 무기와 방어 무기의 지속적 개발의 사이클이 중단된 것이다. 핵무기에 대한 결정적 방어 수단으로 제출된 것은 다른 핵무기이다. 핵무기가 다른 핵무기에 대한 유일한 방어 수단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핵무기가 갖는 엄청난 파괴력과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핵 보복이 만들어내는 더 엄청난 파괴적 결과에 대한 이론적 상정에 근거한다. 따라서 핵무기의 가장 중요한 효능은 핵 공격 의지를 사전에 약화시킴으로써 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즉 억지deterence에 있다. 실제 핵무기에 대한 효과적 방어 수단은 일단 먼저 이루어지는 핵 공격에 살아남은 후 여전히 남아 있는 핵무기를 바탕으로 보복할 수 있는 능력 외에는 없다." "이것이 2차 대전 후 미소 간의 핵전략의 근간으로 자리 잡은 '상호확증파괴'라는 군사적 교리의 핵심적 내용이다."(353-4)
"유도무기의 급속한 개발은 1960년대 베트남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지대공 미사일surface-to-air missile, SAM은 특히 소련을 중심으로 급속히 발전했고 그 실험은 주로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기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베트남전에서 미군 폭격의 군사적 효과가 미미했던 "가장 큰 이유는 부정확한 폭격과 베트남의 방공망 때문이었다. 베트남전 전체를 통해 미군 항공기가 1500대 이상 격추되었는데 그 95퍼센트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공포의 위험을 피하면서 시도된 항공기 폭격의 명중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까지 미군 폭격기의 명중률은 5~6퍼센트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페이브웨이paveway라는 이름이 붙여진 레이저 유도 폭탄이 개발되어 실전에 투입되었다. 소위 스마트 폭탄이라는 일반적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 레이저 유도 폭탄 덕분에 1972~1973년의 폭격 명중률은 48퍼센트로 급속히 개선되었다."(359-60)
"전자 무기의 군사적 이용은 2차 대전 이전에도 시도되었지만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것은 전자부품의 소형화 덕분에 가능하게 되었다. 진공관 대신에 트랜지스터가 사용되었고 수많은 부품들은 납땜이 아니라 실리콘 칩에 인쇄된 형태로 제조되기에 이르렀다." "현대 전쟁의 기본 양상이 되고 있는 전자전의 경우도 다른 모든 종류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안과 무기가 계속적으로 연구됨으로써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낡은 것이 된다. 특히 새로운 무기에 장착되는 전자기기는 다른 무기들에 비해 보다 쉽게 탐지되거나 파괴되기 쉬운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 무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무기가 바로 "전자기파동을 이용한, EMP탄 또는 전자폭탄e-bomb이다. 수소폭탄의 실험 때 모든 전자기기의 작동이 중단 또는 교란되었던 현상을 바탕으로 연구·고안된 이 신형 무기의 위력은 거의 모든 면에서 전자화된 현대 무기에 대한 중요한 위협이다."(363-5)
"현대의 세계적 군사 질서와 주도국의 군사 전략 틀 자체를 고려할 때 육상전과 구분되고 그로부터 독자성을 갖는 해상 전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실제 2차 대전 종식 후 과거와 같은 해전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었던 포클랜드 전쟁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없었다. 핵폭탄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대륙 너머로 발사할 수 있게 된 현대적 상황에서 공격자와 피공격자 사이에 놓여 있는 바다와 산악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더 이상 장애물도 아니고 독자적인 군사 활동의 장으로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군력은 발사되는 화력의 포대platform가 선박이라는 점에서 그 특수성이 인정되는 군사력을 의미할 뿐이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항공기나 대륙간탄도탄 같은 지상 발사 무기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과거 대형 전함들이 점차 퇴조하게 되고 대신 항공기를 작전 대상 지역 근처에 운반하는 항공모함이 해군의 주력이 되었다."(380-1)
"전략핵무기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주력함은 항공모함에서 핵 추진 잠수함 쪽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은 잠수함발진탄도미사일SLBM 발사가 가능한 최초의 핵 추진 잠수함 조지 워싱턴 호를 1959년 12월에 취역시켰고 1960년 7월에는 이 잠수함에 적재된 최초의 SLBM 폴라리스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이 핵 추진 탄도탄 발사용 잠수함은 미국의 2차 핵 가격력의 중심을 이루는 초기의 핵잠수함이었다." "무기를 볼 때 과거의 잠수함들은 어뢰 발사가 주된 무기였는 데 비해 핵잠수함들은 한 척당 20기가 넘는 (다탄두 발사 탄도탄을 갖춘) 트라이덴트 SLBM을 장착하고 있다. 이 트라이덴트 탄도탄은 일부가 유도guided 미사일로 교체되었고 일부 함정에는 각기 7발의 토마호크를 장착한 22문의 발사장치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첨단 무기로 볼 때 잠수함은 단순히 해군의 무기가 아니라 육·해·공 구분의 의미를 무색케 하는 초강대국의 중심적 전략무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383-4)
결론 군사 기술의 고도화와 새로운 전쟁 양상의 출현
"실제 전쟁의 맥락 속에서 어떤 특정 기술의 내재적 우월성은 큰 의미가 없다. 크레벨드 교수가 강조하듯이 중요한 것은 주어진 무기나 기술 자체의 우수성보다는 이러한 장비나 무기가 적군이 사용하는 장비와 무기의 관계 속에서 갖는 '적합도fit'이다. 베트남전을 다시 예로 든다면 미군은 상대편의 장비와 무기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가용한 모든 첨단 무기를 동원했던 반면에 북부 베트남군은 이러한 미군에 정면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미군의 첨단 무기의 효과성을 완전히 무색케 만들었다." "게릴라전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나 그에 의해 지원을 받는 정규 정부군을 상대로 싸울 때 재래전의 방식으로는 전혀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약자가 승리를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전쟁 수행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군사적 패배만을 피하면 되는 측과 반드시 승리를 얻어야 하는 측 사이의 전쟁은 일찍이 아롱 교수에 의해 '비대칭전쟁'이라는 이름을 얻은 바 있다."(395-7)
"재래식 전쟁의 기본 틀을 벗어난 게릴라전의 핵심적 특성은 기술적으로 우월한 적군을 상대로 우호적인 민간인 집단을 보호막으로 하면서 고도의 기동성을 바탕으로 기습 공격 위주의 임시적 전투 방식으로 맞선다는 점에 있다. 이 기습 공격이 초기 단계에서 취하는 가장 빈번한 공격 형태에는 테러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상위 전략 개념의 하위 전술로 여겨졌던 게릴라 전법이 점차로 독자적인 전략 원리로 독립되었듯이 게릴라 전술의 초기 단계의 부분으로 고안되었던 테러가 다시 게릴라 전략의 부분적·전술적 수단의 지위를 넘어서서 독립적 전략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20세기 후반부터 빈번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테러리즘의 주체는 국가 또는 그것에 비견될 만한 조직에 의한 통제를 벗어나 독립적 범죄 집단 같은 활동 양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비대칭성을 바탕으로 테러리스트 조직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399-401)
# ISIS : 국가화된 테러리즘(국가와 테러리즘의 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