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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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론


"러시아의 성장은 러시아가 위치한 지역의 지리, 즉 확장에 방해가 되는 자연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던 광대한 평원이라는 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모스크바국은 이런 환경 덕분에 동유럽을 가로질러 아주 쉽게 확대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곧장 태평양까지, 그리고 심지어 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까지 진출했다. 이런 전진은 미국인들의 서부를 향한 대이동에만 비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러시아 제국의 경계가 정해졌을 때, 그것은 북쪽과 동쪽으로는 대양과 접해 있었고 남쪽으로는 대부분 바다와 높은 산들 그리고 사막에 접해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일련의 다른 민족들과 뒤섞였던 서쪽에서만 국경과 지리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아주 혹독한 기후 때문에 유럽 러시아의 북부에 흩어져 있는 부족들과 시베리아의 다양한 거주민들은 러시아인들의 전진을 전혀 저지할 수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쉽게 확대할 수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은 외부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26-7)


제2부 키예프 루시


"키예프 시(市)는 9세기에 하자르족이 통치하던 동슬라브인들의 거주지였을 것이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올레크라고 불리던 한 바랑기아인이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하여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비잔티움의 중요한 시장(市場)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수립했다. 올레크는 공으로서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류리크의 젖먹이 아들인 이고리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그러다가 이고리는 올레크가 죽은 후인 913년에 권좌에 올랐다." "올레크와 이고리가 비잔티움과 전쟁을 치른 후 944년에 체결한 조약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조심스럽게 작성된 조약의 문구와 놀랍도록 세세한 조항들에서는 루시인들의 콘스탄티노플 체류 문제, 주민들과 루시의 교역, 그리고 일반적으로 양국 사이의 관계가 다루어졌다. 분명한 사실은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특히 교역의 원천으로서 아주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그리스인들과 멀어지지 않도록 이런 관계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54-6)


"1015년까지 나라를 통치하면서 블라디미르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 그는 질서를 수립하고, 내전 시기에 극심한 혼란에 빠진 동슬라브족이 키예프국에 충성을 바치게 하며, 루시 영토를 방어하고 확대하는 정치적·군사적 정책을 계속 펼쳤다." "둘째, 그는 그 이후 500년 동안이나 지속될 정도로 안정적인 키예프 루시의 지배가문의 원칙을 확립해놓았다. 류리크 가문은 러시아에서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유명한 일은 블라디미르가 자신만이 아니라 루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기독교를 수용한 일이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블라디미르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군주가 비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탁월한 신과 세속적인 정치적 권위와 결합된 교회를 강조하는 종교의 도움을 받아서 다양한 민족들을 단일한 사회로 통합시키고, 자신 및 자신의 왕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얻으려고 계획한 것이다."(59-61)


"기독교가 러시아로 전래된 것이 로마로부터가 아니라 비잔티움으로부터라는 점은 기억해야 한다. 비록 당시에는 이런 차이가 나중에 인식된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리고 동구의 교회와 서구의 교회 사이의 분열은 1054년에야 발생되었지만, 러시아가 비잔티움에 충성을 바친 것은 러시아의 이후의 역사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거나, 결정짓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외부에 남아 있었음을 의미했고, 반대로 러시아가 가톨릭 교회 자체가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나머지 유럽 및 라틴 문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고립되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도록 크게 부추겼고, 러시아인들과 폴란드인들 사이의 비극적인 적대감을 조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블라디미르가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당대에 택할 수 있는 최상의 정신적, 문화적, 정치적 선택이었다."(63)


# 키예프 몰락의 여러 가지 이유

1. 지방 공국들의 성장 : 볼리니아-갈라치아, 스몰렌스크, 랴잔, 블라디미르-수즈달, 노브고로드 등의 강력한 공국들과 키예프 왕조 구조 사이의 긴장

2. 사회 갈등 : 농민들의 예속화와 도시 빈민들의 열악한 처지, 노예제도의 상존

3. 경제 붕괴 : 키예프를 우회하는 무역로의 발달로 국제적 지위 하락

4. 정부 체제의 실패 : 친족 간의 공동 통치와 형제 간의 순환 통치 관행이 불러온 만성적인 내부 갈등

5. 외부의 압력 : 스텝 지대의 하자르족, 페체네크족, 폴로베츠족 그리고 최후로는 몽골족의 침략


# 키예프의 정치 제도들

1. 공이라는 지위 : 공은 군사 지휘권, 재판권, 행정권을 갖고 있었지만 관리들은 물론 지방민들과 업무를 조율해야 했다. 키예프 공은 대공 혹은 위대한 공으로 명명되었다.

2. 두마(duma) 혹은 보야르 협의회 : 공 및 그의 측근 가신인 상급 드루지나의 협의회 및 협동 작업에서 발달했으며, 고위 성직자도 두마에서 한자리를 차지했다.

3. 베체(veche) 혹은 민회 : 전쟁이나 평화, 긴급 법령, 그리고 공과의 갈등이나 공들 사이의 갈등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루는 자유민 집회로서 만장일치제제를 채택했다.


제3부 분령 시기의 러시아


"오래 전부터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해온 주장에 따르면, 분령 시기(udel’nyi period)라고 알려진 분할과 패배의 이 시기, 특히 몽골 침략 이후의 암흑 같은 초기 100년 동안에 있었던 역사적 분열과 종말을 방지한 통합의 끈은 키예프 루시의 제도와 문화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라고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101-3)


"이 새로운 시기는 우델(udel)이라고 불렸던 분령지, 즉 개별 공의 독립된 보유지를 따라 명칭이 붙여졌다. 그 시기에 분령지는 급속히 증대되었다. 전형적인 경우를 보면, 어떤 통치자는 유언을 통해서 자신의 공국령을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그리하여 여러 개의 새로운 정치적 독립체가 생겼다. 분할이 잇달아 이루어지면서, 공국의 허약한 통일성은 파괴되었다." "분령 시기에 있었던 러시아의 분할 현상은 인구 이동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재편,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민족들의 등장과 결합되었다. 이런 과정은 키예프가 최종적으로 몰락하기 오래 전부터 대체로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이 러시아 역사에 미친 총체적인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텝 지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투쟁이 러시아인들을 매우 소진시켜 놓았고 키예프의 운은 쇠락해갔다. 키예프 자체와 남부 러시아가 몽골에 의해서 끔찍하게 파괴된 것은 이런 추세를 강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따름이다."(103-4)


"몽골인들─러시아 사료에서는 타타르인들이라고 불린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들이닥쳤다. 그들은 1223년에 남동부 러시아에 갑자기 나타나서 칼카 강 인근의 전투에서 러시아인들과 폴로베츠인들을 격파하고 스텝 지대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돌아와서는 1237~1240년에 러시아를 정복했고, 오랫동안 러시아를 통치했다." "유럽 침공을 시작한 몽골인들은 1236년에 우랄 산맥을 건너서 볼가 불가르인들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1237년에 그들은 러시아의 동쪽에 있던 랴잔 공국을 북쪽 방향에서 기습 공격했다. 몽골인들의 전략에 따르면, 유럽 쪽에 대한 주된 공격을 하기 위한 측면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러시아를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성격대로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침입을 받은 공국을 도우러 가거나 합동작전을 펴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렀고 격렬한 전투 끝에 차례차례 함락되었다."(107-110)


"노브고로드, 혹은 정식 명칭을 사용하면 대노브고로드 공국은 분령 시기 러시아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중요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주장에 따르면 모스크바국의 성장과 통치로부터 수반된 중앙집권화된 전제체제 형태의 중요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눈에 띈다. 사실 비교적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세계시민주의적인 노브고로드에 대한 기억은 19세기 및 그 이후의 러시아의 반정부 세력에게는 러시아의 억압된 민주주의 유산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에 못지않게 러시아 땅을 서유럽의 강국들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한 노브고로드의 역할은 러시아 역사에서 노브고로드가 가지는 반(半)신화적인 지위의 일부분이 되었다. 키예프의 세력과 권위가 쇠퇴하고 경제적, 정치적 무게 중심이 바뀌었을 때, 노브고로드는 가장 큰 교역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북부 러시아의 수도이자, 실제로 전 러시아의 지도적인 도시로 부각되었다."(120-1)


# 노브고로드의 제도와 생활방식

1. 13세기 후반에 은으로 만든 새로운 화폐인 루블 도입

2. 공을 초청하거나 해임할 수 있고, 각종 군사, 사법, 행정권을 행사한 베체(민회)의 막강한 권한

3. 대주교가 주관하고 보야르 집단이 참석하여 베체의 논의와 입법 조치를 견제한 명사 협의회

4. 자체의 베체와 관리를 보유한 지방의 자치권과 자율성 보장

5. 인간 생명을 존중하여 주로 온건한 처벌을 내린 사법체계


"14세기에 변방의 보잘것없는 소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소군주의 후손들이 러시아 역사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모스크바는 14~15세기에 강력하고 팽창하는 왕조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이 국가는 통치자의 '세습 재산'으로 정의된 엄청난 부와 광대한 영토에 의해서, 중앙집권화된 정치권력에 의해서, 경쟁자들과 몽골 칸국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에 의해서, 유산과 운명이라는 세속적이고도 종교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사실, 필연성이라든가 민족적 운명이라는 압축된 의미를 갖고서 이 과정을 〈러시아 땅 모으기〉라고 묘사한 전통은 이 과정에 대한 많은 역사 서술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는 1147년 이전에 공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정착지로서 출발했고, 12세기 중엽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중심지, 즉 소도시가 되었던 것 같다." "14세기에 그곳에는 목재로 된 크지 않은 요새(크렘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상인 및 수공업자들의 주거지와 농가가 있었다."(145)


"14세기부터 몽골 제국은 부흥기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서서히 분열되며 약화되고 있었다. 흑사병으로 인한 황폐화, 발칸 지역과 중국 문제로 인해 취약점을 보이던 상업망, 킵차크 한국 내의 격렬한 권력 투쟁 등은 러시아의 공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몽골인들이 힘을 보유한 동안에는, 모스크바의 공들은 칸들에게 완전히 복종하며, 열심히 그들에게 협력했다. 그들은 몽골인들을 도우면서, 참을성이 없고 투지가 넘치는 트베리와 몇몇 다른 러시아 땅이 파괴되도록 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이후에, 대공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은 몽골인들을 위하여 공물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다른 러시아 공들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재정적인 권위,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사법적인 권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반 3세는 마침내 칸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함으로써 이런 점진적이지만 변화를 초래하던 과정을 완성했는데, 몽골인들은 그것을 중단시키거나 되돌릴 수 있는 힘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165-6)


"이반 3세의 아들인 바실리 3세는 부친을 이어서 1505년부터 1533년까지 통치했다. 새로운 통치자는 많은 면에서 선임자의 정책을 지속했으며 완성시켰다. 바실리 3세는 1511년에 프스코프를 획득하고, 1517녀에는 랴잔의 나머지 부분을 모스크바국에 합쳤을 뿐만 아니라 스타로둡, 체르니고프-세베르스크, 오카 강 상류지역 등 남아 있는 모든 분령지를 사실상 병합했다. 모스크바국의 통치자인 바실리 3세는 스몰렌스크를 목표로 세번의 군사작전을 단행하면서 리투아니아와 싸웠고, 마침내 1514년에 스몰렌스크를 점령했다. 그 결과 1522년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러시아가 얻은 영토는 승인되었다. 그는 이반 3세의 정책을 지속하여 카잔 한국에 대해서 압력을 가했고, 그쪽 방향으로 러시아 국경을 확대했다. 바실리 3세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 그리고 투르크의 유명한 술탄인 술레이만 1세, 그리고 심지어 인도의 대무굴 제국의 건립자인 바바르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했다."(162-3)


"모스크바국은 토지 소유권의 형태를 크게 바꾸었다. 분령 시기의 대부분 동안, 궁정이나 교회 토지를 제외하고는 토지 보유의 지배적인 유형은 보트치나로 알려진 세습 영지였는데, 이것은 사거나 팔거나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는 사유지였다." "그러나 이반 3세와 그 이후의 공들 사이에서는 조건부적인 토지 보유 형태인 포메스티예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포메스티예는 군사적인 봉직을 맡은 대가로 전적으로 공의 재량하에 부여된 토지였다. 포메스티예 소유인이 공에게 봉사를 계속하거나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사후에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한, 포메스티예는 그 가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트치나와는 달리, 포메스티예는 팔거나 돈을 마련할 목적으로 저당 잡힐 수 없었다. 포메스티예 체제의 핵심적인 목적은 이반 3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자신들의 군사 봉직자들에게 생활 기반을 제공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75-6)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은 바실리 3세의 치세 무렵에는 이전에 키예프국의 영토였던 곳의 많은 부분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지만, 키예프국의 유산 중 또다른 많은 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사실상, 서부 러시아의 역사는 수 세기 동안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사회체제 및 성쇠와 연결되어 있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사실상 흑해로까지 확대된 이후에 인구의 3분의 2 혹은 심지어 4분의 3이나 그 이상은 러시아인들이었다고 추산된다. 도시는 여전히 러시아적 성격을 유지했고, 러시아의 보야르들과 정교회는 자신들의 높은 지위와 폭넓은 특권을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공들은 모두 리투아니아의 대공에게 속했지만 리투아니아 공들 바로 옆에서 각자의 분령지를 계속 지배했고, 양 귀족 사이의 통혼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들은 비록 이교도이기는 했지만, 정교도 신민들의 통치자로서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교회로부터 승인받으려고 했다."(198-201)


"리투아니아 군주 가운데 가장 크게 영토를 확장한 비톱트는 1399년에 몽골인들에 대한 중요한 작전을 펼치다가 참패를 당함으로써 큰 낭패를 보았다. 일부 학자들은 비톱트가 보르스클라 강변에서 승리했더라면, 모스크바와 폴란드 양쪽에 대해서 자신의 의지를 성공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동유럽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국 리투아니아를 위해서는 야기엘로의 결혼이 비톱트가 벌인 전쟁 혹은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국 사이의 결혼동맹(바실리 2세는 비톱트의 손자)보다 더 중요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리투아니아의 폴란드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야기엘로는 야드비가와 결혼하기 위해서 정교회를 포기하고 로마 가톨릭을 선택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나라의 이교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만들었다. 자연히 성직자들이 폴란드로부터 리투아니아로 건너왔고, 교회는 폴란드가 행사한 영향력의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202-3)


제4부 모스크바 러시아


▶ 이반 뇌제 통치기(1533-1584)


"이반 뇌제(이반 4세)는 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보야르들과 점차 격렬한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 차르와 보야르 사이의 갈등은 논리적으로 그 이전의 역사부터 초래되었다. 모스크바국의 절대주의가 이반 뇌제와 함께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스크바 팽창됨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보야르 층은 군주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보야르들은 모스크바국의 통치자들이 파괴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며 그리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고래의 분령 질서와 부분적으로 연관되었다." "공포의 통치가 그 뒤를 이었다. 리투아니아로 도망갔던 쿠릅스키 공과 관계된 보야르들과 그 외 사람들이 최초로 몰락했다. 다음 차례로는 차르의 사촌인 스타리차의 블라디미르 공이 자신의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혐의자들과 희생자들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이반 뇌제는 (자신을 향한) 어떤 반대도 용납하지 않았다."(222-6)


"이반 뇌제는 1560년 첫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의 사망 이후에 정서적인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이반은 기이한 개인적인 행동과 외모에 더하여, 잔인한 행동을 종교성과 결합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했고, 종교 서적을 읽었고, 새로운 성인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그는 참회를 구하면서 살해당한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모으도록 하고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직접 기도했다. 잔인함과 경건함이라는 역설적인 혼합은 민간 자료에 나타난 이반 뇌제의 이미지에 반영되었다. 민요와 민간 이야기에서 이반 뇌제는─엄격함, 무시무시함,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혼합물로서의 그로자(groza)라는 의미에서─〈그로즈니 차르〉로서의 모습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분노하고, 전제적이며, 잔인하고, 불공정하며, 끔찍할 수는 있지만 자애로우며, 용서를 잘하고, 관대하며, 정의로우며, 심지어 신하들과 동료들이 훌륭한 조언으로 자신을 반대할 때조차도 그들을 존중하는 통치자로 그려진다."(227)


▶ 동란의 시대(1598-1613)


1. 왕조의 문제 : 차르 표도르의 서거 후 정상적인 제위 계승자가 한 명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자신이 제위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2. 국가적 문제 : 내분으로 러시아가 약화되자 폴란드와 그보다는 약하지만 스웨덴 역시 이 상황을 자신들의 영토상의 이익에 걸맞게 이용하려는 충동을 느꼈다.

3. 사회적 문제 : 봉직자들(봉직귀족, service gentry)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봉직의 대가로 받은 영지인 포메스티예에 귀속되는 국유지와 농민들이 늘어났다.


▶ 미하일 로마노프 통치기(1613-1645)


"미하일 차르의 정부는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외국의 공격을 제지했고, 국제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구스타부스 2세 혹은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를 새로운 왕으로 맞아들인 스웨덴은 유럽의 다른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1617년에 스톨보보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정에 따라 스웨덴인들은 노브고로드와 그에 인접한 북부 러시아 영토를 반환했으나, 핀란드 만을 따라 난 띠 형태의 영토는 계속 보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러시아인들을 바다로부터 멀리 밀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스웨덴은 2만 루블을 받았다. 폴란드인들은 좀더 큰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17~1618년에 블라디슬라프가 러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는 데에 실패한 이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14년 동안의 효력을 가지는 데올리노 휴전이 1618년에 체결되어, 폴란드는 스몰렌스크와 서부 러시아에 있는 몇몇 다른 점령지를 계속 보유하게 되었다."(262-3)


"농노제는 모스크바국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기반이었다. 농노는 노동력으로 귀족을 부양했고, 그럼으로써 국가 전체의 구조를 지탱해주었다. 농민들이 예속된 역사는 키예프 시기까지 소급될 정도로 오래되었다. 노예제를 포함하여, 초기에 성립된 농민들의 예속 상태는 계약의 결과였다. 농민들은 주로 금전이나 곡물 혹은 농기구를 빌린 대가로, 지주에게 오브로크라고 불리는 지대를 납부하고, 바르시치나라고 불리는 부역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비록 1년부터 10년에 이르는 기한이 정해졌다고 할지라도, 농민들이 채무를 다 갚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협정은 연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농민들이 지주들에게 매년 내는 분담금은 종종 대부금에 대한 이자에 불과했다. 특히 봉직귀족계급이 믿을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의 근원을 확고히 하려는 필요성 때문에, 농민들의 이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17세기 말에는 농노의 증여 관행이 발달되었다. 즉, 농노는 사실상 노예로 취급되었던 것이다."(276-7)


"도시민의 중심 계급은 여러 계서적인 집단으로 세분된 상인과 수공업자였다. 1649년에 제정, 공포된 『울로제니예』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히 과세를 위해서 도시 생활을 규제했다. 사실 정부는 세금의 많은 부분을 도시에서 징수했다. 과세를 집단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도시 공동체로부터의 청원에 대한 반응으로, 교회나 부유한 상인들이 주로 관리하고 있던 〈백민(白民, belyi)〉 교외 지역이 법으로 폐지되었고, 모든 도시 집단이 과세 대상자인 〈흑민(黑民, chernyi)〉 도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에 도시 교역과 제조업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런 혜택과 더불어, 『울로제니예』는 도시민들도 사실상 농노화했다. 도시민들은 도시의 허가 없이는 세금을 납부하는 공동체를 떠날 수 없었고, 도망친 도시민들을 회복시키는 제한 규정도 폐지되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도 아들이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야 하는 폐쇄적이고 세습적인 카스트이자 비유동적인 계급이 되고 말았다."(278)


"17세기에 이루어진 모스크바국의 확장으로 인해서, 과거 모스크바 공국의 서쪽, 북쪽, 남쪽, 동쪽에 있는 영토와 민족들이 차르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서쪽으로의 영토 팽창, 특히 우크라이나를 복속한 1654년의 협정이 과거 러시아 영토의 재통일이라고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던 한편,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쪽과 남동쪽으로의 팽창은 〈식민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남부 스텝 지대로의 진출은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한 이후에 계속되었다." "가장 극적인 팽창은 동쪽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실질적인 정착은 좀더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같은 30년 동안 러시아인들은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탐사하고 정복하면서 오비 강으로부터 태평양에 이르기까지 약 4,828킬로미터를 전진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은 별다른 저항 세력을 만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강력한 정치 공동체가 전혀 없었으며, 지방 엘리트들의 협조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288-9)


제5부 제정 러시아


▶ 표트르 대제 통치기(1682-1725)


"표트르 1세가 당대인들에게 심어준 인상은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2미터가 넘는 키와 단단한 체구를 가지고 있던 차르는 깜짝 놀랄 만한 육체적 힘과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그의 통치기 전체를 상징하는 개인적인 특성이었다." "그는 처음에 사병으로 복무를 시작하여, 초급 장교로 승진하기 전에 모든 무기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보병과 수병의 업무를 맨 밑바닥부터 익혔다. 군주는 폴타바에서의 승리 이후에는 육군대장 계급을, 대북방 전쟁의 성공적인 마무리 이후에는 해군대장 계급을 획득했다. 그는 성격상 모든 곳에 가보고 모든 것을 직접 보기를 원했으므로, 방대한 자신의 국토를 이전의 어떤 모스크바국 군주도 하지 않았던 정도로 이리저리 여행했다. 더구나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그는 1697~1698년과 1717년 두 차례에 걸쳐서 배움을 목적으로 서유럽으로 갔다." "그는 이론이 아니라 기술과 기능을 익히기 위해서 서구로 갔다."(321)


"동시에, 표트르는 과격하고 거칠고 잔인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인상적인 정치인으로서의 모습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자신의 곤봉으로 귀족들, 친구들, 다른 궁정 사람들을 직접 때렸다.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주저하지 않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표트르 대제를 그가 숭배했던 이반 뇌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개혁가는 결코 스스로 과대망상증이나 피해망상증의 편집증적인 세계에 빠져 있지도 않았고,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것조차 거절했다. 하나의 구체적 사례를 언급하면, 표트르 1세는 군사적 헌신의 대상으로서 〈폐하를 위해서〉라는 구절을 지워버리고 그것을 〈국가를 위해서〉로 대체했다. 그는 자신의 국가에 봉사하고, 자신의 국가를 변화시키고 깨우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일관되게 기울였다."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표트르는 육군과 해군 업무, 기하학, 요새 축성등을 다양한 전문가들로부터 배웠다."(321-3)


"1721년 8월 30일, 대북방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러시아와 니슈타트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핀란드의 상당 부분을 반환하고 200만 릭스-달러를 지불하기는 했지만,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잉게르만란트, 카렐리아의 일부 그리고 몇 개의 섬을 획득했다. 사실상 러시아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서 나중에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라는 독립국이 되는 소위 발트의 주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핀란드 만 옆에 있으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남동부의 핀란드 국경지방을 얻었다. 특히 러시아는 비보르크라는 요새를 점령함에 따라, 핀란드 만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게 굴욕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적수인 폴란드에 대해 우세를 확보했으며, 독일 문제에 직접 관여─차르가 자신 및 이복형제인 이반 5세의 딸들을 위해서 결혼동맹을 주선한 것도 포함되었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성큼 나서게 되었다."(333)


"표트르 대제는 소위 이성의 시대 동안에 유럽에서 설파되고 어느 정도는 실행에 옮겨진 계몽 전제주의를 믿었다. 그는 전제정치 및 통치자와 신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모스크바국의 전통이 아닌 스웨덴으로부터 빌려왔다. 이반 뇌제와는 달리 표트르 대제는 법을 최고로 존중했고, 스스로 국가의 첫 번째 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반적인 관점에 따라서 보야르 두마나 젬스키 소보르를 싫어했고, 전임자들보다 훨씬 더 고압적인 태도로 교회를 다루었다. 그리하여 그 개혁 군주는 모호하지만 실질적으로 절대 권력의 행사를 방해하던 모스크바국의 전통적인 제도들을 대체로 피했다. 그런 것들 대신에 그는 통치기구라는 완전히 새로운 조직을 구축해놓았다." "콜레기아(collegia)를 신설하면서 황제는 집행부의 다양한 분야를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보좌관들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339-40)


▶ 표트르 대제 이후 ~ 예카테리나 대제 이전


"1725년부터 1762년 사이에 러시아에서는 통치자가 빈번히 교체되고 총신들이 계속해서 등장했다가 몰락했지만,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는 계속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주의 권력과 지위가 강화되었고, 그에 반비례해서 농노의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아들 한 명만이 부친의 영지를 상속해야 한다는 표트르 대제의 주장은 심지어 개혁 군주의 통치기에도 거의 시행되지 못했고, 1731년에는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안나 여제는 대규모의 국가 토지를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땅에 있던 농민들은 농노가 되었다. 엘리자베타도 이런 관행을 열심히 따랐다. 이렇게 하사된 토지는 봉직 의무와도 더 이상 관련되지 않았다." "1756년에는, 귀족 출신임을 입중한 사람들만이 귀족 명부에 등재될 수 있었고, 1758~1760년에 내려진 결정은 국가 봉직을 통하여 세습적인 귀족 지위를 얻을 가능성을 사실상 제거함으로써 표트르 대제가 실시한 조치들 중 또다른 하나를 폐기했다."(365-6)


▶ 예카테리나 대제 통치기(1762-1796)


"귀족의 공동 정체성을 인정하고 지주의 지위와 역할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은 1785년의 귀족헌장에서 완전한 발전 단계에 다다랐다. 귀족은 비록 국가 봉직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국가에 봉사하도록 여전히 기대되었지만, 헌장에 따르면 봉직계급으로서 러시아 귀족의 역사를 규정했던 〈봉사, 충성, 그리고 열정〉이라는 말은 세습적인 명예인 〈위엄 속으로〉라고 변경되었다." "귀족의 지위 상승은 농노제의 확대와 강화를 의미했는데, 이런 진전은 예카테리나 대제의 통치 기간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농노제는 새로운 지역,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확산되었다. 예카테리나 정부는 본질적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이미 존재하던 제도를 확고히 했을 따름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 농노제를 합법화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그 악습을 제국 전역에서 표준화했다는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의 총신들에게 국유지와 농민들을 빈번하고도 대규모로 하사함으로써, 스스로 농노제를 크게 확산시켰다."(383-4)


"예카테리나 대제는 자신과 나라의 성공 및 영예를 추구하면서, 제국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파닌과 포템킨 같은 정치가들, 루먄체프와 수보로프 같은 장군들의 도움을 받아서 여제는 국제무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제국의 국경은 크게 확대되었고, 수백만 명의 신민이 추가되었으며, 러시아는 유럽에서 새로운 위상과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또다른 우려를 낳았다. 처음에 예카테리나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최소화하려고 했고, 자신이 좋아하던 계몽사상으로부터 그 사건들을 분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이 더 과격해지자 여제는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반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및 서구가 당면했던 다른 골칫거리들은 여제를 도와주었다. 제1차 투르크 전쟁 후반부터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싸움에 몰두했고, 제2차 투르크 전쟁의 중요한 순간에 모든 강국들은 혁명기 프랑스 쪽으로 주의를 돌려야 했던 것이다."(385-6)


# 예카테리나 대제의 군사 활동

1. 투르크 전쟁 : 제1차(1768-1774)와 제2차(1787-1795)에 걸친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 이르렀고,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2. 폴란드 분할 :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제1차(1772), 제2차(1793), 제3차(1795)에 걸쳐 정치적 혼돈 상태에 빠진 폴란드를 분할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세임(의회)을 통해서 권력을 행사하던 아주 강력한 귀족과, 선출된 유약한 왕에게 지배받고 있었다. 분명히 다른 곳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통치자들도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지방 의회로부터 지시받는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는 절차상 전국적인 입법기구라기보다는 외교적인 회의체와 유사했다. 의원이라면 누구든 어떤 법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심지어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부패의 확대, 외국의 간섭(러시아의 간섭을 포함한) 등은 빈번한 정치적 혼돈 상태를 낳았다. 전통적으로 의회가 해산될 때 주로 의지했던 방법은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동맹〉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동맹〉은 거부권에 의해서 방해될 수 없었고, 강제로 자신의 견해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체제는 〈내전에 의해 단련된 무정부 상태〉라고 설명되어왔다. 이 체제의 신봉자들은 이 체제가 가진 민주주의적인 성격을 존경했다."(390)


"폴란드 분할은 폴란드인들에게 비극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적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말하자면 공범들이었던 셈이다." "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 제국 내의 〈민족 문제〉의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폴란드의 해체로 인해서, 오랫동안 적대시했고 조심스럽게 러시아 바깥으로 내몰았던 종교적 〈이방인〉 집단인 유대인들이 대거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제국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 중의 일부를 흡수하게 되었던 것이다."(394-5)


"18세기에 일어난 결정적인 사회적 변화 중의 하나는 러시아 군주의 지배하에 들어온 비러시아인들과 비정교도들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제국의 팽창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바다로의 충동〉, 아직 자연적인 국경선에 다다르지 않았던 점, 국경의 불안정성, 메시아적인 야망, 국제적인 경쟁 등─그 결과는 많은 상이한 민족들과 종교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러시아 생활 속으로 강제로 들어온 일이었다." "대체로 공동체 간의 차이점을 인정했지만 우니아트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관용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진정한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로 유대인들과 이슬람 교도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에 여전히 〈전근대적인〉 제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갈등과 저항을 위한 여지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하여 다민족 제국이라는 점은 불안정한 현실이 되어, 점차적으로 러시아 제국에서 관심 사항이 되었다."(409-11)


"러시아가 빌려온 계몽주의 문화는 수많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특히 세속주의의 승리를 대변했으며, 교회 중심적인 모스크바국의 문명과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분명히 정교회는 재정 러시아에 남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계속해서 국가와 연결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회는 적어도 정부와 교양 있는 대중에 관계되는 한에서는 러시아의 삶과 문화에서 중심이 아니라, 동떨어져 있고 아주 무시당하는 구역이 되었다. 게다가 플로롭스키 등에 따르면, 우리는 이 구역 안에서는 독창성이라든지 성장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18세기의 유럽에서 무대를 지배했던 세속주의 철학은 이성, 교육, 사회의 이익을 증가시킬 수 있는 계몽된 사람들의 능력을 강조했다. 마지막 사항은 특히 통치자들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국가의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수단을 갖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재정 러시아에 아주 놀라울 정도로 잘 맞았다."(413)


▶ 알렉산드르 1세 통치기(1801-1825)


"알렉산드르 1세 자신은 제위에 오를 때,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에게 그가 계몽주의 정신을 갖고 통치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 충분한 근거를 주었다." "외국 서적과 정기간행물은 물론이고, 해외여행과 외국인들의 러시아 입국에 대한 불쾌한 제한조치들이 폐지되었다. 검열은 완화되었고, 사설 출판사는 다시 문을 열도록 허용되었다. 수사 때의 고문은 폐지되었고, 예카테리나 대제에 의해서 귀족과 도시에 승인된 헌장은 다시 완전한 효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기껏해야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의 시작에 불과했다. 맞닥뜨려야 하는 핵심적인 사안 중에는 농노제, 전제정치, 국가의 전반적인 후진성 및 행정기구의 무능과 부패 등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에 눈에 띄는 일들 중의 하나는, 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았던 데에 비해서 실제로 실시된 것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르는 전제정치를 제한하고 농노제를 폐지하고 싶어하면서도 실질적인 변화를 초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437-8)


"알렉산드르 1세 그리고 적어도 그의 대부분의 자문관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력 균형을 통해서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헌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대 유럽의 많은 다른 국가에서처럼, 그는 주로 자의성과 제멋대로의 변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질서 있는 행정 및 법체계를 도입하고, 그런 체계가 다양한 사회 신분의 대표들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을 헌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법〉에 기반을 둔 국가인 법치국가가 그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합리화된 문서 절차와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능분화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 정부를 의미했다. 달리 말해서 알렉산드르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대제와 마찬가지로, 질서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고 변화를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는 갈역하고 합리적이며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필요성을 믿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그가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애써 지키려고 했던 것은 위선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특정한 정치철학이 반영된 결과였다."(439-40)


"개혁이 실패한 것에 대한 하나의 설명은 알렉산드르 1세가 외교 문제와 전쟁, 특히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 대재앙이기도 했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지나치게 몰두했기─단 한 명의 프랑스 군인이라도 러시아 땅에 남아 있다면 강화를 고려조차 하지 않겠다는 식의─때문이라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필요한 외교적·군사적 준비를 한 이후 1812년 6월에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국가들, 동맹국들, 위성국들, 즉 러시아의 민간 전통에 따르면 '12개의 침입하는 혀들'의 지지를 받았다. 러시아는 투르크와 강화를 체결하는 데에 성공하고, 스웨덴과 영국이라는 적극적인 동맹국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을 초기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강화를 간청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기대는 근거없음이 판명되었다. 예외적으로 추웠으며 일찍 시작된 겨울도 러시아 측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병참 문제는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판명되었다."(445-50)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노선에 대한 실망감은 1825년 12월에 성공하지 못한 봉기를 일으킨 이후에 데카브리스트(Dekabrist)들이라고 알려진 러시아 최초의 혁명 집단이 등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부분의 데카브리스트들은 군 장교였고, 종종 귀족가문과 정예 부대 출신으로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프랑스어와 때때로 다른 외국어를 배웠으며, 나폴레옹에 대항한 군사 작전 도중 그리고 그 직후에 서구에 대한 지식을 직접 얻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전통을 따르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푸시킨과 그리보예도프 같은 문학계의 권위자를 포함하여 많은 교육받은 러시아인들의 공감을 얻기는 했지만, 사회적 지지는 거의 얻지 못했다. 아직 러시아 자유주의는 잉글랜드나 프랑스에서와 같은 광범위한 사회운동은 결코 아니었다. 러시아 중간계급이 미약하고 후진적이었다는 점도 핵심적인 차이들 중의 하나였다."(460-1)


▶ 니콜라이 1세 통치기(1825-1855)


"법이나 제도보다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더 중요했던 국가와 시대에서, 차르의 성격과 취향에 대한 질문은 사소한 의미 이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품은 권력과 통치라는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아주 잘 부합되었다. 1796년에 태어난 새로운 통치자는 자신의 형처럼 후기 계몽주의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과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가 살던 때는 민족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니콜라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권력은 서구의 계몽전제주의 개념보다는 러시아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가장 잘 표현된 것은 나중에 〈관제 국민성〉이라고 불리게 된 독트린이었다. 교육부 장관 우바로프 백작이 1833년에 공식적으로 선포한 관제 국민성 이론은 정교회, 전제정치, 국민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신앙, 차르, 조국〉처럼 다른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도 그 순서는 중요했고 변하지 않았다."(466)


"이 세 원칙은 별개의 사상이 아니었다. 정교회(Pravoslavie)는 공식적인 교회의 역할과 윤리 및 이상의 궁극적인 근원을 강조했다. 많은 점에서 이것은 이성의 시대에 대한 거부이자,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중심적인 자리를 부여하는 관점을 배격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인생의 〈신비와 불가해성〉 그리고 이성의 무의미함이 강조되었다. 정치적인 원리로서 이것은 사회를 완전하게 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배격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신성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에 말해지고 있었듯이, 각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신을 섬겨야 한다.〉 신성한 권위로서의 전제정치(samoderzhavie) 원칙은 이것에서 비롯된다. 덧붙여서, 인간은 본래 약하고 죄짓기 쉽다고 상정되었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필요했다. 동시에, 그리고 전통을 따라서 그들은 전제정치가 러시아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라고 간주했다."(466-7)


"앞의 두 원칙처럼 중요했던 국민성(narodnost)은 러시아 국민의 특별한 성격을 가리켰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전제정치의 또다른 측면에 불과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을 독특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순종적인 신민이지만 동시에 강한 통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 관점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31년의 군사 봉기 동안에 평범한 군인들은 자신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를로프와 체르니셰프(고위 관리들)를 제외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 혼자 있었다는 사실을 보라. 모두가 넙죽 엎드리며, 자신들의 얼굴을 땅에 대고 있다! 당신의 러시아 민족은 이런 사람들이다.〉 알 수 있다시피, 국민성에 대한 이런 이상은 당대의 러시아적 전통과 유럽 사상, 특히 각 민족이 스스로의 독특한 천재성, 독자적인 역사, 제도, 언어, 기질, 덕성을 갖고 있다는 낭만주의적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러시아의 천재성은 국민과 차르 사이에 사랑과 헌신이라는 독특한 유대관계라고 생각되고 있었다."(467)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초기에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새로운 황제의 기본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혁명 세력과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그의 결심을 굳게 만들었을 따름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귀족에 대한 황제의 신뢰를 땅에 떨어뜨렸으며, 황제가 어떤 일부 신하들이 가진 독립성과 자주성에 대해서도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황제는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치세 후기에는 그의 측근 중에 민간인이 거의 한 사람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밀사에게 과도하게 의지했는데, 밀사들 중 대부분은 그를 수행하던 장군들이었다. 그들은 특별한 임무를 띠고 러시아 전역으로 파견되어 군주의 뜻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정식 행정체제의 범위 바깥에서 활동하는, 말하자면 군주의 분신인 셈이었다. 직접 명령, 절대적인 복종 그리고 적어도 공식적인 보고와 겉모습에 관한 한, 정확성이라는 군인정신이 모든 정부기구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부패와 혼란이 자리잡고 있었다."(468)


"1848년 이후 유럽의 혁명 사태에 겁을 먹은 니콜라이 1세는 완전히 반동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인들에게는 해외여행이 금지되었는데, 이 명령으로 특히 교사들과 학생들이 타격을 입었다. 의과대학을 제외하고는, 정부 장학금을 받지 않는 대학생의 수는 대학별로 300명으로 제한되었다." "헌법과 철학은 교육과정에서 배제되었고, 논리학과 심리학은 허용되었지만 신학 교수가 가르쳐야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학교 자체가 거의 폐지될 뻔했으나, 일부 고위 관리들의 시의적절한 개입이 이런 재앙을 막아냈다." "문학과 사상은 사실상 질식 상태였다. 심지어 우익 역사교수이자 관제 국민성 이론의 지도적인 주창자였던 포고딘조차도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 정부가 러시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썩어문드러져서 악취를 풍기는 묘지의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이런 질실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473)


"러시아가 1848년 이후에 겉보기에는 무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유럽, 특히 동맹국들 사이에서 러시아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점차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의 복잡하고 불운한 관계는 니콜라이 1세가 자신의 근동 정책이 유럽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도록 부추겼다." "1853년 10월에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어 러시아인들이 투르크의 함대와 수송선을 시노페 바깥에서 격침시킨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는 1854년 3월에 투르크 정부에 합세했고, 사르디니아는 그 이듬해에 개입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교전을 벌이기 직전에 멈추었으나, 동맹국들 편에서 외교적인 압력을 강하게 행사했다.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연합 세력에 대항해서 자신의 나라가 홀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855년 3월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하자, 그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2세와 동맹국들은 3월 30일에 파리 조약을 체결했다."(483-6)


# 파리 조약의 결과

1. 투르크에게 다뉴브강 입구와 베사라비아 일부를 양도

2. 흑해 중립화를 인정하여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 철수 

3. 오스만 제국 내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 포기

4. 다뉴브 공국들(미래의 루마니아)은 열강들이 공동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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