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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의 탄생 -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사의 탐색, 1494-1763
김준석 지음 / 북코리아 / 2018년 4월
평점 :
1 들어가며
# 16세기 이후 유럽예외주의(제국이 아닌 다국체제)가 등장하게 된 요인들
1. 다수의 비옥한 분지 사이에 강과 숲, 산맥, 복잡한 해안선 등이 위치한 지형적 특성
2.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거주하는 유목민족의 압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서유럽
3. 카롤링거 제국이 해체된 이래 귀족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강력한 사회세력을 형성
"1500년 전후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는 이후 적어도 약 3세기 동안은 오직 유럽에만 국한된 현상이었다. 이 기간에 유럽을 제외한 유라시아의 대부분 지역은 거대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의 명·청제국, 인도의 무굴제국, 이란을 중심으로 한 서남아시아의 사파비제국, 터키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동부의 오스만제국이 그들이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16~18세기는 '제국의 시대'였으며,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현상이었다." "19세기 이후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전 세계의 국제정치체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국제정치체제가 유럽의 비유럽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발흥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중 국제정치체제와 경제적 발흥 사이의 관련성에 대한 주장은 설득력이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지정학적 경쟁의 결과 군사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는 유럽의 세계진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는 견해는 타당성이 높다."(25-6)
# 근세 초(1500-1800년경) 국제정치에 남아 있던 전근대적 요소들
1.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가를 자신의 가산으로 간주하는) 군주를 비롯한 소수의 정책결정권자들의 지대한 영향력
2. 대다수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형태였는데, 영토 간에 동일한 군주가 다스린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유대관계도 없는 상황
3.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 우위('보편왕국'의 건설)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면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
"그럼에도 근세 초 유럽 각국의 대외정책에 공통적인 목표 또는 행동의 준칙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보편왕국의 수립이 아니라 세력균형의 보존이었다. 세력균형은 루이 14세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상대로 수차례 전쟁을 벌인 17세기 후반부터 국제정치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 1714년의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세력균형은 평화를 위해 모든 국가가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여러 번 언급되었다. 비록 본격적으로 언급되거나 이론화되지는 않았지만, 17세기 중반 이전에도 국가들은 암묵적으로 세력균형의 원리에 따라 행동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유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정당한 군주에 대한 저항을 탐탁지 않게 여겼음에도 펠리페 2세에 반기를 든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했는지, 또 어떤 이유에서 30년전쟁 당시 리슐리외의 프랑스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36)
2 16세기 근대 국제정치체제의 기원과 전개
"백년전쟁(1337~1453)을 거치면서 정부의 전반적인 '군사-행정역량'이 크게 강화되었다. 이는 백년전쟁이 기간과 규모 면에서 그 이전의 전쟁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한편에서는 두 왕국의 완전한 통합을 목표로, 다른 한편에서는 영국을 다시 섬나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치열하게 그리고 전례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싸움을 이어나가다. 그 결과 전쟁 기간 동안 군사기술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기병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궁수와 보병의 중요성이 증가했다. 14세기 말부터는 화포가 전투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백년전쟁을 계기로 병력을 동원하고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먼저 과거와 같이 영주에 대한 봉건적 의무에서 전쟁에 참여하는 기사들만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해져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자원병을 모집해야 했다. 자원병이 병력동원의 중심적인 부분이 된 것은 백년전쟁이 처음이었다."(48-9)
"전쟁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점점 늘어나는 전쟁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세금이 상설화되었다는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조세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이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결과 프랑스는 왕권의 약화와 분열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445년 샤를 7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유럽 최초의 상비군으로 알려진 부대의 창설을 골자로 하는 군사개혁을 감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정부가 이전보다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조세수입 증가는 이웃한 영국, 카스티야 등과 비교해서도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특히 프랑스보다 빠른 시기에 중앙집권화에 성공한 영국이 백년전쟁 이후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전시에 이룬 재정상의 혁신을 이어나가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프랑스의 성취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49-52)
"1494년을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출발점으로 잡는 이유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은 '근대국가'로서의 프랑스가 벌인 첫 번째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둘째, 비록 '전근대적' 혹은 '중세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으킨 전쟁은 적어도 그 외관에서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근대국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 "셋째, 이탈리아전쟁은 1516~19년을 전후하여 모습을 드러낸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과 프랑스의 세력다툼으로 확대되었다.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고, 두 나라 사이의 대결은 곧 이탈리아를 넘어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지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대립은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의 중심축이었다. 두 나라의 세력다툼은 1750년대 두 나라가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체결한 이른바 '외교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55-6)
"카를 5세를 수장으로 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은 유럽 근대국제정치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519년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의 관심은 합스부르크제국이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는 데 집중되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출현에 필연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카를 5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 걸친 광대한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그 모든 영토를 상속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상속도 의도한 것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었다." "'연합왕국'이었던 합스부르크제국의 스페인과 네덜란드, 밀라노와 나폴리 등은 모두 통치자가 카를 5세라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국가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아니라 통치자 개인의 지배여서 각 영토의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통치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통치자는 각 영토에 동일한 자치권을 일률적으로 부여하는 대신 정치적 실력자들과 신분제의회와의 개별 협상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했다."(61-3)
"카토-캉브레지 조약 체결과 함께 마침내 이탈리아전쟁이 막을 내렸다. 1559년에 전쟁이 끝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양측의 재정이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갈되었다." "둘째, 프랑스에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고 불과 두어 달 후에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불안정이 커지면서 프랑스의 대외적인 활동 능력이 제약되었다. 셋째,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발발했다. 종교전쟁은 부분적으로 군주의 때 이른 죽음으로 초래된 왕권 약화로 촉발되었다. 프랑스는 부르봉가의 앙리 4세(r.1589~1610)가 왕위에 올라 정치적인 안정을 다시 가져올 때까지 국내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은 1559년을 기점으로 중단되었고, 1635년까지 두 나라는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두 나라는 전면전을 감행하지 않았을 뿐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서로를 견제했다."(69-70)
"카를 5세의 대외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유지와 보존이었다. 펠리페 2세 역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여러 영토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대외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는 데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에 비해 객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1556년 이후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 스페인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영토를 포함했다. 또한 16세기 전반 합스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프랑스가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일단 영토의 숫자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모두 이베리아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지 않아서 마드리드의 펠리페 2세가 이 두 지역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상당했다. 특히 카스티야에서 거친 대서양을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네덜란드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가 더욱 어려웠다."(82-3)
"네덜란드와 함께 스페인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는 데 펠리페 2세가 직면한 또 하나의 장애물은 엘리자베스 1세가 다스린 영국이었다. 영국은 종교전쟁으로 약화된 프랑스를 대신하여 네덜란드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사략선을 동원하여 스페인 선박을 공격하고 나포하는 등 스페인을 견제하는 데 앞장섰다. 1580년 펠리페 2세가 왕가의 대가 끊긴 포르투갈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막대한 크기의 해외영토가 스페인의 해외영토에 합쳐지자 영국의 스페인에 대한 공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88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여 영국 원정을 감행했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재위 기간 내내 연합왕국을 유지·보존하려는 펠리페 2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았거나 정당하게 획득한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84-5)
"한편, 1595년 앙리 4세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여전히 자신을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스페인의 간섭을 물리치고 외부 적과의 싸움으로 국내 분열을 일시적으로나마 봉합하고자 하는 동기가 전쟁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내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므로 프랑스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연방, 영국과 전쟁 중이던 스페인에 세 번째 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연방과 영국, 프랑스가 동맹을 체결했다. 1596년 5월 세 나라는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여 셋 중 어느 한 나라도 다른 두 나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데 합의했다." "이제 펠리페 2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전쟁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아들이 (내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세 나라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맞춰졌다."(105)
"이와 같이 불리한 여건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음에도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준수한 전과를 올렸다. 재정적으로 적절하게 뒷받침된다면 스페인군의 전력은 여전히 유럽 최강이었다." "이에 앙리 4세는 기나긴 전쟁을 끝내고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영국, 네덜란드연방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펠리페 2세에게 평화조약 체결을 제의했다. 그의 재위 기간을 통틀어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채무에 대한 지급정지를 선언한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1598년 5월 베르뱅 조약으로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은 칼레를 프랑스에 되돌려주었다. 다수의 프랑스인은 조약체결을 사실상의 승리로 간주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대다수 프랑스인이 이를 프랑스의 패배로 여겼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이후 40여 년 동안 스페인의 막강한 힘이 유럽인에게 얼마나 많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105-6)
"유럽에서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의 탄생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등장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규모를 갖춘 제국의 등장은 주변 국가들에 큰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럽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외전략은 기본적으로 수세적·방어적이었다. 하지만 폴 케네디가 지적했듯이 제국의 전례 없는 규모로 인해 그러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전략도 주변 국가들에는 위협적인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합스부르크제국을 견제할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국토가 합스부르크제국에 속한 영토에 둘러싸인 프랑스는 이 '포위망'을 깨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반추하고 개념화하고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가운데 유럽 국가들은 근대적인 국제정치의 기본 문법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114)
3 30년전쟁과 17세기 중반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위기
"1555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에는 심각한 분쟁의 소지가 될 만한 몇몇 요소가 포함되었다. 우선 평화협정은 프로테스탄티즘 중 루터파의 권리만 인정했으며, 칼뱅교를 비롯한 다른 프로테스탄트 분파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비루터파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적지 않게 심각한 문제였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평화협정에서 교회제후국의 통치자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면 그 통치자는 제후로서의 지위를 포기해야 한다('교회제후국에 관한 유보조항')는 규정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협정 체결 이후에도 유보조항을 협정의 일부로 볼 수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반면 가톨릭 제후들은 교회제후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귀족과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협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의 위반이라고 맞섰다. 평화협정의 이와 같은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은 이후 30년전쟁의 발발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138)
"보헤미아는 15세기 초에 얀 후스가 주도한 종교개혁운동의 유산을 간직한 곳이었다. 1618년에 발발한 보헤미아 반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반란을 연상시켰다. 양자 모두 합스부르크 연합왕국에 대한 저항이었고, 중앙정부의 강압적인 종교정책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종교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가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 중앙정부와 반란세력 사이의 싸움에 제3자가 개입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프라하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남짓 지난 1619년 7월 보헤미아 반란 주도세력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슐레지엔, 상·하부 라우지츠의 다섯 개 지역으로 구성되는 '보헤미아 연합'의 수립을 결의함으로써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같은 해 8월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했고, 칼뱅교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내전'이 독일의 '내전'으로 확대되었다."(149-50)
"신앙심과 정치적 야심을 동시에 지닌 프리드리히 5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보호와 증진이라는 명분 아래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정치적 입지의 확대와 강화를 모색해온 인물이었다. 프리드리히 5세의 왕위 수락은 1619년 당시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결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일단 독일을 포함하여 유럽 전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성과를 거두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가 주도한 가톨릭화 작업이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쾰른 분쟁, 도나우뵈르트 사건, 율리히-클레베 계승전쟁 등에서 나타난 합스부르크 황제와 가톨릭 제후국의 공세적인 정책은 신성로마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프리드리히의 얼핏 무모해 보이는 보헤미아 왕위 수락 결정은 합스부르크가 주도하는 반종교개혁의 예봉을 꺾고 프로테스탄트 제후국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선제적인 조치로 이해될 수 있다."(150-1)
"1620년 빌라 호라 전투에서의 승리로 보헤미아 반란을 종식시키는 데 성공한 페르디난트 2세는 1629년 3월 '복원칙령(Restitutionsedikt)'을 발표하여 1552년 이후에 세속화된 모든 교회영토의 재(再)가톨릭화를 명령했다." "일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과격한 내용의 칙령이 발표되자 모든 종교적인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 칼뱅교 제후들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오랜 기간 페르디난트 2세를 지지해온 작센을 비롯한 루터파 제후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상당수 가톨릭 제후들 역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칙령이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위기를 부채질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합스부르크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가 제국 내에서 오랜 기간 지켜져온 '정치적 금도'를 넘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는 스페인도 우려를 표명했다. '복원칙령'은 페르디난트 2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157-8)
"1630년 7월 36세의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독일 북부 포메른에 상륙했다. 스웨덴의 개입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던 합스부르크와 가톨릭 세력의 우위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반면에 1630년 이전까지 유럽 국제정치체제에서 주변적인 위치만을 점했던 스웨덴은 30년전쟁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단숨에 주요 강대국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스웨덴은 이때 획득한 강대국이 지위를 '대북방전쟁'이 종료된 1721년까지 유지했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30년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합스부르크-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스웨덴의 안전을 지키는 데 있었다. 물론 이들로부터의 위협이 임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독일 전역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스웨덴의 안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특히 우려되는 부분은 황제가 같은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와 손잡고 스웨덴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가능성이었다."(168, 172)
"스웨덴이 무려 18년 동안 중단 없이 독일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군사기술과 행정역량 때문이었지만, 프랑스가 개입 초기부터 스웨덴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631년 1월 베르발데 협정에서 프랑스는 스웨덴에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독일에서 합스부르크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는 수년간 스웨덴의 전쟁 개입을 부추겼다. 프랑스가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위그노와의 오랜 싸움이 1628년 10월에야 라로셀 함락으로 마무리되었고, 이후에는 이탈리아의 만토바 계승전쟁에 개입하여 스페인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벌어야 했으며, 국내적으로는 '데보(devots)'라 불린 정치그룹이 같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데 반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슐리외는 폴란드와 스웨덴 양국 간의 정전협정 체결을 중재했고, 구스타프 아돌프가 참전한 후에는 재정 지원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177)
"스페인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는 사이 프랑스는 스웨덴과 헤세-카셀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제후국들과 동맹을 맺고 1637년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페르디난트 3세(r.1637~57)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뇌르틀링겐 전투(1634)의 패배로 독일 북부로 물러나 있던 스웨덴군은 본국에서의 병력 증원과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다시 독일 중심지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스웨덴군은 황제의 군대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국의 군대에 맞서 연전연승함으로써 완벽하게 부활했다. 30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제와 제후국의 군대는 스웨덴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1643년 7월 베스트팔렌의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전쟁을 매듭짓기 위한 평화회담이 시작된 후에도 여전히 양측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양측 간의 싸움은 평화조약이 체결된 해인 1648년까지도 계속되다가 그해 10월 각국 대표들이 조약문에 최종적으로 서명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190-2)
"몇몇 역사가는 30년전쟁의 시작단계에서부터 국제전으로의 성격이 중요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30년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오랜 기간 지속된 스페인과 프랑스의 갈등과 대립이었다. 보헤미아 반란에서 비롯된 황제와 독일 제후들 사이의 전쟁은 강대국 사이의 〈오랜 갈등과 경쟁관계에 얹혔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전쟁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벌어진 종교적·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한다. 30년전쟁은 1635년 혹은 적어도 스웨덴이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1630년 이전까지 독일의 전쟁,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었다. 1630년 이전에 전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제국 내에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관계와 황제-제후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30년전쟁이 전적으로 강대국 국제정치의 문제였다고 결론짓기보다는 1630~35년을 계기로 독일의 전쟁에서 국제전쟁으로 성격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193-4)
"17세기 중반은 오랜 기간 유럽 국제정치사에서 근대적 국제체제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로 여겨져왔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의 한가운데에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의 중요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베스트팔렌 조약의 역사적 의미와 의의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주권원칙이 최초로 확립되었다는 믿음의 타당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인식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조약에 관한 역사적 해석의 정확성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존 견해에서는 평화조약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이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베스트팔렌에서 주권원칙이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역사가들과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에 대해 두 가지 이유에서 의문을 제기한다."(206-8)
"먼저 기존 견해에서는 뮌스터 조약 제65조에서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실이 강조되었다.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리야말로 주권이 징표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제후국들은 1648년 훨씬 이전부터 타 국가들과 조약과 동맹을 체결할 권한을 사실상 인정받아 행사해왔다." "독일 제후국들이 주권을 획득했다고 보기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상위의 정치적·법적 조직이 해체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약을 협상하고 체결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독일 제후들의 기본 입장은 자신들의 오래된 특권이 유지·보존되어야 하며, 30년전쟁 기간 동안 이를 빈번하게 침해한 황제의 권력 행사에 분명한 한계가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이들이 황제의 권력과 제국의 제도들을 무력화하고 스스로 주권국가가 되고자 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208)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국제정치체제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경험했다. 우선, 신·구교 간 공존 문제가 해결되면서 종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아울러 연합왕국에 내재한 불안정 요인이 17세기 중반 이후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연합왕국의 결함은 17세기 중반 이전 주요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30년전쟁이 연합왕국의 '내부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 종교전쟁과 1640년대의 카탈루냐 반란도 전자는 스페인과 영국이, 후자는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부분적으로 국제화되었다. 이에 반해 베스트팔렌 이후의 전쟁들은 거의 전적으로 '국제전'이이었다. 이는 17세기 중반 이후 유럽 국가들이 연합왕국의 결함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연합왕국 내의 어떤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문제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촉발하거나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타 국가에 의해 이용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211-3)
4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의 부상과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변화
"1659년 8월 중순부터 11월 7일까지 24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피레네 조약의 체결로 프랑스는 1635년 이후 24년간 중단 없이 계속된 전쟁을, 스페인은 30년전쟁이 발발하고 네덜란드와의 정전협정이 종료된 1618~21년 이후 무려 40여 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마무리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559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카토-캉브레지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역시 수십 년간 지속된 전쟁을 마무리한 바 있다." "다만 국제정치적인 위상에서 1559년과 1659년 두 나라는 상반된 길을 걸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한 이후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전성기를 구가한 반면, 조약체결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된 마상시합에서 앙리 2세가 낙마하여 죽음을 맞이한 이후 프랑스는 피비린내 나는 종교내전의 늪에 빠졌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레네 조약 이후 프랑스는 젊고 유능한 루이 14세 치하에서 유럽 국제정치를 주도한 반면, 스페인의 지위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236-7)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스페인의 위상은 눈에 띄게 저하되기 시작했다.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이 마무리되자 스페인은 모든 힘을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쏟아부었다. 하지만 1665년 펠리페 4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계속된 포르투갈에 대한 대공세는 완벽한 실패로 끝났다. 1665년 빌라비치오사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은밀한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군은 스페인군에 대승을 거뒀다. 1668년 스페인은 결국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매듭지었음에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독립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당대인들은 왕국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다. 1667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상속전쟁'을 일으켜 스페인령 남부 네덜란드를 공격했지만, 스페인은 변변하게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엑스라샤펠에서 개최된 평화회담에서 스페인 대표단은 프랑스 왕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프랑스와 남부 네덜란드 사이의 국경선을 별다른 이의없이 받아들여야 했다."(238-9)
"1658년에 결성된 라인 동맹은 서부 독일에서 일종의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제후국들은 동맹을 통해 서부 독일이 프랑스-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프랑스는 독일에서 무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신 제후국들로부터 스페인이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이 지역을 거쳐 남부 네덜란드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라인 동맹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존속했고, 이로써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지역에서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를 둘러싼 대외환경이 안정적이었음에도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한 후 그를 대신할 인물을 찾는 대신 국정을 직접 장악한 루이 14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가 더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었다. 1661년 이후 무려 54년간 프랑스의 거의 모든 주요 대외정책을 직접 결정한 루이 14세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240-1)
# 루이 14세가 치른 전쟁들
1. 상속전쟁(1667~68) : 펠리페 4세가 사망한 후, 자신의 왕비이자 펠리페 4세의 장녀인 마리-테레즈의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면서 벌인 전쟁. 네덜란드연방, 영국, 스웨덴이 3국 동맹을 체결하여 양국 간 합의를 종용하였고, 그 결과 엑스라사펠 조약이 체결됐다.
2. 네덜란드전쟁(1672~78) : 프랑스 안보의 위협요소였던 남부네덜란드를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 전쟁 초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에 도취된 루이 14세가 네덜란드연방의 협상 제안을 거부하자,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개입했다. 그 결과 네이메헨 조약이 체결됐다.
3. 재결합전쟁(1683~84) : 독일과의 국경선을 '합리화'한다는 명분 아래, 프랑스 동부 국경지대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과 스페인, 스웨덴에 속했던(속한다고 여겨졌던) 영토들을 합병한 전쟁. 1681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들이 '제국군' 창설에 합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4. 9년전쟁(1689~97) : 퀼른 선제후국의 후임자 선출을 둘러싸고 프랑스가 '재결합전쟁'에서 획득한 영토의 안전을 빌미로 일으킨 전쟁. 동맹국(영국·스페인·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독일 제후국들)이 참전하면서 '소모전'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레이스베이크 조약이 체결됐다.
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 :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자신의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에게 넘기자 프랑스·스페인의 통합 가능성을 우려하던 동맹국(영국·네덜란드연방·오스트리아)이 프랑스에 맞서 벌인 전쟁.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됐다.
"1712년 1월 29일부터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약 15개월 동안 진행된 평화회담 기간 내내 영국이 주도권을 행사했다. 적국인 프랑스와 스페인뿐만 아니라 같은 동맹에 속한 네덜란드연방과 오스트리아도 영국의 평화안을 사실상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볼링브룩이 큰 틀을 마련한 영국 평화안의 대원칙은 프랑스가 유럽에서 다시는 패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세력균형의 원칙에 따라 스페인의 왕위계승과 영토분배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볼링브룩은 영국의 특수한 이익, 곧 네덜란드연방의 방어태세를 약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자국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성과였지만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네덜란드연방에 주어진 보상은 너무나 미약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네덜란드연방이 근세 초 유럽 국제정치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마지막 전쟁이었다."(301-2)
"위트레흐트에서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영국은 유럽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적어도 7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해와 지중해,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영국의 제해권이 굳건히 유지되었다. 비록 하노버가의 조지 1세가 영국 왕위에 오른 후 정권을 탈환한 휘그당에 의해 탄핵되어 런던탑에 갇히거나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했지만, 옥스퍼드와 볼링브룩을 비롯한 토리당의 꿈이 실현되었다. 지중해의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획득으로 영국은 자국 상인들의 레반트 무역을 지원할 천혜의 해군기지를 확보했고, 뉴펀들랜드 획득으로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에서는 네덜란드연방을 배제하고 수익성 좋은 사업들을 독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 왕위의 프로테스탄트 계승 원칙을 인정하고, 제임스 2세의 아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할 것도 약속했다. 이 합의에 따라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로렌 공국으로 망명지를 옮겨야 했다."(302)
"1714년 3월 라슈타트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와 란다우를 보유하는 대신 프랑스가 점령한 영토 중 라인강 우안에 위치한 브라이자흐, 켈, 프라이부르크 등 모든 도시와 요새를 반환할 것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또한 이탈리아에서 과거 스페인에 속했던 거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밀라노와 만토바, 미란돌라, 파르마, 피아첸차 등 주변의 작은 공국, 나폴리, 사르데냐가 모두 오스트리아의 소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남부 네덜란드 역시 오스트리아 수중에 들어갔다. 스페인 왕위와 모든 영토의 계승이라는 원래의 목표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으므로 평화조약체결에 대한 불만이 가장 컸던─카를 6세는 1725년까지도 자신을 스페인 국왕으로 칭했다─오스트리아는 역설적이게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참전국 중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과 더불어 전쟁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304-5)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발단은 프랑스의 부르봉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왕위를 계승하든 어느 한편의 왕위계승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스페인을 차지하는 국가로 급격히 기울어질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최종적으로 전쟁을 결심하게 한 것은 왕위계승으로 초래될 국가들 사이의 힘의 배분 변화였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왕위계승으로 인한 세력균형의 붕괴를 막기 위한 '세력균형 전쟁', '예방전쟁'이었다."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이들이 남긴 글에서 드러난 한 가지 중요한 인식상의 변화는 유럽 국제정치체제가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서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과 구분되는 '공적 이익'을 갖는다는 관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가장 중요한 '공적 이익'은 '안정'과 '평온'으로 규정되었다. 개별 국가의 '사적 이익'은 이러한 체제의 '공적 이익'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정당하게 허용될 수 있었다."(308-9)
5 18세기 유럽 국제정치체제의 전개
# 힌슬리와 도일의 이론과 그 한계점
1. 1715년 이후 그 어떤 유럽 국가도 단독으로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는, '고전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는 근대적인 국제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합스부르크와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종종 '전근대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개념화·이론화의 수준이 떨어졌지만), 이들은 이미 세력균형을 대외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2. 18세기 유럽 국제관계는 외재 변수들이 통제될 때 세력균형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주는 '실험실' 같은 환경을 제공했다. → 18세기 이후 국가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국가이성 이념이 판단기준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군주의 명예와 이익을 우선시하거나, 정책결정자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변심 같은 외재적 변수는 여전히 존재했다.
"위트레흐트 이후의 유럽 국제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프랑스가 더 이상 여타 국가들을 위압하거나 이들에 대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데 있다."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스웨덴과 폴란드, 러시아 사이에 '대(大)북방전쟁(Great Northern War)'이 계속되었지만, 적어도 서유럽은 실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1740년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 비견될 만한 규모의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물론 크고 작은 전쟁과 무력분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거의 25년간 쉼 없이 이어진 전쟁의 후유증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면서 갈등의 중심축이 사라짐에 따라 군사적 충돌의 강도가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 대신 각 국가는 파트너를 바꾸어가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동맹을 체결했다. '주적(主敵)'이 사라진 시대에 유럽 국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협력할 상대와 적대할 상대를 택했다."(324-5)
"1716년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 체결에 합의했다. 영국이 먼저 동맹체결을 제안했고, 오를레앙의 섭정체제가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했던 프랑스는 잠시 고민한 끝에 이를 수락했다.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20년 이상 치열하게 대립한 두 나라가 동맹을 체결한 것은 내정 불안의 위험에 처해 있던 오를레앙과 조지 1세가 안정적인 대외환경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동맹을 체결하는 대가로 프랑스는 영국에 하노버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반란을 주도한 '제임스 3세'를 〈알프스 너머〉 이탈리아 교황령으로 추방할 것을 약속했다. 영국은 스페인의 펠리페 5세가 서약을 깨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 오를레앙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1717년 네덜란드연방의 가입으로 삼국동맹으로 재편된 이 동맹은 이후 1731년까지 양국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위트레흐트 체제에 가장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였다."(327-8)
# 1715년 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를 대신하여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가 1723년까지 섭정 역할을 맡게 되자, 왕위계승 서열에서 앞서는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했음에도 오를레앙 공작의 정통성을 공공연히 문제 삼았다.
# 1714년 앤 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계승법'에 따라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독일인의 왕위계승은 정통성 문제를 야기했고, 자코바이트주의자들의 반란을 불러왔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1731년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제2차 빈 조약 체결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영국이 오스트리아와의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고, 프랑스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내에서는 프랑스나 스페인이 아닌 오스트리아가 영국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맹 파트너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의 화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너무나 심각하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모두 육군을 주력으로 하는 대륙 국가였고,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가 1680년대 이후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 중·동부 유럽에서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획득하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도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밀라노, 나폴리 등을 획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부상하자 프랑스는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2)
"프리드리히 2세는 왕위에 즉위하기 훨씬 전부터 새로운 영토획득이 프로이센 통치자로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1731년 19세의 프리드리히는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당시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영토는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 사이에 위치한 서프로이센과 스웨덴령 포메른이었다. 1740년 슐레지엔이 새로운 목표물이 된 것은 카를 6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은 그동안 주저하고 망설이던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특히 당시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 분쟁이 발단이 되어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페인을 지원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자국의 위상을 강화할 것인지, 아니면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망으로 활짝 열린 기회의 창문을 적극 활용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던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침공을 계기로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351-3)
"프리드리히 2세의 슐레지엔 침공으로 대륙에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무렵 영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의 원인은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무역 분쟁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국령 자메이카와 프랑스 소유의 몇몇 섬을 제외하면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의 주요 섬들과 플로리다, 멕시코, 온두라스, 파나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연안 지역을 식민지로 보유한 스페인 정부와 경제적으로 큰 이윤이 보장되는 이 지역과의 무역을 늘려나가기를 원하는 영국 무역업자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 원인이 되어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 국민들은 영국이 손쉬운 승리를 거둘 것으로 믿었지만, 예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했다." "유럽대륙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 사이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영국-스페인 전쟁은 차츰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일부로 흡수되었다."(353, 356)
"이제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제공할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1742년 7월 28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주선으로 베를린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베를린 조약의 체결과 함께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첫 번째 국면이 막을 내렸다. 의심의 여지없이 승자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는 애초에 세웠던 목표를 훨씬 초과하여 슐레지엔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슐레지엔 합병으로 프로이센의 인구는 220만 명에서 32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오스트리아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프랑스, 스페인, 바이에른, 작센의 공세에 사실상 홀로 맞서야 하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영토 중 슐레지엔과 보헤미아의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을 계기로 프로이센이 독일을 넘어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면, 오스트리아 역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확인받을 수 있었다."(365)
"대륙의 상황에 한층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의 주선으로 1943년 9월, 오스트리아와 사르데냐 사이에 보름스 조약이 체결됐다.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시칠리아를 최종적으로 차지하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보름스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였다. 오스트리아로부터 할양받기로 한 영토의 전략적 가치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가 약속을 지킨다면 사르데냐는 밀라노와의 사이에 마조레 호와 티치노 강, 포 강이라는 '자연국경'을 가지게 될 터였다. 카터릿은 〈이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사르데냐 국왕은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약 120년 후 현실이 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이처럼 높은 가치를 지닌 영토할양을 약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르데냐와의 동맹을 원하는 프랑스-스페인과 영국-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몸값'을 올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368)
"보름스 조약의 체결은 루이 15세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르데냐와 동맹을 맺은 결과 병력 운용에 여유가 생긴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다시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슐레지엔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베를린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에 다시 개입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745년 12월 15일에 체결된 드레스덴 조약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침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녀로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1745년 1월에 사망한 카를 6세의 뒤를 이어 황제로 선출된 남편 프란츠 1세의 권위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드레스덴 조약으로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이 막을 내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중립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클라인슈넬렌도르프와 베를린에 이어 드레스덴에서 세 번째로 프랑스와의 동맹를 일방적으로 포기했다."(369-71)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한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참전국들이 1748년 10월 18일 엑스라샤펠에서 조약안에 서명함으로써 8년여에 걸쳐 지속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기본원칙은 '전전(戰前)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남부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반환했고, 영국은 1745년 6월에 빼앗은 북아메리카의 루이스부르 요새를 반환했다. 오늘날의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브레턴 섬에 위치한 루이스부르 요새는 프랑스령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영국은 1738년 영국-스페인 전쟁 발발 이전에 누리던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서의 무역특권을 다시 인정받았다." "베를린과 보름스, 드레스덴에서 영국의 압력으로 상당한 양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던 오스트리아는 엑스라샤펠에서 다시 한번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데 대해 크게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를 재고하기 시작했다."(379-81)
"169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영국과 대등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오히려 전함 숫자에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에 앞섰다. 영국 해군이 9년전쟁 중에 벌어진 1692년 바르플뢰르 해전과 라오그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동맹국인 네덜란드연방 해군과 연합작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9년전쟁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의 해군력은 프랑스에 크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영국은 꾸준히 전함을 건조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에 반해 프랑스는 지상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재정적으로 벅찬 상황에서 많은 재원을 필요로 하는 해군력 증강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가졌다. 프랑스 정부는 값비싼 전함을 건조하고 함대를 운용하는 대신 사략선을 활용하여 적국의 민간선박을 공격함으로써 상업 및 무역 활동을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제해권 장악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411-2)
"결국 1758년을 전후하여 완전한 저력을 갖추게 된 영국 해군은 프랑스에서 북아메리카 식민지로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프랑스 선박과 이를 호위하는 전함의 항해를 막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영국 선박은 프랑스 해군과 사략선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고 인원과 물자를 안전하게 북아메리카로 운반했다. 1758년을 기점으로 북아메리카의 전황이 영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황이 역전된 두 번째 이유는 영국이 프랑스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한 북아메리카 현지의 인적 자원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7년전쟁이 발발할 즈음 북아메리카의 프랑스계 주민의 수는 5만여 명에 불과했던 데 비해 영국계 주민은 110만여 명에 달했던 것이다." "피트가 현지 주민에게 영국의 영국의 전쟁 노력에 인적·물적으로 기여하면 전쟁이 끝난 후 본국 정부가 그 비용을 모두 변제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415)
"1759년은 영국에 '기적의 해'였다. 북아메리카에서 퀘벡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지역의 바다와 육지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도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 해군은 서인도제도의 과들루프를 점령하여 이 섬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와 커피 등을 본국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이베리아반도 인근의 라고스 만과 프랑스 서부 해안의 퀴베롱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독일에서 활동 중이던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정찰군이 민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했다. 이는 피트 내각이 전례 없이 많은 수의 병력을 대륙에 파병한 덕분이었다. 무려 10만 명의 영국군이 본국의 지원을 받는 5만 명의 독일군과 함께 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았다. 당대의 유명한 예술사가이자 정치인이던 호레이스 월폴은 계속되는 승전보에 〈승리를 알리는 종이 닳을 정도〉라고 썼다. 영국과 프랑스의 7년전쟁은 1759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승부가 갈렸다."(416-7)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의 전쟁은 1763년 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6주의 협상을 거쳐 체결되었다. 1648년 이후 체결된 모든 평화조약을 위한 협상 중에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협상이 완료되었다. 조약 내용은 단순명료했으며 두 나라는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는 데 합의했다. 오스트리아는 1742년의 베를린 조약과 1745년의 드레스덴 조약을 재확인했다." "엄청난 인명 희생과 재원의 소진을 초래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어떠한 영토상의 변화도 없이 종료되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계속 보유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실지와 명예를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프로이센이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러시아라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세 나라를 상대로 전반적으로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가 프로이센을 승자로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이유다."(419-20)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데 있다. 7년전쟁을 통틀어 둘 이상의 동맹국 군대가 합동으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했더라면 프로이센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동맹국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18세기 유럽의 전쟁에서는 결정적이었던 프로이센의 또 하나의 승리 요인은 세 동맹국의 군대가 겨울철이 되면 충분한 식량과 사료를 확보할 겨울숙영지를 찾아 전장에서 철수하여 각지의 근거지로 이동해야 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 나라의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를 지속적인 전략적 우위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즉, 프로이센군을 패배시킨 후 여세를 몰아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지 못했다."(421)
"1763년 2월에는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간에도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뷰트 내각이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프랑스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거부한 것은 만약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게 되면 멀지 않은 장래에 전쟁이 재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측에서 평화협상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베드포드는 프랑스에 뉴펀들랜드 해역에서의 조업권을 허용하는 것은 장차 영국을 상대할 해군을 재건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피트에 대해 프랑스의 해군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겠다는 것은 〈자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반박했다. 베드포드는 영국이 해상에서 절대 패권을 장악한다면 유럽 국가들은 서로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영국은 루이 14세 프랑스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루이 14세의 기억이 반세기가 넘도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영국에 더 신중하게 패전국을 상대하도록 한 것이다."(429)
"7년전쟁에 합류한 시점에 프랑스 정부 내에서는 영토의 크기보다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획득한 상업적 부가 국가의 국력수준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는 견해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프랑스가 7년전쟁을 계기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재정의함에 따라 해양세력으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들과 대륙국가로서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 이해관계의 '분절'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은 중부 및 동유럽 세 나라의 폴란드 분할(1772, 1793, 1795)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반대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러시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원하여 영국과 벌인 전쟁(1778~83)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1800년대 나폴레옹의 집권과 함께 프랑스가 대륙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함에 따라 '분절'은 잠시 사라졌지만, 그의 몰락 이후 다시 중요해졌다."(436-8)