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다 -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전쟁 연대기 동아시아와 그 너머 5
개릿 매팅리 지음, 콜린 박.지소철 옮김 / 너머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1장 서막


"60년 전, 구교도 세력과 신교도 세력이 파벌을 형성한 이래로 항상 운명의 장난처럼 두 파벌 중 어느 한쪽, 혹은 두 파벌 모두를 여성이 이끌었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 메리 튜더와 엘리자베스 튜더, 로렌의 메리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맞서왔고, 최근 30년 동안은 오늘(1587년 2월 18일) 처형장에 선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튜더가 대립해왔다." "가톨릭인 메리 스튜어트가 왕위 계승자로서 엘리자베스 사후에 별 마찰 없이 왕위를 이어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안에는 수많은 신봉자들이 조용히 침묵하고 있겠지만, 이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정통파의 후계자인 그녀를 살해한다면 분노한 그들이 봉기해서 이 모든 죄악을 쓸어버릴 것이 확실했다. 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에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여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 이상으로 그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할 왕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단순히 가톨릭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톨릭 신앙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켜야 했다."(34-6)


2장 단순한 시민들


"만약 메리 스튜어트가 즉위하여 영국에서 로마가톨릭을 회복시키려 한다면, 그때 벌어질 내전이 어떤 것인지 런던 시민들에게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100년 동안이나 영국은 튜더 왕조가 끊긴다면 다시 왕권을 두고 경쟁 관계에 있는 파벌 간에 싸움이 일어나, 우리가 '장미전쟁'이라고 부르는, 무정부 상태의 시대가 또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왕좌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결 중 최악이었던 요크 가와 랭커스터 가의 기나긴 싸움은, 종교 문제로 촉발되는 내전의 참혹함에 비하다면 그저 무장 폭동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구의 목사들이 신도들에게 국민들이 적법한 통치자들의 권위를 부정하며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국가는 저주받은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킬 때마다, 신도들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들이 자비로운 군주인 엘리자베스 여왕의 안녕을 위해 고개 숙여 기도할 때 그들의 음성에는 필사적일 정도의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42-3)


3장 여왕의 당혹감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시동생인 프랑스 왕에게 메리의 처형에 대해 자신이 느낀 놀라움과 분노, 슬픔 등에 대해 장황한 편지를 썼으며, 파리에 있는 자국 외교관들을 통해 그 자신의 심정을 프랑스인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했다. 베네치아 주재 영국 대사는 엘리자베스가 단지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뜻으로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 그것을 데이비슨에게 건네준 것인데, 그 신하가 분별없이 권한 밖의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교황에게 전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이비슨을 구금하고 관직을 박탈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성심을 다해 애도를 표할 생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나라의 정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며, 런던에서도 여왕의 측근들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대해 놀라워하며, 진심으로 그 일이 여왕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듯했다." "엘리자베스는 필요할 때마다 놀라운 연기력을 발휘했는데, 만일 그녀의 행동이 연기였다면 그것은 일생 최고의 연기였을 것이다."(61-2)


"그러나 양립할 수 없는 힘의 충돌은 아무리 묘한 마법을 쓰더라도 영원히 유보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에스파냐란 거인이 유럽 전역에서 육중한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충돌은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유럽에서 힘의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폭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양자 대결만이 남은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침묵공 윌리엄(오라녜 공, 빌렘 1세)의 암살로 인해 자기 발밑에 던져진 유럽 신교도 세력의 지도자 명패를 마지못해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유야 어쨌든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몹시 싫어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말려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튜더가 무엇을 염려했든, 그것이 자신의 목숨은 아니었다. 고조되고 있던 메리 처형에 대한 요구를 그녀가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분명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지만, 메리의 처형으로, 이제 남아 있던 문은 영원히 닫혀버렸다."(66, 70)


4장 기쁨의 날들은 가고


"프랑스 주재 에스파냐 대사인 멘도사는 영국 침공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멘도사는 펠리페 왕에게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있는 가톨릭 세력이 충분한 힘을 갖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휘하의 장군들이 태만하며 부패했고, 전투 경험이 없는 영국의 민병대들은 경멸스러울 만큼 나약하다는 점을 확신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백성들로부터 〈신중한 왕〉으로 불렸어도 억울할 게 없던 펠리페 왕의 답답할 정도의 느린 일 처리와 못 말리는 조심성이 그 거사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리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멘도사는 신앙심 수호와 명예 회복, 그리고 에스파냐의 자기방어를 위해서라도 영국이 저지른 이 마지막 잔학 행위에 대한 응징을 결심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펠리페에게 이렇게 썼다. 〈폐하께서 가능한 한 빨리 영국 침공을 서둘러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이 두 왕국의 왕위를 받아들이시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하느님이 뜻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85-6)


5장 영국 침공 계획


"펠리페가 처음 영국 침공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네덜란드 총독 파르마는 성과가 불확실한 일에 손을 댔다가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 군대가 영국에 투입된다면, 프랑스는 과거에도 수차례 시도했듯이 무방비 상태인 남부 지역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한창 북해의 맞은편 땅에서 힘든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점령한 땅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자신의 근거지마저 유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파르마처럼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에게는 악몽이었다." "더구나 브릴이나 플러싱을 손에 넣지 않는 한 파르마에게는 규모가 큰 항해용 선박들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수심이 깊은 항구가 한 곳도 없었다." "파르마는 영국 침공이 성공하려면 먼저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곧 영국 정복이 시작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95-6, 101)


# 플러싱 : 네덜란드 연합군 본거지가 있던 항구도시


6장 쓰디쓴 빵


"교황 비오 5세는 1570년 2월 25일에 엘리자베스를 이단이자 참된 신앙의 박해자로 규정하고 그녀를 파문한다는 내용을 담은 〈천상의 통치〉 칙령을 포고했다. 뿐만 아니라 비오 5세는 지금껏 교황의 권리로 강조되기는 했지만 실행된 적은 드문 권리를 근거로, 엘리자베스에게 〈가짜 왕권〉을 박탈하고 영국인들은 그녀에게 충성할 의무가 없다고 선포했으며, 차후 그녀의 법과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말 것을 명령하며 이를 어길 경우 파문의 고통이 따를 거라 경고했다. 그 칙령은 안 그래도 민감한 문제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낳았다." "그 칙령을 따른다는 것은 신교도들이나 가톨릭교도들 모두 자기 나라의 법 대신 국제적 지배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네덜란드 식민지의 펠리페 정부, 프랑스의 발루아 정부, 영국의 튜더 정부를 비롯해 각국의 정부들이 그런 교황의 권한을 부정했던 것이고,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을 반역자, 반란자로 규정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112)


7장 명백한 하느님의 뜻


"영국의 도발은 이미 펠리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드레이크는 무례하게도 에스파냐의 해안과 서인도제도를 공격했고, 네덜란드에는 레스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영국 내 가톨릭들이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이복 언니인 메리 튜더와 결혼한 이래로 펠리페는 영국 가톨릭들에게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교황은 그에게 행동을 권유했고, 영국인 망명자들은 서둘러달라고 간청했으며, 그의 자문위원 중에서도 주전파가 우세했다 . 자신이 언젠가 글로 썼던 것처럼, 아마도 펠리페는 단지 이처럼 중요한 일에서는 신중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게 더 낫다는 이유로 일의 진행을 늦추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군대가 영국을 정복할 때까지 메리 스튜어트가 살아 있다면, 그녀가 영국의 여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정신은 프랑스인의 것이었고, 펠리페는 부왕에게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이 그의 왕조에 최대의 위협이 된다는 점을 배웠다. 이제 적어도 그런 위험은 사라졌다."(140-2)


8장 〈바람이 나에게 떠날 것을 명령한다〉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의 몇 차례 항해에 자신의 배들을 빌려주고 수익에서 왕실의 지분을 챙겨 갔지만, 그 얘기만 나오면 항상 자신은 드레이크의 계획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다. 엘리자베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에스파냐 측은 드레이크를 해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자신이 에스파냐 왕과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펠리페 왕에게 도전장을 보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드레이크에게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은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으며, 둘 중 하나가 죽거나, 아니면 자신이 병들고 부상당한 부하들과 함께 거의 다 부서진 작은 배 주디스호를 타고서 플리머스 항으로 '기어서' 돌아왔을 때 느꼈던 만큼의 치욕을 에스파냐 왕에게 안겨줄 때까지 그 전쟁을 계속할 작정이었다(젊은 시절 드레이크는 멕시코의 산 후안 데 울루아의 항구에서, 뉴에스파냐 함대의 공격을 받고 무참히 패한 적이 있었다)."(148-9)


9장 턱수염이 그슬리다


"4월 12일, 펠리페는 드레이크가 약 30척의 함대를 이끌고 플리머스를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멘도사는 드레이크의 임무가 에스파냐 함대의 집결을 방해하는 것임이 거의 확실하며, 그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아마도 카디스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그때 카디스 만에서 세계 해전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도 대서양이 지중해에 맞서 승리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2000년 동안 바다를 지배해온 갤리선의 영광이 막을 내린 것이다." "갤리선은 거대한 함포로 무장한 범선에 대항해 싸우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상대편 배에 올라탄다고 해도 제압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카디스에서 자신이 에스파냐 왕의 턱수염을 그슬려놓았다고 드레이크가 말했을 때 영국인들은 단지 허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드레이크도 수염이 다시 자랄 것임을 알고 있었다."(162-3, 168-9, 184)


10장 〈중요하지 않은 일〉


11장 통 널과 그물


"영국 함대는 사그레스 항에서 열흘간 머물면서 고기잡이 배들과 연안화물선을 사냥했다. 화물선이 운반하는 화물의 대부분은 〈쇠 테와 통 널, 또는 그와 비슷한〉 통을 만드는 물건들로, 카디스 항이나 타구스 강의 해협으로 향하는 것들이었다. 드레이크는 이 가치 없어 보이는 노획물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당시의 해군에게 이런 저장용 통은 물과 포도주뿐만 아니라 소금에 절인 고기, 생선, 비스킷과 각종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품이었다. 견고한 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잘 말린 양질의 통 널이 필수적이었다. 이 물건들은 결코 여분이 많지 않았으며, 게다가 에스파냐 함대의 출항 준비로 인해 이미 공급이 달리는 실정이었다. 만일 에스파냐 함대가 마침내 출항하게 되었을 때 물통이 새거나 악취가 난다면, 또는 곰팡이 핀 통 널과 허술하게 만든 통 때문에 많은 음식이 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사그레스를 뒤덮은 연기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202-3)


"6월 18일, 드레이크는 동방 식민지에서 귀환 중이던 에스파냐 무장상선 산 펠리페호를 포착했다. 산 펠리페호의 선장은 명예를 손상하지 않을 만큼만 싸우고 나서 품위 있게 항복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어디든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배 한 척을 얻었고, 드레이크는 엄청난 전리품을 챙겨 플리머스로 향했다." "전체 값어치는 거의 114,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것은 카디스 만에서 나포하거나 침몰시키고 불태운 모든 선박과 화물을 합한 가치의 세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에스파냐에 있는 모든 통 널과 어선을 전부 내다 팔아도 그만한 돈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드레이크의 몫은 17,000파운드 이상이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몫도 40,000파운드가 넘었다." "17,000파운드라는 액수는 평균적인 귀족의 재산과 맞먹는 것이었고, 40,000파운드면 군대를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산 펠리페호의 획득 덕분에 드레이크와 그의 여왕 모두 그 항해의 의미를 상업적인 모험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210)


12장 팔 하나가 잘리다


"플랑드르 서북쪽 구석에 있던 두 도시, 오스텐트와 슬루이스는 모두 전략적 요충지였다. 파르마는 신속하고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오스텐트를 점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슬루이스 역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었다. 슬루이스는 그가 원하는 수심 깊은 항구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브뤼헤와 동플랑드르를 잇는 수로 연결망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곳에 있어서 영국 침략을 위한 병참에 필수적인 요지이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슬루이스를 함락한 파르마는 펠리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제가 네덜란드에 온 이래로 이번 슬루이스의 포위 공격만큼 난관과 걱정이 많았던 작전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국 침략을 생각한다면, 그 목표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파르마도 투르크의 술탄이 떠벌렸던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막 잘라낸 적의 한쪽 팔은 턱수염이 그슬린 것에 대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220, 237)


13장 행복한 날


"슬루이스 함락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이 약화된 상태에서 나바르의 위그노 군대와 지휘관들이 괴멸된다면 그 저항은 거의 회복할 수 없는 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었다. 산발적인 저항이야 여기저기서 계속되겠지만, 프랑스에 있던 프로테스탄트의 중추 세력은 무너질 것이고, 한동안 미래는 기즈-로렌 가문과 가톨릭동맹의 급진적 광신도들, 그리고 이 둘의 재정 후원자인 에스파냐 왕의 차지가 될 것이었다.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네덜란드 반란군에게는 지옥 같은 날이 될 것이고, 아마도 등 떠밀리듯 역할을 맡게 된 프로테스탄트 연맹의 총사령관이자 재정 후원자인 영국의 엘리자베스에게는 훨씬 더 끔찍한 날이 될 것이다. 위그노의 저항 세력이 붕괴되고 부르봉 가의 혈통도 끊기게 된다면, 분명 앙리 3세는 완전히 기즈 공과 가톨릭 동맹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것이고, 더 이상 파르마의 측면에 대한 위협은 없을 것이며, 또한 프랑스 해협의 항구들은 영국 침공을 위한 안전한 발판으로 이용될 것이다."(240-1)


# 1580년 10월 20일, 쿠트라 전투에서 나바르(부르봉 가)의 위그노 군대는 주아외즈가 지휘하는 기즈(로렌 가)의 왕실 군대를 완전히 괴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14장 승리의 활용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그 승리를 활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엘리자베스가 많은 자금을 투입해 고용한) 도나 남작 휘하의 강력한 기사단인 8,000명의 독일 기병대와, 거의 같은 수의 독일 용병 보병부대 란츠크네히트, 거기에 부이용 공작이 모집하고 지휘하는 약 18,000명의 스위스 옹병들까지 합세한 이들 용병부대는, 지난 30년 동안 프랑스로 들어온 외국 군대 중 가장 강력했으며, 게다가 이미 4,000 내지 6,000명의 위그노들이 합세해 전력이 더욱 보강된 상태였다. 만일 나바르가 즉시 그들과 합류해 자신의 군대까지 합쳐 더욱 강력해진 군대를 이끌고 파리 공략에 나선다면 프랑스 왕은 항복하든지 항전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러면 오랜 세월 이어진 지루한 내전을 첫눈이 내리기 전에 승리로 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쉴리 공으로 불리게 되는 막시밀리앵 드 베튄과 같은 신앙심이 투철한 위그노들은 이토록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나바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256)


15장 불길한 해


"1588년이 다가오자 재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끔찍한 소문들이 서유럽 전체에 퍼져 나갔다. 기본적으로 그 운명의 예언은 〈요한계시록〉의 수비학(數秘學)에 기초한 것이며, 〈다니엘서〉 12장의 암시들로 의미가 명료해졌고, 〈이사야서〉에 있는 소름 끼치는 구절로 뒷받침되었다."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퍼진 1588년에 대한 예언들은 나라마다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다르게 해석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펠리페 왕이 미래를 예언하려는 모든 시도를 나태하고 불경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종교재판소에서도 천년왕국설과 점성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 자신이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불길한 예언들의 논의를 최소화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그해 겨울 그녀의 백성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278, 281, 291)


16장 이 장려한 배들과 함께


"영국은 적어도 육상에서만큼은 1587년 가을보다 1588년 4월에 침략 위험에 대해 방어 태세를 더 잘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거의 다 알고 있던 영국인들조차도 전투가 육지에서 벌어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에 걸쳐 영국인들은 바다가 자신들을 방어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이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백년전쟁을 치르면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그러한 인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헨리 8세는 이미 확립된 전통을 기반으로 유럽의 그 어떤 왕들보다도 더 많은 돈을 전투용 선박에 썼다. 칼레를 프랑스에 빼앗긴 것과 점차 심해지는 에스파냐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바다에 의존하는 의식은 훨씬 더 강해졌다. 1588년 무렵, 엘리자베스는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군주로 부상했다. 영국 해군의 핵심 전력은 강력한 갤리언선 18석이었다. 이 배들 중 가장 작은 것조차도 300톤이나 나갔고, 모두 새로운 방식으로 건조되고 무장되어 있었다."(305-6)


"드레이크와 호킨스 등이 불평했던 것, 그리고 이후로도 여러 역사가들이 불만을 품었던 것은, 엘리자베스가 대담하게 그런 훌륭한 함대를 에스파냐 해안에 파견해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을 차단하고 펠리페의 전함들을 항구에서 꼼짝 못하도록 봉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배에 최소한의 인원만을 배치한 채 대기 상태로 계속 항구에 정박시켜두었고, 그럼으로써 영국 해군의 기본 전략 원칙 중 하나가 된 것[선제공격]을 깼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런 결정을 함으로써 선원들은 육지에서 신선한 음식을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 비용의 절반 이상은 자신들이 부담함으로써 춘계 군사작전을 위해 포장하고 비축해둔 식량뿐만 아니라 여왕의 돈도 아낄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함장들이 에스파냐의 무역선들을 약탈하고 에스파냐 왕에게 도전하는 데 쓰고 싶어 했던 힘을, 대신 영국 함대가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쓸 수 있었다."(308-9)


17장 〈기적을 빌면서〉


"에스파냐 해군이 플로렌시아호로 이름을 바꾼 산 프란체스코호에다 인도양 수비대 소속 갤리언선들을 합쳐, 메디나 시도니아는 총 20척의 갤리언선 전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화력 면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용적 톤수로 따지면 엘리자베스가 보유한 가장 훌륭한 배 20척과 거의 맞먹었다." "그러나 아무리 메디나 시도니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최선의 노력을 해도, 개선은 고사하고 더 악화되는 것조차 막을 수 없는 함대의 상황들이 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인력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대로 훈련받은 포병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앞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될 테지만, 거포, 특히 컬버린 포가 부족하다는 문제에 가려져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비록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겠지만, 메디나 시도니아는 조급해하는 펠리페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는 것과, 시간이 조금 더 있다고 해도 남아 있는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30-2)


18장 바리케이드의 날 1


19장 바리케이드의 날 2


"파르마는 파리에서 벌어진 반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축하의 뜻으로 화톳불을 밝히라고 명령했지만, (가톨릭동맹을 이끄는) 기즈가 시민들로부터 스위스 연대와 프랑스 수비대를 구해준 데다가 루브르 습격까지 실패했으며, 설상가상 앙리가 탈출하게 내버려뒀다는 말을 듣자 고개를 저었다. 파르마는 이렇게 말했다. 〈기즈 공은 우리 이탈리아 속담을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칼을 뽑아 군주에게 겨눈 자는 칼집을 멀리 던져버려야 하는 법인데.〉 (반란자들에게 물적, 심적 원조를 제공한) 멘도사도 앙리가 파리를 빠져나간 것에 대해 걱정은 했겠지만, 이제 앙리 3세가 기즈에게 항복을 하든 저항을 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에페르농은 노르망디를 장악할 수 없을 것이고, 파르마가 없는 사이에 프랑스군이 저지대를 농락할 위험도 전혀 없을 것이다. 파르마의 측면은 안전해졌고, 메디나 시도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프랑스의 위협에 관한 한 에스파냐 함대는 아무 걱정 없이 항해를 하게 된 것이다."(370-1)


20장 무적함대 출항하다


"리스본을 떠난 이후로 점점 메디나 시도니아는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해안을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에도 날마나 새로운 결함들이 드러났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음식이었다. 매일 음식이 상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너무도 많은 통이, 음식과 물을 담고 있는 것 모두, 눈속임으로 건조가 안 된 생나무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또한 폭풍으로 함대가 흩어져 버려서 모을 수 있는 힘은 더욱 적어졌으며, 실종된 배들 중 최소한 일부는 폭풍우에 희생되었거나, 프랑스와 영국 해적선의 재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과 평화협정을 맺거나 최소한 1년 정도 출정을 미루는 게 낫지 않을지 숙고해달라고 펠리페에게 간청했다. 펠리페의 답은 신속하고도 단호했다. 총사령관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언급한 결점들을 개선해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항해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펠리페의 명령에는 변함이 없었다."(383-4)


21장 〈시간과 공간의 이점〉


"승리의 절반이 보장된다는 시간과 공간의 이점이 우선은 에스파냐 함대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오고 있었고, 그들의 적은 그 바람 때문에 항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습의 완전함에 대해 과대평가하기 쉽다. 전위함대의 위치, 함장의 항해 기술, 선박의 속력과 바람을 이용하는 능력 등에 힘입어 플레밍이 제때에 보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습이 완전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영국 함대는 여전히 일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은 무장상선들에 보급품을 싣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출정할 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를 에스파냐 해안에서 돌아오게 한 남쪽의 바람이 그들도 데리고 나왔군. 우리가 돌아오게 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었어.〉 하워드의 말을 보면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또한 그와 전쟁위원회가 이런 상황의 전개를 예견하지 못했다면, 해전에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400)


22장 경기장에 입장하다


"1588년 7월 31일 아침, 마침내 조우한 아르마다는 낯선 초승달 모양으로, 영국 함대는 한 줄로, 혹은 앞쪽은 두 줄로, 각기 선택한 대형으로 늘어선 다음 서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날 아침, 아르마다와 영국 함대가 대치하고 있을 때, 양쪽의 총사령관들은 멍한 상태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갈팡질팡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세상에 이런 함대들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런 함대 둘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무기들이 어떤 성능을 발휘할지, 어떤 전술을 구사해야 그 무기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지 아무도 몰랐다. 해전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형을 이루고, 나무로 선체를 만들고, 돛으로 움직이며, 활강포로 무장하는 것이 해전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날이 시작된 것이다. 선체에 철갑을 두르고 시조포로 무장한 채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전함은 단지 이 새로운 날의 저녁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414-5)


# 활강포는 포신 안에 강선이 없는 포이고, 시조포는 강선이 있는 포를 말한다.


23장 첫 번째 유혈


"첫 날의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다소 맥빠지는 경험이었다. 에스파냐 측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에스파냐 함대에서 레칼데의 배만큼 타격을 입은 배는 없었고, 레칼데 배의 피해도 앞돛대에 포탄 두 발을 맞고 돛줄 몇 개가 끊어지고 삭구가 날아가고 서너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국 함대의 장거리 포격이 권투로 치면 성가신 잽 정도였지만, 분명 영국 측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잽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며, 에스파냐 함대가 효과적으로 보복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영국 함대도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강한 적이었던 것이다. 그날 내내 에스파냐 함대가 보여준 조종술과 군기는 나무랄 데 없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작할 때와 같은 투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는 아르마다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목책 성벽처럼, 무서운 요새처럼 보였다."(421-2)


24장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


"영국군은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아르마다 앞에서는 어떤 작전을 써도 먹히지 않는다는 쓰디쓴 교훈을 얻었다. 그들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교전에서도 에스파냐 함선을 많이 침몰시킬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에스파냐 갤리언선을 하나씩 망가뜨리다 보면 대형이 흐트러져 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이 잡은 에스파냐 함선은 로사리오호와 가라앉고 있던 거함 산 살바도르호, 두 척뿐이었다. 물론 영국군은 자기들이 포를 잘 쏜 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둘 다 사고로 손상된 것이었다. 한편 이틀 동안의 교전, 특히 포틀랜드 빌 앞바다의 격전을 치르며 영국 함대는 하워드가 표현한 〈가공할 만한 거포의 위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배에 화약과 포탄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워드는 화약과 포탄이 없어서 더는 싸울 수가 없다는 아주 절실한 편지를 뭍으로 써 보냈다. 하워드의 말과는 달리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에 손상을 입혔다고 볼 수는 없었다."(446)


25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초승달 대형


"16세기형 배의 대포는 조준도 어렵고 제대로 발사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50미터 거리에서는 별 차이 없는 실수가 500미터 거리에서는 목표물을 완전히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래도 두 함대가 영국해협에서 일주일을 보내면서 더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에스파냐 함대였다. 메디나 시도니아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함대가 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파르마와 약속하지 않은 채 북해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인 듯했다. 토요일 오후 늦게 칼레 해역에 다다른 아르마다는 번개같이 돛과 닻을 내렸다. 이것은 치밀하게 실행한 작전이어서, 깜짝 놀란 영국 함대는 바람과 조류 때문에 정박할 곳을 지나쳐 유리한 위치를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영국 함대는 메디나 시도니아의 신호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르마다의 닻줄이 다 풀리기도 전에 영국 함대도 닻을 내렸고, 이제 두 함대는 칼레 해안 절벽 옆에 정박한 채 멀찍이서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459-60)


26장 불벼락 화공선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 함대가 있는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강한 조류가 도버 해협 쪽으로 흐르고 있어서 함선들이 빼곡하게 정박하고 있는 현재의 위치는 화공선 공격을 당하기에 더없이 적합했다는 점을 걱정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에스파냐군 정박지의 감시병들은 돛을 모두 펼친 채 삭구에 불이 타오르는 여덟 척의 커다란 배들이 바람과 조류를 타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종범선 두 척이 그 배들을 해변으로 끌고가기 위해 갈고리 닻을 던지려는 순간, 불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이중 장탄된 대포들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바다 위 여기저기에 마구잡이로 포탄이 떨어졌고 그 반동으로 불꽃들이 분수처럼 솟았다가 배 안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두 종범선이 혼란에 빠져 자리를 피하고 있을  때 나머지 화공선 여섯 척이 한꺼번에 정박해 있는 아르마다를 향해 돌진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 위로 대포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불꽃이 분수처럼 하늘로 치솟았다."(472-5)


27장 대형이 무너지다


"방어막이 화공선들을 놓치는 광경을 본 메디나 시도니아는 포를 발사하며 닻줄을 풀고 돛을 활짝 편 채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이유가 무엇이든 함장들 대부분은 줄을 끊고 바람을 타면서 마치 화공선을 두려워하는 만큼 서로를 두려워하는 듯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다. 물살과 돌풍이 워낙 강하다 보니 어지럽게 모여 있던 배들은 해협을 지나 플레미시 해변의 모래톱까지 휩쓸려 올라갔다. 그 가공할 초승달 대형이 마침내 무너졌던 것이다." "양쪽 모두가 대단한 용기와 과감한 지도력을 갖고 있으면 승리는 최고의 배와 최고의 대포를 가진 쪽에 돌아간다. 영국 배의 우월성은 이미 실전에서 여러 번 증명된 바 있었다. 영국 함선들은 적의 측면을 포위해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었고, 바람을 이용해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사정거리를 선택하고 원하는 때 언제든지 전투를 그만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영국군이 가장 큰 이점은 그때까지도 탄약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476, 484)


28장 때늦은 기적


"메디나 시도니아가 알아낼 수 있는 한, 남은 것은 약간의 화약뿐이었고 포탄은 전혀 혹은 거의 없었다. 아르마다가 처음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일급 선박들은 대부분 물이 샜다. 대부분의 배가 가로횡대와 삭구를 잃었고 갑판에는 파편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것은 바닷물의 흐름과 해저의 경사였는데, 배 앞쪽에서 좌현 뱃머리의 바다 쪽으로 멀리까지 물의 색깔이 달랐다. 현재의 진로대로라면 반시간도 못 되어서 아르마다 전체가 제일란트의 모래톱에 처박힐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배가 좌초할 때 받을 충격에 대비하고 있을 때 마침 바람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었다. 흥분에 겨운 한 목격자는 바람이 완전히 반대로 방향을 바꿔 남동쪽으로 불었다고 증언했다." "아르마다 전체가 먼 곳으로 나와 깊은 바다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메디나 시도니아와 그의 사제 모두 아르마다가 신의 기적 덕분에 살아났다고 확신했다."(489-92)


29장 〈내 그대들의 장군이 되어〉


30장 드레이크 사로잡히다!


"아르마다가 영국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앙리는 점점 더 고분고분해졌다. 마침내 앙리는 협박에 못 이겨 알랑송 칙령에 서명했다. 그 칙령에서 이단자나 이단을 부추기는 자는 절대 프랑스 왕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제정하는 등 가톨릭동맹의 극단적인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앙리의 양보 조치는 대부분 서류상에만 머물러 있었다." "멘도사는 프랑스 왕을 가톨릭동맹과 기즈의 손아귀에 넣고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에스파냐의 속국으로 만들려면 영국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몇 주 동안 메디나 시도니아의 암울한 〈항해일지〉를 읽고 있었다. 그것을 가져온 돈 발타사르 데 수니가가 패배한 아르마다의 상태를 암담하게 보고하기도 했다." "결국 펠리페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멘도사게 보낸 편지의 여백에 이렇게 갈겨썼다. 〈이건[멘도사가 보내오는 낙관적인 급보들]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에게도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512-4, 524)


31장 멀고 먼 귀향길


"메디나 시도니아는 영국해협에 들어선 이래로 갈레아스선 한 척을 비롯해 적어도 일곱 척의 가장 중요한 배들을 잃었다. 나머지 일급 선박들도 대포에 맞아 거의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병사 중 5분의 1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군수품은 거의 바닥이 났다." "비축했던 보급품이 심각한 문제였다. 신선한 음식은 더 이상 없었다. 비스킷은 대부분 곰팡이가 슬거나 썩어가고 있었으며, 소금에 절인 생선과 고기는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심각한 것이 물 부족이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인 음식들은 그다지 인기가 있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두 주 동안 폭풍이 몰아쳤는데 최악의 방향인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걷잡을 수 없는 맞바람이었다." "19일 후, 산 마르틴호는 에스파냐 북부의 항구도시 산탄데르에 닻을 내리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며칠 뒤, 7월에 영국으로 떠났던 배들 가운데 66척이 에스파냐 항구에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추가로 들어온 배는 단 한 척뿐이었다."(525-30)


32장 거인의 최후


"만일 앙리가 원한 것이 오직 안락과 외형적인 존경과 왕권의 껍데기였다면, 기즈의 통치에 굴복하고 왕관을 기즈의 로렌 가문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다음 그 대가로 그것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늙은 부르봉 추기경이 기꺼이 성사시키려고 한 거래였다. 그러나 앙리는 그렇게 많은 친구와 원칙을 배신했어도 왕권이라는 이념은 배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기즈의 근본적인 왕위 찬탈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공개 처형과 같은 방법으로 그를 쳐서 쓰러뜨렸다. 그래서 앙리는 일곱 달 뒤 성 클라우드에서 자크 클레망이라는 자의 단검에 생을 마감했을 때 나바르에게 자신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줄 수 있었다." "멘도사는 기즈의 유용성을 높이 평가했으나 둘 사이가 수월한 동반 관계는 아니었다. 교황 식스토 역시 기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에스파냐 국왕이 선장을 한 명 더 잃은 게로군.〉"(552-4)


33장 신의 바람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그라블린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승리를 바람 탓으로 돌린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가 하워드에게 수여한 훈장에는 〈하느님께서 숨을 내쉬자 그들은 흩어졌다〉는 말이 새겨져 있다. 네덜란드 훈장에도 비슷한 말이 적혀 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음을 라틴어 시로 축하한 시인들은 신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폭풍우로 에스파냐군 수천 명을 익사시켜주셨음을 찬양하느라 바빠서 영국 함대의 공훈에 대해서는 언급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물론 영국 함대는 아르마다가 날씨 문제로 고전하기에 앞서 더 좋은 배와 더 좋은 포(砲)로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적의 멸망을 신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여길수록 신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터였고, 아르마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프로테스탄트 신이 의도한 바가 된다. 결국 다른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아르마다를 궤멸한 엄청난 폭풍도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559)


34장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에필로그


"아르마다의 패배는 한 가지 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라는 거인이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진격하는 것을 보아왔다. 점점 명백해지는 신의 계획과 미래의 물결인 섭리가 에스파냐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에스파냐가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에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지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가톨릭들은 에스파냐가 신의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로 확실히 선택받은 것을 가톨릭으로서 축하했다. 그동안 각지의 프로테스탄트들도 그만큼 겁을 먹고 당황스러워했다. 아르마다가 영국해협의 오랜 지배자들에게 그들의 집 앞에서 도전했을 때, 임박한 분쟁은 누가 천벌을 받을지를 가르는 결투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런 결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신께서 옳은 자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이었다. 이 분쟁의 해에 관한 불길한 예언, 너무나 오래되고 외경스러워 가장 깨어 있고 회의적인 이들조차 무시해버릴 수 없던 예언 때문에 이 결투의 엄숙함은 더욱 커졌다."(572-3)


"(이상한 폭풍의 힘이 가져온 전투 결과에)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칸디나비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언제나 믿어온 것처럼 신이 실제로 자신들의 편임을 안도하며 확인했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가톨릭들도 에스파냐가 결국 신이 선택한 수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똑같은 안도감을 가지고 확인했다. 에스파냐의 우세가 한 세대 이상 더 지속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에스파냐의 전성기는 지나가 버렸다. 특히 프랑스는 블루아에서 앙리가 기즈를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오스트리아 가계(합스부르크)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로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유럽의 자치권이 합스부르크 가에게 위협받는 동안 그 자치권을 지키는 최고 보증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길고도 어정쩡한 에스파냐와 영국의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마다의 패배는 정말로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일체성을 중세 기독교 세계의 계승자들에게 강제로 다시 부과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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