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 개혁과 (종교)개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아이케 볼가스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백승종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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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reformatio' 개념의 고전적 토대


"'reformare'라는 동사를 처음 사용한 오비디우스나 아풀레이우스 같은 시인들은 아무런 정치적 의미도 담지 않은 채, 오직 시적으로만 그 동사를 활용했다. 그것은 (가) 형태상의 전환 또는 변화, 즉 〈형태의 전환이라는 의미에서의 변신/변형〉을 또는 (나) 질적으로 더 좋았던 과거 상태로의 복귀를 뜻했다." "1세기에는 'reformare'라는 동사의 의미가 시와 상상의 세계를 넘어서 도덕 및 정치 분야로 확장되면서 'reformatio'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reformator'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그 출발은 몰락 또는 아래로의 계속적인 추락이란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몰락으로부터 그 이전 상태로의 회귀, 즉 가치 면에서 더욱 우월했던 과거로의 복귀를 통해, 현재 상황을 변화시킬 필요성 또는 그런 상태에 대한 열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reformatio'의 개념이 내용적으로 완전히 고정되었다. 즉 'reformatio'는 퇴락이 전제된 상황에서, 과거의 척도를 목표삼아 개선을 꾀하는 것이었다."(12-3)


"《구약성경》에서는 'reformatio'와 'reformare'라는 개념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동사 'reformare'가 발견된다." "이것은 질적으로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하는 것을 뜻했다. 창조의 본질로 재귀한다는 《신약성경》의 언어 용례와 비교해볼 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창조적 변모, 즉 새로운 모습의 창출에 관한 것으로, 그 새로움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는 서술이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reformatio'는 'conformare(본받다)'와 대비되면서 그 근사치에 더욱 근접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하게 하십시오.〉 여기에서 드러난 것처럼, 행동을 촉구하는 요구는 하느님과 같은 형상을 가진 인간답게 낮은 곳에서 출발해서 더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때 'reformare'는 종교적 완성의 종말론적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16-7)


2. 중세의 'reformatio' 개념


"중세에는 후기 고전주의자들[그리스의 인문학자들]과 동일한 관점에서 'reformatio'의 개념이 수용되었다. 하느님의 창조물인 이 세상에 관해 두 가지 인간적 행동 양식이 존재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상태를 'conservatio(유지)'하고 'reformatio(복구)'하든가, 또는 잘못된 상태를 'correctio(교정)'하는 것이었다. 'reformare'는 하느님이 마련한 세계 질서를 구현하기 위한 의식적 행동이었다. 비록 결함이 있을지는 몰라도, 죄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 질서의 회복을 추구했다. 중세의 'reformatio' 개념에 따르면, 모든 변화는 하느님이 온전하게 만드신 상태로부터 퇴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reformare'의 개념은 1차적으로 교회의 영역 안에 머물렀으나, 'emendare(수정하다)', 'restaurare(복구하다)', 'corrigere(교정하다)' 등의 개념과 대체할 수 있었다. 개선의 재향점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완벽한 창조의 이상인 〈올바른 규범norma rectitudinis〉이었다."(22-3)


"중세 초/중엽의 세속 문헌에서는 'reformare'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11세기까지도 정치적 개념을 담은 것은 주로 'renovatio(복구)'라는 용어였다. 여기에서 보듯이, 과거로의 회귀라는 관념은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과거 상태의 복구를 뜻했다. 'renovatio'는 과거의 사물을 갱신하는 것이고, 'reformatio'는 설사 파괴되었다 해도 아직은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을 복구한다는 뜻이었다." "'renovatio'는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전제로 했다. 그것은 과거의 상태를 수정함으로써 얻는 안정 등이 아니라 의식적인 새 출발이었다."(25-6) "14세기에는 교회 조직 전체나 신성로마제국의 개혁, 혹은 양자 모두를 개혁reformare할 필요성이 전례 없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통탄할 만한 개개인의 처지는 과거의 관계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개혁이 힘써 추진될 때 가능하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때로 종말론적 요소와 결합되었다."(29-30)


3. 15세기의 'reformatio'와 'Reformation'


"15세기가 되자 'reformatio'라는 개념은 더욱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특정한 것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히 부푼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문헌들, 특히 독일어 전승에서 동사 'reformieren'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교회와 세상의 새 질서를 만들기 위한 웅장한 계획 가운데 나타났다." "(종말론적, 유토피아적 차원에서 개혁 요구가 더욱 강렬해지면서) 이제 'reformatio'는 구체적인 개별 상황과는 거리가 먼 일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378년의 분열Schisma 이래로 외형적으로는 이미 몰락할 위기에 처한 교회였기 때문에 개혁이 불가피했다. 세속의 질서, 특히 신성로마제국도 같은 운명이었다. 그 밖에 인간의 생활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는 'reformatio'를 미래를 향한 돌파구로 여긴다든가, 새로운 요소를 수용해서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새로 이룩하기 위해 관계를 전복시키는 생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34-5)


# 1378년의 분열 : 교회 분열로 두 명의 교황이 할거하게 된 상황. 위기를 막으려고 피사 공의회를 열었으나 통합은커녕 교황이 셋으로 늘어났다.


4. 16~17세기에 'Reformation'의 의미


"16세기에는 'Reformation'의 의미가 성속聖俗 간에 더욱 대조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개념이 명백하게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세속적 언어 습관에서 'Reformation'은 변화된 관계에 발맞춰 제도나 법령을 개정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과거의 규범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15세기에 이 용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신학자들과 교회였다. 종교개혁에 관한 예전의 주장과는 달리, 교회 쇄신에 관한 루터의 요구 중에서는 영적인 요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Reformation'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옛 교회, 즉 초대 교회 공동체의 복구, 달리 말해 근원으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그것의 표면적인 변화로는 충분하지 못했던지, 요수아 말러는 〈교리가 개혁되지 않으면, 관습의 개혁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Reformation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일이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결함을 제거하고 손상된 것을 복구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으로 여겨졌다."(44-5)


"교회가 신구교로 양분되자 신앙의 대립이 고착화되었고, 동일한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Reformation'은 신교의 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약(1555) 때만 해도 아직은 [막연하게 양자를] 구별하는 용어였다." "즉 신교도들은 'reformiert(개혁파)'란 용어를 통해 우월감이 깃든 자기인식을 표현했다. 가령 그들은 루터파 교회를 〈우리 교회의 개혁〉이라 일컫곤 했다."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도들 사이에도 'reformiert'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한 차례 논쟁이 일어났다. '제네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칼뱅파만이 '개혁파Reformiert'로 인정되었다. 독일어권에 속한 칼뱅파의 자기인식은 프랑스 [신교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1617년[에 간행된 종교개혁에 관한] 기념 문헌에서 확인되듯이, 'Reformation'의 개념은 신교도들 사이에서 16세기 교회의 일대 사건[종교개혁]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고한 위치를 획득했다. 협의의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루터의 행적에 국한되었다."(50-1)


"17세기에는 'Reformation'의 개념을 16세기에 일어났던 교회사적 사건[종교개혁]에 국한시키는 것이 일반적 풍조가 아니었다. 개신교회는 당대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도 '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심지어는 1653~1655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그 영토 내에서 행한 가톨릭적이고 반종교개혁적인 조치들까지도 그렇게 불렀다." "종교전쟁을 통해 제국의 각 기관이 망가지고 불능 상태에 빠진 뒤에는 그 재건 및 현재 상태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 재판 결과의 정정까지도 'Reformation'이라 불렀다. '제국의 법정 개혁'의 주목적이 '과정을 줄이려는 노력'이었다고 하면, 그 경우 'Reformation'은 '개혁Reform' 또는 '개선Verbesserung'을 의미한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세속의 용례에서 'Reformation'은 잘못된 상태의 척결이라는 뜻과 더불어 미래 지향적인 측면을 가지게 되었다. 재편성, 곧 달라진 상황에 대한 적응의 의미가 과거의 이상이나 모범을 지향했던 사실에 견주어보면 의미심장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54-5)


5. 시대 구분의 명칭이 된 'Reformation'


"18세기에 간행된 어학 사전들과 백과전서에서 'Reformation'은 주로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루터와 그 추종자들에 관해 사용된 Reformation 개념이었다. 이것은 교회 제도와 교리상의 오남용과 오류를 제거한다는 의미였다.〉 18세기에 간행된 백과사전 《체들러》는 매우 간략하게나마 법률적 개념으로서 이를 정리했다. 〈하나의 법령 또는 명령이 새것에 의해 재확인되거나, 몇가지 점에서 새로 개정되고, 이로써 정치, 법률적으로 한 가지 측면 또는 다른 측면에서 수정, 개선되었을 경우에〉, 'Reformation'으로 여길 수 있다고 했다." "반면 계몽 신학자 및 계몽사상가들은 종교개혁을 자신들의 이상과 소망을 구현하기 위한 전 단계로 인식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이 각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역사 발전에 독특한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종교개혁은 정신적 개명의 시작이며, 계몽을 완수하기 위한 사업의 토대 또는 준비 작업이었다."(58-60)


6. 독일 관념론과 자유주의의 'Reformation'에 관한 이해


"종교개혁을 통해 인간이 획득한 자유에 관한 해석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의식을 되찾은 정신 개념의 측면에서 본 종교개혁은 인간 정신의 발전사에서 타당한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문화적 업적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이로써, 〈새로움은 마지막 깃발을 펼치고 ····· 자유로운 정신의 깃발은 진실로 그 자체인 것, 오직 물자체物自體다.〉 헤겔 좌파 역시 '계몽 판단'의 입장에서, 종교개혁의 본연적인 성과는 정신적 자유의 획득에 있다고 보았다." "아르놀트 루게는 반동과 혁명을 둘러싼 동시대인들의 대립에는 종교개혁과 '예수회주의Jesuitenismus'의 해묵은 적대 관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당시의 지배적인 정치 및 영성적 경향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하는 법정이었다. 종교개혁의 뒤를 이어 국가를 상대로 개별 인간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개혁politische Reformation'이 전개되어, 개신교가 이미 도달한 것과 같은 결과를 추구했다."(70-1)


"마르크스는 종교개혁을 개인의 정신적 자유 원칙과 동일시하는 전통적이고 합리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개신교는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의 문제 제기〉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525년과 1848년의 역사적 사례를 상호 비교했다. 그는 루터를 〈부르주아 개혁의 대표자〉라고 불렀고, 〈부르주아 개혁가〉 루터와 〈평민적 혁명가〉 뮌처를 상호 대비시켰다. 엥겔스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일종의 부르주아 운동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부르주아 계층이 봉건제도에 항거한 사상 최초의 결전장이었고, 17세기에는 청교도혁명, 18세기 말에는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계몽주의적 인식의 완벽한 계승자였다." "하이네는 루터의 〈위대한 종교 혁명〉에서 칸트, 피히테 및 헤겔의 〈철학 혁명〉까지를 일컬어 〈개신교의 마지막 귀결〉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독일이 우선 〈철학의 완성〉을 이룬 다음, 〈정치적 혁명〉 곧 〈독일 혁명〉으로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71-2)


7. 'Reform'의 개념


"프랑스혁명을 겪고 나자, '혁명'의 개념은 정확히 〈비혁명Nicht-Revolution〉을 통해 일어난 사태 변화의 반대 개념이 되었다. 그때까지 'Reform'의 개념은 이런 목적에 국한되었다. 그 개념적 정의는 정립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다른 분야에 적용할 기준은 아직 모호했다. '혁명'과 대비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개념[Reform]은 그 출발부터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개혁'을 비혁명적이라고 이해한 선례는 영국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으로 기왕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에드먼드 버크에게 개혁은 곧 합리적인 정치적 중도였다." "버크가 주장한 개혁은 금세 효과를 내기 마련인 혁명적 조치들과는 달리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정을 가능하게 하며, 과장을 금지하고, 다음 세대에게 참여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 까닭에 시간적 요인은 개혁의 부가적인 장점이었다. 〈우리는 인내함으로써,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크게 성취할 것이다.〉"(81-3)


8. 19세기에 그 개념 정립과 확대 적용


"[프랑스]혁명 시대가 막을 내리자, 독일에서는 '혁명'의 대립 개념인 '개혁'의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전한 개혁 이론의 전제는 하나의 보편적이고 지속적인 역동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법률과 국가 제도는 점차 정의를 잃은 상태에 빠지고 말지만, 〈문화의 근본 조건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대중의 진보〉의 토대 위에서 공동체가 발전할 경우, 양자[공동체와 법률 및 국가 제도] 사이에는 긴장이 조성되기 마련이란 신념이었다. 이처럼 사회적 발전과 정치적 안정성 간에는 확대일로에 있는 내재적 모순이 존재하는 데서 갈등이 빚어진다고 보았다. 그 갈등이 혁명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려면, 시의적절한 개혁을 통해 궤도를 수정함으로써 문제를 극복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정치가의 의무는 그 시점을 옳게 인식하고, 〈제때 개혁을 통해 그 뜻[개혁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하는 것이다.〉"(92-3)


"왕정복고기의 경험을 토대로 한 헌법 논쟁을 거치면서, '개혁'과 '혁명'의 대립 구도에 제3의 항목이 끼어들어, '개혁', '혁명' 및 '반작용Reaktion'의 긴장 관계로 확대되었다." "푈리츠는 〈진실은 대개의 경우 양극단의 중간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개혁이야말로 혁명Revolution과 반동Reaktion을 모면할 수단이라고 믿었다. 이 경우 '혁명'이란 〈내적 국가 생활과 국가 조직 전체의 근간을 폭력을 이용해 재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기왕의 합법적인 국가적 토대를 함부로 무너뜨리거나 아직 노화되었다고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수호하지 않고 충격을 가해 파괴시키는 행위였다. 한편 〈반동Reaktion〉은 〈민중 및 국가의 공적인 생활에서 더 나은 상태를 추구하려는 진보를 가로막고, 낡아빠진 것 또는 이미 붕괴된 것을 강요하려는 의식적인 방해활동 또는 파괴〉 행위였다. '반동'은 단순히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철폐된 관계들을 되살리려는 노력 또는 원상회복을 기도하는 행위였다."(95-7)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계급투쟁과 혁명 이론으로 무장되었고, 그들은 19세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개혁'을 '혁명'의 대립 개념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념적 인식을 토대로 개혁을 하찮은 정치적 강령이라 폄하했다." "'개혁주의Reformation' 개념은 ('수정주의Revisionismus'가 그랬듯이) 무엇보다도 대상자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악용되었다. 공식적 이론에서 벗어난 두 가지[개혁주의와 수정주의]는 상대방이 결코 개혁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 개념이 수정주의 지지자들을 대표하지 못하는데도, 논쟁에서는 양자가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교의敎義는 ····· 이른바 운동의 실질적인 발전의 뒷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베른슈타인도 실상은 '개혁주의'와 '수정주의'를 동일시했다. 그런데 수정주의와는 달리 개혁주의에 관한 체계적인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113-5)


9. 전망


"19세기 이후에 '개혁'은 적응, 일신, 변화를 뜻하는 모든 대상에 적용되었다." "'개혁'은 [히틀러 일당의] 국가사회주의가 부르짖은 전투적 정치 구호와는 애초부터 합치될 수 없었다. 그 개념에는 지나치게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 또는 경멸적 의미로 해석된 자유주의가 깃들어 있었다. [슈미트의 법철학 및 실존주의적] 결정론Dezisionismus을 둘러싼 논쟁에서 '개혁'은 모종의 대안, 즉 결정을 내리라는 강요를 회피한 채 이해관계의 절충을 통해 화해를 꾀하든가, 또는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고집하면서 중도를 모색하지만 막상 그 길은 분명하지 않은 무엇이 되고 말았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해서 본다면, 급진적이고 전체적인 변화만이 〈국가/민족적 혁명〉, 곧 〈변혁〉의 결과로서 쓸모 있는 것이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현상유지에 대한 집착이었다. 개혁의 거부는 언제나 가능했다. 〈목표는 개혁 또는 복구가 아니다. 목표는 전체이고 제국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모든 것은 종말이다.〉"(1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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