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 전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4
빌헬름 얀센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권선형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1. 서론


2. Krieg 1


"14세기부터 '무력에 의한 권리중재kriec'에서 '전쟁Krieg'으로 개념 내용의 이동이 목격되는 사실은 영방領邦의 힘이 강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법 제도의 새로운 정립 및 전래된 소송 절차의 개혁,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공적 무력의 확립을 통해 영방들은 당시에 전쟁이라는 개념이 발전하기 위한 객관적인 전제 조건들을 이루어냈다. 이런 영방들은─서유럽의 왕국들과 마찬가지로─그 구조상 내부적으로 분쟁에 적대적이었고, 분쟁을 억제하는 데에도 확실히 중세 절정기에 교회가 명하는 신의 평화령Gottesfrieden이나 왕이 명하는 지방의 평화령Landfrieden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합법적인 무력 사용을 독점하거나 독자적인 무력에 의한 법률 수행을 일반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무기 사용권이 있는 사람들은 기사의 페데Fehde라는 형태로 계속 전쟁과 같은 방식의 대결을 할 수 있었다."(18)


# 영방領邦 : 중세 독일의 지방 국가로 제후들이 독립된 주권 영역을 형성한 형태

# 페데Fehde : 중세의 합법적인 결투, 싸움


"중세의 전쟁들은 커다란 페데들로, 질적인 면에서는 이런 페데들과 구분되지 않고 단지 양적인 면에서만 구분되었다. 그리고 페데들에 결부되어 있는 결과와 관련하여 정치적 계산이라는 측면에서 좀 더 주의 깊게 다루어졌다. 그래서 예를 들어 1344년에 쾰른의 주교좌主敎座 성당 참사회는 대주교 발람에게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정말 대규모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커다란 전쟁groyss urluge〉도 시작하지 말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전쟁은, 무력 사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기존 법질서의 테두리 내에서 구체적인 권리 분쟁이 무력에 의해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무력과 법은 상호간에 조화를 잘 이루는 것이었지 결코 대립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페데권을 가진 집단을 제한하고 평화적인 분쟁 해결(중재재판)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그리고 군주에게 권력이 축적됨으로써 전반적으로 무력을 덜 사용하는 추세이긴 했다."(19)


"중세에는 전혀 무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판결이나 화해에 의해 종결될 수 있었던 커다란 전쟁과 페데들이 존재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세의 전쟁은 권리 분쟁으로서의 그 개념에 걸맞게 최소한의 무력 행위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쟁의 목표는 적을 괴멸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률적 관점을 적이 제 자신에게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런 인정을 종국에는 평화 협정, 속죄를 통해 고착화하도록 강요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강요는 〈해를 끼치기〉를 통해 실행되었다. 즉 당시의 문헌들이 말하듯이 〈약탈과 방화〉를 통해 또는 오늘날 말하곤 하는 것처럼 재화에 대한 폭력을 통해 실행되었다. 사람에 대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적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로잡기 위해 행사되었다. 시체가 아니라 보상금을 원했기 때문이다." "분쟁이 빈번했지만 15세기에 경제 부흥이 이루어진 이유는 이런 전제 조건하에서만 이해된다."(20-1)


"게르만적 뿌리에서 발전한 중세의 헌법 구조가 전쟁의 정당성 이론에 대한 욕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중세 세계의 또 다른 중심 세력이었던 기독교는 그런 정당성 이론을 매우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전쟁에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합치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전쟁 금지를 목표로 하는 엄격한 전통들과 경향들은, 전쟁 그 자체는 허락하지 않지만 특정 조건하에서의 전쟁은 허용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찰에 의해 비교적 쉽게 밀려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정당한 전쟁gerechte Krieg〉의 이론, 허가된 전쟁의 이론으로 이런 성찰들을 종합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정당성을 위한 결정적인 기준─불의에 대해 복수하는 전쟁─을 전쟁의 원인에서 찾아냈다."(22)


3. Krieg 2


"종파 분열은 비교적 고요했던 중세 말기를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전쟁 유형을 낳았다. 즉 서양 역사를 150년 동안 규정지은 종파에 의한 내전을 낳았다. 당시까지의 전쟁이 적대자들 사이에서 인정된 법질서 내에서의 무력에 의한 권리 분쟁이었다면, 이제는 이런 근본적인 공통점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하는 무력 사용의 한계들이 무너졌다. 중세에는 단지 이교도 전쟁이라는 이례적이고 극단적인 형식으로만 알려져 있던 것이 종파 전쟁에서는 전반적인 특징이 되었다. 즉 무력의 무분별한 표출, 적을 〈무법자outlaw〉로 경멸하기, 적을 괴멸시키려는 경향이 그것들이다. 공화제respublicae를 안정시킬 채비를 했었던 내부와 외부 사이의 희미한 경계들은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미 가시적이고 작동 가능했기 때문에 (중세의 사상가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내전은 특별히 강렬하게 체험된 공포가 되었다."(35)


"중세 도덕신학Moraltheologie의 테두리 안에서 발전된 자연법 학설은 이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사는 적합한 자연적 상태가 평화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은 언제나 보통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하는 예외적인 상태로 여겨졌다.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한다.〉(아우구스티누스) 하지만 홉스의 경우에는 인간의 본능적인 사회성socialitas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적 상태status naturalis〉와 관련하여 평화와 전쟁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에게는 평화pax가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in omnes이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다." "홉스의 국가론은 말하자면 부정적으로 반영됨으로써, 즉 국가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학설이 됨으로써 전쟁 개념의 발전에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국가들 사이에서inter civitates〉는 계속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가 존재했고, 〈자연법laws of nature〉은 무제한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36-7)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전쟁과 협정을 번갈아서 행하여 균형과 안정을 이루었던 유럽적 국가 시스템을 비판함으로써 영구 평화ewige Friede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다." "(절대주의) 국가는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관점에 따르면 전쟁을 관리할 수 있는 그 어떤 기능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절대주의 국가는 전쟁의 원인 제공자다. 〈평화는 자유로부터, 또한 필연적으로 억압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생겨난다.〉 100년이 지체된 후인 1866년 제네바 〈국제평화협정〉은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어구 속에 이런 확신을 집약했다. 계몽주의의 국가 간 전쟁에 대한 유죄 판결은 그러니까 전쟁보다는 국가를 겨냥하고 있었다." "전쟁이 국가의 산물로 해석된 것처럼 반대로 국가가 전쟁의 산물로 해석되기도 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향에 의해 작은 사회들이 형성되고, 필요에 의해 시민 사회들이 형성되며, 전쟁에 의해 국가들이 형성된다.〉"(48-50)


"내전의 청산인이자 내적 평화의 보증인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정당화는, 내적 평화가 사회에 대한 전제정치 식의 억압으로 가치가 떨어진 이래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인간의 도덕적·경제적 이익의 조화라는 계몽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무력을 독점한 제도적 평화 보증인의 필요성은 더 이상 인정될 수 없었다. 파스칼이 자기 시대의 경험에 의해 모든 불행 중에 가장 좋지 않은 것으로 염려한 내전은 이제 마블리에게는 심지어 〈선행bien〉으로 여겨졌다. 내전의 도움을 통해서만 억압과 정복을 지향하는 구체제의 지배 질서를 제거할 수 있었고, 그로써 영구 평화 상태를 마련할 조건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유럽적 국가 시스템의 틀 안에서 혁명적인 내전은 전쟁에 대한 전쟁이라는 특성과 신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식의 내전에 대한 성찰들은 프랑스 혁명과 그에 이은 혁명 전쟁에서 점차 전쟁 이데올로기로 집약되었다."(52)


"국가 간 전쟁은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더 이상 내전의 방지를 위한 필요악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단지 유럽의 전래된 정치 질서에 의해 강요된 내전의 수행 방식의 하나로 합법화되었다." "구舊체제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왕의 전투를 모든 점에서 시민과 멀리 떼어 놓는 원칙이 적용된 반면에, (전쟁이 '수동적으로 민주화'되면서) 이제는 반대로 온 국민이 실제적인 측면이나 선동적인 측면에서 전쟁에 관여했다. 옛 국가의 군인들에게는 그때그때의 〈전쟁의 원인causa belli〉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면─아무 상관이 없었음에 틀림없다!─이제 전사들은 목숨 걸고 싸우거나 또는 그렇게 싸운다고 믿는 그 일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또한 그들에게는 무관심한 순종과 형식적인 용감성 이상이 요구되었다. 전사가 일부러 의식적으로 싸우면서 변호한 그 원칙들은 열정, 희생정신 및 헌신을 요구했다."(54-6)


"독일에서는 구체제로부터 물려받았으며 이제 헤겔 철학을 통해 이념적으로 기초를 다진 국가와 사회의 대립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전쟁은 〈법률처럼 국가의 기본 기구〉(라손, 1868)로서 국가를 통해 대변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 남겨졌다. 사실로 주어지고 철학적으로 합법화된 이러한 지평 내에서 전쟁을 〈적을 강요하여 우리의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무력행위로, 다른 수단들이 개입된 정치적 교류의 연장으로〉 이해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전개될 수 있었다." "19세기의 정치적 실천은 전반적으로 이런 모델을 지향하고 있었다. 〈전쟁의 목적은 국가가 추구하는 정치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쟁취하는 것이다.〉(비스마르크), 〈전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합리적 조약을 맺기 위한 교섭 수단이다.〉(라손, 1871) 할러는 전쟁이 〈좀 더 나은 평화, 즉 좀 더 유리한 조약으로 이끄는 ····· 수단〉으로 통용되도록 했다."(66-7)


"18세기와는 달리 19세기의 정치가들은 내부적으로도 선동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고 또 전쟁에 동참하며, 전쟁에 따라붙는 〈위대하고 정당한 민족적 이해〉를 여론에 분명하게 전달하거나 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여론을 형성하는 한 국가의 교양계층이 이미 전쟁을 〈문명화된 국민〉의 〈구원〉이나 〈회춘〉으로서(라손, 1868) 광적으로 확신하고 있을수록 더 쉽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상호간에 내적인 간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해함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가의 생각과 점점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된 19세기의 전쟁주의가 만난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전쟁을 이처럼 보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결국 얼마나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었는지가 분명해졌다." "민족 전쟁으로 행해진 19세기의 국가 간 전쟁에서는 개인적 (적대감) 또는 집단적 당혹감이라는 요소가 더 이상 제거될 수 없었다."(69)


"여기서 힘주어 강조해야 할 것은, 이 전쟁주의는 오로지 국가들 사이의 전쟁만 고려했다는 점과, 그래서 공적인 평안과 안전을 통해 나타나는 국가의 내적 평화는 이론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런 외적인 전쟁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어떤 혐의를 불러일으킨다. 즉 국가 간 전쟁을 찬양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발설되지는 않은 어떤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내전에 대한 공포, 즉 혁명에 대한 고백되지 않은 공포였다는 혐의 말이다. 이미 헤겔은 〈행복한 전쟁은 내적인 불안을 막아주고 국가의 내적 힘을 확고하게 했다〉고 확증했다. 이것은 보댕 이래로 통용되는 생각이다. 전쟁은 단지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도덕적인 고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혁명적인 요소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적인 상황과 분위기를 분해한다는 것을 하인리히 레오는 암시했었다." "19세기 내내 귀족과 시민계급 엘리트 대부분은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74-5)


"영구 평화에 관한 계몽주의적 이념에서 처음으로, 전쟁의 원인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착된 정치·사회적 제도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했다. 이미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전쟁을 사회화의 산물로 인식했었다." "이제는 전제주의자와 귀족들이 아니라 시민사회 자체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사유재산 원칙이 전쟁의 원인으로 지탄받았다.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과 착취가 지금까지 추구되어온 조화로운 평화 상태로 가는 도상에서 진정 방해가 되는 요소로 증명되었다. 〈그래서 소유라는 개념이 인간을 동물 이하로 끌어내리는 가장 끔찍한 괴물인 전쟁을 세상에 불러들였다.〉"(79-81) "최후의 혁명적 내전을 통해 시민사회를 파괴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하는 시민사회의 대립 요소를 제거하려고 한, 바이틀링이 말하는─종교적 색채를 띤─사회 혁명적 동력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혔고, 포괄적인 역사 이론의 틀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83)


"마르크스의 전쟁 개념의 근간에 놓여 있는 특징은 전쟁에 관한 보통의 이해와 결부되어 있는 생각과 가치 평가를 독특하게 뒤집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 전쟁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국가 간 전쟁은 19세기 중반 이래로 단지 진정한 대립을 은폐하고 국제적인 내전의─〈가난한 자들의 부자들에 대한 전쟁〉의─발발을 연기시키는 그런 기능만 지녔다." "마르크스의 혁명 개념이 혁명적 내전의 전통에 의해 매우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혁명은 (시민)전쟁이다.〉 레닌의 이 문장도 마르크스의 입장을 적절하게 특징짓는다. 내전이 없는 비폭력적인 혁명에 대한 구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에서 거둔 성과가 자아낸 인상에 의해 비로소 발전되었고, 현대의 무기 기술로 볼 때 성공적인 봉기가 가능할지에 대한 늙은 엥겔스의 의심을 통해 힘을 받았다."(84-5)


4. 전망


"내전의 전통은 다시 20세기에야 비로소,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현실적으로 중요해졌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상상할 수 없는 효력을 지닌 핵폭탄이라는 파괴적인 무기의 발전으로 국가 간 전쟁에 정치 수단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거나 또는 전쟁을 주전론적으로 신격화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주권 국가들의 전래된 시스템이 거대 권력들의 존재로 인해 변형되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존재하고 심지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반면, 군사적으로 무능한 국가들 사이의 간헐적인 국지전을 도외시한다면 이런 시스템에 구조적 특징으로 내재해 있는 국가 간의 열린 전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이 무의미하게 된 이후, 혁명 전쟁은 이를 넘어서서 거대 국가들이 다양한 방식의 공개적·비공개적 중재들을 통해, 말하자면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강력하게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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