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극단의 시대, 합리성에 포획된 근대적 인간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윤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장 관료로 내딛은 첫발, 그 신중한 한 걸음


"이호준은 19세기 말 조선 정계의 복잡한 인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인물이었다. 세도정권의 막후였던 조대비 세력, 고종의 등극과 함께 막후가 된 대원군, 그리고 임오군란 이후 고종의 막후였던 중전 민씨 세력과 언제든 소통 가능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론 명문가에 양자로 들어간 이완용은 그 집안의 상속자로 교육받았고,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면서 관료로 진출하는 길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2)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양자가 될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드는데, 서자는 적자가 될 수 없었으며 성씨가 같은 집안 아이만이 양자가 될 수 있었다. 서얼이 관직에는 나아갈 수 있었지만, 양반가의 관습에서는 여전히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고 있었다. 이호준의 경우도 이미 서자인 이윤용이 있었지만 가문을 상속받을 적자가 필요했고, 같은 우봉 이씨 가문의 이완용을 양자로 들여 그를 적장자로 삼았다."(25)


"고종의 미국에 대한 짝사랑은 대단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종은 1881년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읽고 조미통상조약의 체결을 결정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부유한 나라가 되었지만, 유럽의 열강과 달리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미국에 대해 당시 중국도 매우 호감을 갖고 있었다. 서양과 최초로 맺은 조약인 조미통상조약은 조선이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조약 중에서 그나마 조선에게 가장 유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관세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미국이 두 나라 사이를 조정하는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면서 (갑신정변에 연루된) 신기선의 국문을 행했던 1887년의 이완용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정계 분위기에 조응하면서도 조용히 미래의 변화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 같다."(36-8)


"이완용이 귀국했을 때에는 위안스카이와 그의 위세를 등에 업은 민영준(민영휘) 등의 민씨 척족이 큰 세력을 형성하여 정사를 좌우하고 있었다.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고종의 외교 정책과 차관 도입 시도가 좌절되었으며, 내무부를 중심으로 근대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점차 빛을 잃어갔다. 고종의 결정을 믿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했던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고종의 정책 실패와 함께 줄어들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이완용에게 내부 참의직을 제수한 것은 고종의 신임이 이완용에게 쏠리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조치였다. 더욱이 청과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미대리공사직을 수행한 이완용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 세력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완용은 사직상소를 통해 "이러한 총애가 미치자 사람들이 오히려 놀라는데, 신의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자신의 난처한 입장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52-3)


"그는 사직상소가 아니면 병을 핑계로 임명받은 자리에 불참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정계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반면에 왕과 세자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강원과 승정원의 관직은 계속 유지했다." "이완용보다 7살이 어린 윤치호는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지만, 그 개혁은 급격한 정치 구조의 변동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왕을 중심으로 서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종이 추진하던 개혁은 청의 간섭으로 거의 수포로 돌아갔고, 국가의 실권을 가진 내무부는 친청세력과 민씨 척족이 장악한 채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있었다. 변화의 새로운 기운이 없는 정계에서 이완용이 자신의 입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분란이 생길 수 있는 관직을 마다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893년 가을, 생모 신씨가 사망했다. 이완용은 3년간 꾸준히 지켰던 시강원 겸교사서직을 사직하고 생모의 3년상을 치르기 위해 낙향했다."(55-7)


2장 충성스러운 신하에서 기민한 정치인으로


"1차 갑오내각 때는 대원군과 민씨 척족의 첨예한 대립이 부각되었고, 왕이 배제된 상황에서 새로운 내각이 어떤 방향으로 재편될지 매우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때 이완용은 조선을 떠나 있어야 하는 전권공사직을 마다한 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에 2차 갑오내각은 대원군과 민씨 척족 세력이 배제된 대신 친일적 색채를 띠면서 관료 중심의 개혁을 이끌려 했던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의 세력과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박영효 등의 갑신파가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는 한편 앞으로 예상되는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미국 등 구미 열강의 외교관들과 소통 가능한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이때 주목받은 세력이 친미 성향의 정동파였다. 이완용의 입각은 조선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노우에의 정략적 필요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65)


"3차 갑오내각의 초기인 1895년 6월 초에는 아직 이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을 배척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노우에가 조선을 떠난 후 임시 대리공사였던 스기무라 후카시가 6월 16일 일본 외무성에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정동파는 각국과 골고루 교제하여 각국 공동의 보조에 의해 어느 한 나라의 강제를 피하려 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6월 25일 일본공사관 서기관 히오키 마쓰는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완용이 열흘 사이에 일본을 배척하는 정치색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중전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중전은 6월 7일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으로 귀국하자 정동파 인사들을 통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은 고종과 중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고, 일본을 배척하고 고종을 중심으로 개혁을 단행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69)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벌어진 후, "미국공사관에 기거하던 이완용은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귀국한 이범진과 함께 다시 고종을 빼내오는 계획을 세웠다." "고종을 자주 만났던 미국 선교사들이 이완용과 고종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으며, 고종을 모시던 상궁 엄씨가 계획에 동참했다. 궁궐이 습격당하고 중전이 처참하게 죽자 고종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더구나 임오군란 때처럼 권력 행사에서 배제된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빠져나왔다." "이완용은 이범진, 베베르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과 세자를 맞이했다. 이완용과 고종은 4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아관파천이 춘생문 사건처럼 사전에 발각되었다면 이완용은 망명을 하거나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완용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이 일을 감행했고 성공시켰다."(84-5)


# 춘생문 사건 :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는 시도가 좌절된 사건


3장 정계의 중심에서 세상과 만나다


"이범진의 축출 이후 갑오개혁에 따른 사회적 혼선이 빚어지자 양반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신식'에 대한 불만 여론은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고종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여론에 부응하며 구체제를 유지하려는 정치 세력을 등용하여 축소된 왕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범진 퇴진 이후 정계를 주도했던 이완용에게는 새로운 갈등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체제에 대해서는 동의했지만,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통해 왕의 권력 행사를 일정하게 제약하고 내각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왕과 내각이 조화를 이루면서 통치권의 일부인 행정권을 내각이 어느 정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고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과 정부의 분리라는 갑오개혁의 원칙이 관철될 경우 통치권의 일부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의정부 제도를 부활시켜 행정 권력을 다시 자신의 통치권 내로 편입시키고자 했다."(102-4)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1년 동안 이완용은 고종을 등에 업고 세력을 얻은 보수 세력에 맞서 정동파의 입지를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정동파가 보수 세력의 반격에 맞서는 동안 고종과 러시아공사 사이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김홍륙은 이용익 등과 결탁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1896년 10월 21일, 니콜라이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이 러시아 차관을 얻는 데 실패한 채 러시아 군사교관 14명만을 데리고 귀국했다. 그는 고종에게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조선을 도울 의사가 없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머물 필요가 없다며 환궁을 요청했다. 이완용은 기대했던 러시아의 원조가 성사되지 않자 실망하는 한편 김홍륙 등을 후원하면서 조선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려는 러시아공사에 대해 불만을 갖기 시작한다. 이에 그는 일본공사관원과 친분이 있는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를 통해 은밀히 일본과의 제휴를 도모했다."(118-9)


"김홍륙 등의 정치 공세로 인해 민영환, 박정양이 정계에서 물러나면서 이완용의 고종 환궁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고종의 '총신'에 의해 그는 점차 정계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동파는 아직 고종에게 유용한 세력이었다. 김홍륙 등의 득세로 실권은 상실했지만, 미국공사관과 소통할 수 있는 이완용 등을 내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순 없었다. 또한 보수 세력과 정동파 세력을 서로 견제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해가던 고종은 김홍륙 등의 독주를 견제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다." 경운궁 수리가 마무리되자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할 명분이 없어진 고종은 "1897년 2월 20일 마침내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환궁이 실현되었지만, 이완용은 환궁을 주도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이 계획했던 미국인 고문을 통한 내정 개혁 역시 실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정계 개편의 주도권은 환궁으로 왕의 건재를 과시할 수 있었던 고종의 손에 넘어갔다."(124-5)


"1898년 1월, 러시아는 조선에서 부동항을 얻기 위해 목포와 진남포 지역의 토지 매입에 적극 나서는 한편 부산 절영도를 석탄고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조차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군함을 부산에 입항시킨 후 무력시위를 벌였다. 또한 김홍륙, 민종묵, 이용익 등의 친러세력은 한러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더욱 커져가자 독립협회는 윤치호와 서재필이 주축이 되어 러시아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사회·정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다음 2월 13일 토론회를 개최하여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로 건의한다." 1898년 2월 27일, 양부의 병을 핑계로 서울에 남아 있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한다." "독립협회의 반러운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킬 용의가 있다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137-9)


"갑오개혁 이전의 정계에서 몇 안 되는 개화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았던 이완용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자신보다 출신 성분이 낮은 사람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다. 이들은 정계에 안주하지 않고 인민을 향해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가 겸 언론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양반 관료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계를 주도해왔던 이완용은 이러한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을미사변 전후에 반일을 표명하다가 아관파천 이후 반러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가 변신의 귀재이고, 그래서 을사조약 체결 과정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해왔다. 그러나 고종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조선을 개혁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이완용에게 그것은 변신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종의 신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권력 구조 속에서 이완용은 일관되게 군주를 보필해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143-5)


4장 정계 밖에서 설움을 겪다


"1894년과 1895년에 이완용이 보여준 고종에 대한 충성심과 여전히 고종의 부름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찾으려는 그의 행동은 기존의 권력 구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치 지우려는 것이었다. 갑오개혁 시기에 그가 추진한 행정제도와 교육제도의 개혁은 기존 체제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전라북도 관찰사로서 보여준 관료적 합리성 역시 기존 지방 행정 체제 안에서 허용 가능한 것이었다. 이완용은 갑오·을미개혁을 거치면서, 그리고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지만, 기존의 권력 가운데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규정하는 관료로서의 태도를 벗어버린 적은 없었다. 그는 개량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치 관료였다. 그리고 다른 관료에 비해 신중한 성품의 인물로, 유교적 합리성을 교육받았고 근대적 합리성을 체득한 이였다. 그는 체제에 편입된 양반 관료로서 자신의 지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정세의 흐름과 상황에 맞춰 행동반경을 결정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171-2)


"이완용이 학부대신으로 다시 내각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공사 하야시의 추천 때문이었다. 1905년 초에 일진회가 친일 집회를 열었을 때만 해도 이완용은 친러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야시 공사의 추천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시기에 일본공사는 되도록 친일 인사를 입각시켜 고종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기 때문에 반일 성향의 인물들은 대부분 내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러적 이미지를 가진 이완용이 학부대신에 임명된 것은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1902년 유길준의 쿠데타 사건으로 이완용과 두터운 관계를 맺고 있던 이하영이 일본공사관을 통해 자신과 이완용 형제의 구원을 요청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완용은 이하영을 통해 일본공사와 연계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대한제국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 기조로 인해 고종과 이완용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알렌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177-9)


"1905년 9월 5일,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하는 조항이 들어 있는 포츠머스조약에 러시아가 합의하면서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9월 27일, 영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한다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을 공개했다. 이로써 일본을 견제할 현실적 가능성도 사라졌다. 갑오·을미년의 위기를 아관파천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이때 고종은 측근 세력을 동원하여 미국 등에 지원을 호소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었지만, 내각원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종의 계획에 함께하지 않았다. 고종 측근들은 내각 대신을 친일 세력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내각 대신들은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할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고종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완용 역시 아관파천 때와 같이 고종을 위해 어떠한 계획도 도모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았던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바뀐 이상 국제 정세는 10년 전처럼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80-1)


5장 애국과 매국의 갈림길에서


1905년 11월 15일, 을사조약 체결을 놓고 이토의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토가 고종의 말에 찬성한 것은 당시 정부의 정책 결정 구조가 의정부에서 각 대신들의 사안을 의논한 후 고종에게 올리면 고종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하는 형식이었으므로 이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들이 모두 반대 의견을 표명하더라도 고종이 찬성할 권한은 갖고 있었다. 이토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이완용 또한 그러했다. 그래서 이완용은 "아래에서 대신들이 막아서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고종이 결정권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하들이 일본공사에게 거절 의사를 전달하기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고종에게 조약 거부의 구실을 제공하는 데 불과했다. 즉 고종이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니 지금 바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함으로써 조약 체결을 미루고, 영국·미국·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일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195)


"1905년 11월 17일, 소위 '을사5적'으로 불리는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5명의 대신이 '가(可)'에 서명하여 체결된 을사조약 내용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동양 평화의 화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배신했고, 내각 대신이 임금과 백성을 저버리며 일신의 영화만을 추구했다고 비난했다. 장지연은 을사조약 체결의 책임을 이토와 내각 대신들에게 떠넘긴 채 대한제국 권력의 핵심인 고종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한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 글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의 유생들은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무효화하라는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고, 도끼를 등에 메고 대궐 앞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민영환 역시 유생들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읍소했는데, 일본 헌병들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키자 울분을 참지 못한 채 결국 자결한다."(198-9)


"대부분의 유생들이 최고 결정권자였던 고종을 차마 거론하지 못한 채 모든 책임을 을사5적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최익현은 고종의 허약과 무능을 정면으로 엄중하게 꾸짖었다. 을사5적을 처단하라는 유생들의 상소에 대해 '충심을 알고 있다'라는 비답을 내려왔던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임오군란과 갑오농민전쟁에서 보여준 백성들의 힘과 분노를 두려워했던 지배 엘리트들은 백성들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부 넘겨주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들은 왕과 인민 사이에서 양자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을 구상했다. 입헌군주제와 지배 엘리트가 장악한 정당의 수립이 그들이 생각하는 정체였다. 이러한 구상은 기존 체제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는 가운데 왕권을 조금 제한하고, 백성들의 요구를 조금 수용하는 절충적인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왕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었고, 또한 부정해서도 안 되었다."(201-3)


"이완용은 을사조약이 체결되면 대한제국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관철 의지를 확인한 후 고종이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거절 의사를 표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서 자신의 역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판단 속에서 조약문을 수정하여 되도록 왕권 행사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통감의 권한을 외교에 한정시킴으로써 고종의 통치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이완용은 현실 상황에 맞춰 자신의 입지를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그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매우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울분과 분노에 치를 떨기보다는, 또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상황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합리성과 실용성을 갖춘 관료였다."(206-7)


"이완용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합리성과 실용주의로 포장된 이완용의 주장은 조금씩 대한제국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와 근대 문명을 받아들인 유학파 지식인들은 을사조약에서 명시했던 "한국이 부강을 인할 시"까지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에 근거하여 부강을 위한 실력 양성의 기치를 더욱 높이 내걸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웨덴-노르웨이 제국 등 실질적으로는 식민지에 가깝지만 형식적으로는 국가 연방의 형태로 통합된 나라들, 그리고 독일과 미국 등의 연방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보호국은 식민지와 다르며 대한제국이 부강해진다면 다시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저항과 투쟁이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고 일본의 강압을 더 불러온다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은 '실력 양성'만이 독립 주권을 되찾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09-10)


6장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친일로 나아가다


"고종의 양위와 정미7조약 체결로 이토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얻은 이완용은 자신의 세력과 친인척을 정계에 등용하는 한편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계몽 단체와 일진회를 무력화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일진회는 6월 10일 일진회 특별평의원회를 열어 총리대신 이완용의 사직 권고안을 의결함으로써 본격적인 이완용 반대운동을 벌여 나간다. 송병준은 일진회원들을 동원해 여론을 이끌어내고, 일본 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이완용 내각을 전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당시에 일본 정부 내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놓고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청일전쟁·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갔던 군부 세력은 대한제국에 대한 즉각적인 군사 점령을 주장한 반면, 이토는 주변 열강, 특히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을 점진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군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이토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되어가고 있었다."(229-31)


"1909년 7월 10일 이토의 귀국 연회가 끝나자 소네 통감은 이완용을 불러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게 위탁하고,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기유각서'의 체결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사법권의 위탁으로 대한제국 언론은 이완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인 사법권 이양은 통치권의 상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236-7)


"주권의 핵심 내용이었던 통치권을 이양하되, 국호와 왕실을 그대로 두는 형태의 병합은 1905년 이후 대한제국 지식인들이 수용한 국가연합 이론에서도 언급되었던 형태였다." "국호와 황실의 존재는 대한제국의 멸망이란 충격을 완화시키는 방법이었다." "데라우치는 이완용의 제안 중 국호 문제는 양보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독립 제국임을 선포했던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존속시킬 경우, 일본 황족에 포섭된 대한제국 황실의 지위 문제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 또는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청의 속국인 왕조 국가란 이미지가 있는 조선이란 국호를 고집했던 것 같다. 데라우치는 대한제국 국호 사용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왕의 칭호 존속 요구를 수용했다. 데라우치와의 협상을 마친 이완용은 8월 22일 순종을 알현하고 한일병햡조약에 대한 전권 위임장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통감부에 가서 데라우치와 회견하고 조약에 조인했다."(253)


"순종은 이왕(李王)이란 호칭에 불만을 표했다. 병합 조칙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28일, 순종은 궁내부대신 민병석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일본 측이 제시한 '왕'을 '대왕'으로 정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순종이 끝까지 황실의 지위 문제를 고집했던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협상 전 이완용과 만났을 때 고종과 순종이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던 것은 황실의 지위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더구나 데라우치와의 협상에서 이완용이 관철하려 했던 것이 왕호, 즉 황제와 황실에 대한 지위 문제였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실의 지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8월 29일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한국을 제국에 병합하는 건'이 선포되고, 고종과 순종을 각각 덕수궁 이태왕과 창덕궁 이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자국의 황실 전범에 없는 '왕공족(王公族)'이란 제도를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하는 칙령이 선포되었다."(254-5)


7장 권력의 정점에서 지탄의 절정으로


# 1926년 2월 11일 이완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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