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분열에서 분단으로 / 1947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대미(對美) 로비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원래 5~6주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체류를 연장해 가면서 미국 정부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7년 3월 5일,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3월 12일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날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목적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 침략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23-5)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서중석은 〈1947년 6월 28일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1947년 7월 19일쯤의 시점에서 미국으로 볼 때 김규식과는 달리 여운형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 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좌우합작위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인 47년 12월 6일 공식 해체되었다."(51-2)


'하나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해 46년 2월 9일 이래,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1886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여운형이 26년 연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욱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이 강하던 때였고 그런 의식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일성과 김구·이승만은 36~37년의 나이 차이가 났는데, 바로 이런 나이 차이가 세대간 의식 차이와 더불어 남북협상을 어렵게 만든 점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방북,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38선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들이 그런 장유유서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반대할 때에 여운형은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정병준은 해방정국에서 〈북한 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 형성에 노력한 것은 여운형뿐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58-9)


4장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 1948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106) "육지 응원 경찰의 대거 투입으로 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응원 경찰이 1천 500명이었는데,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섬'이라는 인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하게 된다."(113-4)


"해방 후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처단 문제는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의 발의로 다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神聖)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反族案)을 철회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走狗)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쓴 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8월 27일엔 2명의 방청객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이런 반발 움직임을 가리켜 『독립신보』 8월 27일자는 〈친일파들이 발악〉한다고 평하였다." "특히 친일파의 아성이라 할 경찰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160-1)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었고, 일반 청년들도 경찰에 억울하게 당하고 나면 그들을 한번 봐주기 위해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본 것도 갈등을 키웠다."(174-5)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잠자고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189-91)


5장 반공의 종교화 / 1949년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흡수해 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민국당은 49년 4월 말에 이르러 소속의원 69명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힘이 달려 이들과 어느 정도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1인 집권체제를 원하는 이승만으로선 무언가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장악할 수 없는 정당 체계에는 고개를 돌리고 정치적 과제까지도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한 관료조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3월경에 이르러 좌익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건 그런 프로젝트의 나아갈 바를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좌익의 산악 게릴라전은 49년 9월 최고조에 달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지만, 합법 공간 및 일상적인 민생 영역에서의 좌익은 49년 3월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뒤 붕괴되었다. 남로당의 궤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한에서 이렇다 할 인민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225-6)


유사 국가 기구에 의한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학도호국단이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48년 10월에 구성된 대한청년단과 49년 8월에 재편성돼 나타날 국민회와 함께 3대 반관(半官) 또는 유사 국가기구적 대중조직으로 '3위1체'를 구성했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만 했으며, 그와 동시에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것 말고 청년들은 민보단, 소방단, 의용단에도 가입해야 했다.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이 모든 조직의 총재나 명예총재는 모두 이승만이었고, 대한부녀회만 프란체스카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매우 기이한 이중적 국가체제 운영 방식이었던 것이다."(226-7)


"학도호국단은 족청의 부단장을 역임하였다가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사상에 근거하여 안호상의 지도하에 만들어졌다. 안호상은 '국민사상을 귀일(歸一)' 시키기 위한 일민주의 사상 보급에 문교 행정의 중점을 두었다." "『일민주의 개술』에서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하며, 동일성과 동질성이 생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민이다. 이 일민, 곧 한 민족에는 오직 한 주의만이 그 지도원리가 된다. 만일 두 주의들, 세 주의들을 지도원리로 한다면 우리는 한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벌써 두 민족, 세 민족이 되고 말아, 한 민족의 부정이요 멸망이다.〉 일민주의 추종자들은 피를 강조했다. 핏줄과 혈통이 주된 화두였다. 히틀러의 게르만 순혈론과 '피와 땅'과 거의 같은 담론이었다."(227-8)


6월 5일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만들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그냥 가입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동지나 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자백서를 쓰게끔 강요받았으며, 그밖에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야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은 민중 속에 침투한 정보망이자 동원망〉이었다며,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었다. 이 자수와 밀고는 한국전쟁 전후로 남한과 북한이 공히 동원했던 충성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보도연맹은 더 나아가 '알아서 기는 문화'와 '충성경쟁'을 낳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며,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고 했다."(248-9)


"김구는 이승만과는 다른 인물이었지만, 동질적인 세대적 특성은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875년생, 김구는 1876년생이었다. 이는 이들이 30년 가까이 왕정체제하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들의 왕정체제 이후의 삶은 내내 복고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들의 전 생애가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투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엔 이미 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은 어떻게 했을망정, 일상적 영역에선 생물학적 연령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267) "이는 이들에 비해 36~37년이나 젊었던 김일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거쳐야 할 사회 발달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해방 직후에도 왕조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바, 김일성은 그 전통에 편승하여 자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이승만 못지않게 해 나갔다."(271-2)


"해방정국을 주도한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 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우대를 받고 미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데엔 영어 다음으로 개신교가 유리하였다는 뜻이다."(279) "개신교는 '반공' 및 '친미'의 강력한 보증수표였다. 개신교 스스로 '반공'과 '친미'를 위해 적극적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띠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은 그걸 부추겼다. 해방 후 장로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가운데 하나였던 한경직은 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46년 1월 5일 조만식의 연금 이후 월남했다. 한경직은 일본 천리교회가 남기고 간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접수하여 영락교회를 세웠다. 공산주의를 반드시 베어야만 할 '괴물'이며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으로 간주한 한경직은 신자들의 정치참여를 촉구하였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제도는 서북청년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렸다."(282-3)


맺음말 전투적 극단주의의 배양


일체의 도덕과 윤리와 행동규범이 무시되고, 간교와 탐욕과 냉혈이 그 자리를 차지한 무법천지, "그런 '무질서'와 '아사리판'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남한 사회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좀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익 청년단체에게 테러와 폭력은 호구지책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포장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호구지책 행위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치행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출발한 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선 정치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사람을 불러모아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그 나름대로의 자율적 힘을 갖게 되어 역으로 정치행위를 규제하였다. 정치 패거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이 민족에 우선하면서 정치세력 간 타협은 점점 멀어져 갔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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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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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한(恨)과 욕망의 폭발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정국과 이후 6·25전쟁에서의 반공과 친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원한관계와 얽혀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했다. 또 그래서 그 시절에 저질러진 학살도 〈근대적 국가기구에 의해 감정 중립적, 관료적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전근대 시절 부족간의 전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무자비한 살인과 강간, 재산 탈취, 피학살자를 거의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면, 그건 대세 또는 힘이 센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였을 것이다." "피가 끓는 원한관계, 전통적인 유대관계, 대세 추종의 처세술 등과 같은 동기들로 인해 빚어졌거나 증폭된 갈등마저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의사(擬似)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9-10)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모든 갈등의 핵이었던 신탁통치 문제도 독립의 방법론적 문제였다기보다는 생사와 흥망의 이해득실의 문제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반공만 해도 그렇다. 일제는 공산주의 사상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걸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의 분열과 내부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이용하였다. 똑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좌익 독립운동 세력에게 혹독한 탄압을 집중시킴으로써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좌우 반목을 조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반공주의는 혹독한 탄압을 통해 식민지 민중의 사회적 활동을 비교적안전이 보장되는 연고주의에 의존케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후 한국 사회의 공공 영역의 발달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11-2)


1장 36년 묵은 한(恨)의 분출 / 1945년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38도선 이북만을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단 하루 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 군인 3천 명을 동원해 특별경찰대를 조직하고 건준이 접수한 경찰서·방송국 등을 다시 빼앗아 버렸다. 미군 진주 후에도 한국인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안재홍은 뒷날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고 개탄했다. 그렇다고 해서 건준의 모든 기능이 다 죽은 건 아니었다. 민중의 감격과 환희는 여전했다. 건준의 조직 확대도 계속되었다. 건준은 8월 22일에는 총무, 조직, 선전, 재정, 식량, 문화, 치안, 교통, 건설, 기획, 후생, 조사 등 12부와 서기 1국으로 발전했으며,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36-7)


"미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대부분 행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 하급 장교였다. 점령군은 모든 행정에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하지가 신문 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나의 정보원이다〉라고 실토했듯이, 미군은 일본군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의 자세로 한국인들을 대했다. 이는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미군에게 준 한국에 관한 정보의 주요 내용은 ① 한국인의 민도는 극히 낮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불결하고 도둑이 많다), ② 2대 정치세력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다, ③ 한국을 통치하려면 총독부 관료체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등이었다."(72-3)


"1946년 후반 일제 시기의 경찰 8천여 명 중 5천여 명이 미군정 경찰로 활동했으며, 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그런 경찰이 '극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것도 큰 문제였다. 패전국 일본에선 국립경찰이 〈대중적 지역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제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나 쉽게 사용되었다는 정당한 판단을 기초로 하여〉 미군의 점령 기간 중 폐지되었지만, 한국에선 일제 치하의 방식 그대로 존속된 것이다. 도 경찰국장은 도지사가 아니라 서울에 있는 경무부장이 직접 통솔했으므로 전국의 모든 경찰은 미군정의 일사분란한 지휘 체계하에 놓이게 되었다. 극적인 중앙집권성과 더불어 경찰력도 과거보다 더 강화되었다. 해방 전 조선 전체의 경찰은 2만 명(일본인 1만 2천 명)이었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남한 경찰력은 2만에서 2만 5천 명으로 늘어 사실상 배가되었다." "초강력 중앙집권체제로 강화된 경찰이 민주주의 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98-9)


"미군정은 군정의 자문행정기구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조치로 각 정치 세력의 통합을 원했다. 이승만이 공산당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거나 자신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어느 정당에 대해서도 뚜렷한 언질을 주지 않은 채 각 정당의 통일을 강조한 것도 바로 미군정의 그런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미군정의 그런 뜻을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는 용도로 이용하고자 했겠지만, 양측의 뜻이 맞아 구성된 것이 바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그러나 평화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임시정부를 추대하느냐, 인민공화국을 국외의 인사로 보강하느냐, 양자택일을 하자〉(공산당의 이현상), 〈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해야 한다〉(한국국민당의 원세훈),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은 대립된 것이 아니다. 국내외 혁명가들이 결합하자〉(건국동맹의 이걸소) 등의 주장 가운데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110-1)


"임정에겐 한민당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오랫동안 임정을 괴롭혀 온 고질적인 내분이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중경(임정)의 문제점은 정책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분파와 개별 인물들간의 파쟁에 있다〉며, 〈이는 이들 망명한 애국자들이 지난 26년 간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으로 혁명적 지도자로 행세하기 위해 투쟁하던 데에 그 뿌리가 있다〉고 했다."(132) "귀국시 1진과 2진을 나눈 문제를 둘러싼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간의) 갈등은 급기야 12월 6일 경교장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마저 무산시키고 말았다." "회의 기록을 위해 참석했던 장준하는 후일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라면서, 〈이 난국에 온 국민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개탄했다."(135)


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 1946년


한국군과의 언어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미군정이 1945년 12월 5일에 건립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광복군 출신들은 일본군 출신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불평하는 소수파〉가 되어 대부분 국방경비대의 고위직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미군정은 경비대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용사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국방경비대는 일본 식민지의 군사적 배경을 지닌 장교들의 집합 장소가 되고 말았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 군의(軍醫) 중좌 출신이었으며, 제1연대장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나중에 창설된 제5연대장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국방경비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던 미 군정청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으로 육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다."(209-10)


"미군정은 1945년 9월 17일 '정당은 오라' 성명을 통해 일종의 정당신고제를 택한 지 5개월여 만인 46년 2월 23일 법령 제55호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3인 이상의 집단이 어떠한 형태의 정치 활동을 하려면 군정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등록은 당원 명부에서부터 재정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요구하였다. 정당의 모든 걸 당국에 정확하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좌파정당의 비밀 활동을 규제하는 동시에 등록의무 불이행을 이류로 정당 해체가 가능토록 하였다. 등록하지 못한 조직은 회합이나 시위에 필요한 허가를 얻기도 어려웠다. 4월까지 134개 정당 및 단체가 등록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에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가 해당 조치를 〈일본인들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233-4)


"1946년 5월 8일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도 좌우파들을 대상으로 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게 되었다."(247) "미군정은 왜 그렇게 좌우합작에 열성을 보였던 걸까? 후일 미 군정청에 경제고문으로 있으면서 미소공위의 미국 측 대표단원이었던 로버트 키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군정은 중도파들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규식(1881년생)과 여운형(1885년생)은 서로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오래전부터 막역한 독립운동 동지들이었기에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약했거니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질 못해 이후 좌우 양쪽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게 된다."(251-2)


"해방 정국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서북청년회(서청)는 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훗날 제주 4·3항쟁 진압시 서청의 활동이 말해 주듯이, 서청은 종교적 수준의 반공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청의 간부인 문봉제의 회고에 따르면, 서청 사무실은 한민당 본부가 들어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는데,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는 '성분 심사' 등으로 매타작이 하루가 멀다시피 있었고, 그때마다 '살려달라'는 비명과 기절이 엇갈리는 생지옥이 연출되었다."(263-4) "'입만 살아 움직이는 지식인'보다 실천하는 '서청 단원'들이 차라리 더 순수하다며 그들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논리는 비단 선우휘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에게 깊이 침투돼 있는 것이었다."(266)


"우익청년단체 조직원 수가 총 32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건 당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정치단체나 정치지도자들도 청년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청년단체들이 정치인들로부터 자금을 일부 제공받는 동시에 경찰의 비호하에 폭력을 일삼으면서 사회 각계에서 기부금을 받아내는 것으로 연명하였다. 폭력성이 강한 테러의 경우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런 테러단원의 소득은 기업체에서의 임금 소득보다 훨씬 높았다. 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테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 "그랬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지만, 그 실상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강했다."(269-70)


극심한 식량난에서 비롯한 10월 대구항쟁이 핏빛 진압에 쓸려나가면서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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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과 저항 -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사회사, 한국근현대사회문화사총서 1
김영미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장 식민지 경성의 동화정책


# 조선 후기 한성부의 주민 통제수단

1. 행정관이 배치되는 공식적인 지방행정조직 : 부部와 방坊

2. 자발적으로 생겨난 주민조직 : 리里와 계契와 동洞

3. 오가통五家統으로 대표되는 더 작은 규모의 인보조직隣保組織

4. 세원稅源이 되는 개인을 직접 파악하기 위한 호적戶籍제도와 호패號牌제도


"과도적인 상황을 정리하고 경성부가 행정제도를 일원적으로 정비한 것은 1914년이었다. 그것은 부제府制라는 지방자치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부제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시제市制를 모방한 도시 지방자치제도이면서 일본인 중심의 도시재편정책이었다. 도시지역에만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하되 그 혜택이 일본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고안된 제도였다. 부제의 실시와 함께 일본인 거류민단이 폐지되었으며 일본인들의 자치에 대한 요구는 부府에 부윤府尹의 자문기관인 부협의회府協議會를 두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재조 일본인들은 그동안 누려온 거류민단의 자치적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부협의회제도를 통해 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를 일정하게 보장 받았으며 거류민단의 부채를 경성부로 떠넘기는 경제적 실익도 얻었다." "종래의 경성부 하부 행정구역이었던 부·방·계·동이 전부 폐지되고 모든 거주구역은 정町·동洞으로 일원화되었다."(57-8)


"일제 시기 도시지역 주민지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행정기관의 비중을 줄이고 행정보조기구의 역할을 극대화한 것이었다. 행정기관의 업무를 대신한 행정보조적 주민조직이 바로 정·동 총대제도였다." "총대는 주민에 의해 '선임'되고 부윤이 '승인'하는 존재로서 공공사무를 보조하는 행정보조자이다. 총대는 5명 이내의 평의원들의 보좌를 받게 되므로 각 동과 정에는 총대와 평의원 6인으로 행정보조기구가 구성된다. '총대'란 일본어 음독으로 '쇼다이'로서 대표자를 뜻한다. 동 총대란 곧 조선어로 동수洞首라는 뜻에 다름 아니다. 총대제도는 갑오개혁 이후나 대한제국 시기에 하부 행정을 보조하던 동수제도의 변형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후기 자연촌락에 설치된 동 존위제도의 식민지 근대적 현신이었다. 총대는 오늘날 동 회장의 전신으로 동 총대제도는 동사무소 제도의 기원이다."(60-1)


"1916년 주민자치제를 내세우며 총대제도를 도입한 경성부는 1933년 이를 보다 발전시킨 정·동회제도를 시행한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인 거주지역인 정과 조선인 거주지역인 동에 조직되는 정회·동회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세대주들의 모임이다. 조선에 도입되는 이 제도는 당시 일본 대도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일본에서 이러한 주민 조직은 '죠카이[町會]' 혹은 '죠나이카이[町內會]'로 불렸다."(102) "죠나이카이는 사회적 위기를 완화시켜주고 행정보조사무도 담당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행정당국은 이 조직의 효용성에 주목해 주민조직을 행정보조에 활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104) "다만 일본의 대도시에서는 죠나이카이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다음 국가적으로 정비되었다면 경성부 정·동회의 경우 처음부터 행정당국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차이가 있었다."(106)


"(1930년대 들어 급격해진) 지역의 발전은 지역유지 혹은 일부 주민들에게 동리의 개발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지역개발, 이것이 지역유지들이 정회에 참여하는 주요한 활동 명분이자 주민동원의 논리였다." "동리 발전과 생활환경의 개선은 지역유지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일반의 염원이기도 했다." "정회사업의 목표는 교통·상하수도·교육·위생 등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공동체문화를 만들어 나가며, 동리의 유해환경을 퇴출하는 것이다. 결국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살기 좋은 동네를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도시화의 진전과 더불어 1930년대 경성부에서는 여러 가지 도시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으며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도시민들은 이러한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할 조직이 필요하였으며 정회제도는 주민들의 그러한 요구를 하나의 포섭 지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122-3)


2장 전시총동원체제 하의 정회町會와 주민생활


"경성부에서는 전시체제기에 접어들면서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두 개의 주민조직이 결성되었다. 하나는 경성부 방호단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정신총동원조직이다. 경성부에서 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조직들이 빠른 시일에 결성될 수 있었던 토대는 주민조직으로 육성된 정회조직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성부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의 하부조직은 모두 정회조직을 토대로 하여 결성되었다. 따라서 1939년에 이르면 정회는 사실상 세 가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주민자치기구로서의 기존 정회, 방호단의 세포인 방호분단, 그리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조직인 하부단위 정연맹이다.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정연맹은 독자적인 물적 기반 없이 정회의 인력과 자금력을 동원하면서 결성되고 운영되었다. 곧 정회조직은 방호단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 정연맹의 물적 토대였다."(138-9)


"초기의 정회는 주민들의 수평적 모임이었지만, 전시에 이르면 정회의 외부와 내부에 연합회와 세포조직이 결성되어 정회는 경성부가 주민들로부터 효율적으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총동원조직으로 변모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총대제와 초기 정·동회제 그리고 전시 정회제에서 '자치'와 '동원'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회제하에서 '자치정신'과 '공동체정신'에 대한 강조는 효율적인 동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전시체제기 정회의 자율적 공간들이 축소되지만, 효율적인 동원과 통제를 위해 집단적 가치와 자발성은 오히려 한층 더 강조되었다. 일제가 강조하는 자치정신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국가적 이해에 헌신하는 태도를 의미하였다. 주민들이 생활공간의 주인으로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해가는 주민 자치의 내용은 국가의 이해와 합치되는 한에서 인정되었다."(144)


"그 전에는 정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배급제도가 시행되면서 이제는 주택의 소유자이건, 곁방살이를 하는 사람이건 정회사무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수와 직업과 연령에 따라 배급량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배급을 비롯한 모든 전시업무들이 정회와 애국반으로 통합된 체제는 도시에서 주민동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자유판매가 금지되고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도시민들에게 식량배급권은 무엇보다 강력한 주민통제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배급대상자의 근거가 되는 정적부는 곧 동원대상자들의 명부로 이용되었다. 정회와 애국반은 배급단위이자 주민동원조직이었으며, 정회 임원들과 애국반장은 통제경제 하에서 주민생활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원구조의 최말단에서 주민들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하는 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배급권을 담보로 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149-51)


3장 지배를 타고 넘어 : 동민洞民 사회의 지배와 저항


"1920~30년대는 위생문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시문제가 대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경성부의 주민사회는 일상적인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행정당국에 진정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출하였다. 이 시기 도시문제는 절대적인 인프라의 부족에서 연유하기도 하였지만 일제 행정당국의 차별적이고 권위적인 대민행정이 그 배경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역사회의 집단행동은 그러한 경성부의 차별적이고 부조리한 행정을 문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주민운동은 조선인 거주지역인 북촌과 빈민들이 밀집한 교외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162) "주민운동이 제기한 도시문제들은 생계의 직접적 위협, 생활상의 불편, 불합리한 자원배분, 지역개발 등 여러 차원의 이해와 관련되어 있다." "주민들은 지역을 단위로 결집하여 경성부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공공성과 불일치하는 행정 태만, 지역 차별 등의 과오에 대해서 항의하고 있다."(173)


# 주민운동의 전개양상

1. 오물(방치된 쓰레기와 분뇨) 처리 태만에 대한 항의

2. 경성부에 편입된 교외지역의 상하수도 시설 설치 요구

3. 경성부와의 연결도로 개수를 요구하는 도로·교통 문제

4. 북촌 지역의 교육예산 배정 문제(민족차별적인 행정)

5. 위생상·교육상 유해하거나 혐오스러운 시설 철거 요구

6. 이전능력이 전무한 무허가주택 주민들의 대책 요구

7. (제방 축조 같은) 재해 예방 시설과 구제 대책 마련 촉구


4장 해방 직후 동회의 정치세력화


"1945년 8월 16일 행정의 준공백 상태에서 출범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당면 임무를 질서 유지에 두었다. 해방 직후 건준이 처리해야 할 당면 업무들은 산적해 있었다. 도처에 산재해 있는 일본인들의 가옥과 공장·공공시설물에 대한 파괴 행위와 밀거래를 방지하는 일, 소위 적산이라 불리는 이 시설물들을 파악하고 접수해서 관리하는 일, 사적인 보복과 테러 행위를 금지하는 일, 식량창고를 접수해서 관리하고 식량을 안전하게 운반해서 전 시민들에게 배급하는 일 등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건준이 이 모든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기존의 주민조직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건준은 모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자치수단을 강구하고 자신의 직역職域을 지킴으로써 건국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자치를 위해 기존 정리조직町里組織을 활용할 수 있으며, 지역유지가 중심이 되어 청년층을 동원하거나 경방단警防團 조직을 개편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208-9)


"8월 19일 전경성총대연합회가 건준의 협력기관으로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며칠 전까지 총독부 하에서 활동하던 바로 그 정총대들의 조직이었다." "이와 같이 주민자치조직이자 전시체제기 주민동원조직이었던 정회는 해방과 함께 대두된 건국 준비의 필요성에 의해 재활용되었다. 정회뿐만 아니라 정회를 단위로 전시 방공防空과 치안유지 등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경방단이나 청년단 조직들도 식량배급이나 치안유지, 각종 자금과 인력동원을 위한 행동조직으로 재조직되었다."(210-2) "해방 이후에도 정·동町洞은 주민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단위이자 생활의 문제를 공동으로 풀어가는 단위, 그리고 지역엘리트들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치 행위나 문화계몽운동을 벌여나가는 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 활발하게 전개되는 국가건설운동은 이 공간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고 자치성을 높여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221)


"해방 직후 서울 주민들은 계급·계층적으로 보았을 때 절대다수가 실업자이거나 영세상인들이었다. 이는 해방 직후 서울에서 주민들이 자신들의 의사를 결집시키거나 정치세력들이 주민들을 동원하는 데에 정회와 애국반이 가장 중요한 조직이 되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미군정의 점령정책에 대한 좌익의 저항운동이 소위 '쌀 요구투쟁'으로 전개된 것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좌익은 식량위기를, 당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실업자 대중을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실업자 대중의 조직 방식으로 동회 단위의 '쌀 요구회'가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정회의 쌀 확보 노력은 초기에는 건의서 제출과 같은 온건한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좌익의 지도와 결합되면서 한층 적극적인 '쌀 요구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쌀 요구투쟁은 부분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 저지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241-2)


"정회조직에 대한 좌익의 통제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 수락을 결의한) 1946년 1월 3일 집회를 계기로 반탁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곧바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우익이 주도하는 정연합회를 별도로 만든 미군정은 다른 한편으로 좌익의 협동조합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지역과 직장 단위의 소비조합 결성을 지지하였다. 1946년 2월 1일 군정청에서는 각 도 도지사회를 소집하여 경제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대책을 토의한 결과 물가조정책의 하나로 소비조합을 각 부·군·읍·면의 지역과 직장에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소비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통해 중간 모리배의 개입을 없앤다는 점에서 사실상 좌익의 협동조합운동과 유사하다. 미군정은 협동조합운동의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좌익의 주도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비조합을 새롭게 제기함으로써 좌익의 협동조합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한 것이다."(258-60)


"배급제도의 정비와 좌익의 퇴조 속에서 동회·애국반 조직은 배급권을 매개로 강제성이 강회된 우익의 동원조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8월 15일 기념행사는 좌·우익 동원역량의 반전을 보여준다." "좌익 민전은 서울시가 이 행사를 위해 시내 각 동회라인을 통해 자금과 인원을 강제동원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1946년 중반부터 동회는 확실히 우익 정치세력의 자금과 인력동원의 중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승만의 도미渡美자금을 동민들에게 할당하거나, 통반장을 통하여 독촉 가입신청서를 돌리고 도장을 찍는 등 동회·애국반을 통한 강제동원 행위가 급증하였다."(265) "결국 동회조직을 통해서 주민들을 통제하고 동원해 가는 정치세력이나 그러한 정치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일반 민중 모두 식민지 전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속에서 이와 같은 강제적 주민동원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268)


5장 동원에서 통제로 : 정부수립과 동회의 국가기구화


"미군정은 1946년 8월 14일 해방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를 특별시로 승격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군정은 이 조치와 함께 서울시에 미국 도시에서처럼 시市 헌장憲章을 수여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서울시의 특별시 승격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해방 1주년, 곧 미군정 통치 1주년을 맞이하여 미국에 대한 이미지 쇄신이 필요했다. 식량 위기, 좌익 테러,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인해 민심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미군정은 해방 1주년 기념식을 거행해야 했다. 이에 이전부터 준비해온 특별시 승격조치를 해방 1주년 기념식에 맞추어 발표함으로써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울시에 도와 동등한 직능과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행정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46년 10월 1일부터는 행정구역 명칭을 변경하여 일본식 동명이던 정町은 동洞으로, 통通은 로路로, 정목丁目은 가街로 바꾸었다."(271-2)


"미군정에 의해 1947년 초 시행된 주민등록은 주민들의 기류 사항을 전면적으로 재확인하는 작업이었지만, 이 제도는 등록표의 발급과 연계됨으로써 일제 말기의 기류제도를 한층 보완한 새로운 주민통제방식이었다. 등록표는 발급과 관리 주체가 도시의 동회장과 지방의 면장이지만 전국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신분증이었다. 등록표의 가장 큰 특징은 키와 몸무게뿐 아니라 개인의 신체적 특징에 관한 사항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으며 개인의 유일성을 입증하는 지문 날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식량배급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가지고 다닐 것'이 명시되어 있어 항상적인 검문에 응하도록 되어 있다." "서울 시민들은 등록표와 생활필수품 통장을 가지고 가야 식량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시는 등록표제도의 시행과 더불어 1947년 4월 1일부터 가족단위의 배급통장제도를 폐지하고 개인별 통장제도를 시행하였다."(284)


"일제 시기 경방단의 재판이라는 비난 속에서 5·10선거를 사수하기 위해 결성된 동회 단위의 주민조직인 향보단은 5·10선거 과정에서 효율적인 주민통제조직으로 평가되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정권은 향보단을 해체한다고 발표하였지만 실제로는 향보단을 민보단으로 이름만 바꾸고 그대로 존속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이 조직은 향보단과 마찬가지로 청년층들을 민보단에 편입시켜 이들의 반정부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주민들이 반정부 활동을 주민들 스스로 감시하도록 만듦으로써 전 주민들을 경찰기구의 영향력 속에 편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민보단 조직은 우익계 청년단 통합체로서 출범한 대한청년단(총재 이승만, 단장 신성모)과 함께 청년방위대로 개편되었다. 청년방위대는 오늘의 향토예비군과 흡사한 조직이다." "청년방위대와 대한청년단은 한국전쟁 당시 향토 방위를 위한 주민 자위대의 주축이 되었다."(296-9)


"여순항쟁을 계기로 치안에 더욱 불안을 느낀 이승만정권은 방공防共을 위한 보다 강력한 주민조직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949년 4월초 서울시 경찰국에서는 기성애국반을 재편성하고 유숙계 제도를 시행하여, 수도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할 방침이라고 발표하였다." "1949년 애국반 개편의 특징은 향보단·민보단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애국반 개편의 목적이 일제 말기처럼 혹은 미군정 시기처럼 행정보조조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하부기구 곧 주민들의 자치적 사찰기구로서 개조시키는 것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개편 내용의 핵심은 주민동태에 대한 의무적 신고제도인 유숙계법의 시행에 있었으며, 이 법을 실행하는 단위로서 애국반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또 애국반에 대한 감시체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들을 이와 같은 감시체제 하에 두고 국민 전체의 동태를 전부 경찰이 파악하는 것이 이 제도의 목표이다."(29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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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현대사총서 27
김득중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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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는 여순사건이라는 기념비적이고 유혈적인 사건을 통해 탄생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공산주의자는 이제 '빨갱이'로 불리어졌다. 공산주의자라는 낱말이 정치적 지향을 일컫는 것에 반하여,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 존재로 멸시하는 용어였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인간의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당한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는 '빨갱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애국하는 일이고 민족을 위하는 일이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일로 생각되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46-7)


제1부 여순사건의 발발과 대중봉기로의 전화


#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봉기를 결정한 요인

1. 제주도 파병 명령에 대한 거부감

2. 숙군에 대한 두려움


"봉기 주동자는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이었는데도 2천여 명에 가까운 연대 병력이 일순간에 봉기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 지창수의 연설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이 사무쳐 있던 14연대 장병들에게 지창수의 연설은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제주도 인민을 진압하러 가는 14연대 출동을 동족상잔이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북한의 인민군이 남진하고 있고, 14연대는 인민군과 같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점이었지만 이것도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선동적 내용이었다. 두 번째로 14연대 봉기가 일어난 직후 많은 장교가 사살되었다는 점이 하사관이 주도한 봉기를 성공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대장을 비롯한 살아남은 14연대 지휘장교들은 봉기 소식을 듣고도 이를 제지할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78-9)


"연대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한민국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 군대에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동족 농민과 청년·부녀자들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병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간주했다. 여수봉기 뒤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성명성에는 쌀 수집이나 토지개혁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 강력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을 표출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병사위원회의 성명서만으로 볼 때,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제주도파병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1)


"조선경비대가 내용적으로는 군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경찰을 보조하는 하부 조직으로 창설된 것은 정부수립 후 국군으로 발전하는 조선경비대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첫째로 조선경비대가 전국적인 군대조직이 아니라 향토연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특히 해당 지역에서 모병을 했기 때문에, 사회운동으로 수배되어 경찰을 피해 다니던 인물들이 이미 군대에 들어와 있던 인맥을 통해 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게 되면서, 각 연대는 인적 구성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로 지방색을 띠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보조 조직을 표방하여 본격적인 무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나 인력 면에서 경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조선경비대의 주요 활동 목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있기보다는 폭동진압이나 치안유지 같이 남한에서 발생한 정치적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두어졌다."(104-6)


"(여순 봉기 직전에 시행되던) 숙군은 좌익 세력뿐만 경비대 내에서 김구를 추종하는 우파 세력 등, 숙군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을 제외한 모든 파벌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동기가 체포되었다 하더라도 14연대 남로당 세포가 받은 피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우익 장교를 체포할 만큼 숙군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바람이 언젠가는 남로당 세포 적발로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이었다." "백선엽은 만주 간도특설대에 있을 때 공산세력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고 극도의 반공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세포를 적발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선엽은 여수 14연대를 국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백선엽이 지목한 반란세력은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정보활동에 따라 체포된 오동기 전 14연대장은 김구를 추종하는 인물이었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123)


"여수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남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주로 군대의 물리력에 의지했다." "이처럼 봉기 확산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군대였다. 무장 세력은 한 지역을 방어하면서 그 안의 인민위원회 활동을 보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봉기군이 물러나면서 인민위원회도 동시에 무너졌다. 봉기군의 짧은 점령 기간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구체적인 정책을 펴지 못했고, 지역의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처단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같은 '반동세력'의 처단은 곧이어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피의 악순환을 불러 일으켰다. 벌교의 경우에서 보듯, 진압군은 우익 세력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장소에서 좌익 혐의자를 죽였다. 진압군의 점령 뒤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여수·순천과는 달리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봉기군 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산악지대를 끼고 있었던 구례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빨치산과 정부군과의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128)


"여수에서 경찰이 가장 많이 희생된 때는 14연대 봉기군 주력과 당 지도부가 진압군을 피해 여수를 빠져나가려 한 10월 24일 밤이었다. 서종현 등 소장 강경파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차 있던 경찰관 약 50여 명에게 총격을 가해 집단학살했다. 서종현 등은 단선반대투쟁에서 경찰에 잡혀 고문 받았던 경험으로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체포한 경찰들을 풀어주면 다시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전에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숙청은 조사와 선별 과정이 있었고, 죄가 가볍다고 생각되거나 양심적인 경찰로 판단된 인물들은 석방했다. 하지만 서종현이 이날 여수 경찰서에서 벌인 일은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의적 판단과 적개심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우익 세력 처단은 주로 친일파와 한민당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단독선거를 반대한 김구의 한독당 계열은 숙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153)


제2부 진압과 학살


"여순사건이 14연대의 봉기와 이에 따른 지방 좌익 세력 참여로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직후의 정부 대응은 정치적 반대 세력인 김구를 고사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민당이 스스로 야당의 역할을 자임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국회 내 소장파가 반이승만 세력으로 결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의 역학관계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의도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 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선전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듬해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210-1)


# 반대파를 옭아매려는 사건 규정

1. 이범석 국무장관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와 극우정객들(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독당 세력)이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발표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을 분명하게 부인하고 일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전남 현지에 암약하던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공보처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의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뒤바뀜을 통해 내부 갈등의 책임을 밖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211-3)


"국회의원에 대한 암살계획이 있다고 위협했던 윤치영 내무장관은 이제 국회 차원을 넘어 국민과 전 사회를 향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11월 8일 윤치영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윤치영은 이 보도의 출처를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보를 독점했지만,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에서는 이러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 이 발표의 수신인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민중이었다. 즉 윤치영은 남한의 여순사건이 가져올 신생정부의 위약성과 정통성 부재를 외부의 북한정권에 대항한 더 큰 규모의 반란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공산정권과 소련군의 학정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봉기가 일어나는 판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반란은 용납될 수 없다는 근거도 이 발표는 제공하고 있었다."(215-7)


"초기에 나타났던 군 명령계통의 혼란이 정리되는 과정은 결국 만주군 출신의 강경파가 진압작전에서 헤게모니를 잡아나가는 과정이었고, 이는 곧 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압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은 미군의 의도와도 부합했다. 4연대를 진압군으로 파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육군과 미 임시군사고문단 간에서 시각 차이가 나타났을 때, 결국에는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입장이 관철된 것에서 잘 드러나듯 진압작전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여수봉기를 군대 내의 공산주의 세포가 일으킨 반란으로 간주한 미군은 이를 시급히 진압하지 못하면 이승만 정권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활약은 과연 육군이 봉기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사권을 장악한 미군은 지휘 체계가 변화하는 것을 묵인했다."(244)


"(송호성 보좌역으로 파견된)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초석을 놓았고, 광범한 한국인 인맥을 기반으로 1980년대까지 한국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하우스만은 특히 미군정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장관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국무회의에 국방부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미군 당국은 진압작전에 직접 전투 병력을 출동시키지는 않았으나, 국군 각 부대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고문단원을 활용하여 진압작전을 통제하고 조언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지도(lead)하지 말고 조언(advise)하라'는 지시를 받은 고문단원들의 활용은 "미군을 직접 투입할 경우 발생하는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전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원하는 대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278-9)


"미군에게 여순 진압작전의 효과는 무엇이었나? 미 임시군사고문단원들은 정부 진압부대의 전투능력 부족, 유능한 지휘관의 부재, 인접부대간의 상호협동작전의 부재, 광범위한 포위망 형성에 따른 통신 두절, 부대의 좌익 침투, 장교와 사병간의 일체감 부족 등의 취약성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허점을 메운 것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에 의한 전반적인 작전계획수립, 병력집결지 선정, 작전지원 등이었다고 자평했다. 고문단원들은 여순 진압작전이 국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전에 국군은 다른 부대와 협력하여 대규모 작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여순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많은 부대가 참가함으로써, 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을 펴는 요령을 익혔다는 것이었다. 결국 군 지휘관과 참모 그리고 국군 부대에게 여순 진압작전은 하나의 훌륭한 연습장(training ground)이었다."(290-1)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온 협력자 색출 과정은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시민들은 도저히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협력자 색출은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붕괴시켰다. 협력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 간의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이 같은 분열은 지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먼저 반공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입구였다." "이승만 반공체제에서 거세되어야 할 잡초는 공산주의자로 상정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계속된 숙청작업을 통해 건설되었고, 여순사건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 공산주의 혐의자를 제거하는 하나의 경험과 실례로서 간직되었다."(314-5)


제3부 반공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


정부는 10월 20일 일체의 보도를 금지하는 '기재유보(記載留保)' 조치를 내리고 21일에야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정부 발표문에 사실상 의존하던 각 신문은 "전남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하고 점차 북진하고 있다, 14연대 반란은 극우와 극좌세력의 합작품이다, 반란세력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이범석 국무총리의 기자회견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다.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라면, 이 반란이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선전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사건의 원인에 대한 보도였다. 그리고 원인에 대한 판단은 어느 정도의 사태 파악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범석 국무총리가 여순사건 발발 원인을 발표할 당시, 정부는 사건의 진상과 진행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은 '골육상잔'이나 '천인공노' 같은 감정적 언어들을 사용하여 이 사건에 이미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374)


"당시 여순사건을 보도한 각 신문 기사의 끝에는 '군검열제(軍檢閱濟)'라는 꼬리가 달려있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기사는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각 신문들이 보도했던 양상을 살펴보면, 언론은 정부 발표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신문도 이 사실을 파고들거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김구가 '극우세력'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의식하여 사건 관여를 적극 부인하자 신문들은 단지 김구의 발언을 기사화 했을 뿐, 이에 대한 짤막한 해설도 싣지 않았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정부의 발표만이 실릴 뿐이었고, 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원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 사건의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과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문들의 이러한 무책임한 방임적 태도는 신문사가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377-8)


"반란자 즉 공산주의자들은 '내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족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이제 이들은 동족이 아니라 민족의 '원수'이자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민족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 민족'의 발견은 이승만 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같은 핏줄을 공유하고, 같은 지역에 살며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내 민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잔인무도한 악마로 변하였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을 통일하는 구심점은 반공이었으며, 반공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민족이 살아가야 할 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은 '반공 민족'을 탄생시키는 주요한 계기였다."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동족상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온적이고 동정적인 태도이며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었다."(413-4)


"여순 진압작전을 통해 국군은 군사적 경험을 익히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숙군은 한국군을 '정화'하는 계기였다. 대한민국 군대는 숙군을 통해 가장 강력한 반공 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 만들어졌다." "숙군을 추진한 조직과 인물들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군은 단지 군 조직을 정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숙군 과정에서 사용된 조직과 인적 자원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서 그대로 전용되었다.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에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직접 관여하면서 민간인 학살은 매우 조직적인 성격을 띠어갔다."(451-2)


"이제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엄숙한 임무를 떠맡은 '호국의 간성'으로 떠올랐다.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었다. 대통령령 제186호로 제정된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1949.9.28 제정)은 중앙학도호국단 아래에 시·도 학도호국단, 부·군·도 학도호국단 학교 학도호국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학교 자체가 군대식으로 조직되었고, 교사와 학생은 군사 교육을 받았다. 군대의 구호는 학교 체육 용어로 채택되었다. 1949년 말 학도호국단은 전국의 중학교 이상 1,146개 교, 총 단원 수는 35만 명을 통괄하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되었다.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군 장성과 지휘관들은 파워 엘리트로 진입했다. 군부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고, 지방의 부대사령관은 도지사, 시장,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지방 사정을 논의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대한민국 성립 초기부터 군은 비정치적인 집단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부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457-8)


#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주요 조치들

1. 대한청년단(한청) 발족(1948.12.19) : 국민회청년단·대동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민족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을 통합하고, 통합에 반대한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족청)은 해체

2. 교육계 '정화'(1949.1~3) : 문교부장관 안호상의 주도로 교원들의 사상검증과 숙청 진행

3. 학도호국단 창설(1949.4.22) : 학교 내에서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공식화하고 반공주의에 기반한 군사 교육 실시

4. 국민보도연맹 결성(1949.4.20) :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좌익 세력을 색출하고 섬멸하는 도구로 사용

5. 국가보안법 제정(1948.11.9~20) : 국가가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목적을 사전에 판단하여 특정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예비검속'을 입법으로 명문화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군경을 동원한 대량학살은 인민을 죽음의 공포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국민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두 번째는 법제적 폭력이었다. 법은 폭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법은 폭력의 화장한 얼굴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국민 형성 과정에서 '배제'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에서는 물리적, 법적 폭력이 광범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형성이 '포섭'보다는 '배제'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사회통제는 배제보다는 포섭에 중심을 두는 국민 형성의 방법이자 국가의 권력 기술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562)


# 사회통제를 통한 포섭 방식

1. 유숙계(1949.7~한국전쟁기) : 가족 이외의 친척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각 가정에 유숙할 경우 반장을 통해 경찰관에게 보고하도록 한 제도로서, 충실한 국민이 되기 위해 일상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해야 하는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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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의 정체 - 아베 신조의 군국주의의 꿈, 그 중심에 일본회의가 있다!
아오키 오사무 지음, 이민연 옮김 / 율리시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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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본회의의 현재


 1990년을 전후하여 소련을 필두로 하는 사회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면서 이른바 냉전체제는 종식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운동단체 등이 큰 피해를 보았지만, 반공을 최대의 결집 축으로 삼은 일본의 우파 역시 일종의 목표상실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운동을 다시 새롭게 부흥하고 재결집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냉전체제가 붕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97년에 일본회의를 결성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데, 결국 우파로서 내세운 결집축도 새롭게 정리되어 일종의 '원점회귀'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한다. p.31


2장 또 하나의 학생운동과 생장의 집


3장 꿈틀거리는 회귀 욕구


4장 풀뿌리 운동의 궤적


 일본회의가 가장 중시하는 주제들은 무엇보다 먼저 ① 천황, 황실, 천황제의 수호와 그 숭배, 이어서 ② 현행 헌법과 그로 상징되는 전후체제의 타파 , 그리고 이에 부수하는 것으로서 ③ '애국적'인 교육의 추진, ④ '전통적'인 가족관의 고집, ⑤ '자학적'인 역사관의 부정. 이로부터 파생한 그 밖의 주제를 다룰 수는 있어도 역시 핵심적인 운동대상은 이상 5가지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의 노하우 역시 원호법제화 운동 등에서의 '성공체험'을 통해 배운 수법, 오직 그것을 반복하여 진화·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운동의 경우에는 신사본청이나 신사계, 신흥종교단체와 같은 동원력, 자금력을 보유한 조직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국 각지에 '캐러밴대'라는 명칭의 회원부대를 파견하여 '풀뿌리 운동'으로 대량의 서명 모집과 지방조직 구축, 또는 지방의회에서의 결의와 의견서 채택을 추진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한다. 

 그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일본회의와 그 관련 단체, 종교단체 등이 연계하여 '국민회의'라는 명칭의 조직을 설립하고, 대규모 집회 등을 파상적으로 개최하여 시선을 끌면서 전국에서 모은 서명과 지방의회의 결의, 의견서를 갖고 중앙정계를 압박한다. 한편, 뜻을 같이 하는 국회의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원연맹이나 의원 모임을 결성하고, 여당과 정책결정자를 움직여 운동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한 토대로 일본회의는 지금까지 국회의원간담회나 지방의원연맹의 내실을 다지면서 가맹의원 수를 착실히 늘려왔다. pp.204-205


# 풀뿌리 운동의 주요 활동 내역

1. 정부 주최 '헌법기념식전' 규탄(1976)

2. 원호법제화 운동(~1979) : 일본의 공식연호를 기록방법으로 법제화하려는 운동. 1979년 6월 법으로 제정되었다. 

3. (헌법을 존중하는) 자민당 신강령 반대 운동(1985) 

4. 쇼와 천황 재위 60년 봉축운동(1985~86)

5. 《신편 일본사新編日本史》 편찬 운동(1985~86)


6. 건국기념일 식전 독자개최(1988) : 기원절(초대 천황인 신무 천황의 즉위일)을 건국기념일로 정립

7. 천황 방중 반대 운동(1992)

8. 전후 50년 국회결의(무라야마 담화) 등에 대한 반대 운동(1994~95)

9. 선택적 부부별성제도 반대 운동(1996~)

10. 국기국가법 제정 운동(1999)


11. 외국인(특히 재일한국인)의 지방참정권 반대 운동(1999~)

12.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지지와 (별도의) '국립추모시설' 계획에 대한 반대 운동(2001~02)

13. 야스쿠니 신사 20만 참배운동(2005)

14. 교육기본법 개정 운동(2000~06) : 헌법개정의 전초전으로 '공공의 정신, 도덕심'이나 '일본의 전통·문화 존중' '향토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교육기본법에 포함시키려는 운동 → 제1차 아베 정권에서 개정 교육기본법 설립(2006)

15. 여성 천황 허용의 황실규범 개정 반대 운동(2005~06)


 일본회의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이들을 아는 관계자는 그 집념과 끈기의 배후에 '종교심'이 있다고 지적한다.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 출신이기에 존재하는 '종교심'이 그렇다. 일본회의 자체가 신사본청을 필두로 하는 신사계로부터 두터운 후원을 받기 때문에 그 '종교심'에 의해 뒷받침되는 운동과 주장은 가끔 근대민주주의 대원칙을 쉽게 벗어나거나 짓밟는다. 

 천황 중심주의의 찬미와 국민주권의 부정, 제정일치에 대한 한없는 동경과 정교분리의 부정. 예를 들면 일본회의의 실무를 관장하는 가바시마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드문 전통을 지닌 국가이며, 국민주권이나 정교분리 등과 같은 사상은 일본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평소 태연하게 입에 담아왔다. 이는 일본회의의 운동과 동질성·연관성을 지닌 아베 정권의 위험성을 동시에 부각해준다. pp.206-207


5장 아베 정권과의 공명, 그 실상


 일본회의가 아베 정권을 좌지우지한다거나 지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양자가 공감하고 공명하면서 '전후체제의 타파'라는 공통목표를 향해 나아가 결과적으로 일본회의라는 존재가 거대해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한 것 같다. 즉 '위로부터'의 권력 행사를 통해 '전후체제를 타파'하려고 호령하는 아베 정권과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으로 '전후체제를 타파'하고자 집요하게 운동을 지속해온 일본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전후 처음으로 자전거 앞뒤 바퀴처럼 서로 작용하면서 오랜 비원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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