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 개혁과 (종교)개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아이케 볼가스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백승종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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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reformatio' 개념의 고전적 토대


"'reformare'라는 동사를 처음 사용한 오비디우스나 아풀레이우스 같은 시인들은 아무런 정치적 의미도 담지 않은 채, 오직 시적으로만 그 동사를 활용했다. 그것은 (가) 형태상의 전환 또는 변화, 즉 〈형태의 전환이라는 의미에서의 변신/변형〉을 또는 (나) 질적으로 더 좋았던 과거 상태로의 복귀를 뜻했다." "1세기에는 'reformare'라는 동사의 의미가 시와 상상의 세계를 넘어서 도덕 및 정치 분야로 확장되면서 'reformatio'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reformator'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그 출발은 몰락 또는 아래로의 계속적인 추락이란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몰락으로부터 그 이전 상태로의 회귀, 즉 가치 면에서 더욱 우월했던 과거로의 복귀를 통해,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필요성 또는 그런 상태에 대한 열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reformatio'의 개념이 내용적으로 완전히 고정되었다. 즉 'reformatio'는 퇴락이 전제된 상황에서, 과거의 척도를 목표삼아 개선을 꾀하는 것이었다."(12-3)


"《구약성경》에서는 'reformatio'와 'reformare'라는 개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동사 'reformare'가 발견된다." "이것은 질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것을 뜻했다. 창조의 본질로 재귀한다는 《신약성경》의 언어 용례와 비교해볼 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창조적 변모, 즉 새로운 모습의 창출에 관한 것으로, 그 새로움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는 서술이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reformatio'는 'conformare(본받다)'와 대비되면서 그 근사치에 더욱 근접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하게 하십시오.〉 여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행동을 촉구하는 요구는 하느님과 같은 형상을 가진 인간답게 낮은 곳에서 출발해서 더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때 'reformare'는 종교적 완성의 종말론적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16-7)


2. 중세의 'reformatio' 개념


"중세에는 후기 고전주의자들[그리스의 인문학자들]과 동일한 관점에서 'reformatio'의 개념이 수용되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이 세상에 관해 두 가지 인간적 행동 양식이 존재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상태를 'conservatio(유지)'하고 'reformatio(복구)'하든가, 또는 잘못된 상태를 'correctio(교정)'하는 것이었다. 'reformare'는 하느님이 마련한 세계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비록 결함이 있을지는 몰라도, 죄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 질서의 회복을 추구했다. 중세의 'reformatio' 개념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하느님이 온전하게 만드신 상태로부터 퇴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reformare'의 개념은 1차적으로 교회의 영역 안에 머물렀으나, 'emendare(수정하다)', 'restaurare(복구하다)', 'corrigere(교정하다)' 등의 개념과 대체할 수 있었다. 개선의 재향점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완벽한 창조의 이상인 〈올바른 규범norma rectitudinis〉이었다."(22-3)


"중세 초/중엽의 세속 문헌에서는 'reformare'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1세기까지도 정치적 개념을 담은 것은 주로 'renovatio(복구)'라는 용어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과거로의 회귀라는 관념은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 상태의 복구를 뜻했다. 'renovatio'는 과거의 사물을 갱신하는 것이고, 'reformatio'는 설사 파괴되었다 해도 아직은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을 복구한다는 뜻이었다." "'renovatio'는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과거의 상태를 수정함으로써 얻는 안정 등이 아니라 의식적인 새 출발이었다."(25-6) "14세기에는 교회 조직 전체나 신성로마제국의 개혁, 혹은 양자 모두를 개혁reformare할 필요성이 전례 없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통탄할 만한 개개인의 처지는 과거의 관계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개혁이 힘써 추진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때로 종말론적 요소와 결합되었다."(29-30)


3. 15세기의 'reformatio'와 'Reformation'


"15세기가 되자 'reformatio'라는 개념은 더욱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히 부푼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문헌들, 특히 독일어 전승에서 동사 'reformieren'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교회와 세상의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한 웅장한 계획 가운데 나타났다." "(종말론적, 유토피아적 차원에서 개혁 요구가 더욱 강렬해지면서) 이제 'reformatio'는 구체적인 개별 상황과는 거리가 먼 일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378년의 분열Schisma 이래로 외형적으로는 이미 몰락할 위기에 처한 교회였기 때문에 개혁이 불가피했다. 세속의 질서, 특히 신성로마제국도 같은 운명이었다. 그 밖에 인간의 생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는 'reformatio'를 미래를 향한 돌파구로 여긴다든가, 새로운 요소를 수용해서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새로 이룩하기 위해 관계를 전복시키는 생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34-5)


# 1378년의 분열 : 교회 분열로 두 명의 교황이 할거하게 된 상황. 위기를 막으려고 피사 공의회를 열었으나 통합은커녕 교황이 셋으로 늘어났다.


4. 16~17세기에 'Reformation'의 의미


"16세기에는 'Reformation'의 의미가 성속聖俗 간에 더욱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이 명백하게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세속적 언어 습관에서 'Reformation'은 변화된 관계에 발맞춰 제도나 법령을 개정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과거의 규범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15세기에 이 용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신학자들과 교회였다. 종교개혁에 관한 예전의 주장과는 달리, 교회 쇄신에 관한 루터의 요구 중에서는 영적인 요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Reformation'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옛 교회, 즉 초대 교회 공동체의 복구, 달리 말해 근원으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그것의 표면적인 변화로는 충분하지 못했던지, 요수아 말러는 〈교리가 개혁되지 않으면, 관습의 개혁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일이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결함을 제거하고 손상된 것을 복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여겨졌다."(44-5)


"교회가 신구교로 양분되자 신앙의 대립이 고착화되었고, 동일한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Reformation'은 신교의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약(1555) 때만 해도 아직은 [막연하게 양자를] 구별하는 용어였다." "즉 신교도들은 'reformiert(개혁파)'란 용어를 통해 우월감이 깃든 자기인식을 표현했다. 가령 그들은 루터파 교회를 〈우리 교회의 개혁〉이라 일컫곤 했다."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도들 사이에도 'reformiert'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한 차례 논쟁이 일어났다. '제네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칼뱅파만이 '개혁파Reformiert'로 인정되었다. 독일어권에 속한 칼뱅파의 자기인식은 프랑스 [신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1617년[에 간행된 종교개혁에 관한] 기념 문헌에서 확인되듯이, 'Reformation'의 개념은 신교도들 사이에서 16세기 교회의 일대 사건[종교개혁]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고한 위치를 획득했다. 협의의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루터의 행적에 국한되었다."(50-1)


"17세기에는 'Reformation'의 개념을 16세기에 일어났던 교회사적 사건[종교개혁]에 국한시키는 것이 일반적 풍조가 아니었다. 개신교회는 당대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도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1653~1655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영토 내에서 행한 가톨릭적이고 반종교개혁적인 조치들까지도 그렇게 불렀다." "종교전쟁을 통해 제국의 각 기관이 망가지고 불능 상태에 빠진 뒤에는 그 재건 및 현재 상태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재판 결과의 정정까지도 'Reformation'이라 불렀다. '제국의 법정 개혁'의 주목적이 '과정을 줄이려는 노력'이었다고 하면, 그 경우 'Reformation'은 '개혁Reform' 또는 '개선Verbesserung'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세속의 용례에서 'Reformation'은 잘못된 상태의 척결이라는 뜻과 더불어 미래 지향적인 측면을 가지게 되었다. 재편성, 곧 달라진 상황에 대한 적응의 의미가 과거의 이상이나 모범을 지향했던 사실에 견주어보면 의미심장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54-5)


5. 시대 구분의 명칭이 된 'Reformation'


"18세기에 간행된 어학 사전들과 백과전서에서 'Reformation'은 주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루터와 그 추종자들에 관해 사용된 Reformation 개념이었다. 이것은 교회 제도와 교리상의 오남용과 오류를 제거한다는 의미였다.〉 18세기에 간행된 백과사전 《체들러》는 매우 간략하게나마 법률적 개념으로서 이를 정리했다. 〈하나의 법령 또는 명령이 새것에 의해 재확인되거나, 몇가지 점에서 새로 개정되고, 이로써 정치, 법률적으로 한 가지 측면 또는 다른 측면에서 수정, 개선되었을 경우에〉, 'Reformation'으로 여길 수 있다고 했다." "반면 계몽 신학자 및 계몽사상가들은 종교개혁을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구현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인식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각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역사 발전에 독특한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종교개혁은 정신적 개명의 시작이며, 계몽을 완수하기 위한 사업의 토대 또는 준비 작업이었다."(58-60)


6. 독일 관념론과 자유주의의 'Reformation'에 관한 이해


"종교개혁을 통해 인간이 획득한 자유에 관한 해석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을 되찾은 정신 개념의 측면에서 본 종교개혁은 인간 정신의 발전사에서 타당한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문화적 업적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이로써, 〈새로움은 마지막 깃발을 펼치고 ····· 자유로운 정신의 깃발은 진실로 그 자체인 것, 오직 물자체物自體다.〉 헤겔 좌파 역시 '계몽 판단'의 입장에서, 종교개혁의 본연적인 성과는 정신적 자유의 획득에 있다고 보았다." "아르놀트 루게는 반동과 혁명을 둘러싼 동시대인들의 대립에는 종교개혁과 '예수회주의Jesuitenismus'의 해묵은 적대 관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당시의 지배적인 정치 및 영성적 경향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하는 법정이었다. 종교개혁의 뒤를 이어 국가를 상대로 개별 인간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개혁politische Reformation'이 전개되어, 개신교가 이미 도달한 것과 같은 결과를 추구했다."(70-1)


"마르크스는 종교개혁을 개인의 정신적 자유 원칙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이고 합리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개신교는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문제 제기〉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525년과 1848년의 역사적 사례를 상호 비교했다. 그는 루터를 〈부르주아 개혁의 대표자〉라고 불렀고, 〈부르주아 개혁가〉 루터와 〈평민적 혁명가〉 뮌처를 상호 대비시켰다. 엥겔스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일종의 부르주아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부르주아 계층이 봉건제도에 항거한 사상 최초의 결전장이었고, 17세기에는 청교도혁명, 18세기 말에는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계몽주의적 인식의 완벽한 계승자였다." "하이네는 루터의 〈위대한 종교 혁명〉에서 칸트, 피히테 및 헤겔의 〈철학 혁명〉까지를 일컬어 〈개신교의 마지막 귀결〉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독일이 우선 〈철학의 완성〉을 이룬 다음, 〈정치적 혁명〉 곧 〈독일 혁명〉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71-2)


7. 'Reform'의 개념


"프랑스혁명을 겪고 나자, '혁명'의 개념은 정확히 〈비혁명Nicht-Revolution〉을 통해 일어난 사태 변화의 반대 개념이 되었다. 그때까지 'Reform'의 개념은 이런 목적에 국한되었다. 그 개념적 정의는 정립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다른 분야에 적용할 기준은 아직 모호했다. '혁명'과 대비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Reform]은 그 출발부터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개혁'을 비혁명적이라고 이해한 선례는 영국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기왕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에드먼드 버크에게 개혁은 곧 합리적인 정치적 중도였다." "버크가 주장한 개혁은 금세 효과를 내기 마련인 혁명적 조치들과는 달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정을 가능하게 하며, 과장을 금지하고, 다음 세대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 까닭에 시간적 요인은 개혁의 부가적인 장점이었다. 〈우리는 인내함으로써,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크게 성취할 것이다.〉"(81-3)


8. 19세기에 그 개념 정립과 확대 적용


"[프랑스]혁명 시대가 막을 내리자, 독일에서는 '혁명'의 대립 개념인 '개혁'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전한 개혁 이론의 전제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역동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법률과 국가 제도는 점차 정의를 잃은 상태에 빠지고 말지만, 〈문화의 근본 조건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대중의 진보〉의 토대 위에서 공동체가 발전할 경우, 양자[공동체와 법률 및 국가 제도] 사이에는 긴장이 조성되기 마련이란 신념이었다. 이처럼 사회적 발전과 정치적 안정성 간에는 확대일로에 있는 내재적 모순이 존재하는 데서 갈등이 빚어진다고 보았다. 그 갈등이 혁명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려면, 시의적절한 개혁을 통해 궤도를 수정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치가의 의무는 그 시점을 옳게 인식하고, 〈제때 개혁을 통해 그 뜻[개혁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다.〉"(92-3)


"왕정복고기의 경험을 토대로 한 헌법 논쟁을 거치면서, '개혁'과 '혁명'의 대립 구도에 제3의 항목이 끼어들어, '개혁', '혁명' 및 '반작용Reaktion'의 긴장 관계로 확대되었다." "푈리츠는 〈진실은 대개의 경우 양극단의 중간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개혁이야말로 혁명Revolution과 반동Reaktion을 모면할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 경우 '혁명'이란 〈내적 국가 생활과 국가 조직 전체의 근간을 폭력을 이용해 재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기왕의 합법적인 국가적 토대를 함부로 무너뜨리거나 아직 노화되었다고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수호하지 않고 충격을 가해 파괴시키는 행위였다. 한편 〈반동Reaktion〉은 〈민중 및 국가의 공적인 생활에서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려는 진보를 가로막고, 낡아빠진 것 또는 이미 붕괴된 것을 강요하려는 의식적인 방해활동 또는 파괴〉 행위였다. '반동'은 단순히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철폐된 관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 또는 원상회복을 기도하는 행위였다."(95-7)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계급투쟁과 혁명 이론으로 무장되었고, 그들은 19세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혁'을 '혁명'의 대립 개념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념적 인식을 토대로 개혁을 하찮은 정치적 강령이라 폄하했다." "'개혁주의Reformation' 개념은 ('수정주의Revisionismus'가 그랬듯이) 무엇보다도 대상자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악용되었다. 공식적 이론에서 벗어난 두 가지[개혁주의와 수정주의]는 상대방이 결코 개혁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 개념이 수정주의 지지자들을 대표하지 못하는데도, 논쟁에서는 양자가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교의敎義는 ····· 이른바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의 뒷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베른슈타인도 실상은 '개혁주의'와 '수정주의'를 동일시했다. 그런데 수정주의와는 달리 개혁주의에 관한 체계적인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113-5)


9. 전망


"19세기 이후에 '개혁'은 적응, 일신, 변화를 뜻하는 모든 대상에 적용되었다." "'개혁'은 [히틀러 일당의] 국가사회주의가 부르짖은 전투적 정치 구호와는 애초부터 합치될 수 없었다. 그 개념에는 지나치게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 또는 경멸적 의미로 해석된 자유주의가 깃들어 있었다. [슈미트의 법철학 및 실존주의적] 결정론Dezisionismus을 둘러싼 논쟁에서 '개혁'은 모종의 대안, 즉 결정을 내리라는 강요를 회피한 채 이해관계의 절충을 통해 화해를 꾀하든가, 또는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고집하면서 중도를 모색하지만 막상 그 길은 분명하지 않은 무엇이 되고 말았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본다면, 급진적이고 전체적인 변화만이 〈국가/민족적 혁명〉, 곧 〈변혁〉의 결과로서 쓸모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현상유지에 대한 집착이었다. 개혁의 거부는 언제나 가능했다. 〈목표는 개혁 또는 복구가 아니다. 목표는 전체이고 제국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모든 것은 종말이다.〉"(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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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루돌프 피어하우스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공진성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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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유럽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전통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단어들인 '자유주의적liberal', '자유주의자Liberale', '자유주의Liberalismus'는 정치적 구호와 투쟁의 언어로서, 그리고 정치적 지향과 정당의 이름으로서 19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자리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철학적 견해나 정치적 주장의 차이를 넘어, 공통적으로 그들이 그 자체로 인도적이며 합리적이고 교육받은 선한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동의할 목표를 추구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과 비판자들은 그들을 전통의 파괴자라고 폄하했고, 그들이 처음에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나중에는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에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12-3)


"두 가지 정황이 추가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둘째,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19세기 중반 이후로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정당들의 정치적 구상과 충분히 차별적인 독자적 정치 구상을 내세워 자신들의 집권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미래는 오늘날 자유와 평등 간의 긴장, 개인의 자기 결정과 사회적 형평성의 제도적 보장 간의 긴장, 법치국가와 복지국가 간의 긴장이 민주주의 정치 체계 속에서 어느 정도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이제야 제기된 현대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부터 독일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잠재되어 있던 문제였다."(14)


2. 문제 상황 : 리버랄 - 진보적 - 자유로운 정신의 - 민주적인


"오늘날까지 '리버랄liberal'과 '리버랄리테트'라는 단어는 전반적으로 아직 정치적이지 않은 일정한 성향과 입장이 편견에서 자유롭고 잘 베풀며 관대하고 계몽된 사고와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등장한 시민의 해방과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의 결합을 자연법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했고, 성숙하고 자유로운 국민을 그 단계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려고 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사고를 당파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으려고 했다. 이런 생각이 재산을 지닌 교육받은 시민 계층의 특수한 이익을 표현한다는 주장을 자유주의자들이 굳이 반박하지 않은 것은 그런 생각이 [시민 계층의 특수 이익을 표현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의 이익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7)


"자유주의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유럽에서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성적이거나 문학적이지만은 않은 투쟁을 이미 경험했다. 그 투쟁은 한 사회 안에서 벌어진 앞으로 밀고 나아가려는 세력과 버티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고, 분배의 상황을 바꾸려는 세력과 재산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으며, 정치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추구하는 집단과 특권을 지키려는 집단 간의 투쟁이었다. 혁명이 다가올 사회에 관한 이론을 폭력적으로 실천하려는 방향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폭력적인 반동과 복고의 가능성도 알고 있었다." "'리버랄'은 구체제의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시대에 맞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이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자칭, 타칭의 수식어가 되었다."(17-8)


3. 단어의 역사


"라틴어 'liberalis'는 먼저 '자유와 관련된', 다음으로 '너그러운'과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에게 어울리는'을 의미했고, 명사형 'liberalitas'는 개별 인간의 '귀하고 깨어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특히 그런 사람이 지닌 '너그러움'과 능력, 물론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자신에게만 유익하지는 않은 능력을 의미했다. 이것은 (예컨대 관후寬厚함처럼) 공중의 존경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liberalitas'는 아직 정치적인 덕은 아니었지만, 공적으로 인정받는 덕이기는 했다." "그 밖에도 'liberalitas'는 자선이나 기부와 같은 구체적인 의미와 여러모로 연관되는 일반 윤리적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독일어 '리버랄'과 '리버랄리테트'는 지식인들이 라틴어에서 가져와 사용한 말로서 16세기 이후에 독일어에 등장했으며, 넓은 의미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어떤 태도에 대해 말할 때 '리버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독일에서 이미 18세기 후반에 뚜렷하게 증가했다."(24-7)


4. 정치적 개념으로의 변화


"(프랑스에서 반反시에예스파, 곧 온건 입헌주의자들을 가리키던) 'liberal' 개념이 이른바 공적인 영역의 빛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 것은 혁명력 8년(1799) 브뤼메르 18일이었다. 하루 전에 마레는 〈혁명의 토대가 된 관대하고 리버럴한 사상들〉을 칭송했다. 그리고 18일에 〈원로원Conseil des Anciens〉에서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구성원인 바라와 물리아가 자신에게 〈리버럴한 사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타도하고자 하는〉 정당의 당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19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 후견주의적인 사상, 리버럴한 사상들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정파들 사이를 연결하는 끈을 없애려는 의도를 나폴레옹은 분명히 이 선언으로써 표현하기를 원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과 리버럴한 사상을 나란히 놓은 것은 그 두 사상이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급진주의, 반동, 부패, 무정부에 맞서 필요하게 될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36)


"당대의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언어에서 '리버랄'이라는 말은, 계몽을 통해 더욱 활성화된 더 오래된 의미, 즉 '호의적인, 자선을 베푸는, 관대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44) "1815년 무렵의 독일에서는 '리버랄'이라는 단어에 더욱 확실하게 정치적 윤곽을 부여하는 일이 아직 필요하지 않았다. 공화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표현하기에 그 단어는 너무 불확실했다. 계몽된 정부의 정책을 가리키는 데에는 다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 정책을 '리버럴'하다고 부를 수 있었지만, 애국적인 의식을 지닌 시민의 태도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요구하고 이런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집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어떤 집단의 정치적 강령이 아직 아니었다. 그래서 〈리버럴한〉 사상과 원칙이 사적인 삶 속에서나 공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리버럴들〉이라고 부를 기회도 역시 없었다."(47)


5. 1830년 이전의 자유주의 개념


"1822~1823년에 괴레스는 〈자본주의자들의 돈에 대한 교만〉과 〈배운 자들의 이성에 대한 교만〉을 〈요란한 자유주의〉의 요소라고 일컬었다. 〈신흥 자본가 귀족〉과 새로운 〈지식인 성직자〉를 〈전제적 지배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육성한 정부들은 이제 이들이 정부의 〈근간〉을 허문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으며, 〈두 개의 다른 계급〉, 즉 〈용병 부대〉와 〈관료 집단〉을 정부의 수호를 위해 끌어들여야 했다. 〈이 두 적대적 집단 간의 싸움에서 한편은 자유주의를, 다른 한편은 정통주의Legitimismus를 구호로 내세웠다.〉 몇 년 후(1825)에 프란츠 폰 바더는 당대의 〈리버럴한 교의 속에서 로마제국을 부패시킨 것과 동일한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를〉 다시 발견했다고 믿었다." "바더의 '자유주의' 개념은 훗날 가톨릭적 반근대주의의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정치적 사유와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 그 자체가 되었다."(60-1)


"한편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원칙과 목표의 추상성은 자유주의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을 잘못 판단하여 정작 인간을 개선하고 싶어 하면서도 오히려 망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헤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헤겔은 자유주의를 〈이성의 ····· 추상Abstraktion ····· der Vernunft〉에 매달리는 노선이라고 표현했다. 〈이성의 원칙들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안착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추상에 매달리는 노선이다. 구체적인 것은 자유주의를 언제나 이기며, 구체적인 것에 맞서서 자유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파산한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제한된 역사적 권리만을 가지며, 그 자체로는 원칙적으로 [국가를] 안정시킬 수 없으므로, 보편적 국가 목적에 대한 관념 속에서 자유주의를 〈지양Aufhebung〉하는 것이 필수적이다"(64-5)


6. [1848년] 3월혁명 이전 시기의 자유주의


"1842년에 〈독일 계간 문집〉은 1830년 이후로 독일에서 리버럴들이 점차 의심받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혁명에 대한 공포가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 것 일체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혁명가들이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이제 혁명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리버럴이라는 표현에 자부심을 가졌다면, 이제 이 한정사는 욕설과 비난이 되었고, 소란하고 음험하고 전복적이며 위험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리버럴들의 수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그들을 〈선량한 백성들로부터 ·····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후의 신성한 권리, 이른바 [통치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을 〈리버럴〉이라고 불렀다면, 이 비난은 계속 확장되었고, 마침내 〈어떤 사람이 맘에 안 드는데 그를 비난할 다른 어떤 말이 즉시 생각나지 않을 때〉 아무에게나 갖다 붙이는 말이 되었다."(83-4)


"(자유주의가 〈합리적인 법의 생산을 지향하는 노력들의 총체〉라고 주장한) 파울 피처는 '가짜 또는 오해된 자유주의의 무절제' 속에서,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를 〈잘못 다룬〉 결과를 깨닫는다. 이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가 거부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자들은 그것을 〈매우 거친 급진주의〉와 동일시하고, 〈입헌적 리버럴들〉을 〈자기자신의 원칙을 따른 결과를 두려워하는 ····· 길들여진 혁명가들〉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반동〉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한 이후로, 〈리버럴한 시각〉은 사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리버럴한 원칙〉에 기초한 모든 주장은 〈계획적인 반대라고 비난〉받으며, 〈전체의 이익 ·····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진보의 권리〉에 대한 옹호는 〈기존 체제의 전복과 무정부, 폭도들의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모략당하고, 〈리버럴한 분위기의 상승〉은 소수 몽상가들의 작품으로 폄하된다."(86)


"당파 싸움과 혁명에 대한 의심을 넘어 〈순수하게reine〉 리버럴한 입장을 규정하고 '자유주의' 개념에 신념윤리적인 합리적 속성을 부여하려는 이러한 노력들에 맞서 자유주의 좌파 진영은 자유주의의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기능을 강조했다. 에드가 바우어는 1843년에 〈독일의 이른바 리버럴들〉이 투쟁을 기피하고 단결을 호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 모순은 분명해져야 했으며 통일은 비판을 통해 달성되어야 했다." "바우어에 의하면 〈헌정 체제에서 최고의 선을 발견하는 자유주의의 어떤 장르〉는 모호하며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급진적 비판 속에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이제 단순히 하나의 세계관적·정치적 지향이나 관념적 구상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당파는 단호한 야당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성과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87-8)


"1840년대에 이미 급진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요소들을 거의 모두 지적하며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리버럴', '리버랄레, '자유주의'와 같은 개념들에 (가치를 긍정하는 어떤 수식어도 그 앞에 붙이지 않으면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그리고 폄하하는 어조를 부여했다. 1845년에 〈진정한〉 사회주의자 진영에서 나온 어느 논문은 〈독일의 자유주의〉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독일의 자유주의가 〈리버럴한 헌법〉을 지지했고, 독일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야〉가 당시로서는 〈가장 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문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발견됨〉으로써 독일의 자유주의는 계속해서 존재할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자유주의는 스스로 존재하기를 단념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위선적이고 잔혹한 형태로〉만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90-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독일에는 〈실질적 자유주의〉가 없었다. 그저 자유주의에 대한 〈열광〉과 〈이데올로기〉만 있었을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성숙한 리버럴, 곧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리버럴한 말들은 부르주아지의 실제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념적 표현〉이다. 〈자유주의가 우리의 기존 관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라는〉 믿음은 그저 독일인들이 여전히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1840년대를 지나면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자신이나 타인의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표시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 표어가 되었고, 정치적 토론과 논쟁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에서 온건 노선과 급진 노선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면서 온건한 자유주의는 점차 [급진적 자유주의보다] 보수주의에 더 가깝게 변하게 되었다."(93)


7. 혁명과 반동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희망과 의심, 낙담 사이에서 반동의 시절들을 견뎠고, 다른 리버랄레들은 민주주의와 '붉은' 혁명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리버럴한 원칙들을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했지만, 그들은 모두 단절을, 즉 시간이 자유주의를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19세기 전반기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된 시간적 단절을 느꼈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그들의 당혹감과 자신을 '리버랄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이런 감정의 반영이었다.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욱 강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원칙들이 낳은 결과와 거리를 두었고, 정치적 패배 후에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보다는] 경제의 전체적 발전을 지지하고 민족 통일의 달성을 자유주의의 진정한 목표들보다 우선시함으로써, 더욱 강하게 '기존의 것'과 타협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들은 집권하지 않는 정당을 본질 상실의 위험뿐만 아니라 분열의 위험으로도 이끌 수 있다."(109-10)


8. 정치적 자유주의의 부활


9. 전망


"정치적 발전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동의를 묻는 질문과 관련해 자유주의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새로운 것으로 분열되었고, '리버럴'이라는 말이 정당 이름에서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리버럴한 생각과 행동의 필요성이 심지어 민주주의를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도 인정되고 강조되는 나라에서 리버럴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동시에 자유롭고 사회적인 법치국가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유주의의 정치적 신조Credo이다." "이 단어는 오랫동안 불분명한 것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으로도 여겨졌다. 이 말이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된 것처럼 보였고, 정치적으로는 유약함과 기회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과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리버럴한 민주주의의 중도적 입장은 (적어도 교정자로서) 필요해 보인다."(1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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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호르스트 슈투케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남기호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사실의 규정과 단어의 역사를 위한 지침들


"오늘날 지배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대 개념으로서의 '계몽'은 17세기 후반기에 착수되어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던 유럽의 정신 운동을 나타낸다. 이 정신 운동을 통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근본에서부터 변화시킨 세속화 과정 속에서 〈근대 세계〉가 표출되었던 것이며,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마법화〉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탈마법화〉의 목표는 원리상 역사적 전통 세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자율적인 인간 이성의 비판적 검증을 견딜 수 없는 모든 권위, 교의, 질서, 결속, 제도, 인습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이었다. 이것들은 자신들의 합법칙적 체계 내의 분류에서 벗어나는 것들이었으며, 따라서 미신, 선입견, 오류 등으로 입증되었다." "이제 절대적으로 정립되어 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간주된 이성이 계몽의 기초로 출현하게 된다." "〈근대적인〉 인간은 스스로를 자신의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며, 자연을 자신이 이성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의 대상으로서 지배하게 된다."(20-1)


3. 18세기 마지막 30년 동안의 전형적인 개념 형성


# 계몽 개념의 다의성

1. 베스텐리더 : 온갖 종류의 외피와 덮개를 제거하여 빛으로 오성을 비추고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 즉 교화와 도야를 통해 국민 전체의 교양 수준을 고양시키는 것

2. 빌란트 : 이성의 권리와 책무를 통해 요청되고 구성되는 보편적 인식 개념이자 앎의 수준. 변증법적 연관 속에서 학문적 지식이 가장 높은 단계까지 상승하는 것

3. 박애주의자들 : 자신이 부분으로 속한 전체와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계층에 맞는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는 것, 도덕적·실용적인 민족 교양 운동의 측면을 강조함

4. 칸트 : 미성년 상태에서 성년 상태로 전진하는 '과정', 예술과 학문, 종교로 대표되는 정신 영역에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 더 나은 것을 향한 역사적 진보

5. 멘델스존 : 계몽은 특수한 '근대적' 상황이나 이에 상응하는 기획과는 구성적 연관성이 없으며, 단지 '교양'의 이론적 측면을 표현(실천적 측면은 문화)하고 있는 것

6. 바르트 : 모든 인간들에게 도덕적·경제적으로 유익하고 실현 가능한 공통 자산으로서, 보편적 인식 요구와 결합되거나 고도의 사고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개념


4. 혁명기 매체의 논쟁에서 표어 신조어들과 개념 구획들


"표어로서, 또는 동시대 표현에 따르면 유행어로서, '계몽'은 매체에서, 그리고 매체 때문에 가장 구별되어 수용되고 평가를 겪었다. 매체의 경우 몇 년 만에 책, 소책자, 정기간행물, 논문, 기사 등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범람했으며, 모두 제목에 '계몽'이라는 말을 달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말은 어떤 이들에겐 신성한 이름의 지위와 타당성을 획득했고, 애용하는 말로 뽑혔으며, 마법의 주문처럼 다루어졌고, 국민의 좌우명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반해 다른 이들은 이 말을 욕설로 여겼고, 아예 존경스럽게 표현하길 거부했으며, 솔직하게 미심쩍고 경멸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언어 사용의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1780년대 중반부터 도처로 퍼져가는 계몽 논의의 정치화와 세계관적 양극화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계몽의 친구와 적에 관해 힘주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99-100)


"계몽에 대해 제기된 엄청난 양의 비난과 고발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계몽은 기존의 정치와 종교 질서에 대한 모반을 꾀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토대와 존립을 위협하고 공공의 안녕을 매몰시키며 종교와 왕권의 전복을 획책하고 보편적 자유 정신, 무종교, 몰인륜성, 무정부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명목적인 또는 실제적인 〈계몽의 적들〉로 우둔함의 촉진자, 무지한 자, 정통 고수자, 무지와 우둔의 사도, 열광자, 몽매한 자, 어둠의 친구, 반反계몽의 친구와 같은 이름들이 꼽혔으며, 이들의 입장은 〈예수회〉와 〈비밀 가톨릭〉의 입장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다른 한편으로 〈계몽가〉라는 단어가 경멸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해도, 〈계몽가〉는 자유정신가, 반反그리스도, 무신론자, 무신앙과 반란과 악덕의 친구, 열광자(!), 종교와 인간 행복의 적, 인류의 적,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비방되고 탄핵되었다."(102-3)


"계몽을 '일루미나티'나 '자코뱅주의'에 귀속시키는 것은 '계몽'과 '비계몽' 간의 대립이 '진보'와 '반동' 간의 대립과 동일하며, 체계 또는 운동 개념으로서의 '계몽'이 내용적으로 이념과 정당의 역사로부터 알려진 초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생과 수렴한다는 이해를 실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외관은 미혹된 것이다. 개념사적으로 그러한 종류의 이해는 근거가 없다. 1790년대에는 여전히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보편적으로 인정된 계몽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념사적으로 (이신론으로부터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계몽=자유사상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입헌주의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계몽=정치적 자유 감각이라는 등식도 성립되지 않는다. 매체상의 계몽 논의에서조차도 이러한 연관은 열려 있었으며, 계몽 개념의 보편적 논의 가능성에도 한계가 없었다."(106-7)


"모든 정치적 지향의 추종자들과 자코뱅주의자들은 계몽 개념을 혁명적인 것, 선동적인 것, 폭력적인 것, 무정부적인 것과 분리하려 시도했다. 바이에른의 한 자코뱅주의 전단지는 프랑스혁명의 원인들로 미신, 재정 파탄, 국세 낭비, 경솔한 전쟁, 귀족의 패륜, 부역 부담, 높은 문맹률Zehentbarbarei 그리고 보편적인 국가 노예 상태를 꼽고 있다. 전제정치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국가를 파괴하고 프랑스혁명을 야기했던 것이지, 계몽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계몽의 적들'의 중상모략을 무력화시키고 계몽의 속행과 촉진과 완성을 위해 통치자나 대중을 움직이려는 변론적인 의도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이 다시금 계몽을 활성화하려 했다면,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한 목표는 〈참된 계몽〉을 대변한다는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드물지 않게 〈참된 계몽〉을 기독교의 영원한 진리 인식에 결부시키고, 전승된 정치 질서의 원리 위에 확립하게 하는 데까지 멀리 나아갔다."(109-10)


5. '독일 운동'에 있어서의 단어 사용과 개념 규정들


"헤르더에게 '계몽'은 특정한 종류의 합리적 앎을 표시하기 위해 아무 시대에나 임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으로 머문다. 그는 이 단어의 사용을 본격적인 정의 속에 확정하지도, 매우 폭넓은 변용變用들을 중단하지도 않았다. 그가 '계몽'으로써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인본성과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앎이다. 이는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이성의 인도하에 밝히고 확장시키는 과정과 결과를 포함하며, 자연 및 인간 세계의 인과적 연관들에 대한 지식의 획득과 증가를 포함한다. 더 나아가 이 앎은 〈사물들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제시해준다. 마지막으로 앎은 다른 무엇보다 그에 상응하는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정상적인 삶의 형식 속에서 자신의 표현을 발견한다. 헤르더는 '계몽'에 대한 이러한 근본 이해를 가지고 상이한 곳에서 풍부하게 구별되는 관점들을 결합시켰다. 계몽의 의미 내용은 이 결합된 과점들을 통해 다양하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140)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진리가 생생하게 확신시켜 주었는데도 진리 가정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따라 더 긴급한 시대의 욕구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이다." "그가 우리 시대의 더 긴급한 욕구·····로 특징짓는 것은 〈감정을 고상하게 하고 의지를 도덕적으로 순화하는 것·····이다. 오성의 계몽을 위해서는 이미 상당히 많은 것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은 빛이 아니라 온기이며, 철학적 문화가 아니라 미적 문화다.〉 실러는 이 후자를 성격 형성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여긴다."(146-7)


"예나 시절 초기의 헤겔이 '계몽'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문장이 잘 보여준다. 〈계몽은 이미 그 근원에 있어서, 그리고 즉자 대자적으로 오성의 통속성과 이성을 넘어서려는 오성의 허황된 고양을 표현한다.〉 이때 헤겔에게 '계몽'은 일단 모든 철학적 이념들을 대중적으로, 또는 본래 통속적으로 만드는, 그리고 이렇게 진부하게 만드는 일Plattmachen을 체계로까지 고양시키는 풍조Manier와 동일하다. 비판적인 철학적 규명을 통해 헤겔의 계몽 이해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계몽'을 오성의 활동과 영향을 받은 고유한 학문적 형태와 방법으로 파악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오성을 모든 이념적인 것을 유한성 아래에 제한하고 계산하고 정립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오성의 〈왕국〉은 유한한 것이 즉자 대자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며, 유일한 실재성이라는 원리에 의거한다. 그래서 계몽의 근본 특징에 ····· 속하는 것은 유한자와 무한자의 절대적 대립태다."(159-60)


"헤겔은 계몽 개념을 사용할 때에 도식적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계몽〉이라는 역사적 전체 현상의 특수한 현상 형식들과 부분적으로 합치하는 구별된 관점들은 계몽의 구성적 징표들에 관한 그때마다 구별되는 조합과 평가에 이를 수 있다." "보편적 계몽 개념은 어떤 면에서 정신사적 근본 개념으로서의 '계몽'을 서술한다. 비록 이것을 헤겔 자신이 명시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 이전의 18세기 독일 철학을 특별히 볼프 형이상학이 아닌 한에서 ····· 계몽이라는 표현으로 특징짓는다. 그렇지만 그는 이 시기 프랑스 철학에 관해서는 다른 계몽의 형식을 말하고 있다." "독일 계몽에 대해 헤겔은 대체로 아주 혹평하는 편이다. 독일 계몽과 정반대로 그는 프랑스 철학을 일관성과 정신적인 활력과 개념의 힘 때문에 놀랄만한 것으로 여긴다. 프랑스 철학은 그러한 것들을 갖추고 부정의 관점을 관철했으며, 실존에 대항해서, 신앙에 대항해서, 권위의 온갖 힘에 대항해서 싸웠던 것이다."(174-5)


"헤겔은 계몽의 성과를 조명하고 심오한 역사적 권리를 증명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계몽의 권리란 바로 감정의 몰사고적 종교성에 맞서 있는 사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체계적인 개념 형성은 단호하게 계몽의 성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단점과 불충분성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것들의 입증에 결정적 구실을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항상 절대지의 원리에 따라 계몽이 맺는 〈절대자〉와의 연관이다. 절대지의 원리는 헤겔에 의해 무한하고 유한한 생동하는 정신 자체의 변증법적 운동으로부터 획득된다. 이에 따르면 사유의 유한화는 신이 그 외부에 정립되어 있는 인식의 우주와 진리의 왕국을 창출하는 만큼만 계몽의 구성적 징표가 된다. 이로써 유한자의 관점이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신은 사유 밖의 피안으로 여겨진다." "헤겔에게 〈계몽〉은 18세기 프랑스혁명의 부속물, 즉 정신을 갖추지 않고 오성적 진지성과 유용성의 원리로써 이념을 쟁취한 프랑스혁명의 맥 빠진 형식이다."(176-7)


6. 19세기 계몽 이해의 근본 경향들과 국면들


"적지 않은 개별적 이질성에도, 낭만주의와 관념론이 '계몽'의 의미 영역을 역사적·체계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계몽'이라는 역사적 개별 개념 형성에 기여한 몫은 그 당시엔 성취되지 못했던 함축성과 목적성을 띠었다. 전체 결과 속에 일관되게 실현된 의도는 〈계몽〉을 철저히 〈근대〉의 획기적 정신 형태와 운동으로, 또는 모든 역사적 전승과 외적 권위에 대항하는 합리주의적이고 유한한, 결국엔 〈반종교적인〉 18세기의 세계관, 사유방식, 정신 태도로 바꿔 표현하려는 것이었으며, 근대의 추상적·해방적 특징을 역사철학적으로 명료화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편적 언어 사용에 끼친 낭만주의적·관념론적 계몽 이해의 영향은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은 '계몽'의 의미 내용과 적용 영역에 대한 논쟁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참된 계몽과 거짓된 계몽의 구분 문제에 해당된다."(182-3)


특정한 단어 선택은 해당 개념의 적용 범위를 협소화하지만 시대적 관점에서는 그 개념이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말하자면 19세기 후반기에 역사적 시기 및 운동 개념으로서의 '계몽'이 의미상 고정되고 사태 중립적·가치 중립적 보편 개념으로서의 '계몽'과 분리됨에 따라 '계몽'을 보편적 세계관 개념, 체계 개념, 방법 개념으로 형성하려는 경향이 출현한다. 이 개념은 사안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구체적 계몽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적용 영역은 〈계몽의 시대〉에 제한되지 않으며, 원리상 인간성의 전체 역사를 포괄한다. 이 개념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보편적인 하나의 세계관, 정신 태도, 사유방식 등으로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들은 전통의 구속적인 권위를 내던지고, 전승된 신앙 교의, 교리적 표상 방식과 관례로부터 사유를 해방시키며, 사유의 고유한 지위를 자리 잡게 하고, 사유에 의해 이성적으로 인식된 것만을 타당하게 보려 한다."(202-3)


"계몽 개념을 보편적으로 구속력 있게 정의하려는 19세기의 다양한 노력들 중에서 〈계몽〉을 〈반계몽주의Obskurantismus〉의 정반대로 규정함으로써 계몽의 구성적 징표들을 정교하게 만들려 했던 노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말에 같은 방향의 논쟁을 계승하면서 표어로서 다양하게 사용된 반계몽주의는 정신적·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에 절대적으로 적대적이고, 모든 변화와 새로운 현상을 단호하게 혐오하며, 민족의 우둔화와 무지에만 관심을 두고, 가장 타락한 수단으로써 학문적 통찰을 확산시키고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대상들에 대한 명석한 개념을 형성하며 인간의 권리들에 대한 가르침을 억압하고 정신의 자유로운 도약을 저지하려 했던 힘과 경향을 총칭하는 일종의 집합 개념이다." "그것의 반대 개념인 '계몽'은 인식 및 앎의 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참된 사실들과 인식들의 전달 및 조화로운 합일 그리고 올바르고 명료한 사유 및 개념 파악의 형성을 포괄한다."(207-8)


"브루노 바우어에게 '계몽'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파괴를, 특정하게는 기독교의 비판적 파괴를 의미한다. 그는 세계사를 완전한 자기 인식과 절대적 자유를 향한 인간성의 변증법적 진보로 파악한다. 이는 고대로부터 일련의 계몽들을 거쳐 성취되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계몽'을 원리상 역사를 조건으로 하는 해방적 진리 인식이자 의식의 도야로 파악한다. 의식의 도야는 자연적 의식으로부터 초자연적인 종교적 의식으로 상승하며, 인간의 자율적인 자기 인식에서 완성된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본질 인식은 종교적 표상들을 통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인식의 진보와 이 진보를 불러오는 계몽마저도 그렇게 규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계몽은 18세기의 무신론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적 계몽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계몽은 종교적 형식으로 수행된 종교의 해체다." "바우어에겐 이러한 계몽이 '근대 세계'의 중심 과제다."(225-6)


"니체의 〈새로운 계몽〉 개념은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배경으로 하여 〈사이비 신앙〉의 문화 비판적·시대 비판적 반대 개념으로서, 그리고 지성에 대한 의지의 우월성을 설정하는 엘리트적 교육 개념으로서 구상된 것이다. 그 개념은 기독교에 대한 투쟁 못지않게 도덕, 이성, 인본성, 문화, 진리, 철학 등 〈옛 계몽〉의 지도 이념들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그 개념은 이념들을 대체해 방향을 지시하는 원리로서 〈생〉과 〈의지〉를 설정한다.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를 〈힘에의 의지〉의 기능으로 설명하고, 특정한 종류의 생명체를 보존하기 위해 특정한 종류의 비진리가 승리하고 지속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여기면서, 합리주의적·기독교적 해석의 기반에 놓여 있던 계몽의 원리들과 의식적으로 결별한다. 그렇게 니체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계몽'이라는 말의 다양한 철학적 사용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2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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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 평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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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론


"'평화Friede'는 언어적으로 유사한 낱말들인 '자유로운frei', '구혼하다freien', '친구Freund'처럼 인도게르만어의 어근 'pri-' (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원래는 사랑과 보호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감정적 속박과 애착의 관점보다는 상호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의 관점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평화'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개념이다." "결정적인 것은 평화의 상태를 '사랑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가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평화'는 어떤 때에는 (특히 친족 간에 지배적인 것처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상호 결속의 상태로,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비폭력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세에 널리 퍼진 화해와 평화의 대립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데, 여기서 '평화'는 바로 (대개는 시간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폭력의 중지를 의미할 뿐이다."(12-3)


2. Friede 1


"〈평화의 휴전induciae pacis〉과 〈항구 평화pax perpetua〉라는 '평화'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특히 안전securitas 개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평화 개념도 있었다. 이것은 내용적으로 '안전securitas'과 '정의iustitia'보다는 오히려 '사랑caritas'과 '은총gratia'을 지향하고 있으며, 법ius, 즉 엄격하고 공식적인 법률에 대한 반대말로 사용되었다." "중세 교회의 법률적 사고에서 '사랑caritas(minne)'과 '정의iustitia'는 바로 평화의 관점에서 대립했다. 즉 기독교인은 (그리고 교황도) 평화의 이해와 관계되는 〈사랑을 위해서propter caritatem〉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정의iustitia'의 관철이 짜증스러운 일(불쾌감)을 유발할 것 같은 경우에만 그랬다. 그러므로 'caritas', 즉 'minne'의 의미에서 '평화'는 '평화로운'(즉 법적인) 소송을 포함해 '다툼' 자체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다."(20-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와 정의는 세계 질서의 기본 범주들이었다. 그는 평화를 〈질서의 고요함tranquillitas ordinis〉으로, 질서를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각각 자기 자리에 앉히는 배치〉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 내에서 모든 사물에다 그에 걸맞은 〈올바른〉 자리를 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iustitia', 곧 정의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세계(만물)의 질서ordo omnium rerum〉 및 그에 소속된 평화와 정의는 그 창시자이자 최종 목표인 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본래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정의는 피안의 완전함의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지상의 평화와 정의는 불완전한 모사, 또는─극단적인 경우─영원한 평화pax aeterna, 영원한 정의의 파편상破片像 이상일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기에, 이생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 평화pax temporalis가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23)


"중세의 평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깨지지 않은 또는 회복된 법질서의 상태로서의 평화, 즉 〈평화와 정의〉로서 나타나고, 2) 소송과 논쟁의 중지로서의 평화 그리고 정의와 법의 집행이 중지된 평화, 즉 〈평화의 평온함〉이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형성하는 평화로서 나타나며, 3) 아주 특별한 법률적·물적·인적 영역들의 〈충족〉으로서의 평화, 즉 〈평화의 안전securitas pacis〉이 중요시되는 평화로서 나타난다. 공포된 평화든, 명령받은 평화든, 합의된 평화든 간에 중세의 모든 평화는 공간적·물적·인적 견지에서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 〈특수한 평화paces speciales〉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걸음은, 〈보편적 평화pax generalis〉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불린 적도 있었던 [중세 때 국왕 등이 내린] 분쟁 중지령Landfrieden이었다." "즉 보장된 비폭력 상태로서의 평화를, 비록 제약된 공간 내에서이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34-5)


# 중세의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

1. 사랑caritas, 평온tranquillitas, 안전securitas, 그리고 정의iustitia 같은 개념들로 경계가 표시되는 의미 영역 내에 평화를 분류해 넣는다.

2.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별하되, 그 기준은 정의에 대한 평화의 관계다.

3.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평화는 자기 영역권 밖의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 즉 이교도 세계를 배제한 '닫힌' 평화였다.

4. 도덕적·신화적인 '영적 평화' 개념과 달리, '정치적 평화' 개념은 개방성을 띠고 있다.

5. 모든 정치 공동체 형성의 의미와 목적으로 평화('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현세적 평화'는 '시민 평화pax civilis'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3. Freide 2


"종교 개혁에 의해 야기된 기독교 세계의 종파 분열은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평화'의 의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기독교의 '영적 평화pax spiritualis'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평화의 기초fundamentum pacis'로서의 '정의iustitia'에 대해 더 이상 의견 일치를 볼수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들 내의 그리고 공동체들 사이의 '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도 의문시되었다." "종파들로 분열된 기독교는 법과 평화를 더 이상 연관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의 평화는 '외견상의 평화pax apparens'가, 즉 전통적 교리의 의미에서의 사이비 평화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해하던 대로의 '정의롭고 참된 평화'는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복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의 결과는 전래적 의미에서의 저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평화, 즉 '시민의 평화', 다시 말해 국가의 평화였다."(43)


"국가 내부의 이 같은 평화 상태는 그 후 250년 동안 평화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이 '시민 평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세 초기의 사회 및 국가 이론서들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의 골자는, 통일된 신학적 세계 이해가 붕괴된 이후 다시 한 번 종파들을 포괄하는 공동의 '세계관'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합리적 자연법(즉 탈신학화한 기독교적 자연법)의 체계 속으로 새로운 평화 개념을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자연법 속에는 이미 15세기와 16세기의 위대한 발견들을 통해서 소개된 기독교 밖의 세계에 대한 경험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종파의 분열과 더불어 자연법 사상의 형성을 촉진시킨 경험이었다. 이 자연법의 관점에서는 '인류'가 '기독교'보다 더 가치 있고 우선한다. 또한 그것은 평화와 기독교 사이의 긴밀한 중세적 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평화'와 '인간성humanitas'을 현대적 개념으로 결합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44)


"장 보댕은 평화를 〈국가의 평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초 작업을 했다. 그러나 정신사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토마스 홉스다. 그는 〈시민의 상태status civilis〉와 〈평화의 상태status pacis〉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 미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을 아주 확고하게 표명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평화와 국가는 서로 의존한다. 즉 국가만이 자신의 시민들에게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으며, 반대로 평화를 실제로 보장해주는 그런 공동체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에게는 중세적 국가 사상가들의 (시류가 지나버린) 〈참된 평화pax vera〉보다 〈효과적인 평화pax effectiva〉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성과 진리의 문제는 제쳐둔 채 당국에 의해 강제되고 보증된 〈시민 평화〉일 뿐이었고, 그 내용은 '안전'과 '평온'이었다. 중세에 평화와 정의가 병존하는 가치들이었다면, 이제 정의는 엄격하게 평화에 종속되었다."(44-6)


"그에 비해 전통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사회 이론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자연법의 합리주의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도 자연적인 정의에 기반하는 〈자연적인 평화pax naturalis〉 개념을 고집했다. 이 사상가들은 평화란 '사회적 결합에 의해 비로소 창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러므로 칸트의 표현을 쓰자면 평화란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이들에게 평화는 오히려 사회를 이루어 살기 이전에 인간들이 함께 살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것으로서 평화는 인간들 상호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정의, 즉 이성이 직접 통찰할 수 있는 정의가 지배하는 한, 효력을 지니며 또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를 전쟁으로부터 생각해서, 평화가 〈전쟁의 부재absentia belli〉라고 파악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이들은 전쟁을 평화로부터 생각해서, 〈평화의 깨짐ruptura pacis〉으로 정의했다."(48-50)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국내 평화는 정의에 기반을 두며, 동시에 분란이 생길 경우에 무엇이 옳고 합법적인지를 확인하고, 또 자기들 판결이 실행되도록 힘쓰는 사법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다. 국가들 간의 진정한 평화도 정의에 기반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권이 없었다. 분란이 생길 경우에는 우월한 적수가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사건의 공정성을 판단하고 판결 또한 직접 집행해야만 했다. 즉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국가 간 평화inter civitas〉는 〈시민 평화〉인 국내 평화에 비교해서 좀 더 열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시민 평화〉를 옹호하던 바로 그 중요한 대변인들이 지속적인 국내 평화와 지속적인 국제 평화의 병존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고, 좀 더 높은 가치인 국내 평화를 위해 국제 평화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보댕과 리슐리외 같은 사람들은 국가 조직의 공고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국가 간 전쟁의 〈정화 작용〉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56-7)


"18세기에 들어와 (도덕적) 이성법의 이념이 점차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평화 개념 또한 중요해졌으며, 결코 완전히 잊힌 적이 없는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 간의 오래된 구분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97년에 피히테는 〈법은 평화다〉라고 쓴 바 있다." "이 진술은, 참된 평화란 폭력이 아닌, 부당한 폭력은 더더욱 아닌, 올바른 법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히테는 자국 내에서 〈시민 평화〉가 〈정의로운 평화〉가 되면 국가 간 평화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는 불가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먼저 이 국내 평화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평화 이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국제 영구 평화(1795)에 관해 구상한 칸트의 결정적인 첫 논문이 〈모든 국가의 시민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칸트에게는 내부의 '올바른' 질서 없이는 외부의 어떤 평화도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66-7)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영구 평화의 상태가 확산되는 걸 방해하는 것은 계몽되지 않은 종교 사상이 아니라 계몽되지 않은 '경제적' 사고였다. 중상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통상 제한 정책이 국가들 간의 영구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국가 간의 무역과 교통의 자유에서 그리고 국가 내부에 전파되고 있는 '무역 정신'에서 '지속적인 평화'의 가장 훌륭하고 확실한 보증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그 다음에는 도덕적으로도 이해된) 인간과 민족들 간의 이해의 조화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18세기 전반기의 경제 이론과 평화 사상의 결합이 계몽주의적·시민적 평화 개념의 실제 지평을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18세기에 〈평화의 정신〉과 〈무역의 천재〉의 결합으로서 시작된 것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 사상과 평화 사상의 동일시로까지 확대되었다."(72-3)


"프랑스혁명의 대변자들이 생각했던 평화는 공공의 안녕과 안전을 보장하는 현대 국가의 〈시민 평화〉가 아니었다. 시민 평화는 이성, 자유, 도덕을 억압하고 조롱한 전제 정치의 강제력에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혁명가들이 추구한 평화는, 국가 내의 강제 평화든 교묘하게 측정된 균형 체계에 기초하는 국가 간의 평화든 간에 국가의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평화는 보편적 인류의 평화로서, 무력이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 게 아니라 비이성과 착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모든 인간과 민족의 자연스러운 〈박애〉로부터 이에 반대하는 방해물들이 먼저 제거되기만 하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는 평화였다. 방해물들이란 절대주의 국가 체제와 그 대변자들이다." "영구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시민전으로서만, 즉 세계시민의 전쟁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 평화, 보편적 박애의 제국은 자의적 국경선을 통해 제한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76-8)


"'평화'의 종교적 의미를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구상들의 특징이다." "전쟁과 적대관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했던 것은 바로 세속화된 종교적 평화 개념이었다. 세계에 평화의 제국이 도래하리라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이 도래하는 제국의 대표자로서 이해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평화의 제국을 믿지 않거나 또는 이 제국의 도래를 저지시키려고까지 했던 모든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적으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평화를 저지하거나 공격하는 자는 누구나 평화의 적 그 자체로 간주했고, 미래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박멸되어야만 할 평화의 절대적 적(중세의 이단자가 그랬듯이)으로 간주되었다. 이 절대적 적(평화의 적과 인류의 적)의 개념은 나중에 그 어느 이론에서보다도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큰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95)


4. 전망


"국력 신장을 위해 또는 민족적 이익 및 권리 주장을 위해 전쟁이 필요 불가결하고도 허용된 수단이라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도덕 능력의 회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철천욕(鐵泉浴, 혹독한 시련)'이라며 전쟁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확신들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19세기 후반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확신들은 파시즘 사상의 구성 요소로서 20세기에도 아직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파시즘의 붕괴 이후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주전론자들〉은 전쟁을 찬미하면서 오직 국가들 간의 전쟁만을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공공의 안녕과 안전이라는 국내 평화의 가치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20세기 초에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데, 〈폭력에 관한 성찰〉에서의 조르주 소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이 국가 내부의 싸움에서도 필요한 형태로 인정되기를 바라면서, 무조건적 평화 연맹으로서의 근대 국가의 의미를 지양했다."(102-3)


"'냉전'이 개시된 이후 평화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조화, 자유, 정의, 행복의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희망하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평화'는 세계 구원을 기대하는 짧은 상투어가 되었다. 물론 이때 주목해야만 할 점은 평화가 더 이상 인간적인 공동생활의 이상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pax universalis'로서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 한, 이 〈구원〉은 핵무기 기술에 직면해 완전히 냉철한 의미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 그리고 정복은 인간성에 반하는 것 ······〉이라는 홀바흐의 말은, 극단적인 형태의 전쟁(세계 전쟁)은 인간성humanitas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humanum genus〉 전체를 향해 조준되었다는 격화된 표현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모든 역사적 경험을 초월하는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평화를 얻으려는 학문적 노력과 각성이 강화되었다."(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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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빌헬름 얀센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권선형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Krieg 1


"14세기부터 '무력에 의한 권리중재kriec'에서 '전쟁Krieg'으로 개념 내용의 이동이 목격되는 사실은 영방領邦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법 제도의 새로운 정립 및 전래된 소송 절차의 개혁,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공적 무력의 확립을 통해 영방들은 당시에 전쟁이라는 개념이 발전하기 위한 객관적인 전제 조건들을 이루어냈다. 이런 영방들은─서유럽의 왕국들과 마찬가지로─그 구조상 내부적으로 분쟁에 적대적이었고, 분쟁을 억제하는 데에도 확실히 중세 절정기에 교회가 명하는 신의 평화령Gottesfrieden이나 왕이 명하는 지방의 평화령Landfrieden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무력 사용을 독점하거나 독자적인 무력에 의한 법률 수행을 일반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무기 사용권이 있는 사람들은 기사의 페데Fehde라는 형태로 계속 전쟁과 같은 방식의 대결을 할 수 있었다."(18)


# 영방領邦 : 중세 독일의 지방 국가로 제후들이 독립된 주권 영역을 형성한 형태

# 페데Fehde : 중세의 합법적인 결투, 싸움


"중세의 전쟁들은 커다란 페데들로, 질적인 면에서는 이런 페데들과 구분되지 않고 단지 양적인 면에서만 구분되었다. 그리고 페데들에 결부되어 있는 결과와 관련하여 정치적 계산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다루어졌다. 그래서 예를 들어 1344년에 쾰른의 주교좌主敎座 성당 참사회는 대주교 발람에게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정말 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커다란 전쟁groyss urluge〉도 시작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쟁은, 무력 사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기존 법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구체적인 권리 분쟁이 무력에 의해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력과 법은 상호간에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었지 결코 대립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페데권을 가진 집단을 제한하고 평화적인 분쟁 해결(중재재판)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리고 군주에게 권력이 축적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무력을 덜 사용하는 추세이긴 했다."(19)


"중세에는 전혀 무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판결이나 화해에 의해 종결될 수 있었던 커다란 전쟁과 페데들이 존재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세의 전쟁은 권리 분쟁으로서의 그 개념에 걸맞게 최소한의 무력 행위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쟁의 목표는 적을 괴멸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률적 관점을 적이 제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런 인정을 종국에는 평화 협정, 속죄를 통해 고착화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요는 〈해를 끼치기〉를 통해 실행되었다. 즉 당시의 문헌들이 말하듯이 〈약탈과 방화〉를 통해 또는 오늘날 말하곤 하는 것처럼 재화에 대한 폭력을 통해 실행되었다. 사람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로잡기 위해 행사되었다. 시체가 아니라 보상금을 원했기 때문이다." "분쟁이 빈번했지만 15세기에 경제 부흥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만 이해된다."(20-1)


"게르만적 뿌리에서 발전한 중세의 헌법 구조가 전쟁의 정당성 이론에 대한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중세 세계의 또 다른 중심 세력이었던 기독교는 그런 정당성 이론을 매우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전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전쟁 금지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 전통들과 경향들은, 전쟁 그 자체는 허락하지 않지만 특정 조건하에서의 전쟁은 허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찰에 의해 비교적 쉽게 밀려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정당한 전쟁gerechte Krieg〉의 이론, 허가된 전쟁의 이론으로 이런 성찰들을 종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당성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전쟁─을 전쟁의 원인에서 찾아냈다."(22)


3. Krieg 2


"종파 분열은 비교적 고요했던 중세 말기를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전쟁 유형을 낳았다. 즉 서양 역사를 150년 동안 규정지은 종파에 의한 내전을 낳았다. 당시까지의 전쟁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인정된 법질서 내에서의 무력에 의한 권리 분쟁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근본적인 공통점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하는 무력 사용의 한계들이 무너졌다. 중세에는 단지 이교도 전쟁이라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형식으로만 알려져 있던 것이 종파 전쟁에서는 전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즉 무력의 무분별한 표출, 적을 〈무법자outlaw〉로 경멸하기, 적을 괴멸시키려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공화제respublicae를 안정시킬 채비를 했었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희미한 경계들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가시적이고 작동 가능했기 때문에 (중세의 사상가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전은 특별히 강렬하게 체험된 공포가 되었다."(35)


"중세 도덕신학Moraltheologie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된 자연법 학설은 이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적합한 자연적 상태가 평화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나 보통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하는 예외적인 상태로 여겨졌다.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지만 홉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socialitas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상태status naturalis〉와 관련하여 평화와 전쟁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에게는 평화pax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in omnes이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다." "홉스의 국가론은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반영됨으로써, 즉 국가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학설이 됨으로써 전쟁 개념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들 사이에서inter civitates〉는 계속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가 존재했고, 〈자연법laws of nature〉은 무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6-7)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전쟁과 협정을 번갈아서 행하여 균형과 안정을 이루었던 유럽적 국가 시스템을 비판함으로써 영구 평화ewige Friede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관점에 따르면 전쟁을 관리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절대주의 국가는 전쟁의 원인 제공자다. 〈평화는 자유로부터, 또한 필연적으로 억압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생겨난다.〉 100년이 지체된 후인 1866년 제네바 〈국제평화협정〉은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어구 속에 이런 확신을 집약했다. 계몽주의의 국가 간 전쟁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러니까 전쟁보다는 국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산물로 해석된 것처럼 반대로 국가가 전쟁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향에 의해 작은 사회들이 형성되고, 필요에 의해 시민 사회들이 형성되며, 전쟁에 의해 국가들이 형성된다.〉"(48-50)


"내전의 청산인이자 내적 평화의 보증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정당화는, 내적 평화가 사회에 대한 전제정치 식의 억압으로 가치가 떨어진 이래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적·경제적 이익의 조화라는 계몽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무력을 독점한 제도적 평화 보증인의 필요성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었다. 파스칼이 자기 시대의 경험에 의해 모든 불행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염려한 내전은 이제 마블리에게는 심지어 〈선행bien〉으로 여겨졌다. 내전의 도움을 통해서만 억압과 정복을 지향하는 구체제의 지배 질서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로써 영구 평화 상태를 마련할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유럽적 국가 시스템의 틀 안에서 혁명적인 내전은 전쟁에 대한 전쟁이라는 특성과 신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내전에 대한 성찰들은 프랑스 혁명과 그에 이은 혁명 전쟁에서 점차 전쟁 이데올로기로 집약되었다."(52)


"국가 간 전쟁은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내전의 방지를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단지 유럽의 전래된 정치 질서에 의해 강요된 내전의 수행 방식의 하나로 합법화되었다." "구舊체제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왕의 전투를 모든 점에서 시민과 멀리 떼어 놓는 원칙이 적용된 반면에, (전쟁이 '수동적으로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반대로 온 국민이 실제적인 측면이나 선동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관여했다. 옛 국가의 군인들에게는 그때그때의 〈전쟁의 원인causa belli〉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아무 상관이 없었음에 틀림없다!─이제 전사들은 목숨 걸고 싸우거나 또는 그렇게 싸운다고 믿는 그 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무관심한 순종과 형식적인 용감성 이상이 요구되었다. 전사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싸우면서 변호한 그 원칙들은 열정, 희생정신 및 헌신을 요구했다."(54-6)


"독일에서는 구체제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이제 헤겔 철학을 통해 이념적으로 기초를 다진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법률처럼 국가의 기본 기구〉(라손, 1868)로서 국가를 통해 대변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남겨졌다. 사실로 주어지고 철학적으로 합법화된 이러한 지평 내에서 전쟁을 〈적을 강요하여 우리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력행위로, 다른 수단들이 개입된 정치적 교류의 연장으로〉 이해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개될 수 있었다." "19세기의 정치적 실천은 전반적으로 이런 모델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쟁의 목적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쟁취하는 것이다.〉(비스마르크), 〈전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합리적 조약을 맺기 위한 교섭 수단이다.〉(라손, 1871) 할러는 전쟁이 〈좀 더 나은 평화, 즉 좀 더 유리한 조약으로 이끄는 ····· 수단〉으로 통용되도록 했다."(66-7)


"18세기와는 달리 19세기의 정치가들은 내부적으로도 선동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또 전쟁에 동참하며, 전쟁에 따라붙는 〈위대하고 정당한 민족적 이해〉를 여론에 분명하게 전달하거나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여론을 형성하는 한 국가의 교양계층이 이미 전쟁을 〈문명화된 국민〉의 〈구원〉이나 〈회춘〉으로서(라손, 1868) 광적으로 확신하고 있을수록 더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상호간에 내적인 간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해함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가의 생각과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된 19세기의 전쟁주의가 만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전쟁을 이처럼 보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얼마나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었는지가 분명해졌다." "민족 전쟁으로 행해진 19세기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개인적 (적대감) 또는 집단적 당혹감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제거될 수 없었다."(69)


"여기서 힘주어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전쟁주의는 오로지 국가들 사이의 전쟁만 고려했다는 점과, 그래서 공적인 평안과 안전을 통해 나타나는 국가의 내적 평화는 이론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런 외적인 전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국가 간 전쟁을 찬양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발설되지는 않은 어떤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전에 대한 공포, 즉 혁명에 대한 고백되지 않은 공포였다는 혐의 말이다. 이미 헤겔은 〈행복한 전쟁은 내적인 불안을 막아주고 국가의 내적 힘을 확고하게 했다〉고 확증했다. 이것은 보댕 이래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전쟁은 단지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도덕적인 고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혁명적인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분해한다는 것을 하인리히 레오는 암시했었다." "19세기 내내 귀족과 시민계급 엘리트 대부분은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74-5)


"영구 평화에 관한 계몽주의적 이념에서 처음으로,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착된 정치·사회적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미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전쟁을 사회화의 산물로 인식했었다." "이제는 전제주의자와 귀족들이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사유재산 원칙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탄받았다.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착취가 지금까지 추구되어온 조화로운 평화 상태로 가는 도상에서 진정 방해가 되는 요소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소유라는 개념이 인간을 동물 이하로 끌어내리는 가장 끔찍한 괴물인 전쟁을 세상에 불러들였다.〉"(79-81) "최후의 혁명적 내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하는 시민사회의 대립 요소를 제거하려고 한, 바이틀링이 말하는─종교적 색채를 띤─사회 혁명적 동력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혔고, 포괄적인 역사 이론의 틀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83)


"마르크스의 전쟁 개념의 근간에 놓여 있는 특징은 전쟁에 관한 보통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생각과 가치 평가를 독특하게 뒤집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 전쟁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국가 간 전쟁은 19세기 중반 이래로 단지 진정한 대립을 은폐하고 국제적인 내전의─〈가난한 자들의 부자들에 대한 전쟁〉의─발발을 연기시키는 그런 기능만 지녔다." "마르크스의 혁명 개념이 혁명적 내전의 전통에 의해 매우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은 (시민)전쟁이다.〉 레닌의 이 문장도 마르크스의 입장을 적절하게 특징짓는다. 내전이 없는 비폭력적인 혁명에 대한 구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에서 거둔 성과가 자아낸 인상에 의해 비로소 발전되었고, 현대의 무기 기술로 볼 때 성공적인 봉기가 가능할지에 대한 늙은 엥겔스의 의심을 통해 힘을 받았다."(84-5)


4. 전망


"내전의 전통은 다시 20세기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중요해졌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핵폭탄이라는 파괴적인 무기의 발전으로 국가 간 전쟁에 정치 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또는 전쟁을 주전론적으로 신격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주권 국가들의 전래된 시스템이 거대 권력들의 존재로 인해 변형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존재하고 심지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국가들 사이의 간헐적인 국지전을 도외시한다면 이런 시스템에 구조적 특징으로 내재해 있는 국가 간의 열린 전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 무의미하게 된 이후, 혁명 전쟁은 이를 넘어서서 거대 국가들이 다양한 방식의 공개적·비공개적 중재들을 통해, 말하자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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