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탄생 -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 선인 현대사총서 27
김득중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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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는 여순사건이라는 기념비적이고 유혈적인 사건을 통해 탄생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공산주의자는 양민을 학살하는 살인마, 비인간, 악마로 간주되었고,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된 공산주의자는 이제 '빨갱이'로 불리어졌다. 공산주의자라는 낱말이 정치적 지향을 일컫는 것에 반하여,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적 존재로 멸시하는 용어였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동정조차 필요 없었다.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빨갱이'는 인간의 기본적 위엄과 권리를 박탈당한 '죽여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에는 '빨갱이'를 죽이는 것 자체가 애국하는 일이고 민족을 위하는 일이며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일로 생각되었다. '공산주의자'로부터 '빨갱이'로의 전환, 빨갱이를 비인간적인 악마로 형상화한 계기는 다름 아닌 여순사건이었다."(46-7)


제1부 여순사건의 발발과 대중봉기로의 전화


# 14연대 남로당 세포들이 봉기를 결정한 요인

1. 제주도 파병 명령에 대한 거부감

2. 숙군에 대한 두려움


"봉기 주동자는 (지창수 상사를 중심으로)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 소수이었는데도 2천여 명에 가까운 연대 병력이 일순간에 봉기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먼저 지창수의 연설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경찰에 대한 원한이 깊이 사무쳐 있던 14연대 장병들에게 지창수의 연설은 직접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었고, 제주도 인민을 진압하러 가는 14연대 출동을 동족상잔이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북한의 인민군이 남진하고 있고, 14연대는 인민군과 같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다른 점이었지만 이것도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선동적 내용이었다. 두 번째로 14연대 봉기가 일어난 직후 많은 장교가 사살되었다는 점이 하사관이 주도한 봉기를 성공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대장을 비롯한 살아남은 14연대 지휘장교들은 봉기 소식을 듣고도 이를 제지할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78-9)


"연대 대부분의 병사들은 "대한민국 국방군은 침공하는 외국 군대에 싸우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지, 동족 농민과 청년·부녀자들에게 총을 쏘고, 죽이기 위해 국방군에 들어온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 출병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간주했다. 여수봉기 뒤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성명성에는 쌀 수집이나 토지개혁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반면, 강력한 반미·반제국주의 의식을 표출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병사위원회의 성명서만으로 볼 때, 14연대 군인들의 봉기는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제주도파병을 반대하는 것에 초점이 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1)


"조선경비대가 내용적으로는 군대이지만 형식적으로는 경찰을 보조하는 하부 조직으로 창설된 것은 정부수립 후 국군으로 발전하는 조선경비대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다. 첫째로 조선경비대가 전국적인 군대조직이 아니라 향토연대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특히 해당 지역에서 모병을 했기 때문에, 사회운동으로 수배되어 경찰을 피해 다니던 인물들이 이미 군대에 들어와 있던 인맥을 통해 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게 되면서, 각 연대는 인적 구성으로 보아 상당한 정도로 지방색을 띠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경비대는 경찰의 보조 조직을 표방하여 본격적인 무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나 인력 면에서 경찰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조선경비대의 주요 활동 목표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있기보다는 폭동진압이나 치안유지 같이 남한에서 발생한 정치적 동요를 진정시키는 데 두어졌다."(104-6)


"(여순 봉기 직전에 시행되던) 숙군은 좌익 세력뿐만 경비대 내에서 김구를 추종하는 우파 세력 등, 숙군을 주도하고 있는 세력을 제외한 모든 파벌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동기가 체포되었다 하더라도 14연대 남로당 세포가 받은 피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우익 장교를 체포할 만큼 숙군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바람이 언젠가는 남로당 세포 적발로까지 이어지리라는 것이었다." "백선엽은 만주 간도특설대에 있을 때 공산세력을 토벌한 경험이 있었고 극도의 반공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세포를 적발하는 데 적합한 인물이었다." "백선엽은 여수 14연대를 국군 내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백선엽이 지목한 반란세력은 단지 공산주의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정보활동에 따라 체포된 오동기 전 14연대장은 김구를 추종하는 인물이었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123)


"여수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남 동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주로 군대의 물리력에 의지했다." "이처럼 봉기 확산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군대였다. 무장 세력은 한 지역을 방어하면서 그 안의 인민위원회 활동을 보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봉기군이 물러나면서 인민위원회도 동시에 무너졌다. 봉기군의 짧은 점령 기간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구체적인 정책을 펴지 못했고, 지역의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을 처단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같은 '반동세력'의 처단은 곧이어 진압군이 들어오면서 피의 악순환을 불러 일으켰다. 벌교의 경우에서 보듯, 진압군은 우익 세력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같은 장소에서 좌익 혐의자를 죽였다. 진압군의 점령 뒤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여수·순천과는 달리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봉기군 활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산악지대를 끼고 있었던 구례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빨치산과 정부군과의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128)


"여수에서 경찰이 가장 많이 희생된 때는 14연대 봉기군 주력과 당 지도부가 진압군을 피해 여수를 빠져나가려 한 10월 24일 밤이었다. 서종현 등 소장 강경파들은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차 있던 경찰관 약 50여 명에게 총격을 가해 집단학살했다. 서종현 등은 단선반대투쟁에서 경찰에 잡혀 고문 받았던 경험으로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체포한 경찰들을 풀어주면 다시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전에 인민위원회가 주도한 숙청은 조사와 선별 과정이 있었고, 죄가 가볍다고 생각되거나 양심적인 경찰로 판단된 인물들은 석방했다. 하지만 서종현이 이날 여수 경찰서에서 벌인 일은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자의적 판단과 적개심으로 이루어진 학살이었다." "우익 세력 처단은 주로 친일파와 한민당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단독선거를 반대한 김구의 한독당 계열은 숙청대상에서 제외되었다."(153)


제2부 진압과 학살


"여순사건이 14연대의 봉기와 이에 따른 지방 좌익 세력 참여로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직후의 정부 대응은 정치적 반대 세력인 김구를 고사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민당이 스스로 야당의 역할을 자임하고 김구의 한독당과 국회 내 소장파가 반이승만 세력으로 결집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의 역학관계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의도했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 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선전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 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듬해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210-1)


# 반대파를 옭아매려는 사건 규정

1. 이범석 국무장관은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와 극우정객들(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독당 세력)이 결탁한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발표


"김구가 여순사건 관련을 분명하게 부인하고 일반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전남 현지에 암약하던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조직적으로 사건을 일으켰다는 공보처의 발표는 "정부 조직의 한 부분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은 이런 식의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뒤바뀜을 통해 내부 갈등의 책임을 밖의 확인되지 않은 실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지배층의 실정을 은폐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외부의 사주로 몰아감으로써 사건 주체의 정당성을 박탈해버리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었다."(211-3)


"국회의원에 대한 암살계획이 있다고 위협했던 윤치영 내무장관은 이제 국회 차원을 넘어 국민과 전 사회를 향해서 발언하기 시작했다. 11월 8일 윤치영은 북한의 최소한 8개 도시에서 공산지배에 반대하는 광범한 폭동이 1주일 전부터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윤치영은 이 보도의 출처를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보를 독점했지만,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북한에서는 이러한 폭동이 일어난 사실이 없다는 점이다." "실제 이 발표의 수신인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 민중이었다. 즉 윤치영은 남한의 여순사건이 가져올 신생정부의 위약성과 정통성 부재를 외부의 북한정권에 대항한 더 큰 규모의 반란에 관심을 돌리게 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공산정권과 소련군의 학정에 반대하는 수만 명의 봉기가 일어나는 판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적 색채를 띤 반란은 용납될 수 없다는 근거도 이 발표는 제공하고 있었다."(215-7)


"초기에 나타났던 군 명령계통의 혼란이 정리되는 과정은 결국 만주군 출신의 강경파가 진압작전에서 헤게모니를 잡아나가는 과정이었고, 이는 곧 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압군 내부에서 반공주의 노선이 강화되는 과정은 미군의 의도와도 부합했다. 4연대를 진압군으로 파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육군과 미 임시군사고문단 간에서 시각 차이가 나타났을 때, 결국에는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입장이 관철된 것에서 잘 드러나듯 진압작전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하에 있었다. 여수봉기를 군대 내의 공산주의 세포가 일으킨 반란으로 간주한 미군은 이를 시급히 진압하지 못하면 이승만 정권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활약은 과연 육군이 봉기군을 성공적으로 진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사권을 장악한 미군은 지휘 체계가 변화하는 것을 묵인했다."(244)


"(송호성 보좌역으로 파견된) 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에 초석을 놓았고, 광범한 한국인 인맥을 기반으로 1980년대까지 한국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하우스만은 특히 미군정시기와 이승만 정권 초기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장관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국무회의에 국방부장관의 고문관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미군 당국은 진압작전에 직접 전투 병력을 출동시키지는 않았으나, 국군 각 부대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고문단원을 활용하여 진압작전을 통제하고 조언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지도(lead)하지 말고 조언(advise)하라'는 지시를 받은 고문단원들의 활용은 "미군을 직접 투입할 경우 발생하는 희생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전을 완전히 통제함으로써 원하는 대로 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278-9)


"미군에게 여순 진압작전의 효과는 무엇이었나? 미 임시군사고문단원들은 정부 진압부대의 전투능력 부족, 유능한 지휘관의 부재, 인접부대간의 상호협동작전의 부재, 광범위한 포위망 형성에 따른 통신 두절, 부대의 좌익 침투, 장교와 사병간의 일체감 부족 등의 취약성을 이구동성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허점을 메운 것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에 의한 전반적인 작전계획수립, 병력집결지 선정, 작전지원 등이었다고 자평했다. 고문단원들은 여순 진압작전이 국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전에 국군은 다른 부대와 협력하여 대규모 작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나, 여순 진압작전에는 38선 경비임무를 맡은 부대를 제외한 남한의 많은 부대가 참가함으로써, 국군은 처음으로 연합작전을 펴는 요령을 익혔다는 것이었다. 결국 군 지휘관과 참모 그리고 국군 부대에게 여순 진압작전은 하나의 훌륭한 연습장(training ground)이었다."(290-1)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온 협력자 색출 과정은 어떤 이의도 용납하지 않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시민들은 도저히 저항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협력자 색출은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붕괴시켰다. 협력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 간의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이 같은 분열은 지역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먼저 반공국민이 되어야만 했다. 반공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입구였다." "이승만 반공체제에서 거세되어야 할 잡초는 공산주의자로 상정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계속된 숙청작업을 통해 건설되었고, 여순사건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 공산주의 혐의자를 제거하는 하나의 경험과 실례로서 간직되었다."(314-5)


제3부 반공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


정부는 10월 20일 일체의 보도를 금지하는 '기재유보(記載留保)' 조치를 내리고 21일에야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정부 발표문에 사실상 의존하던 각 신문은 "전남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순천을 점령하고 점차 북진하고 있다, 14연대 반란은 극우와 극좌세력의 합작품이다, 반란세력이 살인과 방화를 일삼고 있다는 이범석 국무총리의 기자회견 내용을 그대로 받아 보도했다.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라면, 이 반란이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선전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사건의 원인에 대한 보도였다. 그리고 원인에 대한 판단은 어느 정도의 사태 파악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범석 국무총리가 여순사건 발발 원인을 발표할 당시, 정부는 사건의 진상과 진행방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언론은 '골육상잔'이나 '천인공노' 같은 감정적 언어들을 사용하여 이 사건에 이미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374)


"당시 여순사건을 보도한 각 신문 기사의 끝에는 '군검열제(軍檢閱濟)'라는 꼬리가 달려있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기사는 내용이 삭제되었다." "당시 각 신문들이 보도했던 양상을 살펴보면, 언론은 정부 발표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이 극우와 극좌세력이 연합해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는 처음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어느 신문도 이 사실을 파고들거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김구가 '극우세력'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의식하여 사건 관여를 적극 부인하자 신문들은 단지 김구의 발언을 기사화 했을 뿐, 이에 대한 짤막한 해설도 싣지 않았다. 신문지상에는 연일 정부의 발표만이 실릴 뿐이었고, 이 사건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원인),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이 사건의 성격은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과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문들의 이러한 무책임한 방임적 태도는 신문사가 현지에 특파원을 파견한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377-8)


"반란자 즉 공산주의자들은 '내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족의 범주에서 배제되었다. 이제 이들은 동족이 아니라 민족의 '원수'이자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공산주의냐 반공이냐 라는 이데올로기적 기준이 민족의 구성원을 규정하는 1차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반공 민족'의 발견은 이승만 정권이 직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교두보였다. 같은 핏줄을 공유하고, 같은 지역에 살며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내 민족'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잔인무도한 악마로 변하였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을 통일하는 구심점은 반공이었으며, 반공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이 민족이 살아가야 할 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여순사건은 '반공 민족'을 탄생시키는 주요한 계기였다." "이승만 정부로서는 이 사건을 '동족상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미온적이고 동정적인 태도이며 올바르지 않은 관점이었다."(413-4)


"여순 진압작전을 통해 국군은 군사적 경험을 익히는 데 성공했지만, 아직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된 숙군은 한국군을 '정화'하는 계기였다. 대한민국 군대는 숙군을 통해 가장 강력한 반공 조직체이자 반공이데올로기의 보루로 만들어졌다." "숙군을 추진한 조직과 인물들이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 전후 시기의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군은 단지 군 조직을 정화하는 데 머물지 않았으며, 숙군 과정에서 사용된 조직과 인적 자원들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게 벌어졌던 민간인 학살에서 그대로 전용되었다. 1948년 제주도와 여순 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에 군 정보기관과 헌병대 등이 직접 관여하면서 민간인 학살은 매우 조직적인 성격을 띠어갔다."(451-2)


"이제 군대는 나라를 지키는 엄숙한 임무를 떠맡은 '호국의 간성'으로 떠올랐다.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었다. 대통령령 제186호로 제정된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1949.9.28 제정)은 중앙학도호국단 아래에 시·도 학도호국단, 부·군·도 학도호국단 학교 학도호국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학교 자체가 군대식으로 조직되었고, 교사와 학생은 군사 교육을 받았다. 군대의 구호는 학교 체육 용어로 채택되었다. 1949년 말 학도호국단은 전국의 중학교 이상 1,146개 교, 총 단원 수는 35만 명을 통괄하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되었다. 군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군 장성과 지휘관들은 파워 엘리트로 진입했다. 군부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고, 지방의 부대사령관은 도지사, 시장,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지방 사정을 논의하고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대한민국 성립 초기부터 군은 비정치적인 집단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부문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457-8)


#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주요 조치들

1. 대한청년단(한청) 발족(1948.12.19) : 국민회청년단·대동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민족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을 통합하고, 통합에 반대한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족청)은 해체

2. 교육계 '정화'(1949.1~3) : 문교부장관 안호상의 주도로 교원들의 사상검증과 숙청 진행

3. 학도호국단 창설(1949.4.22) : 학교 내에서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공식화하고 반공주의에 기반한 군사 교육 실시

4. 국민보도연맹 결성(1949.4.20) :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한다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좌익 세력을 색출하고 섬멸하는 도구로 사용

5. 국가보안법 제정(1948.11.9~20) : 국가가 어떤 집단이나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목적을 사전에 판단하여 특정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예비검속'을 입법으로 명문화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군경을 동원한 대량학살은 인민을 죽음의 공포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국민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두 번째는 법제적 폭력이었다. 법은 폭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법은 폭력의 화장한 얼굴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국민 형성 과정에서 '배제'의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대한민국 국민 형성에서는 물리적, 법적 폭력이 광범하게 사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 형성이 '포섭'보다는 '배제'를 우선시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 번째는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사회통제는 배제보다는 포섭에 중심을 두는 국민 형성의 방법이자 국가의 권력 기술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562)


# 사회통제를 통한 포섭 방식

1. 유숙계(1949.7~한국전쟁기) : 가족 이외의 친척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각 가정에 유숙할 경우 반장을 통해 경찰관에게 보고하도록 한 제도로서, 충실한 국민이 되기 위해 일상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경계해야 하는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을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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