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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 자유주의 ㅣ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7
루돌프 피어하우스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오토 브루너, 베르너 콘체 엮음, 공진성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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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유럽이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정치적 전통 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단어들인 '자유주의적liberal', '자유주의자Liberale', '자유주의Liberalismus'는 정치적 구호와 투쟁의 언어로서, 그리고 정치적 지향과 정당의 이름으로서 19세기에 처음 등장하여 자리를 잡았다." "기본적으로 모든 자유주의자들은, 철학적 견해나 정치적 주장의 차이를 넘어, 공통적으로 그들이 그 자체로 인도적이며 합리적이고 교육받은 선한 사람이면 누구나 마땅히 동의할 목표를 추구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의 적과 비판자들은 그들을 전통의 파괴자라고 폄하했고, 그들이 처음에는 자유를 요구하지만 나중에는 평등을 추구함으로써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정치적 자유주의는 그것이 세속화와 사회적 원자화의 부수적 현상이며, 물질주의와 상업 정신의 정치적 표현이고, 민주주의와 대중의 전제적 지배로의 길을 에비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직면해 있었다."(12-3)
"두 가지 정황이 추가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19세기 이후에 정치적 입장의 스펙트럼이 〈왼쪽〉으로 확장됨으로써 한때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입장이 점차 중앙으로 밀려나 혁신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둘째, 자유주의가 그 비판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세계관이나 정치적 목표와 동일시됨으로써 하나의 계급 이데올로기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19세기 중반 이후로 자유주의자들이 다른 정당들의 정치적 구상과 충분히 차별적인 독자적 정치 구상을 내세워 자신들의 집권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자유주의의 정치적 미래는 오늘날 자유와 평등 간의 긴장, 개인의 자기 결정과 사회적 형평성의 제도적 보장 간의 긴장, 법치국가와 복지국가 간의 긴장이 민주주의 정치 체계 속에서 어느 정도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이제야 제기된 현대의 문제가 아니라, 19세기부터 독일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잠재되어 있던 문제였다."(14)
2. 문제 상황 : 리버랄 - 진보적 - 자유로운 정신의 - 민주적인
"오늘날까지 '리버랄liberal'과 '리버랄리테트'라는 단어는 전반적으로 아직 정치적이지 않은 일정한 성향과 입장이 편견에서 자유롭고 잘 베풀며 관대하고 계몽된 사고와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유럽의 사회적·정치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등장한 시민의 해방과 자유주의적 정치 이념의 결합을 자연법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했고, 성숙하고 자유로운 국민을 그 단계에서 등장한 것으로 보려고 했으며,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사고를 당파적인 것으로 여기지는 않으려고 했다. 이런 생각이 재산을 지닌 교육받은 시민 계층의 특수한 이익을 표현한다는 주장을 자유주의자들이 굳이 반박하지 않은 것은 그런 생각이 [시민 계층의 특수 이익을 표현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의 이익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그들이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6-7)
"자유주의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유럽에서 혁명 이후에 정치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 개념을 사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성적이거나 문학적이지만은 않은 투쟁을 이미 경험했다. 그 투쟁은 한 사회 안에서 벌어진 앞으로 밀고 나아가려는 세력과 버티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고, 분배의 상황을 바꾸려는 세력과 재산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투쟁이었으며, 정치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추구하는 집단과 특권을 지키려는 집단 간의 투쟁이었다. 혁명이 다가올 사회에 관한 이론을 폭력적으로 실천하려는 방향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폭력적인 반동과 복고의 가능성도 알고 있었다." "'리버랄'은 구체제의 정치적·사회적 관계를 복원하거나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시대에 맞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사회적 제도들이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자칭, 타칭의 수식어가 되었다."(17-8)
3. 단어의 역사
"라틴어 'liberalis'는 먼저 '자유와 관련된', 다음으로 '너그러운'과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에게 어울리는'을 의미했고, 명사형 'liberalitas'는 개별 인간의 '귀하고 깨어 있는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특히 그런 사람이 지닌 '너그러움'과 능력, 물론 개인적인 능력으로 이해되지만 자신에게만 유익하지는 않은 능력을 의미했다. 이것은 (예컨대 관후寬厚함처럼) 공중의 존경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liberalitas'는 아직 정치적인 덕은 아니었지만, 공적으로 인정받는 덕이기는 했다." "그 밖에도 'liberalitas'는 자선이나 기부와 같은 구체적인 의미와 여러모로 연관되는 일반 윤리적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독일어 '리버랄'과 '리버랄리테트'는 지식인들이 라틴어에서 가져와 사용한 말로서 16세기 이후에 독일어에 등장했으며, 넓은 의미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어떤 태도에 대해 말할 때 '리버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이 독일에서 이미 18세기 후반에 뚜렷하게 증가했다."(24-7)
4. 정치적 개념으로의 변화
"(프랑스에서 반反시에예스파, 곧 온건 입헌주의자들을 가리키던) 'liberal' 개념이 이른바 공적인 영역의 빛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 것은 혁명력 8년(1799) 브뤼메르 18일이었다. 하루 전에 마레는 〈혁명의 토대가 된 관대하고 리버럴한 사상들〉을 칭송했다. 그리고 18일에 〈원로원Conseil des Anciens〉에서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의 구성원인 바라와 물리아가 자신에게 〈리버럴한 사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타도하고자 하는〉 정당의 당수 자리에 오를 것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19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 후견주의적인 사상, 리버럴한 사상들은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자신의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정파들 사이를 연결하는 끈을 없애려는 의도를 나폴레옹은 분명히 이 선언으로써 표현하기를 원했다. 보수주의적인 사상과 리버럴한 사상을 나란히 놓은 것은 그 두 사상이 서로 대립적이지 않고 급진주의, 반동, 부패, 무정부에 맞서 필요하게 될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였다."(36)
"당대의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언어에서 '리버랄'이라는 말은, 계몽을 통해 더욱 활성화된 더 오래된 의미, 즉 '호의적인, 자선을 베푸는, 관대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44) "1815년 무렵의 독일에서는 '리버랄'이라는 단어에 더욱 확실하게 정치적 윤곽을 부여하는 일이 아직 필요하지 않았다. 공화주의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표현하기에 그 단어는 너무 불확실했다. 계몽된 정부의 정책을 가리키는 데에는 다른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 정책을 '리버럴'하다고 부를 수 있었지만, 애국적인 의식을 지닌 시민의 태도도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을 요구하고 이런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집단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어떤 집단의 정치적 강령이 아직 아니었다. 그래서 〈리버럴한〉 사상과 원칙이 사적인 삶 속에서나 공적인 삶 속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리버럴들〉이라고 부를 기회도 역시 없었다."(47)
5. 1830년 이전의 자유주의 개념
"1822~1823년에 괴레스는 〈자본주의자들의 돈에 대한 교만〉과 〈배운 자들의 이성에 대한 교만〉을 〈요란한 자유주의〉의 요소라고 일컬었다. 〈신흥 자본가 귀족〉과 새로운 〈지식인 성직자〉를 〈전제적 지배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육성한 정부들은 이제 이들이 정부의 〈근간〉을 허문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으며, 〈두 개의 다른 계급〉, 즉 〈용병 부대〉와 〈관료 집단〉을 정부의 수호를 위해 끌어들여야 했다. 〈이 두 적대적 집단 간의 싸움에서 한편은 자유주의를, 다른 한편은 정통주의Legitimismus를 구호로 내세웠다.〉 몇 년 후(1825)에 프란츠 폰 바더는 당대의 〈리버럴한 교의 속에서 로마제국을 부패시킨 것과 동일한 에피쿠로스주의[쾌락주의]를〉 다시 발견했다고 믿었다." "바더의 '자유주의' 개념은 훗날 가톨릭적 반근대주의의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정치적 사유와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 그 자체가 되었다."(60-1)
"한편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원칙과 목표의 추상성은 자유주의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며, 인간을 잘못 판단하여 정작 인간을 개선하고 싶어 하면서도 오히려 망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헤겔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헤겔은 자유주의를 〈이성의 ····· 추상Abstraktion ····· der Vernunft〉에 매달리는 노선이라고 표현했다. 〈이성의 원칙들은 구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안착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추상에 매달리는 노선이다. 구체적인 것은 자유주의를 언제나 이기며, 구체적인 것에 맞서서 자유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파산한다.〉" "헤겔에 따르면 자유주의는 단지 제한된 역사적 권리만을 가지며, 그 자체로는 원칙적으로 [국가를] 안정시킬 수 없으므로, 보편적 국가 목적에 대한 관념 속에서 자유주의를 〈지양Aufhebung〉하는 것이 필수적이다"(64-5)
6. [1848년] 3월혁명 이전 시기의 자유주의
"1842년에 〈독일 계간 문집〉은 1830년 이후로 독일에서 리버럴들이 점차 의심받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혁명에 대한 공포가 기존의 것과 다른 것을 원하고 생각하는 것 일체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혁명가들이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들이 이제 혁명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과거에 사람들이 리버럴이라는 표현에 자부심을 가졌다면, 이제 이 한정사는 욕설과 비난이 되었고, 소란하고 음험하고 전복적이며 위험함을 의미하게 되었다.〉 리버럴들의 수가 늘어나자 사람들은 그들을 〈선량한 백성들로부터 ·····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후의 신성한 권리, 이른바 [통치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을 〈리버럴〉이라고 불렀다면, 이 비난은 계속 확장되었고, 마침내 〈어떤 사람이 맘에 안 드는데 그를 비난할 다른 어떤 말이 즉시 생각나지 않을 때〉 아무에게나 갖다 붙이는 말이 되었다."(83-4)
"(자유주의가 〈합리적인 법의 생산을 지향하는 노력들의 총체〉라고 주장한) 파울 피처는 '가짜 또는 오해된 자유주의의 무절제' 속에서,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를 〈잘못 다룬〉 결과를 깨닫는다. 이 순수한 진짜 자유주의가 거부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반대자들은 그것을 〈매우 거친 급진주의〉와 동일시하고, 〈입헌적 리버럴들〉을 〈자기자신의 원칙을 따른 결과를 두려워하는 ····· 길들여진 혁명가들〉이라고 부른다. 〈자유주의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반동〉이 자신들이 가진 힘을 사용한 이후로, 〈리버럴한 시각〉은 사방으로부터 의심을 받고, 〈리버럴한 원칙〉에 기초한 모든 주장은 〈계획적인 반대라고 비난〉받으며, 〈전체의 이익 ····· 그리고 양도할 수 없는 진보의 권리〉에 대한 옹호는 〈기존 체제의 전복과 무정부, 폭도들의 지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모략당하고, 〈리버럴한 분위기의 상승〉은 소수 몽상가들의 작품으로 폄하된다."(86)
"당파 싸움과 혁명에 대한 의심을 넘어 〈순수하게reine〉 리버럴한 입장을 규정하고 '자유주의' 개념에 신념윤리적인 합리적 속성을 부여하려는 이러한 노력들에 맞서 자유주의 좌파 진영은 자유주의의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기능을 강조했다. 에드가 바우어는 1843년에 〈독일의 이른바 리버럴들〉이 투쟁을 기피하고 단결을 호소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 모순은 분명해져야 했으며 통일은 비판을 통해 달성되어야 했다." "바우어에 의하면 〈헌정 체제에서 최고의 선을 발견하는 자유주의의 어떤 장르〉는 모호하며 극복되어야 한다. 이런 급진적 비판 속에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이제 단순히 하나의 세계관적·정치적 지향이나 관념적 구상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당파는 단호한 야당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성과가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87-8)
"1840년대에 이미 급진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자유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요소들을 거의 모두 지적하며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리버럴', '리버랄레, '자유주의'와 같은 개념들에 (가치를 긍정하는 어떤 수식어도 그 앞에 붙이지 않으면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그리고 폄하하는 어조를 부여했다. 1845년에 〈진정한〉 사회주의자 진영에서 나온 어느 논문은 〈독일의 자유주의〉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독일의 자유주의가 〈리버럴한 헌법〉을 지지했고, 독일 자유주의의 〈정치적 시야〉가 당시로서는 〈가장 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논문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발견됨〉으로써 독일의 자유주의는 계속해서 존재할 근거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자유주의는 스스로 존재하기를 단념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저 〈위선적이고 잔혹한 형태로〉만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90-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독일에는 〈실질적 자유주의〉가 없었다. 그저 자유주의에 대한 〈열광〉과 〈이데올로기〉만 있었을 뿐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성숙한 리버럴, 곧 국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리버럴한 말들은 부르주아지의 실제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념적 표현〉이다. 〈자유주의가 우리의 기존 관계에 대한 합리적 인식이라는〉 믿음은 그저 독일인들이 여전히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에 매달려 있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1840년대를 지나면서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자신이나 타인의 정치적 입장과 당파를 표시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정치적 표어가 되었고, 정치적 토론과 논쟁에서 사용되는 어휘들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내에서 온건 노선과 급진 노선 간의 차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면서 온건한 자유주의는 점차 [급진적 자유주의보다] 보수주의에 더 가깝게 변하게 되었다."(93)
7. 혁명과 반동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 나은 시대에 대한 희망과 의심, 낙담 사이에서 반동의 시절들을 견뎠고, 다른 리버랄레들은 민주주의와 '붉은' 혁명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리버럴한 원칙들을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했지만, 그들은 모두 단절을, 즉 시간이 자유주의를 도울 것이라고 기대했던 19세기 전반기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된 시간적 단절을 느꼈다.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그들의 당혹감과 자신을 '리버랄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이런 감정의 반영이었다. 많은 리버랄레들이 더욱 강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원칙들이 낳은 결과와 거리를 두었고, 정치적 패배 후에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보다는] 경제의 전체적 발전을 지지하고 민족 통일의 달성을 자유주의의 진정한 목표들보다 우선시함으로써, 더욱 강하게 '기존의 것'과 타협했다. 그러나 이런 타협들은 집권하지 않는 정당을 본질 상실의 위험뿐만 아니라 분열의 위험으로도 이끌 수 있다."(109-10)
8. 정치적 자유주의의 부활
9. 전망
"정치적 발전 과정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동의를 묻는 질문과 관련해 자유주의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새로운 것으로 분열되었고, '리버럴'이라는 말이 정당 이름에서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리버럴한 생각과 행동의 필요성이 심지어 민주주의를 다르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도 인정되고 강조되는 나라에서 리버럴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동시에 자유롭고 사회적인 법치국가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자유주의의 정치적 신조Credo이다." "이 단어는 오랫동안 불분명한 것뿐만 아니라 부담스러운 것으로도 여겨졌다. 이 말이 사회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체제와 연결된 것처럼 보였고, 정치적으로는 유약함과 기회주의를 상기시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과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리버럴한 민주주의의 중도적 입장은 (적어도 교정자로서) 필요해 보인다."(1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