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3장 분열에서 분단으로 / 1947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이승만의 대미(對美) 로비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는 원래 5~6주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이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체류를 연장해 가면서 미국 정부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제정세는 이승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47년 3월 5일,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유럽에는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3월 12일 이승만에게 큰 도움이 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그날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는 선언을 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목적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 침략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23-5)


"여운형의 암살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서중석은 〈1947년 6월 28일 하지는 이승만에게 이승만과 김구가 계획 중이라는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구하는 서한을 은밀히 보내지 않고 '공개적으로' 보냈는데, 그 이후 미군정의 태도를 보면 여운형의 암살을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적으로' 경고만 하고는 방관하였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1947년 7월 19일쯤의 시점에서 미국으로 볼 때 김규식과는 달리 여운형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냉전의 길목으로 깊숙이 들어서고 있었다. 한국 문제는 더 이상 소련과 협의하여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좌우합작위의 좌측 수석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활동 정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자, 좌우합작위는 활동을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인 47년 12월 6일 공식 해체되었다."(51-2)


'하나의 민주공화국' 수립을 위해 46년 2월 9일 이래, 다섯 차례나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은 1886년생, 김일성은 1912년생으로, 여운형이 26년 연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엔 더욱 장유유서(長幼有序) 의식이 강하던 때였고 그런 의식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일성과 김구·이승만은 36~37년의 나이 차이가 났는데, 바로 이런 나이 차이가 세대간 의식 차이와 더불어 남북협상을 어렵게 만든 점도 전혀 없진 않았을 것이다. 어찌됐건 방북, 그것도 위험을 무릅쓰면서 38선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여운형의 측근들이 그런 장유유서의 질서를 언급하면서 반대할 때에 여운형은 〈나라의 통일독립을 위해 선후배나 체면을 가릴 때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하는 정병준은 해방정국에서 〈북한 방문을 통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적 연대 형성에 노력한 것은 여운형뿐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58-9)


4장 욕망과 폭력의 제도화 / 1948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106) "육지 응원 경찰의 대거 투입으로 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응원 경찰이 1천 500명이었는데,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섬'이라는 인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하게 된다."(113-4)


"해방 후부터 계속 제기되어 온 친일파 처단 문제는 1948년 8월 5일 제헌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의원 김웅진의 발의로 다시 본격 논의되기 시작했다.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둘러싸고 공방이 치열하던 8월 26일 국회의원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神聖)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족안(反族案)을 철회하라.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走狗)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 쓴 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 뭉쳐야 한다.〉 8월 27일엔 2명의 방청객이 국회의사당 안에서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삐라를 살포했다. 이런 반발 움직임을 가리켜 『독립신보』 8월 27일자는 〈친일파들이 발악〉한다고 평하였다." "특히 친일파의 아성이라 할 경찰이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160-1)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 "〈경찰은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는 것이 상식처럼 돼 있었고, 일반 청년들도 경찰에 억울하게 당하고 나면 그들을 한번 봐주기 위해 일부러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본 것도 갈등을 키웠다."(174-5)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잠자고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189-91)


5장 반공의 종교화 / 1949년


"한민당은 신익희와 지청천 세력을 흡수해 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민국당은 49년 4월 말에 이르러 소속의원 69명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승만은 힘이 달려 이들과 어느 정도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1인 집권체제를 원하는 이승만으로선 무언가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장악할 수 없는 정당 체계에는 고개를 돌리고 정치적 과제까지도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한 관료조직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3월경에 이르러 좌익이 거의 소멸되었다는 건 그런 프로젝트의 나아갈 바를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좌익의 산악 게릴라전은 49년 9월 최고조에 달해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지만, 합법 공간 및 일상적인 민생 영역에서의 좌익은 49년 3월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된 뒤 붕괴되었다. 남로당의 궤멸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한에서 이렇다 할 인민 봉기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225-6)


유사 국가 기구에 의한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학도호국단이다. "학도호국단은 이미 48년 10월에 구성된 대한청년단과 49년 8월에 재편성돼 나타날 국민회와 함께 3대 반관(半官) 또는 유사 국가기구적 대중조직으로 '3위1체'를 구성했다." "대한민국 국적이 있는 18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모두 국민회에 가입해야만 했으며, 그와 동시에 성년 여성은 대한부녀회, 청년은 대한청년단, 학생은 학도호국단에 가입해야만 했다. 이것 말고 청년들은 민보단, 소방단, 의용단에도 가입해야 했다. 국민회비를 내지 않으면 식량배급통장이나 물자의 배급을 중지한다고 위협했고, 청년단비를 내지 않으면 38선에 보낸다고 위협했다. 이 모든 조직의 총재나 명예총재는 모두 이승만이었고, 대한부녀회만 프란체스카가 총재를 맡았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법률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매우 기이한 이중적 국가체제 운영 방식이었던 것이다."(226-7)


"학도호국단은 족청의 부단장을 역임하였다가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안호상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사상에 근거하여 안호상의 지도하에 만들어졌다. 안호상은 '국민사상을 귀일(歸一)' 시키기 위한 일민주의 사상 보급에 문교 행정의 중점을 두었다." "『일민주의 개술』에서 이승만은 〈하나가 미처 되지 못한 바 있으면 하나를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만드는 데에 장애가 있으면 이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민은 생각도 같고 행동도 같아야만 하며, 동일성과 동질성이 생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일민이다. 이 일민, 곧 한 민족에는 오직 한 주의만이 그 지도원리가 된다. 만일 두 주의들, 세 주의들을 지도원리로 한다면 우리는 한 민족이 아니라, 도리어 벌써 두 민족, 세 민족이 되고 말아, 한 민족의 부정이요 멸망이다.〉 일민주의 추종자들은 피를 강조했다. 핏줄과 혈통이 주된 화두였다. 히틀러의 게르만 순혈론과 '피와 땅'과 거의 같은 담론이었다."(227-8)


6월 5일 이승만 정권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을 만들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그냥 가입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동지나 아는 사람들을 고발하는 자백서를 쓰게끔 강요받았으며, 그밖에도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야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은 민중 속에 침투한 정보망이자 동원망〉이었다며, 〈자수와 밀고가 장려되었다. 이 자수와 밀고는 한국전쟁 전후로 남한과 북한이 공히 동원했던 충성을 추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했다." "보도연맹은 더 나아가 '알아서 기는 문화'와 '충성경쟁'을 낳게 했다. 박명림은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며,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고 했다."(248-9)


"김구는 이승만과는 다른 인물이었지만, 동질적인 세대적 특성은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1875년생, 김구는 1876년생이었다. 이는 이들이 30년 가까이 왕정체제하에서 산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한다. 이들의 왕정체제 이후의 삶은 내내 복고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아니 이들의 전 생애가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 투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들이 해방정국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엔 이미 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말은 어떻게 했을망정, 일상적 영역에선 생물학적 연령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권위주의와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다."(267) "이는 이들에 비해 36~37년이나 젊었던 김일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거쳐야 할 사회 발달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해방 직후에도 왕조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던 바, 김일성은 그 전통에 편승하여 자신에 대한 우상화 작업을 이승만 못지않게 해 나갔다."(271-2)


"해방정국을 주도한 '통역 정치'의 다른 한쪽엔 '기독교 정치', 특히 '개신교 정치'가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우대를 받고 미국인들에게 접근하는 데엔 영어 다음으로 개신교가 유리하였다는 뜻이다."(279) "개신교는 '반공' 및 '친미'의 강력한 보증수표였다. 개신교 스스로 '반공'과 '친미'를 위해 적극적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띠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은 그걸 부추겼다. 해방 후 장로교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 가운데 하나였던 한경직은 45년 9월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가 46년 1월 5일 조만식의 연금 이후 월남했다. 한경직은 일본 천리교회가 남기고 간 재산을 미군정으로부터 접수하여 영락교회를 세웠다. 공산주의를 반드시 베어야만 할 '괴물'이며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으로 간주한 한경직은 신자들의 정치참여를 촉구하였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제도는 서북청년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나중에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렸다."(282-3)


맺음말 전투적 극단주의의 배양


일체의 도덕과 윤리와 행동규범이 무시되고, 간교와 탐욕과 냉혈이 그 자리를 차지한 무법천지, "그런 '무질서'와 '아사리판'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남한 사회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또는 좀더 잘먹고 잘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카오스의 도가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익 청년단체에게 테러와 폭력은 호구지책이었지만, 그들은 그런 행위를 포장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호구지책 행위를 더욱 극렬하게 만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정치행위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출발한 면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행위를 하기 위해선 정치자금을 만들어야 했고 사람을 불러모아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그 나름대로의 자율적 힘을 갖게 되어 역으로 정치행위를 규제하였다. 정치 패거리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일이 민족에 우선하면서 정치세력 간 타협은 점점 멀어져 갔다."(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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