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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과 일본 ㅣ 대학교양총서 2
조경달 지음, 최혜주 옮김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1장 일본의 군사 지배
"조선은 무엇보다도 강대한 군사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병합과 함께 한국주차군은 조선주차군으로 바뀌고, 군사령관은 총독의 통솔하에 두었다. 의병전쟁은 대략 종식되었지만, 잔병활동은 여전히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래서 주차군은 분산주의를 취해 각지에 소부대를 주둔시키고, 의병의 잔병을 뿌리째 '소탕'하려고 했다. 잔병은 평안남도나 강원도의 산간부에 숨어서 출몰하고 있었는데, 1915년경까지는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버렸다." "함경북도 나남에는 제19사단, 용산에는 제20사단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1921년까지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사이 1918년에 주차군은 조선군이라고 개칭되었다. 또한 경상남도 진해에는 1916년에 해군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병합 초기의 총독정치는 당시부터 무단정치로 불렸다. 그것을 가장 상징하는 것이 헌병경찰제도다." "헌병대는 군사경찰로 육·해군대신의 지휘를 받고, 그 사령관은 '내지'의 헌병대 사령관과 동격이 되었다. 그 권한은 절대적이었다."(16-7)
"식민지 조선 최대의 지주는 1908년 12월 28일에 설립된 동척(본점·경성)이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1만 7714정보의 토지를 지급받아 발족한 동척은 그 후 1913년까지 4만 7148정보의 토지를 매수했고, 1919년에는 7만 8520정보를 소유한 거대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사업에서 금융업은 중요한 부문이었지만, 토지의 집적은 토지를 저당으로 취하는 대금업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병경찰은 사적인 토지매매에도 간섭해 토지의 매각을 용이하게 허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농민에게 매각 기회를 잃게 하고 도리어 농민의 곤궁화를 촉진해 대금업을 하는 동척에게 유리하게 움직였다. 국책회사 동척은 스스로가 지주경영을 실시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 농업이민을 유치하는 데도 노력을 경주했다." "당초에는 자작농·소작농·지주를 각각 모집했지만, 1914년 이후에는 자작농과 지주만 되었고, 1921년 이후에는 10정보 이상을 소유하는 지주의 육성만을 다루게 되었다."(28-9)
"총독부의 동화정책은 국적문제에서 기이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에는 마지막까지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고, 다만 그것을 준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것은 일본국적법이 적용된 타이완이나 카라후토(사할린)와는 대조적이다. 일본국적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국적이탈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고, 조선인은 제3국에의 귀화가 영원히 금지되었다. 예를 들면 귀화하는 것이 가능한 조선인이라도 이중국적인 채로 '일본신민'으로 취급되었다. 위험분자를 방임하지 않는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본래 제국헌법이 시행되지 않은 이상 조선 반도에 있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이 있었지만, 그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 등은 친일파 조선인의 명예직이었고, 무단정치기에는 회의가 개최된 일도 없었다." "참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인에게 연동해서 일본인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재조일본인의 큰 불만이 되었다."(34-6)
2장 3·1운동
"당초 3·1운동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3대 원칙으로 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거사 단계가 되어 학생·민중에 대한 불신과 공포에서 일원적이고 대중적으로 운동을 추진해가는 것을 그만두고 비폭력만을 표방하였다. 결행일이 2일 빨라진 것도 장의 행렬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3일에 결행하면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학생을 쫓아낸 후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고 한용운의 인사와 만세삼창만을 거행하고 이어서 축배를 들려고 할 때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미리 당국에 자수를 신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대표가 결국 나타나지 않았던 파고다공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학생과 일반 민중만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오후 2시가 지나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일제히 '대한독립만세'가 고창되어 태극기를 선두로 시내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수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시내 곳곳에서 독립연설을 거행하면서 3대로 나뉘어 시위행진을 실시했다."(55-6)
"대부분의 경우 만세시위운동은 장날에 시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의 작법이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이나 연설 뒤,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술기운으로 용기를 내어 참가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장시에는 반드시 주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위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받은 뒤에 무기를 빼앗아 항쟁으로 이행해갔다." "민중사적 시점에서 볼 때 민중은 민중대로 자율성을 발휘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점과 헌병의 숙사 등을 습격해도 물품은 거의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이었고, 절도에는 이르지 않았다." "또한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보인 강제적 참가의 논리를 가지고 이루어져 만세를 환호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았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왕성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민란의 작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 만세를 부르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은 지방관을 욕하는 만세(山呼)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60-1)
3장 문화정치로의 전환
"3·1운동의 결과 무단정치의 한계성이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3·1운동의 흥기는 총독부가 조선 민족과 공유의 정치문화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에서 최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조선 민족과 공유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새로이 모색된 통치책이 일시동인에 근거하는 내지연장주의를 슬로건으로 한 문화정치다. 이것은 조선 지배를 하는 데 조선인의 협력을 얻어서 간다는 정치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이른바 협력체제 구축이 필수가 되었지만 이러한 방향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내지연장주의는 머지않아 조선을 '내지'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조선인을 일본인과 완전히 같게 하여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동화주의는 점차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주의에 일정한 배려를 보였지만, 조선인을 서서히 일본에 심복시켜 일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동화하려는 것이었다."(77-8)
# 문화통치기의 주요 양상
1. 헌병경찰제도 폐지 : 보통경찰로 전환 및 증원, 조선인 순사보는 순사로 승격
2. 지방제도 개편 : 의결권 없는 각종 지방의회를 허용, 지방 유력층 가운데 협력자 물색
3. 공론사회 형성 : 언론·출판의 자유 완화로 조선어 신문·잡지 다수 간행, 각종 결사체 급증
4. 종교정책 전환 : 공인 종교(신도·불교·기독교) 외에 신흥 종교를 '종교 유사 단체'로 공인
5. 조선사 찬탈 : 총독부 주도로 〈조선사〉 편찬(민속학자 이능화와 역사학자 최남선 참여)
6. 청년회운동 : 실력양성운동 차원에서 청년회 활성화(사회주의 이념 확산의 주요 통로)
7. 민립대학 설립운동 : 총독부에서 관립대학을 추진하면서 경성제국대학관제 공포(1924.5)
8. 물산장려운동 : 알맞은 조선 산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무산계급에게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여 쇠퇴
9. 회사령 철폐 : 회사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 총독부에 협조하는 합작기업 위주로 증대
"〈민족개조론〉은 지배계급에게는 '허위'와 '사욕', 일반 민중에게는 '게으름' '겁이 많고 나약함' '신의가 없음' 등의 도덕적 문제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조선 민족 재생의 길은 그 도덕적 결함을 극복해서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광수는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교화해 계속해야 할 영속적 과업이라고 했다." "이광수의 조선민족관은 총독부의 논의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고, 너무나 자학적이었다. 그러나 이광수는 안창호가 만든 흥사단의 자매단체로 1922년 10월에 수양동맹회를 결성해 진심으로 민족개조의 과업에 착수해갔다. 주자학에서는 학문과 덕행을 쌓은 뛰어난 인격자가 뛰어난 정치를 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덕을 겸비한 인격자가 교화의 주체다. 안창호나 이광수가 의식하고 있거나 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그러한 주자학적 전통의 선상에서 민족 엘리트의 육성을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다."(95-6)
4장 민족운동의 전개
# 문화운동과 민중
1. 천도교와 기독교의 운동 : 천도교청년회에서 종합잡지 『개벽』 간행(1920.6), 기독교계는 교육 사업에 주력
2. 여성운동 :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조직(1919.3~4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1922.6)와 조선여성동우회 창립(1924.5)
3. 형평운동 : 백정의 인권 향상과 차별 철폐를 목표로 형평사 설립(1923.4)
4. 농촌계몽운동 : 천도교 주도로 조선농민사 창립(1925.10)
5. 생활개선운동 : 구관비판과 생활근대화를 촉구하는 각종 모임 창립
6. 브나로드 운동 : 학생들이 여름방학 기간에 귀향해서 벌인 문자보급운동(1931~1934)
# 사회주의운동과 민중
1. 사회주의 단체 결성 : 다양한 연구서클과 노농조직이 난립하다가 조선노동총동맹으로 합류(1924.4)
2. 두 개의 공산당 : 이루크츠크 공산당 한인지부(1918.1)와 이동휘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인사회당(상하이파, 1918.6)으로 분열
3. 조선공산당 탄생 : 코민테른의 통합 지시로 조선공산당 결성(1925.4)
4. 6·10만세운동 : 순종 장례식(1926.6.10)을 기해 제2의 3·1운동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력 상실
5. 조선공산당 해체 : 당국의 끈질긴 탄압과 내부 분열로 조직이 와해되자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승인 취소(1928.11)
"조선의 사회주의는 3·1운동 이후 급속하게 청년과 지식인 사이에 퍼져갔다. 유교적 민본주의는 평등주의나 평균주의를 표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받침 접시가 되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 중에는 지주의 자제나 양반 가문 출신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유교적 민본주의에 부수하는 명사의식을 가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덕망가로 혹은 교양인으로 자격이 있는 것을 경쟁하려고 했다.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사(士)', 즉 지식인이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영웅주의가 있었고, 민중을 소리높이 부르짖으면서도 민중으로부터 유리하는 지식인의 관념적인 모습이 있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소재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소작쟁의의 전형은 식민지 조선에서 최대 소작쟁의라고 불리며 획기적인 사건이 된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岩泰島)의 농민운동이다."(126-7)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년 8월 결성된 암태도소작인회가 소작료를 4할로 할 것을 요구하고 최대 지주 문재철이 이를 거부하면서 폭력충돌이 벌어졌으나 1924년 8월말 경찰의 중재 속에 소작인회의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면서 화해 성립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의열단의 선언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신채호는 "문화정치하의 자치운동과 문화운동을 엄하게 비판한다. 동시에 이승만의 외교독립론과 안창호의 독립준비론을 비판했다. 그리고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혁명"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국가주의자였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무정부주의자로 변하여 사(士)는 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정치는 민을 위해서라도 그 실천주체는 어디까지나 사(士)가 아니면 안 되지만, 신채호는 유교적 민본주의가 가진 평균주의나 평등주의의 이면을 받침 접시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면서, 사(士)와 민(民)의 논리에서 그것을 역전시킨다. 그것은 조선의 유교적 민본주의가 참으로 민중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그들이 의거하려고 해도 의거할 조선 민중은 간도 지방 등에 한정적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진화는 분하게도 실천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다."(133-4)
5장 식민지의 근대
"성곽 도시였던 경성은 그 중앙을 동서로 지나는 청계천에 의해 크게 남북으로 나뉘어 왕조 시대에는 각각 북촌·남촌이라 불렸다. 북촌은 상류 양반이, 남촌은 하급 양반이 사는 지역이었다. 남촌은 남산 기슭에 있었고, 일본인은 여기에 있는 진고개라고 하는 배수가 나쁜 장소에 살기 시작해 서서히 개발을 추진해갔다. 총독부는 1914년에 이제까지의 행정구획인 5부 8면제를 고쳐서 주로 조선인 거주지역의 북촌에는 동제,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에는 정제(町制)를 펼쳤다. 거리의 발전 방법도 양극적으로 진행되어 상업시설과 극장·영화관 등의 오락시설도 일본인용과 조선인용이 각각의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인 거리는 남의 본정통이나 황금통이 중심이고, 조선인 거리는 북의 종로통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프라 정비나 경관의 근대화 등은 압도적으로 남촌이 우선적으로 추진되고, 북촌에서는 상하수도 및 전기·가스 등의 보급이 늦어져 진행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5일에는 남산에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천황을 모시는 조선신궁이 창건되었다."(148-150)
"경성 거리는 백화점 외에도 다방과 카페·빠·영화관 등으로 북적거렸다. 그 주요 소비자는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시민공원인 창경원(구 창경궁)과 남산공원 등에서 자유연애를 즐겼다. '그/그녀'들은 일본 문화나 서구 문화의 주요 소비자였고, 일본 가요나 서양 음악에 친숙했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기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들은 다방의 마담이나 가수·여우 등이 되었고, 자산가·지식인·예술가 등과 교제하며 근대 문화 전파의 중개자 노릇을 했다." "모던보이·모던걸은 '부르주아'의 아이들이었고, 이기주의자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식인도 역시 모던보이·모던걸처럼 근대문화를 강하게 동경했다."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인텔리를 자처했고, 전문학교나 대학을 나오면 아주 으스대는 풍토가 일반적이었다."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도 강했는데, 일본에 유학하는 자 대부분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154-5)
"빈곤한 민중 사이에서는 무속이나 신흥종교는 근대의학에 대체할 기능을 일관해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총독부가 근대성의 침투를 폭력적으로 도모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하나의 응답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흥종교는 치병에 그치지 않고 구제를 말했기 때문에 민중세계에 큰 힘을 가졌다. 종말종교는 민중의 안타까운 구제원망의 반영으로 있었지만 신흥종교의 대부분은 표면적으로는 통속적인 도덕을 부르짖는 한편, 이면에서는 종말의 도래와 교조에 의한 신 왕국의 탄생을 말한다." "신도의 대부분은 무식하고 가난한 밑바닥 민중이었지만, 그중에서는 민족주의자도 있었다. 그 한편에서 친일행위도 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의 배격을 주장하는 각파 유지연맹에 자금을 원조하고 함께 할동한 적도 있었다. 종말종교는 민족주의적임과 동시에 그 구제사상은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 존재의 상태도 양의적, 다의적이었다."(162-3)
6장 문화정치의 종언과 일본인
"1931년 6월 17일 취임한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은 '농공병진' 정책을 취했다. 농업에서는 미작·전작(畑作) 중시의 농업을 유지하면서, '남면북양(南棉北羊)' 정책과 '북선개척' 정책이 수행되었다. 작부 면적 50만 보, 실면 생산 6억 근을 목표로 한 '남면' 정책에서는 이전부터 있는 공동판매제를 강화하여, 염가 매상으로 농민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북양' 정책에서는 면양 10만 두를 목표로 농가에 면양 사육을 강제했다. 이들 정책은 일본의 섬유산업의 요청에 응하는 것이었지만, 면양의 경우는 군사양모에 이바지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북선개척' 정책에서는 백두산 지역의 삼림 80만 정보의 벌채가 계획되어 이민장려의 미명 아래 화전민을 구축했다. 공업에 대해서는 슬로건만큼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공업화는 군수공업의 필요성과도 어울려 서서히 중공업에 비중을 옮겨가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은 192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182)
"(1935년 1월부터 시작된) 심전개발운동은 그 목표로 ①국체관념의 명징, ②경신숭조사상의 함양, ③보은·감사·자립정신의 양성을 내걸었다. 거기에는 유교와 함께 신도·불교·기독교의 공인종교의 부흥을 호소하면서, 실은 국가신도 체제에 그것들을 짜넣어 국체관념을 내면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공인종교의 부흥을 내거는 한편으로, 종말을 부르짖는 신흥종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로 임했다." "문화정치의 특징은 총독부 비판에는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도 마음의 자유는 묵인하려고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 탓도 있어 대부분의 신흥종교가 '종교 유사의 단체'로 공인되었다. 따라서 그 공인은 문화정치 도래의 중요한 표지였다." "문화정치가 언제 끝나는가에 대해서는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심전개발운동의 개시야말로 문화정치 종언의 표시로 보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문화정치의 시기는 말할거리가 많지만 불과 15년밖에 계속되지 않았다."(193-4)
7장 전시체제와 조선
"(중일전쟁 발발 후 가속화된) 대륙병참기지화란 '내선일체'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그것은 일만지(日滿支, 일본·만주·중국) 블록의 전제조건이었으며, 조선은 '제2의 내지' '내지의 분신'이 되었다. (1936년 8월 5일,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는 동아신질서 건설의 기치와 더불어 이제까지의 '내선융화' 표어를 진척시켜 '내선일체'로 하고, 차별 없는 조선을 맹렬하게 선전했다. 여기에 조선의 상층사회와 일부 지식인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본제국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한 기대의 고조에는 일본제국의 강대성에 새삼스럽게 압도된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기대를 팽창시킨 사람들에게는 기묘한 자존의식이 싹터간다. '내지'가 제일선의 지위에 있는 데 대해서 조선은 제이선의 지위에 있다고 하는 아(亞)제국의식이다. 이 의식은 식민지인이라는 것을 망각해 자기를 일본제국의 정식 일원으로 규정하고, '이등신민'인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끝없이 '내지신민'에 근접해가려고 한다."(210-1)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총독부는 벌써 그 반달 후인 7월 22일에 정보통제와 국가 관념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활동을 기초로 해서 중일전쟁부터 1년 후인 1938년 7월 1일, 총력전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발족시켰다. 여기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개시된다." "이 운동은 연맹조직의 정비를 통해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고, 근로보국의 정신을 앙양시켜 거국일치해서 시국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할 것을 과제로 하는 것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발족에 호응해서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운동으로 개편되어 조직명도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직역연맹하의 애국반에서는 매월 1일을 애국일로 하여 국기게양, 궁성요배, 신사참배, '국어'장려, 근로봉사,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214-5)
#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결정한 기본국책요강에 기초해 신체제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창립된 일본의 관제 국민조직
"(1939년 11월 10일, 개정조선민사령으로 공포된) 창씨개명의 의도는 혈통지상주의의 조선적인 가(家)제도를 파괴해 일본적인 이에(家) 제도를 이입하고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의해 조선인을 포섭하려는 것에 있었다. 이미 시작되고 있던 지원병제나 시행예정의 징병제에 의해 조선인은 황군의 일원이 되지만, 황군은 문자 그대로 천황의 적자다. 일본어를 말하는 것은 물론 성명도 일본풍이 아니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의 가제도를 천황제 가족국가관에 적합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미나미 지로는 '내선결혼'도 이제까지 이상으로 열심히 선전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을 통해서 표창도 거행하고 있다." "결국 (신고를 마친) '설정 창씨'를 한 조선인은 80퍼센트 이상이 되었다. 창씨 소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폭풍과 같은 떠들썩함이었지만 20퍼센트의 조선인은 압력을 뿌리쳤다.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요했다고 해도 조선 호적을 폐지해 일본 호적에 편입시키려 하지 않았다."(220-1)
"당시 '내선일체'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몸도 마음도 피도 일본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철저 일체론'이고, 현영섭과 이광수가 대표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황도'를 생활원리로 하면서도 이체동심에 의해 단결하면 좋다는 입장에 선 '협화적 내선일체론'인데, 조선지식인 대부분이 이 입장에 서 있었다. 전자는 단순한 황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은 조선어를 망각해 일본어만을 이야기하고, 문화적으로도 일본 문화를 완전 수용해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은 일본인과 혈통을 같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한 놀랄 만한 조선민족말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자는 황민화에는 찬성하지만 그것은 조선 민족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 같은 다문화주의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조공체제론적이었고, 중화가 일본으로 대체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논의였다."(225-6)
8장 전쟁과 해방
"1941년 11월 28일에 한국독립당 주도의 임시정부에 의해 공포된 「대한민국건국강령」에서는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구체화되어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보지를 균등'하게 할 것을 지향했다. 토지의 전면 국유화와 평등분배, 즉 토지혁명과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가 확인됨과 동시에 보통선거권, 남녀의 권리평등, 고등교육까지의 면비(免費) 수학 등이 선언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정책이 '선민(先民)의 명명(明命)'에 그 연원이 구해져, '성조(聖祖)의 지공분수(至公分授)의 법을 따르는' 것에 의해 선언되고 있는 점이다. 거기에는 유교적 민본주의의 계승이 강하게 의식되어 그것을 진정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적 갈등을 한 18세기 이래의 실학의 전통이 생겨나고 있다. 본래 '대한민국'이라는 명칭도 왕조 시대부터 표방되고 있던 '민국' 이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중흥의 조라고 불린 정조는 '민국' 이념을 명확히 했고, 그 이념은 고종의 정치에도 계승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중화민국'의 단순한 차용이 아니다."(250-1)
"1945년 8월 14일 밤 여운형에게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로부터의 회담 요청이 있었다. 다음 아침 6시 반경, 양자 사이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 무조건 항복을 내용으로 하는 포츠담선언을 수탁했기 때문에 치안유지에 협력해주기 바란다는 요청이다. 여운형은 ①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3개월분의 식량 확보,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대한 불간섭, ④학생·청년조직에의 불간섭, ⑤노무자의 국가 신건설에 대한 동원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을 붙였고, 엔도는 이를 무조건 승낙했다. 여운형은 좌파인 동시에 민중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기에 치안유지를 부탁할 인물로 가장 알맞은 인선이었다."(261) "한편 총독부는 모든 기관에 명해 대량의 서류를 소각했다. 그리고 9월 8일 엔도 정무총감이 인천에서 하지 중장을 마중했고, 다음 9일에 항복문서의 서명이 총독부에서 제9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와의 사이에서 거행되었다. 일본의 35년에 이르는 지배가 정식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2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