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머리말 한(恨)과 욕망의 폭발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정국과 이후 6·25전쟁에서의 반공과 친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원한관계와 얽혀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했다. 또 그래서 그 시절에 저질러진 학살도 〈근대적 국가기구에 의해 감정 중립적, 관료적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전근대 시절 부족간의 전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무자비한 살인과 강간, 재산 탈취, 피학살자를 거의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면, 그건 대세 또는 힘이 센 쪽으로 기우는 기회주의였을 것이다." "피가 끓는 원한관계, 전통적인 유대관계, 대세 추종의 처세술 등과 같은 동기들로 인해 빚어졌거나 증폭된 갈등마저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의사(擬似) 이데올로기 투쟁'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9-10)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갈등의 핵심은 '기득권 투쟁'과 '면죄부 투쟁'이었다. 일제 36년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과거에 대한 평가와 그 평가에 따른 이해득실의 문제를 둘러싼 혈투였다. 이데올로기는 그 과정에서 도입된 장식물의 성격이 강했다.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모든 갈등의 핵이었던 신탁통치 문제도 독립의 방법론적 문제였다기보다는 생사와 흥망의 이해득실의 문제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반공만 해도 그렇다. 일제는 공산주의 사상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걸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의 분열과 내부 갈등을 부추기는 데 이용하였다. 똑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좌익 독립운동 세력에게 혹독한 탄압을 집중시킴으로써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좌우 반목을 조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반공주의는 혹독한 탄압을 통해 식민지 민중의 사회적 활동을 비교적안전이 보장되는 연고주의에 의존케 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이후 한국 사회의 공공 영역의 발달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쳤다."(11-2)


1장 36년 묵은 한(恨)의 분출 / 1945년


"조선총독부는 소련군이 38도선 이북만을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단 하루 만에 행정권 이양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할 방침이다〉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일본 군인 3천 명을 동원해 특별경찰대를 조직하고 건준이 접수한 경찰서·방송국 등을 다시 빼앗아 버렸다. 미군 진주 후에도 한국인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안재홍은 뒷날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고 개탄했다. 그렇다고 해서 건준의 모든 기능이 다 죽은 건 아니었다. 민중의 감격과 환희는 여전했다. 건준의 조직 확대도 계속되었다. 건준은 8월 22일에는 총무, 조직, 선전, 재정, 식량, 문화, 치안, 교통, 건설, 기획, 후생, 조사 등 12부와 서기 1국으로 발전했으며, 8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를 설치할 만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되었다."(36-7)


"미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대부분 행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 하급 장교였다. 점령군은 모든 행정에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 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하지가 신문 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나의 정보원이다〉라고 실토했듯이, 미군은 일본군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의 자세로 한국인들을 대했다. 이는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미군에게 준 한국에 관한 정보의 주요 내용은 ① 한국인의 민도는 극히 낮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불결하고 도둑이 많다), ② 2대 정치세력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다, ③ 한국을 통치하려면 총독부 관료체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등이었다."(72-3)


"1946년 후반 일제 시기의 경찰 8천여 명 중 5천여 명이 미군정 경찰로 활동했으며, 경찰 간부의 80% 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그런 경찰이 '극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것도 큰 문제였다. 패전국 일본에선 국립경찰이 〈대중적 지역통제를 받지 않았으므로 전제적 억압의 도구로 너무나 쉽게 사용되었다는 정당한 판단을 기초로 하여〉 미군의 점령 기간 중 폐지되었지만, 한국에선 일제 치하의 방식 그대로 존속된 것이다. 도 경찰국장은 도지사가 아니라 서울에 있는 경무부장이 직접 통솔했으므로 전국의 모든 경찰은 미군정의 일사분란한 지휘 체계하에 놓이게 되었다. 극적인 중앙집권성과 더불어 경찰력도 과거보다 더 강화되었다. 해방 전 조선 전체의 경찰은 2만 명(일본인 1만 2천 명)이었지만, 미군정 치하에서 남한 경찰력은 2만에서 2만 5천 명으로 늘어 사실상 배가되었다." "초강력 중앙집권체제로 강화된 경찰이 민주주의 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98-9)


"미군정은 군정의 자문행정기구를 수립하기 위한 사전조치로 각 정치 세력의 통합을 원했다. 이승만이 공산당에 대해 호감을 표명한 거나 자신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어느 정당에 대해서도 뚜렷한 언질을 주지 않은 채 각 정당의 통일을 강조한 것도 바로 미군정의 그런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미군정의 그런 뜻을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하는 용도로 이용하고자 했겠지만, 양측의 뜻이 맞아 구성된 것이 바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그러나 평화공존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문제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임시정부를 추대하느냐, 인민공화국을 국외의 인사로 보강하느냐, 양자택일을 하자〉(공산당의 이현상), 〈임시정부를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해야 한다〉(한국국민당의 원세훈),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은 대립된 것이 아니다. 국내외 혁명가들이 결합하자〉(건국동맹의 이걸소) 등의 주장 가운데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110-1)


"임정에겐 한민당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였지만, 더욱 큰 문제는 오랫동안 임정을 괴롭혀 온 고질적인 내분이었다." "미군정의 한 보고서는 〈중경(임정)의 문제점은 정책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분파와 개별 인물들간의 파쟁에 있다〉며, 〈이는 이들 망명한 애국자들이 지난 26년 간 먹고살기 위해 투쟁하는 한편으로 혁명적 지도자로 행세하기 위해 투쟁하던 데에 그 뿌리가 있다〉고 했다."(132) "귀국시 1진과 2진을 나눈 문제를 둘러싼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계열간의) 갈등은 급기야 12월 6일 경교장에서 열린 첫 국무회의마저 무산시키고 말았다." "회의 기록을 위해 참석했던 장준하는 후일 〈환국한 임정 각료들 안에서까지 일치구국의 염이 저렇듯 허사가 된다면 이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라면서, 〈이 난국에 온 국민의 기대가 임정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는 국무회의가 된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개탄했다."(135)


2장 좌우(左右) 갈등의 폭발 / 1946년


한국군과의 언어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미군정이 1945년 12월 5일에 건립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광복군 출신들은 일본군 출신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소란스럽고 불평하는 소수파〉가 되어 대부분 국방경비대의 고위직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미군정은 경비대 장교는 투옥 경력이 없어야 된다고 규정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용사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국방경비대는 일본 식민지의 군사적 배경을 지닌 장교들의 집합 장소가 되고 말았다.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원용덕은 만주 군의(軍醫) 중좌 출신이었으며, 제1연대장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이자 경비대 총참모장 정일권은 만주군관학교, 나중에 창설된 제5연대장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국방경비대 창설의 산파역을 맡았던 미 군정청 국방부 고문 이응준도 일본육사 26기생으로 육군 대좌(대령) 출신이었다."(209-10)


"미군정은 1945년 9월 17일 '정당은 오라' 성명을 통해 일종의 정당신고제를 택한 지 5개월여 만인 46년 2월 23일 법령 제55호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3인 이상의 집단이 어떠한 형태의 정치 활동을 하려면 군정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등록은 당원 명부에서부터 재정 상태에 이르기까지 정당에 관한 모든 정보를 요구하였다. 정당의 모든 걸 당국에 정확하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좌파정당의 비밀 활동을 규제하는 동시에 등록의무 불이행을 이류로 정당 해체가 가능토록 하였다. 등록하지 못한 조직은 회합이나 시위에 필요한 허가를 얻기도 어려웠다. 4월까지 134개 정당 및 단체가 등록하였는데, 이는 미군정이 3월 20일로 예정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전에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보다 나은 정보를 얻고 궁극적으로 좌익들을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인민보』가 해당 조치를 〈일본인들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고약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233-4)


"1946년 5월 8일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도 좌우파들을 대상으로 한 좌우합작을 구상하게 되었다."(247) "미군정은 왜 그렇게 좌우합작에 열성을 보였던 걸까? 후일 미 군정청에 경제고문으로 있으면서 미소공위의 미국 측 대표단원이었던 로버트 키니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군정은 중도파들을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과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규식(1881년생)과 여운형(1885년생)은 서로 형님, 아우하는 사이로 오래전부터 막역한 독립운동 동지들이었기에 대화가 잘 통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약했거니와 권모술수에도 능하질 못해 이후 좌우 양쪽으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게 된다."(251-2)


"해방 정국의 우익 청년단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서북청년회(서청)는 46년 11월 30일 대한혁신청년회, 함북청년회, 황해회청년부, 북선청년회, 평안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회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훗날 제주 4·3항쟁 진압시 서청의 활동이 말해 주듯이, 서청은 종교적 수준의 반공 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청의 간부인 문봉제의 회고에 따르면, 서청 사무실은 한민당 본부가 들어 있는 동아일보 사옥에 있었는데, 동아일보 사옥 옥상에서는 '성분 심사' 등으로 매타작이 하루가 멀다시피 있었고, 그때마다 '살려달라'는 비명과 기절이 엇갈리는 생지옥이 연출되었다."(263-4) "'입만 살아 움직이는 지식인'보다 실천하는 '서청 단원'들이 차라리 더 순수하다며 그들의 폭력을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논리는 비단 선우휘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에게 깊이 침투돼 있는 것이었다."(266)


"우익청년단체 조직원 수가 총 32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건 당시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대규모 실업과 경제난 때문이었다. 정치단체나 정치지도자들도 청년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청년단체들이 정치인들로부터 자금을 일부 제공받는 동시에 경찰의 비호하에 폭력을 일삼으면서 사회 각계에서 기부금을 받아내는 것으로 연명하였다. 폭력성이 강한 테러의 경우엔 높은 소득을 올릴 수도 있었다. 그런 테러단원의 소득은 기업체에서의 임금 소득보다 훨씬 높았다. 46년 8월 전평 조합원에 대한 대한노총의 테러에 가담한 청년 테러단원은 하루 300~500원을 받고 동원되었다. 이때 전 산업 남성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은 61원이었다." "그랬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겉으로는 이데올로기 투쟁의 양상을 강하게 띠었지만, 그 실상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강했다."(269-70)


극심한 식량난에서 비롯한 10월 대구항쟁이 핏빛 진압에 쓸려나가면서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3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