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다 -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전쟁 연대기 동아시아와 그 너머 5
개릿 매팅리 지음, 콜린 박.지소철 옮김 / 너머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1장 서막


"60년 전, 구교도 세력과 신교도 세력이 파벌을 형성한 이래로 항상 운명의 장난처럼 두 파벌 중 어느 한쪽, 혹은 두 파벌 모두를 여성이 이끌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 메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튜더, 로렌의 메리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맞서왔고, 최근 30년 동안은 오늘(1587년 2월 18일) 처형장에 선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대립해왔다." "가톨릭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 계승자로서 엘리자베스 사후에 별 마찰 없이 왕위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안에는 수많은 신봉자들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겠지만, 이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정통파의 후계자인 그녀를 살해한다면 분노한 그들이 봉기해서 이 모든 죄악을 쓸어버릴 것이 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여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 이상으로 그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할 왕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단순히 가톨릭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켜야 했다."(34-6)


2장 단순한 시민들


"만약 메리 스튜어트가 즉위하여 영국에서 로마가톨릭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그때 벌어질 내전이 어떤 것인지 런던 시민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100년 동안이나 영국은 튜더 왕조가 끊긴다면 다시 왕권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파벌 간에 싸움이 일어나, 우리가 '장미전쟁'이라고 부르는, 무정부 상태의 시대가 또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왕좌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결 중 최악이었던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의 기나긴 싸움은, 종교 문제로 촉발되는 내전의 참혹함에 비하다면 그저 무장 폭동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구의 목사들이 신도들에게 국민들이 적법한 통치자들의 권위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국가는 저주받은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킬 때마다, 신도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들이 자비로운 군주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안녕을 위해 고개 숙여 기도할 때 그들의 음성에는 필사적일 정도의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42-3)


3장 여왕의 당혹감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시동생인 프랑스 왕에게 메리의 처형에 대해 자신이 느낀 놀라움과 분노, 슬픔 등에 대해 장황한 편지를 썼으며, 파리에 있는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그 자신의 심정을 프랑스인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했다. 베네치아 주재 영국 대사는 엘리자베스가 단지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으로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데이비슨에게 건네준 것인데, 그 신하가 분별없이 권한 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교황에게 전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이비슨을 구금하고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성심을 다해 애도를 표할 생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나라의 정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며, 런던에서도 여왕의 측근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대해 놀라워하며, 진심으로 그 일이 여왕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듯했다." "엘리자베스는 필요할 때마다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했는데, 만일 그녀의 행동이 연기였다면 그것은 일생 최고의 연기였을 것이다."(61-2)


"그러나 양립할 수 없는 힘의 충돌은 아무리 묘한 마법을 쓰더라도 영원히 유보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에스파냐란 거인이 유럽 전역에서 육중한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충돌은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양자 대결만이 남은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침묵공 윌리엄(오라녜 공, 빌렘 1세)의 암살로 인해 자기 발밑에 던져진 유럽 신교도 세력의 지도자 명패를 마지못해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유야 어쨌든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몹시 싫어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말려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튜더가 무엇을 염려했든, 그것이 자신의 목숨은 아니었다. 고조되고 있던 메리 처형에 대한 요구를 그녀가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분명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지만, 메리의 처형으로, 이제 남아 있던 문은 영원히 닫혀버렸다."(66, 70)


4장 기쁨의 날들은 가고


"프랑스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멘도사는 영국 침공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멘도사는 펠리페 왕에게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가톨릭 세력이 충분한 힘을 갖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휘하의 장군들이 태만하며 부패했고, 전투 경험이 없는 영국의 민병대들은 경멸스러울 만큼 나약하다는 점을 확신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로부터 〈신중한 왕〉으로 불렸어도 억울할 게 없던 펠리페 왕의 답답할 정도의 느린 일 처리와 못 말리는 조심성이 그 거사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리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멘도사는 신앙심 수호와 명예 회복, 그리고 에스파냐의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영국이 저지른 이 마지막 잔학 행위에 대한 응징을 결심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펠리페에게 이렇게 썼다. 〈폐하께서 가능한 한 빨리 영국 침공을 서둘러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이 두 왕국의 왕위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하느님이 뜻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85-6)


5장 영국 침공 계획


"펠리페가 처음 영국 침공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네덜란드 총독 파르마는 성과가 불확실한 일에 손을 댔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 군대가 영국에 투입된다면, 프랑스는 과거에도 수차례 시도했듯이 무방비 상태인 남부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한창 북해의 맞은편 땅에서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점령한 땅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자신의 근거지마저 유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파르마처럼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에게는 악몽이었다." "더구나 브릴이나 플러싱을 손에 넣지 않는 한 파르마에게는 규모가 큰 항해용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수심이 깊은 항구가 한 곳도 없었다." "파르마는 영국 침공이 성공하려면 먼저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곧 영국 정복이 시작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95-6, 101)


# 플러싱 : 네덜란드 연합군 본거지가 있던 항구도시


6장 쓰디쓴 빵


"교황 비오 5세는 1570년 2월 25일에 엘리자베스를 이단이자 참된 신앙의 박해자로 규정하고 그녀를 파문한다는 내용을 담은 〈천상의 통치〉 칙령을 포고했다. 뿐만 아니라 비오 5세는 지금껏 교황의 권리로 강조되기는 했지만 실행된 적은 드문 권리를 근거로, 엘리자베스에게 〈가짜 왕권〉을 박탈하고 영국인들은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다고 선포했으며, 차후 그녀의 법과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이를 어길 경우 파문의 고통이 따를 거라 경고했다. 그 칙령은 안 그래도 민감한 문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그 칙령을 따른다는 것은 신교도들이나 가톨릭교도들 모두 자기 나라의 법 대신 국제적 지배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네덜란드 식민지의 펠리페 정부, 프랑스의 발루아 정부, 영국의 튜더 정부를 비롯해 각국의 정부들이 그런 교황의 권한을 부정했던 것이고,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을 반역자, 반란자로 규정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112)


7장 명백한 하느님의 뜻


"영국의 도발은 이미 펠리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드레이크는 무례하게도 에스파냐의 해안과 서인도제도를 공격했고, 네덜란드에는 레스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영국 내 가톨릭들이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이복 언니인 메리 튜더와 결혼한 이래로 펠리페는 영국 가톨릭들에게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황은 그에게 행동을 권유했고, 영국인 망명자들은 서둘러달라고 간청했으며, 그의 자문위원 중에서도 주전파가 우세했다 . 자신이 언젠가 글로 썼던 것처럼, 아마도 펠리페는 단지 이처럼 중요한 일에서는 신중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게 더 낫다는 이유로 일의 진행을 늦추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군대가 영국을 정복할 때까지 메리 스튜어트가 살아 있다면, 그녀가 영국의 여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정신은 프랑스인의 것이었고, 펠리페는 부왕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이 그의 왕조에 최대의 위협이 된다는 점을 배웠다. 이제 적어도 그런 위험은 사라졌다."(140-2)


8장 〈바람이 나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의 몇 차례 항해에 자신의 배들을 빌려주고 수익에서 왕실의 지분을 챙겨 갔지만, 그 얘기만 나오면 항상 자신은 드레이크의 계획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에스파냐 측은 드레이크를 해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자신이 에스파냐 왕과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펠리페 왕에게 도전장을 보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드레이크에게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은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으며,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아니면 자신이 병들고 부상당한 부하들과 함께 거의 다 부서진 작은 배 주디스호를 타고서 플리머스 항으로 '기어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만큼의 치욕을 에스파냐 왕에게 안겨줄 때까지 그 전쟁을 계속할 작정이었다(젊은 시절 드레이크는 멕시코의 산 후안 데 울루아의 항구에서, 뉴에스파냐 함대의 공격을 받고 무참히 패한 적이 있었다)."(148-9)


9장 턱수염이 그슬리다


"4월 12일, 펠리페는 드레이크가 약 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를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멘도사는 드레이크의 임무가 에스파냐 함대의 집결을 방해하는 것임이 거의 확실하며, 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아마도 카디스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때 카디스 만에서 세계 해전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대서양이 지중해에 맞서 승리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 동안 바다를 지배해온 갤리선의 영광이 막을 내린 것이다." "갤리선은 거대한 함포로 무장한 범선에 대항해 싸우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상대편 배에 올라탄다고 해도 제압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카디스에서 자신이 에스파냐 왕의 턱수염을 그슬려놓았다고 드레이크가 말했을 때 영국인들은 단지 허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드레이크도 수염이 다시 자랄 것임을 알고 있었다."(162-3, 168-9, 184)


10장 〈중요하지 않은 일〉


11장 통 널과 그물


"영국 함대는 사그레스 항에서 열흘간 머물면서 고기잡이 배들과 연안화물선을 사냥했다. 화물선이 운반하는 화물의 대부분은 〈쇠 테와 통 널, 또는 그와 비슷한〉 통을 만드는 물건들로, 카디스 항이나 타구스 강의 해협으로 향하는 것들이었다. 드레이크는 이 가치 없어 보이는 노획물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당시의 해군에게 이런 저장용 통은 물과 포도주뿐만 아니라 소금에 절인 고기, 생선, 비스킷과 각종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 견고한 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말린 양질의 통 널이 필수적이었다. 이 물건들은 결코 여분이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에스파냐 함대의 출항 준비로 인해 이미 공급이 달리는 실정이었다. 만일 에스파냐 함대가 마침내 출항하게 되었을 때 물통이 새거나 악취가 난다면, 또는 곰팡이 핀 통 널과 허술하게 만든 통 때문에 많은 음식이 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사그레스를 뒤덮은 연기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202-3)


"6월 18일, 드레이크는 동방 식민지에서 귀환 중이던 에스파냐 무장상선 산 펠리페호를 포착했다. 산 펠리페호의 선장은 명예를 손상하지 않을 만큼만 싸우고 나서 품위 있게 항복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어디든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배 한 척을 얻었고, 드레이크는 엄청난 전리품을 챙겨 플리머스로 향했다." "전체 값어치는 거의 114,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것은 카디스 만에서 나포하거나 침몰시키고 불태운 모든 선박과 화물을 합한 가치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에스파냐에 있는 모든 통 널과 어선을 전부 내다 팔아도 그만한 돈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레이크의 몫은 17,000파운드 이상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몫도 40,000파운드가 넘었다." "17,000파운드라는 액수는 평균적인 귀족의 재산과 맞먹는 것이었고, 40,000파운드면 군대를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산 펠리페호의 획득 덕분에 드레이크와 그의 여왕 모두 그 항해의 의미를 상업적인 모험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210)


12장 팔 하나가 잘리다


"플랑드르 서북쪽 구석에 있던 두 도시, 오스텐트와 슬루이스는 모두 전략적 요충지였다. 파르마는 신속하고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오스텐트를 점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슬루이스 역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슬루이스는 그가 원하는 수심 깊은 항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브뤼헤와 동플랑드르를 잇는 수로 연결망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곳에 있어서 영국 침략을 위한 병참에 필수적인 요지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슬루이스를 함락한 파르마는 펠리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제가 네덜란드에 온 이래로 이번 슬루이스의 포위 공격만큼 난관과 걱정이 많았던 작전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국 침략을 생각한다면, 그 목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파르마도 투르크의 술탄이 떠벌렸던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막 잘라낸 적의 한쪽 팔은 턱수염이 그슬린 것에 대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220, 237)


13장 행복한 날


"슬루이스 함락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이 약화된 상태에서 나바르의 위그노 군대와 지휘관들이 괴멸된다면 그 저항은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산발적인 저항이야 여기저기서 계속되겠지만, 프랑스에 있던 프로테스탄트의 중추 세력은 무너질 것이고, 한동안 미래는 기즈-로렌 가문과 가톨릭동맹의 급진적 광신도들, 그리고 이 둘의 재정 후원자인 에스파냐 왕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네덜란드 반란군에게는 지옥 같은 날이 될 것이고, 아마도 등 떠밀리듯 역할을 맡게 된 프로테스탄트 연맹의 총사령관이자 재정 후원자인 영국의 엘리자베스에게는 훨씬 더 끔찍한 날이 될 것이다. 위그노의 저항 세력이 붕괴되고 부르봉 가의 혈통도 끊기게 된다면, 분명 앙리 3세는 완전히 기즈 공과 가톨릭 동맹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것이고, 더 이상 파르마의 측면에 대한 위협은 없을 것이며, 또한 프랑스 해협의 항구들은 영국 침공을 위한 안전한 발판으로 이용될 것이다."(240-1)


# 1580년 10월 20일,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부르봉 가)의 위그노 군대는 주아외즈가 지휘하는 기즈(로렌 가)의 왕실 군대를 완전히 괴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장 승리의 활용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그 승리를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엘리자베스가 많은 자금을 투입해 고용한) 도나 남작 휘하의 강력한 기사단인 8,000명의 독일 기병대와, 거의 같은 수의 독일 용병 보병부대 란츠크네히트, 거기에 부이용 공작이 모집하고 지휘하는 약 18,000명의 스위스 옹병들까지 합세한 이들 용병부대는,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로 들어온 외국 군대 중 가장 강력했으며, 게다가 이미 4,000 내지 6,000명의 위그노들이 합세해 전력이 더욱 보강된 상태였다. 만일 나바르가 즉시 그들과 합류해 자신의 군대까지 합쳐 더욱 강력해진 군대를 이끌고 파리 공략에 나선다면 프랑스 왕은 항복하든지 항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오랜 세월 이어진 지루한 내전을 첫눈이 내리기 전에 승리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쉴리 공으로 불리게 되는 막시밀리앵 드 베튄과 같은 신앙심이 투철한 위그노들은 이토록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나바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256)


15장 불길한 해


"1588년이 다가오자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끔찍한 소문들이 서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기본적으로 그 운명의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수비학(數秘學)에 기초한 것이며, 〈다니엘서〉 12장의 암시들로 의미가 명료해졌고, 〈이사야서〉에 있는 소름 끼치는 구절로 뒷받침되었다."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퍼진 1588년에 대한 예언들은 나라마다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다르게 해석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 왕이 미래를 예언하려는 모든 시도를 나태하고 불경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종교재판소에서도 천년왕국설과 점성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자신이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길한 예언들의 논의를 최소화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그녀의 백성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278, 281, 291)


16장 이 장려한 배들과 함께


"영국은 적어도 육상에서만큼은 1587년 가을보다 1588년 4월에 침략 위험에 대해 방어 태세를 더 잘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거의 다 알고 있던 영국인들조차도 전투가 육지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영국인들은 바다가 자신들을 방어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이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그러한 인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헨리 8세는 이미 확립된 전통을 기반으로 유럽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많은 돈을 전투용 선박에 썼다.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긴 것과 점차 심해지는 에스파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바다에 의존하는 의식은 훨씬 더 강해졌다. 1588년 무렵, 엘리자베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군주로 부상했다. 영국 해군의 핵심 전력은 강력한 갤리언선 18석이었다. 이 배들 중 가장 작은 것조차도 300톤이나 나갔고, 모두 새로운 방식으로 건조되고 무장되어 있었다."(305-6)


"드레이크와 호킨스 등이 불평했던 것, 그리고 이후로도 여러 역사가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은, 엘리자베스가 대담하게 그런 훌륭한 함대를 에스파냐 해안에 파견해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을 차단하고 펠리페의 전함들을 항구에서 꼼짝 못하도록 봉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배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배치한 채 대기 상태로 계속 항구에 정박시켜두었고, 그럼으로써 영국 해군의 기본 전략 원칙 중 하나가 된 것[선제공격]을 깼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런 결정을 함으로써 선원들은 육지에서 신선한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 비용의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부담함으로써 춘계 군사작전을 위해 포장하고 비축해둔 식량뿐만 아니라 여왕의 돈도 아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함장들이 에스파냐의 무역선들을 약탈하고 에스파냐 왕에게 도전하는 데 쓰고 싶어 했던 힘을, 대신 영국 함대가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쓸 수 있었다."(308-9)


17장 〈기적을 빌면서〉


"에스파냐 해군이 플로렌시아호로 이름을 바꾼 산 프란체스코호에다 인도양 수비대 소속 갤리언선들을 합쳐, 메디나 시도니아는 총 20척의 갤리언선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력 면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용적 톤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가 보유한 가장 훌륭한 배 20척과 거의 맞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메디나 시도니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도, 개선은 고사하고 더 악화되는 것조차 막을 수 없는 함대의 상황들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력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대로 훈련받은 포병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앞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될 테지만, 거포, 특히 컬버린 포가 부족하다는 문제에 가려져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비록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겠지만, 메디나 시도니아는 조급해하는 펠리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과, 시간이 조금 더 있다고 해도 남아 있는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30-2)


18장 바리케이드의 날 1


19장 바리케이드의 날 2


"파르마는 파리에서 벌어진 반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화톳불을 밝히라고 명령했지만, (가톨릭동맹을 이끄는) 기즈가 시민들로부터 스위스 연대와 프랑스 수비대를 구해준 데다가 루브르 습격까지 실패했으며, 설상가상 앙리가 탈출하게 내버려뒀다는 말을 듣자 고개를 저었다. 파르마는 이렇게 말했다. 〈기즈 공은 우리 이탈리아 속담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칼을 뽑아 군주에게 겨눈 자는 칼집을 멀리 던져버려야 하는 법인데.〉 (반란자들에게 물적, 심적 원조를 제공한) 멘도사도 앙리가 파리를 빠져나간 것에 대해 걱정은 했겠지만, 이제 앙리 3세가 기즈에게 항복을 하든 저항을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에페르농은 노르망디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고, 파르마가 없는 사이에 프랑스군이 저지대를 농락할 위험도 전혀 없을 것이다. 파르마의 측면은 안전해졌고, 메디나 시도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프랑스의 위협에 관한 한 에스파냐 함대는 아무 걱정 없이 항해를 하게 된 것이다."(370-1)


20장 무적함대 출항하다


"리스본을 떠난 이후로 점점 메디나 시도니아는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해안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에도 날마나 새로운 결함들이 드러났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음식이었다. 매일 음식이 상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너무도 많은 통이, 음식과 물을 담고 있는 것 모두, 눈속임으로 건조가 안 된 생나무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또한 폭풍으로 함대가 흩어져 버려서 모을 수 있는 힘은 더욱 적어졌으며, 실종된 배들 중 최소한 일부는 폭풍우에 희생되었거나, 프랑스와 영국 해적선의 재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거나 최소한 1년 정도 출정을 미루는 게 낫지 않을지 숙고해달라고 펠리페에게 간청했다. 펠리페의 답은 신속하고도 단호했다. 총사령관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언급한 결점들을 개선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항해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펠리페의 명령에는 변함이 없었다."(383-4)


21장 〈시간과 공간의 이점〉


"승리의 절반이 보장된다는 시간과 공간의 이점이 우선은 에스파냐 함대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들의 적은 그 바람 때문에 항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습의 완전함에 대해 과대평가하기 쉽다. 전위함대의 위치, 함장의 항해 기술, 선박의 속력과 바람을 이용하는 능력 등에 힘입어 플레밍이 제때에 보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전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함대는 여전히 일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무장상선들에 보급품을 싣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출정할 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를 에스파냐 해안에서 돌아오게 한 남쪽의 바람이 그들도 데리고 나왔군. 우리가 돌아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었어.〉 하워드의 말을 보면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와 전쟁위원회가 이런 상황의 전개를 예견하지 못했다면, 해전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400)


22장 경기장에 입장하다


"1588년 7월 31일 아침, 마침내 조우한 아르마다는 낯선 초승달 모양으로, 영국 함대는 한 줄로, 혹은 앞쪽은 두 줄로, 각기 선택한 대형으로 늘어선 다음 서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아침, 아르마다와 영국 함대가 대치하고 있을 때, 양쪽의 총사령관들은 멍한 상태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갈팡질팡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세상에 이런 함대들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런 함대 둘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무기들이 어떤 성능을 발휘할지,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그 무기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지 아무도 몰랐다. 해전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형을 이루고, 나무로 선체를 만들고, 돛으로 움직이며, 활강포로 무장하는 것이 해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날이 시작된 것이다. 선체에 철갑을 두르고 시조포로 무장한 채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전함은 단지 이 새로운 날의 저녁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414-5)


# 활강포는 포신 안에 강선이 없는 포이고, 시조포는 강선이 있는 포를 말한다.


23장 첫 번째 유혈


"첫 날의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다소 맥빠지는 경험이었다. 에스파냐 측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에스파냐 함대에서 레칼데의 배만큼 타격을 입은 배는 없었고, 레칼데 배의 피해도 앞돛대에 포탄 두 발을 맞고 돛줄 몇 개가 끊어지고 삭구가 날아가고 서너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국 함대의 장거리 포격이 권투로 치면 성가신 잽 정도였지만, 분명 영국 측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잽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에스파냐 함대가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영국 함대도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강한 적이었던 것이다. 그날 내내 에스파냐 함대가 보여준 조종술과 군기는 나무랄 데 없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작할 때와 같은 투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는 아르마다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목책 성벽처럼, 무서운 요새처럼 보였다."(421-2)


24장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


"영국군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아르마다 앞에서는 어떤 작전을 써도 먹히지 않는다는 쓰디쓴 교훈을 얻었다. 그들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교전에서도 에스파냐 함선을 많이 침몰시킬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에스파냐 갤리언선을 하나씩 망가뜨리다 보면 대형이 흐트러져 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이 잡은 에스파냐 함선은 로사리오호와 가라앉고 있던 거함 산 살바도르호, 두 척뿐이었다. 물론 영국군은 자기들이 포를 잘 쏜 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둘 다 사고로 손상된 것이었다. 한편 이틀 동안의 교전, 특히 포틀랜드 빌 앞바다의 격전을 치르며 영국 함대는 하워드가 표현한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배에 화약과 포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워드는 화약과 포탄이 없어서 더는 싸울 수가 없다는 아주 절실한 편지를 뭍으로 써 보냈다. 하워드의 말과는 달리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에 손상을 입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446)


25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초승달 대형


"16세기형 배의 대포는 조준도 어렵고 제대로 발사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50미터 거리에서는 별 차이 없는 실수가 500미터 거리에서는 목표물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함대가 영국해협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더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에스파냐 함대였다. 메디나 시도니아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함대가 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파르마와 약속하지 않은 채 북해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인 듯했다. 토요일 오후 늦게 칼레 해역에 다다른 아르마다는 번개같이 돛과 닻을 내렸다. 이것은 치밀하게 실행한 작전이어서, 깜짝 놀란 영국 함대는 바람과 조류 때문에 정박할 곳을 지나쳐 유리한 위치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영국 함대는 메디나 시도니아의 신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르마다의 닻줄이 다 풀리기도 전에 영국 함대도 닻을 내렸고, 이제 두 함대는 칼레 해안 절벽 옆에 정박한 채 멀찍이서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459-60)


26장 불벼락 화공선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 함대가 있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강한 조류가 도버 해협 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함선들이 빼곡하게 정박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는 화공선 공격을 당하기에 더없이 적합했다는 점을 걱정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에스파냐군 정박지의 감시병들은 돛을 모두 펼친 채 삭구에 불이 타오르는 여덟 척의 커다란 배들이 바람과 조류를 타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종범선 두 척이 그 배들을 해변으로 끌고가기 위해 갈고리 닻을 던지려는 순간, 불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이중 장탄된 대포들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바다 위 여기저기에 마구잡이로 포탄이 떨어졌고 그 반동으로 불꽃들이 분수처럼 솟았다가 배 안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두 종범선이 혼란에 빠져 자리를 피하고 있을  때 나머지 화공선 여섯 척이 한꺼번에 정박해 있는 아르마다를 향해 돌진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위로 대포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불꽃이 분수처럼 하늘로 치솟았다."(472-5)


27장 대형이 무너지다


"방어막이 화공선들을 놓치는 광경을 본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를 발사하며 닻줄을 풀고 돛을 활짝 편 채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유가 무엇이든 함장들 대부분은 줄을 끊고 바람을 타면서 마치 화공선을 두려워하는 만큼 서로를 두려워하는 듯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물살과 돌풍이 워낙 강하다 보니 어지럽게 모여 있던 배들은 해협을 지나 플레미시 해변의 모래톱까지 휩쓸려 올라갔다. 그 가공할 초승달 대형이 마침내 무너졌던 것이다." "양쪽 모두가 대단한 용기와 과감한 지도력을 갖고 있으면 승리는 최고의 배와 최고의 대포를 가진 쪽에 돌아간다. 영국 배의 우월성은 이미 실전에서 여러 번 증명된 바 있었다. 영국 함선들은 적의 측면을 포위해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었고, 바람을 이용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사정거리를 선택하고 원하는 때 언제든지 전투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영국군이 가장 큰 이점은 그때까지도 탄약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476, 484)


28장 때늦은 기적


"메디나 시도니아가 알아낼 수 있는 한, 남은 것은 약간의 화약뿐이었고 포탄은 전혀 혹은 거의 없었다. 아르마다가 처음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일급 선박들은 대부분 물이 샜다. 대부분의 배가 가로횡대와 삭구를 잃었고 갑판에는 파편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바닷물의 흐름과 해저의 경사였는데, 배 앞쪽에서 좌현 뱃머리의 바다 쪽으로 멀리까지 물의 색깔이 달랐다. 현재의 진로대로라면 반시간도 못 되어서 아르마다 전체가 제일란트의 모래톱에 처박힐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배가 좌초할 때 받을 충격에 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흥분에 겨운 한 목격자는 바람이 완전히 반대로 방향을 바꿔 남동쪽으로 불었다고 증언했다." "아르마다 전체가 먼 곳으로 나와 깊은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메디나 시도니아와 그의 사제 모두 아르마다가 신의 기적 덕분에 살아났다고 확신했다."(489-92)


29장 〈내 그대들의 장군이 되어〉


30장 드레이크 사로잡히다!


"아르마다가 영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앙리는 점점 더 고분고분해졌다. 마침내 앙리는 협박에 못 이겨 알랑송 칙령에 서명했다. 그 칙령에서 이단자나 이단을 부추기는 자는 절대 프랑스 왕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제정하는 등 가톨릭동맹의 극단적인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앙리의 양보 조치는 대부분 서류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멘도사는 프랑스 왕을 가톨릭동맹과 기즈의 손아귀에 넣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에스파냐의 속국으로 만들려면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몇 주 동안 메디나 시도니아의 암울한 〈항해일지〉를 읽고 있었다. 그것을 가져온 돈 발타사르 데 수니가가 패배한 아르마다의 상태를 암담하게 보고하기도 했다." "결국 펠리페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멘도사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이렇게 갈겨썼다. 〈이건[멘도사가 보내오는 낙관적인 급보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512-4, 524)


31장 멀고 먼 귀향길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해협에 들어선 이래로 갈레아스선 한 척을 비롯해 적어도 일곱 척의 가장 중요한 배들을 잃었다. 나머지 일급 선박들도 대포에 맞아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병사 중 5분의 1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군수품은 거의 바닥이 났다." "비축했던 보급품이 심각한 문제였다. 신선한 음식은 더 이상 없었다. 비스킷은 대부분 곰팡이가 슬거나 썩어가고 있었으며, 소금에 절인 생선과 고기는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물 부족이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음식들은 그다지 인기가 있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두 주 동안 폭풍이 몰아쳤는데 최악의 방향인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걷잡을 수 없는 맞바람이었다." "19일 후, 산 마르틴호는 에스파냐 북부의 항구도시 산탄데르에 닻을 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며칠 뒤, 7월에 영국으로 떠났던 배들 가운데 66척이 에스파냐 항구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추가로 들어온 배는 단 한 척뿐이었다."(525-30)


32장 거인의 최후


"만일 앙리가 원한 것이 오직 안락과 외형적인 존경과 왕권의 껍데기였다면, 기즈의 통치에 굴복하고 왕관을 기즈의 로렌 가문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다음 그 대가로 그것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늙은 부르봉 추기경이 기꺼이 성사시키려고 한 거래였다. 그러나 앙리는 그렇게 많은 친구와 원칙을 배신했어도 왕권이라는 이념은 배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기즈의 근본적인 왕위 찬탈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공개 처형과 같은 방법으로 그를 쳐서 쓰러뜨렸다. 그래서 앙리는 일곱 달 뒤 성 클라우드에서 자크 클레망이라는 자의 단검에 생을 마감했을 때 나바르에게 자신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었다." "멘도사는 기즈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했으나 둘 사이가 수월한 동반 관계는 아니었다. 교황 식스토 역시 기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에스파냐 국왕이 선장을 한 명 더 잃은 게로군.〉"(552-4)


33장 신의 바람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승리를 바람 탓으로 돌린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하워드에게 수여한 훈장에는 〈하느님께서 숨을 내쉬자 그들은 흩어졌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네덜란드 훈장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음을 라틴어 시로 축하한 시인들은 신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폭풍우로 에스파냐군 수천 명을 익사시켜주셨음을 찬양하느라 바빠서 영국 함대의 공훈에 대해서는 언급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영국 함대는 아르마다가 날씨 문제로 고전하기에 앞서 더 좋은 배와 더 좋은 포(砲)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적의 멸망을 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여길수록 신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터였고, 아르마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프로테스탄트 신이 의도한 바가 된다. 결국 다른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마다를 궤멸한 엄청난 폭풍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559)


34장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에필로그


"아르마다의 패배는 한 가지 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라는 거인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진격하는 것을 보아왔다. 점점 명백해지는 신의 계획과 미래의 물결인 섭리가 에스파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에스파냐가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가톨릭들은 에스파냐가 신의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로 확실히 선택받은 것을 가톨릭으로서 축하했다. 그동안 각지의 프로테스탄트들도 그만큼 겁을 먹고 당황스러워했다. 아르마다가 영국해협의 오랜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집 앞에서 도전했을 때, 임박한 분쟁은 누가 천벌을 받을지를 가르는 결투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런 결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신께서 옳은 자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이었다. 이 분쟁의 해에 관한 불길한 예언, 너무나 오래되고 외경스러워 가장 깨어 있고 회의적인 이들조차 무시해버릴 수 없던 예언 때문에 이 결투의 엄숙함은 더욱 커졌다."(572-3)


"(이상한 폭풍의 힘이 가져온 전투 결과에)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언제나 믿어온 것처럼 신이 실제로 자신들의 편임을 안도하며 확인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가톨릭들도 에스파냐가 결국 신이 선택한 수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똑같은 안도감을 가지고 확인했다. 에스파냐의 우세가 한 세대 이상 더 지속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에스파냐의 전성기는 지나가 버렸다. 특히 프랑스는 블루아에서 앙리가 기즈를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오스트리아 가계(합스부르크)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로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유럽의 자치권이 합스부르크 가에게 위협받는 동안 그 자치권을 지키는 최고 보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길고도 어정쩡한 에스파냐와 영국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마다의 패배는 정말로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일체성을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계승자들에게 강제로 다시 부과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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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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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백년전쟁'이란 표현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표현은 100년 넘게 이어진 일련의 전쟁들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1337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당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던 에드워드 3세한테서 잉글랜드가 보유하고 있던 기옌 공국을 '몰수'하면서 시작된 이 일련의 전쟁들은 1453년 잉글랜드가 결국 보르도를 상실하면서 끝났다. 대부분의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장궁의 화력 덕분에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누렸다(그러나 한때 무적이었던 잉글랜드 궁수들이 프랑스 대포에 의해 궤멸된 전쟁 말기의 패전들도 있다)." "물론 우수한 무기로 그토록 자주 승리를 따낸 뛰어난 잉글랜드 궁수는 칭송해야 하고, 만약 프랑스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면 그들도 똑같이 나쁘게 행동했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했으며 그때의 기억, 즉 프랑스의 국가적 신화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기억은 이후로 두 나라 사람들의 관계를 줄곧 해쳐왔다."(11-3)


1장 전쟁의 서막 1328~1340년


"10세기 이래 새로운 농업이 발전하면서 북서유럽 농민들은 점점 더 많은 임야를 쟁기로 갈아 비옥한 토양을 개척할 수 있었다. 14세기 초까지 경작지는 매년 확대되었고, 출생률도 함께 상승했다. 프랑스만큼 이런 발전이 뚜렷하게 이루어진 곳도 없어서, 1330년대 프랑스의 인구는 2,10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수치는 잉글랜드 인구의 다섯 배에 해당한다. 프랑스 상인과 장인들도 증가하여 알프스 이북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와 대성당을 지었다. 고딕 양식의 파리는 북유럽의 중심지가 되었고, 인구는 15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중세 잉글랜드는 오늘날 노르웨이 수준의 인구 과소 지역으로, 경작지보다는 숲과 황야가 더 많았다. 이 작고 가난한 나라의 재산은 양모였다. 런던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프랑스의 필리프와 달리 잉글랜드 국왕은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에드워드 3세는 항상 그의 〈의회 귀족들〉, 즉 100여 명의 봉건영주와 주교, 소두원장의 의향을 신중히 고려해야 했다."(25-6)


"그러나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결국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와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와 기옌 간의 오래된 봉건 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시에 에드워드 3세는 1259년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가신 자격으로 보유한 아키텐 공국(즉 기옌)을 유지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공국은 에드워드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때로 기옌의 세수는 잉글랜드의 세수보다도 컸다. 공국의 수도로 인구가 3만 명이었던 보르도는 잉글랜드와의 왕래로 번영을 구가했다. 백년전쟁에 관한 뛰어난 권위자인 케네스 파울러 박사가 쓴 대로, 〈13세기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들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어쩌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불완전하게 아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종주권suzerainty을 주권sovereignty으로 승격시키고, 공작의 영주 권력을 지주 권력으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22, 29)


"1339년 전역이 특별히 흥미로운 이유는 프랑스의 비전투원들이 당한 참화 때문이다. 적국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해 시골과 도시 모두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 중세 전쟁의 관습이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와 치른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이 고약한 관습을 얻었고, 에드워드는 1339년 원정 때 젊은 왕세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불태우고 약탈하여 〈시골의 곡물과 가축, 여타 물품이 남김없이 파괴되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병사들은 집집마다 들어가 약탈한 뒤 불을 놓았고, 작은 촌락들은 하나같이 불길에 휩싸였다. 수도원이나 교회, 구호원도 이런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민간인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고, 굶어 죽어가던 수천 명은 요새화된 도시로 도망쳤다. 잉글랜드 국왕은 그러한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방에서 펼치는 '총력전'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았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이 전쟁에 지치기를 바라며 슈보시, 즉 체계적으로 적의 영역을 초토화하는 습격 전술을 최대한 활용했다."(44)


2장 크레시 전투 1340~1350년


"궁수들의 무기, 즉 유명한 잉글랜드 장궁English long-bow은 군사 전술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실 이 장궁은 잉글랜드보다는 웨일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잉글랜드인들은 12세기 궨트 전역 동안 두꺼운 교회 문을 관통해 화살을 날려 보내는 웨일스인들의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 장궁에 주목했다. 에드워드 1세 이래로 모든 시골 장정들은 법에 따라 일요일마다 나무 둥치에 활쏘기 연습을 해야 했으므로 잉글랜드의 모든 마을들이 국가적인 궁수 자원 풀에 기여해온 셈이다. 1346년이 되자 장궁은 규격화되었고, 궁수들은 화살을 스물네 발씩 소지했다. 추가 보급품은 수레에 실려왔다. 장궁 궁수는 문자 그대로 하늘을 어둡게 뒤덮으며 분당 열 발이나 심지어 열두 발도 쏠 수 있었다. 사정거리는 135미터가 넘었고, 판금 갑옷을 꿰뚫을 수 있는 거리는 55미터 정도였다. 런던탑에는 활과 화살을 저장해둔 거대한 무기고가 있었다. 활대 다수가 기옌에서 수입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68-9)


"1346년 8월 26일에 펼쳐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해질녘부터 축시[새벽 1~3시]까지〉 열다섯 차례 돌진했고, 돌진은 매번 빗발치는 화살 세례 속에서 아수라장으로 시작해 아수라장으로 끝났다. 프루아사르는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은 그 혼란상을, 특히 프랑스 병사들의 와해와 무질서를 묘사하기는커녕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살육은 웨일스와 콘월의 단검병들이 〈땅에 쓰러진 백작과 남작, 기사와 종자들을 가리지 않고 베고 죽이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군의 마지막 공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개되었다. 어둠이 깔리자 죽은 자들을 제외한 많은 기사들이 조용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전장에서 타던 말 한두 마리를 잃었고, 자신도 목에 화살을 맞은 필리프 국왕이 어둠 속에서 최후의 필사적인 돌격을 감행하고자 했을 때 그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고작 60명의 중기병뿐이었다. 라브루아 궁성으로 피신한 국왕은 다시 밤새도록 말을 달려 더 안전한 피난처가 있는 아미앵으로 갔다."(86-7)


"교황의 중재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347년 9월 휴전에 합의했다. 필리프 국왕은 절박한 처지였다. 그의 군대가 궤멸했을 뿐 아니라 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침공에 대비하여 지체없이 세력을 재건해야 했다. 이 오만하고 도도한 남자는 그해 11월 파리에서 열린 삼부회 앞에서 몸을 낮췄다. 삼부회의 대변인은 국왕에게 〈전하께서는 나쁜 조언에 귀를 기울여 모든 것을 잃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고, 국왕이 〈크레시와 칼레에서 한심하게 쫓겨났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좌절과 굴욕을 겪고 나서도 그는 잉글랜드를 침공할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3세는 백성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의회 두루마리 문서는 양원이 모두 국왕의 승리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그들이 찬성하여 왕에게 준 돈이 잘 쓰였다는 데 동의하는 안을 가결했다고 기록한다. 〈잉글랜드 왕국이 다른 어느 국왕의 치세 때도 보지 못한 정도로 바뀌고, 영예로워지고 부유해졌다.〉"(93)


3장 푸아티에 전투와 흑태자 1350~1360년


"이제 잉글랜드인들은 프랑스를 일종의 엘도라도로 여겼다. 잉글랜드 전체가 프랑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넘쳐났다. 심지어 병사들의 급료도 상당했다. 기마 궁수는 하루에 6실링을 받았는데 이 금액은 고국에서 숙련 장인이 받는 임금과 맞먹었고, 훌륭한 쟁기꾼이 2실링을 벌면 운이 좋을 때 보병 궁수는 하루 3실링을 받았다. 더욱이 자원한 궁수와 중기병의 고용 계약 시스템은 그들이 전리품을 한몫 차지할 수 있게 보장했다. 그러나 파울러 박사의 표현대로 〈사람들을 전쟁터로 유혹한 것은 이익의 확실성이 아니라 대박을 터뜨릴 가능성, 흔히 100분의 1도 안 되는 그 가능성이었다〉. 전쟁은 무거운 세금이 다시 부과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국왕이 적대 행위를 재개하길 희망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러한 열성적인 반응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이용 가능한 원시적인 매스미디어를 철저히 활용함으로써 자신이 놀랍도록 세련된 홍보 전문가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107-8)


"1350년부터 1364년까지에 해당하는 백년전쟁의 다음 단계에서는 필리프의 아들인 프랑스 국왕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결국에는 기옌에 영구적으로 자리를 잡는 흑태자가 전면에 부상한다." "1356년 9월 18일에 펼쳐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패한 장 국왕과 그의 열 네 살 된 아들 필리프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붙잡혔다. 영국해협 너머에서는 〈프랑스군이 패주하고 그 국왕이 포로로 잡혔다는 푸아티에 전투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모든 교회에서 장엄한 의식을 거행했고, 잉글랜드 전역에서 밤새 커다란 불을 지피며 축제를 벌였다〉." "한편 중앙정부가 붕괴한 프랑스는 대혼란에 빠져들었다. 열 여덟 살의 병약한 젊은 도팽 샤를한테는 너무 벅찬 상황이었다. 나바르 국왕의 추종자들이 노르망디에서 들고일어났을 뿐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부대[계약이 만료된 용병단], 즉 루티에routier들이 성을 점령하고 노상강도 귀족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101, 125-6)


# 도팽 :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붙이던 칭호로 보통 왕세자로 번역된다


"1360년 5월 1일 샤르트르 근처의 브레티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일주일 만에 흑태자와 도팽은 합의에 도달했다. 장 국왕의 몸값은 금화 300만 크라운(50만 파운드)으로 삭감되었고, 영토에 대해서도 1차 런던조약 때 제시된 축소된 조건으로 결정되었다. 즉 기옌의 완전한 주권과 더불어 리무쟁, 푸아투, 앙구무아, 생통주, 루에르그, 퐁티외 외에 다른 많은 지구들 역시 완전한 주권과 함께 잉글랜드의 소유가 된 것이다. 10월 24일 브레티니조약이 칼레에서 비준되었다. 약속된 지역들이 잉글랜드 쪽에 완전히 양도되면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장은 할양 지역들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에드워드는 더는 자신을 프랑스 국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공식적인 포기 선언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새 국가의 통치자는 잉글랜드 국왕이 아니라 보르도의 흑태자였고, 에드워드는 그에게 아키텐 공작 작위를 내렸다."(132-3)


4장 현명왕 샤를 1360~1380년


"샤를 5세는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왔다. 그는 아버지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부과했던 가혹한 소비세─에드세aides[포도주세], 타유세taille[토지세], 가벨세[소금세]─를 계속 유지, 확대해왔고 여전히 몸값의 절반가량을 빚지고 있었지만 그의 군자금 담당 대신들은 국왕의 병사들에게 이전보다 더 정기적으로 급여를 지급할 수 있게 신경 썼다. 프랑스 국왕은 잉글랜드에 더 이상 몸값을 보내지 않았고, 그가 특별세에서 얻는 수입은 잉글랜드 의회가 에드워드 3세에게 허용한 비정기적인 전시 세입보다 열 배나 많았다. 프랑스 국왕은 군사 문제를 다루는 창의적인 칙령들을 여러 해에 걸쳐 내렸고, 마침내 상시 병력─상비군까지는 아닌─을 얻었다." "샤를의 전략은 초토전술과 게릴라 습격전을 결합한 것으로, 그는 프랑스군에 잉글랜드군과 전면전을 치르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새로운 지휘관들에 변경의 수비대장이나 루티에로서 능력을 입증한 무명의 인물들을 중용했다."(147-8)


"전반적으로 프랑스군은 승산이 있을 때도 전면전을 피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의 전술은 급습과 야간 공격, 매복, 전체적으로 적을 성가시게 하는 전술이었다. 그는 수비대 숫자가 적은 고립된 도시와 요새에 집중하여 식량 징발 부대와 짐마차 행렬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차단하고, 지속적인 기습 공격으로 적의 사기를 서서히 떨어뜨렸다. 포위전에서는 재빠른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좋은 조건과 심지어 돈을 제시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의 전체적인 전략은 아키텐의 프랑스인들이 들고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으로, 이를 위해 말로 설득하고 뇌물로 매수하고 위협을 하는 등 여러 수법을 구사했다." "1376년 4월에는 〈잉글랜드 기사도의 꽃〉이었던 흑태자가 세상을 떠났다. 수비대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잉글랜드 병력은 충분하지 않았고, 적은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잉글랜드 거점들도 함락되어 있었고, 심지어 건지섬마저 웨일스의 에번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침공당했다."(152-5)


"1373년 말 아키텐 공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옌마저 축소되었다. 그해에 앙주 공작은 잉글랜드 쪽 가론강 변에 있는 바자와 보르도로 통하는 요충지인 라레올마저 장악했다. 플랜태저넷가의 오랜 봉신인 알브레마저 발루아 쪽으로 넘어가,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작아진 기옌 공국 안쪽으로 돌출부가 생겨났다. 더욱이 잉글랜드의 요새를 모두 포함해 브르타뉴 대부분도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브르타뉴 공작은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다. 북부에서는 오직 칼레와 노르망디의 한 수비대만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1374년부터 샤를 5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다른 질환들에 통풍까지 추가되었다. 총사령관 뒤게슬랭은 기옌의 심장부를 점령할 가망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1374년 1월 그와 곤트는 페리괴에서 만나 아키텐 전역에서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1375년 6월 추가적인 휴전 협상이 이루어져 프랑스 전역에서 2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156-7)


5장 잃어버린 평화 1380~1399년


"138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은 둘 다 미성년자였다. 1367년 보르도에서 태어난 리처드 2세는 과대망상증의 기미가 있었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적을 만드는 데 소질이 있는 깐깐하고 고압적인 사람으로 자라났다. 리처드보다 한 살 어린 샤를 6세는 과도하게 향락에 빠져 살고 정신착란과 호전적인 기질이 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할아버지 장 2세를 빼닮았다." "이 시기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은 국제분쟁이었다. 리처드 2세 재위 초반에 잉글랜드 의회는 〈프랑스, 에스파냐, 아일랜드, 아키텐, 브르타뉴와 여타 지역〉에서의 온갖 전쟁들을 걱정스럽게 언급했다─이 전쟁들은 곧 플랑드르와 스코틀랜드, 심지어 포르투갈로까지 확대된다. 갈등은 로마와 아비뇽 간의 분열로 더욱 악화되었다. 갈등을 중재할 불편부당한 교황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기옌과 바다에서 공격하는 쪽은 잉글랜드인들이라기보다는 프랑스인들이었고, 잉글랜드는 침공의 두려움에 떨었다."(173-4)


"1388년 11월 샤를 6세는 숙부들을 국왕 자문회의에서 쫓아내고, 아버지의 대신들(민간에 '마르무제'로 알려져 있었다)을 재등용했다. 마르무제 가운데 대단히 유능하고 냉철한 자들이 화평을 맺기로 결정했다." "1389년 5월 리처드 2세 역시 권력을 잡아 스스로 통치할 수 있었고, 그 역시 화평을 원했다." "1389년 6월 18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단은 칼레 근처의 투링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리처드는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393년 셰르부르는 새로 즉위한 나바르 국왕에게 되팔렸고(나바르는 그곳을 재빨리 프랑스한테 재매각했다), 브레스트는 1396년 브르타뉴에 팔렸다. 양측 모두 항구적인 합의를 보고자 했다. 샤를 국왕과 그의 귀족들은 투르크를 상대로 한 십자군 원정을 떠날 수 있게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해결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부르고뉴의 필리프도 자기 백성들이 잉글랜드와의 우호적인 통상 관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화평에 열성적으로 호응했다."(187-8)


"리처드 2세는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인물, 즉 자신의 왕국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더 완벽하게 소유하길 원해서 결국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도를 넘고 말았다. 곤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볼링브루크의 헨리를 국외로 추방하고, 1398년에 곤트가 죽자 볼링브루크를 평생토록 유배시키고 그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한 것이다. 이 일과, 그가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든 사면을 받기 위해 엄청난 돈을 내도록 만든 조치와 같은 공공연한 여타 부당한 처사에 잉글랜드의 대귀족들은 격분했다. 1399년 리처드가 아일랜드로 떠나 있는 동안 볼링브루크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많은 지지를 받아 국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다." "볼링브루크는 헨리 4세로 즉위해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리처드는 몇 달 뒤 사망했는데, 스스로 곡기를 끊은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2세의 결점이 무엇이었든 그는 진심으로 프랑스와 화평을 맺으려고 시도했고, 그의 실패는 전쟁의 재개를 의미했다."(192-3)


6장 잉글랜드의 기회 1399~1413년


"1400년의 프랑스 왕국의 표면적인 강력함은 실재라기보다는 프랑스 궁정과 프랑스 왕족들의 화려한 위용에 기인한 것으로, 실속 없는 허울에 불과했다. 왕국이 거대한 아파나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와 달리 프랑스의 공작령과 백작령들은 영토적 실체로, 때로는 여러 도道 전부가 작위와 함께 상속되면서 반半독립적인 제후령을 이루었다(잉글랜드에서 그나마 이와 비견될 만한 사례는 랭커스터 공작령이다). 아파나주를 보유한 발루아 왕가의 탐욕스러운 왕족들은 인근의 시골이 여전히 루티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을지라도 대개 자신들의 아름다운 성에서 반쯤 국왕처럼 화려하게 사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두 명이 있었으니,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이었다." "샤를 6세가 정신이 말짱한 시기와 갈수록 길어지는 광증의 발작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면서 정신이상에 시달리자, 두 공작은 모두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단단히 작심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중요 정책마다 대립했다."(202-3)


# 아파나주apanages :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왕자나 형제들에게 하사되는 작위와 영토


"프랑스, 특히 파리는 무장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였다. 아르마냐크파는 지도자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의 이름을 땄는데, 루이의 아들인 오를레앙의 샤를과 아르마냐크 백작의 딸이 결혼한 사이였다.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마냐크파는 왕가의 대신료들과 소수의 부유한 부르주아, 장의 영토 바깥의 대다수 귀족들과 다른 왕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에 반해 부르고뉴파는 파리의 부르주아와 학계의 지지를 받았다. 1408년 장은 사촌(오를레앙의 루이)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그가 폭군이었다는 것을 근거로─소르본 대학의 신학자를 기용했고, 파리로 돌아와 국왕의 사면을 받아냈다." "1413년 8월, 부르고뉴의 용맹공 장은 샤를 6세를 납치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파리를 아르마냐크파와 베르나르 백작의 잔혹한 가스코뉴인들에게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몇 년 동안 자신의 반半왕국에서 지냈다. 이미 프랑스가 그와 아르마냐크파에 의해 망가진 뒤였다."(204-5, 208)


7장 헨리 5세와 아쟁쿠르 전투 1413~1422년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가 펼쳐졌다. 전장의 진흙탕은 궁수들에게 유리했고, 그들은 육중한 프랑스 병사들 옆에서 가뿐하게 움직이며 갑옷의 접합 부위를 찌르거나 그들을 쓰러 넘어뜨렸다. 프랑스 중기병들 대부분은 진흙탕에 익사하거나 자기 몸 위로 쓰러진 동료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죽었다." "141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화평을 주선해 교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그의 진짜 임무는 교회 분열을 치유하는 것으로, 이 일은 1417년 마르티누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는 화평 주선은 뒤로하고 헨리와 상호 원조,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부르고뉴의 장 공장은 잉글랜드 편에 서기로 결심했고, 그해 10월 헨리를 만나러 갔다. 공작은 헨리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샤를 6세를 폐위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은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 될 것을 약속했다."(230-1, 234-5)


"1417년이 되자, 헨리 5세는 느리고 철저한 포위전을 통해 차근차근 지역을 손에 넣어 프랑스를 정복하고 복속할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노르망디부터 시작될 터였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내전이 변함없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새로운 총사령관 아르마냐크 백작은 파리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는 부르고뉴 군대 때문에 파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1418년 7월 29일, 헨리는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을 포위했다." "포위된 도시는 부르고뉴 또는 아르마냐크로부터 도움을 기대했고, 11월에는 군대가 오고 있다는 풍문이 루앙에 전해졌지만, 곧 뜬소문으로 드러났다. 파리에 민중 반란이 일어나 아르마냐크파는 축출되었고, 폭도가 총사령관을 때려죽인 뒤에 파리를 재점령한 부르고뉴파는 파리를 확실히 장악하는 데 여념이 없어 노르망디에서 벌어지는 일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그해 말이 되었을 때 잉글랜드인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주인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236-7, 242, 245)


"헨리는 1420년 5월 20일 트루아에 도착했고, 다음 날 이미 기안되어 있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병증에 사로잡힌〉 불쌍한 샤를 6세는 헨리를 만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지만 순순히 조인식을 마쳤다. 조약 내용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왕위의 계승자이자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트루아조약은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굴욕 가운데 하나로 1940년의 굴욕에 비견될 만하지만, 루아르강 이북에서는 조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헨리가 프랑스 왕관을 쓸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섬뜩한 아이러니다." "그는 이질 증상을 보였던 것 같다. 헨리는 동생 베드퍼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부르고뉴와 동맹을 계속 유지해야 하며,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이 사양할 때만 프랑스 섭정의 지위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또 상황이 나빠지면 잉글랜드는 노르망디를 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유지를 남겼다. 헨리 5세는 1422년 8월 31일, 불과 서른 다설 살에 숨을 거두었다."(251-2, 260)


8장 프랑스 섭정 베드퍼드 공작 1422~1429년


"앵글로-프랑스 왕국은 잉글랜드와 완전히 분리되어 유지되었고, 소수의 고위 잉글랜드 관리들의 감독을 받는 프랑스인들이 오래된 제도에 근거해 왕국을 다스렸다. 노르망디는 트루아에서 맺은 약속과 달리 루앙에 있는 자문회의를 통해 별개의 국가로 운영되었다. 섭정이 노르망디 공국을 랭커스터가의 보루로 탈바꿈시키려고 작정했기 때문이다. 바이이는 언제나 잉글랜드인이었지만 다른 관리들은 거의 현지인들이었다. 베드퍼드는 교역을 장려하고, 캉에 대학을 설립하고, 조카의 이름으로 고품질 주화를 발행하여, 잉글랜드의 지배가 현지 노르망디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베드퍼드는 플랜태저넷가의 통치를 인기 있게 만들려고 애쓰면서도 신민들이 전쟁 수행 노력에 기여하도록 강요했다." "공식적, 비공식적인 요구 사항들이 앙주와 멘, 일드프랑스에도 강요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잉글랜드인들은 점점 자금 압박에 시달렸고, 과세와 약탈은 갈수록 가혹해졌다."(270-2)


# 바이이baillis : 프랑스 북부에 파견된 국왕의 지방 행정관


"1423년 4월 베드퍼드와 부르고뉴 그리고 브르타뉴 공작은 아미앵에서 만나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서로 간에 형제애와 단합〉을 유지할 것을 맹세하고, 비록 군사적 의무 사항을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도팽의 최종 타도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부르고뉴와 브르타뉴는 다소 주저하며 조약에 서명했고, 나중에 어느 한쪽이 도팽과 동맹을 맺더라도 계속 같은 편으로 남기로 약속하는 비밀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에 제대로 된 전략적 협력은 없었다 해도 종종 전장에서는 군사적 관계가 훌륭하게 작동했다." "1424년 8월 17일 펼쳐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도팽파를 대파했다. 베르뇌유는 제2의 아쟁쿠르로 여겨졌고, 섭정의 위신은 하늘을 찔렀다. 도팽파의 전투력은 완전히 붕괴했지만, 베드퍼드는 형의 본보기를 충실하게 따라, 앙주와 멘의 정복 완수라는 보기에는 덜 화려하지만 실속 있는 이득을 선호했고, 적의 거점을 체계적으로 축소시켜 나갔다."(274-5, 282)


"1427년 7월, 솔즈베리와 섭정은 다가오는 전역의 목표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솔즈베리는 루아르강으로 가는 요충지인 오를레앙의 정복을 원했다. 반면 베드퍼드는 잉글랜드가 앙주 지역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고, 기옌과 북부 영토를 연결할 수 있는 앙제르를 원했다. 솔즈베리의 의견이 관철되었지만 베드퍼드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429년 봄이 되었지만 오를레앙의 성벽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팽파는 도시의 주인인 오를레앙 공작이 잉글랜드에 포로로 있다는 구실로 오를레앙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하는 영리한 외교 수단을 구사했다. 베드퍼드는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위험에 빠뜨릴까봐 걱정하면서도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 "화가 난 필리프가 부르고뉴 병사들에게 포위전을 중지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30일, 소규모 호위대를 동반한 구원군의 지도자가 검은 군마를 타고 작은 전부를 든 채 오를레앙으로 입성했다. 잔 다르크였다."(292, 296-7)


9장 오를레앙의 마녀 1429~1435년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인들이 자신들의 특권이라 간주하던 신의 지지를 주장했다. 며칠 만에 그녀의 병사들은 잉글랜드의 주요 토루를 점령하고 글러스데일을 비롯한 수비대를 죽인 뒤 투렐을 재탈환했다. 1429년 5월 8일, 90일간 지속되었던 공성전 끝에 서퍽 백작은 결국 포위를 풀었다." "몽스트렐레는 도팽파가 파테 전투 이후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인들이 그녀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모두 믿게 되었다고 알려준다. 이제 잔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녀는 파리로 진군하는 대신 자신과 함께 랭스로 가서 대관식을 치르자며 도팽을 설득했다. 1만 2,000명의 군사가 어찌어찌 모였고,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영토를 통과하여 랭스로 간 샤를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잔은 대관식 내내 하얀 깃발을 들고 그의 근처에 서 있었고, 의식이 끝난 뒤 처음으로 그를 프랑스의 국왕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반드시 샤를 7세라고 불러야 하는 국왕의 대관식은 도팽파의 사기를 경이로울 정도로 진작시켰다."(306-8)


"1430년 5월 24일, 콩피에뉴 바깥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 부르고뉴 병사가 잔 다르크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몽스트렐레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병사들이 〈마치 병사 500명을 사로잡았을 때보다 훨씬 더 흥분했으니, 이는 그들이 전쟁에서 어느 대장이나 지휘관보다 그 처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11월, 잔은 잉글랜드인들에게 넘겨졌다." "한참을 괴롭히고 속임수를 쓰고 진술을 곡해한 끝에 법학자들은 마침내 그녀를 덫에 빠뜨렸고, 1431년 5월 30일 잔은 개전의 여지가 없는 이단자라며 루앙 장터에서 워릭의 병사들 손에 화형당했다. 그녀는 바로 죽었고, 처형인은 화염 속에서 불에 탄 시신을 끄집어내서 사람들이 여자의 시신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고작 열아홉 살이었다. 샤를 국왕은 그녀를 전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잔의 처형은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동레미 출신의 마법사 처녀는 짧은 생애 동안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310-1)


"전쟁은 에드워드 3세 시대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었다. 갑옷과 무기는 갈수록 정교해졌고, 신형 대포들의 상당수는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되었든 포위전에 절대적 필수품이 되었다. 더욱이 수비대 유지에는 지속적인 출혈이 따랐다. 농업 불황과 해외 무역의 쇠퇴로 과세 수익이 감소했고, 줄어든 세입은 어떤 잔 다르크보다도 랭커스터 이중 왕국에 훨씬 더 큰 위협이었다." "이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에 대한 지지를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1435년 8월에 아라스에서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루앙에서 중병을 앓고 있던 베드퍼드는 영토에 대해서는 양보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프랑스 왕위에 대한 조카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다. 잉글랜드 사절단은 이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신성한 사안이라는 주장을 하라고 지시받았다." "잉글랜드 대표단들은 〈샤를 국왕과 부르고뉴 공작이 갈수록 서로에게 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근거 있는 의심을 했다."(320, 324-6)


10장 비보 1435~1450년


"1435년 9월 20일, 베드퍼드가 죽은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는 아라스조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마콩과 오세르, 퐁티외와 더불어 솜강 유역의 도시들과 솜강 유역 북쪽의 왕령지를 받았다(모두 그가 이미 점령하고 있던 영토였다). 샤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끝내고, 자신은 필리프의 부친 암살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함과 동시에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1435년부터 1450년까지는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세력이 승산 없는 전쟁을 질질 끌었던 시기로, 그들이 부르고뉴파한테서 버림을 받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잉글랜드인들은 30년 동안 지배해온 노르망디와 칼레를 자신들의 나라에 통합된 일부로 간주했다. 마침내 마주한 몰락은 온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고 정부를 무너뜨렸다. 왕조 간 반목은 국내 분쟁으로 탈바꿈했다."(331-4)


"1444년, 매우 연로해진 보퍼트 주교는 정계에서 은퇴했으나 그의 당파가 여전히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서퍽 백작이 이끄는 정권은 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고, 워릭이 경멸한 서퍽 백작과 그의 탐욕스러운 동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가차없이 돈과 토지, 상업적 특권을 갈취하고, 심지어 측근들을 동원해 법정을 겁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퍽한테 더 나은 면도 있었다.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싸운 뒤─별다른 공훈이 없다는 게 눈에 띄는 점이다─그는 이제 잉글랜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와 화평을 맺어야 하며, 노르망디와 기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는 데 자문회의 다수와 의견을 같이했다." "투르 휴전협정 소식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국수주의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잉글랜드인들한테는 매우 다르게─바쟁에 따르면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으로─받아들여졌다. 1419년 이후로 적대 행위가 중단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347-8)


"1449년 7월 31일 샤를 7세는 3만 명의 군사를 노르망디로 보냈다. 그들은 삼면에서 공국을 공격했다." "불시에 이루어진 노르망디 침공은 전 잉글랜드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루앙 사령관 서머싯에게 1만 파운드를 보냈을 뿐 즉각적인 증원은 없었다." "최후의 저항은 셰르부르에서 1,000명의 수비대원들을 지휘하던 토머스 가워의 몫이었다. 뷔로는 기름을 먹인 가죽으로 방수 처리한 포대를 바다 쪽 모래톱에 설치하고, 밀물이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면 돌아와 포격을 이어갔다. 〈도시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포와 포의 집중 공격이 이어졌다〉고 몽스트렐레의 연대기를 이어간 무명 작가는 말한다. 가워는 결연하게 싸웠고, 프레장 드 코에티비 제독을 비롯해 많은 포위군이 전사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존 파스톨프 경이 새로운 군대를 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1450년 8월 12일 셰르부르는 항복했다. 프랑스는 채널제도를 제외하고 노르망디 전역을 재정복했다."(352, 355, 358-9)


11장 암울한 싸움 1450~1453년


"근래에 보기 드물게 평화로웠던 기옌은 1445~1449년 잉글랜드에 포도주를 어느 때보다 많이 수출했다. 우선 프랑스의 침공이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기옌은 30년이 아니라 무려 300년 동안 플랜태저넷가에 속해 있었고, 기옌 사람들은 대체로 잉글랜드인 공작과 멀리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통치에 충성했다. 하지만 샤를은 노르망디를 정복하자마자 투르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고, 그해가 저물어가는 상황이었는데도 곧장 기옌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1451년 7월 말이 되자 바욘만이 플랜태저넷가를 위해 버티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8월 20일 함락되었다." "처음에 일부 가스코뉴 귀족들이 프랑스인들을 반겼지만 곧 기옌 사람들은 그들의 새로운 주인을 싫어하게 되었다. 북부 프랑스 행정관들과 징세인들은 능률적이고 가혹하며, 옛날 방식을 멸시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452년 비밀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해 서머싯 공작이 군대를 파견해준다면 보르도가 잉글랜드를 위해 들고일어날 것이라고 약속했다."(366-8)


"1452년 10월 17일 톨벗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도크에 상륙했다. 프랑스인들은 이 원정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원정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결과 기옌에는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다. 10월 21일 잉글랜드군이 입성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당대의 테크노크라트 장 뷔로가 있었다." "1453년 7월 17일 펼쳐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화가 잉글랜드 병사들에게 정면으로 쏟아졌다. 활로 시작된 잉글랜드의 군사적 우위가 소형 화기에 의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9월 말이 되었을 때는 보르도만이 프랑스에 맞서고 있었다. 보르도 시민들은 허약한 서머싯 정부한테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1453년 10월 19일, 기옌의 수도는 다소 낙관적으로 샤를 국왕의 자비를 믿으면서 무조건 항복했다. 샤를의 첫 행동은 장 뷔로 명장을 보르도의 종신 시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백년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68-70, 372-5)


에필로그


"비록 잉글랜드 자체는 1세기 동안 〈프랑스에서 얻어낸 전리품들〉로 부유해졌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정부를 파산시켰고, 랭커스터 왕조의 위신에도 치명타를 가했다. 1453년 8월 헨리 6세는 미쳐버렸고, 6개월 뒤 요크 공작이 호국경이 되었다. 1455년 헨리가 회복되어 보퍼트 가문을 권력에 복귀시키자, 과거의 참전 군인들이 프랑스에서 터득한 전투 기술을 서로에게 구사하면서 장미전쟁으로 알려진 길고도 살인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삶의 방식으로서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들의 측근인 중기병과 궁수들은 일자리가 절실했다." "필리프 드 코민은 15세기 말에 잉글랜드 왕가를 논하면서 〈그들의 아버지와 추종자들은 프랑스 왕국을 약탈하고 파괴하고, 오랫동안 그곳의 상당 지역을 점령했다〉고 썼다." "영국해협 너머의 다른 관찰자들은 장미전쟁이 잉글랜드 국왕과 그 백성이 프랑스에서 저지른 일에 대한 신의 심판이었다는 코민의 생각에 동의했을 것이다."(3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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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기억, 제국의 유산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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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영제국을 보는 시각과 방법


# 영제국에 대한 (보수적) 역사서술 방법

1. 경제·군사 팽창론(전통적 견해) : 19세기 영제국의 팽창은 독점자본의 이윤극대화 운동에서 비롯했다는 홉스-레닌 식의 견해

2. 신사 자본주의론 : 대토지 소유 귀족과 젠트리들─시장경제를 이용해 임대소득을 추구하면서도, 일상적인 노동을 멀리하고 여가와 아마추어 정신을 중시하는─이 근대 영국의 부의 축적을 주도했다는 견해. 이들과 기존의 상업 자본이 결합된 금융-상업자본이 제국 팽창과 맞물려 해외 시장으로 그 힘을 집중시켰다고 본다.

3. 장식주의론(ornamentalism) : 19세기의 영제국 역시 인종주의가 만연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적 위계를 중시한 사회였기 때문에, 토착지역의 부왕이나 제후들에게 각종 칭호를 부여하여 제국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그들의 협조를 얻는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했다는 견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의식한 조어이다.

4. 네트워크론 : 영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인쇄언어 연결망, 전신망, 해저 케이블 등 19세기의 기술발전을 바탕으로 특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영국적인 것'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공유했다는 견해. 말하자면 현대의 세계화는 대부분 영제국이 시행한 제도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인과 국민은 제국에서 영연방으로의 평화로운 이행을 강조했다." "그러나 제국 해체 이후 한 세대 이상 영국의 역사가들은 제국 팽창과 해체의 전 과정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과 해체의 충격이 오히려 시대 변화에 순조롭게 적응했다는 심리적 위안을 요구했던 것처럼 보인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제국사 연구는 역사가들이 이전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국을 '역사화'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문제는 이 '제국의 역사화'가 이전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도덕적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히려 제국 지배를 시대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바라보는, 일종의 자국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영미문화의 세계적 확산과 기여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은 세계화 과정에서 영미문화의 확산을 중시하고, 그러한 확산이 영제국에서 영연방에 이르는 문화적 연결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27-8)


"존 매켄지는 『선전과 제국』에서 대중매체의 발전이 영국의 공공여론을 조성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현상으로서 제국주의가 20세기까지 계속 영국인들의 내면세계에 뿌리내려 왔음을 보여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지식인들은 도덕적 부담감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제국적 가치가 시대의 추세에 뒤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영향을 받아 영국사 연구자들은 제국과 제국적 가치가 영국사의 지배적인 동력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메켄지는 이러한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고 본다. 제국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밀려났지만, 일상생활에서 소비되는 제국적 상품(차·담배·코코아·비누·설탕 등)과 대중문화 속에 깃들어 있었다. 매켄지가 보기에, 〈제국의 유산은 영국인들의 정신세계의 보호무역시장〉 안에서 계속 번창하고 증식해 온 것이다. 포클랜드 전쟁 당시 일반 대중의 열렬한 지지야말로 〈제국적 세계관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이 영국인의 의식 속에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32-3)


1부 19세기의 유산


1장 재정-군사국가와 신사 자본주의


"18세기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은 그 체제 중심부 국가들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해당한다. 명예혁명 이후 나폴레옹 몰락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영토와 인구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던 영국이 마침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존 브루어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은 간헐적으로 발발하는 전쟁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기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사실 전쟁은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이라기보다는 해외시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벌어졌기 때문에 주된 전장은 아메리카나 인도와 같은 해외 식민지였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과 육군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지출을 점차로 늘렸고, 이를 부담하기 위해 물품세 부과와 일련의 국채 발행이라는 수단에 의존했다. 이 시기의 국가는 일종의 효율적인 전쟁기구였다. 따라서 그 성격은 한마디로 '재정-군사국가(fiscal-military state)'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43-4)


"제국사 연구에서 주변부 이론은 경제적 해석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전의 경제적 해석에서 19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시대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제국 팽창의 휴지기였다. 그러나 주변부 이론은 이것이 공식적인 식민지 확장만을 제국주의로 간주하는 오해에서 비롯했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영국이 식민지를 확대하지 않은 것은 '자유무역'을 통해 제국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부 이론을 제시한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새롭게 신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전 시기에 걸쳐 제국정책이 이어졌으며, 다만 이전에는 그 정책이 비공식적 제국(inform empire)의 형태로 표출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즉 토착세력의 협력에 힘입어 적은 비용으로 제국을 꾸려나가는 방안이며, 이 협력관계야말로 〈제국주의를 규정하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주변부 이론은 제국의 확대가 의도되고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부의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결과라고 본다."(55-6)


"케인과 홉킨스는 주변부 이론과 경제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두 이론이 다 같이 산업혁명의 혁명성을 전제로 삼고 있음에 주목한다. 경제적 해석이 제국주의를 산업자본의 진화단계에 연결지었다면, 주변부 이론은 산업화가 해외 지역의 확대를 촉진했다고 본다. 자유무역의 대두와 제국의 성장을 산업화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케인과 홉킨스에 따르면, 영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대 자본주의'이다. 근대 초기 이래 이 나라에서 부의 축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대토지를 소유한 소수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상업적 농업의 발전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지대(rent)를 소득원으로 하는 경제 범주로 성장해 왔음을 뜻한다. 물론 영국의 귀족과 신사층은 아직도 봉건적 전통의 계승자였다. 그들은 질서·권위·신분과 같은 전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17세기 말에 그들은 봉건귀족의 삶에서 벗어나 '시장의 철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57-9)


"지주 세력은 부재지주로서 농업 이윤이나 지대뿐 아니라 도시화와 경제 활성화에 따른 열매까지도 거두어들였다. 광산 개발의 이득과 도시 지역의 각종 임대소득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득의 특징은 일상생활에서 부의 축적에 하루 내내 매진하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부를 중시하면서도 일상적인 부의 추구를 경멸했으며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각종 기예와 그 철학으로서 아마추어 정신을 귀중하게 여겼다. 이러한 태도와 분위기는 귀족과 지주층을 넘어서 다른 사회세력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사 자본주의란 '신사적 규범'을 유지하면서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이 활동이야말로 영국 경제발전의 주된 동력이었다. 귀족과 지주 외부로부터 다양한 자산가들이 이 활동 무대에 스스로 등장했다. 18세기에 화폐자산을 소유한 부유층이 대거 이 대열에 끼어들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금융 및 서비스 분야의 부유층이 여기에 합류했다."(59-60)


"18세기 이래 영국 사회는 '토지와 화폐의 결합'이라는 틀을 유지해 왔다. 지주와 화폐자산가층의 동맹은 18세기에는 '낡은 부패 관행'으로, 19세기에는 값싼 정부와 자유무역주의로 변모했지만, 그 동맹은 언제나 영국의 경제발전과 해외 팽창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19세기 후반 신사적 자본가층이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내부의 역학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동맹의 균형추가 경제개혁의 주된 수혜자였던 금융세력에 기울어진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 과정에서 신사적 자본가들은 적극적인 제국주의로 나아가면서도 영국 사회에 대한 지배 이데올로기로는 '보수적 진보(conservative progress)'를 내세웠다. 케인과 홉킨스의 표현에 따르면, 그 구호는 〈전통과 특권을 보호하면서도 또한 '자유인으로 태어난 영국인'의 권리를 지지하고 물질적 향상의 전망을 제시한다.〉 요컨대 19세기 후반 영제국의 새로운 팽창은 구 런던시 서비스 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63-4)


2장 네트워크로서의 제국


"겉으로 보면 영제국은 두 차례에 걸쳐 급속하게 팽창했다. 우선 7년전쟁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해외 지역을 흡수한다. 다음으로, 1880년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독일, 프랑스와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분할에 가담한다. 그사이의 시기, 즉 미국 독립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팽창의 열기가 약해졌는가. 공식적인 제국 지배 지역만 살피면 그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영제국의 실질적인 지배력과 영향력은 더 강력해졌으며 오히려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갤러거와 로빈슨이 주목한 '비공식적 제국'은 이를 가리킨다. 이 시기 비공식적 제국은 물론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세계시장 확대와 직접 연결된 것이었다." "사실 상황에 따라 비공식적 제국은 공식적 제국으로 순식간에 바뀔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제국주의가 그 결과이다. 19세기 중엽에 주로 비공식적 제국을 추구했다고 해서 군사력을 동원한 팽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식적 제국과 비공식적 제국의 경계는 고정되지 않았다."(67-8)


"19세기 영제국 또는 영국 세계 체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다윈에 따르면, 그것은 브리튼, 인도, 시티(the City)의 금융자본,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분석에서 각지에 산재한 다른 식민지들은 위의 구성요소와 비교하면 부차적인 중요성만을 가질 뿐이다. 여기에서 브리튼은 특히 제조업과 재정 및 석탄자원을 의미하고, 인도는 그 경계를 넘어 아덴에서 미얀마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과 해양, 즉 페르시아만, 이란,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말레이반도, 그리고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 등 인도양 인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략 지역이었다." "자치령의 존재야말로 영국과 유럽 다른 나라의 제국 경영을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이었다. 영국인 이민을 근간으로 형성된 백인 정착지는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남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백인 정착지로 이주한 영국인 이민들은 대체로 개인의 자유, 독립, 평등에 기초를 둔 사회를 형성함과 동시에 영국 문화의 정체성을 이어나갔다."(69-73)


"1851년 이후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좀 더 유리해졌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협조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의 이해관계를 양보했지만, 그 대신에 지중해의 몰타, 실론, 케이프타운을 완전히 장악했고, 중남미의 해안 지역도 속령으로 만들었다. 영국의 이러한 팽창은 에스파냐·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유럽 국가들 사이에 아메리카와 아시아 해상무역을 분할해 온 중상주의 질서의 종국을 나타내는 신호였다. 기존의 영국 지배 영역과 새로운 식민지들은 전략적으로 아메리카·아프리카·오스트레일리아·남아시아·중국·태평양 등 전 세계에 걸친 연결망을 갖출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 셈이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영제국에 편입된 케이프타운·몰타·지브롤터·수에즈 운하·아덴·실론·싱가포르·홍콩·밴쿠버 아일랜드·포클랜드·노바 스코샤 등은 영국 해군의 세계 항로 지배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했다. 오직 영국만이 해상을 통한 전 지구적 연결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77-8)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치령과 식민지, 그리고 복잡한 정부기구를 하나로 묶는 연결망은 어떻게 강화·유지되었는가. '영국 세계 체제'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다윈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우선 신문·전신·증기선·철도·상품·정보인력 이동 등 기술진보와 변화가 제국 연결망을 강화했고, 다음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이윤·상품·서비스·문화로 구성된 '영국적 세계'라는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계를 보호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자의식 또한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에 확립된 영제국은 기본적으로 취약한 네트워크 연결망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 식민지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국이 무임승차한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동시에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영국의 우월한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고 외부 자극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해 준 것이 토착 엘리트의 협조와 19세기 이래 지정학적 요인이었다."(78, 95)


"19세기 영제국의 팽창과 제국 네트워크의 출현은 영국 정부의 분명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 당시 국제 정세와 특히 지정학적 조건과 요인에 힘입은 것이었다. 다윈은 〈수동적인 동아시아, 유럽 대륙의 세력균형, 그리고 강력하면서도 비호전적인 미국〉이라는 국제 상황이 영제국 세계 체제의 성립에 도움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시티 금융자분의 자기 이익 추구 경향과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제국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수에즈 운하 자체가 이 지정학적 요인을 더 강화한 지렛대였다. 이 운하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상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 지정학적 조건이 변하면서, 그 요인은 오히려 제국 해체를 가속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20세기 미국과 러시아의 대두는 영국이 자체의 힘으로 대처할 수 있는 도전이 아니라 제국의 출현과 해체에 항상 영향을 미치는 상수였던 셈이다. 그렇더라도 제국 네트워크는 오늘날 지구화 현상의 초석이 되었다."(96-7)


3장 제국과 '대영국'에 관한 담론


"'대영국(Greater Britain)' 개념은 영국인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19세기 후반 대륙을 기반으로 팽창한 강대국들의 등장에 자극받아 나타난 것이었다. 제국(empire)이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그 말이 함축한 전제적이고 군국적인 의미가 영국인의 자유에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인 정착지가 영국의 일부라고 주장한 존 실리 이전에 제임스 프로드가 이미 새로운 강력한 국가들에 맞서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연결하는 〈군살이 없고 좀 더 효율적이며 응집력이 강한〉 '대영국'의 이상을 설파했다. 〈다른 나라의 인구증가, 제국적 에너지, 막강한 정치 발전을 고려할 때, 그리고 러시아, 미국 또는 독일에 속하는 광대한 영토와 우리 브리튼섬의 보잘것없는 면적을 비교할 때, 우리가 식민지를 우리 자신과 동일하게 생각해서 영국인을 그곳까지 확산시키고 영토를 배가히자 않는다면 경쟁국 속에서 한 국가로서 우리 위치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110)


"실리는 브리튼섬과 백인 자치령을 결속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다가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지금까지 영국의 자치령과 속령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비효율적인 영토였다. 19세기 철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운활동에 근거한 영국의 이점은 위축되는 대신 준대륙 국가인 미국과 러시아가 등장했다. 그러나 증기선·전신·전기 등 새로운 기술혁신과 더불어 이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네트워크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말이다." "실리는 '대영국'의 구체적인 구현체로서 '제국연방(Imperial Federation)'을 언급한다. 제국연방운동을 전개한 '제국연방연맹'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을 미합중국과 같은 연방제 국가 또는 국가연합으로 통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여기에서 제국연방의 핵심 개념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이 평등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112-5)


"19세기 중엽 영국 정부 각 부처의 행정개혁, 이른바 '글래드스턴주의'로 불리는 일련의 개혁조치가 이루어진 직후, 영국과 백인 자치령 사이에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교류와 무역이 급속하게 증가했으며, 제국의 경계 안에 있는 여러 지역은 왕실을 매개로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었다. 왕실은 영국과 백인 자치령 모두에게 국가(또는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원래 백인 정착지는 국왕의 하사장(charter)을 받은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였다. 이민집단은 국왕에게서 위임받은 왕령지에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사회를 형성했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의식은 백인 정착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제 캐나다를 비롯한 '백인 자치령(white dominion)'은 더 이상 속령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런 구별은 백인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결국, 백인 자치령의 출현은 비백인으로 구성된 속령 및 식민지의 팽창과 관련되어 자리 잡은 것이다."(119-20)


"'대영국'론이 (그 인기에 비해) 단순히 구호에 그쳤던 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영향을 미쳤다. 실리가 입론의 근거로 삼았던 기술발전이 그 자신의 예상과 달랐다. 그가 내세운 '거리의 소멸'은 한 세기 후에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해상 네트워크와 통신을 통한 연결은 대륙 국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근대 기술문명의 추세를 감지했지만, 오히려 기술적 난점이 '대영국'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못했다. 영국 정체성의 문제 또한 너무 단순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는 영국인, 영국식 이름 및 지명의 세계적 확산과 영국성의 확장 가능성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 태어난 나라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친숙성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형성해 나간 정체성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실리는 앵글로색슨인의 확산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국성의 확대를 통해 다양하고도 새로운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다."(129)


2부 전쟁과 불황


4장 전쟁과 동원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남아공 등 자치령 국가는 광활한 국토와 비교하면 인구가 적었다. 그런데도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못지않게 성인 남성 가운데 상당수를 군 자원으로 소집해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터키의 갈리폴리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8년 12월 31일 현재 캐나다군 병력 규모는 62만 8,964명이었다. 이 가운데 영국에 파견된 군 병력은 42만 2,405명에 이르렀다. 영국에서 유럽 대륙 전선에 투입된 캐나다군 규모는 40만 1,191명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또한 인구 규모에 비해 막대한 인력을 동원해 전선에 투입했다. 성인 남성 대비 참전군인의 비율은 캐나다 13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13퍼센트, 뉴질랜드 19~20퍼센트에 이르렀다(영국은 27퍼센트)."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백인 자치령 국가의 경우 막대한 인적 자원의 손실을 입었다. 특히 참전군인 대비 사상자 비율은 캐나다 50퍼센트, 뉴질랜드 59퍼센트, 오스트레일리아 65퍼센트에 이른다."(150-2)


"일부 사회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자치령 국가들은 전쟁 동원에 적극 협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자치령 국가의 적극적인 협조를 친영국적 정서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영국과 인종적·문화적 전통을 공유한다는 인식에는 군주제, 대의제 헌정, 시민적 자유 등 그들이 공통의 선진적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긍지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당대의 정치평론가 아치볼드 허드에 따르면, 당시 독일 측 정세분석가들은 자치령 국가들이 유럽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치령 국가와 식민지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자치령 국가들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그 제도의 요체는 시민적 자유를 토대로 하는 군주제와 대의제 헌정(representative constitution)이었다. 대의제 헌정이란 구체적으로 의회(parliament)와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로 구현된다. 그들은 전쟁을 자신의 제도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참전한 것이다."(153-4)


"전쟁 이전에 '대영국'론은 영국과 해외 자치령 지식인 및 정치인들 사이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이상이었다. 강대국들의 국제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에 대영국론은 영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호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전과 그에 따른 막대한 희생이 제국의 원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치령 국가들은 이전 제국 질서의 변화를 요구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한 자치령은 전후에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도 독자적인 주권국가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당시 영국 정부로서는 국제기구나 회의에 자치령 국가들이 참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영국과 자치령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정한 '제국의 원리'를 고안했다. 영국왕이 〈영연방 개별 국가들을 결속하는 초석〉이라는 원리였다. 단일한 군주를 중심으로 상징적으로 맺어진 네트워크야말로 개별 국가들의 협조와 발전의 기초가 되는 셈이었다."(160)


5장 경제불황과 제국


"영국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화된 제국의 연결망을 새롭게 강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1920년대 말 영국의 실무 관리와 지식인들은 미국의 대두에 따른 영국의 대응전략에 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유럽 대륙과의 공조 또는 유럽 경제권에 대한 관심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맥락에서 제국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들 논의는 모두 자유무역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문제는 두 경제권 모두 미국에 대한 대응전략이면서도 각지 서로 다른 약점을 보여 준다는 사실이었다. 유럽 경제권의 공조를 강조하는 데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 상호보완적인 경제 특징보다는 경쟁적인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낼 것이고, 영제국은 국제분업의 효율성을 보여 주면서도 제국 네트워크의 취약성과 미국 영향력 증대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166, 170-1)


"이 시기 국제경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현안은 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된 금본위제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금본위제 채택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하락 추세에 있던 파운드화의 환율을 정하는 일이었다. 1파운드당 4.86달러라는 이전 수준의 환율로 되돌아갈 경우 외국 투자자들이 파운드화에 실망하고 뉴욕으로 금융 거래를 옮길 위험이 있었다. 반면, 파운드화로 이루어진 해외투자 자본의 가치를 높일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전시 부채 상환도 더 유리해질 것이었다. 처칠은 뒤의 가능성을 더 중시했다. 달러에 대한 스털링화의 가치는 전전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본위제 복귀로 영국은 수출산업의 타격과 노동계급 생활수준 하락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다." "1차 세계대전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전통적인 수출산업은 구조적 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 그에 따라 해외시장에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은 전반적으로 약해졌다. 여기에 스털링화의 과대평가가 어느 정도 나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173, 178-9)


6장 제국 경영의 한계


"전후 영국 사회는 한동안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시경제체제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던 노동계급이 실업과 경제침체에 따른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리기 시작했다." "제국 문제와 관련지어 이 시기 격렬한 노동자 항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들은 제국 네트워크를 다시 강화하려는 시도, 특히 상업제국의 활성화를 위한 노동자의 양보와 희생을 거부한 셈이었다. 물론 전후에 일반 여론은 앞으로 영국의 번영이 전쟁 이전 상업제국의 복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런던은 세계 최고의 투자처이자 교역 및 금융 중심지로서 지위를 되찾아야 했다. 금본위제 도입을 통한 파운드화 가치 안정, 수출경쟁력 회복, 수출시장 확대는 제국 운영에 긴요한 조건들이었다. 수출경쟁력 제고는 무엇보다 노동자의 임금 삭감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전쟁기의 산업 평화에 순응했던 노동자들은 정부의 이 같은 견해에 협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사관계의 불안은 제국 경여의 미래에도 불안을 안겨주었다."(193, 198)


"전 세계에 걸친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과 영국 국내 정치 및 사회의 혼란이 겹치면서, 영국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 제국을 둘러싼 찬반 담론이 가열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식민지 정치인과 지식인의 각성을 가져왔다. 전쟁의 참혹함과 야만성을 목격한 사람들은 산업화된 서구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류 번영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간디와 타고르 같은 지식인들의 비판은 식민지 해방운동의 징후를 나타냈다. 영국 정치가들도 그 시대의 추세를 느끼고 있었다." "전후 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식민지 지배가 일종의 약탈 면허이며 그나마 문명화라는 식민지 지배의 인도적 전통도 1890년대 이후 사실상 붕괴되었다는 비관론이 대두했다. 문화적·인종적 전통을 공유하는 백인 자치령 국가들조차 전후의 경제침체에 따라 영국의 이익과 다른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견도 있었다."(199-200)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서아시아 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조지 커즌이다. 그는 인도 총독을 지냈고 전시내각에 참여했으며 1919~24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전후에는 서아시아 진출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까닭은 인도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인도 지배를 위해서는 서아시아에 다른 경쟁국이 들어서거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영제국의 확장을 의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커즌이 선호한 것은 인도 지방의 토후국 모델을 적용해 서아시아 지역에 아랍인 자치국들을 세우는 방식이었다. 영국의 서아시아 진출은 전쟁기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제정러시아 붕괴 후 독일이 서부전선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자 독일 동맹국인 오스만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영국군이 이 지역에 진출했다. 이는 전후에 곧바로 제국의 방어비 증가를 가져왔다. 영국은 전후에 팔레스타인·이라크·이란 등에 대한 신탁통치 주도국이 되었다."(235-6)


"동아시아에서 영국은 중국의 홍콩과 상하이를 이 지역 상업 무역 금융 중심지로 개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큰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전간기에 특히 발전한 도시는 상하이다. 19세기 후반에 조차지를 개발한 영국은 인접한 미국 조차지와 행정단위를 묶어 상하이 공공조계로 개발했다. 1920년대 상하이가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공업생산지가 된 것은 상하이 공공조계의 번영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반영감정의 고조,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처할 수 있는 대안은 별로 없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영국 해군력 증강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서양을 둘러싼 경쟁〉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의 대두와 함께 중지되었다." "일본은 이미 쿠릴열도에서 타이완까지,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남태평양까지 진출을 노리는 해상제국이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은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방어까지 책임져야 할 처지에 빠진 것이다."(239-42)


3부 이행, 제국에서 국가연합으로


7장 제국의 해체, 2차 세계대전에서 수에즈 위기까지


"존 다윈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의 완패는 제국의 토대로 삼았던 모든 전제가 무너진 탓이다. 그 전제는 프랑스와 연합해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영국의 선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적인 지배권을 유지하며, 이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 지구적인 경제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배, 제국 네트워크의 확장에 따른 해군력의 취약점 노출, 그리고 1930년대 영국 경제의 불황 심화로 이 모든 전제가 붕괴된 것이다." "전후에 영제국은 한동안 느슨한 형태로나마 유지되었다. 에이레가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독립국가가 된 인도·파키스탄·실론이 공화국 체제를 선택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1949년 영연방 정상회의에서 인도아대륙의 신생 3개국이 잔류를 선어하고, 기존 식민지를 대부분 지배함으로써 기존의 제국적 결속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영연방 체제는 형식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제국의 해체가 급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에즈 위기 이후의 일이다."(252, 259-60)


"1956년 11월 6일 영국이 수에즈에서 군대 철수를 결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균열, 이든에 대한 여론의 비판, 유엔의 철수 요구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바로 그날부터 파운드화가 폭락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경제에서 파운드 스털링화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기축통화였다. 파운드 스털링 통화권은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후 여러 나라가 금 대신에 파운드화에 대한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면서 성립되었다.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영국은 제국에 속한 국가들을 적용대상으로, 스털링 통화권 국가를 단일한 환율시행 지역으로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보전하고 제국 내 무역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상당 기간 자치령 국가와 영제국 식민지들의 협조 체제가 유지되었고, 이것이 후일 새로운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288-9)


"1930년대 이래 스털링 통화권은 제국 내 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영국이 완만한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제국의 자치령과 식민지는 영국 수출품의 주된 소비시장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영국 금융자본의 주요 채무국이자 영국 금융서비스 및 해운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파운드화를 축적하지 못할 때 채무상환 이행과 지불준비금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의 지불유예 선언이 계속될수록 파운드화 폭락 위험이 가중될 것이다." "1949년 경제불황기에 파운드화가 다시 폭락하자 영국 정부는 결국 파운드의 가치를 30.5퍼센트 인하한다. 이 당시는 달러결핍시대였기 때문에 스털링 통화권 국가들도 대부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폭락 우려가 높아졌을 때 이전과 달리 통화권 내 국가들의 동요가 커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 폭락을 방치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289-90)


"수에즈 위기는 세계경제에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스털링 통화권은 런던 시티의 금융자본과 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경제 영역이었다. 이 통화권은 영국 경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건전성이나 수지균형에 별반 영향을 받지 않고 관성적으로 지속되었다. 기업가와 상인과 투자자들은 이전부터 익숙한 국제무역과 환거래의 관행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서 영국은 미국의 여러 지원과 도움을 통해 파운드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수에즈 위기 당시 파운드화 위기는 제국 지배의 오랜 유산인 스털링 통화권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군사개입의 좌절은 그 취약성을 재확인한 사건이었다. 위기 이후 스털링 통화권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와 불안이 국제무역과 환거래에서 기존의 오랜 관행과 익숙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293)


8장 탈식민화의 정치와 영연방


"영연방의 성격이 크게 바뀌고 그와 함께 회원국들의 결속력이 약화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당시 노동당 정부는 영연방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해럴드 윌슨은 총리직에 오르기 전부터 코먼웰스에 대해 개인적으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영제국에 대한 복고적 유토피아나 대국주의적 편견보다는 그의 사회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 시절부터 비국교도 전통을 지녔으며 세계의 빈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는 영국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영연방을 이용하려는 정략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연방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관련된 대외정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그의 국제주의적·사회주의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윌슨의 제안은 영국이 회원국의 농산물과 원료를 고가로 구매하고, 그 대가로 회원국은 자국의 투자계획에서 영국의 우선권을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식민부의 경제 관리들은 이러한 정책이 실제로는 영국 경제의 쇠퇴를 가속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305-7)


"그렇다면 당시 경제 실무를 맡은 관리들이 영연방 회원국 사이의 무역 증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까닭은 무엇인가. 1950년대 초만 하더라도 파운드화는 태환화폐였다. 달러부족시대에 회원국 무역의 영국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그러나 독일 및 일본의 대두와 더불어 파운드화는 약세로 돌아섰으며 영국과 회원국 간의 무역 비중도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실무 관리들은 회원국과의 무역 증대가 영국에 실익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회원국의 1차 상품을 시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면서도 영국 수출 증대를 통해 수지균형을 꾀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관리들은 수에즈 사태 이후 영국이 재정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과 캐나다의 보증 및 지원을 통해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들은 영연방 회원국과 무역을 강화할 경우 반대급부로 역외무역, 특히 대유럽무역이 쇠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더욱이 영연방 회원국 모두는 자국의 경제발전에만 관심이 있었다."(309)


"오늘날 영연방은 주권국가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일부 국가들이 가입 또는 탈퇴를 거듭하기도 하고, 이전에 영제국 지배와 관련이 없는 나라들도 새롭게 회원국으로 가입 신청을 하기도 한다." "1970년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시도와 영연방 사무국 체제의 등장 이후 영연방에 대한 영국 정치가들의 관심은 약화되었다. 영연방은 더 이상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영국이 주도할 수 없고 또 영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오늘날 영국은 코먼웰스에 관례적인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영연방 사무국의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은 이전 영제국의 유산을 상징하지만, 1980년대 이후 특히 정상회의는 주로 자치령 국가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원국들이 주도한다. 1971년 싱가포르 회의 이후 대부분 격년으로 지금까지 25차례 열렸다. 그 가운데 영국이 개최한 것은 4차례에 불과하다. 이는 영연방의 탈중심화와 다변화를 보여 준다."(314-5)


9장 유럽으로의 복귀


"오늘날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중요한 이슈로 제기한 정당은 보수당이다. 영연방에서 유럽공동체로 방향 전환을 처음 시도한 정당도 보수당이었고 1970년대 보수당 집권기(히스 총리)에 유럽공동체 가입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당시 가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의회 토론 과정에서 국가주권 침해 문제가 논의되었음에도 이런 점들은 의회보고서나 유럽공동체법에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당시 영국 정부가 의회주권 문제에 대해서 실제로 관심이 없었는지, 또는 그 심각성이 장래에 문제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공동체 가입 당시에 영국 정부와 일반 여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이 없었다는 점이다. EEC가 유럽통합운동의 산물이고, 통합운동이 초국가적 정치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표명해 온 점을 고려하면 의회주권의 전통을 중시해 온 영국에서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329)


4부 제국 이후


10장 제국의 기억과 영연방, 그리고 '상상의 잉글랜드'


"전후 노동력 부족에 직면한 영국은 아일랜드와 유럽 대륙 국가로부터 노동자를 모집했다. 특히 1948년 '국적법'은 아일랜드인에게 자유로운 출입국 권리 및 선거권을 부여했다. 이 시기까지 영국의 이민정책은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유럽인에게만 한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영제국 해체가 가속되면서 새로운 영연방국 출신들이 대거 영국으로 몰려왔다. 이는 영국이 제국 지배의 경험으로 개방적인 이민정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경제부흥기에 값싼 해외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당시 노동시장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인도아대륙, 카리브해 연안국 출신 소수 인종이 다양한 연결망을 통해 영국으로 입국했다. 자유방임적인 이민정책은 이런 경제상황뿐 아니라 백인 자치령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영연방 결속을 통해 미국과 소련에 대응하려는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1968년 8월 20일, 유색인 혐오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존 파월의 연설은 결국 유색인 이민 급증이라는 사회현상이 빚어낸 사건이었다."(347-8)


"유력 정치인과 의원은 물론 언론의 논조는 대부분 파월에 비판적이었지만, 일반 시민의 여론은 파월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소위 '유혈의 강' 연설을 둘러싼 논란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파월 지지자들의 편지 쓰기이다. 몇 주에 걸쳐 파월의 자택, 의원 사무실, 언론사에 엄청난 양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개인 상황이나 가정 조건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힘을 나타냈다. 말하자면 편지 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상상하는 공동체를 나타내고자 했다. 빌 슈워츠에 따르면, 파월에게 지지 편지를 보낸 사람들의 다수는 백인 여성이었다. 이들 편지에 나타나는 정서는 〈친숙한 세계의 붕괴를 느끼는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기억에 자리 잡은 이전의 친숙했던 세계란 본토, 백인 남녀, 변경, 식민지, 백인 정착지, 백인 자치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상상된 백인의 세계라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재의 무질서를 인식하고 분노한 것이었다."(350-2)


"영제국 역사에서 식민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종을 기억하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문명을 다른 세계에 전파했다는 의식에 기반을 두기도 한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은 이를 통해 그들의 '백인성'을 확인했다. 1950~60년대 영국인들의 일부는 분명 해외 백인 자치령 국가에서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았으며, 이들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서 이러한 의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백인 자치령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에서 긍정적인 변화는 백인 자치령이 '백인성'을 중시하고 다른 인종에 대한 배제의 원칙을 새롭게 정립한 점과 관련된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자치령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강력한 영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대영국' 이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었음에 비해, 1950~60년대 본토에서 해외로 이주한 영국인들의 집착은 오히려 쇠락하고 변질된 영국 사회를 대신해 해외에서 순수한 잉글랜드 또는 '상상의 잉글랜드'를 찾으려는 퇴행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다."(365-6)


11장 다문화 사회의 명암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문예비평 분야에서 축적된 탈식민이론은 기본적으로 언어 및 문화 중심주의와 관련된다. 이 경향은 인간의 삶 자체를 문화로 본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문화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는 단순히 정신활동의 결과물만을 뜻하는 것뿐 아니라, 그 활동 과정과 일련의 실천을 포함한다. 문예비평가들이 보기에, 문화는 주로 의미, 즉 '세계에 대한 인간 인식'의 생산과 교환에 관련된다. 의미는 언어에 의해 구성되고 언어는 재현을 통해 작동한다. 언어는 그 기호와 기의를 다른 사람들이 해독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관념과 감정을 재현하고 드러낸다." "로버트 영은 문화는 처음부터 타자, 달리 말해 인종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문화란 닮은 것과 다른 것(차이)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즉, 인종·종족·젠더 등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의 사회관계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370-2)


"탈식민담론은 외부 세계에 대한 근대 유럽인들의 인식과 지식체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유럽인들은 외부 세계 사람들을 항상 자기와 다르고 열등한 '타자'로 인식했으며, 이 '타자'에 대한 담론을 통해 자신을 스스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계몽운동기 이래 유럽 문화는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이념적·과학적으로, 또 상상력으로써 오리엔트를 관리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생산해 왔다.〉 사이드의 문제 제기는 미셸 푸코의 지식/권력모델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타자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식체계가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중요한 기능을 행사했다는 사이드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18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담론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사이드가 오리엔트 담론 형성 과정의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민속지학, 역사학, 여행기의 형태로 처음 형성된 식민지 담론의 원자료는 역사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보여준다."(369-70, 388)


"예컨대 리처드 프라이스는 남아프리카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사 주민들에 대한 영국인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변모해 왔는가를 추적한다. 19세기 전반 이들에 대한 선교사 기록은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 준다. 남자는 긍지가 있고 여성은 온순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남성은 선교사들이 만난 종족 가운데 가장 훌륭한 체격을 지녔고 여성은 생기발랄하면서도 뻔뻔하지 않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생활에 대해 인간 문화의 보편성이라는 맥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834~35년 무렵 변경지방에서 영국인 이주민과 잦은 전쟁이 일어났다. 정착민 담론이 식민성에 대한 인도주의적 담론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부터 코사인들의 호전성, 신뢰할 수 없는 문화를 자주 언급한다. 이후 이 지역에 관한 새로운 지식체계는 식민지의 열등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영제국의 아프리카 정책 수립에 기초가 되었다."(388-9)


12장 브렉시트, 그 이후


"1970년대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직후 영국의 헌정(憲政) 위기를 강조한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이자 좌파 지식인 톰 네언은 브리튼이라는 모호한 영국 헌정이 잉글랜드 민족주의의 대두─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파월주의─와 함께 위기에 직면하리라고 예상했다." "네언이 보기에, 유럽통합은 브리튼섬에서 앵글로-색슨 헤게모니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 헤게모니는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섬나라 근성'과 협소성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그 토대가 잠식될 것이었다. 그는 새롭게 '잉글랜드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퇴행적 쇼비니즘 및 EU 회의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보았다." "요컨대 브렉시트 선거 결과는 단기적인 요인 못지않게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 이후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른 잉글랜드 중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장기 요인과 직접 관련된 것이다. 네언이 예건했듯이, '잉글랜드적인 것(Englishness)'에 대한 새로운 열광과 퇴행적 민족주의의 대두가 장기적으로 영국 헌정의 해체요인으로 작용한 셈이다."(405-6)


종장 거대한 경험과 유산


"영제국 네트워크가 20세기 중엽까지도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 세계에서 영국은 일종의 강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강소국이면서도 선점 효과에 따른 이점을 극대화했다. 해군과 상선대에 바탕을 둔 영국의 해양 지배력에 강력하게 도전할 만한 세력은 근대 산업문명의 초기에는 나타나기 어려웠다. 그 세력이 가시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나, 그마저도 새롭게 등장한 여러 국민국가 사이의 역학관계와 국제정치 질서의 제약을 받았다. 유럽 대륙의 국민국가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세력균형에 집착하였고 대서양 반대쪽의 미국은 국내 개발과 발전에 치중했으며, 동아시아의 전통 국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나 국제정치에 수동적으로만 영향받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의 균형이 깨어지고 미국이 외부로 팽창하기 시작하며 동아시아 국민국가들이 새롭게 깨어나기 시작할 경우, 영제국과 그 네트워크는 충격을 받고 붕괴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416)


"영국의 정치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대중까지도 한동안 제국 경영이나 제국 네트워크를 외면해 왔다. 영국의 역사가들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부정적 측면을 상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덜 사악한 제국이나 선한 제국이라는 수사가 이를 나타낸다. 제국에 거리를 두려는 사회 심리적 경향은 제국의 상실에 따른 충격에서 일찍 빠져나오려는 자기방어적 기제에 해당한다. 영국이 과거 제국 경험을 상당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18세기 이래 영국은 제국 네트워크를 경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신이 이룩한 선진적인 수단과 방법, 그리고 이상을 다른 세계에 확산시켰다. 근대성의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주의, 시장주의, 대의제 정치, 책임정부제도, 재산권 보장, 시민적 자유 등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전 세계에 퍼졌다. 영제국은 어떤 점에서는 근대 세계와 표리관계를 이룬다."(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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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의 탄생 -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사의 탐색, 1494-1763
김준석 지음 / 북코리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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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 16세기 이후 유럽예외주의(제국이 아닌 다국체제)가 등장하게 된 요인들

1. 다수의 비옥한 분지 사이에 강과 숲, 산맥, 복잡한 해안선 등이 위치한 지형적 특성

2.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거주하는 유목민족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서유럽

3. 카롤링거 제국이 해체된 이래 귀족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


"1500년 전후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는 이후 적어도 약 3세기 동안은 오직 유럽에만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 기간에 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거대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의 명·청제국, 인도의 무굴제국,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의 사파비제국, 터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부의 오스만제국이 그들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16~18세기는 '제국의 시대'였으며,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현상이었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전 세계의 국제정치체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국제정치체제가 유럽의 비유럽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발흥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중 국제정치체제와 경제적 발흥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의 결과 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유럽의 세계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높다."(25-6)


# 근세 초(1500-1800년경) 국제정치에 남아 있던 전근대적 요소들

1.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가를 자신의 가산으로 간주하는) 군주를 비롯한 소수의 정책결정권자들의 지대한 영향력

2.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형태였는데, 영토 간에 동일한 군주가 다스린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유대관계도 없는 상황

3.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 우위('보편왕국'의 건설)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면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


"그럼에도 근세 초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에 공통적인 목표 또는 행동의 준칙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보편왕국의 수립이 아니라 세력균형의 보존이었다. 세력균형은 루이 14세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상대로 수차례 전쟁을 벌인 17세기 후반부터 국제정치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 1714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세력균형은 평화를 위해 모든 국가가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여러 번 언급되었다. 비록 본격적으로 언급되거나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17세기 중반 이전에도 국가들은 암묵적으로 세력균형의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유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정당한 군주에 대한 저항을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펠리페 2세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했는지, 또 어떤 이유에서 30년전쟁 당시 리슐리외의 프랑스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36)


2 16세기 근대 국제정치체제의 기원과 전개


"백년전쟁(1337~1453)을 거치면서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행정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는 백년전쟁이 기간과 규모 면에서 그 이전의 전쟁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한편에서는 두 왕국의 완전한 통합을 목표로, 다른 한편에서는 영국을 다시 섬나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치열하게 그리고 전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싸움을 이어나가다. 그 결과 전쟁 기간 동안 군사기술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기병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궁수와 보병의 중요성이 증가했다. 14세기 말부터는 화포가 전투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을 계기로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과거와 같이 영주에 대한 봉건적 의무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기사들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자원병을 모집해야 했다. 자원병이 병력동원의 중심적인 부분이 된 것은 백년전쟁이 처음이었다."(48-9)


"전쟁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점점 늘어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세금이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조세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결과 프랑스는 왕권의 약화와 분열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445년 샤를 7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럽 최초의 상비군으로 알려진 부대의 창설을 골자로 하는 군사개혁을 감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가 이전보다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조세수입 증가는 이웃한 영국, 카스티야 등과 비교해서도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특히 프랑스보다 빠른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영국이 백년전쟁 이후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전시에 이룬 재정상의 혁신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프랑스의 성취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49-52)


"1494년을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출발점으로 잡는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근대국가'로서의 프랑스가 벌인 첫 번째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둘째, 비록 '전근대적' 혹은 '중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으킨 전쟁은 적어도 그 외관에서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근대국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셋째, 이탈리아전쟁은 1516~19년을 전후하여 모습을 드러낸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과 프랑스의 세력다툼으로 확대되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두 나라 사이의 대결은 곧 이탈리아를 넘어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대립은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의 중심축이었다. 두 나라의 세력다툼은 1750년대 두 나라가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체결한 이른바 '외교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55-6)


"카를 5세를 수장으로 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은 유럽 근대국제정치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19년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의 관심은 합스부르크제국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되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에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를 5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그 모든 영토를 상속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상속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었다." "'연합왕국'이었던 합스부르크제국의 스페인과 네덜란드, 밀라노와 나폴리 등은 모두 통치자가 카를 5세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국가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아니라 통치자 개인의 지배여서 각 영토의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통치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통치자는 각 영토에 동일한 자치권을 일률적으로 부여하는 대신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와의 개별 협상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했다."(61-3)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과 함께 마침내 이탈리아전쟁이 막을 내렸다. 1559년에 전쟁이 끝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양측의 재정이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갈되었다." "둘째, 프랑스에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고 불과 두어 달 후에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불안정이 커지면서 프랑스의 대외적인 활동 능력이 제약되었다. 셋째,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종교전쟁은 부분적으로 군주의 때 이른 죽음으로 초래된 왕권 약화로 촉발되었다. 프랑스는 부르봉가의 앙리 4세(r.1589~1610)가 왕위에 올라 정치적인 안정을 다시 가져올 때까지 국내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은 1559년을 기점으로 중단되었고, 1635년까지 두 나라는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전면전을 감행하지 않았을 뿐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서로를 견제했다."(69-70)


"카를 5세의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유지와 보존이었다. 펠리페 2세 역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여러 영토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에 비해 객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1556년 이후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영토를 포함했다. 또한 16세기 전반 합스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프랑스가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일단 영토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모두 이베리아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지 않아서 마드리드의 펠리페 2세가 이 두 지역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상당했다. 특히 카스티야에서 거친 대서양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가 더욱 어려웠다."(82-3)


"네덜란드와 함께 스페인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는 데 펠리페 2세가 직면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린 영국이었다. 영국은 종교전쟁으로 약화된 프랑스를 대신하여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사략선을 동원하여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고 나포하는 등 스페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1580년 펠리페 2세가 왕가의 대가 끊긴 포르투갈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막대한 크기의 해외영토가 스페인의 해외영토에 합쳐지자 영국의 스페인에 대한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여 영국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재위 기간 내내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려는 펠리페 2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았거나 정당하게 획득한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84-5)


"한편, 1595년 앙리 4세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여전히 자신을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스페인의 간섭을 물리치고 외부 적과의 싸움으로 국내 분열을 일시적으로나마 봉합하고자 하는 동기가 전쟁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내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연방, 영국과 전쟁 중이던 스페인에 세 번째 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연방과 영국, 프랑스가 동맹을 체결했다. 1596년 5월 세 나라는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여 셋 중 어느 한 나라도 다른 두 나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제 펠리페 2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전쟁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이 (내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세 나라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맞춰졌다."(105)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음에도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준수한 전과를 올렸다. 재정적으로 적절하게 뒷받침된다면 스페인군의 전력은 여전히 유럽 최강이었다." "이에 앙리 4세는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영국, 네덜란드연방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펠리페 2세에게 평화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그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채무에 대한 지급정지를 선언한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1598년 5월 베르뱅 조약으로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칼레를 프랑스에 되돌려주었다. 다수의 프랑스인은 조약체결을 사실상의 승리로 간주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대다수 프랑스인이 이를 프랑스의 패배로 여겼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이후 40여 년 동안 스페인의 막강한 힘이 유럽인에게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105-6)


"유럽에서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의 탄생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규모를 갖춘 제국의 등장은 주변 국가들에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럽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외전략은 기본적으로 수세적·방어적이었다. 하지만 폴 케네디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전례 없는 규모로 인해 그러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전략도 주변 국가들에는 위협적인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합스부르크제국을 견제할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토가 합스부르크제국에 속한 영토에 둘러싸인 프랑스는 이 '포위망'을 깨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반추하고 개념화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가운데 유럽 국가들은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기본 문법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114)


3 30년전쟁과 17세기 중반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위기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에는 심각한 분쟁의 소지가 될 만한 몇몇 요소가 포함되었다. 우선 평화협정은 프로테스탄티즘 중 루터파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칼뱅교를 비롯한 다른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적지 않게 심각한 문제였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화협정에서 교회제후국의 통치자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면 그 통치자는 제후로서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교회제후국에 관한 유보조항')는 규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협정 체결 이후에도 유보조항을 협정의 일부로 볼 수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 제후들은 교회제후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귀족과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협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의 위반이라고 맞섰다. 평화협정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은 이후 30년전쟁의 발발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38)


"보헤미아는 15세기 초에 얀 후스가 주도한 종교개혁운동의 유산을 간직한 곳이었다. 1618년에 발발한 보헤미아 반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란을 연상시켰다. 양자 모두 합스부르크 연합왕국에 대한 저항이었고, 중앙정부의 강압적인 종교정책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종교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가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 중앙정부와 반란세력 사이의 싸움에 제3자가 개입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프라하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남짓 지난 1619년 7월 보헤미아 반란 주도세력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슐레지엔, 상·하부 라우지츠의 다섯 개 지역으로 구성되는 '보헤미아 연합'의 수립을 결의함으로써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같은 해 8월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했고, 칼뱅교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내전'이 독일의 '내전'으로 확대되었다."(149-50)


"신앙심과 정치적 야심을 동시에 지닌 프리드리히 5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보호와 증진이라는 명분 아래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의 확대와 강화를 모색해온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5세의 왕위 수락은 1619년 당시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결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일단 독일을 포함하여 유럽 전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가 주도한 가톨릭화 작업이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쾰른 분쟁, 도나우뵈르트 사건, 율리히-클레베 계승전쟁 등에서 나타난 합스부르크 황제와 가톨릭 제후국의 공세적인 정책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프리드리히의 얼핏 무모해 보이는 보헤미아 왕위 수락 결정은 합스부르크가 주도하는 반종교개혁의 예봉을 꺾고 프로테스탄트 제후국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선제적인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150-1)


"1620년 빌라 호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보헤미아 반란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한 페르디난트 2세는 1629년 3월 '복원칙령(Restitutionsedikt)'을 발표하여 1552년 이후에 세속화된 모든 교회영토의 재(再)가톨릭화를 명령했다." "일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과격한 내용의 칙령이 발표되자 모든 종교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 칼뱅교 제후들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오랜 기간 페르디난트 2세를 지지해온 작센을 비롯한 루터파 제후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가톨릭 제후들 역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칙령이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위기를 부채질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가 제국 내에서 오랜 기간 지켜져온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는 스페인도 우려를 표명했다. '복원칙령'은 페르디난트 2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157-8)


"1630년 7월 36세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독일 북부 포메른에 상륙했다. 스웨덴의 개입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던 합스부르크와 가톨릭 세력의 우위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반면에 1630년 이전까지 유럽 국제정치체제에서 주변적인 위치만을 점했던 스웨덴은 30년전쟁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단숨에 주요 강대국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스웨덴은 이때 획득한 강대국이 지위를 '대북방전쟁'이 종료된 1721년까지 유지했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30년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합스부르크-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스웨덴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었다. 물론 이들로부터의 위협이 임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독일 전역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스웨덴의 안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황제가 같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 손잡고 스웨덴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었다."(168, 172)


"스웨덴이 무려 18년 동안 중단 없이 독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군사기술과 행정역량 때문이었지만, 프랑스가 개입 초기부터 스웨덴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631년 1월 베르발데 협정에서 프랑스는 스웨덴에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독일에서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수년간 스웨덴의 전쟁 개입을 부추겼다. 프랑스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위그노와의 오랜 싸움이 1628년 10월에야 라로셀 함락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만토바 계승전쟁에 개입하여 스페인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벌어야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데보(devots)'라 불린 정치그룹이 같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슐리외는 폴란드와 스웨덴 양국 간의 정전협정 체결을 중재했고,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전한 후에는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177)


"스페인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사이 프랑스는 스웨덴과 헤세-카셀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동맹을 맺고 1637년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3세(r.1637~57)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뇌르틀링겐 전투(1634)의 패배로 독일 북부로 물러나 있던 스웨덴군은 본국에서의 병력 증원과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독일 중심지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황제의 군대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의 군대에 맞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완벽하게 부활했다. 30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제와 제후국의 군대는 스웨덴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1643년 7월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전쟁을 매듭짓기 위한 평화회담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양측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양측 간의 싸움은 평화조약이 체결된 해인 1648년까지도 계속되다가 그해 10월 각국 대표들이 조약문에 최종적으로 서명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190-2)


"몇몇 역사가는 30년전쟁의 시작단계에서부터 국제전으로의 성격이 중요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30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오랜 기간 지속된 스페인과 프랑스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보헤미아 반란에서 비롯된 황제와 독일 제후들 사이의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오랜 갈등과 경쟁관계에 얹혔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전쟁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벌어진 종교적·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30년전쟁은 1635년 혹은 적어도 스웨덴이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1630년 이전까지 독일의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었다. 1630년 이전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제국 내에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관계와 황제-제후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30년전쟁이 전적으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문제였다고 결론짓기보다는 1630~35년을 계기로 독일의 전쟁에서 국제전쟁으로 성격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193-4)


"17세기 중반은 오랜 기간 유럽 국제정치사에서 근대적 국제체제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여겨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의 한가운데에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중요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베스트팔렌 조약의 역사적 의미와 의의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주권원칙이 최초로 확립되었다는 믿음의 타당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조약에 관한 역사적 해석의 정확성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 견해에서는 평화조약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이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베스트팔렌에서 주권원칙이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역사가들과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에 대해 두 가지 이유에서 의문을 제기한다."(206-8)


"먼저 기존 견해에서는 뮌스터 조약 제65조에서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야말로 주권이 징표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제후국들은 1648년 훨씬 이전부터 타 국가들과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한을 사실상 인정받아 행사해왔다." "독일 제후국들이 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상위의 정치적·법적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약을 협상하고 체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제후들의 기본 입장은 자신들의 오래된 특권이 유지·보존되어야 하며, 30년전쟁 기간 동안 이를 빈번하게 침해한 황제의 권력 행사에 분명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이들이 황제의 권력과 제국의 제도들을 무력화하고 스스로 주권국가가 되고자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08)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신·구교 간 공존 문제가 해결되면서 종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아울러 연합왕국에 내재한 불안정 요인이 17세기 중반 이후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연합왕국의 결함은 17세기 중반 이전 주요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전쟁이 연합왕국의 '내부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전쟁과 1640년대의 카탈루냐 반란도 전자는 스페인과 영국이, 후자는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부분적으로 국제화되었다. 이에 반해 베스트팔렌 이후의 전쟁들은 거의 전적으로 '국제전'이이었다. 이는 17세기 중반 이후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연합왕국 내의 어떤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촉발하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타 국가에 의해 이용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211-3)


4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부상과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변화


"1659년 8월 중순부터 11월 7일까지 24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피레네 조약의 체결로 프랑스는 1635년 이후 24년간 중단 없이 계속된 전쟁을, 스페인은 30년전쟁이 발발하고 네덜란드와의 정전협정이 종료된 1618~21년 이후 무려 40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마무리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559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카토-캉브레지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역시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을 마무리한 바 있다." "다만 국제정치적인 위상에서 1559년과 1659년 두 나라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한 이후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 조약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마상시합에서 앙리 2세가 낙마하여 죽음을 맞이한 이후 프랑스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내전의 늪에 빠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레네 조약 이후 프랑스는 젊고 유능한 루이 14세 치하에서 유럽 국제정치를 주도한 반면, 스페인의 지위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236-7)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스페인의 위상은 눈에 띄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페인은 모든 힘을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쏟아부었다. 하지만 1665년 펠리페 4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된 포르투갈에 대한 대공세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1665년 빌라비치오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은 스페인군에 대승을 거뒀다. 1668년 스페인은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매듭지었음에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당대인들은 왕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667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상속전쟁'을 일으켜 스페인령 남부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스페인은 변변하게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엑스라샤펠에서 개최된 평화회담에서 스페인 대표단은 프랑스 왕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프랑스와 남부 네덜란드 사이의 국경선을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들여야 했다."(238-9)


"1658년에 결성된 라인 동맹은 서부 독일에서 일종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제후국들은 동맹을 통해 서부 독일이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프랑스는 독일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신 제후국들로부터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이 지역을 거쳐 남부 네덜란드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라인 동맹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고, 이로써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지역에서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안정적이었음에도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한 후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는 대신 국정을 직접 장악한 루이 14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가 더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었다. 1661년 이후 무려 54년간 프랑스의 거의 모든 주요 대외정책을 직접 결정한 루이 14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240-1)


# 루이 14세가 치른 전쟁들

1. 상속전쟁(1667~68) : 펠리페 4세가 사망한 후, 자신의 왕비이자 펠리페 4세의 장녀인 마리-테레즈의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벌인 전쟁. 네덜란드연방, 영국, 스웨덴이 3국 동맹을 체결하여 양국 간 합의를 종용하였고, 그 결과 엑스라사펠 조약이 체결됐다. 

2. 네덜란드전쟁(1672~78) : 프랑스 안보의 위협요소였던 남부네덜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전쟁 초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에 도취된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연방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개입했다. 그 결과 네이메헨 조약이 체결됐다.

3. 재결합전쟁(1683~84) : 독일과의 국경선을 '합리화'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스 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과 스페인, 스웨덴에 속했던(속한다고 여겨졌던) 영토들을 합병한 전쟁. 1681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들이 '제국군' 창설에 합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4. 9년전쟁(1689~97) : 퀼른 선제후국의 후임자 선출을 둘러싸고 프랑스가 '재결합전쟁'에서 획득한 영토의 안전을 빌미로 일으킨 전쟁. 동맹국(영국·스페인·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독일 제후국들)이 참전하면서 '소모전'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레이스베이크 조약이 체결됐다.

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 :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자신의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에게 넘기자 프랑스·스페인의 통합 가능성을 우려하던 동맹국(영국·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이 프랑스에 맞서 벌인 전쟁.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됐다.


"1712년 1월 29일부터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약 15개월 동안 진행된 평화회담 기간 내내 영국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적국인 프랑스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같은 동맹에 속한 네덜란드연방과 오스트리아도 영국의 평화안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볼링브룩이 큰 틀을 마련한 영국 평화안의 대원칙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다시는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의 원칙에 따라 스페인의 왕위계승과 영토분배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볼링브룩은 영국의 특수한 이익, 곧 네덜란드연방의 방어태세를 약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성과였지만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네덜란드연방에 주어진 보상은 너무나 미약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네덜란드연방이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마지막 전쟁이었다."(301-2)


"위트레흐트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영국은 유럽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적어도 7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해와 지중해,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영국의 제해권이 굳건히 유지되었다. 비록 하노버가의 조지 1세가 영국 왕위에 오른 후 정권을 탈환한 휘그당에 의해 탄핵되어 런던탑에 갇히거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옥스퍼드와 볼링브룩을 비롯한 토리당의 꿈이 실현되었다. 지중해의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획득으로 영국은 자국 상인들의 레반트 무역을 지원할 천혜의 해군기지를 확보했고, 뉴펀들랜드 획득으로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네덜란드연방을 배제하고 수익성 좋은 사업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 원칙을 인정하고, 제임스 2세의 아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할 것도 약속했다. 이 합의에 따라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로렌 공국으로 망명지를 옮겨야 했다."(302)


"1714년 3월 라슈타트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와 란다우를 보유하는 대신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 중 라인강 우안에 위치한 브라이자흐, 켈, 프라이부르크 등 모든 도시와 요새를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또한 이탈리아에서 과거 스페인에 속했던 거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밀라노와 만토바, 미란돌라, 파르마, 피아첸차 등 주변의 작은 공국, 나폴리, 사르데냐가 모두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남부 네덜란드 역시 오스트리아 수중에 들어갔다. 스페인 왕위와 모든 영토의 계승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으므로 평화조약체결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던─카를 6세는 1725년까지도 자신을 스페인 국왕으로 칭했다─오스트리아는 역설적이게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참전국 중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더불어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304-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발단은 프랑스의 부르봉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어느 한편의 왕위계승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스페인을 차지하는 국가로 급격히 기울어질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전쟁을 결심하게 한 것은 왕위계승으로 초래될 국가들 사이의 힘의 배분 변화였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왕위계승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붕괴를 막기 위한 '세력균형 전쟁', '예방전쟁'이었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들이 남긴 글에서 드러난 한 가지 중요한 인식상의 변화는 유럽 국제정치체제가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서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과 구분되는 '공적 이익'을 갖는다는 관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가장 중요한 '공적 이익'은 '안정'과 '평온'으로 규정되었다.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은 이러한 체제의 '공적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정당하게 허용될 수 있었다."(308-9)


5 18세기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 힌슬리와 도일의 이론과 그 한계점

1. 1715년 이후 그 어떤 유럽 국가도 단독으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고전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는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와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종종 '전근대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개념화·이론화의 수준이 떨어졌지만), 이들은 이미 세력균형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2. 18세기 유럽 국제관계는 외재 변수들이 통제될 때 세력균형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실험실' 같은 환경을 제공했다. → 18세기 이후 국가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이성 이념이 판단기준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군주의 명예와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정책결정자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변심 같은 외재적 변수는 여전히 존재했다.


"위트레흐트 이후의 유럽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프랑스가 더 이상 여타 국가들을 위압하거나 이들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스웨덴과 폴란드, 러시아 사이에 '대(大)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이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서유럽은 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1740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비견될 만한 규모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과 무력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거의 25년간 쉼 없이 이어진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면서 갈등의 중심축이 사라짐에 따라 군사적 충돌의 강도가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 대신 각 국가는 파트너를 바꾸어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다. '주적(主敵)'이 사라진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협력할 상대와 적대할 상대를 택했다."(324-5)


"1716년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 체결에 합의했다. 영국이 먼저 동맹체결을 제안했고, 오를레앙의 섭정체제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던 프랑스는 잠시 고민한 끝에 이를 수락했다.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20년 이상 치열하게 대립한 두 나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은 내정 불안의 위험에 처해 있던 오를레앙과 조지 1세가 안정적인 대외환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동맹을 체결하는 대가로 프랑스는 영국에 하노버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반란을 주도한 '제임스 3세'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 교황령으로 추방할 것을 약속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서약을 깨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 오를레앙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1717년 네덜란드연방의 가입으로 삼국동맹으로 재편된 이 동맹은 이후 1731년까지 양국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위트레흐트 체제에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였다."(327-8)


# 1715년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하여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 역할을 맡게 되자, 왕위계승 서열에서 앞서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했음에도 오를레앙 공작의 정통성을 공공연히 문제 삼았다.


#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독일인의 왕위계승은 정통성 문제를 야기했고, 자코바이트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왔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1731년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제2차 빈 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영국이 오스트리아와의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고, 프랑스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내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이 아닌 오스트리아가 영국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맹 파트너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화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너무나 심각하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모두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대륙 국가였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가 1680년대 이후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중·동부 유럽에서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획득하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도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밀라노, 나폴리 등을 획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자 프랑스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2)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즉위하기 훨씬 전부터 새로운 영토획득이 프로이센 통치자로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1731년 19세의 프리드리히는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당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영토는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 사이에 위치한 서프로이센과 스웨덴령 포메른이었다. 1740년 슐레지엔이 새로운 목표물이 된 것은 카를 6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은 그동안 주저하고 망설이던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특히 당시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 분쟁이 발단이 되어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을 지원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자국의 위상을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망으로 활짝 열린 기회의 창문을 적극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던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을 계기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351-3)


"프리드리히 2세의 슐레지엔 침공으로 대륙에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무렵 영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은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무역 분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국령 자메이카와 프랑스 소유의 몇몇 섬을 제외하면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의 주요 섬들과 플로리다, 멕시코, 온두라스,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보유한 스페인 정부와 경제적으로 큰 이윤이 보장되는 이 지역과의 무역을 늘려나가기를 원하는 영국 무역업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원인이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국민들은 영국이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었지만, 예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했다." "유럽대륙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영국-스페인 전쟁은 차츰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일부로 흡수되었다."(353, 356)


"이제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제공할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1742년 7월 28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주선으로 베를린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베를린 조약의 체결과 함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첫 번째 국면이 막을 내렸다. 의심의 여지없이 승자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는 애초에 세웠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슐레지엔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슐레지엔 합병으로 프로이센의 인구는 220만 명에서 32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작센의 공세에 사실상 홀로 맞서야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 중 슐레지엔과 보헤미아의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이 독일을 넘어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면, 오스트리아 역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확인받을 수 있었다."(365)


"대륙의 상황에 한층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의 주선으로 1943년 9월,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사이에 보름스 조약이 체결됐다.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시칠리아를 최종적으로 차지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보름스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였다. 오스트리아로부터 할양받기로 한 영토의 전략적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가 약속을 지킨다면 사르데냐는 밀라노와의 사이에 마조레 호와 티치노 강, 포 강이라는 '자연국경'을 가지게 될 터였다. 카터릿은 〈이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사르데냐 국왕은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약 120년 후 현실이 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이처럼 높은 가치를 지닌 영토할양을 약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르데냐와의 동맹을 원하는 프랑스-스페인과 영국-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몸값'을 올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368)


"보름스 조약의 체결은 루이 15세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르데냐와 동맹을 맺은 결과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긴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다시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베를린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에 다시 개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745년 12월 15일에 체결된 드레스덴 조약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녀로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1745년 1월에 사망한 카를 6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선출된 남편 프란츠 1세의 권위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드레스덴 조약으로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막을 내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클라인슈넬렌도르프와 베를린에 이어 드레스덴에서 세 번째로 프랑스와의 동맹를 일방적으로 포기했다."(369-71)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한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참전국들이 1748년 10월 18일 엑스라샤펠에서 조약안에 서명함으로써 8년여에 걸쳐 지속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기본원칙은 '전전(戰前)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반환했고, 영국은 1745년 6월에 빼앗은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부르 요새를 반환했다. 오늘날의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 섬에 위치한 루이스부르 요새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영국은 1738년 영국-스페인 전쟁 발발 이전에 누리던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특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베를린과 보름스, 드레스덴에서 영국의 압력으로 상당한 양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오스트리아는 엑스라샤펠에서 다시 한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379-81)


"169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영국과 대등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오히려 전함 숫자에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 앞섰다. 영국 해군이 9년전쟁 중에 벌어진 1692년 바르플뢰르 해전과 라오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동맹국인 네덜란드연방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의 해군력은 프랑스에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은 꾸준히 전함을 건조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지상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재정적으로 벅찬 상황에서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 해군력 증강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가졌다. 프랑스 정부는 값비싼 전함을 건조하고 함대를 운용하는 대신 사략선을 활용하여 적국의 민간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상업 및 무역 활동을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해권 장악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411-2)


"결국 1758년을 전후하여 완전한 저력을 갖추게 된 영국 해군은 프랑스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프랑스 선박과 이를 호위하는 전함의 항해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영국 선박은 프랑스 해군과 사략선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인원과 물자를 안전하게 북아메리카로 운반했다. 1758년을 기점으로 북아메리카의 전황이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황이 역전된 두 번째 이유는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북아메리카 현지의 인적 자원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7년전쟁이 발발할 즈음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계 주민의 수는 5만여 명에 불과했던 데 비해 영국계 주민은 110만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피트가 현지 주민에게 영국의 영국의 전쟁 노력에 인적·물적으로 기여하면 전쟁이 끝난 후 본국 정부가 그 비용을 모두 변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415)


"1759년은 영국에 '기적의 해'였다. 북아메리카에서 퀘벡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지역의 바다와 육지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도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해군은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를 점령하여 이 섬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와 커피 등을 본국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이베리아반도 인근의 라고스 만과 프랑스 서부 해안의 퀴베롱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정찰군이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다. 이는 피트 내각이 전례 없이 많은 수의 병력을 대륙에 파병한 덕분이었다. 무려 10만 명의 영국군이 본국의 지원을 받는 5만 명의 독일군과 함께 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았다. 당대의 유명한 예술사가이자 정치인이던 호레이스 월폴은 계속되는 승전보에 〈승리를 알리는 종이 닳을 정도〉라고 썼다. 영국과 프랑스의 7년전쟁은 1759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승부가 갈렸다."(416-7)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은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6주의 협상을 거쳐 체결되었다. 1648년 이후 체결된 모든 평화조약을 위한 협상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협상이 완료되었다. 조약 내용은 단순명료했으며 두 나라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데 합의했다. 오스트리아는 1742년의 베를린 조약과 1745년의 드레스덴 조약을 재확인했다." "엄청난 인명 희생과 재원의 소진을 초래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어떠한 영토상의 변화도 없이 종료되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실지와 명예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프로이센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세 나라를 상대로 전반적으로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을 승자로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이유다."(419-20)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데 있다. 7년전쟁을 통틀어 둘 이상의 동맹국 군대가 합동으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했더라면 프로이센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동맹국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18세기 유럽의 전쟁에서는 결정적이었던 프로이센의 또 하나의 승리 요인은 세 동맹국의 군대가 겨울철이 되면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겨울숙영지를 찾아 전장에서 철수하여 각지의 근거지로 이동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나라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를 지속적인 전략적 우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즉, 프로이센군을 패배시킨 후 여세를 몰아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421)


"1763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간에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뷰트 내각이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프랑스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거부한 것은 만약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게 되면 멀지 않은 장래에 전쟁이 재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측에서 평화협상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베드포드는 프랑스에 뉴펀들랜드 해역에서의 조업권을 허용하는 것은 장차 영국을 상대할 해군을 재건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피트에 대해 프랑스의 해군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은 〈자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베드포드는 영국이 해상에서 절대 패권을 장악한다면 유럽 국가들은 서로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은 루이 14세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루이 14세의 기억이 반세기가 넘도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영국에 더 신중하게 패전국을 상대하도록 한 것이다."(429)


"7년전쟁에 합류한 시점에 프랑스 정부 내에서는 영토의 크기보다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획득한 상업적 부가 국가의 국력수준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프랑스가 7년전쟁을 계기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재정의함에 따라 해양세력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들과 대륙국가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분절'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은 중부 및 동유럽 세 나라의 폴란드 분할(1772, 1793, 1795)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반대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원하여 영국과 벌인 전쟁(1778~83)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800년대 나폴레옹의 집권과 함께 프랑스가 대륙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함에 따라 '분절'은 잠시 사라졌지만, 그의 몰락 이후 다시 중요해졌다."(4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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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 990~1992년 프리즘 총서 27
찰스 틸리 지음, 지봉근 옮김 / 그린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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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계사에서의 도시와 국가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국민국가national states─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된 자치 가능한 구조를 방편으로 다양한 인접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국가─는 매우 드물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국가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제국이나 도시국가 또는 다른 어떤 형태였다. 유감스럽지만 국민국가라 해도 반드시 국민들이 강한 언어적·종교적·상징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민족국가nation-state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웨덴과 아일랜드 같은 국가가 현재 이러한 이상형에 근접하지만 극소수의 유럽 국민국가만 민족국가로 보기에 적합하다. 영국, 독일, 프랑스는─기본적으로 국민국가이긴 하지만─분명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호전적인 민족성을 보이는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그 밖의 다른 지역과 한 묶음인 소비에트연방은 매일 고통스러운 차이를 경험했다." "지배자들 간에 서로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상호 권리를 인정했던 명목상의 독립국가들이 거의 전 세계를 점유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19)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태동하고 국가적 군비 확장과 유럽의 긴 헤게모니 장악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에 대한 적절한 대안들─990년 한참 이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지역에서 번창했던 느슨하게 결합된 지역적 제국들─이 유럽에서 득세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학자들이 의문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다." "명확히 한정된 어느 정도 독립한 국가들로 분할되는 과정과 밀집하고 불균등한 네트워크의 동시 발생은 결과적으로 유럽을 다른 세계들과 구별시켰다. 도시와 국가의 변화하는 지형학 이면에는 (도시를 선호하는) 자본과 (특히 국가 안에서 확고해지는) 강제의 역학이 작동했다." "그리하여 핵심적인 이중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990년 이후 유럽에서 득세했던 국가의 종류와 관련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는 거대한 변형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유럽의 국가들이 결국 국민국가의 다양한 변형들로 통합했는가? 왜 변화의 방향이 그렇듯 유사한데 경로는 다양한가?〉라는 문제이다."(22-3)


# 기존 이론들

1. 국가주의적 분석 : 정치적 변화를 경제적 변화의 부분적 독립 과정으로 보며 특정 국가의 내부적 사건들의 결과로 제시한다.

2. 지정학적 분석 : 국제 체제 내에 '국가 제조 기술자'가 있으며, 국가 구성은 국가 관계에 대한 현재 채제에 강하게 조응한다.

3. 생산양식 분석 : 봉건주의, 자본주의 또는 다른 생산 조직의 논리가 국가 영토 내에서 작동하면서 국가와 그 변화를 추동한다.

4. 세계 체제 분석 : 국가 간의 관계를 경제 구조에서 도출하지만, 개별 국가의 구조를 세계 경제 내 위상의 결과로 간주한다.


"자본을 축적하고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이 책의 분석에서 도시는 확실히 중요한데, 이는 자본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이자 그들의 이권을 위한 조직적 동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각 가정의 생존 문제는 고용, 투자, 재분배 또는 다른 강한 연계를 통한 자본의 존재에 의존하는 바, 인구 분배는 자본 분배를 따라갔다(그러나 때때로 자본은 싼 노동력을 쫓아가며, 둘은 상호적 관계이다). 교역, 창고 저장, 은행, 생산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는데, 서로 인접함으로써 모두 이득을 얻는다. 농업 생산력에 의한 한계 내에서도 그러한 인접함은 조밀하고 차별화된 인구 구성을 촉진시키는데, 그들은 외부, 즉 도시에 이어지는 연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 성장의 혁신은 집중과 축적 사이의 균형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 축적이 전반적으로 진행되었으나 집중화가 상대적으로 저조한 곳은 훨씬 작은 규모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자본 집중만이 단일하게 부각된 곳은 도시 인구가 중심지 주변에 응집한다."(43-4)


"유럽의 국가들은 실제로 핵심적 활동과 조직의 분야에서 상당히 달랐다. 세 가지 상이한 국가 양식은 990년 이후 중요한 분절의 시기에 유럽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확산하였다. 그 세가지는 조공을 받는 제국들, 도시국가와 도시연합 같은 주권 분할 체제, 국민국가이다. 첫째는 대규모 군대와 차출 기구를 건설했으나 지역 행정의 대부분은 지방 실세들에게 남겨 주었고 그들은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다. 주권 분할 체제에서는 연정과 협의 기구들이 전쟁과 차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국가적 규모에서 지속적인 국가 장치가 부상하는 일은 드물었다. 국민국가는 군사 조직, 차출 조직, 행정 조직, 심지어 유통 및 생산 조직조차도 상대적으로 조직적이고 중앙집권화한 구조 내에 통합한다. 이 세 가지 형식 모두의 오랜 생존과 공존은 유럽의 국가 구성이 단일하고 단선적이라는 통념, 또는 국민국가가 본질적으로 우월한 정부 형태라는─실제 점차 우월해지기는 한다─통념에 반하는 내용이다."(49)


"축적은 유럽의 경제사에서 보다 큰 장기적 차이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중심 고리는 단순하다. 장기적인 면에서 면에서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전쟁과 전쟁 준비가 유럽 국가들의 주요 구성 요소를 생산해 냈다. 전쟁에 패한 국가들은 보편적으로 수축되고 흔히 그 존재를 마감했다. 국가의 크기와 상관없이, 가장 큰 강제 수단들을 소유한 국가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효율성(투입량 대비 산출량)은 유효성(총산출량)에 이어 두 번째 순서였다. 경쟁, 기술적 변화, 가장 큰 교전 상대국의 규모가 상호작용하며, 전쟁과 강제 수단의 창안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광대한 확장을 이루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수록 점점 더 소수의 지배자들만이 자신들이 소유한 정규 자산으로 군사적 수단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지배자들이 단기적 차용과 장기적 조세로 바꾸었다. 두 활동 모두 기존의 자본 집중이 이루어진 곳으로 더 쉽게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든 곳에서 통치 구조의 변화를 만들어 냈다."(61-2)


2장 유럽의 도시와 국가


"990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가장자리에 살았던 대략 3000만 명의 사람들은 역사와 공동의 운명으로 연결된 단일한 집합적 인간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리라는 어떤 설득력 있는 이유도 없었다." "황제, 왕, 왕자, 공작, 칼리프, 술탄, 그리고 다른 강력한 통치자들은 정복자, 조공 수취인, 임대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영역 내 사람들을 지속적이고 치밀하게 통제하는 국가의 수장은 아니었다. 나아가 그들의 관할권 내에는 경쟁자들과 표면상의 신하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명목상 주권자들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병私兵들이 대륙 전반에 걸쳐 확산되었다. 유럽 어느 곳에도 중앙집권화된 국민국가 비슷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뻗어서 형성된 원 안에서 수명이 짧은 국가의 주권은 더욱 심하게 분열되어 수백 개의 공국, 주교 관할 지역, 도시국가, 그리고 수도의 작은 배후지에서 중첩된 통제를 가하는 권력체로 분열되었다."(78-80)


"1490년, 유럽의 주변 지역에는 실질적인 영토를 지배하는 지배자들이 자리했다. 오스만제국뿐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모스크바대공국, 튜튼기사단의 땅, 스칸디나비아 동맹,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나폴리가 그런 곳들이다. 그러한 권력은 대체로 임대료와 공물에 근거해 유지되었고, 자신의 지역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의 거물들을 통해 지배하였다." "보다 큰 국가들의 부서진 원형 내부에서 유럽은 극도로 주권이 분할된 땅으로 남아 있었다." "유럽의 8000만 인구는 500개의 국가, 국가 지망 세력, 작은 주, 유사 국가 조직들로 분할되어 있었다. 다시 5세기가 지난 1990년, 유럽인들은 통합 작업을 훨씬 더 강화하였다. 현재 6억 명이 유럽 대륙 주위에 살고 있다." "비록 1490년에 존재했던 정치적 독립체들 대부분보다는 크지만, 룩셈부르크와 안도라 같은 소국들은 진기한 것이 되었다. 계산법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유럽 전체는 단지 25~28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82-4)


"유럽의 도시들은 상업과 산업의 우선성에 의해 느슨한 위계를 형성했는데, 거의 모든 시기에 소수의 도시 클러스터들이 나머지 도시들을 확실하게 지배했다." "상업적 농업은 전반적으로 상인, 대규모 자영농, 작은 영지의 영주들을 번창하게 했지만, 대영주가 농촌 환경에서 민중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약화시켰다." "성장하는 도시들은 커다란 이주민 흐름을 생성시켰다. 즉, 행상·상인·하인·장인들이 해마다 계절마다 도시와 시골 사이를 자주 오갔던 것이다." "도시와 농촌 간의 강한 교역의 존재는 지배자들에게 관세와 소비세를 통해 수익을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과세의 기회, 영주의 권력, 군대의 공급은 국가가 형성되는 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량 공급, 이주, 교역, 통신, 취업 기회를 통해 큰 도시 클러스터들은 주변 지역의 사회적 삶에 그 표시를 각인시켰고, 따라서 국가권력을 그 지역까지 확장하려는 지배자들의 전략에 영향을 주었다. 도시 성장의 시기에 이러한 효과들은 더 강화되었다."(92-5)


"강제의 지형도와 자본의 지형도 사이에 오랜 기간 지속되는 불일치는 이들을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적 관계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진화하도록 했다. 990년부터 현재까지 유럽 전체적으로 자본과 강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변천은 두 개의 평행선 원호를 따라왔다. 먼저 '가산제'의 시대에 유럽의 왕조들은 보통 필요한 자본을 직접 통제 아래 있는 토지와 주민들로부터 공물과 임대료로 차출하였다.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금액은 통상 엄격한 계약상의 제한 금액 내에 있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 즈음)에 왕조들은 대출, 수익 사업 관리, 세금 취합을 공식적으로 독립적인 자본가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르면 '국유화'의 시대가 왔는데, 대부분의 주권자들이 재정적 장치들을 국가 구조에 직접 병합시켰고, 독립적인 계약자들이 관여하는 것을 급격하게 축소시켰다. 근세기 '전문화'의 시대에는 군사 조직에서 재정을 더 확실하게 분리하였고, 고정자본 감독에 대한 국가 관여를 증가시켰다."(101)


"강제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진화가 이루어졌다. 가산제의 시대에 왕조들은 하인, 신하, 왕에게 인력 봉사를 해야 했던 민병대로부터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이 또한 계약상의 제한 내에 국한되었다. 중개의 시대(특히 1400년~1700년까지)에 왕들은 상당한 행동의 자유를 유지했던 하청업자들로부터 공급받은 용병들에게 점점 더 의존했다. 다음으로 국유화의 시대에 주권자들은 육군과 해군을 국가의 행정 구조에 직접 흡수했는데, 점차 외국 용병들을 돌려보내고 대부분의 병력을 국가 자체의 시민들로부터 고용하거나 징병했다. 19세기 중반 전문화의 단계에서 유럽 국가들은 대규모 민간 행정가들의 후원으로 시민 군대 체제를 통일하였고, 전쟁 이외의 강제적 사용에 특화하기 위해 경찰력을 분리시켰다. 19세기에 이르면,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군대와 재정 메커니즘을 내재화하였다. 강제와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이는 다양하고 폭넓은 규율·보상·분배·보호 활동과 병행되었다."(101-2)


3장 전쟁이 국가를 만든 방식, 그리고 그 반대의 방식


"강제는 항상 상대적이다. 집중된 강제 수단을 통제하는 누구라도 이웃이 그런 수단들을 구축하게 되면 이익을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1400년 이전의 유럽에서 친족 집단에 의한 대부분 국가의 통치는 그 경쟁을 가중시켰다. 번성하는 친족 집단의 성향은 확장과 점증하는 상속자 수에 비례한 영역 확보를 추구하는 바, 이것이 정복을 조장했고, 따라서 경쟁 관계를 심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공석이 된 왕위에 대한 권세 있는 왕조의 요구 덕분에 지배자 가족들 간의 결혼은 증가하였다. 주권이 분할된 유럽 지역에서 경쟁자들은 항상 쉽게 닿을 만큼 가까운 관계였지만, 어떤 특정한 중심권이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동맹으로도 항상 유효하였다. 더욱이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같은 보다 큰 국가들은 현재의 주권에 대한 '내부적' 경쟁자들을 오랫동안 품어 주었는데, 그 경쟁자들은 지배에 대한 일부 권리를 주장하는 무장 집단이며 외부의 적에 대해 묵시적이거나 명시적인 연합군으로 공헌하기도 했다."(133)


"모든 국가의 특정한 전쟁 만들기 유형은 밀접하게 연관된 세 개의 요소에 따라 결정되었다. 즉, 주요 경쟁자들의 특성, 외부를 향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지배자 자신과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신하여 지배자가 수행했던 보호 활동의 논리가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줄곧, 대규모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국내 지배를 위해 무장했고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던 지역 거물들에 의존한 탓에 그들이 지배자에 반대해 무기를 들 때마다 반복적으로 내전을 치러야 하는 위험에 마주쳤다. 1400년부터 1700년까지의 중대한 시기에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경쟁적 청구인들을 무장해제하거나, 고립시키거나, 동참하도록 하는데 대부분의 공력을 소모했다. 지방 권역에서는 자체의 소규모 경찰 병력을 오래전에 창설하였지만, 유럽 국가들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제복을 갖추고, 급여를 받으며 관료제를 갖춘, 그리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데 특화된 경찰력을 확립하였다. 덕분에 군대는 외부 정복과 국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132, 140)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유럽 국가 형성의 중대한 시기였던─유럽 대부분 지역에 배치된 군대들은 전반적으로 대영주와 군사 기획가에 의해 모집된 용병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단순히 군대를 모집하고 이들에게 급여를 지불하는 것만을 수반한 것은 아니었다. 호전적 국가는 그만큼 보급을 해야만 했다. 17세기말 6만 명의 남성으로 된 군대와 4만 마리의 말들은 하루에 거의 100만 파운드의 곡식을 소비했다. 일부는 군사들과 함께 끌고 다녔고, 일부는 창고에 보관했으며, 군대가 위치한 곳이 어디건 대량의 곡식을 구해 주어야 했다. 그 모든 것은 막대한 비용과 조직이 필요했다. 당시의 금액과 임금으로 보면 100만 파운드의 곡식 가격은 일반 노동자 9만 명의 하루 임금과 같은 금액이었다. 군대는 음식 외에 무기, 말, 의류, 막사 또한 필요로 하며, 군대가 크면 클수록 개개인에게 보급품을 제공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리하여 물자 보급에도 관여하게 된 17세기의 용병 사업가들의 거대 사업은 더욱 커졌다."(149)


"역사적으로 대국들이 군사적 비용을 당기 수입에서 지불할 수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그 부족분을 차용이나 또 다른 방식에 의해 해결했다. 즉, 채권자를 기다리게 만들고, 공직을 팔고, 고객들로부터 대출을 강요하고, 정부의 미래 수입에 대한 청구권을 획득한 은행가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결했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기꺼이 하고자 할 때는 대출 기관으로서, 대출 동원자로서, 그리고 관리자 또는 그 대출을 상환하는 수입의 모집인으로서도 국가에 봉사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국가 경제의 화폐화를 촉진시키기도 했다." "프랑스혁명과 함께 시작된 대중 동원 체제와 대규모 시민 군대의 시대에 국가의 순수 인구 규모는 대체적으로 전쟁 도발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자본가의 활약, 화페화, 활용 가능한 신용, 전쟁 도발의 용이함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이런 점들은 자본가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국가들에서 전시 체제로 재빨리 변동하는 중요한 장점을 제공해 주었다."(157-8)


"해외의 제국은 모국에서 지상전을 치렀던 범주의 국가 구조와는 다르게 건설되었다. 그럼에도 국가와 제국의 관계는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유럽 국가의 특성이 유럽 외부로 확장하는 형태가 지배적이었고, 제국의 특성이 본국 중심지의 작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와 네덜란드공화국 같은 자본 집중 국가는 주로 교역의 독점권을 향한 무자비한 추구에 몰두했으나, 군사적 정복과 식민화에는 거의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노르웨이와 스페인 같은 강제 집중 국가는 그 에너지의 대부분을 정착, 토착(또는 수입) 노동력의 노예화, 공물의 강제 징수에 쏟았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절충형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 제국주의 게임에 입장했고, 자본주의와 강제 전략을 결합하여 뛰어난 결과를 만들었다." "정복과 정착 전략은 불가피하게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육군과 해군을 필요로 했는데, 전세계에 걸친 관료들의 그물망이 태동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중앙정부에 관리를 추가해야 하는 일을 만들었다."(171-2)


4장 국가와 시민


"전쟁 만들기와 국가 만들기는 서로를 강화시켜 주며, 국가가 상당한 규모의 인접 영토 주변으로 확실하게 인정받는 경계를 구성하기 시작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구분이 안 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둘 모두 지역 주민들로부터 자원을 차출─국가 만들기, 전쟁 만들기, 보호를 위한 수단을 국민 대중으로부터 끌어내기─하게 된다. 자원 차출 시도 때문에 국가가 보호에 관여하는 일이 늘어나는데, 이는 선택된 고객에 대한 경쟁자와 적을 저지하는 일이다. 차출과 보호가 확장하면서 국민 대중 내의 분쟁에 대한 판결 요구가 생성되었고, 여기에는 차출과 보호 자체에 대한 법적 규제가 포함되었다." "지배자들이 전쟁과 다른 강제 수단을 위해 지역 경제로부터 더욱더 많은 자원을 인출할수록, 그 경제 내의 주요 계급들은 강제와 전쟁의 영역 바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더욱 많이, 성공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사한 1000년의 범위에서 강제 활동이 명백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175-6)


"산발적이건 대규모건 저항에 직면했을 때 지배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협상을 했다. 납세 저항자를 뭉개고 망설이는 납세자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데 '협상'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본보기의 처벌을 빈번히 사용하는 것─저항하는 이들 모두가 아니라 소수의 주모자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 모든 연체자들 대신에 가장 부유한 지역 납세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은 권력자들이 민중 다수와 타협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어떤 경우건, 협상은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모든 타협은 국가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청원, 국가 대 개인과 집단의 권리, 국가의 시민에 대한 의무를 창출했거나 아니면 확인했다. 그것은 또한 시민에 관한 국가의 권리도 창출했다. 우리가 지금 '시민권'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은 지배자들이 머리를 짜내고, 특별히 호전적 행위와 같은 국가 활동의 수단들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구획된 다수의 협상들로 구성된 것이 맞다."(183)


"1750년 이후 국유화와 전문화의 시대에 국가들은 거의 보편적이었던 간접 지배 체제에서 직접 지배의 새로운 체제로 이동했다. 이는 지역 공동체, 가정, 생산적 기업의 삶에 대한 중재되지 않은 개입을 의미했다." "18세기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세를 증대시키면서, 공동체·가정·기업과 바로 타협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자율적 중재자를 모두 없앴다." "17세기 이전에 규모가 큰 유럽 국가들은 모두 강력한 중재자들을 통해 신민을 통치했는데, 중재자들은 상당히 자율권을 가졌고, 국가권력의 대리 행사를 통해 그들 자신의 이권을 챙겼다." "그러나 인력을 포함한 더 많은 자원이 전쟁에 필요해지자, 그리고 대국들의 정복 위협이 점점 더 심각해지자 훨씬 더 많은 지배자들이 오랜 중재자들을 우회하거나 억압하거나 끌어들여서 전쟁에 충당할 돈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체와 가정에 직접 손을 뻗쳤다. 따라서 국가 상비군, 국민국가, 직접 지배는 서로 인과관계라고 하겠다."(186-8)


"지배자들은 국가권력을 조작하기 위한 더욱 자의식 강한 시도 중 하나로, 직접 지배를 장치하는 과정에서 인구 구성을 동질화하고자 자주 노력했다. 지배자의 시점에서 언어·종교·이데올로기가 동질화된 인구 구성은 왕의 요구에 반대하는 공동 전선을 펼 위험을 주었다. 따라서 동질화는 분리하여 지배하는 정책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 동질성은 많은 것을 보상하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동질화된 인구 구성 내에서 일반 민중은 지배자와 동일화할 가능성이 더 커지고, 의사소통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어질 수 있고, 한 분야에서 작동했던 행정적 혁신이 다른 곳에서도 그만큼 작동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공통의 기원을 느꼈던 사람들은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여 통합할 가능성이 더욱 컸다. 예를 들어 1492년 그라나다 정복을 완수했던 직후에 스페인은 종교적 소수자들─특히 무슬림과 유대인─에게 개종과 이주 중에 선택할 기회를 주어서 주기적으로 동질화를 촉진시켰다."(191-2)


"직접 통치가 유럽 전역에 확산되자 유럽 보통 사람들의 복지, 문화, 일상은 그들이 거주하게 되었던 국가에 이전에는 결코 없었던 방식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 국가는 국어, 국가 교육 체계, 국가 병역,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부여하려고 착수했다." "그러한 점에서 삶은 국가 내부에서는 균질화되었고,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질화되었다. 국가적 상징은 결정화되었고, 국어는 표준화되었으며, 국가 노동시장은 조직화되었다. 전쟁 자체는 균질적인 경험이었는데, 이는 군인들이 전체 국민을 대표하였고 시민 대중은 공동의 궁핍과 책임을 감내하였기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 구성의 후기 단계에서 '민족주의'의 표지 아래 같이 묶을 수 있는 이질적인 현상들이 산출되었다. 그 말은 정치적 독립에 대한 요구에도 그들 자체의 국가를 갖지 못한 주민들의 집단적 행동 동기를 지칭한다. 그것은 또한 유감스럽게도 다른 국가에 강한 일체감을 가진 기존 국가의 주민들의 동기를 지칭하기도 한다."(206-7)


5장 국민국가의 계통


"국가란 명확한 영토 내에서 집중화된 강제의 수단들을 통제하는 차별적 조직이고, 어떤 점에서는 같은 영토 내에서 작동하는 모든 조직들에 대해 일차적 우선순위권을 행사한다. 무장한 남성들이 국가를 만드는데, 그 수단은 주어진 영토 내에서 강제의 수단을 축적하고 집중시켜서, 그 영토 내에서 생산과 재생산을 지배하는 조직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구별되는 조직을 창설하여, 같은 영토 내에서 다른 집중화된 강제를 압수·포섭·청산함으로써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 안에서 관할권을 실행하면서 구성하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인접 영토들에 같은 과정을 확산시키고, 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되고 자율적인 조직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국민국가를 창안하였다." "비록 국가 창설자들이 항상 정복과 통제의 모델을 의식적으로 따르려 했지만, 그러한 활동들이 낳은 국가의 단계별 구성에 대한 계획을 세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활동은 강제적 통제의 하향식 위계를 필연적으로 창안하였다."(232-3)


"넓게 보면 유사한 방식으로,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세르비아, 브란덴부르크 국가는 호전적인 군주들과 무장한 영주들 사이의 강한 동맹, 귀족과 신흥 중산계급에 대한 통치 권력의 큰 양보, 농민에 대한 합동 착취, 한정된 범위에서 상업 자본에 기초하여 구성되었다." "왕과 귀족의 상대적 무게(전쟁이 지속 가능한 국가 구조를 만들어 낸 정도)는 매우 다양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모두 잔혹한 강제에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에서 이웃한 유럽 국가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16세기에 동유럽의 곡물이 서쪽으로 엄청나게 밀려오기 시작하자, 대영주들이 기존 통제 구조에서 운송을 통해 직접 이익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대영주들은 국가권력을 사용하여 상인들을 억제했고 농업 생산자들을 강압했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농노제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권력 균형의 상황에서는 상업 확장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건설되지 않았고, 독립적인 자본가 계급도, 유럽의 도시국가를 닮은 국가도 만들어지지 않았다."(250-1)


"우리는 국가 구성의 주요한 선택적 형식들로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스페인의 경로를 대조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유럽 전체의 범위에서 보면 그 넷은 (네덜란드와 베네치아 같은) 자본 집중과 (러시아와 폴란드 같은) 강제 집중의 경로와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 공통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네 경우 모두 야망을 품은 왕조들이 다양한 성공을 거치며, 16세기와 17세기에 군사력 구축을 위해 지방의 중요 신분을 대표하는 회합들을 분쇄하거나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은 신분 의회Estates가 복종하였고, 스페인 의회Cortes는 휘청거렸고, 영국 의회Parliament는 지배계급 권력의 방어벽으로 생존했다. 네 경우 모두 자본의 중심과 강제의 중심이 일치했던 점은─최소한 잠깐이었더라도─적시에 대규모 군사력 창설을 용이하게 했다. 그 적시란 대규모의, 고비용의, 잘 무장된 육군과 해군이 국민국가가 헤게모니와 제국을 추구하는 데 엄청난 장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기를 뜻한다."(280)


"왜 베네치아나 러시아는 잉글랜드가 되지 못했는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와 이탈리아는 1세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이 국민국가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전 역사가 그들 곁을 맴돌았다. 베네치아는 상업 귀족의 이익에 경도된 국가를 창설했고, 이 귀족 계급은 대규모의 영속적 군사력을 구축하려는 노력에 협조하는 것보다는 유럽 상업 체제의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른바 전제군주에 의한 국가를 창설했지만, 이들은 농민의 노동력과 그 생산물을 국가의 목적에 맞추어 내주는 것을 보류하려는 이해관계를 가진 영주들의 협력에, 그리고 국가가 생산한 이익을 쉽게 소비해 버리는 관료 체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각기 다른 혁명─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볼셰비키 혁명─이 베네치아와 모스크바 사람들을 서유럽의 강대한 국민국가들을 닮아 가는 새로운 국가들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계승 국가들도 이전 정체성의 특징을 유지하고 있었다."(280-1)


"중국에 대한 스키너의 설명은 군사력의 구축과 그 조직적 결과들이 자본과 강제의 상대적 무게, 차출과 지배의 '상향식'과 '하향식' 체제, 그리고 도시와 국가의 기능에 따라 유럽의 지역과 지역 사이에 어떤 다양성을 보였는지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쟁과 전쟁 준비에 핵심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러한 공통성 너머에 그들의 지배적 활동들은 자본과 강제와 이전 역사의 네트워크 내 위치에 따라 다양했다. 나아가 유사한 활동이라 해도 언제 어디에서 발생했는가에 따라 다른 조직상의 잔여물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점차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특정 국가의 구조와 활동을 결정했다. 국제전에서 국가의 자원을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장점 때문에, 유럽의 지배적인 정치체로서, 그리고 국가 구성의 모델로서 대규모 국민국가가 조공 수취 국가, 연합, 도시국가, 그리고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대체했다. 이러한 국가들이 마침내 유럽 국가 체제의 특징으로 규정되고,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선봉에 섰다."(281)


6장 유럽의 국가 체제


"990년 무렵, 유럽 지역은 너댓 개의 상대적으로 독특한 국가 집단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동유럽의 정복 정권들이 계속 상대의 지배 영역 내부로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와, 남쪽으로는 비잔틴과, 동쪽으로는 스텝 지역의 무장 세력과 관계를 유지했다. 주로 무슬림이 지중해를 둘러쌌고 이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뒤덮었다. 중부 이탈리아에서 플랑드르에 이르는 상대적 도시 지역에서는 수백 개의 반半자치 세력들이 교황령과 신성로마제국의 관할권 주장 지역과 중첩되었다. 색슨의 영역이 그 지역의 북동쪽 가장자리와 닿아 있었다. 북부 쪽의 다소 분리된 영향력 작용 지역에서는 덴마크 제국이 영국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부분적으로 분리된 이 국가 클러스터들은 곧 보다 강한 상호 연계를 맺는데, 그들은 지중해로부터 북쪽으로의 교역 확대, 스텝 지역에서의 유목민 군대의 끊임없는 출몰, 기독교와 무슬림의 영토 투쟁, 북쪽 해양 전사들의 광범위한 침략을 통해 연계되기 시작했다."(286-7)


"1490년으로 나아가 보면, 500년 전에 유럽인들은 이후 독특해진 두 가지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첫째는 조약, 외교관, 혼사, 그리고 광범위한 의사소통에 의해 연결된 상호 연계 국가 체제고, 둘째는 대규모의 훈련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공식적 평화협정에 의해 종료되는 전면전이었다. 유럽인들은 전쟁 종료 후, 다수의 국가들이 합의한 문서에 의해 대륙 전체에 걸쳐 국경과 주권에 대한 주요 재편성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낡은 전쟁 형식은 해적질과 강도질에, 몽골의 개입의 마지막 국면에, 발칸 지역을 가르며 일어났던 무슬림과 기독교도 사이의 불규칙한 전투에,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유럽인의 탐험 여행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국가 체제를 닮은 어떤 것이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나아가 점차 그 참여자들은 도시국가, 연맹, 또는 제국이 아닌 국민국가─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중앙집권화된─들이었다."(288-9)


"19세기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종전 합의는 국가 체제 참여자들을 계속 입장하게 했고, 그 구성원들에 대한 주요한 재편성이 계속 나타났다. 1830년 프랑스혁명 직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프랑스의 사보이와 니스 병합, 그리고 이탈리아왕국의 창설은 1859년 오스트리아에 맞선 프랑스와 피에몬테의 전쟁에서 야기되었다.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북독일연방(제국의 전신이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직접적 결과물)의 구성은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의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남동부 유럽에서 크림전쟁, 오스트리아-독일 전쟁, 그리고 여러 번의 러시아-오스만 전쟁은 매번 오스만 지배의 해체와 강력한 국제적 영향력에 의한 새로운 국민국가 구성을 촉발시켰다. 그리스,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가 그 실례였다. 더욱이 크림전쟁의 종식(1856년)은 오스만제국을 터키로 재구성했는데, 이는 유럽의 구성 방식을 어느 정도 닮은 새로운 국가였다."(297-8)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은 흔히 유럽 국가 체제를 정상에 하나의 헤게모니 권력이 있거나 두 개의 경쟁 권력이 있는 단순 위계로 취급했다. 헤게모니를 다투는 전쟁에 대한 모든 이론은 국가들이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가정 위에 구축되었다. 사실 어떤 단일한 국가도 그러한 모델에 요구되는 방식의 체제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프랑스의 힘이 정점에 달했던 1812년, 영국과 러시아가 이에 굴복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19세기에 영국이 번창하였던 때,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은 모든 고비마다 영국과 분쟁을 벌였다. 단일한 위계 모델의 결함은 명백하고 치명적이다. 권력의 힘이 즉각 미치는 인접 지역에서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지만 근거지에서 떠날 경우 그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발견한다." "유럽 국가 체제에 대한 더 좋은 개념은 그것을 어떤 국가들은 다른 국가들보다 더 중심에 있고 영향력이 있지만, 체제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위계는 다른, 지리학적으로 분산된 네트워크로 다루는 것이다."(305-6)


"지난 3세기 동안, 강대국들의 협약은 권력에 대한 국가적 분쟁 발생에 대한 제약을 점점 더 협소하게 만들었다. 이는 국제전의 종결 후 합의의 시행, 식민지의 조직화, 군대와 관료와 다른 국가 장치의 요소들을 표준화한 모델의 확산, 국가 체제를 돌볼 임무를 맡은 국제 조직의 창설, 국경에 대한 집합적 보장, 국내 질서 유지를 위한 개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협소화에 의해 국가 구성의 대안적 통로 가능성은 제한되었다. 전 세계에 걸쳐 국가 구성은 어느 정도 계획적인 국민국가─제국도 도시국가도 연방도 아닌─구성으로 통합되었는데, 이 모델은 강대국이 제안하고 보조하고 강요한 바에 따른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1500년에 지구 대지의 대략 7%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갖고 있었고, 이는 1800년 35%, 1914년 84%로 치솟았다. 이러한 자체 확장은 전 세계에 걸친 국민국가의 증식을 촉진하였다. 16세기 자본의 확장과 전쟁의 재조직화 모두 국민국가의 지배력 확대를 더 선호했던 것이다."(319-21)


7장 1992년의 군부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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