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를 읽다 -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5
양자오 지음, 문현선 옮김 / 유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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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속된 세계관


"갑골문으로 쓰인 복사卜辭나 청동기에 보이는 상나라 문화와 『초사』에 보이는 초나라 문화 사이에는 아주 쉽게 교집합이 발견됩니다. 귀신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으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람과 귀신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한 묘사가 넘치지요. 주나라 사람과 문화의 관점(불연속 세계관)에서 보면 이는 모두 '괴력난신'怪力亂神에 해당하는 것으로,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가치도 없는 일들입니다." "폭넓은 고대 문화를 살펴보건대, 상나라와 초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자 장광즈 선생이 주창한 '연속된 세계관'에 기초합니다. 사람과 외부 환경 사이에 명확한 구분과 단절이 없다는 의미지요. 세상 만물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은 저것으로 변화할 수 있고, 저것 또한 이것으로 변화할 수 있지요." "이러한 문화의 축적이 있었기에, 장자는 우언寓言이라는 형식을 골라 쓸 수 있었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34-8)


"장자가 묘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완벽하게 '연속된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주류가 아닌 세계관으로 자신이 처한 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평가하고 판단했지요. 이에 반해 노자는 여전히 주나라 문화의 '불연속 세계관' 입장에서 어떻게 인간관계를 처리할지, 어떻게 역발상의 논리로 이 인간 세상에 더욱 적합한 방식을 찾아낼지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양자 모두 '도'道를 이야기하고 '도'라는 말로 완전하고 신비한 원리 원칙을 통칭하며, 마찬가지로 '자연'自然을 강조하면서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사람이 자연을 광활한 공간으로 삼아 인간 세계라는 비좁은 범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유유히 누비며 도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데 중점을 두는 반면, 노자는 자연의 도리를 인간 세상에 적용해 인간관계를 처리하고 이를 통해 더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인간의 삶을 장악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40-1)


2 상대성에서 시작하다


"연못에서 살면서 몇 길 높이를 채 오르지 못하는 작은 새가 거대한 붕새를 비웃습니다. 〈저이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인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킬로미터를 날지 못하고 곧 내려오며 풀숲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닐 뿐이지만 이 역시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일일 뿐이다. 그런데 저이는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작은 새는 두 번이나 〈어디로 가는가?〉라고 되풀이 물음으로써 거대한 붕새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도리어 붕새에 대한 경멸을 드러냅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과 맞닥뜨렸을 때 자주 드러내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입니다. 오늘날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이는 서로 다른 잣대와 크기를 넘어서는 '공약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작은' 잣대의 크기로는 '큰' 잣대와 크기의 문제에 깊이 다가갈 수 없는 법입니다."(82-3)


# 〈연못 안의 작은 새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이[붕]는 또 어디로 가는가? 나는 펄쩍 날아올라도 몇 길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오며 쑥대밭 사이를 맴돌지만 이 또한 날 만큼 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저이는 또 어디로 가는가?" 이것이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이다.〉 『장자』 내편 제1편 「소요유」


# 공약불가능성 : 현대의 과학과 과거의 과학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로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사용한 개념


"(붕새의 비유를 사람에게 적용해보면) 〈지혜는 한 가지 벼슬을 감당할〉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영예와 모욕의 경계를 가늠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으며, 〈바람을 타고 다니며 가볍고 묘하게 날기를 잘하는〉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에는 〈지인至人, 신인神人, 성인聖人〉의 등급에 속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아가 없고 육체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인〉이 될 수 있지요.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공로를 세우고자 애쓰지도 않지만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신인〉입니다. 다른 사람이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지만 어떠한 명성도 굳이 바라지 않으므로 비로소 진정한 〈성인〉인 것이지요." "이것이 '작은 앎'과 '큰 앎'의 차이로, '작은 앎'을 가진 낮은 등급의 사람은 이해의 잣대와 크기가 훨씬 더 큰 '큰 앎'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89)


# 〈그러므로 말한다. "지인에게는 자기가 없으며 신인에게는 공로가 없고 성인에게는 이름이 없다."〉


3 절대성으로 상대성을 초월하다


"〈도〉를 감추는 것은 선입견과 편견이며, 작은 부분만 보고 전체를 다 아는 듯 여기는 태도입니다. 말을 감추는 것은 갖가지 화려한 수식과 교묘한 화법입니다. 그래서 유가와 묵가의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있습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작은 이룸〉을 얻어 각기 다른 입장에서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서로 대립합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평가하는 기준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이런 언어의 상대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불분명함에서 벗어나 맑고 깨어 있는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밝음〉일까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대응하여 이루어진다는 사물의 상대성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인 것이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저것'이 됩니다. 고정된 '이것'과 '저것'은 없습니다."(151-2)


# 〈도는 작은 이룸에 감춰지며, 말은 화려함에 감춰진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있어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며 옳다고 하는 바를 그르다 한다.〉 〈그 그르다고 하는 바를 옳다 하고 그 옳다 하는 바를 그르다고 하려면 밝음을 따름만 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것이 아님도 없고 사물은 이것이 아님도 없다. 저것으로 말미암으면 보이지 않으나 스스로 알면 그것을 알게 된다.〉 『장자』 내편 제2편 「제물론」


"그래서 성인은 이러한 상대적인 이치에 기대지 않고 〈하늘〉에 의지합니다." "'樞'(추)는 가운데서 사물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로 '문지도리'는 문이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문의 중심축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지도리〉는 '도'가 회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중심축을 뜻하겠지요. 어떻게 '도'를 회전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회전의 가운데〉, 다시 말해 원심에 서는 것이죠. 원심은 원의 한가운데이며, 이쪽도 없고 저쪽도 없습니다. 모든 대립하는 입장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지요. 이쪽에 있지 않으며 저쪽에 있지도 않습니다. 중심점에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습니다. '저것'과 '이것'이 구분되지 않으므로 〈무궁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밝음〉은 옳고 그름, 저것과 이것의 상대성을 꿰뚫어보며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인 원점을 찾아내, 그 자리에 굳게 서서 바쁘고 번잡하며 상대적인 저것과 이것, 옳고 그름을 관찰하고 그에 대응합니다."(154-6)


# 〈이것 또한 한 가지 시비요, 저것 또한 한 가지 시비다.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있는가? 과연 저것과 이것의 구분은 없는가? 저것과 이것이 그 짝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 한다.〉


4 관점이 곧 편견이다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핵심입니다. '제물'齊物은 모든 것을 한 가지로 바꾸고, 한 가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만물은 그러하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가능하지 않음이 없다〉라는 이치를 보라고 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거나 그렇지 않음',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음'은 종종 〈만물은 실로 그러한 바가 있으며, 만물은 실로 가능한 바가 있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름이나 이름 붙이기, 주관적인 규정에 우리 자신이 집착하면서 나온 편견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별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같지 않음'이 생겨나지요. 그래서 '제물'은 곧 구별과 편견을 꿰뚫어보는 것이며, 주관적인 관점에서는 사실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사물에는 나름의 자연스러운 이치가 있고 모두 평등해집니다."(165)


"청나라 말 중화민국 초기의 학자 차오서우쿤은 『장자내편주』莊子內篇注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제물론」의 본문을 마치고 나면 그 뒤는 조항의 열거에 지나지 않으며 상술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장자 자신도 이미 '말'言에 대해, 해석이나 설명에 대해 경고한 바 있지요. 자신의 글에서 말했듯 〈이로써 그칠 따름입니다.〉 ... 도가 일단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는 더 이상 모두를 하나로 아우르는 근원적인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이치는 교묘한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지요. 진정한 자애는 어디에나 두루 펼쳐지기에 특정한 방향에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큰 도는 이름 부를 수 없다〉라는 말은 『노자』의 제1장 첫머리에 나오는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는 도가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와 같습니다." "『노자』에서는 이 역설의 원칙을 인간 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돌려 사상의 핵심을 이룹니다."(186-8)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모순 그리고 그가 웅변이라는 방식을 활용한 또 다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큰 바룸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이렇게 믿고 있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장자 자신의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하지요. 그런데도 그는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논쟁하거나 설명하는 '행위'와 논쟁하거나 설명하고자 하는 '이치'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확신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 자신이 한 말과 할 수 있는 말에 질문을 던집니다. 갖가지 웅변 기술을 쓰면서, 그는 우리를 이해시키고 믿게 하려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웅변 기술이라는 것이 의지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현대의 논리 언어로 설명하건대, 장자의 글은 끊임없이 첫 번째 진술로부터 멀어지며, 두 번째 진술은 첫 번째 진술에서 쓰인 언어와 이치를 '메타'meta 검증하지요."(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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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다 -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3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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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어』의 연원


"공자의 가장 큰 공헌은 서주西周의 귀족 교육 체계인 '왕관학'王官學의 내용을, 출신 성분으로 봤을 때 그런 자격이 부족한 이들에게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귀족 교육의 핵심인 글쓰기가 공자를 통해 확대되고 전파되어 그 결과, 중국 최초의 민간 저술이 탄생했습니다. 『논어』 이전의 다른 문자 기록은 모두 왕조의 봉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시경』, 『서경』, 『춘추』는 다 귀족 교육의 중요한 교재였기에 문자로 기록된 겁니다. 『시경』은 관리가 민요를 수집해 민간의 사정을 살피던 채풍采風 및 귀족 연회의 여흥과 관계가 있으며, 『서경』은 조정의 문서를 모아 놓은 겁니다. 『춘추』는 사관이 자신의 직분에 따라 작성한 방대한 사건 기록이지요. 그렇게 기원전 5세기까지 이루어졌던 글쓰기에 대한 독점과 제한을 공자는 교육이라는 방식을 빌려 부수었으며, 이에 힘입어 그의 제자들은 최초의 민간 저술인 『논어』를 집필했습니다."(39)


"역사적으로 『논어』의 더 새롭고 혁명적인 의의는 바로 『논어』가 그 전에는 없었던 인간관계, 즉 사제 관계를 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 이전의 교육은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배울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 자격은 혈연과 신분으로 정해졌습니다." "반면 공자와 그가 가르친 사람들은 혈연관게가 아니었습니다.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은 본래의 봉건 질서 속에서 그런 귀족 교육을 받을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자가 맡은 역할은 사실상 봉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침 봉건 질서가 흔들리던 춘추 시대였기에, 공자가 옛 체제의 규범을 어기고 본래 폐쇄적이고 독점적이었던 귀족 교육의 내용을 차별 없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친족 간의 유대를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공자를 좇아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41-3)


2 스승으로서의 공자


"그 시대에 구舊귀족의 태도는 자리와 직무가 생겼을 때 관련 지식과 기능을 잘 익히면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지식과 기능이란 군주와 다른 고관들을 대하는 예의, 연회에서 쓰이는 음악과 그 의미 그리고 시를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야인'들은 적극적인 태도로 알아서 예악을 배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누가 자기를 필요로 하면 즉시 국정과 외교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사실상 공자의 주요 업무는 제자들이 〈먼저 예악에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다시 말해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평소 공자의 가르침 아래 열심히 예악과 규범을 익히다가 언제든 국정과 외교 분야에서 그것을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정말로 국정에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간 사람', 즉 이미 준비를 마친 사람을 쓰겠다〉고 주장한 겁니다."(53-4)


# 〈먼저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야인野人이고 나중에 예악에 나아가는 것은 군자다. 만약 실제로 쓰고자 한다면 나는 먼저 나아가는 쪽을 좇겠다.〉, 「선진」편 첫째 장


"공자가 보기에 스승은 학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자신이 말하고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의문과 반박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 정진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스승은 당연히 학생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지만, 만약 스승과 학생 사이에 스승이 학생을 돕고 영향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만 있고 거꾸로 학생이 스승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공자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기꺼워하기만 하는 안회를 두고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불평한 겁니다. 그는 진심으로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중요하게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어쨌든 안회에 대한 공자의 원망은 진짜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한마디에서 '기쁠 열說' 자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 '說'자는 '悅'자와 통하며 마음 속에서 우러나온 기쁨과 희열을 뜻합니다."(64-6)


# 〈회는 나를 돕는 사람이 아니니, 내 말에 기뻐하지 않는 바가 없다.〉, 「선진」편 넷째 장


3 공자는 진리의 확성기가 아니었다


"공자가 '효'를 중시한 까닭은 나날이 혼란해지던 춘추 시대에 그가 목도한 인간 세상의 숱한 고통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서주 봉건 질서의 파괴 및 와해와 근본적으로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봉건 질서는 친족의 인륜을 확장하여 사회적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마땅히 봉건 질서를 회복해야 했고, 또한 봉건 질서를 회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륜 관계의 각 주체들이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 된 자는 '효'에, 신하 된 자는 '충'에 힘쓰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결코 자식과 신하에게만 편파적으로 역할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동시에 아비 된 자도, 군왕인 자도 각기 아비답고 군왕다워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어디까지나 관계는 상대적이므로 행위에 대한 요구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어야 했습니다."(78-9)


# 〈효성스럽도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와 형제가 그에 관해 하는 말에서 사람들이 흠을 잡지 못하는구나.〉, 「선진」편 다섯째 장


"공자가 보기에 배움을 향한 진실한 감정과 즐거움의 기준에 부합하는 제자는 안회밖에 없었습니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이 가졌던 모순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 매우 유용해서 무질서한 사회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인재를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본래 그런 용도의 가르침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공자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가르침은 주나라의 예악禮樂을 회복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윤리가 바탕인 봉건 시기의 예절과 의례 정신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했던 겁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공명과 이익이나 현실에 따르지 않음을 강조했으며, 유용하게 쓰이려고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가르침의 모순은 그의 가르침이 인본주의로 돌아간 '무용한 학문'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유용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제자가 겨우 서른한 살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공자로서는 당연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89-90)


#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배움을 좋아했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고 지금은 없습니다."〉, 「선진」편 일곱째 장


4 본래의 공자로 돌아가기


"염유(염구)가 스승에게 한 말을 보면 내적인 능력을 들어 자신의 그리 훌륭하지 못한 외적 행동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내적인 느낌과 동기를 기준으로 그를 비판합니다. 스승이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행동을 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강한 동기를 갖고 더 잘하려고 하는지, 그것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자는 확실히 '유심론자'입니다. 염유에 대한 그의 추궁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문제 삼고 있으니까요." "확실히 주관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관성은 공자의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자신의 풍부하고 민감한 공감 능력에 의지해 공자는 어떤 가치, 즉 진실하고 성실하게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외적인 표현으로 남에게 잘 보이고 남을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공자는 염유가 정말로 '역부족'인지 아니면 '선을 그은 것'인지 그 내적인 차이를 한눈에 꿰뚫어본 것입니다."(126-7)


# 〈염구가 말했다. "스승님의 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부족일 따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선을 긋고 있다."〉, 「옹야」편 열두째 장


"춘추 시대는 왜 그렇게 혼란하고 무질서해서 수많은 사람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을까요? 공자의 견해는 시종일관 같았습니다. '예'를 잃었기 때문이었지요. '예'가 버려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었다고 본 겁니다." "묵가, 도가 그리고 훗날의 법가의 공통된 출발점은 기존의 '예'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 것이었으며 적어도 '예'가 현실의 요구에 부적합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예'를 밀어내고 '예'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의 외적 형식과 내적 정신이 서로 근본적으로 어긋나 버린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예'가 형식화되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이어졌던 끊이 끊어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새상을 구하는 방법은 '예'의 정신을 탐구하고 처음에 설정된 '예'의 원초적인 의미로 돌아가 다시금 '예'가 인간 내면의 진실한 감정과 결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130-1)


# 〈공자께서는 상을 당한 자 곁에서는 일찍이 배불리 드신 적이 없다.〉, 「술이」편 아홉째 장, 〈공자께서는 곡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술이」편 열째 장


"공자의 장점은 배우기를 좋아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며 자기가 배운 것을 어떻게 가르질지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 지식과 기능은 공자 자신에게 제대로 속하지 못하고, 실제 삶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자신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습니다." "공자는 언제나 배운 다음의 일을 걱정했습니다." "공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제자들이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당연히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기능은 가르칠 수 있어도 가장 중요한, 그 지식과 기능이 자신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게 하는 것만은 가르칠 수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런 몇 가지 일을 끊임없이 걱정했는데 이 걱정 자체가 그의 꾸준한 수양인 동시에 제자들을 감화시키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진정한 솔선수범이었던 것이죠."(140-2)


#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것을 연구하지 못하고, 의로운 얘기를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점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술이」편 세째 장


5 스승에게는 정답이 없었다


"자로와 염유가 차례로 공자에게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말을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자로에게는 〈어른이 계시니 의견을 여쭤 봐야 하지 않느냐? 어찌 듣자마자 행하겠느냐?〉라고 답했고, 염유에게는 〈옳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당시 공서화는 공자 옆에 가장 자주 있던 제자여서 그 두 번의 문답을 다 들었습니다. 당연히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왜 다른 대답을 했는지 물으니 공자는 〈염유는 성격이 소극적인 편이어서 망설이지 말라고 격려한 것이고, 자로는 성격이 충동적이고 늘 혼자 두 사람 몫의 일을 하려고 해서 다소 늦춰 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이른바 '인재시교'因材施敎로서 인물에 맞게 가르치는 교육 방식입니다. 진정한 교육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답이 아닌 답을 제자들에게 내줄 수 있는 사람만이 스승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173-4)


# 〈자로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父兄이 있는데 어찌 듣고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물었다.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 공서화가 물었다. "유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부형이 있다'고 하셨고 구가 들으면 바로 행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스승님은 '들으면 바로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워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물러나는 성격이라 격려한 것이고, 유는 두 사람 역할을 하므로 물러나게 했다."〉, 「선진」편 스물 두째 장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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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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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정 러시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문화적 발전은 〈인텔리겐치아〉의 대두였을 것이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들어온 이 용어는 교육받은 사람들 혹은 심지어 이상적인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육받고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개인들로서 처음에는 계몽사상, 그다음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절대적인 원칙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억압적이고 탄압적인 정치 및 사회 질서라고 생각한 것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의미했다." "게르첸, 벨린스키, 바쿠닌 같은 〈서구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중심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이유로 전제정치, 농노제, 그리고 인권이 부재하는 현실을 반대했고, 모든 개인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질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사마린과 같은 〈슬라브주의자들〉도 농노제, 시민적인 자유의 부재, 개인 생활에 대한 정부의 침해에 반대했으나, 〈정신적인 공동체〉라는 원칙의 이름으로 그런 태도를 취했다."(548-9)


"농민들은 때때로 일종의 노예제 수준까지 다다른 농노체제에 직면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농노들은 이동이 금지되었고, 노동 및 화폐 지대가 어느 정도 혼합된 지대를 지주들에게 납부해야 했다." "특히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지방의 〈소요〉를 정부가 기록으로 남겼다. 알렉세이 통치기의 스텐카 라진 반란, 표트르 1세 통치기의 블라빈의 반란, 예카테리나 2세 때의 푸가초프의 봉기처럼 대중 봉기도 때때로 발생되었다. 이런 반란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불렸는데, 지도자들은 모두 카자크(Kazak)였다. 카자크들은 한때 국경지역의 약탈적인 부족들이었는데, 모스크바국과 표트르 이후의 제국이 확대됨에 따라 그들의 자유와 자율성은 축소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푸가초프의 선언문을 읽고는, 그것을 〈공중누각〉이라고 일축했다. 그러한 〈누각〉─완전히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에 대한 꿈─은 러시아의 삶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남아 있었다."(550-1)


▶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대관식 때 모스크바의 귀족들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농노제가 아래로부터 폐지되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위로부터 그것을 폐지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농노해방의 도래와 관련된 놀라운 측면은 그 과정이 공개되었으며, 공식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그 계획을 발표했고 토론과 제안을 권장했는데, 이것은 글라스노스트(glasnost)라고 알려진 공개와 개방의 과정이었다. 귀족 협의회는 개혁이 실시되는 방법에 관해서 논의하도록 요청받았고, 때때로 회의 진행 과정을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1861년 2월 19일의 법을 통해서 농노제는 폐지되었다. 그때 이후로 러시아인들이 삶에서 인간의 예속상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개혁이 농민들에게 다른 사회계급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여전히 인두세를 내야 했고, 농민공동체에 결박되었으며, 관습법에 기반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557-9)


# 그 외의 "대개혁" 조치들

1. 지방정부의 기구들인 젬스트보 의회와 상임 위원회 설치

2.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분리하여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

3. 군 복무 의무가 하층계급에서 모든 러시아인으로 확대

4. 국립은행 창립, 교육과 검열 분야의 자유주의적 조치


"일부 관료층과 러시아 귀족들은 개혁 조치에 단호히 반대했다. 농민 봉기, 대학생 소요, 1862년에 일어난 원인불명의 화재, 1863년의 폴란드 반란, 1866년의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시도 등 특수한 상황이 여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변화를 어디에서 멈출지에 대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대개혁〉은 러시아의 전반적인 발전 및 당대의 지적 분위기와 함께 그 이상의 개혁을 위한 압력을 낳았다. 입헌군주체제를 용인하고 몇몇 다른 양보를 했더라면 대부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제국의 안정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게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더 이상의 변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투했다. 〈대개혁〉은 크림 전쟁으로 구체제가 완전히 파산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야 실시되었다."(567)


"1870년대 무렵이 되면, 러시아 혁명운동을 이끌던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허무주의의 신조는 인간의 총체적인 해방에 강조점을 두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자들〉에게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프로그램을 부여했던 '인민주의'라는 새로운 신조와 결합되고, 그것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허무주의자들이 그들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자신들 주위의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우월감에서 기쁨을 느꼈다면,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경우에 농민들을 의미하는 대중에게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들은 무지크(muzhik) 즉 농민들이 땀, 그리고 심지어 피의 희생으로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되갚고, 인민들을 좀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를 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식인들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환경 때문에 가질 수 없었던 도덕적 순수성과 정직성─그들이 원한다면 진리─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인민들 가운데에서 발견하기를 희망했다."(572-3)


"인민주의자들의 운동은 1873년, 1874년, 그 직후의 몇 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1873년에 제국정부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들 중 상당수의 학생들은 러시아에 있던 수많은 다른 젊은 남녀들과 함께 〈인민 속으로(vnarod)〉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시골 마을로 갔으며, 그중에 약 2,500명이 농촌의 교사, 서기, 의사, 수의사, 간호사, 점원이 되었다." "특히 자발적이고 근본적인 대규모 인민혁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단지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라브로프의 제자들은 점진주의의 필요성, 즉 대중이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이전에 교육과 선전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또다른 인민주의 이론가인 트카초프와 헌신적인 혁명가인 네차예프는 농민들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 스스로 정부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73)


#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정복은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어, 1865년과 1876년 사이에 일련의 과감한 군사 원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러시아인들은 코칸트, 부하라, 히바의 칸국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1881년에는 카스피 해 너머 지역을 병합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팽창한 과정은 다른 지역의 식민지 전쟁 및 미국의 서부 확장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중앙아시아는 상업적인 이유들 때문에, 원료 중에서도 특히 면화의 공급원이자 러시아의 제조품을 위한 시장으로서 매력적이었다. 그곳으로의 팽창은 국경을 안정시키고 약탈적인 이웃 민족들로부터 국경지역에 있는 러시아 정착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안보상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서구 제국주의와 아주 유사한 사고방식이 러시아에서 발전되었다. 특히 문명국가인 러시아가 후진 민족들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질서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견해가 발달했다."(581)


▶ 알렉산드르 3세 통치기(1881-1894), 니콜라이 2세 통치기(1894-1917)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고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정치 개혁의 길을 배격했다." "정부는 〈정교화-전제정치-국민성〉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었는데, 이것은 시대 상황에 부합되지 못했다. 정교회는 다민족 제국에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거의 결속시킬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에서 종교가 더 이상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좀더 개인적이고 가변적인 형태의 신앙과 가치라고 생각하게 된 많은 형식적인 정교도 러시아인들조차도 통합시키지 못했다. 전제체제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에 훨씬 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으며,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여전히 차르와 인민 사이가 사랑과 헌신으로 신비롭게 결합되었다는 가부장적인 이상에 기반을 두는 민족주의는 일반적인 러시아인들의 정치적·사회적 욕구를 거의 충족시키지 못했다. 민족주의는 다민족 국가를 분열시켰을 따름이다."(583-4)


"니콜라이 2세는 차르의 무제한적인 개인 권력만이 러시아의 힘과 안정과 심지어 국가로서의 진보를 보증해준다고 명백히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능력이었으며, 정교회와 민족성과 결합된 전제정치였다." "늘 그렇듯이, 그는 〈차르의 심장은 신의 손안에 있다〉라는 전통적인 속담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통치자는 국민들과 거의 신비로운 사랑이라는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1905년에 대규모 대중 소요사태를 당해서 전국적인 대표권을 가진 의회 설립 요구에 동의할 때조차도, 〈독특한 러시아적 원칙에 부합되는 질서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땅의 사람들과 짐 사이의 교감, 차르와 모든 루시 사이의 연합이 옛날 시대와 똑같이 확립되도록 하라〉고 말했다." "니콜라이의 형편없는 판단력과 황후 알렉산드라의 사악한 영향력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징조는 라스푸틴처럼 믿을 수 없는 인물이 국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590-2)


"1905년 혁명은 정부의 충격적이고도 억압적인 폭력 행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피의 일요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이 사건은 제국 전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정치적·사회적 격변을 초래했다." "(행진을 주도한) 가폰의 노조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회유하고, 저렴한 찻집과 교화적 내용의 강연 그리고 일상적인 물질적 필요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전제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육성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의 일환으로 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조직의 모임은 사회비판, 도덕적 열정, 신성한 목적의 혼합이라는 특징을 가졌으며, 점차로 노동자들을 돕고 옹호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충성스런 신민으로서, 그에게 시정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겨울궁전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대량 학살로 인하여 분노가 크게 분출되었고, 혁명운동이 또다시 힘을 얻었다."(606-7)


"혁명운동은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지속된 대규모 총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이자 가장 성공적인 파업으로 묘사되었다." "10월 총파업 동안에, 그리고 파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혹은 평의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미래의 선구적 조직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정부는 기본 활동이 마비되었고, 마침내 반대 세력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닫자 결국 항복했다." "10월 선언을 통해서 로마노프 가문의 제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 사건은 반정부 세력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이 충분한지의 문제를 놓고 갈라졌다. 좌파 자유주의 입헌민주당원들은 정부의 양보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반정부 세력이 이렇게 분열되면서 1905년은 유혈 투쟁 속에서 끝났다. 겨울 동안 토벌 원정대와 즉결 군사재판을 통해서 많은 문제 지역에서 질서가 회복되었다."(607-9)


"1860년대의 급진주의 세대들, 즉 투르게네프의 〈아들들〉은 종종 모호한 급진적 변화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기존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권위를 배격했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을 발견했다." "허무주의는 젊은 급진파 러시아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심에서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인격의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었다." "보다 정교한 사회적 신조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등장해서 소비에트 시대까지 러시아 급진주의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나로드니체스트보(narodnichestvo), 즉 인민주의의 형태로 갑자기 등장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면, 인민주의는 인민에 대한 헌신,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농민공동체의 힘에 의지해서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해악을 피할 수 있는 각별한 역사적 기회를 가졌다는 신념, 사회혁명이 정치적 변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주장 등으로 정의되었다."(676-7)


"러시아 사상과 문화에서 발생된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 중의 하나는 최고 단계에 이른 철학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과 종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유물론에 대한 불만과 종교적·신비주의적 인식에 대한 매력은 아주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도 도달했다. 1908년~1909년 무렵에 나중에 소련의 계몽인민위원이 된 루나차르스키와 작가인 고리키를 포함한 일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건신론(建神論)〉이라고 알려진, 다시 종교로 관심을 돌린 마르크스주의를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그들은 차가운 합리주의, 유물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이 대중의 혁명운동에 영감을 주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을 위해서 〈신화〉의 힘을 되찾으려면 잠재의식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이 있던 곳에 인간성을 가져다놓았지만, 종교적인 열정, 도덕적 확실성, 악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 등을 유지하는 새로운 신앙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682-4)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가 한 약속을 아주 호소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사회의 불만과 분노가 러시아의 허약한 신질서를 훼손하지 않았더라면, 레닌의 주장은 1917년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보충 설명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질서가 무너지게 된 상당 부분의 원인은 계속된 경제적 붕괴, 특히 도시와 전선에서의 최악의 물질적 상황이었다. 기존의 정치 및 사회적 권위에 대해서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던 많은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이 더욱 많은 권력을 갖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불신했고, 2월 이후로 혁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을 〈인민의 적〉이자 러시아와 혁명의 〈배신자〉라고 낙인찍기까지 했다." "혁명은 〈굴욕과 모욕〉을 끝장낼 것이며, 일반인들에게 부여되는 〈존중〉에 기반한 사회 및 정치 질서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해졌다."(699-702)


제6부 소비에트 러시아


"레닌과 볼셰비키는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명확한 청사진도 없이, 혹은 심지어 명확한 통치전략도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레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인민의 〈에너지, 주도력, 단호함〉을 발휘함으로써 〈공산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했다. 1917년 11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모든 노동하는 인민들〉이 〈당신들 스스로 이제 국가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직접 일을 독자적으로 해나가도록〉 요청했다. 동시에 레닌은 〈혁명이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일〉이라는 점을 부단히 상기시켰으며, 10월 이후에는 엄격한 통제, 무자비한 억압, 강철 같은 규율, 심지어 독재에 대해서도 종종 명백하게 말했다." "이런 모순되는 언어는 적어도 정권 초기에 인민의 주도권과 창의력에 대한 진지한 이상을, 지도력과 규율 그리고 중앙 통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결합시켰던 모순된 정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720-1)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소비에트 초기의 많은 정책은 러시아를 변모시키려는 볼셰비키의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접근 태도를 보여주었다. 1917년 11월에는 언론이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많은 〈부르주아〉 신문과 온건한 사회주의 신문들이 폐간되었다. 경제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해서 은행과 대규모 공장은 즉각 국유화되었고, 대외무역은 국가가 독점했으며, 12월에는 국가의 경제계획을 발전시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7년 12월에 정부는 무시무시한 〈체카(Cheka)〉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10월 이후에 흔히 발생하던 일상적인 폭력과 약탈, 그리고 반체제 활동 혐의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때부터 정치경찰은 소비에트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현실이 되었다. 정부는 자유주의적인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들의 정당〉이라고 선포했으며, 심지어 많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위험한 반대세력이라고 간주했다."(724)


"국내 전선에서 전시 공산주의는 대체로 소비에트 체제가 외부의 적들과 벌이고 있던 격렬한 싸움의 결과로서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국가는 1918년 여름부터 대규모의 잔혹한 전면 내전에 돌입했다. 소위 백군(白軍)이 들고 일어나서 적군(亦軍)에 의한 러시아 통치에 도전했던 것이다." "많은 외국들은 러시아에 무장 병력을 파견하거나 지방의 반정부 운동과 정부들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10월부터 1920년 1월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를 봉쇄함으로써 개입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더 큰 결단력과 경계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전시 공산주의는 무절제한 유토피아주의의 시기였다. 급진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진정한 〈공산주의〉로 갑작스럽게 도약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볼셰비즘 안에서 급진적인 해방과 지독한 권위주의가 이상하지만 지속적으로 뒤엉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725-6)


# 적군의 승리 요인

1.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들 간의 부실한 협력 관계

2. 볼셰비키가 주요 도시, 인구, 산업체, 군수품을 장악한 상황

3. 반볼셰비즘 외에 공통분모가 없던 백군 내부의 분열

4. 백군의 비러시아 민족들에 대한 반反분리주의, 농민들에 대한 반反토지개혁 성향


"전제정치가 붕괴된 직후에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1917년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에는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자캅카스 연방(이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해체됨)이 그 뒤를 따랐다. 1917년 12월에 개최된 제4차 중앙아시아 이슬람 교도 대회는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치를 선언했고, 중앙아시아에는 다양한 공화국이 등장했다.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는 달리, 이런 국가들은 역사상 처음부터 독립국가들이었다.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는 제국이 분열됨으로써 국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지만, 볼셰비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를 고수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 정신에 따라서 제국의 영토를 한데 묶어놓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민족의 독립을 주창하던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책망받았다."(733)


"스탈린이 자신의 연합 세력 및 숭배 세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 접근법이 가진 상호 연관된 두 가지 특징 덕분이었다. 첫째로, 그는 보통의 공산주의자 대중을 위하여 이데올로기를 단순화했고, 심지어 신성하게 만들었다." "레닌 사후에, 스탈린은 레닌의 저서를 도그마로, 반대 의견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로, 스탈린은 일관되게 낙관론, 희망, 신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트로츠키가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의 성공은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혁명이 발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을 때, 스탈린은 〈영구혁명론〉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는 〈영구절망론〉이라고 조롱하면서,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시했다." "스탈린의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편향을 비난했던 제15차 당대회는 신경제정책의 종식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의미하는 조치를 채택했다."(748)


"제1차 5개년 계획은 분명히 경제에 대한 것 이상이었다. 〈위대한 전환〉이라고 불린 그것은 사회의 모든 측면을 변모시키려던 혁명이었다. 1928년에 샤흐티 석탄광산의 기술자들이 사보타주를 벌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사건은 제국주의자들과 음모를 꾸몄다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공개재판의 시발점이었고, 계급투쟁이 재개되었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선동 조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산주의자들은 기존 전문가들에게, 특히 그들이 〈이질적인〉 계급 배경 출신이라면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격려받았다. 비공산주의 및 비노동자 출신의 기술자, 현장감독, 교사, 언론인, 국가 공무원, 작가 등에 대한 숙청의 폭풍이 몰아쳤다. 〈문화혁명〉이라고 불렸던 이것은 국가와 당이 착수했으나, 소비에트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그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벌어진 숙청으로 인하여,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겼다."(758)


"최근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 체제는 단지 철권 통제, 억압, 공포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적 건설을 위한 열정,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위계질서에서 상승하려는 개인적인 야망 등은 체제의 동맹 세력과 지지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구체적인 보상도 있었다.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이 종료된 이후에, 동원 자체를 위한 동원은 물질적인 혜택도 약속하는 경향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면,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은 새로운 의복, 자전거, 축음기, 라디오, 자기, 리넨 제품, 피아노 등을 보상받았으며, 그들이 당 집회나 생산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파티와 무도회에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 실제로, 공공생활에서 행복은 널리 확산된 주제가 되었다." "신문은 적들과 숙청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새 모자와 신발 그리고 공원에서의 무도회와 축제를 위한 광고로 가득 차 있었다."(769-70)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는 비록 많은 경우에 뜻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거나 단지 실패에 그치기는 했지만, 많은 분야에서 의미심장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의 최우선 순위는 농업이었다. 농업 분야에서 그는 당이 생산에 좀더 적극 관여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행정을 재조직하고 〈처녀지〉 캠페인, 육류와 우유 캠페인 등 다양한 영웅적인 〈캠페인〉을 통하여 생산에 자극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다시 행정적인 재조직과 캠페인을 통해서 소비재의 더 많은 생산과 좀더 나은 산업 경영을 장려하려고 시도했다. 대규모 주택건설 붐도 시작되었다." "아마도 가장 중대한 개혁은 문화의 탈스탈린주의화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과 환멸감이 급속히 뒤따라 몰려왔다. 경제 발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탈스탈린화 혹은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소련 생활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는 창의적인 공산주의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기보다는, 사실상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불안정을 초래했다."(819-21)


"흐루쇼프의 후계자들은 아주 다른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통치했다. 지도 원칙은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었으며, 혁명이 아니라 질서였다. 1964년에 권력에 오른 새로운 집단지도부는 1917년 이후에 성년이 된 사람들로서는 첫 번째 통치자 세대였다. 그들은 혁명기에 어린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발전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었다." "새로운 지도자들─특히 당수 브레즈네프, 수상 코시긴, 당 이론전문가 수슬로프, 최고 소비에트 의장인 포드고르니 등의 인물들─은 흐루쇼프의 대부분의 개혁 조치를 되돌리기 위해서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행정 재편은 취소되었다. 직책의 임기를 제한하고 관료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장려하려는 급진 사상은 관료에 대한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지방의 주도권에 박차를 가하려던 경제적 실험은 모스크바의 중앙 통제로 대체되었다."(822-3)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68세의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직을 맡은 것은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안드로포프는 어느정도의 세련미와 비범한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1982년 5월에 당 서기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교체될 때까지 15년 동안 정치경찰인 국가보안 위원회의 수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정체(停滯)와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떤 안드로포프는 고심 끝에 즉각 행정기구를 숙청하고, 결근 노동자들을 찾기 위해서 공공장소를 경찰이 조사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조치 등으로 노동규율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신장병으로 갑자기 중단되었고, 그는 지도자 지위에 있은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안드로포프를 대체한 인물은 브레즈네프가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던 체르넨코였다. 그가 소련 지도자가 된 후 1년도 생존하지 못하자, 1985년 3월 11일에, 안드로포프의 후견을 받은 고르바초프가 정치국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826)


"고르바초프, 그리고 셰바르드나제와 야코블레프 같은 그의 원래의 동료들이 소련의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자신들에게도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토대에는 소련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낮은 경제성장률은 점증하던 환멸감 및 비관론과 결부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우선 위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위기에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정부와 당은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태, 제조품의 빈약한 질 등 경제 문제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심화되고 있던 〈정체(停滯)〉─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을 가리키면서 널리 사용된 용어─에 대한 인정은 문화적 위기와 이데올로기적인 위기에 대한 인정과 짝을 이루었다." "고르바초프의 선언에 따르면, 소련은 한마디로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재건축(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했다."(892-4)


"아주 중요한 점은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적 사회주의의 이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소련 사회의 실질적인 쇠퇴는 말할 것도 없고, 당 생활을 포함한 소련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목격한 광범한 냉소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기에 행한 레닌의 말을 종종 되풀이하면서, 개혁된 선봉 세력과 〈민주화〉의 결합을 통해서 소련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는 경제 및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신념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열쇠였다. 그리하여 고르바초프는 시민들이 공적 생활에 더욱 참여하고, 더 많은 주도권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오래된 정치적 전통만이 아니라, 레닌을 뒤따라 강력한 중앙의 권위가 변화의 시기에 필수적이라고 믿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의 본질적인 〈휴머니즘〉,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의 옹호와 증진에 대해서 종종 거론하곤 했다."(894-5)


"소련의 민족정책 자체가 소련에서 민족주의 혹은 여러 민족주의의 대두에 기여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민족주의는 모스크바의 통치에 대한 반응이자 항의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다민족국가라는 공식적인 이상의 결과였으며, 그에 수반되어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한 결과였다. 경제 발전, 도시화, 교육도 민족 및 종족 지도자들의 대두에 기여했다." "일단 고르바초프가 공개적인 표현에 대한 제약을 느슨하게 하자, 소련의 정책을 통해서는 민족적 정체성과 열망이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자치권을 더 달라는 요구는 종종 지방권력에 대한 것이었으며, 숨 막힐 듯한 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달라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단지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억압받던 자들의 귀환이었다. 소련식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겠다는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적인 약속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많은 시민들에게 민족주의는 대안적인 신념을 제공했으며, 번영과 자유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다."(901)


"소수민족의 공화국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함에 따라서 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1990년 3월에 중심에 있는 거대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권을 주장했을 때 소련의 운명은 거의 필연적으로 결말을 맞이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정부는 소련의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할 때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반대로 러시아 정부의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중앙〉을 러시아의 진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자치권〉과 심지어 〈주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공화국들이 이런 일을 동일하게 하도록 지원하면서 〈법의 전쟁〉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러시아 법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소련의 법을 무효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옐친을 동료 개혁가로 보았으나, 그가 권위에 대항해서 고개를 들고는 더욱 빠른 속도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하기 아주 어려운 동지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907)


"러시아의 정치무대에 집중하던 옐친은 1990년 3월에 새로 신설된 러시아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러시아 의회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도록 설득하여, 러시아 공화국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새로운 대통령직을 승인하도록 했다. 1991년 6월 1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나 중앙정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얻을 수 없었던 대중적인 지지와 민주주의적 절차를 놀랍도록 과시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옐친이 1990년 7월 12일에, 그리고 그 다음 날 솝차크와 포포프가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유서 깊은 도시, 장소, 거리는 옛 이름을 되찾았고, 차르 국가의 흰색, 푸른색, 붉은색 국기와 쌍두독수리 문장이 부활되었고, 공개적인 종교행사는 점점 빈번히 개최되었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민족주의 및 종교적 부흥과 결합되었다."(908-9)


제7부 러시아 연방


"옐친(1991년-1999년 집권)은 자신의 의사일정의 맨 꼭대기에 경제적 변화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으므로, 추바이스, 가이다르, 키리옌코 같은 경제 개혁가들에 대한 신뢰감을 거듭 표명했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기고, 점차로 강력한 이해관계를 가진 반대파가 경제 개혁 혹은 적어도 그런 특별한 종류의 경제 개혁을 원하지 않게 됨에 따라서 대통령은 거듭 후퇴해야 했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옐친은 그보다 앞선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모든 방향으로부터 비난받았다.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호평받는 정치인이었던 옐친에 대한 여론조사의 지지율은 2퍼센트, 심지어 1퍼센트로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헌법상 대통령이라는 매우 강력한 지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서, 정치적으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 내의 지도적인 인물들을 종종 해임하고 정부의 노선을 다소 변경하기도 했다."(930-1)


"새로운 러시아 연방의 89개 연방주체 중의 하나인 체첸 공화국의 인구는 러시아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었고, 머나먼 캅카스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단지 석유와 가스의 수송로라는 점에서만 중요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체첸인들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자 샤밀의 지도하에 투쟁했고, 1917년 이후에는 소련 권력에 저항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던 1991년에, 소련 공군의 장성인 두다예프가 원로회에 의해서 체첸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주 애매한 선거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다예프는 모스크바의 권위에 자주 반항했고, 자국이 러시아에서 수많은 범죄 활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용인했다. 러시아의 새로운 의회, 국가 두마, 심지어 많은 군 지도자들도 군사 개입에 반대했지만, 옐친은 체첸을 침입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12월 11일에, 4만 명의 군인들이 체첸으로 파견되었다."(937-8)


"옐친은 러시아가 문명의 길에 서 있도록 하는 데에 자신의 개인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며, 자신에 대한 모든 반대가 공산주의로의 회귀에 관한 위협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것 같다. 1993년 12월 12일에 새로운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함으로써, 옐친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그는 장관들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으며, 입법부의 승인을 얻을 수 없었을 때에는 행정명령에 의해서 필요한 조치를 통과시킬 수도 있었다. 옐친의 헌법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해서 더 큰 권력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대통령을 탄핵한다거나 헌법을 개정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헌법을 〈대통령 만능주의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결국 옐친이 정부예산과 온전한 입법 프로그램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제 입법부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1993년 12월 선거에서 옐친이 거둔 승리는 동시에 실시된 새로운 두마 선거에서 다수 의석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빛을 잃었다."(940)


"1999년 여름, 모스크바와 남부 러시아에 있는 아파트 건물 두 동에서 폭탄이 터져,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체첸의 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았고, 1999년 9월에 러시아의 대규모 침입으로 제2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던 총리 푸틴은 〈우리는 그들을 옥외 화장실 안으로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극단적인 무력 사용을 인가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여론조사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50퍼센트로 치솟은 반면에, 공식적인 발언에서 점점 일관성을 상실하고 국가정치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안전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은 옐친의 지지율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제 옐친조차도 자신이 옆으로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에 행한 신년 연설에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된 푸틴은 옐친과 그의 가족이 평생토록 법적 소추로부터 면제되는 것과 관대한 연금을 지급받을 것을 보장해주었다."(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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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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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론


"러시아의 성장은 러시아가 위치한 지역의 지리, 즉 확장에 방해가 되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던 광대한 평원이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모스크바국은 이런 환경 덕분에 동유럽을 가로질러 아주 쉽게 확대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곧장 태평양까지, 그리고 심지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했다. 이런 전진은 미국인들의 서부를 향한 대이동에만 비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경계가 정해졌을 때, 그것은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양과 접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대부분 바다와 높은 산들 그리고 사막에 접해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일련의 다른 민족들과 뒤섞였던 서쪽에서만 국경과 지리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아주 혹독한 기후 때문에 유럽 러시아의 북부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과 시베리아의 다양한 거주민들은 러시아인들의 전진을 전혀 저지할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쉽게 확대할 수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은 외부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26-7)


제2부 키예프 루시


"키예프 시(市)는 9세기에 하자르족이 통치하던 동슬라브인들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올레크라고 불리던 한 바랑기아인이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비잔티움의 중요한 시장(市場)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올레크는 공으로서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류리크의 젖먹이 아들인 이고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이고리는 올레크가 죽은 후인 913년에 권좌에 올랐다." "올레크와 이고리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치른 후 944년에 체결한 조약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조심스럽게 작성된 조약의 문구와 놀랍도록 세세한 조항들에서는 루시인들의 콘스탄티노플 체류 문제, 주민들과 루시의 교역, 그리고 일반적으로 양국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분명한 사실은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특히 교역의 원천으로서 아주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리스인들과 멀어지지 않도록 이런 관계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54-6)


"1015년까지 나라를 통치하면서 블라디미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그는 질서를 수립하고, 내전 시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진 동슬라브족이 키예프국에 충성을 바치게 하며, 루시 영토를 방어하고 확대하는 정치적·군사적 정책을 계속 펼쳤다." "둘째, 그는 그 이후 5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정도로 안정적인 키예프 루시의 지배가문의 원칙을 확립해놓았다. 류리크 가문은 러시아에서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일은 블라디미르가 자신만이 아니라 루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기독교를 수용한 일이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 것이다."(59-61)


"기독교가 러시아로 전래된 것이 로마로부터가 아니라 비잔티움으로부터라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비록 당시에는 이런 차이가 나중에 인식된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동구의 교회와 서구의 교회 사이의 분열은 1054년에야 발생되었지만, 러시아가 비잔티움에 충성을 바친 것은 러시아의 이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거나, 결정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외부에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나머지 유럽 및 라틴 문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도록 크게 부추겼고,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 사이의 비극적인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당대에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선택이었다."(63)


# 키예프 몰락의 여러 가지 이유

1. 지방 공국들의 성장 : 볼리니아-갈라치아, 스몰렌스크, 랴잔, 블라디미르-수즈달, 노브고로드 등의 강력한 공국들과 키예프 왕조 구조 사이의 긴장

2. 사회 갈등 : 농민들의 예속화와 도시 빈민들의 열악한 처지, 노예제도의 상존

3. 경제 붕괴 : 키예프를 우회하는 무역로의 발달로 국제적 지위 하락

4. 정부 체제의 실패 : 친족 간의 공동 통치와 형제 간의 순환 통치 관행이 불러온 만성적인 내부 갈등

5. 외부의 압력 : 스텝 지대의 하자르족, 페체네크족, 폴로베츠족 그리고 최후로는 몽골족의 침략


# 키예프의 정치 제도들

1. 공이라는 지위 : 공은 군사 지휘권, 재판권, 행정권을 갖고 있었지만 관리들은 물론 지방민들과 업무를 조율해야 했다. 키예프 공은 대공 혹은 위대한 공으로 명명되었다.

2. 두마(duma) 혹은 보야르 협의회 : 공 및 그의 측근 가신인 상급 드루지나의 협의회 및 협동 작업에서 발달했으며, 고위 성직자도 두마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3. 베체(veche) 혹은 민회 : 전쟁이나 평화, 긴급 법령, 그리고 공과의 갈등이나 공들 사이의 갈등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루는 자유민 집회로서 만장일치제제를 채택했다.


제3부 분령 시기의 러시아


"오래 전부터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해온 주장에 따르면, 분령 시기(udel’nyi period)라고 알려진 분할과 패배의 이 시기, 특히 몽골 침략 이후의 암흑 같은 초기 100년 동안에 있었던 역사적 분열과 종말을 방지한 통합의 끈은 키예프 루시의 제도와 문화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라고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101-3)


"이 새로운 시기는 우델(udel)이라고 불렸던 분령지, 즉 개별 공의 독립된 보유지를 따라 명칭이 붙여졌다. 그 시기에 분령지는 급속히 증대되었다. 전형적인 경우를 보면, 어떤 통치자는 유언을 통해서 자신의 공국령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리하여 여러 개의 새로운 정치적 독립체가 생겼다. 분할이 잇달아 이루어지면서, 공국의 허약한 통일성은 파괴되었다." "분령 시기에 있었던 러시아의 분할 현상은 인구 이동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재편,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민족들의 등장과 결합되었다. 이런 과정은 키예프가 최종적으로 몰락하기 오래 전부터 대체로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이 러시아 역사에 미친 총체적인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텝 지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투쟁이 러시아인들을 매우 소진시켜 놓았고 키예프의 운은 쇠락해갔다. 키예프 자체와 남부 러시아가 몽골에 의해서 끔찍하게 파괴된 것은 이런 추세를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따름이다."(103-4)


"몽골인들─러시아 사료에서는 타타르인들이라고 불린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은 1223년에 남동부 러시아에 갑자기 나타나서 칼카 강 인근의 전투에서 러시아인들과 폴로베츠인들을 격파하고 스텝 지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와서는 1237~1240년에 러시아를 정복했고, 오랫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다." "유럽 침공을 시작한 몽골인들은 1236년에 우랄 산맥을 건너서 볼가 불가르인들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1237년에 그들은 러시아의 동쪽에 있던 랴잔 공국을 북쪽 방향에서 기습 공격했다. 몽골인들의 전략에 따르면, 유럽 쪽에 대한 주된 공격을 하기 위한 측면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러시아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성격대로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침입을 받은 공국을 도우러 가거나 합동작전을 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렀고 격렬한 전투 끝에 차례차례 함락되었다."(107-110)


"노브고로드, 혹은 정식 명칭을 사용하면 대노브고로드 공국은 분령 시기 러시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중요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주장에 따르면 모스크바국의 성장과 통치로부터 수반된 중앙집권화된 전제체제 형태의 중요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눈에 띈다. 사실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세계시민주의적인 노브고로드에 대한 기억은 19세기 및 그 이후의 러시아의 반정부 세력에게는 러시아의 억압된 민주주의 유산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에 못지않게 러시아 땅을 서유럽의 강국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한 노브고로드의 역할은 러시아 역사에서 노브고로드가 가지는 반(半)신화적인 지위의 일부분이 되었다. 키예프의 세력과 권위가 쇠퇴하고 경제적, 정치적 무게 중심이 바뀌었을 때, 노브고로드는 가장 큰 교역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북부 러시아의 수도이자, 실제로 전 러시아의 지도적인 도시로 부각되었다."(120-1)


# 노브고로드의 제도와 생활방식

1. 13세기 후반에 은으로 만든 새로운 화폐인 루블 도입

2. 공을 초청하거나 해임할 수 있고, 각종 군사, 사법, 행정권을 행사한 베체(민회)의 막강한 권한

3. 대주교가 주관하고 보야르 집단이 참석하여 베체의 논의와 입법 조치를 견제한 명사 협의회

4. 자체의 베체와 관리를 보유한 지방의 자치권과 자율성 보장

5. 인간 생명을 존중하여 주로 온건한 처벌을 내린 사법체계


"14세기에 변방의 보잘것없는 소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소군주의 후손들이 러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모스크바는 14~15세기에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이 국가는 통치자의 '세습 재산'으로 정의된 엄청난 부와 광대한 영토에 의해서,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에 의해서, 경쟁자들과 몽골 칸국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에 의해서, 유산과 운명이라는 세속적이고도 종교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사실, 필연성이라든가 민족적 운명이라는 압축된 의미를 갖고서 이 과정을 〈러시아 땅 모으기〉라고 묘사한 전통은 이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 서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는 1147년 이전에 공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정착지로서 출발했고, 12세기 중엽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중심지, 즉 소도시가 되었던 것 같다." "14세기에 그곳에는 목재로 된 크지 않은 요새(크렘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상인 및 수공업자들의 주거지와 농가가 있었다."(145)


"14세기부터 몽골 제국은 부흥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분열되며 약화되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황폐화, 발칸 지역과 중국 문제로 인해 취약점을 보이던 상업망, 킵차크 한국 내의 격렬한 권력 투쟁 등은 러시아의 공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몽골인들이 힘을 보유한 동안에는, 모스크바의 공들은 칸들에게 완전히 복종하며, 열심히 그들에게 협력했다. 그들은 몽골인들을 도우면서, 참을성이 없고 투지가 넘치는 트베리와 몇몇 다른 러시아 땅이 파괴되도록 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이후에, 대공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은 몽골인들을 위하여 공물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다른 러시아 공들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재정적인 권위,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사법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반 3세는 마침내 칸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런 점진적이지만 변화를 초래하던 과정을 완성했는데, 몽골인들은 그것을 중단시키거나 되돌릴 수 있는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165-6)


"이반 3세의 아들인 바실리 3세는 부친을 이어서 1505년부터 1533년까지 통치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많은 면에서 선임자의 정책을 지속했으며 완성시켰다. 바실리 3세는 1511년에 프스코프를 획득하고, 1517녀에는 랴잔의 나머지 부분을 모스크바국에 합쳤을 뿐만 아니라 스타로둡, 체르니고프-세베르스크, 오카 강 상류지역 등 남아 있는 모든 분령지를 사실상 병합했다. 모스크바국의 통치자인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목표로 세번의 군사작전을 단행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싸웠고, 마침내 1514년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그 결과 1522년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러시아가 얻은 영토는 승인되었다. 그는 이반 3세의 정책을 지속하여 카잔 한국에 대해서 압력을 가했고, 그쪽 방향으로 러시아 국경을 확대했다. 바실리 3세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 그리고 투르크의 유명한 술탄인 술레이만 1세, 그리고 심지어 인도의 대무굴 제국의 건립자인 바바르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62-3)


"모스크바국은 토지 소유권의 형태를 크게 바꾸었다. 분령 시기의 대부분 동안, 궁정이나 교회 토지를 제외하고는 토지 보유의 지배적인 유형은 보트치나로 알려진 세습 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러나 이반 3세와 그 이후의 공들 사이에서는 조건부적인 토지 보유 형태인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인 봉직을 맡은 대가로 전적으로 공의 재량하에 부여된 토지였다. 포메스티예 소유인이 공에게 봉사를 계속하거나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사후에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한, 포메스티예는 그 가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트치나와는 달리, 포메스티예는 팔거나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저당 잡힐 수 없었다. 포메스티예 체제의 핵심적인 목적은 이반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군사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75-6)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은 바실리 3세의 치세 무렵에는 이전에 키예프국의 영토였던 곳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지만, 키예프국의 유산 중 또다른 많은 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상, 서부 러시아의 역사는 수 세기 동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사회체제 및 성쇠와 연결되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사실상 흑해로까지 확대된 이후에 인구의 3분의 2 혹은 심지어 4분의 3이나 그 이상은 러시아인들이었다고 추산된다. 도시는 여전히 러시아적 성격을 유지했고, 러시아의 보야르들과 정교회는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폭넓은 특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모두 리투아니아의 대공에게 속했지만 리투아니아 공들 바로 옆에서 각자의 분령지를 계속 지배했고, 양 귀족 사이의 통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들은 비록 이교도이기는 했지만, 정교도 신민들의 통치자로서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교회로부터 승인받으려고 했다."(198-201)


"리투아니아 군주 가운데 가장 크게 영토를 확장한 비톱트는 1399년에 몽골인들에 대한 중요한 작전을 펼치다가 참패를 당함으로써 큰 낭패를 보았다. 일부 학자들은 비톱트가 보르스클라 강변에서 승리했더라면, 모스크바와 폴란드 양쪽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동유럽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리투아니아를 위해서는 야기엘로의 결혼이 비톱트가 벌인 전쟁 혹은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국 사이의 결혼동맹(바실리 2세는 비톱트의 손자)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리투아니아의 폴란드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야기엘로는 야드비가와 결혼하기 위해서 정교회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나라의 이교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자연히 성직자들이 폴란드로부터 리투아니아로 건너왔고, 교회는 폴란드가 행사한 영향력의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202-3)


제4부 모스크바 러시아


▶ 이반 뇌제 통치기(1533-1584)


"이반 뇌제(이반 4세)는 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보야르들과 점차 격렬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차르와 보야르 사이의 갈등은 논리적으로 그 이전의 역사부터 초래되었다. 모스크바국의 절대주의가 이반 뇌제와 함께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스크바 팽창됨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보야르 층은 군주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보야르들은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이 파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그리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고래의 분령 질서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었다." "공포의 통치가 그 뒤를 이었다. 리투아니아로 도망갔던 쿠릅스키 공과 관계된 보야르들과 그 외 사람들이 최초로 몰락했다. 다음 차례로는 차르의 사촌인 스타리차의 블라디미르 공이 자신의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혐의자들과 희생자들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이반 뇌제는 (자신을 향한)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222-6)


"이반 뇌제는 1560년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의 사망 이후에 정서적인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반은 기이한 개인적인 행동과 외모에 더하여, 잔인한 행동을 종교성과 결합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고, 종교 서적을 읽었고, 새로운 성인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그는 참회를 구하면서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모으도록 하고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직접 기도했다. 잔인함과 경건함이라는 역설적인 혼합은 민간 자료에 나타난 이반 뇌제의 이미지에 반영되었다. 민요와 민간 이야기에서 이반 뇌제는─엄격함, 무시무시함,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혼합물로서의 그로자(groza)라는 의미에서─〈그로즈니 차르〉로서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분노하고, 전제적이며, 잔인하고, 불공정하며, 끔찍할 수는 있지만 자애로우며, 용서를 잘하고, 관대하며, 정의로우며, 심지어 신하들과 동료들이 훌륭한 조언으로 자신을 반대할 때조차도 그들을 존중하는 통치자로 그려진다."(227)


▶ 동란의 시대(1598-1613)


1. 왕조의 문제 : 차르 표도르의 서거 후 정상적인 제위 계승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자신이 제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2. 국가적 문제 : 내분으로 러시아가 약화되자 폴란드와 그보다는 약하지만 스웨덴 역시 이 상황을 자신들의 영토상의 이익에 걸맞게 이용하려는 충동을 느꼈다.

3. 사회적 문제 : 봉직자들(봉직귀족, service gentry)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봉직의 대가로 받은 영지인 포메스티예에 귀속되는 국유지와 농민들이 늘어났다.


▶ 미하일 로마노프 통치기(1613-1645)


"미하일 차르의 정부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외국의 공격을 제지했고, 국제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구스타부스 2세 혹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를 새로운 왕으로 맞아들인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1617년에 스톨보보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스웨덴인들은 노브고로드와 그에 인접한 북부 러시아 영토를 반환했으나, 핀란드 만을 따라 난 띠 형태의 영토는 계속 보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인들을 바다로부터 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스웨덴은 2만 루블을 받았다. 폴란드인들은 좀더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17~1618년에 블라디슬라프가 러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는 데에 실패한 이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14년 동안의 효력을 가지는 데올리노 휴전이 1618년에 체결되어, 폴란드는 스몰렌스크와 서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다른 점령지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262-3)


"농노제는 모스크바국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기반이었다. 농노는 노동력으로 귀족을 부양했고, 그럼으로써 국가 전체의 구조를 지탱해주었다. 농민들이 예속된 역사는 키예프 시기까지 소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노예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예속 상태는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오브로크라고 불리는 지대를 납부하고, 바르시치나라고 불리는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부터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들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특히 봉직귀족계급이 믿을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의 근원을 확고히 하려는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의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276-7)


"도시민의 중심 계급은 여러 계서적인 집단으로 세분된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1649년에 제정, 공포된 『울로제니예』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히 과세를 위해서 도시 생활을 규제했다. 사실 정부는 세금의 많은 부분을 도시에서 징수했다. 과세를 집단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도시 공동체로부터의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나 부유한 상인들이 주로 관리하고 있던 〈백민(白民, belyi)〉 교외 지역이 법으로 폐지되었고, 모든 도시 집단이 과세 대상자인 〈흑민(黑民, chernyi)〉 도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에 도시 교역과 제조업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런 혜택과 더불어, 『울로제니예』는 도시민들도 사실상 농노화했다. 도시민들은 도시의 허가 없이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를 떠날 수 없었고, 도망친 도시민들을 회복시키는 제한 규정도 폐지되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도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폐쇄적이고 세습적인 카스트이자 비유동적인 계급이 되고 말았다."(278)


"17세기에 이루어진 모스크바국의 확장으로 인해서, 과거 모스크바 공국의 서쪽, 북쪽, 남쪽, 동쪽에 있는 영토와 민족들이 차르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서쪽으로의 영토 팽창, 특히 우크라이나를 복속한 1654년의 협정이 과거 러시아 영토의 재통일이라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쪽과 남동쪽으로의 팽창은 〈식민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남부 스텝 지대로의 진출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한 이후에 계속되었다." "가장 극적인 팽창은 동쪽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실질적인 정착은 좀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같은 30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탐사하고 정복하면서 오비 강으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약 4,828킬로미터를 전진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별다른 저항 세력을 만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강력한 정치 공동체가 전혀 없었으며, 지방 엘리트들의 협조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288-9)


제5부 제정 러시아


▶ 표트르 대제 통치기(1682-1725)


"표트르 1세가 당대인들에게 심어준 인상은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2미터가 넘는 키와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던 차르는 깜짝 놀랄 만한 육체적 힘과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그의 통치기 전체를 상징하는 개인적인 특성이었다." "그는 처음에 사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초급 장교로 승진하기 전에 모든 무기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보병과 수병의 업무를 맨 밑바닥부터 익혔다. 군주는 폴타바에서의 승리 이후에는 육군대장 계급을, 대북방 전쟁의 성공적인 마무리 이후에는 해군대장 계급을 획득했다. 그는 성격상 모든 곳에 가보고 모든 것을 직접 보기를 원했으므로, 방대한 자신의 국토를 이전의 어떤 모스크바국 군주도 하지 않았던 정도로 이리저리 여행했다. 더구나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그는 1697~1698년과 1717년 두 차례에 걸쳐서 배움을 목적으로 서유럽으로 갔다." "그는 이론이 아니라 기술과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서구로 갔다."(321)


"동시에, 표트르는 과격하고 거칠고 잔인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상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모습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자신의 곤봉으로 귀족들, 친구들, 다른 궁정 사람들을 직접 때렸다.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주저하지 않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표트르 대제를 그가 숭배했던 이반 뇌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개혁가는 결코 스스로 과대망상증이나 피해망상증의 편집증적인 세계에 빠져 있지도 않았고,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조차 거절했다.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면, 표트르 1세는 군사적 헌신의 대상으로서 〈폐하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국가를 위해서〉로 대체했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봉사하고, 자신의 국가를 변화시키고 깨우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였다."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표트르는 육군과 해군 업무, 기하학, 요새 축성등을 다양한 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321-3)


"1721년 8월 30일, 대북방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러시아와 니슈타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핀란드의 상당 부분을 반환하고 200만 릭스-달러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잉게르만란트, 카렐리아의 일부 그리고 몇 개의 섬을 획득했다. 사실상 러시아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나중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라는 독립국이 되는 소위 발트의 주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핀란드 만 옆에 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남동부의 핀란드 국경지방을 얻었다. 특히 러시아는 비보르크라는 요새를 점령함에 따라, 핀란드 만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굴욕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적수인 폴란드에 대해 우세를 확보했으며, 독일 문제에 직접 관여─차르가 자신 및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딸들을 위해서 결혼동맹을 주선한 것도 포함되었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성큼 나서게 되었다."(333)


"표트르 대제는 소위 이성의 시대 동안에 유럽에서 설파되고 어느 정도는 실행에 옮겨진 계몽 전제주의를 믿었다. 그는 전제정치 및 통치자와 신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모스크바국의 전통이 아닌 스웨덴으로부터 빌려왔다. 이반 뇌제와는 달리 표트르 대제는 법을 최고로 존중했고, 스스로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관점에 따라서 보야르 두마나 젬스키 소보르를 싫어했고, 전임자들보다 훨씬 더 고압적인 태도로 교회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그 개혁 군주는 모호하지만 실질적으로 절대 권력의 행사를 방해하던 모스크바국의 전통적인 제도들을 대체로 피했다. 그런 것들 대신에 그는 통치기구라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을 구축해놓았다." "콜레기아(collegia)를 신설하면서 황제는 집행부의 다양한 분야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보좌관들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339-40)


▶ 표트르 대제 이후 ~ 예카테리나 대제 이전


"1725년부터 1762년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통치자가 빈번히 교체되고 총신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가 몰락했지만,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는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주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고, 그에 반비례해서 농노의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들 한 명만이 부친의 영지를 상속해야 한다는 표트르 대제의 주장은 심지어 개혁 군주의 통치기에도 거의 시행되지 못했고, 1731년에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안나 여제는 대규모의 국가 토지를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땅에 있던 농민들은 농노가 되었다. 엘리자베타도 이런 관행을 열심히 따랐다. 이렇게 하사된 토지는 봉직 의무와도 더 이상 관련되지 않았다." "1756년에는, 귀족 출신임을 입중한 사람들만이 귀족 명부에 등재될 수 있었고, 1758~1760년에 내려진 결정은 국가 봉직을 통하여 세습적인 귀족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사실상 제거함으로써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조치들 중 또다른 하나를 폐기했다."(365-6)


▶ 예카테리나 대제 통치기(1762-1796)


"귀족의 공동 정체성을 인정하고 지주의 지위와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은 1785년의 귀족헌장에서 완전한 발전 단계에 다다랐다. 귀족은 비록 국가 봉직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국가에 봉사하도록 여전히 기대되었지만, 헌장에 따르면 봉직계급으로서 러시아 귀족의 역사를 규정했던 〈봉사, 충성, 그리고 열정〉이라는 말은 세습적인 명예인 〈위엄 속으로〉라고 변경되었다." "귀족의 지위 상승은 농노제의 확대와 강화를 의미했는데, 이런 진전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통치 기간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농노제는 새로운 지역,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확산되었다. 예카테리나 정부는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이미 존재하던 제도를 확고히 했을 따름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제를 합법화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그 악습을 제국 전역에서 표준화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의 총신들에게 국유지와 농민들을 빈번하고도 대규모로 하사함으로써, 스스로 농노제를 크게 확산시켰다."(383-4)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과 나라의 성공 및 영예를 추구하면서, 제국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파닌과 포템킨 같은 정치가들, 루먄체프와 수보로프 같은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제는 국제무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제국의 국경은 크게 확대되었고, 수백만 명의 신민이 추가되었으며, 러시아는 유럽에서 새로운 위상과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또다른 우려를 낳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최소화하려고 했고, 자신이 좋아하던 계몽사상으로부터 그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이 더 과격해지자 여제는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반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및 서구가 당면했던 다른 골칫거리들은 여제를 도와주었다. 제1차 투르크 전쟁 후반부터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싸움에 몰두했고, 제2차 투르크 전쟁의 중요한 순간에 모든 강국들은 혁명기 프랑스 쪽으로 주의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385-6)


# 예카테리나 대제의 군사 활동

1. 투르크 전쟁 : 제1차(1768-1774)와 제2차(1787-1795)에 걸친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2. 폴란드 분할 :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제1차(1772), 제2차(1793), 제3차(1795)에 걸쳐 정치적 혼돈 상태에 빠진 폴란드를 분할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세임(의회)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던 아주 강력한 귀족과, 선출된 유약한 왕에게 지배받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곳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통치자들도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방 의회로부터 지시받는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는 절차상 전국적인 입법기구라기보다는 외교적인 회의체와 유사했다. 의원이라면 누구든 어떤 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부패의 확대, 외국의 간섭(러시아의 간섭을 포함한) 등은 빈번한 정치적 혼돈 상태를 낳았다. 전통적으로 의회가 해산될 때 주로 의지했던 방법은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동맹〉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동맹〉은 거부권에 의해서 방해될 수 없었고, 강제로 자신의 견해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체제는 〈내전에 의해 단련된 무정부 상태〉라고 설명되어왔다. 이 체제의 신봉자들은 이 체제가 가진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존경했다."(390)


"폴란드 분할은 폴란드인들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적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말하자면 공범들이었던 셈이다." "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 제국 내의 〈민족 문제〉의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폴란드의 해체로 인해서, 오랫동안 적대시했고 조심스럽게 러시아 바깥으로 내몰았던 종교적 〈이방인〉 집단인 유대인들이 대거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제국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의 일부를 흡수하게 되었던 것이다."(394-5)


"18세기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회적 변화 중의 하나는 러시아 군주의 지배하에 들어온 비러시아인들과 비정교도들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팽창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바다로의 충동〉, 아직 자연적인 국경선에 다다르지 않았던 점, 국경의 불안정성, 메시아적인 야망, 국제적인 경쟁 등─그 결과는 많은 상이한 민족들과 종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러시아 생활 속으로 강제로 들어온 일이었다." "대체로 공동체 간의 차이점을 인정했지만 우니아트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관용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대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제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갈등과 저항을 위한 여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다민족 제국이라는 점은 불안정한 현실이 되어, 점차적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관심 사항이 되었다."(409-11)


"러시아가 빌려온 계몽주의 문화는 수많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세속주의의 승리를 대변했으며, 교회 중심적인 모스크바국의 문명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분명히 정교회는 재정 러시아에 남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해서 국가와 연결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회는 적어도 정부와 교양 있는 대중에 관계되는 한에서는 러시아의 삶과 문화에서 중심이 아니라, 동떨어져 있고 아주 무시당하는 구역이 되었다. 게다가 플로롭스키 등에 따르면, 우리는 이 구역 안에서는 독창성이라든지 성장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18세기의 유럽에서 무대를 지배했던 세속주의 철학은 이성, 교육, 사회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계몽된 사람들의 능력을 강조했다. 마지막 사항은 특히 통치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수단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재정 러시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413)


▶ 알렉산드르 1세 통치기(1801-1825)


"알렉산드르 1세 자신은 제위에 오를 때,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에게 그가 계몽주의 정신을 갖고 통치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 충분한 근거를 주었다." "외국 서적과 정기간행물은 물론이고, 해외여행과 외국인들의 러시아 입국에 대한 불쾌한 제한조치들이 폐지되었다. 검열은 완화되었고, 사설 출판사는 다시 문을 열도록 허용되었다. 수사 때의 고문은 폐지되었고,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해서 귀족과 도시에 승인된 헌장은 다시 완전한 효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기껏해야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의 시작에 불과했다. 맞닥뜨려야 하는 핵심적인 사안 중에는 농노제, 전제정치, 국가의 전반적인 후진성 및 행정기구의 무능과 부패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에 눈에 띄는 일들 중의 하나는,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았던 데에 비해서 실제로 실시된 것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르는 전제정치를 제한하고 농노제를 폐지하고 싶어하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437-8)


"알렉산드르 1세 그리고 적어도 그의 대부분의 자문관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력 균형을 통해서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대 유럽의 많은 다른 국가에서처럼, 그는 주로 자의성과 제멋대로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질서 있는 행정 및 법체계를 도입하고, 그런 체계가 다양한 사회 신분의 대표들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을 헌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법〉에 기반을 둔 국가인 법치국가가 그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합리화된 문서 절차와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능분화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의미했다. 달리 말해서 알렉산드르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와 마찬가지로, 질서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고 변화를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는 갈역하고 합리적이며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필요성을 믿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그가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애써 지키려고 했던 것은 위선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철학이 반영된 결과였다."(439-40)


"개혁이 실패한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알렉산드르 1세가 외교 문제와 전쟁, 특히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 대재앙이기도 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지나치게 몰두했기─단 한 명의 프랑스 군인이라도 러시아 땅에 남아 있다면 강화를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식의─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한 이후 1812년 6월에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국가들, 동맹국들, 위성국들, 즉 러시아의 민간 전통에 따르면 '12개의 침입하는 혀들'의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는 투르크와 강화를 체결하는 데에 성공하고, 스웨덴과 영국이라는 적극적인 동맹국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을 초기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강화를 간청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기대는 근거없음이 판명되었다. 예외적으로 추웠으며 일찍 시작된 겨울도 러시아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병참 문제는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판명되었다."(445-50)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노선에 대한 실망감은 1825년 12월에 성공하지 못한 봉기를 일으킨 이후에 데카브리스트(Dekabrist)들이라고 알려진 러시아 최초의 혁명 집단이 등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데카브리스트들은 군 장교였고, 종종 귀족가문과 정예 부대 출신으로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어와 때때로 다른 외국어를 배웠으며, 나폴레옹에 대항한 군사 작전 도중 그리고 그 직후에 서구에 대한 지식을 직접 얻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따르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푸시킨과 그리보예도프 같은 문학계의 권위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의 공감을 얻기는 했지만, 사회적 지지는 거의 얻지 못했다. 아직 러시아 자유주의는 잉글랜드나 프랑스에서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은 결코 아니었다. 러시아 중간계급이 미약하고 후진적이었다는 점도 핵심적인 차이들 중의 하나였다."(460-1)


▶ 니콜라이 1세 통치기(1825-1855)


"법이나 제도보다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 중요했던 국가와 시대에서, 차르의 성격과 취향에 대한 질문은 사소한 의미 이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품은 권력과 통치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아주 잘 부합되었다. 1796년에 태어난 새로운 통치자는 자신의 형처럼 후기 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과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때는 민족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권력은 서구의 계몽전제주의 개념보다는 러시아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나중에 〈관제 국민성〉이라고 불리게 된 독트린이었다. 교육부 장관 우바로프 백작이 1833년에 공식적으로 선포한 관제 국민성 이론은 정교회, 전제정치, 국민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신앙, 차르, 조국〉처럼 다른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도 그 순서는 중요했고 변하지 않았다."(466)


"이 세 원칙은 별개의 사상이 아니었다. 정교회(Pravoslavie)는 공식적인 교회의 역할과 윤리 및 이상의 궁극적인 근원을 강조했다. 많은 점에서 이것은 이성의 시대에 대한 거부이자,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중심적인 자리를 부여하는 관점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인생의 〈신비와 불가해성〉 그리고 이성의 무의미함이 강조되었다. 정치적인 원리로서 이것은 사회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배격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신성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 말해지고 있었듯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신을 섬겨야 한다.〉 신성한 권위로서의 전제정치(samoderzhavie) 원칙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덧붙여서, 인간은 본래 약하고 죄짓기 쉽다고 상정되었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동시에, 그리고 전통을 따라서 그들은 전제정치가 러시아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라고 간주했다."(466-7)


"앞의 두 원칙처럼 중요했던 국민성(narodnost)은 러시아 국민의 특별한 성격을 가리켰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전제정치의 또다른 측면에 불과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독특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신민이지만 동시에 강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31년의 군사 봉기 동안에 평범한 군인들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를로프와 체르니셰프(고위 관리들)를 제외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보라. 모두가 넙죽 엎드리며, 자신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있다! 당신의 러시아 민족은 이런 사람들이다.〉 알 수 있다시피, 국민성에 대한 이런 이상은 당대의 러시아적 전통과 유럽 사상, 특히 각 민족이 스스로의 독특한 천재성, 독자적인 역사, 제도, 언어, 기질, 덕성을 갖고 있다는 낭만주의적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러시아의 천재성은 국민과 차르 사이에 사랑과 헌신이라는 독특한 유대관계라고 생각되고 있었다."(467)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초기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새로운 황제의 기본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혁명 세력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그의 결심을 굳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귀족에 대한 황제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황제가 어떤 일부 신하들이 가진 독립성과 자주성에 대해서도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치세 후기에는 그의 측근 중에 민간인이 거의 한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밀사에게 과도하게 의지했는데, 밀사들 중 대부분은 그를 수행하던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되어 군주의 뜻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정식 행정체제의 범위 바깥에서 활동하는, 말하자면 군주의 분신인 셈이었다. 직접 명령,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적어도 공식적인 보고와 겉모습에 관한 한, 정확성이라는 군인정신이 모든 정부기구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패와 혼란이 자리잡고 있었다."(468)


"1848년 이후 유럽의 혁명 사태에 겁을 먹은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인들에게는 해외여행이 금지되었는데, 이 명령으로 특히 교사들과 학생들이 타격을 입었다.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정부 장학금을 받지 않는 대학생의 수는 대학별로 300명으로 제한되었다." "헌법과 철학은 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고, 논리학과 심리학은 허용되었지만 신학 교수가 가르쳐야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학교 자체가 거의 폐지될 뻔했으나, 일부 고위 관리들의 시의적절한 개입이 이런 재앙을 막아냈다." "문학과 사상은 사실상 질식 상태였다. 심지어 우익 역사교수이자 관제 국민성 이론의 지도적인 주창자였던 포고딘조차도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 정부가 러시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썩어문드러져서 악취를 풍기는 묘지의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이런 질실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473)


"러시아가 1848년 이후에 겉보기에는 무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유럽, 특히 동맹국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점차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의 복잡하고 불운한 관계는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의 근동 정책이 유럽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도록 부추겼다." "1853년 10월에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러시아인들이 투르크의 함대와 수송선을 시노페 바깥에서 격침시킨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는 1854년 3월에 투르크 정부에 합세했고, 사르디니아는 그 이듬해에 개입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기 직전에 멈추었으나, 동맹국들 편에서 외교적인 압력을 강하게 행사했다.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연합 세력에 대항해서 자신의 나라가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와 동맹국들은 3월 30일에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483-6)


# 파리 조약의 결과

1. 투르크에게 다뉴브강 입구와 베사라비아 일부를 양도

2. 흑해 중립화를 인정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 철수 

3.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 포기

4. 다뉴브 공국들(미래의 루마니아)은 열강들이 공동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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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지음, 이순호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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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역사의 교차로에서


"18세기에 마침내 지구를 둘러싼 제국을 수립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획득한 식민지 중에서도 전설로 가득찬 동방에 대해 가장 큰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의기양양함에는 뜻밖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손에 넣어 승리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좋았으나, 수송로와 병참선이 지나치게 멀어져 여러 곳에서 끊길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러한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나중에 본인 스스로도 주장했듯이, 시리아에서 전설과 영광의 길을 따라 바빌론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 내쳐 인도까지 쳐들어갈 계획으로 1798년 이집트 원정에 이어 시리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후 그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러시아 황제 파벨을 꼬드겨 러시아군도 같은 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중동의 토착 정권들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유럽 국가들의 이런 팽창을 막으려고 했다. 중동을 지배할 의도는 없었으나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 또한 결단코 막으려고 했다."(51)


"영국정부가 19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의 간섭, 전복, 침략에 맞서 쇠락한 이슬람 정권들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자 이윽고 러시아제국이 영국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러시아의 아시아 진출 계획을 막는 것은 영국 군부와 민관인 관리들의 집요한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거대한 게임the Great Game'은 1829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이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인도를 지킬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다 그 논의에서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접근을 막는 것이 최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이때부터 쇠락한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들을 영국령 인도와 이집트로 가는 통로 사이의 거대한 완충지대로 만드는 것이 영국의 전략이 되었다. 특히 이것은 파머스턴이 오랫동안 외무장관과 총리로 재직할 때 추진했던 관계로, 그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51-3)


"거대한 게임이 특히 격렬하게 진행되던 서아시아에서는 다르다넬스의 좁은 해협 위쪽,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동서 통로와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북서 통로에 자리하여 수백 년 동안 세계정치의 교차로가 되었던 고대 비잔티움, 곧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 콘스탄티노플이 적대 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는 한, 강력한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흑해로 들어가 러시아 해안선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러시아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점령하는 날에는, 영국 함대는 해협으로의 진입을 차단당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 함대가 지중해로 진출하여 영국의 생명선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아시아 대륙 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 접한 드높은 산맥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침략군이 영국령 인도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올 수 있는 요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가 그 고지대에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영국의 정책 기조가 되었다."(53)


"오스만제국은 제1차 발칸전쟁(1912~1913)에서 발칸동맹(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에 패해 유럽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2차 발칸전쟁(1913)에서는 아시아 쪽 터키의 맞은편에 위치한 트라케(트라키아)를 용케 회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에 찾아든 잠깐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을 잡고 술탄의 각료로 제국을 지배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청년튀르크당은, 제국의 영토가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고 유럽의 포식자들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유럽 국가들은 아프리카 대륙마저 분할했고, 이제 그들이 눈길을 돌릴 만한 곳은 많지 않았다. 지표면의 4분의 1은 영국, 6분의 1은 러시아가 차지하여 대부분 지역은 이미 점령된 상태였고, 서반구도 먼로주의에 포함돼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입장이어서, 유럽 국가들이 뚫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지역은 중동뿐이었다."(77-8)


"CUP(통일진보위원회) 내의 다양한 분파는 강력한 유럽 국가를 동맹으로 확보하는 것이 터키 의제의 가장 절박한 사안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유럽권의 한 나라, 아니 열강의 하나─영국, 프랑스, 혹은 독일─만 동맹으로 얻으면, 오스만제국은 영토를 침탈당하는 일 없이 안전해지리라고 청년튀르크당은 판단했다. 러시아와 러시아보다는 힘이 다소 약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그리스, 불가리아가 오스만제국을 침략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들이었다." "1914년 5월과 7월 사이에는 오스만의 정세가 더욱 악화되어 CUP 지도자들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세 강대국에도 동맹의 개연성 여부를 은밀히 타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프랑스파였던 해상장관 제말은 프랑스에 동맹을 제의했다가 거부당했다. 절망에 빠진 탈라트가 고심 끝에 러시아에까지 접근하는 무리수를 두었으나, 역시 퇴짜를 맞았다." "오스만제국은 열강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하는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져들었다."(83-4)


"불간섭 정책을 옹호하던 오스만제국의 국방장관 엔베르 파샤는 1914년 8월 말에 벌어진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해 9월에 시작된 마수리아 호수 전투에서 독일군이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자, 오스만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하려면 독일이 단독으로 승리를 거두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러시아는 수십만 명의 병력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상황이어서, 엔베르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도 러시아의 패배가 임박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독일의 승리 열차는 이제 막 역을 떠나려 했으므로, 엔베르로서는 이번이 기차에 올라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더욱 조바심을 냈을 것이다. 9월 26일 엔베르는 결국 동료들에게 의논도 하지 않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여 외국 배들(사실상 연합국 선박)의 접근을 가로막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고는 일주일 뒤 독일 대사 폰 반겐하임에게, 대재상이 더는 오스만의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통보했다."(114-5)


2부 하르툼의 키치너, 장래를 준비하다


"영국은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발발하자 이집트와 키프로스 문제를 명확히 해둘 필요를 느꼈다." "카이로의 영국청(이집트 총독 키치너가 근무하는 곳)이 원한 것은, 이름뿐이나마 언젠가는 독립시켜주겠다는 언질이 포함된 보호령이었는데, 영국정부는 두 나라의 병합이라는 본래의 결정을 번복하고 카이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영국 내각의 결정으로 키치너의 영국청은, 키치너와 그의 참모들이 훗날 아랍어권 전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던 통치 형태의 원형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인도에서와 같은 직접통치 방식이 아닌 보호령이 그것이다. 키치너의 이집트에서는 허울뿐이나마 세습군주와 토착 각료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영국 고문관들의 조언으로 결정된 사안이라 해도 모든 법령은 그들 이름으로 공표되었고, 그것이 바로 키치너 사단이 바란 정부 형태였던 것이다. 로널드 스토스의 표현을 빌리면, 〈영국은 명령법에 반대하고, 가정법을 좋아하며, 기원祈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136-7)


"1914년 영국인들의 관심은 온통 오스만제국이 참전하면 수에즈운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개연성에 모아졌다. 로널드 스토스도 예외는 아니어서 유럽의 국방부 관리들이 철도 시설을 중심으로 적국의 군사력을 분석하듯, 낙타에 초점을 맞추어 오스만의 군사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실 낙타는 구실이었을 뿐, 스토스의 진짜 목적은 그 편지와 함께 1914년 9월 6일 클레이턴이 건네준, 낙타 이외의 또다른 문제들을 메카의 지도자와 논의해달라는 내용의 극비 비망록을 키치너에게 전달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비망록에서 클레이턴이 제기한 문제들 중에는 영국에 호의적인 아라비아 지도자를 이슬람의 칼리프로 만들어 오스만 술탄을 대체할 개연성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클레이턴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슬람 성지의 수호자인 메카의 아미르가 칼리프의 명백한 후보자라고 말햇다. 그렇게 되면 성지순례의 면으로도 영국에 중요한 조력자가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157-8)


"키치너는 외무장관 그레이의 승인을 받아 스토스에게 보낸 전문에서, 메카의 지배자에게 〈터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 전쟁에서 아랍이 영국을 도와주면, 영국도 아라비아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아랍인들이 외국의 공격에 맞서 싸울 때도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답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여기서 '아랍인'은 아라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아라비아 반도가 술탄으로부터 해방되면 영국은 외세의 모든 침략으로부터 그곳 지배자들을 보호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월권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키치너의 발언이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역할이 전시보다 전후에 더 중요할 것이라고 여긴 자신의 믿음을 반영하듯, 메카에 보내는 메시지를 폭탄선언으로 마감했다. 〈메카나 메디나의 칼리프는 진정한 아랍 종족이 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금 벌어지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그 선은 달성될 것입니다.〉"(161-3)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그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본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그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키치너와 그의 측근들은 메카의 지배자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드는 오류도 범했다. 메카의 지배자는 그들이 보낸 전문을 보고 영국이 자신에게 거대한 왕국의 지배자를 제의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슬람의 새로운 칼리프가 뜻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카의 지배자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의 경계지가 될 곳을 언급할 때 스토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그래서였다. 키치너나 그나 아미르의 통치영역을 확대시켜줄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164)


3부 중동의 진창에 빠진 영국


"1915년 초 (서부전선 병력 차출을 거부하던) 키치너는 돌연 마음을 바꿔 영국의 다르다넬스 공격을 제안했다. 러시아 최고사령부가 다르다넬스에 대한 양동 공격을 급히 요청해오자, 그 청에 응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렇게 되면 독일이 모든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여할 수 있게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견제 공격을 요청하고, 키치너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 엔베르의 카프카스 고원 지대 공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요청은 1951년 1월 러시아가 엔베르의 튀르크군에 신속한 승리를 거두기 전 영국에 전달되었다." "결과적으로 영국 지도자들은 있지도 않은 튀르크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해주겠다며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처칠, 키치너, 애스퀴스, 로이드 조지, 영국, 중동의 운명을 바꿔놓게 될 다르다넬스 작전(갈리폴리 전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196-7)


"키치너와 처칠의 다르다넬스 작전이 막상 성공할 조짐이 보이자 원조를 요청했던 러시아 정부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작전 성공은 물론 기뻐할 일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영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할 것이 뻔했고, 그러자 러시아인들 마음속에 지난 1세기 동안 거대한 게임을 벌이며 느꼈던 공포와 시기심이 되살아난 것이다. 러시아 정부가 우려한 것은, 영국이 일단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나면 내놓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15년 3월 15일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가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메시지가 담긴 비밀 통전通電을 런던과 파리에 각각 발송했다. 콘스탄티노플과 다르다넬스 해협, 그리고 해협에 인접한 지역을 러시아에 인도할 것을 연합국에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의 다른 영토와 그 밖의 지역에 갖고 있는 야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양국의 계획을 호의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207)


"러시아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그레이가 콘스탄티노플 협정을 비밀에 부친 것은 그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인도의 무슬림 여론에 미칠 파장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국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최후의 무슬림 독립국, 따라서 중요성이 적지 않은 오스만제국을 파괴한 장본인으로 비춰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레이는 또, 오스만제국이 파괴되는 데 따른 이슬람교도들의 손실을 다른 곳에 무슬림 국가를 세우는 방식으로 벌충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아라비아가 그 후보지로 가장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곳은 열강들도 탐내지 않았으므로 약속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도 훗날, 〈외국 군대가 아라비아 땅을 점령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마른 황무지여서 강대국이 목초지로 욕심 부릴 만한 곳도 아니었다〉고 썼다. 그때만 해도 아라비아에 엄청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211-2)


"한편 사이크스가 외유에서 돌아와 내각에 던진 주요 메시지는, 그동안은 아랍이 전쟁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는 연합국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메카의 샤리프 아미르 후세인과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사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각료들의 토의 끝에 결국 (카이로에 교섭권을 주어 후세인과 합의해야 한다는) 키치너의 안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헨리 맥마흔이 런던이 부여해준 권한과 지시사항으로 메카와 교신을 재개한 것이 바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과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토록 오랫동안 그 의미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맥마흔 서한이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사뭇 달라진 어조로 후세인에게 답변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다. 원하는 약속을 해주라는 키치너의 지시를 받고 특정 영토와 경계지역에 대한 논의를 하기로 마지못해 동의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실한 언질을 주는 데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헷갈리는 용어를 사용했다."(274-5)


"그가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은 당연했다. 1916년 초 윈덤 디즈가 상황 파악을 위해 작성한 자료에 아랍인이 세 부류로 갈라져 있던 것도 그 힌트가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영국이 그 모든 아랍인들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중 첫 번째인 시리아인들만 해도 프랑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겨 그들 영토에는 프랑스가 발을 들이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주목표로 삼았고, 그것은 물론 프랑스의 요구와 상반되었다. 두 번째 아랍인인 후세인도 아랍왕국의 지배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디즈는 아랍인 대다수와 터키인 모두 그것에 반대한다고 썼다. 〈이 생각은 실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대부분, 아랍인 다수, 모든 터키인들의 관점이다.〉 다른 아랍인들도 후세인을 지도자로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라는 것이 디즈의 생각이었다. 끝으로 이라크의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디즈가 보기에는) 독립을 원했지만 인도정부가 그곳을 병합해 지배하려는 것이 문제였다."(277-8)


"그러나 클레이턴과 그의 동료들은 몰랐지만, (아랍 비밀결사 지도자인) 알 미스리, (영국 관리와 아랍 지도자 간의 매개 역할을 한) 알 파루키, 아미르 후세인도 영국에 위조화폐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고 비밀결사에도 부하들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만 혹은 수십만 명의 아랍군을 결집할 수 있다고 장담한 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처음에는 아랍 봉기를 약속한 알 파루키도 11월 15일 마크 사이크스를 만났을 때는 태도를 바꿔, 연합국이 시리아 해안지대에 군대를 먼저 상륙시키지 않으면 아랍 봉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세인도 영국이 먼저 공격해주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아랍 봉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영국군이 시리아를 공격하지 않으면 아랍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이크스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영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략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281)


"1915년 11월 23일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후속 조치를 위한 협상을 벌였고, 갑론을박 끝에 서로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사이크스 쪽에서 보면 프랑스가 확대된 레바논을 지배하고 여타 시리아 지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으니, 모술까지 이어지는 세력권을 프랑스에 부여하는 데 성공한 것이고, (프랑스 협상대표) 피코는 피코대로 그것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지방 바스라와 바그다드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걸림돌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리하여 두 항구도시 아크레(아코)와 하니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철도로 연결되는 영토 지대는 영국이 차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여타 지역은 모종의 국제기구 통치를 받도록 하는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팔레스타인과, 프랑스나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는 중동의 나머지 지역은 아랍국 혹은 독립의 허울은 쓰겠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영국의 세력권을 분할될 국가들이 연합을 만들기로 했다."(289)


# 사이크스-피코 예비 협정(1916년 1월 3일 체결)


4부 전복


"서방권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시간상의 문제일 뿐 쇠락한 오스만제국이 언제든 붕괴되거나 혹은 해체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으므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벌이는 긴박한 전쟁의 과정에서 오스만제국은 와해될 것이고, 제국 내에서 일어난 분란이 그것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916년 중엽의 양상은 그와 다르게 나타났다." "오스만군에 속한 다수의 독일장교들이 명령이 잘 먹히지 않는 것에 좌절과 혐오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양국 관계에 균열이 갈 만큼 그것이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전쟁이 승리하는 쪽으로만 힘을 행사했을 뿐, 오스만 정부의 독립이나 혹은 CUP 지도자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독일은 연합국이나 동맹국의 그 어느 강대국보다 능란하게, 전후 아시아에 가진 영토적 야망을 전시 행동에 개입시키지 않는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후방을 교란시키는 기회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었다."(309-10)


"우연인지 필연인지 키치너가 바다에서 유명을 달리한 것과 때를 같이해 메카에서는 아미르 후세인의 봉기가 일어났다. 후세인이 청년튀르크당이 자신을 폐위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으킨 것이었다. 하지만 카이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것이 키치너 사단의 노력이 가져온 성과로 믿었다." "그러나 후세인이 바란 아랍 봉기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스만군에 속한 아랍부대들 중 후세인 편으로 넘어온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 오스만제국을 변절하고 연합국 측으로 넘어온 정치인이나 군인도 없었다. 알 파루키가 후세인에게로 몰려들 것이라고 약속한 강력한 비밀 군사조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세인의 병력은 영국 돈에 매수된 수천 명의 부족민이 전부였다. 후세인에게는 정규군도 없었다. 헤자즈와 헤자즈 부족민들이 사는 인근 지역을 벗어나면, 후세인의 봉기를 지원해줄 곳 또한 없었다." "결국 후세인이 아랍 봉기를 선언한 지 1년 뒤에는 데이비드 호가스가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상황이 되었다."(327-34)


5부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진 연합국


"행정부에 일어난 변화는 영국의 중동정책에도 우연치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동방에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애스퀴스와 그레이가 내각에서 퇴출되고, 자신의 중동관을 내각에 강요했던 키치너도 죽고 없어진 뒤, 키치너와 모든 면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로이드 조지가 총리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처음부터 동방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 변수로 보았다는 점에서 키치너와 달랐다." "중동에 관한 로이드 조지의 미래관은 많은 부분 기독교 백성을 학대했다는 이유로 오스만제국을 혐오한 그의 첫 정치적 스승이자 자유당 출신 총리였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튀르크 정부를 증오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반면에 그는 소아시아에 영토적 야망을 가진 그리스에는 호의를 보였고, 성지(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들의 열망도 지지했다. 다만 두 번째 경우는, 유대인의 조국이 세워지더라도 그것이 영국의 통치를 받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366-7)


"1917년 5월 전쟁에 혐오감을 느낀 프랑스군이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그간 편안하게 느꼈던 마지막 전시내각마저 붕괴했다. 전통적 지도력이 신뢰를 잃은 탓이었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총리 후보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소도 로이드 조지처럼 정치적 '고독자'였다." "클레망소는 그 무엇에 앞서 증오자였고,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한 것이 또 독일이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한 가혹한 강화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열린 보르도 국민회의에서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 클레망소였던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인물이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힘을 모아야 하고, 그러므로 프랑스가 식민지 사업에 힘을 분산시킨 것은 실책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에 병합시키려고 하는 프랑스 상·하원의원들에게는 그가 당연히 주적일 수밖에 없었다."(369-70)


6부 신세계와 약속의 땅


"로이드 조지는 1917년 5월 10일에 열린 하원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전쟁 중에 점령한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를 독일에 반환하지 않을 것이고,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도 터키가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그의 긴밀한 협력자마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각료들 중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로이드 조지는 마크 사이크스가 약속한 전후 중동에서의 프랑스 권리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이크스-피코 협정도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물리적 소유뿐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그는 1917년 4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에게 〈우리는 정복으로 그곳을 차지할 것이고, 이후에도 그곳에 계속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프랑스도 종래에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시사했다. 로이드 조지는 내각에서 유일하게 팔레스타인 획득을 시종일관 원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조국을 조성하는 안도 지지했다."(412-3)


"로이드 조지는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이익에 매우 중요하다는 논지를 펼쳐) 정부의 주요 민간인 각료들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전시내각의 레오 에이머리와 마크 사이크스는 전후에 독일이 오스만제국을 독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인도로 가는 길이 적국 수중에 떨어져 영국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튀르크와 독일을 격퇴하고 오스만제국의 남쪽 주변부를 차지하는 것이 첩경이었다. 내각이 개전 초부터 메소포타미아 병합을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아라비아도 독립을 주장한 현지 지배자들과 협상을 벌여 보조금도 주고 지원도 약속하여 친영파로 만들어놓았다. 그리하여 그 지역에서 취약지로 남은 곳은 이제 팔레스타인뿐이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다리로서 이집트에서 인도로 이어지는 육로를 가로막는데다, 수에즈운하와도 가까워 운하는 물론이고 운하와 연결되는 해로도 함께 위협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425-6)


"전시내각의 또다른 인물인 옴즈비 고어가 팔레스타인 농업연구소에서 아론손이 거둔 성과에 감격한 것은, 그것이 시온주의 논점의 핵심을 건드린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지 커즌이 의회에서 개진한 시온주의 문제도, 팔레스타인 정착을 원하는 수백만 유대인들을 부양하기에는 그곳의 땅이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아랍인 원주민들도 추가 정착민을 받을 여지는 없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나라를 제거하지 않고는 두 번째 나라를 세울 공간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아론손의 발견으로 그 논점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아론손의 연구대로라면 과학적 영농기술로 땅이 비옥해져 팔레스타인의 주민 60여만 명을 쫓아내지 않고도 수백만 명이 추가로 정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옴즈비 고어도 시온주의 유대인들이 중동의 아랍어권 및 여타 민족들을 도와 그 지역이 갱생되면, 사막이 다시금 번영을 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런던으로 돌아왔다."(429-30)


7부 중동 침략


"영국 지도자들은 중동 아랍어권 지역의 정복이 끝나갈 시점이 다가오자, 후세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1914년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및 다마스쿠스의 분리주의 지도자들과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기울였던 클레이턴의 노력도, 비무슬림 통치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이 저항에 막혀 좌초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마스쿠스가 영국군의 진군로에 포함돼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중동의 미래를 위해 연합국의 대의와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그곳 주민들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파이살이 연합국의 계획에 동의한 것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만 정부가 시리아에 즉각 자치를 허용함으로써 아랍 민족주의에 선수를 치려 했던 보고서들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영국은 시리아 지방들에서 후세인보다 한층 좋은 평판을 얻을 조짐을 보인 다마스쿠스의 토착 아랍 지도부에 맞서, 후세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빠질 수도 있었다."(503-4)


"마크 사이크스는 1918년 중반 7인위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영국의 의도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이크스의 외무부 상관들이 공식적으로 승인한 선언문으로도 새로운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사이크스의 필치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듯 그 선언문도 사용된 단어만 달랐을 뿐 아라비아 반도 이외의 아랍권 모두, 이런저런 유럽세력권이나 통치권에 포함되도록 만든 영국의 전후 중동정책을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이크스의 선언이 인정한 완전한 독립은 아라비아 반도에 국한돼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독립된 지역이거나 혹은 아랍인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지역들만 독립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1918년 11월 8일에는 마침내 중동에 토착정부들이 들어설 수 있도록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영국-프랑스 공동선언문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의 주장에 따라 아랍 '독립'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다."(506-7)


"외무부는 육군성으로 하여금 앨런비에게 새롭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게 함으로써, 전부터 징후를 보여온 정치적 논제를 계속 진행시켰다. 앨런비가 점령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된 적의 영토가 아닌 〈독립국 지위를 갖는 동맹의 영토〉로 취급하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외무부가 〈주요 지역들에 아랍 기를 게양하고 그것에 경례하는 것과 같은 특징적 혹은 형식적 행위를 함으로써 아랍의 토착 지배권을 인정하고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간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시를 내린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10월 1일 사이크스는 앨런비에게 군정 지역을 최소화하고, 프랑스의 역할도 그에 맞춰 축소시키라는 전문을 보냈다." "이렇듯 외무부는 앨런비에게 형식적으로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따르되 실제로는 다르게 행동할 것을 주문했고, 그 점에서 외무부의 조치는 더 많은 것을 원한 프랑스, 프랑스에는 아무것도 주고 싶어 하지 않은 파이살, 혹은 카이로 아랍부의 어느 곳도 만족시키지 못한 해법이었다."(512-3)


8부 승리의 떡고물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의 입김 아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오스만정부와 독일정부의 틈이 어느 정도나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1918년에도 그들은 독일이 아시아 북부 지역 점령을 끝내고, 이제는 중부를 탈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아시아 남부의 영국 입지도 뒤흔들 채비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전시에 팽배했던 관점, 다시 말해 독일이 세계제국을 건설할 야망을 갖고 있고, 그러므로 종전 뒤 아시아의 모든 지역은 독일의 거대한 노예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며, 아시아의 부와 천연자원 또한 독일 산업의 연료가 되어 종국에는 독일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관점과도 부합했다." "에이머리가 1917년 말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은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전쟁은 이제 문자 그대로 동방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국-독일 경계선을 결정짓기 위해 아시아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다.〉"(546)


"1918년 여름 전시내각 회의에서 영국군 참모총장은 유럽전의 승리가 1919년 여름에는 힘들고 1920년 여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 내각도 적군이 그토록 신속히 아니 별안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해, (적국들과의 휴전협정을 고려하거나 그 문안을 작성하는 등의)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고 실제로 며칠 뒤 영국정부의 현안이 되었다. 10월 1일에서 6일 사이에는 오스만제국 정부와 몇몇 튀르크 요인들이 강화를 타진해 오고,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는 독일이 윌슨 대통령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협상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영국의 전시내각은, 영국이 지배하기를 바라는 중동 지역이 행여 영국군에 점령되기 전 전쟁이 끝날까봐 안절부절 속을 태웠다. 레오 에이머리가 종전이 되기 전에 사실상 중동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영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스뫼츠와 참모총장을 닦달한 것도 그래서였다."(554-6)


"1919년 겨울 총리실은 영국 언론에 파이살의 아랍군이 앨런비 장군의 시리아 정복에 〈현저하게 기여했다〉는 것과, 그들이 〈앨런비의 군대에 앞서 시리아 내륙의 4대 도시(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 입성했다〉는 취지의 기밀 비망록을 배포했다. 비망록에는 파이살군이 헤자즈의 외국군이 아닌 원주민군으로서 시리아 도시들에 입성했으며, 〈그러므로 시리아를 해방시키는 데 조력한 아랍군의 대부분은 그 지방 원주민들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비망록의 취지는 아랍어권 시리아는 그들 스스로 봉기를 일으켜 해방되었고, 그러므로 (튀르크에 이어) 그곳을 다시 지배하려는 의도를 가진 서구 민주주의의 원리 또한 그곳과는 맞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실제로는 아랍인들이 기여한 부분이 〈지극히 미미〉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의 또 다른 주요 동맹인 파이살에게 불리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자, 파이살과 시리아의 대군이 그들 나라를 직접 해방시켰다고 주장한 것이다."(575-6)


9부 썰물은 빠지고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영국제국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중동과 여타 지역에서 점령한 영토를 추가하여, 과거 그 어느 때 혹은 세계의 그 어느 제국보다 광대한 대제국이 된 것이다.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이 큰 모험을 치르느라 지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시에 얻은 영토를 하나라도 더 부여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로이드 조지는 중동에 파견된 영국군만 해도 250만 명에 달하고 그중 25만 명이 죽거나 부상당한 반면, 갈리폴리 전투를 제외하면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미군 또한 중동에는 발도 디밀지 않았다고 하면서, 영국은 중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평화회의에서도 그는 108만 4000명에 달하는 영국 및 제국 병력이 오스만 영토에 주둔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을 제외하면 점령군에 의미 있는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없다는 점도 지적했다."(583-7)


"중동의 평화협상은 기본적으로 로이드 조지가 짠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 이는 미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나 혹은 소생하여 재무장한 독일이 제기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줄 세력으로 삼는 동시에, 이탈리아 및 프랑스와도 싸움을 붙여 어부지리를 챙기려는 두 가지 속셈을 가진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1918~1919년에서 1919~1920년으로 협상시점이 넘어가면서 미국이 영국의 동맹도 아니고 어느 나라의 동맹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미국이 세계정세와 '헝클어진 동맹관계'로부터 발을 빼려고 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동맹이 어려워지자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모색하여 예전과 반대되는 길을 걸을 요량으로, 그간 중동에서 취했던 반프랑스 정책을 철회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국-프랑스 동맹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손상을 입은 뒤였다. 결국 중동 평화협상은 출발도 어설프고 끝은 더욱 어설픈 것이 되고 말았다."(592-3)


"미국은 터키와 싸운 교전국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윌슨은 오스만과 관련된 협상에 참여했다. 그가 제안한 14개 조항이 오스만 문제의 타결에는 적용할 수 없었지만, 정치철학의 표현으로 간주되어 국제문제는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로이드 조지도 그것을 알고 우드로 윌슨이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방들의 안건을 심의하려고 하자, 시리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프랑스─윌슨의 14개 조항과 원칙에 반하는 위협이었다─로 그의 관심을 바꿔놓았다." "윌슨은 당연히 시리아인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아랍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파이살도 회의 참석자들에게, 그가 독립을 주장하는 아랍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은 배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주장에 대해 보이는 파이살의 이런 합리성은, 아랍인들의 독립 주장을 영국의 사주에 의한 속임수로 보고 그에 대해 강경노선을 고수한 프랑스의 클레망소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600-1)


10부 아시아를 덮친 폭풍우


"중동 지역에서 이윽고 분란이 시작되었다. 1918년에 시작된 독립의 요구가 1919년에 들어서는 소요로 발전해간 이집트를 시작으로, 표면상으로 이집트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인도 변경지에서도 1919년 전쟁이 발발했다. 아라비아의 영국 정책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와해되는 조짐을 보였다. 불행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당시 중동의 영국 당국에는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형국이었다. 트란스요르단만 해도 부족 간 투쟁으로 혼란이 초래되고, 서팔레스타인에서도 1920년 봄 유대인을 향한 아랍인들의 폭동이 일어나며, 1920년 여름에는 이라크에서 봉기의 불길이 타올랐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은 아마도 종전 뒤 (재정난으로 인해) 중동에 주둔한 영국군 병력이 충분하지 못해, 사방에서 도전해오는 적들의 기세를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629)


"전후 영국이 중동에서 갖고 있던 입지에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곳은 수십 년 간 영국이 '임시' 보호령으로 통치했고, 그곳의 영국 통치자들이 처음부터 아랍어권 사람들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통치를 좋아한다고 믿었던 이집트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국이 이집트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한 점에 있었다. 따라서 이집트 정치인들이 그 약속을 믿고, 1차 세계대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영국도 이제는 이집트에 독립의 일정을 제시할 때가 되었다고 여긴다고 해서 사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술탄과 이집트의 지도부들이 원하는 것은 완전한 독립이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에 많이 의존했던 영국으로서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집트 지도부와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여 영국은 결국 현지 정치인들의 동의 없이 군대의 힘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631-6)


"아프가니스탄은 인도 평원으로 이어지는 고개들이 있는 영국의 또 다른 전략거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도 1세기 동안 여러 차례 유혈낭자한 전쟁을 치르며, 적대국(러시아)이 그 험준한 산악왕국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1907년 영국-러시아 협정 체결로, 아프가니스탄이 영국 보호령임을 인정받음으로써 그 문제도 일단락된 것으로 여겨졌다." "재차 발발한 제3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종결짓는 라왈핀디 조약이 조인된 것은 1919년 8월 8일 오전이었다. 영국이 적대적 외세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왕국으로부터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보유했던 외교권을 철회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그런데 라왈핀디 조약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아프간 정부는 새롭게 얻은 자국의 독립을 볼셰비키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사용했다. 이렇게 영국이 지난 십수년 간 아프간을 보호령으로 삼은 결과 얻은 것은 우호가 아닌 원한이었다."(637-40)


"아라비아에서는 영국의 두 주요 동맹인 헤자즈의 왕 후세인과 나지드의 왕 이브 사우드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후세인의 지배권이 끝나고 이븐 사우드의 지배권이 시작되는 국경지대의 조그만 도시풍 오아시스들이었던 (알)쿠르마와 투라바에 집중되었다. 그곳들의 점유가 보기보다 중요했던 것은 너른 목초지와 더불어 부족들의 충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이븐 사우드는 선대로부터 18세기의 종교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와하브주의 신봉자였다. 1745년에 맺은 양가의 동맹관계도 두 집안의 잦은 혼인으로 더욱 돈독해졌다. 문제는 이 와하브주의자들(와하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와하비로 불렀다)이 그것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는 광신도로 보일 만큼 엄격한 청교도적 이슬람을 표방했고, 예리한 감각을 지닌 이븐 사우드가 와하브의 그런 광신적 에너지를 정치적 목적에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 있었다."(642-3)


"후세인이 자신의 권위가 침해당한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도 이런 청교도적 이슬람이 부근의 헤자즈 지방으로 스며들어왔기 때문이다. 정통 수니파였던 그에게 와하브주의는 교의적이고 정치적인 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근절시키기 위해 쿠르마와 투라바로 되풀이해서 군대를 보냈으나 가는 족족 패하기만 했다." "1921년 말에 이르면, 전투병력만 15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흐완('종교상의 형제들'이라는 뜻)을 선발대로 내세운 이븐 사우드군은 아라비아를 완전히 정복할 기세였다. 1920년 9월 20일에는 《타임스》의 중동 전문 특파원마저, 카이로의 아랍부가 후세인을 이슬람 칼리프로 만들려고 한 정책은 실패작이었음이 드러났다는 기사를 썼다. 그는 이븐 사우드가 헤자즈를 점령할 것이라는 예측도 했다. 그의 말대로 이븐 사우드는 4년 뒤인 1924년 헤자즈를 점령하고 후세인을 망명길로 내몰았다." "영국은 이렇듯 중동제국의 서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쪽 경계지에서도 더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644-5)


"한편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체결된 1919년 말엽 오스만제국에서 실시된 하원 총선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압도적 다수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힌 의원들은 하원이 소집되기도 전, 터키 내륙 깊숙이 위치하여 바다와 영국 함대의 대포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고, 서른여덟 살의 민족주의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이 새로운 투쟁기지로 삼은 곳이기도 한 앙고라(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에 모여들어, 민족계약National Pact으로 알려진 케말주의적 정치원리가 담긴 선언문을 채택하여 열화와 같은 대중의 성원을 받았다." "1920년 1월 중순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하원이 소집되고 1920년 1월 28일에는 하원이 비밀회의를 열어 민족계약의 채택을 의결한 뒤 2월 17일 대중에 그 사실을 공표했다." "20세기의 정치적 논제가 유럽 주변 대륙들에 대한 유럽 지배의 종식에 있었다면, 오스만 의회의 독립선언이야말로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만했다."(646-7)


"앙고라에 수립된 케말의 터키정부가 처음 결정한 사항은 러시아로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 간에는 우호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조약)1921년 3월 16일에 조인된 모스크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는 1년 여의 기간이 걸렸다." "당시 스탈린은 인종문제와 국가통제인민위원이었다. 그랬던 만큼 볼셰비키 이데올로기보다는 러시아의 국가 이익을 우선시했을테고, 그래서 케말이 (볼셰비키 운동에 적대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것과는 별개로) 영국에 손상을 줄 수 있다고 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 현실주의적 아니 냉소적 볼셰비키였던 그로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케말을 지원할 만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례 없이 많은 양의 소비에트 자금과 물자가 반볼셰비키 민족주의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터키 국경지대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외국의 정치운동에 제공한 최초의 중요한 군사원조였다."(649-50)


"시리아에서는 세 개의 주요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메소포타미아 출신의 아랍계 오스만군 장교들로 구성되었던 만큼 당연히 메소포타미아 지방들의 미래를 관건으로 삼은 알 하드,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이어서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에게 해준 약속을 철회하도록 압력 넣는 것에 전력투구한 반시온주의 조직인 아랍 클럽, 세 단체들 중 명성이 가장 높았던 알 파타트(청년 아랍협회)가 그들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1919년 중반 소집되기 무섭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냈다.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이 포함되는 대시리아 독립국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방식, 혹은 프랑스의 요구에 맞서 미국, 영국, 시온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파이살의 계획과는 상충하는 요구사항이었다." "1920년 1월 말에는 호전적 민족주의자들이 시리아 의회를 장악한 채 (프랑스의 느슨한 위임통치를 인정한) 파이살-클라망소 협정을 부결시켰다."(658-60)


"그러나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의 입지와 파이살의 입지 모두 영국이 없으면 무너질 허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7월 26일에는 프랑스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7월 28일에는 파이살이 망명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리아를 몇 개의 하부 지역으로 나누었다. 지금의 레바논이 된 대레바논도 그중 하나였다. 1920년 8월 1일 구로 장군이 선언한 대레바논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프랑스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명시된 곳과도 대체로 일치했다. 그곳에는 옛 오스만제국의 한 지방이었던 레바논─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마론파 기독교도와 전통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드루즈파의 중심지─외에 해안가 도시들인 베이루트, 트리폴리, 시돈, 티레, 그리고 레바논 내륙의 상당 지역에 걸쳐 있던 알비카(베카) 골짜기도 포함되었다. 기독교도 근거지인 레바논에 생경한 지역들이 추가된 것이고, 그에 따라 다수의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인구도 그곳으로 유입되었다."(662-4)


"프랑스 정부는 시리아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부근의 팔레스타인이 '시온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외교와 선전운동도 함께 펼쳤다." "하지만 1920년 프랑스가 영국의 이익에 직접적 위협을 가한 곳은 그곳들이 아닌, 장차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75퍼센트 정도를 접하게 될 요르단 강 동안의 인구가 적은 트란스요르단이었다. 부족적 삶과 구조로 보면 아라비아에 가깝고, 역사적으로는 많은 지역이 성서의 땅에 속해 있었으며, 과거 한때는 아라비아의 로마 속주에 속해 있기도 했던 복잡다단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가을에는 앨런비 장군이 그곳을 점령한 뒤 파이살이 통치하는 무능한 다마스쿠스 정부에 일임해 두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곳은 방치돼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실책이었다. 프랑스가 다마스쿠스에서 파이살 세력을 몰아낸 뒤 파이살의 계승자를 자임하며 트란스요르단의 지배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666-8)


"1917~1918년 앨런비 장군의 점령에 이어 팔레스타인에는 군정이 수립되었다. 그와 더불어 평판 나쁘고 수행하기 힘든 짐을 떠맡은 것에 대한 영국정부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었다. 벨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조국을 창설하는 문제를 두고 이해 당사자들끼리 군정 기간 내내 실랑이를 벌인 탓이다." "클레이턴만 해도 시온주의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전 세계 유대인들의 문화·정서적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확장하되, 유대인 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서의 영국 통치령으로 받아들였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영국군 장교들은 심지어 그런 한정된 시온주의조차 인정하지 않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을 지지했다." "반면에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벨푸어선언이 영국정부의 확고한 정책이고 따라서 반드시 실행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군말 없이 그 정책을 따를 것이고, 나아가 그것의 이점에도 눈뜨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672-3)


"로이드 조지는 바스라와 바그다드 그리고 모술에 대한 통치방법을 구상할 때, 그 세 곳이 단일 정치체로 통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라크(영국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들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한 아랍식 명칭)는 단일 정치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이라는 뜻)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모술을 구태여 이라크에 포함시키려 한 것도, 그곳이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유전을 보유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윌슨은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갈등을 메소포타미아의 근본적 문제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200만 명에 달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시아파 무슬림이 소수파인 수니파 무슬림의 지배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수니파 지배가 수반되지 않은 정부 형태 또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구나 윌슨의 보고에 따르면 이라크 주민의 75퍼센트는 〈정부에 한 번도 복종해본 적이 없는〉 부족이었다."(679-80)


"페르시아의 스러져 가는 카자르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무력한 젊은 군주 아흐마드 샤는 목숨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형편인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친영파 인물을 총리에 앉혀두는 조건으로 영국정부의 정례 보조금을 받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커즌의 지휘 아래 테헤란의 영국 공사와 페르시아 총리 및 그의 두 동료 관리들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에서 페르시아 대표들은 조인의 조건으로 영국에 13만 파운드를 요구하여 몰래 받아 챙긴 뒤 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영국-페르시아 협정은 이런 협잡 끝에 1919년 8월 9일 조인되었다." "그러나 1921년 2월 21일 대령 레자 칸이 카자크 병력 3,000명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군, 권력을 탈취하고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지 고작 닷새밖에 안 된 2월 26일 테헤란의 신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세 이슬람 국가들(터키,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반영 동맹국이 되었다."(689-96)


11부 러시아, 중동에 돌아오다


"소비에트가 페르시아 민족주의를 조장하고, 터키 민족주의를 후원하고, 이라크 봉기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들 중 어느 것도 그들이 직접 고취하거나 지휘하지는 않았다. 중동 일대를 휩쓴 봉기가 볼셰비키 러시아가 연루된 광범위한 국제 음모 때문에 일어났다고 믿은 것은 영국의 망상이었다. 중동 사태는 일련의 어설픈 봉기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개별적 혹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자생적으로 발생했다. 따라서 그 운동들을 이용은 했을망정, 볼셰비키와 볼셰비키주의가 그 운동들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 것은 없었다." "영국 관리들은 종전 뒤 중동에서 일어난 봉기들을 오래된 음모자들이 꾸민 사악한 음모로 규정했다. 영국 정보부는 볼셰비키와 국제 금융, 범아랍주의와 범튀르크주의, 이슬람과 러시아도 거대한 음모의 공범자들인 국제적 유대인 공동체들과 독일-프로이센이 이용한 재료로 보았다."(701-3)


"1919년 외무장관이 된 조지 커즌은 러시아와의 거대한 게임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답게 러시아의 세력 팽창에 맞서 영국의 군사적 입지를 높여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남카프카스와 북부 페르시아에도 확고한 방어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커즌과 외무부 사무차관 하딩은 중동의 어느 한 지역을 러시아에 빼앗기면 도미노효과로 나머지 지역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다 나중에는 인도마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인도장관 에드윈 몬터규와 인도 부왕 쳄스퍼드 남작 3세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위협이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치중될 것이고, 그러므로 러시아와의 경쟁도 이슬람권 아시아 일대의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영국은 중동의 민족주의 세력을 러시아로 돌아서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상황에 영국군까지 주둔시키면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710-1)


12부 1922년의 타결


"1921년 2월 식민장관으로 취임했을 당시 처칠에게는 이미 적은 비용으로도 중동을 지배할 수 있는 광범위한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난날 육군장관과 공군장관을 겸직했을 때도 그는 비행기와 장갑차로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여, 중동의 유지비를 줄이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 방비가 잘된 공군 기지 몇 곳만 있으면 〈병력과 돈만 잡아먹는 기나긴 병참선 없이도〉 영국 공군은 〈보호령들을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록된 것도 그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처칠도 인정했듯이 외부의 침략에서 메소포타미아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의 '내적 안정 유지'를 유일한 목표로 삼은 전략이었다. 처칠이 중동에서의 영국 문제를 외부가 아닌 내부, 내적 분란에서 찾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대에 뒤쳐진 제국주의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처칠의 전략은 토착민의 봉기 진압에 주안점을 두었던 만큼, 동의가 아닌 강압으로 아랍인을 통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51-2)


# 카이로 회의의 네 가지 기본 안건(1921년 3월 21일)

1. 메소포타미아(이라크) 문제 : 파이살에게 왕위를 부여하며, 원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왕위를 제공한 것처럼 꾸민다.

2. 쿠르드족 지역 문제 : 이라크 편입 또는 쿠르디스탄 독립 안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여 현행 독립체 상태를 유지한다.

3. 트란스요르단 문제 : 파이살의 형 압둘라를 임시 총리로 임명하여 반프랑스 운동과 반시온주의 운동을 억제한다.

4. 이븐 사우드 문제 : 하심가 왕족(파이살, 압둘라)의 승승장구에 반발할 여지가 있으므로 연간 보조금을 인상해준다.


"파이살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위임통치령에 반대하고 이라크('뿌리가 튼튼한 나라'라는 뜻)의 정식 독립을 요구하여 영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라크와 영국의 관계를 국제연맹의 결정이 아닌, 양국 간의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에 대해 영국은 국제연맹의 승인 없이 이라크의 지위를 바꿀 법적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다고 맞섰다. 다만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것이면 조약 협상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파이살은 위임통치령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조약에 포함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런 식으로 협상은 런던에 분노와 좌절을 안겨주며 1년 넘게 지지부진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라크와 이집트가 얻은 것은 제한된 자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국가의 지위는 갖게 되었다. 이라크와 이집트 모두 정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했다. 영국에 의해 임명된 군주들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것이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64-6)


"압둘라를 트란스요르단 지배자로 남겨둠으로써 파생되는 문제는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처칠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것은, 그로 인해 영국이 사우드가와 하심가가 벌이는 아라비아의 극렬한 종교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 식민성이 트란스요르단에 잠정적으로 취한 일련의 행정적 조치들로 그곳은 영속적인 정치적 실체로 굳어져 갔다. 아라비아 왕자가 외국 수행원들과 암만에 정착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라는 복잡한 통치체제 속에 항구적 요소로 뿌리내린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본래 그곳의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간 되풀이된 제안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영토의 75퍼센트가 이미 그곳 사람도 아닌 아랍 왕조에 돌아가 버린 형국이었다. 훗날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트란스요르단은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분리된 개별 정치체로 서서히 발전해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요르단이 지난날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는 사실마저도 잊을 정도가 되었다."(772-3)


# 사우디아라비아 왕국과 요르단 하심 왕국의 대립


"1921년 아민 알 후세이니가 예루살렘의 대 무프티(최고의 법률적 권위자) 겸 팔레스타인 무슬림 지도자가 되었을 때 리치먼드는 그로 인해 시온주의가 큰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타격을 받은 쪽은 오히려 아랍인들이었다. 대 무프티가 아랍인들을 피투성이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감으로써, 시온주의에 가하려던 것보다 오히려 더 끔찍하고 파괴적인 피해를 그들에게 입힌 탓이었다. 아만 알 후세이니는 '모 아니면 도' 식의 모험가였다. 그러다 보니 아랍인-유대인 문제도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한쪽이 쫓겨나거나 소멸되어야 끝장이 나는 극단으로 몰고 가 아랍 영토와 아랍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런 극단적 행보를 이어가던 끝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결국은 나치 독일에 가서 아돌프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랍권 팔레스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민 알 후세이니와 지도자 자리를 놓고 겨룬 여러 명의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다."(779-80)


"아랍 지도부와 시온주의 지도부는 벨푸어선언을 구체화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위임통치령 내용과 시온주의에 대한 영국의 공약이 대폭 축소된 영국정부의 백서도 거부한다는 전문을 런던 식민성에 보낸 아랍회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일단 그것으로 유대인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발전을 이루어 자치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틀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영국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온주의 지도부는 시간이 가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처칠이 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아랍회의 집행위원회는 시간이 가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처칠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거부한 것이다. 1922년 7월 22일에는 국제연맹이, 영국이 요르단 강 서안에 (처칠이 고쳐 쓴) 벨푸어선언을 실행하도록 명시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을 최종 승인했다."(791-2)


"오스만제국의 아랍어권 지역은 튀르크의 지배를 더는 받지 않게 되었다. 동쪽에 메소포타미아에는 아라비아 왕자(파이살)가 지배하고 쿠르드족,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유대인 인구가 뒤섞인 신생국가 이라크가 세워졌다. 독립국의 외양은 갖췄으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이라크에 접한 시리아와 크게 확대된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강 동안에는 앞으로 입헌국가 요르단으로 독립하게 될 신생 아랍국이 수립되고, 요르단 강 서안은 유대민족의 조국이 들어설 때까지 당분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따라서 처칠이 원했던 오스만제국의 재건된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재편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식민장관 처칠이 설정했던 주요 목표들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가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비용절감을 관철시킨 것만 해도 그랬다. 경제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확립한 것도 처칠이 거둔 큰 성과였다."(795)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하나는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동 분규가 여타 지역의 분규와 비교하여 특별했던 것은,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863-4)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본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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