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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 평화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5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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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서론
"'평화Friede'는 언어적으로 유사한 낱말들인 '자유로운frei', '구혼하다freien', '친구Freund'처럼 인도게르만어의 어근 'pri-' (사랑하다, 보호하다)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원래는 사랑과 보호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감정적 속박과 애착의 관점보다는 상호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의 관점이 훨씬 더 강조되었다. '평화'는 처음부터 사회적인 개념이다." "결정적인 것은 평화의 상태를 '사랑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호하다'로부터 이해해야 하는지가 차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평화'는 어떤 때에는 (특히 친족 간에 지배적인 것처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상호 결속의 상태로,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비폭력 상태로 파악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세에 널리 퍼진 화해와 평화의 대립이 그 사실을 대변하는데, 여기서 '평화'는 바로 (대개는 시간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폭력의 중지를 의미할 뿐이다."(12-3)
2. Friede 1
"〈평화의 휴전induciae pacis〉과 〈항구 평화pax perpetua〉라는 '평화'의 두 가지 의미에 대한 이해는 무엇보다도 특히 안전securitas 개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평화 개념도 있었다. 이것은 내용적으로 '안전securitas'과 '정의iustitia'보다는 오히려 '사랑caritas'과 '은총gratia'을 지향하고 있으며, 법ius, 즉 엄격하고 공식적인 법률에 대한 반대말로 사용되었다." "중세 교회의 법률적 사고에서 '사랑caritas(minne)'과 '정의iustitia'는 바로 평화의 관점에서 대립했다. 즉 기독교인은 (그리고 교황도) 평화의 이해와 관계되는 〈사랑을 위해서propter caritatem〉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정의iustitia'의 관철이 짜증스러운 일(불쾌감)을 유발할 것 같은 경우에만 그랬다. 그러므로 'caritas', 즉 'minne'의 의미에서 '평화'는 '평화로운'(즉 법적인) 소송을 포함해 '다툼' 자체에 대한 반대 개념이었다."(20-1)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평화와 정의는 세계 질서의 기본 범주들이었다. 그는 평화를 〈질서의 고요함tranquillitas ordinis〉으로, 질서를 〈동등한 것들과 동등하지 않은 것들을 각각 자기 자리에 앉히는 배치〉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위계적으로 구성된 세계 질서 내에서 모든 사물에다 그에 걸맞은 〈올바른〉 자리를 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iustitia', 곧 정의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세계(만물)의 질서ordo omnium rerum〉 및 그에 소속된 평화와 정의는 그 창시자이자 최종 목표인 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고, 따라서 본래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와 정의는 피안의 완전함의 상태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지상의 평화와 정의는 불완전한 모사, 또는─극단적인 경우─영원한 평화pax aeterna, 영원한 정의의 파편상破片像 이상일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기에, 이생에서는 기껏해야 일시적 평화pax temporalis가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23)
"중세의 평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1) 깨지지 않은 또는 회복된 법질서의 상태로서의 평화, 즉 〈평화와 정의〉로서 나타나고, 2) 소송과 논쟁의 중지로서의 평화 그리고 정의와 법의 집행이 중지된 평화, 즉 〈평화의 평온함〉이 개념의 실질적 내용을 형성하는 평화로서 나타나며, 3) 아주 특별한 법률적·물적·인적 영역들의 〈충족〉으로서의 평화, 즉 〈평화의 안전securitas pacis〉이 중요시되는 평화로서 나타난다. 공포된 평화든, 명령받은 평화든, 합의된 평화든 간에 중세의 모든 평화는 공간적·물적·인적 견지에서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이 있음을 전제로 한 〈특수한 평화paces speciales〉였다. 이것을 넘어서는 최초의 걸음은, 〈보편적 평화pax generalis〉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불린 적도 있었던 [중세 때 국왕 등이 내린] 분쟁 중지령Landfrieden이었다." "즉 보장된 비폭력 상태로서의 평화를, 비록 제약된 공간 내에서이긴 했지만, 〈보편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던 것이다."(34-5)
# 중세의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
1. 사랑caritas, 평온tranquillitas, 안전securitas, 그리고 정의iustitia 같은 개념들로 경계가 표시되는 의미 영역 내에 평화를 분류해 넣는다.
2.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별하되, 그 기준은 정의에 대한 평화의 관계다.
3.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평화는 자기 영역권 밖의 '평화롭지 못한' 영역들, 즉 이교도 세계를 배제한 '닫힌' 평화였다.
4. 도덕적·신화적인 '영적 평화' 개념과 달리, '정치적 평화' 개념은 개방성을 띠고 있다.
5. 모든 정치 공동체 형성의 의미와 목적으로 평화('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의 가치가 인정되었다. '현세적 평화'는 '시민 평화pax civilis' 개념으로 구체화된다.
3. Freide 2
"종교 개혁에 의해 야기된 기독교 세계의 종파 분열은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평화'의 의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초래했다. 기독교의 '영적 평화pax spiritualis'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평화의 기초fundamentum pacis'로서의 '정의iustitia'에 대해 더 이상 의견 일치를 볼수 없었기 때문에, 공동체들 내의 그리고 공동체들 사이의 '현세적 평화pax temporalis'도 의문시되었다." "종파들로 분열된 기독교는 법과 평화를 더 이상 연관시킬 수 없었다. 기독교의 평화는 '외견상의 평화pax apparens'가, 즉 전통적 교리의 의미에서의 사이비 평화가 되었다. 지금까지 이해하던 대로의 '정의롭고 참된 평화'는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복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의 결과는 전래적 의미에서의 저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평화, 즉 '시민의 평화', 다시 말해 국가의 평화였다."(43)
"국가 내부의 이 같은 평화 상태는 그 후 250년 동안 평화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이 '시민 평화'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세 초기의 사회 및 국가 이론서들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 토론의 골자는, 통일된 신학적 세계 이해가 붕괴된 이후 다시 한 번 종파들을 포괄하는 공동의 '세계관'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합리적 자연법(즉 탈신학화한 기독교적 자연법)의 체계 속으로 새로운 평화 개념을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자연법 속에는 이미 15세기와 16세기의 위대한 발견들을 통해서 소개된 기독교 밖의 세계에 대한 경험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종파의 분열과 더불어 자연법 사상의 형성을 촉진시킨 경험이었다. 이 자연법의 관점에서는 '인류'가 '기독교'보다 더 가치 있고 우선한다. 또한 그것은 평화와 기독교 사이의 긴밀한 중세적 결합을 해체시키고, 그 대신 '평화'와 '인간성humanitas'을 현대적 개념으로 결합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44)
"장 보댕은 평화를 〈국가의 평화〉로 이해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초 작업을 했다. 그러나 정신사적인 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토마스 홉스다. 그는 〈시민의 상태status civilis〉와 〈평화의 상태status pacis〉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생각, 미래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을 아주 확고하게 표명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평화와 국가는 서로 의존한다. 즉 국가만이 자신의 시민들에게 평화를 보장해줄 수 있으며, 반대로 평화를 실제로 보장해주는 그런 공동체만을 국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홉스에게는 중세적 국가 사상가들의 (시류가 지나버린) 〈참된 평화pax vera〉보다 〈효과적인 평화pax effectiva〉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성과 진리의 문제는 제쳐둔 채 당국에 의해 강제되고 보증된 〈시민 평화〉일 뿐이었고, 그 내용은 '안전'과 '평온'이었다. 중세에 평화와 정의가 병존하는 가치들이었다면, 이제 정의는 엄격하게 평화에 종속되었다."(44-6)
"그에 비해 전통적이고 스콜라 철학적인 사회 이론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자연법의 합리주의에 관심을 둔 이론가들도 자연적인 정의에 기반하는 〈자연적인 평화pax naturalis〉 개념을 고집했다. 이 사상가들은 평화란 '사회적 결합에 의해 비로소 창출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러므로 칸트의 표현을 쓰자면 평화란 '문화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이들에게 평화는 오히려 사회를 이루어 살기 이전에 인간들이 함께 살던 〈자연스러운〉 상태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것으로서 평화는 인간들 상호관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정의, 즉 이성이 직접 통찰할 수 있는 정의가 지배하는 한, 효력을 지니며 또 무효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들은 홉스가 그랬던 것처럼, 평화를 전쟁으로부터 생각해서, 평화가 〈전쟁의 부재absentia belli〉라고 파악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이들은 전쟁을 평화로부터 생각해서, 〈평화의 깨짐ruptura pacis〉으로 정의했다."(48-50)
"스콜라 철학에 따르면 국내 평화는 정의에 기반을 두며, 동시에 분란이 생길 경우에 무엇이 옳고 합법적인지를 확인하고, 또 자기들 판결이 실행되도록 힘쓰는 사법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었다. 국가들 간의 진정한 평화도 정의에 기반을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재판권이 없었다. 분란이 생길 경우에는 우월한 적수가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사건의 공정성을 판단하고 판결 또한 직접 집행해야만 했다. 즉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국가 간 평화inter civitas〉는 〈시민 평화〉인 국내 평화에 비교해서 좀 더 열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시민 평화〉를 옹호하던 바로 그 중요한 대변인들이 지속적인 국내 평화와 지속적인 국제 평화의 병존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했고, 좀 더 높은 가치인 국내 평화를 위해 국제 평화를 희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보댕과 리슐리외 같은 사람들은 국가 조직의 공고화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국가 간 전쟁의 〈정화 작용〉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56-7)
"18세기에 들어와 (도덕적) 이성법의 이념이 점차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평화 개념 또한 중요해졌으며, 결코 완전히 잊힌 적이 없는 참된 평화와 거짓 평화 간의 오래된 구분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797년에 피히테는 〈법은 평화다〉라고 쓴 바 있다." "이 진술은, 참된 평화란 폭력이 아닌, 부당한 폭력은 더더욱 아닌, 올바른 법에 기초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피히테는 자국 내에서 〈시민 평화〉가 〈정의로운 평화〉가 되면 국가 간 평화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내적 평화와 외적 평화는 불가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먼저 이 국내 평화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계몽주의 평화 이념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국제 영구 평화(1795)에 관해 구상한 칸트의 결정적인 첫 논문이 〈모든 국가의 시민헌법은 공화주의적이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칸트에게는 내부의 '올바른' 질서 없이는 외부의 어떤 평화도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66-7)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보기에 영구 평화의 상태가 확산되는 걸 방해하는 것은 계몽되지 않은 종교 사상이 아니라 계몽되지 않은 '경제적' 사고였다. 중상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통상 제한 정책이 국가들 간의 영구 평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드러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사람들은 국가 간의 무역과 교통의 자유에서 그리고 국가 내부에 전파되고 있는 '무역 정신'에서 '지속적인 평화'의 가장 훌륭하고 확실한 보증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그 다음에는 도덕적으로도 이해된) 인간과 민족들 간의 이해의 조화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18세기 전반기의 경제 이론과 평화 사상의 결합이 계몽주의적·시민적 평화 개념의 실제 지평을 형성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18세기에 〈평화의 정신〉과 〈무역의 천재〉의 결합으로서 시작된 것이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 사상과 평화 사상의 동일시로까지 확대되었다."(72-3)
"프랑스혁명의 대변자들이 생각했던 평화는 공공의 안녕과 안전을 보장하는 현대 국가의 〈시민 평화〉가 아니었다. 시민 평화는 이성, 자유, 도덕을 억압하고 조롱한 전제 정치의 강제력에 기인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혁명가들이 추구한 평화는, 국가 내의 강제 평화든 교묘하게 측정된 균형 체계에 기초하는 국가 간의 평화든 간에 국가의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평화는 보편적 인류의 평화로서, 무력이나 정치적 계산에 의해 비로소 형성된 게 아니라 비이성과 착각에 의해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모든 인간과 민족의 자연스러운 〈박애〉로부터 이에 반대하는 방해물들이 먼저 제거되기만 하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는 평화였다. 방해물들이란 절대주의 국가 체제와 그 대변자들이다." "영구평화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은 시민전으로서만, 즉 세계시민의 전쟁으로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 평화, 보편적 박애의 제국은 자의적 국경선을 통해 제한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76-8)
"'평화'의 종교적 의미를 정치·사회적 평화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신세를 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 구상들의 특징이다." "전쟁과 적대관계 전반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했던 것은 바로 세속화된 종교적 평화 개념이었다. 세계에 평화의 제국이 도래하리라고 확신하고, 스스로를 예언자로서뿐만 아니라 이 도래하는 제국의 대표자로서 이해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평화의 제국을 믿지 않거나 또는 이 제국의 도래를 저지시키려고까지 했던 모든 사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적으로 간주되었다. 더욱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평화를 저지하거나 공격하는 자는 누구나 평화의 적 그 자체로 간주했고, 미래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박멸되어야만 할 평화의 절대적 적(중세의 이단자가 그랬듯이)으로 간주되었다. 이 절대적 적(평화의 적과 인류의 적)의 개념은 나중에 그 어느 이론에서보다도 특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큰 개가를 올리게 되었다."(95)
4. 전망
"국력 신장을 위해 또는 민족적 이익 및 권리 주장을 위해 전쟁이 필요 불가결하고도 허용된 수단이라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도덕 능력의 회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철천욕(鐵泉浴, 혹독한 시련)'이라며 전쟁을 높이 평가하는 그런 확신들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19세기 후반에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런 확신들은 파시즘 사상의 구성 요소로서 20세기에도 아직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파시즘의 붕괴 이후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다." "〈주전론자들〉은 전쟁을 찬미하면서 오직 국가들 간의 전쟁만을 생각했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공공의 안녕과 안전이라는 국내 평화의 가치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20세기 초에야 그런 사람이 나타났는데, 〈폭력에 관한 성찰〉에서의 조르주 소렐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폭력〉이 국가 내부의 싸움에서도 필요한 형태로 인정되기를 바라면서, 무조건적 평화 연맹으로서의 근대 국가의 의미를 지양했다."(102-3)
"'냉전'이 개시된 이후 평화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조화, 자유, 정의, 행복의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고 희망하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평화'는 세계 구원을 기대하는 짧은 상투어가 되었다. 물론 이때 주목해야만 할 점은 평화가 더 이상 인간적인 공동생활의 이상적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세계 평화pax universalis'로서 인류 전체의 존립을 위한 조건이 되어버린 한, 이 〈구원〉은 핵무기 기술에 직면해 완전히 냉철한 의미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 그리고 정복은 인간성에 반하는 것 ······〉이라는 홀바흐의 말은, 극단적인 형태의 전쟁(세계 전쟁)은 인간성humanitas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humanum genus〉 전체를 향해 조준되었다는 격화된 표현 속에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모든 역사적 경험을 초월하는 이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평화를 얻으려는 학문적 노력과 각성이 강화되었다."(1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