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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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정 러시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문화적 발전은 〈인텔리겐치아〉의 대두였을 것이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들어온 이 용어는 교육받은 사람들 혹은 심지어 이상적인 삶에 헌신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육받고 지적인 일에 종사하는 개인들로서 처음에는 계몽사상, 그다음에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절대적인 원칙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억압적이고 탄압적인 정치 및 사회 질서라고 생각한 것에 반대하던 사람들을 의미했다." "게르첸, 벨린스키, 바쿠닌 같은 〈서구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중심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이유로 전제정치, 농노제, 그리고 인권이 부재하는 현실을 반대했고, 모든 개인들에게 존엄한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질서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호먀코프, 키레옙스키, 사마린과 같은 〈슬라브주의자들〉도 농노제, 시민적인 자유의 부재, 개인 생활에 대한 정부의 침해에 반대했으나, 〈정신적인 공동체〉라는 원칙의 이름으로 그런 태도를 취했다."(548-9)


"농민들은 때때로 일종의 노예제 수준까지 다다른 농노체제에 직면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농노들은 이동이 금지되었고, 노동 및 화폐 지대가 어느 정도 혼합된 지대를 지주들에게 납부해야 했다." "특히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농민들이 일으킨 지방의 〈소요〉를 정부가 기록으로 남겼다. 알렉세이 통치기의 스텐카 라진 반란, 표트르 1세 통치기의 블라빈의 반란, 예카테리나 2세 때의 푸가초프의 봉기처럼 대중 봉기도 때때로 발생되었다. 이런 반란은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불렸는데, 지도자들은 모두 카자크(Kazak)였다. 카자크들은 한때 국경지역의 약탈적인 부족들이었는데, 모스크바국과 표트르 이후의 제국이 확대됨에 따라 그들의 자유와 자율성은 축소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푸가초프의 선언문을 읽고는, 그것을 〈공중누각〉이라고 일축했다. 그러한 〈누각〉─완전히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에 대한 꿈─은 러시아의 삶에서 오랫동안 실제로 남아 있었다."(550-1)


▶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자신의 대관식 때 모스크바의 귀족들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농노제가 아래로부터 폐지되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위로부터 그것을 폐지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농노해방의 도래와 관련된 놀라운 측면은 그 과정이 공개되었으며, 공식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그 계획을 발표했고 토론과 제안을 권장했는데, 이것은 글라스노스트(glasnost)라고 알려진 공개와 개방의 과정이었다. 귀족 협의회는 개혁이 실시되는 방법에 관해서 논의하도록 요청받았고, 때때로 회의 진행 과정을 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1861년 2월 19일의 법을 통해서 농노제는 폐지되었다. 그때 이후로 러시아인들이 삶에서 인간의 예속상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개혁이 농민들에게 다른 사회계급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들은 여전히 인두세를 내야 했고, 농민공동체에 결박되었으며, 관습법에 기반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557-9)


# 그 외의 "대개혁" 조치들

1. 지방정부의 기구들인 젬스트보 의회와 상임 위원회 설치

2. 사법부를 행정부에서 분리하여 사법부의 독립성 보장

3. 군 복무 의무가 하층계급에서 모든 러시아인으로 확대

4. 국립은행 창립, 교육과 검열 분야의 자유주의적 조치


"일부 관료층과 러시아 귀족들은 개혁 조치에 단호히 반대했다. 농민 봉기, 대학생 소요, 1862년에 일어난 원인불명의 화재, 1863년의 폴란드 반란, 1866년의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시도 등 특수한 상황이 여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변화를 어디에서 멈출지에 대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대개혁〉은 러시아의 전반적인 발전 및 당대의 지적 분위기와 함께 그 이상의 개혁을 위한 압력을 낳았다. 입헌군주체제를 용인하고 몇몇 다른 양보를 했더라면 대부분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제국의 안정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렇게까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더 이상의 변화를 주장하던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분투했다. 〈대개혁〉은 크림 전쟁으로 구체제가 완전히 파산되었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야 실시되었다."(567)


"1870년대 무렵이 되면, 러시아 혁명운동을 이끌던 본질적으로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허무주의의 신조는 인간의 총체적인 해방에 강조점을 두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자들〉에게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프로그램을 부여했던 '인민주의'라는 새로운 신조와 결합되고, 그것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허무주의자들이 그들의 해방과 독립 그리고 자신들 주위의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우월감에서 기쁨을 느꼈다면,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경우에 농민들을 의미하는 대중에게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들은 무지크(muzhik) 즉 농민들이 땀, 그리고 심지어 피의 희생으로 자신들이 받은 교육을 되갚고, 인민들을 좀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를 원했다. 덧붙여 말하자면, 지식인들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환경 때문에 가질 수 없었던 도덕적 순수성과 정직성─그들이 원한다면 진리─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인민들 가운데에서 발견하기를 희망했다."(572-3)


"인민주의자들의 운동은 1873년, 1874년, 그 직후의 몇 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 1873년에 제국정부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러시아 대학생들에게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때, 그들 중 상당수의 학생들은 러시아에 있던 수많은 다른 젊은 남녀들과 함께 〈인민 속으로(vnarod)〉 가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시골 마을로 갔으며, 그중에 약 2,500명이 농촌의 교사, 서기, 의사, 수의사, 간호사, 점원이 되었다." "특히 자발적이고 근본적인 대규모 인민혁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바쿠닌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단지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라브로프의 제자들은 점진주의의 필요성, 즉 대중이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이전에 교육과 선전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다." "또다른 인민주의 이론가인 트카초프와 헌신적인 혁명가인 네차예프는 농민들이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혁명가들 스스로 정부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73)


#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정복은 알렉산드르 2세 통치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어, 1865년과 1876년 사이에 일련의 과감한 군사 원정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러시아인들은 코칸트, 부하라, 히바의 칸국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1881년에는 카스피 해 너머 지역을 병합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팽창한 과정은 다른 지역의 식민지 전쟁 및 미국의 서부 확장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중앙아시아는 상업적인 이유들 때문에, 원료 중에서도 특히 면화의 공급원이자 러시아의 제조품을 위한 시장으로서 매력적이었다. 그곳으로의 팽창은 국경을 안정시키고 약탈적인 이웃 민족들로부터 국경지역에 있는 러시아 정착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안보상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서구 제국주의와 아주 유사한 사고방식이 러시아에서 발전되었다. 특히 문명국가인 러시아가 후진 민족들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질서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견해가 발달했다."(581)


▶ 알렉산드르 3세 통치기(1881-1894), 니콜라이 2세 통치기(1894-1917)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고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자,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정치 개혁의 길을 배격했다." "정부는 〈정교화-전제정치-국민성〉이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었는데, 이것은 시대 상황에 부합되지 못했다. 정교회는 다민족 제국에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거의 결속시킬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에서 종교가 더 이상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좀더 개인적이고 가변적인 형태의 신앙과 가치라고 생각하게 된 많은 형식적인 정교도 러시아인들조차도 통합시키지 못했다. 전제체제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에 훨씬 더 시대착오적인 것이었으며, 진보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가능성이 더 컸다. 여전히 차르와 인민 사이가 사랑과 헌신으로 신비롭게 결합되었다는 가부장적인 이상에 기반을 두는 민족주의는 일반적인 러시아인들의 정치적·사회적 욕구를 거의 충족시키지 못했다. 민족주의는 다민족 국가를 분열시켰을 따름이다."(583-4)


"니콜라이 2세는 차르의 무제한적인 개인 권력만이 러시아의 힘과 안정과 심지어 국가로서의 진보를 보증해준다고 명백히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도덕적인 능력이었으며, 정교회와 민족성과 결합된 전제정치였다." "늘 그렇듯이, 그는 〈차르의 심장은 신의 손안에 있다〉라는 전통적인 속담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의 통치자는 국민들과 거의 신비로운 사랑이라는 특별한 유대를 맺고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1905년에 대규모 대중 소요사태를 당해서 전국적인 대표권을 가진 의회 설립 요구에 동의할 때조차도, 〈독특한 러시아적 원칙에 부합되는 질서의 기반 위에 서 있는 땅의 사람들과 짐 사이의 교감, 차르와 모든 루시 사이의 연합이 옛날 시대와 똑같이 확립되도록 하라〉고 말했다." "니콜라이의 형편없는 판단력과 황후 알렉산드라의 사악한 영향력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징조는 라스푸틴처럼 믿을 수 없는 인물이 국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치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590-2)


"1905년 혁명은 정부의 충격적이고도 억압적인 폭력 행위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피의 일요일〉이라고 알려지게 된 이 사건은 제국 전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정치적·사회적 격변을 초래했다." "(행진을 주도한) 가폰의 노조는 노동자들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멀어지도록 회유하고, 저렴한 찻집과 교화적 내용의 강연 그리고 일상적인 물질적 필요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전제정치에 대한 노동자들의 충성심을 육성하기 위한 경찰의 노력의 일환으로 1904년에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서 생겨난 조직의 모임은 사회비판, 도덕적 열정, 신성한 목적의 혼합이라는 특징을 가졌으며, 점차로 노동자들을 돕고 옹호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충성스런 신민으로서, 그에게 시정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겨울궁전 쪽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대량 학살로 인하여 분노가 크게 분출되었고, 혁명운동이 또다시 힘을 얻었다."(606-7)


"혁명운동은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지속된 대규모 총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이것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이자 가장 성공적인 파업으로 묘사되었다." "10월 총파업 동안에, 그리고 파업을 지도하기 위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소비에트 혹은 평의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은 그 당시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미래의 선구적 조직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정부는 기본 활동이 마비되었고, 마침내 반대 세력이 엄청난 규모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깨닫자 결국 항복했다." "10월 선언을 통해서 로마노프 가문의 제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 사건은 반정부 세력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개혁이 충분한지의 문제를 놓고 갈라졌다. 좌파 자유주의 입헌민주당원들은 정부의 양보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다." "반정부 세력이 이렇게 분열되면서 1905년은 유혈 투쟁 속에서 끝났다. 겨울 동안 토벌 원정대와 즉결 군사재판을 통해서 많은 문제 지역에서 질서가 회복되었다."(607-9)


"1860년대의 급진주의 세대들, 즉 투르게네프의 〈아들들〉은 종종 모호한 급진적 변화 프로그램의 이름으로 기존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권위를 배격했던 〈허무주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을 발견했다." "허무주의는 젊은 급진파 러시아인들을 기존 질서에 대한 충성심에서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인격의 총체적인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었다." "보다 정교한 사회적 신조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등장해서 소비에트 시대까지 러시아 급진주의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나로드니체스트보(narodnichestvo), 즉 인민주의의 형태로 갑자기 등장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보면, 인민주의는 인민에 대한 헌신,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 농민공동체의 힘에 의지해서 러시아가 자본주의의 해악을 피할 수 있는 각별한 역사적 기회를 가졌다는 신념, 사회혁명이 정치적 변화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주장 등으로 정의되었다."(676-7)


"러시아 사상과 문화에서 발생된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 중의 하나는 최고 단계에 이른 철학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신적인 것과 종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유물론에 대한 불만과 종교적·신비주의적 인식에 대한 매력은 아주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도 도달했다. 1908년~1909년 무렵에 나중에 소련의 계몽인민위원이 된 루나차르스키와 작가인 고리키를 포함한 일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건신론(建神論)〉이라고 알려진, 다시 종교로 관심을 돌린 마르크스주의를 정교하게 만들어냈다. 그들은 차가운 합리주의, 유물론,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결정론이 대중의 혁명운동에 영감을 주기에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을 위해서 〈신화〉의 힘을 되찾으려면 잠재의식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이 있던 곳에 인간성을 가져다놓았지만, 종교적인 열정, 도덕적 확실성, 악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의 약속 등을 유지하는 새로운 신앙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682-4)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볼셰비키가 한 약속을 아주 호소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또한 사회의 불만과 분노가 러시아의 허약한 신질서를 훼손하지 않았더라면, 레닌의 주장은 1917년의 역사에 대한 하나의 보충 설명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물론 질서가 무너지게 된 상당 부분의 원인은 계속된 경제적 붕괴, 특히 도시와 전선에서의 최악의 물질적 상황이었다. 기존의 정치 및 사회적 권위에 대해서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던 많은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유일한 해결책은 자신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신들이 더욱 많은 권력을 갖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하층계급 러시아인들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불신했고, 2월 이후로 혁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을 〈인민의 적〉이자 러시아와 혁명의 〈배신자〉라고 낙인찍기까지 했다." "혁명은 〈굴욕과 모욕〉을 끝장낼 것이며, 일반인들에게 부여되는 〈존중〉에 기반한 사회 및 정치 질서를 창출할 것이라고 말해졌다."(699-702)


제6부 소비에트 러시아


"레닌과 볼셰비키는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명확한 청사진도 없이, 혹은 심지어 명확한 통치전략도 없이 권력을 장악했다. 레닌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인민의 〈에너지, 주도력, 단호함〉을 발휘함으로써 〈공산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혁명이라고 말했다. 1917년 11월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모든 노동하는 인민들〉이 〈당신들 스스로 이제 국가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어느 누구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직접 일을 독자적으로 해나가도록〉 요청했다. 동시에 레닌은 〈혁명이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권위주의적인 일〉이라는 점을 부단히 상기시켰으며, 10월 이후에는 엄격한 통제, 무자비한 억압, 강철 같은 규율, 심지어 독재에 대해서도 종종 명백하게 말했다." "이런 모순되는 언어는 적어도 정권 초기에 인민의 주도권과 창의력에 대한 진지한 이상을, 지도력과 규율 그리고 중앙 통제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결합시켰던 모순된 정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720-1)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소비에트 초기의 많은 정책은 러시아를 변모시키려는 볼셰비키의 중앙집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접근 태도를 보여주었다. 1917년 11월에는 언론이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많은 〈부르주아〉 신문과 온건한 사회주의 신문들이 폐간되었다. 경제를 중앙에서 통제하기 위해서 은행과 대규모 공장은 즉각 국유화되었고, 대외무역은 국가가 독점했으며, 12월에는 국가의 경제계획을 발전시키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17년 12월에 정부는 무시무시한 〈체카(Cheka)〉를 설치했는데, 이것은 10월 이후에 흔히 발생하던 일상적인 폭력과 약탈, 그리고 반체제 활동 혐의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때부터 정치경찰은 소비에트의 생활에서 기본적인 현실이 되었다. 정부는 자유주의적인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들의 정당〉이라고 선포했으며, 심지어 많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위험한 반대세력이라고 간주했다."(724)


"국내 전선에서 전시 공산주의는 대체로 소비에트 체제가 외부의 적들과 벌이고 있던 격렬한 싸움의 결과로서 엄격하게 실시되었다. 국가는 1918년 여름부터 대규모의 잔혹한 전면 내전에 돌입했다. 소위 백군(白軍)이 들고 일어나서 적군(亦軍)에 의한 러시아 통치에 도전했던 것이다." "많은 외국들은 러시아에 무장 병력을 파견하거나 지방의 반정부 운동과 정부들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10월부터 1920년 1월까지 소비에트 러시아를 봉쇄함으로써 개입했다." "이것은 볼셰비키가 더 큰 결단력과 경계심을 갖도록 자극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전시 공산주의는 무절제한 유토피아주의의 시기였다. 급진주의자들은 계급 없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오랫동안 꿈꾸어오던 진정한 〈공산주의〉로 갑작스럽게 도약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다시 볼셰비즘 안에서 급진적인 해방과 지독한 권위주의가 이상하지만 지속적으로 뒤엉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725-6)


# 적군의 승리 요인

1.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들 간의 부실한 협력 관계

2. 볼셰비키가 주요 도시, 인구, 산업체, 군수품을 장악한 상황

3. 반볼셰비즘 외에 공통분모가 없던 백군 내부의 분열

4. 백군의 비러시아 민족들에 대한 반反분리주의, 농민들에 대한 반反토지개혁 성향


"전제정치가 붕괴된 직후에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1917년에 핀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에는 에스토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자캅카스 연방(이후에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해체됨)이 그 뒤를 따랐다. 1917년 12월에 개최된 제4차 중앙아시아 이슬람 교도 대회는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치를 선언했고, 중앙아시아에는 다양한 공화국이 등장했다. 폴란드 및 리투아니아와는 달리, 이런 국가들은 역사상 처음부터 독립국가들이었다.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는 제국이 분열됨으로써 국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지만, 볼셰비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투쟁하면서도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가진다는 원칙를 고수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 정신에 따라서 제국의 영토를 한데 묶어놓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민족의 독립을 주창하던 사람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라고 책망받았다."(733)


"스탈린이 자신의 연합 세력 및 숭배 세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 접근법이 가진 상호 연관된 두 가지 특징 덕분이었다. 첫째로, 그는 보통의 공산주의자 대중을 위하여 이데올로기를 단순화했고, 심지어 신성하게 만들었다." "레닌 사후에, 스탈린은 레닌의 저서를 도그마로, 반대 의견을 이단으로 간주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로, 스탈린은 일관되게 낙관론, 희망, 신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트로츠키가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의 성공은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혁명이 발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을 때, 스탈린은 〈영구혁명론〉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감〉을 조금도 보여주지 못하는 〈영구절망론〉이라고 조롱하면서, 〈일국사회주의론〉을 제시했다." "스탈린의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편향을 비난했던 제15차 당대회는 신경제정책의 종식과 제1차 5개년 계획의 시작을 의미하는 조치를 채택했다."(748)


"제1차 5개년 계획은 분명히 경제에 대한 것 이상이었다. 〈위대한 전환〉이라고 불린 그것은 사회의 모든 측면을 변모시키려던 혁명이었다. 1928년에 샤흐티 석탄광산의 기술자들이 사보타주를 벌였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사건은 제국주의자들과 음모를 꾸몄다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공개재판의 시발점이었고, 계급투쟁이 재개되었음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선동 조치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산주의자들은 기존 전문가들에게, 특히 그들이 〈이질적인〉 계급 배경 출신이라면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도록 격려받았다. 비공산주의 및 비노동자 출신의 기술자, 현장감독, 교사, 언론인, 국가 공무원, 작가 등에 대한 숙청의 폭풍이 몰아쳤다. 〈문화혁명〉이라고 불렸던 이것은 국가와 당이 착수했으나, 소비에트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그 혁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벌어진 숙청으로 인하여, 노동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생겼다."(758)


"최근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 체제는 단지 철권 통제, 억압, 공포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사회주의적 건설을 위한 열정, 〈부르주아〉 전문가들에 대한 계급적 적대감,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위계질서에서 상승하려는 개인적인 야망 등은 체제의 동맹 세력과 지지 세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여기에 구체적인 보상도 있었다.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이 종료된 이후에, 동원 자체를 위한 동원은 물질적인 혜택도 약속하는 경향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면,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은 새로운 의복, 자전거, 축음기, 라디오, 자기, 리넨 제품, 피아노 등을 보상받았으며, 그들이 당 집회나 생산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파티와 무도회에서 여가를 보내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다. 실제로, 공공생활에서 행복은 널리 확산된 주제가 되었다." "신문은 적들과 숙청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매력적인 새 모자와 신발 그리고 공원에서의 무도회와 축제를 위한 광고로 가득 차 있었다."(769-70)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는 비록 많은 경우에 뜻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거나 단지 실패에 그치기는 했지만, 많은 분야에서 의미심장한 계획을 담고 있었다. 그의 최우선 순위는 농업이었다. 농업 분야에서 그는 당이 생산에 좀더 적극 관여하도록 독려함으로써 행정을 재조직하고 〈처녀지〉 캠페인, 육류와 우유 캠페인 등 다양한 영웅적인 〈캠페인〉을 통하여 생산에 자극을 주려고 시도했다. 그는 또다시 행정적인 재조직과 캠페인을 통해서 소비재의 더 많은 생산과 좀더 나은 산업 경영을 장려하려고 시도했다. 대규모 주택건설 붐도 시작되었다." "아마도 가장 중대한 개혁은 문화의 탈스탈린주의화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과 환멸감이 급속히 뒤따라 몰려왔다. 경제 발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탈스탈린화 혹은 좀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소련 생활의 어느 정도의 〈자유화〉는 창의적인 공산주의의 에너지를 분출시켰다기보다는, 사실상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불안정을 초래했다."(819-21)


"흐루쇼프의 후계자들은 아주 다른 정신과 목적을 가지고 통치했다. 지도 원칙은 변화가 아니라 안정이었으며, 혁명이 아니라 질서였다. 1964년에 권력에 오른 새로운 집단지도부는 1917년 이후에 성년이 된 사람들로서는 첫 번째 통치자 세대였다. 그들은 혁명기에 어린이였고, 대부분 기술교육을 받았다." "대체적으로, 그들은 안정된 권력과 효율적인 경제발전 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실용적인 인물들이었다." "새로운 지도자들─특히 당수 브레즈네프, 수상 코시긴, 당 이론전문가 수슬로프, 최고 소비에트 의장인 포드고르니 등의 인물들─은 흐루쇼프의 대부분의 개혁 조치를 되돌리기 위해서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행정 재편은 취소되었다. 직책의 임기를 제한하고 관료제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장려하려는 급진 사상은 관료에 대한 직업적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대체되었다." "지방의 주도권에 박차를 가하려던 경제적 실험은 모스크바의 중앙 통제로 대체되었다."(822-3)


"1982년 11월 10일,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68세의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직을 맡은 것은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안드로포프는 어느정도의 세련미와 비범한 지성을 갖춘 사람으로서, 1982년 5월에 당 서기국에서 일하기 위해서 교체될 때까지 15년 동안 정치경찰인 국가보안 위원회의 수장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브레즈네프 치하의 정체(停滯)와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떤 안드로포프는 고심 끝에 즉각 행정기구를 숙청하고, 결근 노동자들을 찾기 위해서 공공장소를 경찰이 조사하도록 하는 획기적인 조치 등으로 노동규율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신장병으로 갑자기 중단되었고, 그는 지도자 지위에 있은 지 불과 1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안드로포프를 대체한 인물은 브레즈네프가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던 체르넨코였다. 그가 소련 지도자가 된 후 1년도 생존하지 못하자, 1985년 3월 11일에, 안드로포프의 후견을 받은 고르바초프가 정치국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826)


"고르바초프, 그리고 셰바르드나제와 야코블레프 같은 그의 원래의 동료들이 소련의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는 자신들에게도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토대에는 소련이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낮은 경제성장률은 점증하던 환멸감 및 비관론과 결부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우선 위기를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위기에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정부와 당은 낮은 경제성장률, 생활수준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암울한 농업 상태, 제조품의 빈약한 질 등 경제 문제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심화되고 있던 〈정체(停滯)〉─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을 가리키면서 널리 사용된 용어─에 대한 인정은 문화적 위기와 이데올로기적인 위기에 대한 인정과 짝을 이루었다." "고르바초프의 선언에 따르면, 소련은 한마디로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정신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재건축(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했다."(892-4)


"아주 중요한 점은 고르바초프가 레닌주의적 사회주의의 이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그는 소련 사회의 실질적인 쇠퇴는 말할 것도 없고, 당 생활을 포함한 소련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목격한 광범한 냉소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기에 행한 레닌의 말을 종종 되풀이하면서, 개혁된 선봉 세력과 〈민주화〉의 결합을 통해서 소련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화는 경제 및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신념에 또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열쇠였다. 그리하여 고르바초프는 시민들이 공적 생활에 더욱 참여하고, 더 많은 주도권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오래된 정치적 전통만이 아니라, 레닌을 뒤따라 강력한 중앙의 권위가 변화의 시기에 필수적이라고 믿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의 본질적인 〈휴머니즘〉,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의 옹호와 증진에 대해서 종종 거론하곤 했다."(894-5)


"소련의 민족정책 자체가 소련에서 민족주의 혹은 여러 민족주의의 대두에 기여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민족주의는 모스크바의 통치에 대한 반응이자 항의였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다민족국가라는 공식적인 이상의 결과였으며, 그에 수반되어 민족문화와 정체성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한 결과였다. 경제 발전, 도시화, 교육도 민족 및 종족 지도자들의 대두에 기여했다." "일단 고르바초프가 공개적인 표현에 대한 제약을 느슨하게 하자, 소련의 정책을 통해서는 민족적 정체성과 열망이 근절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자치권을 더 달라는 요구는 종종 지방권력에 대한 것이었으며, 숨 막힐 듯한 소련으로부터 독립시켜달라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주의는 단지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억압받던 자들의 귀환이었다. 소련식 사회주의를 작동시키겠다는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적인 약속으로부터 거리감을 느끼고 있던 많은 시민들에게 민족주의는 대안적인 신념을 제공했으며, 번영과 자유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다."(901)


"소수민족의 공화국들이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함에 따라서 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면, 1990년 3월에 중심에 있는 거대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권을 주장했을 때 소련의 운명은 거의 필연적으로 결말을 맞이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정부는 소련의 비러시아계 민족들을 통제하려고 노력할 때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반대로 러시아 정부의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중앙〉을 러시아의 진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의 〈자치권〉과 심지어 〈주권〉을 주장했다. 그리고 다른 공화국들이 이런 일을 동일하게 하도록 지원하면서 〈법의 전쟁〉을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러시아 법은 러시아 영토에 대한 소련의 법을 무효화시켰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옐친을 동료 개혁가로 보았으나, 그가 권위에 대항해서 고개를 들고는 더욱 빠른 속도의 변화를 요구할 정도로 대하기 아주 어려운 동지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907)


"러시아의 정치무대에 집중하던 옐친은 1990년 3월에 새로 신설된 러시아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러시아 의회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도록 설득하여, 러시아 공화국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새로운 대통령직을 승인하도록 했다. 1991년 6월 12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나 중앙정부의 어떤 다른 지도자도 얻을 수 없었던 대중적인 지지와 민주주의적 절차를 놀랍도록 과시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옐친이 1990년 7월 12일에, 그리고 그 다음 날 솝차크와 포포프가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유서 깊은 도시, 장소, 거리는 옛 이름을 되찾았고, 차르 국가의 흰색, 푸른색, 붉은색 국기와 쌍두독수리 문장이 부활되었고, 공개적인 종교행사는 점점 빈번히 개최되었다. 이렇듯 자유주의는 민족주의 및 종교적 부흥과 결합되었다."(908-9)


제7부 러시아 연방


"옐친(1991년-1999년 집권)은 자신의 의사일정의 맨 꼭대기에 경제적 변화를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으므로, 추바이스, 가이다르, 키리옌코 같은 경제 개혁가들에 대한 신뢰감을 거듭 표명했다. 그러나 개혁 과정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기고, 점차로 강력한 이해관계를 가진 반대파가 경제 개혁 혹은 적어도 그런 특별한 종류의 경제 개혁을 원하지 않게 됨에 따라서 대통령은 거듭 후퇴해야 했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옐친은 그보다 앞선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모든 방향으로부터 비난받았다. 한때 러시아에서 가장 호평받는 정치인이었던 옐친에 대한 여론조사의 지지율은 2퍼센트, 심지어 1퍼센트로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헌법상 대통령이라는 매우 강력한 지위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서, 정치적으로도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 내의 지도적인 인물들을 종종 해임하고 정부의 노선을 다소 변경하기도 했다."(930-1)


"새로운 러시아 연방의 89개 연방주체 중의 하나인 체첸 공화국의 인구는 러시아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었고, 머나먼 캅카스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단지 석유와 가스의 수송로라는 점에서만 중요했다. 이슬람교를 믿는 체첸인들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자 샤밀의 지도하에 투쟁했고, 1917년 이후에는 소련 권력에 저항했다." "소련이 붕괴되고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던 1991년에, 소련 공군의 장성인 두다예프가 원로회에 의해서 체첸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독립을 선포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주 애매한 선거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체첸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두다예프는 모스크바의 권위에 자주 반항했고, 자국이 러시아에서 수많은 범죄 활동의 근거지가 되도록 용인했다. 러시아의 새로운 의회, 국가 두마, 심지어 많은 군 지도자들도 군사 개입에 반대했지만, 옐친은 체첸을 침입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12월 11일에, 4만 명의 군인들이 체첸으로 파견되었다."(937-8)


"옐친은 러시아가 문명의 길에 서 있도록 하는 데에 자신의 개인적인 역할이 필수적이며, 자신에 대한 모든 반대가 공산주의로의 회귀에 관한 위협이라고 굳게 확신했던 것 같다. 1993년 12월 12일에 새로운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승리함으로써, 옐친의 입지는 더욱 강력해졌다.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한 그는 장관들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으며, 입법부의 승인을 얻을 수 없었을 때에는 행정명령에 의해서 필요한 조치를 통과시킬 수도 있었다. 옐친의 헌법은 중앙정부가 지방에 대해서 더 큰 권력을 갖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대통령을 탄핵한다거나 헌법을 개정하는 일도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헌법을 〈대통령 만능주의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결국 옐친이 정부예산과 온전한 입법 프로그램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제 입법부의 동의를 필요로 했다." "1993년 12월 선거에서 옐친이 거둔 승리는 동시에 실시된 새로운 두마 선거에서 다수 의석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빛을 잃었다."(940)


"1999년 여름, 모스크바와 남부 러시아에 있는 아파트 건물 두 동에서 폭탄이 터져,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체첸의 테러리스트들은 비난받았고, 1999년 9월에 러시아의 대규모 침입으로 제2차 체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직까지 잘 보이지 않던 총리 푸틴은 〈우리는 그들을 옥외 화장실 안으로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극단적인 무력 사용을 인가함으로써 자신의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여론조사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50퍼센트로 치솟은 반면에, 공식적인 발언에서 점점 일관성을 상실하고 국가정치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안전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은 옐친의 지지율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제 옐친조차도 자신이 옆으로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에 행한 신년 연설에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된 푸틴은 옐친과 그의 가족이 평생토록 법적 소추로부터 면제되는 것과 관대한 연금을 지급받을 것을 보장해주었다."(9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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